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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 【함께 귀양 갔던 영남 사람으로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1592년 6월 일 회령 귀양지에 있을 때이다.】 與人書 【嶺南人同被謫者, 而姓名無傳. 壬辰六月日在會寧謫所時】 호남과 영남으로 떨어져 살다가 변방 너머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 여러 해를 어울리며 함께 가슴 속까지 내보였으니 인정과 의리의 친분이 혈육을 뛰어넘습니다. 지난번 방문하셨을 때에 사랑하고 염려하시는 뜻을 크게 입어 더욱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동강(東岡)73) 선생께서 떠나신 뒤로【아마도 빠진 글자가 있는 듯하다.】 우리들의 처지가 더욱 쓸쓸한데,74) 그대와의 거리가 멀지 않으나 각자 쓸데없는 일들에 얽매여 조석으로 정답게 만날 수 없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번민에 잠기게 합니다.근래에 듣기로는 적의 형세가 기세등등하여 임금께서 수례를 타고 또 서경(西京)75)으로 피신하셨다고 합니다. 게다가 안변(安邊)76)이 함락되어 방백(方伯)들은 몸을 숨기고 왕주(王胄)77)처럼 깊이 들어오려는 계책이 있으니, 고금 천하에 오늘날과 같은 참화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본래 인재를 모아 양성하지 않았으니 이러한 큰 환란을 당하여 누가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하며78) 평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또한 몸을 숨겨 달아날 곳이 없어 하루아침에 화가 닥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매우 걱정이니 한번 오셔서 의논하시기를 바랍니다.〈부제학 김성일에게 올린 편지〉 한 통을 숨기지 않고 찾아 부칩니다. 이 편지의 첫 부분은 남들이 보면 번거로운 일이 있을까 두려워 감히 마음속 말을 다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품고 있는 생각을 충분히 알 수 있을 테니 끝내 동지에게 침묵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차운시 또한 지어 올리니 아울러 헤아려주십시오. 틀림없이 만날 테니 일일이 쓰지 않겠습니다. 湖嶺分住, 塞外相遇, 數年遊從, 共輸心肝, 情義之親, 有逾骨肉. 頃日之訪, 多荷眷眷之意, 尤不知所喩. 自東岡先生出【恐脫字】, 吾儕益自踽踽, 與君相去, 亦不相遠, 而各有宂絆, 未得朝夕之款, 令人憒憒也. 近聞賊勢長駈, 乘輿又移西京, 且破安邊, 方伯遁身, 王冑有深入之計, 古今天下安有今日之慘禍耶. 我國素不儲養人才, 當此大禍難, 孰有麤拳大踢, 可以戡定耶. 吾輩亦無藏身之所脫, 一朝禍迫, 何以爲之, 甚可慮也, 幸一來謀之. 上金部提學書一通, 不隱搜付. 此書在初頭, 恐煩人見, 不敢罄其所懷, 然亦足以知其所存, 不欲終默於同志也. 次韻亦錄呈, 幷惟采之許多. 須面不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으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ㆍ직봉(直峯)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며, 외손서이다. 1558년 진사가 되었고 1567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한 후 이조 좌랑, 홍문관 직제학,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 이조 참판 등을 지냈다. 저술로 《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 《경연강의(經筵講義)》, 《동강집》이 있다. 쓸쓸하고 원문의 '우우(踽踽)'는 친한 사람이 없어 쓸쓸한 모습을 뜻한다. 《시경》 〈당풍(唐風) 체두(杕杜)〉에 "쓸쓸히 홀로 길을 가니, 어찌 타인이 없으랴마는, 내 형제만 못하니라. 아 길 가는 사람들은, 어찌 도와주지 않는고.[獨行踽踽, 豈無他人. 不如我同父. 嗟行之人, 胡不比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서경(西京) 고려시대 사경(四京) 가운데 하나로 지금의 평양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안변(安邊)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함경도에 속한 도호부였다. 지금은 북한의 강원도에 속한 군(郡)이다. 왕주(王冑) 수(隋) 나라 시인이다. 수 양제(隋煬帝)보다 시가 낫기 때문에 늘 미움을 받다가 그로 하여 해침을 당했다. 거친 …… 발길질하며 주희(朱熹)가 진량(陳亮)에게 준 편지에 "공자가 어찌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정성스럽지 않았으며, 맹자가 어찌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하지 않았겠는가.[孔子豈不是至公至誠, 孟子豈不是麤拳大踢.]"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晦庵集 卷28 答陳同夫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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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를 읊다 詠琴 가냘픈 손으로 한 곡조를 타는데 一曲生纖指돌아가는 구름이 석양을 가리네 歸雲遏夕陽가야산으로 떨어진 태양은 伽倻山下日응당 늙은 신선 곁에 있겠네 應在老仙傍 一曲生纖指, 歸雲遏夕陽.伽倻山下日, 應在老仙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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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1592년 5월 일, 부령32) 유배지에 있을 때.】 與人書 【姓名不傳. ○壬辰五月日, 在富寧謫所時.】 지난번 한 통의 편지는 진실로 그리워하던 차에 받았습니다. 봉함을 뜯고 반복하여 읽어보니33) 마치 맑은 가르침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근래 무더운 여름 날씨가 되었으니 정신을 굳게 하며 서로 의지하고 있는지요? 비록 한창 무더울 때를 마주하여 쉽게 그대 계시는 곳으로 의리상 달려갈 수 없으니 단지 그리움만 더할 뿐입니다. 아름다운 봄날에 객지에서 시름으로 한결같이 초조하고 애가 타니 정신이 어지럽고 산란합니다. 지난날 학문을 헤아려 보니 아직 평생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조금 얻은 것으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떠하겠습니까? 남쪽 지방은 왜적의 변란으로 사람들이 놀랐다고 하니 부모와 형제가 어떻게 몸을 보전하고 있는지 생각하면 음식을 먹어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고 잠자리에 나아가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당당했던 나라로 다시 안정되어야 할 텐데 이와 같은 일이 있으니 차라리 죽어 인간 세상의 소식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귀댁의 하인이 돌아와서 도성의 소식들을 어떻게 말하였는지요? 바닷가에서 가졌던 아름다운 만남을 다시 마련할 수는 없겠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頃紆一札, 實値想際. 開緘圭復, 若承淸誨. 卽日夏熱爲況, 神介相須. 雖殷際晤, 未易向風馳義, 只增悠悠. 三春佳節. 客裡愁過, 一向焦枯, 神精昏憒. 商量舊學, 亦未爲平生之志, 些子之得, 到此如何? 南方賊變, 令人驚瞻, 父母兄弟, 想何保全, 食不下咽, 寢不能寐. 堂堂國家更安, 有如此事, 寧欲一死而不願聞人間消息也. 貴奚入來, 洛中諸奇, 何以云. 然海上佳會, 更未謀做乎. 以爲如何. 부령(富寧) 함경북도의 부령군 지역이다. 본래 본래 경성군(鏡城郡)의 석막성(石幕城) 지역이었는데, 1449년에 부거현(富居縣)과 회령부(會寧府)의 땅을 떼어 붙여 부령 도호부(富寧都護府)로 삼았다. 반복하여 읽으니 원문의 '규복(圭復)'은 《논어》 〈선진(先進)〉에 "남용이 백규의 글을 세 번씩 되풀이하여 읽거늘, 공자가 형의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아 주었다.〔南容三復白圭, 孔子以其兄之子妻之.〕"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상대방의 시문을 정성스럽게 읽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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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봉습고 錦峰拾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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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봉사 【선조 28년(1595).】 乙未封事 【宣祖二十八年】 삼가 아룁니다. 《서경(書經)》에 "하늘이 듣고 보는 것은 우리 백성들이 듣고 보는 것을 따르는 것이며, 하늘이 밝고 두려운 것은 우리 백성의 밝고 두려움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1) 이 말은 하늘이 듣고 보는 것은 보고 들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보고 듣는 것으로 인하여 보고 들음을 삼고, 하늘이 밝고 두려운 것은 좋아하고 미워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밝고 두려움으로 인하여 밝고 두려운 것을 삼았다는 것입니다. 대개 하늘과 사람은 그 이치가 하나여서 막힘없이 통하니, 민심이 있는 곳이 바로 천리(天理)가 있는 곳이어서 기쁨으로 감동하면 복으로 감응하고, 원망으로 감동하면 재앙으로 감응하니, 그 뚜렷한 효험이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처럼 빠름은 그 이치가 반드시 그러한 것입니다.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삼가 생각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국가가 어렵고 위태로운 날에 백성이 도탄에 빠져 괴로워하는 것을 아파하시어 강개(慷慨)하고 분발하시며 공검(恭儉)하고 부지런히 애쓰셔서 안으로는 국정을 잘 닦고 밖으로는 적을 물리치며,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간사한 무리를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기에 힘쓰셨습니다. 처사의 원한을 특별히 신설(伸雪)하고 국가를 병들게 하는 간악하고 흉악한 자들을 드러내 배척하여 하늘의 뜻에 보답하고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며 기쁘게 하신 것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중흥과 회복의 큰 기회가 아니겠습니까?아! 우리나라가 개국한 이래로 사특함과 올바름이 줄어들고 늘어나는 것에 진실로 많은 반복이 있었으나, 사림에게 재앙을 끼쳐 국가의 명맥을 끊어지게 함에 이르러서는 기축(己丑1589)년의 변란보다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지금 보건대 국가가 무너지고 집안이 망하는 징조가 필시 여기에서 연유하지 않음이 없으니, 혈기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인들 분격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 간사한 적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을 성토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화살에 놀란 새처럼 두려운 마음2)은 겨우 그쳤지만 가시지 않는 두려움이 아직도 있어 입을 다물고 혀를 묶은 채 답답한 마음을 펴지 못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지금 하늘이 성상의 마음을 열어 밝은 태양3)이 널리 비추듯 시비를 분별하고 원통함을 밝게 씻겨주어 조야(朝野)의 분통한 마음을 덜어주셨으니, 지금이 바로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이 말을 다할 때입니다.신들은 청컨대 그 강령(綱領)을 하나하나 들어 우러러 전하를 번거롭게 하겠습니다. 기축년에 역적의 변란이 사대부의 사이에서 일어났는데, 정여립(鄭汝立)은 당초부터 불을 지르고 사람을 겁박하는 도적이 아니라 실로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기망한 간인이었으므로 당시에는 박식하고 견문이 넓어 사림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이(李珥)와 같은 무리도 맨 처음 교유할 때 깊이 추앙하며 칭찬하였으니, 청요직에 천거되어 쓰인 것도 실은 이이가 이끌어준 힘이었습니다.계미(癸未 1583)년에 분당(分黨)이 이미 심하여 이이가 세력을 잃은 뒤로부터 정여립은 비로소 속마음을 고치지 않고 겉만 달라진 채 동인(東人)에게 빌붙었습니다. 동인은 이미 앞을 내다보는 지혜가 없이 한갓 일시의 헛된 명성만을 믿어 뿌리쳐 물리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가려서 사귀지 못한 죄입니다.왕망(王莽)이 거짓으로 공손하니 당시【다른 본에는 '당시(當時)' 두 글자가 없다.】 8만 명이 그 덕을 칭송하였고, 육당(陸棠)의 속임수에 선유(先儒)가 믿어 의심치 않고 사위로 삼았으니,4) 사람을 알아보기 어려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공통된 걱정거리입니다. 만약 실정을 따져 그 죄를 차등한다면 교유하며 칭찬하고 인정한 책임에 대하여 스스로 먼저 죄를 받아야 하나 나머지는 마땅히 감면하여 가벼운 형벌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만일 조정으로 하여금 서로 화합하고 의리를 강구하여 밝게 한다면 반드시 정자(程子)가 희령(熙寧)·원풍(元豐) 때 붕당을 아울러 쓰자는 논의5)처럼 하여야 합니다. 사람 쓰는 것에 피차를 구분하여 나가고 물러나게 하지 않으며 다만 충성스러운지 사특한지로 취사(取捨)해야 합니다. 친분을 맺는 데도 또한 마땅히 그 사람이 현명한지 그렇지 못한지를 분별하여 자신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데 급급하지 않으며 공정하게 보고 들어6) 대립하는 단서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러한 변란을 당하여 마땅히 각자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세상을 속이는 상황을 극력 진달하여 사림에게 화가 미치지 않게 할 것이니 이것이 군자의 책임입니다.정철(鄭澈)은 사납고 고약한 성질로 이것이 재앙을 만들려는 꾀를 내어 불령(不逞)7)한 무리를 모아 그 세력을 확장하고, 은밀히 함정을 파서 무고한 사람을 빠뜨리며, 공법(公法)에 의탁하여 사적인 원수를 갚아 평소 눈을 흘긴 조그만 원한까지도 반드시 모두 보복하는 처지에 들였습니다. 밖으로는 경박한 무리를 부추겨 한 도(道)의 선비들 의론을 가장(假裝)하여 전하를 현혹하고, 안으로는 간사하고 옹졸한 무리에게 부탁하여 대간(臺諫)의 명성과 위세를 빙자하여 불측하고 터무니없는 말로 얽어 밤낮으로 협공하여 반드시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생각하였습니다. 만약 중천의 태양 같은 성상의 밝음이 아니었으면, 일세(一世)의 충신과 어진 사람들이 모두 반역의 깊은 구덩이에 빠졌을 것이니, 그 꾀가 참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당파의 재앙을 역대와 비교하여 증험하면 실로 위험한 기미와 패망의 징조이니 시비와 사정(邪正)의 분별에 대해 자연히 후세의 공론이 있을 것입니다. 오직 전하께서 밝게 분별하시어 잘 살피고 선택하는 것이 어떠한지에 달려 있으니, 진실로 초야에 있는 신하가 감히 알 바는 아닙니다.정개청의 경우는 당초부터 조정의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고, 다만 산림(山林)에서 한결같이 학문에 매진하던8) 선비였습니다. 그 사람됨은 성품이 순수하고 독실하며, 조예가 정확하고 도학을 밝혀 세상의 큰 선비가 되었습니다. 항상 장횡거(張橫渠)9)가 예(禮)로 사람을 가르쳤던 교훈을 지키며 구용(九容)10)의 공부를 더욱 엄밀하게 하였으니, 스스로 학문에 독실하고 행실에 힘쓰는 선비가 아니면 그를 알면서도 좋아하는 사람이 대체로 적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제멋대로 하는 것을 즐기면서 예법으로 단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조롱하고 배척하여 그를 원수처럼【다른 본에는 '구(仇)' 자 아래에 '적(敵)' 자가 있다.】 미워하였습니다.정철은 작은 일에 청렴하고 근신함으로써11) 헛된 명성을 도둑질하고, 스스로 예법에서 벗어나 방자하게 권세와 이욕의 자리에 분주하였습니다. 급기야 그 뜻을 만족하고 기세를 얻은 뒤에는 주색을 음탕하게 즐겼으니, 함께 당파를 연결하고 벗을 맺은 사람은 모두가 품행이 없고 염치가 없는 무리였습니다. 스스로 순수한 유자(儒者)와 단정한 선비의 의론에 배척되는 것을 알고, 이에 감히 스스로 절의와 청담의 명류(名流)로 의탁하여 한결같이 형기(刑器)와 법도를 하찮게12) 여기더니 마침내 부화(浮華)한 것을 자랑하고 근본과 실질을 망각하며, 통달을 귀하게 여기고 명검(名檢)13)을 천하게 여기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그 지식·재변(才辯)·모계(謀計)·기개를 또한 빛나게 드러내어 장황하게 하고, 후배들 중 허황되고 경망하여 선비들 사이에 끼지 못하는 자들이 종횡(縱橫)과 패합(捭闔)14)의 변론으로 서로 선동하며 그의 논설을 지지하고, 막연히 예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해학과 방종으로 몸을 검속하고 물욕을 막는 예법의 밖에서 스스로 안일하였으니, 천리를 해치고 민심을 어지럽게 하며 도술(道術)을 방해하고 풍교(風敎)를 무너지게 한 것이 이처럼 극도에 달하였습니다.정개청의 학문은 항상 정자와 주자를 종주로 삼아 간신들이 세상을 그르치는 상황을 보고는 후학의 폐단이 될까 염려하여 선유(先儒)의 말을 부연한 하나의 논설을 저술하여 절의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폐단을 구원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성인의 문하에 종사할 줄을 알지 못하고, 의리의 편안함을 따르지 않으며, 의기가 발하는 대로 장황하게 하여 나라를 망치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라고 말한 것은 진실로 정철이 절의와 청담에 가탁(假托)한 폐단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가 "천하를 경시하고 온 세상을 오만하게 흘겨보며, 예의의 규범을 벗어나 성명(性命)의 바른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자기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생각을 갖게 하여 끝내는 교활한 무리와 함께 일어나 왕위15)를 흘겨보았다."라고 말한 것은 실제 주자가 주장한 동한절의(東漢節義) 한 조항의 말을 논하여 정철이 세상을 속이고 나라를 그르친 정황에 정확히 적중한 것입니다. 그가 "부귀를 바라지 않고 빈천을 잊을 수 있다고 하여 한편으로는 비록 청고(淸高)한 듯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실로 권세를 부리고 뇌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면치 못하여 온 세상이 본받고 흠모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 이끌어 교만하고 허탄(虛誕)하게 하여 끝내 회복할 계책을 진작하지 못하였다."라고 말한 것도 주자의 의론을 위주로 하여 정철이 자신을 그르치고 다른 사람까지 그르친 정황을 모두 드러낸 것입니다.그렇다면 절의에 대해 저술한 논설은 진실로 선유(先儒)가 이미 정한 공론에 의거한 것이 그 뜻은 전적으로 정철이 세상을 속이고 총애를 취하여 명교(名敎)를 어지럽힌 것을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늙은 간신이 자신의 평소 심술이 남들에게 조사당하여 군자의 올바른 견해로 탄로나게 되어 그 실정을 당대 사람들에게 숨길 수가 없게 됨을 미워하여 이를 덮고 가리기 위한 계책으로 마침내 중상모략 할 꾀를 낸 것입니다. 이에 저술한 논설에 '배(排)' 자를 임의로 더하여 '배절의(排節義)'라고 지목하고 전하를 크게 기만하고, 심지어는 홍수와 맹수의 폐해에 비유하여 사방에 방(榜)을 붙여 보이고 역당의 이름을 덮어씌웠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원통한 일이 있겠습니까?그 논설의 첫머리에서 "동한절의(東漢節義)를 공명(功名)과 비교하면, 그 고상함이 오히려 완고한 자를 격동시키고 나약한 자를 일으킬 수 있으며, 진송청담(晉宋淸談)을 모리(謀利)와 비교하면, 그 기개가 또한 실정을 바로잡고 외물을 진정시킬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학문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성현의 중화(中和)의 도(道)에 죄를 지었다."고 하였으니, 명덕(明德)과 중화(中和)는 진실로 절의에서 나온 것이며, 정개청이 스스로 힘쓰고 사람들에게 권면하는 것이 여기에 있었으니, 정개청의 논설은 절의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절의의 근본을 북돋운 것이며, 한갓 절의라는 이름을 내세워 과격하게 일을 그르치고 사람과 국가에 화를 입히는 자를 미워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논설은 그 자신이 처음 만든 말이 아니고, 진실로 주자의 뜻을 조술(祖述)한 것입니다. 주자의 의론은 《주자어류(朱子語類)》 권34 〈논어해자위안연장(論語解子謂顔淵章)〉에 있으니, "동한(東漢)에서 절의를 숭상하던 때 문득 온 세상을 오만하게 흘겨보고, 조정을 더럽게 여기는 뜻을 두었다. 이런 의사에서 문득 천하를 경시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 얼마 후 청담으로 흘러 들어갔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절의 있는 선비가 진실로 그 지위에서 마땅히 할 말이 아니니 재앙에 이르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후한(後漢)의 명절(名節)이 말년에 이르러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남을 천하게 여기는 폐단이 있으니, 이것이 쌓여 그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반드시 허무맹랑한 데에 이르러 노장(老莊)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송(晉宋)의 인물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또 "비록 청고(淸高)한 것을 숭상하나 개개인마다 관직을 요망하여 한편으로는 청담을 주장하며 한편으로는 권세를 부리고 뇌물을 받아들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주자의 논설로 인하여 한(漢) 나라와 진(晉) 나라의 폐단을 밝혀 간악한 괴수의 정황을 정확히 논파하였습니다.절의는 사람의 마음에 본래 있는 것이나, 사적인 마음이 끼게 되면 이욕에 가리어 자기 한 몸만 사사롭게 하고 의리에는 어두워 임금과 부모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현(聖賢)이 가르침을 베풀 적에 사람들에게 그 밝은 덕을 밝히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이치를 알게 하며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게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하면 의리에 밝아 이해(利害)에 미혹하지 않고, 군부(君父)를 소중히 하여 그 한 몸을 돌아보지 않으니, 생사와 환난의 때를 당하여 절개에 복종하고 의리에 죽는 행동을 기약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한갓 절의의 이름만 알고 실제로 절의에 힘쓰지 않으면, 비록 아침저녁으로 담론하더라도 급기야 이해에 임하고 생사에 처하여서는 시비에 현혹되어 인욕을 천리로 잘못 알고 시의(時宜)에 어두워 손실을 이득으로 여겨 지키며 위의(威儀)에 굴복하고 부귀에 미혹하여 자신을 도모하는 데는 신중하고 군부(君父)는 가볍게 여기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붕당에 금고(禁錮)된 여러 어진 선비들은 대의(大義)가 마음에 근본이 되어 생사에도 그 바탕이 변하지 않으니 진실로 숭상할 만합니다. 그러나 성현의 학문을 일삼지 않고 의리의 근원에 밝지 못하여 오직 조정의 정사만을 비판하고 인물이 선한지 그렇지 않은지 평가하여 악을 배척하고 선을 장려하는16) 것만 제일가는 사업으로 삼고, 곧 성현의 도리가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 실제로 인(仁)에 처하고 의(義)를 행하는 것에 미진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양기(梁冀)가 질제(質帝)를 시해했을 적에 이고(李固)는 재상으로서 그 죄상을 성토하고 공개적으로 죽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의 명령을 듣고 제어를 받으면서 은인자중하였습니다.17) 은총과 친압의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환관들이 전횡(專橫)할 적에 두무(竇武)는 죽이기를 도모하면서 그 경중과 선후의 차례를 스스로 잃은 나머지 마침내 선비들이 섬멸되고 나라도 따라서 멸망하였습니다.18)또 하진(何進)이 동탁(董卓)을 끌어들여 정권을 바꾸는 역모를 이루게 하고19), 두무의 한 가문에서 세 명의 제후가 나와 여러 사람의 뜻을 불평하게 만들며20), 순상(荀爽)이 간신이 날뛰는 조정에 들어오고21), 순욱(荀彧)이 당형(唐衡)의 사위가 되고 조조(曹操)의 신하가 된 일22) 등은 모두 의리를 행하고 절조를 지키는 실상을 알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만약 절의에 대해 진실로 얻은 바가 있었다면 그 출처와 시의(時宜)가 반드시 이처럼 어긋나지는 않았을 것이니, 주자는 한(漢)나라 선비들이 의리의 학문을 외학(外學)으로 여겼다고 말하였고, 남헌(南軒) 장식(張栻)은 그들의 학문에 미진한 바가 있다고 탄식하였던 것입니다.아! 우리나라는 외지고 누추하여 선비들의 견문이 국한되며, 사람은 없고 학문은 끊어져 도학이 분열되고 사특한 것이 아울러 일어나니 인심을 해롭게 하는 이단 사설이 많습니다. 가령 호남 한 도(道)의 풍습은 직분을 닦지 않고 벼슬자리에 나가기를 생각하며, 항상 인물을 비난하고 조정을 비방하는 것을 선비의 풍격으로 삼아 남들이 만약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반드시 죽이려 하고,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반드시 무함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정철은 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 교묘한 임기응변까지 갖추었으니, 절의의 남은 습속을 훔쳐 의탁하고 청담(淸談)의 오류를 거리낌 없이 행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의 식견을 그릇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술수를 부리고 괴이함을 자랑하며 급박하게 곤경에 빠트려 온 세상의 이목을 어지럽히고 역적을 심문할 때 몸을 드러내어 간신의 무리와 결탁하고 사설(邪說)을 격동시켜 기회를 틈타 함정에 빠지게 하고, 마음대로 자행하여 어진 이를 해치고 나라를 그르치게 하는 데에 이르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유림들에게 큰 물여우23)요 국가의 큰 간적(奸賊)으로 죄가 하늘까지 통하였으니 왕법으로 반드시 죽여야 할 자입니다.최영경(崔永慶)은 산림에 높은 뜻을 둔 이름을 지녔으니, 참으로 성세에 은거하는 백성입니다. 남쪽 지방의 허탄하고 망령된 무리가 정철의 조종을 받아 삼봉(三峯)의 설24)을 지어 최영경을 얽어낸 상황을 세상 사람들이 소상히 보거늘25) 권력을 잡은 괴수에게 서캐처럼 붙어 아직 머리를 보존하고 있으니 어찌 천리에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삼봉의 설을 온 나라에 퍼뜨리고 왜적의 난리를 당하자 대소 백성들이 모두 "특별한 한 신인(神人)이 있는데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사방으로 흩어져 나오면 감히 막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몰래 거짓말을 지어내어 인심을 어지럽히고 나라를 망치는 재앙을 이루게 한 것은 진실로 이 무리의 못된 짓26)입니다.유몽정(柳夢井)과 이황종(李黃鍾)은 모두 청렴하고 근신하는 선비입니다. 본도(本道) 출신으로 일찍부터 정철의 속내를 알고 반드시 강하고 편벽됨으로 나라를 그르칠 것이라고 단정하더니 역시 간악한 무리에게 무함을 입었습니다. 유몽정이 원통하게 죽은 다음해에 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예전에 예를 강론하던 뜰에서 자라나니, 사람들은 그의 정성에 감동한 소치라고 하였습니다. 정개청의 아우 정대청(鄭大淸)은 형이 비명(非命)에 죽은 것을 아파하고 억울함을 한번 풀기를 바라서 복상(服喪) 중에 슬피 울며 감히 고기를 먹지 않은 지 지금까지 6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길 가는 사람들이 듣고 마음 아파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그 원통함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성상께서 만 리 밖까지 밝게 내다보시고 괴귀(怪鬼)한 정황을 환히 통찰하시어 정암수(丁岩壽)27) 등 상소 첫머리에 있는 열 사람을 잡아들여 국문하라고 특명을 내리셨으나 간신들이 농간을 부려 대간(臺諫)에 부탁하고 공론을 빌려 이를 저지하여 마침내 전하께서 악을 미워하시는 뜻을 당시에 실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떳떳한 본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이를 통탄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같은 도(道)에 있어 우선 눈과 귀로 보고 기억한 점을 들추어 낸 것인데, 부당하게 걸려들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당시 조정에서 시기하고 저지하는 단서가 쌓여 원한이 되어 틈을 이루었을 것이니, 어찌 악독한 수단에 해를 당한 자가 없었겠습니까? 길거리의 의론이 모두 다 상심하고 통분하여 간악한 괴수의 살점을 씹어 먹고자 하지 않는 자가 없거늘, 단지 주상전하께서만 미처 통촉하지 못하시니, 아! 조정의 신하들이 주상전하를 섬기는데 지극한 정성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옛날 초왕(楚王) 유영(劉英)이 반란을 도모하여28) 은밀히 천하의 명사(名士)를 기록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국문을 당하게 되니, 화를 장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시어사(侍御史) 한랑(寒朗)이 마음으로 원통한 것을 아파하여 온갖 죽음을 무릅쓰고 힘써 다투어 천여 명을 조사하여 풀어주니,29) 그가 남긴 풍모와 공렬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이목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최영경과 정개청은 산림에서 은거하던 선비로 사림의 영수가 되었는데 한 사람도 감히 전하를 위하여 한마디 말을 올린 자가 없습니까? 비록 간적의 위세가 두려워 입을 다물고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으나 또한 조정에 충직한 신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천리(天理)가 밝고 밝아 오래되면 나타나지 않음이 없으니, 간사한 무리가 틈을 타서 허를 이용하여 비록 간교한 꾀를 한때 자행하였으나 부월(鈇鉞)의 형벌을 만세에 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간적(奸賊)의 정황을 통촉하시고, 특별히 착한 무리들의 원통함을 불쌍히 여기시어 최영경이 모함받은 한 가지 일로 밤중에 눈물을 흘리셨다는 하교까지 있었으니, 이는 천지와 신인(神人)의 복입니다.사도(斯道)를 붙들고 국가의 명맥을 길게 유지하는 방책은 선비의 기상을 떨치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고, 선비의 기상을 떨치게 하는 기틀은 또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습니다. 공자께서 말하기를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예악이 흥기하지 못하고, 예악이 흥기하지 못하면 형벌이 도리에 맞지 않게 되며, 형벌이 도리에 맞지 않게 되면 백성은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된다.30)"라고 하였습니다. 바야흐로 회복하려는 초기에 진실로 명분을 바르게 하는 일을 앞세우고 국시(國是)를 분명히 정하여 인심을 위로하면, 유신(維新)31)의 정사를 차례대로 거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아! 국시를 정하지 못하면 인심이 쉽게 흔들리고, 명분을 바로잡는 일이 미진하면 좋은 정사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만약 간구(姦宄)32)의 소굴을 소탕하여 국가의 원기를 붙들어 지키지 않으면, 군자는 믿을 곳이 없어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 소인은 틈을 엿보아 악행을 이으려고 할 것이니, 어찌 매우 두렵지 않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다스리기를 원하는 마음이 없지 않으나, 혹은 편벽되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에 끌리고, 혹은 사욕의 틈에 빠져 한번 간사함에 들어가게 되면 도깨비 같은 무리에게 온갖 방법으로 교묘하게 유인되어 저들과 함께 동화되고 맙니다. 저쪽으로 동화되면 이쪽에 둔 마음이 변하고, 좋아하는 것이 저쪽에 있으면 미워하는 것은 이쪽에 있으며, 저쪽과 당파를 결성하면 이쪽은 원수가 되어 마라를 병들어 망하게 하니, 송(宋) 나라 철종(哲宗)·휘종(徽宗)·영종(寧宗)·이종(理宗) 같은 이들이 경사(經史)에 실려 있거니와 이런 사례가 매우 많습니다.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옛날 도(道)를 잃은 일을 오늘의 귀감으로 삼아, 금석(金石)과 같이 굳게 뜻을 가져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여 변하지 말고 일월과 같이 도를 밝혀 음흉한 기운을 소탕하여 침범하지 말며, 간괴(奸魁)의 죄상을 드러내어 원통한 사람을 밝게 신설(伸雪)하여 종묘사직에 고하고, 교유문(敎諭文)을 안팎으로 반포하여 나라와 혁신한다면 지난날의 사특한 무리와 간특한 잡배들도 장차 신령스러운 교화에 변화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니, 또 어찌 혹여 등용되어 우리의 우환이 되겠습니까?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성인이 그 도(道)를 오래 하면 천하가 교화되어 이루어진다.33)"라고 하였고, 《맹자(孟子)》에 말하기를 "군자는 떳떳한 도를 회복할 뿐이니, 떳떳한 도가 바르게 되면 서민이 흥기하고 서민이 흥기하면 이에 사악하고 간특함이 없을 것이다.34)"라고 하였으니, 오직 성상은 여기에 마음을 두소서.비답하기를 "너희들의 의론이 지극하다. 마땅히 의논하여 처리하리라." 하였다. 伏以書曰: "天聰明, 自我民聰明, 天明畏, 自我民明畏." 此言天之聰明, 非有視聽也, 因民之聰明, 以爲視聽, 天之明畏, 非有好惡也, 因民之明畏, 以爲明畏. 蓋其天人一理, 通達無間, 民心之所存, 卽天理之所在, 而感之以悅, 則應之以福, 感之以怨, 則應之以禍, 其明效之速, 如影之隨形, 其理有必然者矣, 其可誣哉? 恭惟主上殿下, 値國家艱危之日, 痛生民塗炭之苦, 慷慨發憤, 恭儉勤勞, 務以內修外攘進賢退邪爲己任. 特伸處士之冤枉, 顯斥病國之奸凶, 其所以奉答天意, 慰悅人心者, 可謂至矣. 豈非中興恢復之一大機耶? 嗚呼! 我朝自開國以來, 邪正消長, 固多反覆, 至於貽禍士林, 斬絶國脈, 則莫甚於己丑之變. 目今國破家亡之兆, 未必不由於此, 凡有血氣者, 孰不憤奮扼腕, 欲討奸賊通天之罪? 而傷弓甫已, 餘惴尙存, 緘口結舌, 鬱鬱莫伸者, 有年于此矣. 幸今天啓聖心, 离明旁燭, 辨別是非, 昭雪幽枉, 以紓朝野忿惋之懷, 此正志士仁人, 盡言之秋也. 臣等請毛擧其綱, 而仰塵淵聽焉. 己丑逆賊之變, 起於搢紳之間, 而汝立初非放火劫人之賊, 實是欺天罔人之奸, 故在當時, 博洽多聞, 爲士類所推許, 如李珥輩, 最初交遊, 推重嘉奬, 而薦用淸班者, 實珥汲引之力也. 自癸未分黨已甚, 李珥失勢之後, 汝立始改頭換面, 趨附於東, 東人旣無先見之智, 徒信一時之虛名, 不得揮以斥之, 是則未能擇交之罪也. 王莽之僞恭, 當時【一本無當時二字】八萬人頌其德, 陸棠之挾詐, 先儒信之不疑, 作爲家甥, 則知人之難, 古今通患. 若原情以差其罪, 則交游稱許之責, 自有首受之地, 而餘當從末減之科矣. 如使朝廷諧協, 講明義理, 必如程子並用煕豐黨之議, 用人不以彼此進退, 只以忠邪取舍, 交契亦當以其人之賢否分別, 而不屑屑於一己之好惡, 公聽並觀, 不有角立之端, 則其遇此變也, 正當各自引咎, 極陳欺世之狀, 無使禍及士林, 是乃君子責也. 鄭澈以狠愎之性, 乃生媒孼之計, 聚群不逞之徒, 以張其勢, 設陰穽以陷無辜, 托公法以復私讎, 挾平生睚眥之怨, 盡入於必報之地, 外以嗾浮薄之徒, 假一道之士論, 而冀惑天聽, 內以囑奸細之輩, 藉臺諫之聲勢, 而構捏不測, 思所以日夜挾攻, 而必置於死地, 倘微聖明如日中天, 一世之忠賢, 悉陷於叛逆之深坑矣, 其爲計可謂慘矣. 試以今日之黨禍, 擬驗歷代, 實是危機敗證, 是非邪正之分, 自有後世之公論, 唯在殿下明卞而審擇之如何, 固非在野之臣, 所敢知也. 至於鄭介淸, 初非與於朝紳, 而特一林下藏修之士也. 爲人稟性醇篤, 造履精確, 闡明道學, 爲世大儒, 常守橫渠以禮敎人之訓, 九容工夫, 益加嚴密, 自非篤行力行之士, 知而好之者蓋寡矣. 故世之樂放肆而惡拘檢者, 譏訶詆斥, 而疾之如仇【一本仇字下有敵字】. 澈以曲謹小廉, 盜竊虛譽, 自放於禮法之外, 奔走於勢利之場, 及其志滿氣得之後, 則耽淫於酒色之中, 所與連黨結侶者, 皆是無行檢冒廉恥之輩. 自知見擯於醇儒莊士之論, 乃敢自托於節義淸談之流, 一以刑器法度爲蒭狗, 終至於衒浮華亡本實, 貴通達賤名檢, 而其智識才辨謀爲氣槩, 又足以震耀而張皇之, 後生之浮誕佻輕, 不齒士類者, 相與扇縱橫捭闔之辨, 以持其說, 而漠然不知禮義之爲何物, 恢諧放曠, 以自逸於檢防之外, 其害天理亂人心妨道術敗風敎者, 至此而極矣. 介淸之學, 常以程朱爲宗, 目擊奸臣誤世之狀, 恐爲後學之弊, 敷衍先儒之論, 著一說以救節義之流弊, 其曰: "未知從事於聖門, 而不循義理之安, 張皇義氣之發, 以至於亡人之國者." 實指鄭澈假托節義淸談之弊也. 其曰: "高視天下而傲睨一世, 出乎禮義之規, 不屑性命之正. 使天下之人, 皆有以自是而非人, 終至於群狡竝起, 睥睨神器云者." 實主朱子論東漢節義一款之說, 而切中鄭澈欺世誤國之狀也. 其曰: "不要富貴, 能忘貧賤, 這一邊雖似淸高, 那一邊實未免招權納貨, 使一世之效慕者, 相率而爲驕虛浮誕, 卒無以振作恢復之策." 亦主朱子之論, 而畢露鄭澈自誤而誤人之狀也. 然則所著節義一說, 實據先儒已定之論, 而其志專主於攻澈之誣世取寵, 以亂名敎者也. 由是老奸惡其平生心術, 被人點檢, 敗露於君子之正見, 無以遁其情於一世之人, 欲爲閉遮之術, 遂生射影之計, 乃於所著說上任加排字, 目之曰排節義, 以厚誣聖聽, 至比之於洪水猛獸之害, 而榜示四方, 加之逆黨之名, 古今天下, 安有如此等冤痛也耶? 其說首言東漢節義, 較以功名, 則其高尙猶可以激頑起懦, 晉宋淸談, 視之謀利, 則其氣岸亦足以矯情鎭物. 又曰: "不知明德新民之學." 又曰: "得罪於聖賢中和之道." 明德中和, 固節義之所自出, 而介淸之所自勉, 而勉人者在是, 則介淸之說, 非排節義也, 乃培壅節義之根本, 而特惡其名爲節義而過激誤事禍人國家者也. 然則其爲說, 非自家創造立說也, 實祖述朱子之意, 而朱子之論在語類中三十四卷論語解子謂顏淵章, 其曰: "東漢崇尙節義之時, 便自有這箇意思了. 當時節義底人, 便有傲睨一世汚濁朝廷之意, 這意思, 便自有高視天下之心, 少間流入於淸談." 又曰: "節義之士, 固是非其位之所當言, 宜足以致禍." 又曰: "後漢名節, 至於末年, 有貴己賤人之弊, 積此不已, 其弊必至於虛浮, 入老莊." 至論晉宋人物, 則又曰: "雖尙淸高, 然箇箇要官職, 這一邊淸談, 那一邊招權納貨"云云. 因此朱子之說, 以發明漢晉之弊, 而破的奸魁之情狀矣. 節義本人心之固有, 而私意間之, 則蔽於利欲, 而私其一身, 昧於義理, 而遺其君父. 故聖賢設敎, 只是使人明其明德, 格致以知之, 誠正以修之, 如此則義理明, 而不惑於利害, 君父重, 而不顧其一身, 當其死生患難之際, 伏節死義之擧, 有不期然而自不得已也. 若徒知節義之名, 而不務節義之實, 則雖其朝夕談之, 而及其臨利害處死生, 眩於是非, 而認欲爲理, 暗於時措, 而守失爲得, 未免有屈於威義, 淫於富貴, 而自謀深君父輕矣. 黨錮諸賢, 其大義根於心, 死生不變其質, 則誠可尙也, 而不事聖賢之學, 不明義理之原, 唯以非訐朝廷, 臧否人物, 激濁揚淸爲第一等事業, 便以爲聖賢之道, 不過如是, 而其於處仁行義之實, 有所未達. 是以欲正君臣之義, 而梁冀之弑質帝也, 李固爲相, 而非但不能聲罪顯戮, 反聽命受制而隱忍焉. 欲去寵昵之弊, 而宦寺之盤錯也, 竇武謀誅, 自失其輕重先後之序, 而卒爲士類之殲滅, 國隨而亡之. 又如何進之引董卓, 馴致移鼎之逆, 竇武之一門三侯, 以致衆志之不平, 荀爽濡迹於奸臣專命之朝, 荀彧婿於唐衡, 臣於曹操之類, 是皆不知行義守節之實而然也. 若能於節義實有所得, 則其出處時措, 必不如是其乖違也, 所以朱子言漢儒以義理之學爲外學, 而南軒張氏, 亦嘆其於學有所未盡者也. 噫! 我東僻陋, 士局見聞, 人亡學絶, 道術分裂, 邪慝竝興, 他歧之害人心者多矣. 至如湖南一道風習, 則不修職分, 思出其位, 常以譏議人物誹謗朝政, 爲士子標致, 人若不知己, 則必欲殺之, 少有嫌隙, 則必致誣陷. 澈爲這輩之酋長, 濟以機變之巧, 竊托節義之餘習, 妄肆淸談之謬誤, 壞人心術, 誤人知見, 終得以舞術衒怪, 陷溺馳驟, 以惑亂一世之耳目, 呈身於案問逆賊之時, 締結奸黨, 鼔動邪說, 乘機傾陷, 恣行胷臆, 賊賢誤國, 無所不至. 此實儒林之大蜮, 國家之巨奸, 罪通于天, 在王法必誅者也. 崔永慶負山林高義之名, 而眞聖世之逸民也. 南方誕妄之輩, 承望澈之指揮, 做出三峰之說, 以構永慶之狀, 昭在十目之視, 而虱附用事之魁, 尙保首領, 豈其天理所可容乎? 以其三峰之說, 布滿一國, 當倭奴之衝突也, 大小人民, 皆謂別有一箇神人, 將兵而來, 分逬四出, 而莫之敢禦. 其陰造訛言, 惑亂人心, 以致亡國之禍者, 實此輩之作俑也. 至若柳夢井李黃鍾, 俱以淸謹之士. 身在本道, 早見澈之心曲, 必以强偏誤國斷之, 而亦被奸黨之誣陷者也. 夢井冤死之後年, 有白棗數十莖, 生於所嘗講禮之庭, 人以謂精感所致. 介淸之弟大淸, 痛其兄之非命, 冀冤枉之一雪. 服喪悲號, 不敢食肉者, 今至六年之久. 行路聞之, 莫不傷心, 其爲冤痛, 何可測乎? 自上明見萬里之外, 洞照怪鬼之狀, 特命拿鞫丁巖壽等疏頭十人, 而奸臣作弄囑臺諫假公論以沮之, 遂使殿下惡惡之志, 不行於當日, 人有秉彝, 孰不痛惋於此耶? 臣等同在一道, 姑擧耳目之所覩記, 而橫罹枉死之人, 一至於此, 則當日朝廷之上, 積有猜阻之端, 讎怨成隙, 豈無毒手所害者乎? 街談巷議, 莫不盡然傷憤欲食奸魁之肉, 而特主上未及洞燭, 嗟乎! 朝臣之事主上, 可謂非至誠矣. 昔者楚王英之謀亂也, 陰錄天下名士, 事覺被鞫, 禍將叵測. 侍御史寒朗心傷其冤, 出萬死力爭之, 理出千餘人. 其遺風餘烈, 至今照人耳目. 奈何永慶介淸, 以山林高蹈爲士類領袖, 而無一人敢爲殿下伸一喙者. 雖其畏奸賊之威勢, 噤不敢言, 亦可謂朝廷有忠鯁之臣乎? 然而天理昭昭, 未有久而不著, 憸邪之輩, 乘間扺巇, 縱售奸術於一時, 難逃鈇鉞於萬世. 而今我殿下洞燭奸賊之情狀, 特憐善類之冤枉, 以永慶被誣一事, 至有中夜泣下之旨, 此天地神人之福也. 扶斯道壽國脈之策, 莫過於振作士氣, 振作士氣之機, 又莫急於正名. 孔子曰: "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 事不成則禮樂不興, 禮樂不興則刑罰不中, 刑罰不中則民無所措手足". 方此恢復之初頭, 苟能先事乎正名, 明定國是以慰人心, 則惟新之政次第可擧. 嗚呼! 國是未定, 則人心易搖, 正名未盡, 則善政難成. 若不掃蕩姦究之囊橐, 扶護國家之元氣, 則君子無所恃, 而罔盡其忠, 小人有所窺, 而欲紹其惡, 豈非可懼之甚也? 自古人君非無願治之心, 而或牽於好惡之偏, 或漏於己私之隙, 一爲奸邪所中, 則魑魅魍魎, 百端巧鑽, 與之俱化於彼矣. 化於彼則變於此, 好在彼則惡在此, 黨乎彼則仇乎此, 以敗功殄國, 如哲徽寧理之爲者, 載在經史, 此類甚多. 伏願殿下以古之失道, 爲今之龜鑑, 執志如金石, 貫終始而毋渝, 明道如日月, 廓氛陰而罔干, 暴揚奸魁之罪, 昭雪冤枉之人, 告于宗廟社稷, 頒敎中外, 與一國更始, 則向之群邪雜慝, 亦將受變於神化之不暇, 又安有或進而爲吾患哉? 易曰: "聖人久於其道, 而天下化成." "君子反經, 經正則庶民興, 庶民興則斯無邪慝." 惟聖明之留神焉.答曰; "爾等之論至矣. 當議處." 《서경(書經)》에 …… 하였습니다.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하늘의 듣고 봄이 우리 백성의 듣고 봄으로부터 하며, 하늘이 선한 자를 밝혀 드러내주고 악한 자를 두렵게 함이 우리 백성의 밝혀주고 두렵게 함으로부터 한다. 그리하여 상하에 통달하니, 공경할지어다! 땅을 소유한 군주들이여.〔天聰明, 自我民聰明, 天明畏, 自我民明威. 達于上下, 敬哉! 有土.〕"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화살에 …… 마음 원문의 '상궁(傷弓)'은 상궁지조(傷弓之鳥)의 준말로, 한번 화란을 겪은 사람은 화살에 상한 새처럼 매사에 놀라고 조심함을 비유한다.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 "한번 화살에 상한 새는 시위의 맹렬한 소리만 듣고도 높이 난다.〔傷弓之鳥, 聞弦音而高飛.〕"고 하였다. 밝은 태양 원문의 '이명(离明)'은 밝은 해를 가리키는 말로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이(离)는 불이 되고 해가 된다.[离爲火, 爲日.]"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는데, 전하여 임금의 밝은 덕을 의미한다. 육당(陸棠)의 …… 삼았으니 육당은 송 나라 양시(楊時)의 사위이다. 처음에 양시가, 육당의 용모가 매우 단정하고 앉은 자세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것을 보고는 호인(好人)이라 하여 그를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후에 범여위(范汝爲)가 난을 일으켰을 때에 그의 당(黨)이 되었기 때문에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꾸민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朱子語類 卷133 本朝7》 희령(熙寧) …… 논의 송나라 신종(宋神宗)은 처음에 연호를 희령(1068~1077)이라 하였다가 뒤에 원풍(1078~1085)으로 고쳤다. 신종 때에 왕안석(王安石)이 시폐(時弊)를 없애고 부국 강병(富國强兵)하는 방책으로 재정(財政)ㆍ병제(兵制) 등 여러 방면에 걸쳐 개혁하기 위하여 청묘법(靑苗法)ㆍ균수법(均輸法)ㆍ모역법(募役法) 등 여러 법을 새로 시행하였는데, 이를 구래(舊來)의 법의 대칭으로 신법(新法)이라 하고 신법을 지지하던 채확(蔡碓)ㆍ장돈(章惇)ㆍ여혜경(呂惠卿) 등의 무리를 신법당(新法黨)이라 하였으며, 이를 반대하던 범중엄(范仲淹)ㆍ한기(韓琦)ㆍ부필(富弼)ㆍ사마광(司馬光) 등의 무리를 구법당(舊法黨)이라 하였다. 신ㆍ구당이 처음부터 확립된 것은 아니나 대립이 격화됨에 따라 서로 용납하지 않아 뒤에는 함께 조정에 서지 못하게 되었다. 왕안석은 신종 9년에 죽었으나 신당이 계속하여 집권하다가 철종(哲宗)이 즉위하고 태후(太后)가 청정(聽政)하면서부터 신당은 모조리 내쳐지고 구당이 집권하였고, 철종이 친정(親政)하자 신당이 집권하고 휘종(徽宗)이 즉위하고 태후가 섭정(攝政)하자 구당이 집권하고, 또 친정하자 다시 신당이 집권하였으며, 구당은 신법에 대체하는 방안이 일치하지 않아 뒤에는 소식(蘇軾)을 중심으로 하는 촉당(蜀黨), 정이(程頤)의 낙당(洛黨), 유지(劉摯)의 삭당(朔黨)으로 분파되어 다투었다. 휘종 친정 이후 채경(蔡京)이 집정할 때에 구당을 탄압하여 그 세력을 아주 없애어 버렸으니, 왕안석 이후 구당의 집권은 태후가 정사를 보던 얼마 안 되는 기간에 불과하였다. 신법은 갑작스런 변혁에 대한 백성의 반발과 특히 유신(儒臣)들의 반대와 시행과정에서의 농간 등이 방해되는 요인이었고, 신법의 실효를 거두기 전에 신종이 자주 외정(外征)의 군사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요(遼)나라와 다투어 도리어 북방의 군을 잃었으며, 채경이 재상이 되어서는 신법을 더욱 강행하되 재리(財利)에만 힘쓸 뿐더러 휘종에게 사치를 권하고 토목일을 자주 일으켰으므로 백성의 고통이 극심하여 민심이 이반하고 나라가 쇠약해져 마침내 남도(南渡)하게 되는 큰 원인이 되었다. 공정하게 보고 들어 《한서(漢書)》 卷51 〈추양전(鄒陽傳)〉에 "공평하게 듣고 다방면으로 살피면 당대에 밝음을 드리울 것이다.〔公聽竝觀, 垂明當世〕."라고 하였다. 불령(不逞) 원한, 불만, 불평 따위를 품고서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아니하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학문에 매진하던 원문의 '장수(藏修)'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학업에 매진한다는 뜻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군자는 배움에 있어 장하고, 수하고, 식하고, 유한다.[君子之於學也, 藏焉, 修焉, 息焉, 遊焉.]"라고 하였는데,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서 "장은 마음속에 항상 학업을 품는 것이고, 수는 닦고 익히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藏謂心常懷抱學業也, 修謂修習不能廢也.]"라고 풀이하였다. 《禮記正義 卷36 學記》 장횡거(張橫渠) 횡거는 장재(張載)의 호로 자는 자후(子厚), 섬서성(陝西省) 사람이다. 정호(程顥)ㆍ정이(程頤)에게 유(儒)를 배우고, 신종(神宗) 때에 문원 교서(文院校書)가 되었으나,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反對)하여 벼슬을 내어 놓고 물러났다. 그의 설은 예(禮)를 숭상하고 역(易)으로 종(宗)을 삼고, 중용(中庸)으로 체(體)를 삼았으며, 이기 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主張)하였다. 구용(九容) 옛날 군자가 수신하고 처세할 적에 견지해야 하는 아홉 가지 몸가짐으로, "발걸음을 경망하게 하지 않고, 손으로 아무 데나 어지럽게 가리키지 않고, 눈은 흘겨보지 않고, 말을 경박하게 하지 않고, 목소리를 온화하게 하여 괴상한 소리를 내지 않고, 고개를 곧게 세워 마구 갸우뚱거리거나 돌아보지 않고, 기운을 엄숙하게 하고, 서 있을 때에는 바르게 서서 덕 있는 기상을 지니고, 낯빛을 장중하게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라는 것이다. 《禮記 玉藻》 작은 …… 근신함으로써 주희(朱熹)의 〈답혹인(答或人)〉에 "향원은 일종의 작은 일에 청렴하고 근신하며, 세상에 아부하고 시속을 좇는 사람이다.〔鄕原, 是一種小廉曲謹, 阿世徇俗之人.〕"라고 한 데서 나왔다. 하찮게 원문의 '추구(蒭狗)'는 짚을 엮어 만든 개를 말하는데 쓸모없는 사물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장자(莊子)》 〈천운(天運)〉에 "추구를 진설하기 전에는 상자에 담아서 좋은 비단으로 감싸 두지만 시축(尸祝)이 재계를 한 뒤에 모셔다가 제사를 지낼 때 쓰고 나면 발로 밟기도 하고 가져다가 불을 지펴 밥을 짓기도 한다." 한 데서 나왔다. 명검(名檢) 명교(名敎)로서 말과 행실을 속박하여 조심함을 말한다. 패합(捭闔) 개폐(開閉), 억양(抑揚), 허실(虛實) 등을 끝없이 펼쳐나가는 변론술(辯論術)을 가리킨다. 《귀곡자(鬼谷子)》에 〈패합〉이 있는데, 전국(戰國) 시대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귀곡자를 스승으로 삼아 패합과 종횡의 술(術)을 배워 유세(遊說)하는 방법으로 삼았다. 왕위 원문의 '신기(神器)'는 원래 왕위(王位) 계승에 따르는 보물인 옥새(玉璽)나 보정(寶鼎)을 이르는데, 곧바로 왕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악을 …… 장려하는 원문의 '격탁양청(激濁揚淸)'은 흐린 물을 쳐내고 맑은 물을 일게 한다는 뜻으로, 악을 물리치고 선을 권장함을 비유한다. 전국 시대 초(楚)나라 시교(尸佼)가 말하기를 "물은 네 가지 덕이 있으니……맑은 물을 일게 하고 흐린 물을 쳐내, 더러운 것을 씻어 버리는 것이 의이다.[水有四德……揚淸激濁, 蕩去滓穢, 義也.]"라고 하였다. 《山堂肆考 卷22 水有四德》 양기(梁冀)가 …… 은인자중하였습니다. 양기는 후한 순제(後漢順帝)의 왕후 양씨(梁氏)의 오라비로, 누이동생인 양 태후(楊太后)가 임조(臨朝)하면서 정권을 독점하였다. 충제(冲帝)가 죽자 질제(質帝)를 세웠는데, 질제가 "이 사람이 발호장군이다.〔此跋扈將軍也〕"라고 자신을 평한 것을 미워하여 독살하고 환제(桓帝)를 세웠다. 이고(李固)는 충제 때의 태위(太尉)로 조야(朝野)의 명망이 높았는데, 충제가 죽었을 때와 질제가 시해되었을 때에 모두 청하왕(淸河王) 유산(劉蒜)을 옹립하려고 노력하다가 양기의 비위를 거슬러 면직되었다. 환제 건화(建和) 1년(147)에 유문(劉文) 등이 유산을 황제로 세우려다 실패하고 죽음을 당하였는데, 양기가 이고를 이 사건에 연루시켜 하옥시키자, 이고의 문생 등이 상소하여 무죄를 주장하며 대궐에 나아가 호소하였다. 이에 양 태후가 사면하여 출옥시키자 경사(京師)의 시민들이 환호하며 만세를 부르니, 양기가 대경실색하여 위협을 느낀 나머지 다시 무옥(誣獄)을 일으켜 이고와 두교(杜喬)를 죽이고 그 시신을 성 북쪽에 전시하였다. 양기는 20여 년 동안 권력을 전횡하다가 연희(延煕) 2년(159)에 양 태후가 죽자 환제가 환관 5인과 합세하여 그를 복주(伏誅)하고 그 종족을 모두 기시(棄市)하였다. 《後漢書 卷34 梁冀列傳, 卷63 李固列傳》 환관들이 …… 하였습니다. 후한 영제(後漢靈帝)가 즉위한 뒤에 두 태후(竇太后)의 부친인 대장군 두무(竇武)가 환관(宦官)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 진번(陳蕃)ㆍ이응(李膺) 등 이른바 청류(淸流)와 함께 환관들을 제거하려고 계획하였는데, 그 일이 누설되어 두무가 환관들에게 먼저 살해당하자, 진번이 70여 세의 나이로 곧장 관속(官屬)과 제생(諸生) 등 80여 인을 이끌고서 칼을 빼 들고 승명문(承明門)으로 돌입했다가 패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이로 인해 100여 인이 피살을 당하였는데, 뒤를 이어 계속해서 사형과 유배를 당하고 수금(囚禁)된 자가 700여 인에 이르렀다. 두 태후는 환제(桓帝)의 황후로, 환제가 죽자 수렴청정하면서, 장제(章帝)의 현손(玄孫)으로 당시 12세였던 영제를 맞아들여 황제로 세웠다. 《後漢書 卷69 竇武列傳》 하진(何進)이 …… 이루게 하고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 우림랑(羽林郞)으로 여러 번 전공(戰功)이 있었고 영제(靈帝) 때는 병주목(幷州牧)으로 있었는데, 영제가 붕하자 동탁(董卓)이 하진(何進)의 부름에 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경사에 들어가 곧 스스로 상국(相國)이 되어 소제(少帝)를 폐하고 하태후(河太后)를 시해하고서 헌제(獻帝)를 세우는 등 모든 권병을 독천하였다. 두무의 …… 만들며 두무가 태후(太后)의 명으로 영제(靈帝)를 받아들여 제위(帝位)에 앉힌 공로로 대장군(大將軍)이 되고 문희후(聞喜侯)에 봉해졌으며, 아들과 조카들까지도 모두 후에 봉해져 그 위세가 천하를 흔들었다. 순상(荀爽)이……들어오고 이응(李膺)은 명망이 높았으므로 선비 중에 그의 인정과 대접을 받은 자가 있으면 사람들이 용문(龍門)에 올랐다고 칭하였는데, 순상(荀爽)이 찾아가서 이응을 위해 수레를 몰아주고는 집에 돌아와서 기뻐하며 사람들에게 "오늘 드디어 이군의 수레를 몰았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67 李膺傳》 순상은 후한 때 순숙(荀淑)의 여덟째 아들로 순씨의 팔룡(八龍) 가운데 한 명이다. 순욱(荀彧)이 …… 된 일 순욱은 4세 때 권세를 휘두르던 환관 당형(唐衡)의 딸과 혼인이 결정되어 두고두고 비난거리가 되었다. 189년 27세에 원소(袁紹)의 예우를 받았으나, 대업을 이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조조(曹操)에게 투탁하였다. 조조는 순욱을 나의 자방(子房)이라고 기뻐하며 중용하였고, 순욱도 정치와 전략에서 많은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조조가 찬탈 의사를 비추기 시작했으므로 후한(後漢)을 유지하겠다는 정치적 이상을 가졌던 순욱과는 자연히 틈이 생기게 되었다. 212년 50세에 손권(孫權) 정벌하는 데에 조조를 따라 출정하였으나 병으로 졸하였다. 《三國志 卷10 魏書 荀彧傳》 물여우 간악하고 음흉한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물여우는 귀신과 같이 그 형태를 볼 수가 없는데, 모래를 입에 물고 있다가 물에 비치는 사람의 그림자에 뿌리면 그 사람이 병에 걸린다고 한다. 《시경》 〈하인사(何人斯)〉에 "귀신이나 물여우였다면 볼 수가 없었겠지만〔爲鬼爲蜮̀, 則不可得.〕"이라고 하였다. 삼봉(三峰)의 설 1590년 서인들의 사주를 받고 양천경(梁千頃) 등과 함께 기축옥사 때 정여립(鄭汝立) 일당의 자백에서 나왔던 이른바 정여립의 친구라는 길삼봉(吉三峯)이 바로 최영경(崔永慶)이라고 무고하여 옥사하게 하였다. 그 뒤 1591년 양사(兩司)에서 무고인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탄원이 있자, 최영경을 모함한 당시의 언관(言官)이 파면되고, 무고인 양천경, 양천회(梁千會), 김극관(金克寬), 김극인(金克寅) 등과 같이 잡혀 문초당하였다. 그러자 정철(鄭澈)을 따르던 끝에 그와 같은 허위사실을 상소하였음을 자백하여, 양천경, 양천회 등과 함께 북도로 장형을 받고 유배되어 가다가 장형을 받은 후유증으로 도중에 모두 죽었다. 세상 …… 보거늘 많은 사람이 삼엄하게 주시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대학(大學)》 성의(誠意)에서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열 눈이 보는 바이며 열 손이 가리키는 바이니, 그 엄함이여!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라고 하였다. 못된 짓 원문의 '작용(作俑)'에서 용(俑)은 장사(葬事)에 쓰는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인데, 이는 좋지 못한 선례(先例)를 뜻한다.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중니께서 말씀하시기를 '처음으로 용을 만든 자는 아마 후손이 없을 것이다.' 하셨으니, 이는 사람을 형상하여 장례에 사용하였기 때문이다.[仲尼曰, 始作俑者, 其無後乎, 爲其象人而用之也.]"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정암수(丁巖壽) 1534∼1594.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응룡(應龍)이고, 호는 창랑(滄浪)으로,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동복(同福)에서 출생하였다. 1589년 12월 박천정(朴天挺)‧박대붕(朴大鵬)‧임윤성(任尹聖)‧김승서(金承緖)‧양산룡(梁山龍)‧이경남(李慶男)‧김응회(金應會)‧유사경(柳思敬)‧유영(柳瑛) 등과 연명하여 이산해(李山海)‧정언신(鄭彦信)‧정인홍(鄭仁弘)‧유성룡(柳成龍) 등은 나라를 병들게 하는 간인(姦人)이며 역당이므로 멀리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왕에게 올렸다. 뒤에 이 무함(誣陷)하는 상소가 실은 정철(鄭澈)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소문이 정철의 문객(門客)으로 드나들던 심희수(沈喜壽)에 의해 퍼지기도 하였다. 상소를 본 선조는 연명한 사람 모두를 잡아들일 수 없으니 정암수(丁巖壽)를 포함하여 위에서 10명만을 추국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1591년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이 논집(論執)하고 태학생(太學生)들도 그를 탄원하는 상소를 올려 구원받았다. 초왕(楚王) …… 도모하여 유영은 후한(後漢) 광무제의 여섯 번째 아들로서 초왕에 봉해졌다. 명제(明帝)의 아우로서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하였는데, 연광(燕廣)이란 자가 투서하기를, 초왕 유영이 왕평(王平)·안충(顔忠) 등과 함께 불교를 신봉한다는 명목으로 도서(圖書)를 조작하여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하였다. 명제는 유영의 봉작(封爵)을 박탈하고 단양(丹陽)으로 귀양을 보냈는데 유영은 단양에 이르러 자살하였다. 명제는 이 사건을 혹독하게 다스려 수천 명이 무고하게 연루되어 억울한 옥사가 만들어졌다. 《後漢書 卷42 楚王英列傳》 한랑(寒郞)이 …… 풀어주니 한랑은 후한 명제(後漢明帝) 때 알자수시어사(謁者守侍御使)로 초왕 영(楚王英)의 역옥을 조사하다가 이 옥사에 연루된 수향후(隧鄕侯) 경건(耿建), 낭릉후(郞陵侯) 장신(臧信), 호택후(護澤侯) 등리(鄧鯉), 곡성후(曲成侯) 유건(劉健) 등이 무고하게 걸린 것을 알고서 명제께 고하여 풀려나게 하였다. 《後漢書 卷41 寒朗列傳》 공자께서 …… 없게 된다 《논어》 〈자로(子路)〉에 나오는 구절이다. 유신(維新) 구법(舊法)을 혁신하고 새로운 정사를 펼친다는 것으로, 《시경(詩經)》 〈문왕(文王)〉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왕이 위에 계시어 아, 하늘에 밝게 계시니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천명은 새롭도다. 주나라가 드러나지 않을까 상제의 명이 때에 맞지 않을까 문왕의 오르내리심이 상제의 좌우에 계시니라.[文王在上, 於昭于天. 周雖舊邦, 其命維新. 有周不顯, 帝命不時. 文王陟降, 在帝左右.]"고 하였다. 간구(姦宄) 원문은 '간구(姦究)'인데 《서경》 〈순전(舜典)〉 등에 근거하여 '간구(姦宄)'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간구는 안팎에서 법을 어기고 난행(亂行)을 저지르는 것을 말한다. 《서경》 〈순전(舜典)〉에 "제순(帝舜)이 이르기를 '고요야, 오랑캐가 중하(中夏)를 어지럽혀 사람들을 약탈하고 죽이며, 안팎으로 나쁜 짓을 하기에 너를 사(士)로 삼는다.' 하셨다.〔帝曰: 皐陶, 蠻夷猾夏, 寇賊姦究, 汝作士.〕"라고 하였다. 주역(周易)에 …… 이루어진다 《주역(周易)》 〈항괘(恒卦)〉의 단사(彖辭)에 있는 말로서, 성인(聖人)이 오랫동안 한결같이 항구한 정도(正道)를 지키고 있어 천하가 교화되어 아름다운 풍속을 이룬다는 뜻이다. 맹자(孟子)에 ……하였으니 원문에는 '맹자왈(孟子曰)'이 누락되어 있으나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君子反經而已矣, 經正, 則庶民興; 庶民興, 斯無邪慝矣."를 근거하여 보충하고 국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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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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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서애 유성룡35)의 회계36) 【일이 비변사에 내려져 서애 유성룡이 영의정으로써 회계하였다.】 柳西厓成龍回啓 【事下脩邊司, 西厓以領議政回啓】 근래에 대간 및 지방 유생들이 연이어 상소와 차자를 올려 기축년 역모 사건37)에 연루된 사람들 중 매우 원통한 경우가 있음을 언급하고, 또 한랑(寒朗)이 초(楚) 나라의 옥사를 판별38)했다는 한 구절을 인용하여 조정 대신들이 간언하지 않은 잘못을 책하였습니다. 신들은 마땅히 머리를 찧으면서 부끄러워하고 사죄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무슨 낯으로 다시 논의하겠습니까.국운이 불행하여 역모의 변란이 대신들 사이에서 일어나 바야흐로 옥사(獄事)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성상께서는 이미 파급의 환난이 있을 것임을 걱정하시어 옥석이 함께 불타는 것을 경계하여 덕음(德音)을 거듭 내리셨습니다. 만약 당시에 일을 담당하여 옥사를 다스렸던 신하가 성상께서 보이신 지극한 뜻을 미루고 넓혀서 심문을 잘하고 밝게 판단하여 그 허실(虛實)과 경중(輕重)의 실정을 얻고 조금이라도 사의(私意)가 그 사이에 섞이지 않게 하였다면, 원악(元惡)과 대돈(大憝) 및 법에 걸리는 것이 마땅한 자 외의 나머지, 즉 비록 평시에 교유하였더라도 역모를 알지 못했던 자, 한두 번 정도 얼굴을 본 적이 있거나 한두 번 서신을 왕래한 자, 고알(告訐)하던 중에 거론된 자, 풍문으로 거론된 자 등은 모두 차례로 신원되어 풀려나 실정과 죄가 서로 걸맞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았다면 인정이 크게 감복하고 억울함이 풀릴 수 있었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천토(天討)이며 또한 왕법(王法)이나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못한 점이 있었습니다.그 근원은 실로 근년 이래 조정이 분열되어 형색을 너니 나니 하며 가르는 데서 비롯되었으니, 이른바 한편에 선 사람들이 이 일을 빌미로 하여 수사연좌(收司連坐)39)하려는 계책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시기에 영합하고 풍지(風旨)를 엿보아 소차를 올려 포승줄로 사로잡으려는 자들이 관서(官署)의 앞에 줄을 지어 잇닿으니, 위로는 사대부로부터 아래로는 벼슬하지 않은 선비까지 발을 움직이고 손을 흔드는 것조차 모두 주시해서 지켜보는 중에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있게 되면 반드시 역적을 구원하려 했다는 죄목에 빠뜨렸습니다. 이 때문에 삼 년 동안의 큰 옥사에 원통하게 고초를 받은 일이 천태만상이었으나 한 사람도 이러한 사실을 성상께 밝게 말씀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여러 신하들이 나라를 저버림이 심한 것이니 모두에게 똑같이 죄가 있는 것이지 한 사람에게만 전적으로 죄를 돌릴 수는 없습니다.바야흐로 사변의 초반에 성상께서 다른 사람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윤음(綸音)40)을 널리 내리시어 역적으로서 법에 응당 연좌되는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의 문을 열어 젖히셨으니 하늘같은 은혜가 크게 흘러넘치고 말 못한 원통함이 전부 씻기었습니다. 그리하여 인심을 위로하고 하늘에 무궁한 수명을 빌어 중흥만세의 근본을 세우셨으니, 이는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이와 같이하였기에 옛날 죄적(罪籍)41)에 있는 자 중 살아있는 이는 거의 다 은혜를 입었으나, 유독 이미 죽은 사람 중 최영경(崔永慶),42) 정개청(鄭介淸), 유몽정(柳夢井)43), 이황종(李黃鍾)44) 등과 같은 이들은 당시 함께 누명을 벗을 수 없었습니다. 최영경은 특별히 성상의 명이 내려 대간들이 잇달아 논의하여 이미 억울함을 푼 데다 증직(贈職)을 하였으니 이를 듣고 보는 자들이 누가 감격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정개청과 유몽정, 이황종 등은 비록 인품의 고하가 다르고 죄를 입음에 선후가 있기는 하나 원통하고 억울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정개청은 호남인 중에서 특히 이름이 있어 평생토록 학술과 행실로서 자임하였는데 우연히 한 편의 논설을 저술한 것으로 죽음에 이르렀으니, 나덕윤(羅德潤) 등의 무리들이 천 리 길을 발을 싸매고 와서 문을 두드리며 억울함을 호소했던 것이 당연합니다.대저 큰 병란과 큰 옥사는 한·당(漢·唐)이 망했던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큰 옥사의 뒤에 반드시 큰 병란이 있었던 것은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인심이 이전의 일을 경계로 삼아 나라의 명(命)을 장래에 일신하고자하는데 백성들이 만약 저승에서 원통함을 품고 결백을 밝히지 못한다면 어둡고 답답한 기운이 올라가 하늘의 조화에 간여하여 국가 형정(刑政)의 누가 될 수 있으니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신들의 뜻에는 정개청과 유몽정, 이황종 등에게는 특히 유생의 소(疏)를 윤허하시어 모두 신원하여 결백을 드러나게 해주시고, 그 밖에 소차(疏箚)에서 미처 거론하지 못한 자들 또한 많이 있으니 임진년(壬辰年) 하교(下敎)에 의거하여 법에 마땅히 연좌되는 경우 외에는 모두 옥문을 열어 석방하는 뜻으로 의금부로 하여금 상세히 개록(開錄)45)하게 하고 관련된 실상의 경중에 따라 일체 석방하여 그물을 걷어주는 은혜를 깊은 땅 속과 엎어놓은 항아리 속까지도 고루 입을 수 있게 해주신다면 유신(維新)의 정사(政事)에 보탬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황공하게도 감히 아뢰옵니다.비답(批答)하시를, "이후에 마땅히 면대하여 의논하라." 하였다. 近日臺諫及外方儒生, 連上疏劄, 言己丑逆獄連累人冤濫之事, 且引寒朗論楚獄一節, 責朝臣之不言. 臣等當叩頭慚謝之不暇, 何顔更有論議. 國運不幸, 逆賊之變, 出於搢紳之間, 方獄事之始起也. 自上已慮有波及之患, 以玉石俱焚爲戒, 德音屢下. 若使其時當事按獄之臣, 推廣至意, 淑問明辨, 以得其虛實輕重之情, 不以一毫私意參錯於其間, 則除元惡大憝及律所應坐者外, 其餘雖平時交游而未知逆謀者, 及一再見面一二書往來者, 與出於告訐, 出於風聞者, 皆當次第伸釋, 使情罪相稱, 若是則人情大服, 而冤枉得伸, 夫是之謂天討, 亦所謂王法, 而當時則有不然者. 其源實出於近年以來, 朝廷分裂, 形色彼此, 所謂一邊之人, 旣假此以爲收司連坐之計. 故其投合時好, 希望風旨, 投疏羅織者, 相續於公車之下, 而上自士大夫, 下及韋布之士, 動足搖手, 擧在指目之中, 少有一言, 必陷於營救之罪, 所以三年大獄, 冤楚萬狀, 而無一人以此事狀徹聞於冕旒之下, 此則群臣負國之甚, 均有其罪, 未可專咎於一人也. 方事變之初, 自上不待人言, 渙發綸音, 除逆賊法應連坐外, 悉開放釋之門, 天恩大霈, 幽冤盡洩, 其所以慰解人心, 祈天永命, 以立中興萬世之本者, 實非偶然也. 惟其如是, 故罪籍中生存者, 幾盡蒙恩, 而獨有已死之人, 如崔永慶鄭介淸柳夢井李黃鍾等, 未得一時昭雪. 永慶則特出上命, 而臺諫繼論, 旣爲洩冤, 又加贈爵, 凡在聞見, 孰不感激, 而介淸夢井黃鍾之類, 雖人品有高下, 被罪有先後, 而其爲冤枉則一也. 介淸則於湖南人中尤有名稱, 平生以學術行檢自任, 而因偶然一篇之著論, 以至於滅身, 宜羅德潤輩千里裏足叩閽訴冤也. 大低大兵大獄, 漢唐之所以亡國也. 故大獄之後, 必有大兵, 理所然也. 今則人心懲毖於旣往, 邦命一新於將來, 匹夫匹婦, 若含冤於重泉之下而不得見白, 則幽鬱之氣, 亦足以上干天和, 而爲國家刑政之累, 非小事也. 臣等之意, 介淸·夢井·黃鍾等, 特允儒生之疏, 悉加伸雪, 而此外未及擧名於疏劄者, 亦多有之, 依壬辰下敎法當緣坐外, 悉爲開釋之意, 令義禁府詳細開錄, 從其所坐輕重, 一體宥釋, 使解網之恩, 普被於窮泉覆盆之下, 則其於維新之政, 所補不細, 惶恐敢達.答曰: "後當面議." 유성룡 1542~1607. 본관은 풍산(豐山)이며,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에 올라 명나라의 참전을 이끌어냈고 평양과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1598년 북인의 탄핵으로 삭탈관직당했다가 복관되었으나 은거하며 세상을 마쳤다. 임진왜란의 교훈을 정리한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회계(回啓) 임금의 물음에 대하여 신하들이 심의하여 대답하던 일을 말한다. 기축년 역모 사건 기축옥사(己丑獄事), 혹은 기축사화(己丑士禍)라고도 한다. 기축년(己丑年)인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이 반란을 꾀한다는 고변(告變)에서 시작하였는데 1591년까지 그와 연루된 수많은 동인(東人)의 인물들이 희생되었다. 한랑(寒郞)이……판별 한랑(寒郞)은 후한(後漢)때 설(薛)땅의 사람이다. 초왕(楚王) 영(英)은 소시에는 유협(遊俠)을 좋아하였고 만년에는 황로(黃老)ㆍ부도(浮屠)를 즐기며 방사(方士)와 교유하였는데 뒤에 역적으로 몰려서 자살하였다. 이 때 억울한 연루자가 수천 명이나 되어 여러 해 동안 판결을 내지 못한 것을 한랑(寒郞)이 가서 공정하게 처리하여 죄 없는 많은 사람을 풀어주었다 한다. 《후한서(後漢書)》 권72. 수사연좌(收司連坐) 진 나라 상앙(商鞅)이 제정한 법이다. 10호를 1조(組)로 하여 서로 규찰하게 하고, 그 중에 한 집이 법을 어길 경우 아홉 집이 관아에 고발하되, 만일 규찰하여 고발하지 않으면 10호가 연좌되었다. 윤음(綸音)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 오늘날의 법령과 같은 위력을 지닌다. 죄적(罪籍) 죄인의 죄상을 적은 도류안(徒流案)이나 형명부(刑名簿) 등을 이른다. 최영경(崔永慶) 1529~1590.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으로 서울 출생.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정여립 역옥사건(鄭汝立逆獄事件)이 일어나자 무고로 옥사(獄死)하였는데 당시 정철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정철의 사주로 죽임을 당한 것이라 의심되었다. 유몽정(柳夢井) 1557~1590. 자(字)는 경서(景瑞). 조선시대 호남 지역 문신으로 기축옥사 때 옥사하였으며 무고로 옥사한 것이라 의심되었다. 이황종(李黃鍾) 1534~1590. 자(字)는 중초(仲初). 조선시대 호남 지역 문신으로 기축옥사 때 사망하였다. 개록(開錄) 개록이란 상급 기관에 문서를 보낼 때, 문서의 후반에 이름이나 의견을 적어 보내는 일을 말한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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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곤재 정개청 선생에게 올린 편지【1577년 7월 24일 당시 공의 나이 21세였다.】 上困齋鄭先生書 【丁丑七月二十四日○時公年二十一】 황면재(黃勉齋)46)는 자신의 스승 주자(朱子)의 상(喪)을 당하여 조복에 마질(麻絰)까지 가하였는데47) 제도는 심의(深衣)48)와 같았고 관질(冠絰)을 착용하였습니다. 왕백(王栢)49)은 자신의 스승 하기(何基)50)의 상에 심의를 입고 대질(帶絰)51)을 두르며 관(冠)에 사무(絲武)를 더하였습니다. 왕백이 죽자 그의 제자 김인산(金仁山)52)은 백건(白巾)에 수질(首絰)을 더하였는데, 수질은 시마복(緦麻服)53)과 같이 하고 소대(小帶)는 가는 모시 베를 썼습니다.54) 황면재, 왕백, 김인산 세 군자는 모두 주자 문하의 적통이었으나 스승을 위해 조복을 입는 결정에 조금씩 다른 부분이 없지 않았으니, 무엇으로 준거를 삼아야 하겠습니까? 또 스승을 위하여 삼년상을 지냈는데 그들은 관직을 떠나지 않았습니까?도사(都事) 김천일(金千鎰)55) 문인들의 말을 들으니 "선생께서는 지금 일재(一齋)56) 【이항(李恒)】의 상을 만났으나 이미 조정에 몸을 바쳤기에57) 관직을 떠나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제 생각에는 매우 편치 않아 바로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군자는 연고가 있으면 있는 곳에 따라 당시의 일에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까? 옛날 공자(孔子)의 문하에는 오직 안연(顔淵)과 민자건(閔子騫)만이 벼슬을 하지 않았는데, 공자께서 돌아가시자 칠십 명의 제자들이 집을 짓고 삼년 상 치르기를 마치 아버지 상을 치르는 것처럼 하였으나 복은 입지 않았으니 칠십 명의 제자는 예를 아는 자가 아니란 말입니까?또 몸소 최마복(衰麻服)58)을 입지는 않으나 마음에는 슬퍼하는 감정이 있어서 마치 부모를 잃은 것 같은 뜻과 정자(程子)가 말한 바 안연과 민자건 같은 사람은 공자에 대해서는 비록 참최(斬衰)59)를 삼년 간 입더라도 괜찮다고 했던 뜻을 미루어 보면 진실로 평소 스승을 섬기는 은혜와 의리가 모두 지극하니, 삼년 간 관직을 떠나는 것이 비록 《예경(禮經)》에 실려 있지는 않았더라도 마땅히 행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김천일의 문하에서 저를 꾸짖고 책하는 비방이 많으니 매우 우습고 우습니다.도사 김천일과 함께 한 성(城)에 있어 본래 전부터 알고 지냈는데,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이항 선생에게 수학하여 총명하고 언변이 좋았기에 세상의 중망을 받아 천거되어 이름난 관리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항 선생이 돌아가시자, 비록 초상에 달려왔다고는 하지만 한 번 조문한 뒤로는 장례의 일을 조치하지 않고, 집에 돌아가서는 요를 여러 겹으로 깔고 앉아서60) 관의 지공(支供)을 받고 빈객들을 응접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스승이 살아 있을 때는 달려가서 잘 모셔 명성을 낚는 미끼로 삼고, 돌아가시자 마침내 등을 돌려 배신한 것입니다. 저는 강직한 성미로 강개한 마음을 많이 표출하고, 그의 문인들과 극언으로 변론하며 간간히 거칠고 난폭한 기운을 분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김천일 문하에서는 방문한 향인(鄕人)에게 드러내어 말하지 않겠다고 깊이 생각하였다고들 하니, 말세의 교묘하고 험한 인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소견이 과연 의리의 정당함에 부합합니까? 바라건대 또한 살펴봐 주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주자께서 연평(延平)61) 선생의 상(喪)에 복(服)을 입지 않고 조정에서 토론하셨다는데 그러합니까? 또한 가르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그 사이에 곡절이 많이 있었으나 이 사람의 행사가 뜻밖에 나오고 날까지 저물어 급하게 대략 씁니다. 마음이 어수선하고 기운이 없어 비뚤비뚤하게 쓰게 되어 매우 황공합니다. 黃勉齋喪其師朱子, 吊服加麻, 制如深衣, 用冠絰. 王栢喪其師何基, 服深衣加帶絰, 冠加絲武. 栢卒, 其弟子金仁山則加絰于白巾, 絰如緦麻, 而小帶用細苧. 黃·王·金三君子, 皆朱門之嫡傳, 而所制之師服, 不無少異, 當何爲準. 且爲師三年, 其不去官耶? 聞金都事千鎰門人言則曰: "先生今遭一齋【李恒】喪, 而旣委質于朝, 故不去官." 於愚意甚未安, 乃告以此. 無乃君有故, 以所在而致死時事乎? 昔孔子之門, 惟顔閔不仕, 及其歿也, 七十子築室三年, 若喪父而無服, 夫七十子者, 非知禮者乎? 且以身無衰麻之服, 而心有哀戚之心, 若喪考妣之義, 與程子所謂若顔閔之於孔子, 則雖斬衰三年可也之義推之, 則苟平日以師事之恩義兼至, 則解官三年, 雖不載於禮經, 乃所當爲也. 以此金門多有詆責侍生之謗, 不勝呵仰呵仰. 金都事同在一城, 固嘗的知, 早失父母, 受學李丈, 穎悟善言, 取重於世, 至薦爲名宦, 今其死也, 雖曰奔喪而來, 一吊之後, 不措襄事, 卽返于家, 累茵而坐, 至奉官供, 應接賓客, 是乃其生也, 趨走善事以爲釣名之資, 而之死遂背之也. 狷介之性, 多發慷慨之懷, 與其門人極言辨論, 間發粗暴之氣. 由此金門深懷, 不肯顯說於鄕人之來見者云, 末世人心之巧險, 不可言也, 不可言也. 然侍生之所見, 果有合於義理之正乎? 幸亦垂察開示何如? 朱子不服延平而在朝論討云然乎? 亦乞示破. 其間多有曲折, 而此人之行, 出於意外, 日暮草草, 心亂氣短, 胡寫至此, 惶恐惶恐. 황면재(黃勉齋) 남송(南宋)의 성리학자인 황간(黃幹, 1152~1221)을 말한다. 자는 직경(直卿)이며, 면재(勉齋)는 호이다. 주희(朱熹)의 문인으로, 그의 사위가 되었다. 마질(麻絰)까지 가하였는데 원문의 '가마(加麻)'는 오복제에 속하지 않지만 복을 입을 대상인 경우 머리에 환질(環絰), 즉 마(麻)로 만든 수질(首絰)만 두르는 것을 말한다. 심의(深衣) 대개 흰 베를 써서 두루마기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소매를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소맷단을 두른 것으로 주로 신분이 높은 선비들이 입던 옷이다. 왕백(王栢) 1197~1274. 송나라 때 학자이며 자는 회지(會之)ㆍ백회(伯會), 호는 장소(長嘯)ㆍ노재(魯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황간(黃榦)의 제자 하기(何基)에게 배웠다. 하기(何基) 1188~1269. 남송 무주(婺州) 금화(金華) 사람으로 자는 자공(子恭)이고, 호는 북산(北山). 주희(朱熹)의 문인 황간(黃幹)에게 수학하였다. 대질(帶絰) 상복에 허리에 두르는 것을 대(帶)라 하고, 머리에 두르는 것을 질(絰)이라 한다. 김인산(金仁山) 송나라 말기, 원나라 초기의 학자인 김이상(金履祥, 1232년~1303년)으로, 인산(仁山)은 그의 호이다. 주희(朱熹)와 면재(勉齋) 황간(黃榦)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아, 절학(浙學)을 중흥하였다. 시마복(緦麻服) 조선시대에 입었던 오복(五服) 중의 하나. 가는 베로 만든다. 황면재(黃勉齋) …… 썼습니다. 구준(丘濬)의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권51 〈치국평천하지요(治國平天下之要) 명예악(明禮樂) 가향지례(家鄉之禮)〉에 "송나라 유학자 황간이 그의 스승인 주자(朱子)의 상에 조복(弔服)에 가마(加麻)하였는데 제도는 심의(深衣)와 같았고 관질(冠絰)을 착용하였으며, 왕백이 그의 스승인 하기(何基)의 상에 심의를 입고 대(帶)와 질(絰)을 더하고 관(冠)에 사무(絲武)를 더하였으며, 왕백이 죽자 그의 제자인 김이상이 상을 치르면서 백건(白巾)에 수질(首絰)을 가하였는데, 수질은 시마복의 수질과 같았고 소대(小帶)는 가는 모시 베로 만들었다. 황간ㆍ왕백ㆍ김이상 세 사람은 모두 주자 문하의 적전(嫡傳)이니, 그들이 만든 스승을 위한 복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후세에 스승의 은혜와 의리에 보답하고자 하는 자들은 의당 이를 준하여 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김천일(金千鎰) 1537~1593. 이항(李恒)의 제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高敬命),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하였다. 왜적이 남으로 퇴각할 적에는 진주성(晉州城)에 주둔하여 사력을 다해 싸우다 성이 함락되자 투신 자결하였다. 일재(一齋) 1499~1576.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항지(恒之), 호는 일재,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1566년 명경행수(明經行修)로 추천되어 벼슬길에 올라 1574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지냈다. 저서로는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몸을 바쳤기에 원문의 '위지(委質)'은 처음 벼슬하는 사람이 임금에게 예물(禮物)을 바치는 것으로 전하여 처음 벼슬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또는 자기 몸을 임금에게 맡긴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春秋左傳 僖公24年》 《國語 晉語9》 최마복(衰麻服) 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의 상중에 후손이 입는 상복인 베옷을 뜻한다. 참최(斬衰) 오복(五服) 중의 하나.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상(喪)에 입는 것으로 거친 베로 짓되 아랫단을 꿰매지 않고 접는다. 요를 …… 앉아서 원문의 '누인(累茵)'은 《공자가어(孔子家語)》 권2 〈치사(致思)〉에 자로가 "남쪽으로 초나라에서 유세하여 시종하는 수레가 백 대나 되고 쌓인 곡식이 만 종이나 되며, 자리를 겹쳐서 앉고 솥을 늘어놓고 먹었습니다.[南遊於楚, 從車百乘, 積粟萬鍾, 累茵而坐, 列鼎而食.]" 하였는데, 전하여 높은 벼슬을 하며 누리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연평(延平) 송(宋)나라 학자 이통(李侗, 1093~1163)을 말한다. 연평은 호이고 자는 원중(愿中),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양시(楊時)의 제자인 나종언(羅從彦)에 수학하였고 주자(朱子)의 스승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답서를 붙이다 【곤재 정개청】 附答書 【困齋】 스승의 상례라는 일에 대해 논변한 것이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합당하니 그대의 군자다운 정직함에 탄복하였습니다. 주자께서는 연평에게 다만 수학했을 뿐입니다. '수학'이라는 것을 주자는 "종유(從遊)하다."라고 말하였으니, 대개 존경하지만 스승과 제자 관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 사람이 이항에게 수학만 하였을 뿐이라면 지금의 처신이 오히려 혹 그럴 수 있겠다 싶습니다. 만약 스승62)이 어리석음을 깨우쳐준 은혜가 있는데도 그렇다면 나머지는 족히 볼 것도 없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친구 간에도 오히려 마땅히 복을 입고 마질(麻絰)까지 가하였는데, 하물며 은혜와 의리가 무거운 스승에 대해 어찌 슬픔을 표출하는 변화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황면재(黃勉齋), 왕백(王栢), 김이상(金履祥) 세 군자가 입은 조복이 같지 않은 것에 대해 나는 예에 정해진 복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은혜의 경중(輕重)과 슬픔의 심천(深淺)에 따라서 그것을 드러내 입은 것뿐이니, 이후에 스승을 위해 조복(弔服)을 입은 자는 마땅히 은혜와 슬픔의 얕고 깊음에 따라 정할 일입니다. 만약 이미 군주에게 몸을 맡겼다고 하여 심상(心喪) 삼년복을 입지 못한다고 한다면 신하된 자는 끝내 대공(大功)63)의 상례를 기약할 수 없을 것이니 그것이 괜찮겠습니까. 이른바 오직 있는 곳에 따라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군주 곁에 있으면 군주를 위해 죽고, 부모 곁에 있으면 부모를 위해 죽는다는 것이지 군주를 모시고 있어서 삼년의 상에 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아버지의 상을 당한 것처럼 하되 복은 입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관직을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우리들이 마땅히 뭇 사람들의 긍휼(矜恤)함을 포용하여 마음을 가눌 수 없어 지나치게 명백하고 곧은 성품으로 다툼의 빌미를 일으켜서는 안 될 듯합니다. 잘 모르겠으나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또 스승의 상례라는 한 가지 일에 대해 답해 보겠네. 《예기》를 상고해보면 "심상 삼 년64)"이라 하였고, 또 "아버지의 상을 치르는 듯이 하면서 복을 입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공자의 상에 제자들이 모두 수질(首絰)을 하고 나갔다."고 하였고, 《의례(儀禮)》 〈상복(喪服)〉의 주석에서는 "모두 수질을 하고 나갔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스승을 위해 나간 것이며 떠날 때에도 역시 수질을 하였던 것입니다. 정자께서 "안연과 민자건은 공자에 대하여 비록 참최(斬衰)를 입고 삼년상을 지내더라도 괜찮다."라고 하셨고, 주자께서는 "스승에 대한 의리는 친구와는 구별되니 임금이나 아버지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만약 그 상복을 논한다면 마땅히 임금이나 아버지와 같아야 하므로 《예기》에서 아버지의 상을 치르는 것처럼 하면서도 복은 입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씀하시길 "평소에 거처할 때에는 수질을 두른다."라고 하였고, 또 《의례》 〈상복(〉 기(記)에 붕우 간에 마(麻)를 한다는 주(註)에 "붕우는 비록 친족 관계는 아니나 도(道)를 함께 하는 은혜가 있어 시마복(緦麻服) 때에 쓰는 질대(絰帶) 차림을 한다.65)"라고 하였으니 그 복은 조복(弔服)이고, 그 관(冠)은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士)는 변질(弁絰)66)을 쓰고 서인은 소위모(素委貌)67)를 쓴다고 하였습니다.조복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왕이 삼공육경(三公六卿)을 위해 입는 석최(錫衰)68), 제후를 위해 입는 시최(緦衰)69), 대부와 사를 위해 입는 의최(疑衰)70)가 있습니다. 제후와 경대부 또한 시최로 조복을 삼고, 친구 간에 서로 입는 복은 선비[士]의 조복이 됩니다. 의최와 소상(素裳)71)의 주에 "서인은 하얀 모시로 된 심의를 입는다. 석최라는 것은 석마(錫麻)중에서도 부드럽고 고운 것인데 15승(升) 중에서 그 절반을 제거하니 그 삼베[布]는 일삼음이 있고 그 올[縷]은 일삼음이 없는 것이다. 시최(緦衰)는 또한 15승 중에서 그 절반을 제거하니 그 올[縷]은 일삼음이 있고 그 삼베[布]는 일삼음이 없는 것이다. 의최(疑衰)는 14승이며 의(疑)라는 말은 비긴다[擬]는 말이니, 길(吉)에 비긴다는 것이다.72)"라고 하였습니다.이 몇 가지 설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심상 삼년복은 조복의 제도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스승의 은혜와 의리는 임금과 아버지에 대한 것과 같으니, 그 조복은 아마 자최(齊衰)의 승과 그 수가 같을 것이고, 질대는 아마 기공(期功)·대공(大功)의 대소(大小)와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황면재, 왕백, 김인산 세 현자가 스승을 위해 입은 복은 조복의 제도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으나 예의에 준하여 본다면 미흡한 부분이 있으니, 다만 은혜와 의리의 경중은 알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옛 예의의 올바름을 가지고 논의한 것일 뿐이니, 만약 말세에서 이른바 현자들이 행했던 일들을 가지고 살펴보면 앞의 세 현자들이 스승을 위해 입은 조복의 제도가 어찌 우뚝하게 높디높아 미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아! 말세의 이른바 현자라는 이들은 반드시 모두 의리로 스승에게 구하는 것도 아니며, 더러는 공리(功利) 때문에 서로 따르는 경우가 있음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평소 사우(師友)들과 강론하는 것이 언어와 문자 사이에 그칠 뿐이며 기대하는 것도 남들에게 알려지기를 구하거나 얻을 것만 꾀하는 사사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그들은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의 실제와 만물을 밝히고 인륜을 고찰하는 근본에 대하여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일에 임하여 시행하고 조치할 때 공정하게 사리에 밝지 못하고 한결같이 이익을 도모하고 공리(功利)를 꾀하여 처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니 스승의 상에 복을 입지 않은 일이야 무슨 괴이할 것이 있겠습니까.다만 이른바 스승이라는 것은 그 은혜와 의리가 가벼운지 중한지, 얕은지 깊은지에 따라 차등이 다르니 우선 그 한두 가지를 거론해보면, 구두(句讀)와 훈고(訓詁)의 스승이 있고, 문장(文章)과 공리(功利)의 스승이 있으며, 종유(從遊)와 수학(受學)의 스승이 있고, 수업(受業)과 전도(傳道)의 스승이 있습니다. 더러는 대성(大聖)이고 더러는 대현(大賢)이며 더러는 현인(賢人)에 버금가니, 도덕의 크고 작음과 은의(恩義)의 가벼움과 중함을 살펴보아 자신의 복(服)을 걸맞게 할 뿐이라네. 어떤 경우는 삼년복, 어떤 경우는 기년복, 대공복, 소공복, 시마복으로 저절로 등분(等分)이 없을 수가 없으니 이 또한 알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 살아계실 때는 스승을 섬겨서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 돌아가신 뒤에는 마침내 배신하여 그 은혜와 의리를 잊어버리는 자라면 또 어찌 함께 도를 논의하기에 족하겠습니까. 師喪一事, 言論至正至當, 歎服其君子之正直也. 朱子之於延平, 但受學而已. 受學云者, 朱子曰: "從遊", 盖所尊敬, 而不爲師弟子之辭也. 彼於李丈受學而已, 則今之所處, 猶或可矣. 若有發蒙函丈之恩, 則餘無足可觀, 更何言哉. 朋友猶當吊服加麻, 況於重恩義之師, 豈可無表哀之變也. 黃王金三君子之所服不同者, 愚以爲禮無定服, 故特以恩之輕重哀之深淺, 而表之以所服爾, 後之服師服者, 當以恩哀淺深爲定爾. 若曰旣委質於君而不服三年之心喪, 則爲臣者, 終無期大功之喪, 其可乎. 所謂唯其所在則致死者, 謂如在君傍則爲君死, 在父傍則爲父死云爾, 非謂在君而不服三年之喪也. 禮曰: "若喪父而無服." 則解官可知. 但當今之時, 吾輩當以容衆矜不能爲心, 似不可太白直以起爭端也, 不審, 尊侍以爲如何.又答師喪一事. 考於禮曰: "心喪三年." 又曰: "若喪父而無服." 又曰: "孔子之喪, 二三子皆絰而出." 儀禮喪服疏曰: "皆絰而出." 是爲師出, 行亦絰也. 程子曰: "若顔閔之於孔子, 則雖斬衰三年, 可也." 朱子曰: "師之爲義, 卽朋友而分, 則與君父等." 若論其服, 則當與君父等, 故禮謂"若喪父而無服." 又曰: "平居則絰." 又按儀禮喪服記朋友麻註曰: "朋友雖無親, 有同道之恩, 相爲服緦之絰帶." 其服則吊服也, 其冠則卿大夫士弁絰, 庶人素委貌也. 吊服有三, 王爲三公六卿錫衰, 爲諸侯緦衰, 爲大夫士疑衰. 諸侯及卿大夫, 亦以緦衰爲吊服, 朋友之相爲服, 卽士吊服. 疑衰素裳疏曰: "庶人則白布深衣. 錫衰者, 錫麻之滑易者也, 十五升去其半, 有事其布, 無事其縷.緦亦十五升去其半, 有事其縷, 無事其布. 疑衰十四升, 疑之言擬也, 擬於吉也." 將此數說而觀之, 則心喪三年之服, 不可擬於吊服之制. 愚謂師之恩義, 有類於君父, 則其服疑與齊衰之升數同, 而絰帶則疑與期大功之大小同也, 而黃,王,金三賢之師服, 皆未免於吊服之制, 準禮義則有未洽, 但未知恩義之輕重爾. 然此特論其古禮義之正而已, 若以末世所謂賢者所行之事觀之, 則三賢師服之制, 豈不巍巍然高不可及哉. 嗚呼! 末世之所謂賢者, 未必皆以義理求於師, 而或未免有以功利相從者. 故其平日所與師友講論者, 不過言語文字之間, 而期望者又不出乎求聞計獲之私, 其於格致誠正之實, 明物察倫之本, 亦未知其爲何事也. 是以, 當其臨事施措之際, 未能正誼明理, 而一以謀利計功爲處之當, 其不服師喪, 尙何怪哉. 但所謂師者, 其恩義之輕重淺深, 差等不一, 姑擧其一二, 則有句讀訓誥之師, 有文章功利之師, 有從遊受學之師, 有受業傳道之師. 或大聖, 或大賢, 或次賢, 觀其道德之大小恩義之輕重, 而權其服而已. 或三年, 或期功緦, 自不能無等分矣, 此亦不可不知. 至若生而師事之, 以濟其所欲, 死而遂背之, 以忘其恩義者, 則又何足與論哉. 스승 원문의 '함장(函丈)'은 스승이나 장자(長者)가 앉는 자리를 뜻하는 말로, 함연(函筵)이라고도 한다. 제자가 스승의 자리와 한 길[一丈]의 거리를 둔 것에서 유래하였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만일 음식 대접이나 하려고 청한 손이 아니거든, 자리를 펼 때에 자리와 자리의 사이를 한 길 정도가 되게 한다.[若非飮食之客, 則布席, 席間函丈.]"라고 하였다. 대공(大功) 다섯 등급의 복 중 하나로 굵은 베로 지었으며 대공친의 상사에 9개월 동안 입는 복제(服制)이다. 다섯 등급의 상복(喪服)으로, 참최(斬衰) 3년, 자최(齊衰) 1년, 대공(大功) 9개월, 소공(小功) 5개월, 시마(緦麻)는 3개월을 가리킨다. 심상 삼 년 《예기》 〈단궁 상(檀弓上)〉의 '심상삼년(心喪三年)'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註)에 "심상은 슬퍼하는 모습이 부친상을 당한 것과 같은데, 복이 없는 것이다.[心喪戚容如父而無服也]"라고 하였다. 심상은 스승의 상을 당했을 때, 비록 상복은 입지 않더라도 슬퍼하는 마음만은 상복을 입고 있을 때처럼 하는 것을 말한다. 붕우는 …… 한다. 《의례(儀禮)》 〈상복(喪服)〉에 "붕우를 위해서는 마를 한다.〔朋友麻〕"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의례주소(儀禮注疏)》 정현(鄭玄) 주에서 이르기를 "붕우는 비록 친족 관계는 아니나 도(道)를 같이하는 은혜가 있으므로 서로를 위하여 시마복(緦麻服) 때에 쓰는 질대(絰帶) 차림을 한다.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이르기를 '여럿이 함께 있을 때에는 질을 두르고, 밖으로 나갈 때에는 두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옷은 조복을 입는다.〔朋友雖無親, 有同道之恩, 相為服緦之絰帶. 檀弓曰羣居則絰, 出則否, 其服弔服也.〕"라고 하였다. 변질(弁絰) 상복 제도에서 변(弁 고깔) 위에 삼으로 꼰 끈을 더하여 두르는 것이다. 환질(環絰)이라고도 한다. 소위모(素委貌) 원문의 '위모(委貌)'란 주(周)나라의 관(冠)으로, 후대의 진현관(進賢冠)과 비슷한 모양이다. 원문의 '소위모(素委貌)'는 흰색 비단으로 만든 위모를 말한다. 《의례》 〈사관례(士冠禮)〉에 "위모는 주나라의 도이다.[委貌, 周道也.]"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현의 주에 "위(委)는 편안함과 같으니, 이 관을 써서 용모를 편안하고 바르게 함을 말한 것이다.[委, 猶安也, 言所以安正容貌.]"라고 설명하였다. 위모는 보통 검은 비단으로 만드는데, '소위모'는 흰색 비단으로 만든 것이다. 석최(錫衰) 세마포(細麻布)로 지은 상복, 석(錫)은 석(緆)과 통한다. 고대에 왕이 삼공(三公)과 육경(六卿)을 위해서 입었던 상복인데, 후대에는 대부끼리 서로 조문할 때에도 입었다. 시최(緦衰) 시최(緦衰)는 천은 빨지 않고 베를 짤 때에 실을 가늘게 뽑아서 만든다. 왕이 제후의 상에 조문할 때 입었다. 의최(疑衰) 길(吉)에 견주는 상복이라는 뜻으로 고대에 왕이 대부(大夫)와 사(士)를 위해서 입었던 상복인데, 후대에는 사끼리 서로 조문할 때에도 입었다. 소상(素裳) 흰색의 하상(下裳)으로, 길복(吉服)과 흉복(凶服)에 모두 착용한다. 서인은 …… 것이다. 《주례주소(周禮註疏)》 정현(鄭玄)의 주석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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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묘에 배알하다 謁夷齊廟 현조의 옛 터에 기장이 자라려 하였으니216)기산에서 이미 봉황이 와 우는 것 보았네217)구주에 주나라가 삼분의 이 차지했는데신하의 절개는 은나라 형제에게 남았네말고삐 잡은 외로운 충심218) 소나무 홀로 늙고고사리 캐는 맑은 지조 두 형제의 훌륭함 이루어졌네인륜 강상을 부지하는 힘 알고자 한다면나라를 양보한 초기에 대의가 밝았다오219) 玄鳥遺墟黍欲生岐山已睹鳳來鳴九州周有三分二臣節殷餘弟及兄扣馬孤忠松獨老採薇淸操玉雙成要知扶植綱常力讓國初頭大義明 현조의……하였으니 은나라의 국운이 기울었다는 뜻이다. 상고 시대 유융씨(有娀氏)의 딸이 제곡(帝嚳)의 차비(次妃)가 되어 제비[玄鳥]의 알을 삼키고 임신하여 설(契)을 낳았는데, 설이 바로 은(殷)나라 시조(始祖)가 되었다고 한다. 《詩經 商頌 玄鳥》 《史記 殷本紀》 기산에……보았네 주나라가 세워졌다는 뜻이다. 《국어(國語)》 권1 〈주어(周語)〉에 "주나라가 일어날 적에 봉황이 기산에서 울었다.[周之興也, 鸑鷟鳴於岐山.]"라고 하였다. 말고삐……충심 주 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치려고 하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무왕의 말고삐를 끌어당기며 치지 말기를 간언했다. 《史記 伯夷列傳》 나라를……밝았다오 백이와 숙제가 서로 임금 자리를 양보했던 것을 말한다. 고죽군(孤竹君)은 이 숙제를 후계자로 세우려 했는데, 고죽군이 죽은 뒤 숙제가 백이에게 양보했다. 그러자 백이가 부친의 명이라고 하고는 마침내 도주했고, 이에 숙제도 즉위하려 하지 않고 도주했다. 《史記 伯夷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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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노첨에게 주다 2수 贈崔魯詹【二首】 노선의 붓 아래 옛날 한유의 문장 펼쳐지니그대는 또한 시에 능하여 리가 가르침을 들은 듯229)재주는 젊어서부터 명성이 자자하였는데운수 어긋나 흰 머리카락만 날로 어지럽구나하늘 저편 이별의 한은 봄풀에 슬퍼하고230)관새 너머에서 돌아갈 마음 흰 구름을 바라보네231)구중궁궐이 천리 멀다고 말하지 말라어진 이 대우하는 성명의 군주를 믿어보게나젊어서 약간 공맹의 경전 공부하였는데나이 오십에 명성 없어 부끄러워라벼슬은 낮다고 이르지 않지만 나의 졸렬함을 알고귀가 어두워도 어찌 슬퍼하랴만 어지러운 세상이 싫어라지금 내세울만한 것232)은 다만 백발뿐이오중년까지 오래 사귄 것은 푸른 구름이어라근래의 회포는 그다지 좋은 것 없는데관새의 길 봄바람에 또다시 그대 보내는구나 老仙筆下古韓文子又能詩鯉有聞才調少年名籍籍蹉跎衰鬢日紛紛天涯離恨傷春草關外歸心望白雲莫道九門千里遠急賢須恃聖明君少日稍爲鄒魯文行年五十恥無聞官非謂薄知吾拙聾亦何傷厭世紛長物此時惟白髮舊交中歲盡靑雲邇來懷抱無多好關路春風又送君 리가……듯 《논어》 〈계씨(季氏)〉에서 "공자가 홀로 서 있을 때 아들 리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가니, 공자가 그에게 '시를 배웠느냐'라고 물으니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느니라.'라 하였다. 리는 물러나 시를 배웠다.[嘗獨立, 鯉趨而過庭, 曰學詩乎? 對曰未也. 不學詩, 無以言. 鯉退而學詩.]"라고 하였다. 봄풀에 슬퍼하고 먼 타향에서 부모를 그리는 효심으로는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어려움을 뜻한다. 당나라 맹교(孟郊)의 〈유자음(游子吟)〉 에서 "한 치의 풀과 같은 자식의 마음으로, 봄날의 햇볕 같은 어머니의 사랑 보답하기 어려워라.[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라고 하였다. 흰 구름을 바라보네 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이 병주(幷州)로 부임하여 태항산(太行山)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다가 백운(白雲)이 떠가는 것을 보고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부친이 계신 곳이 저 구름 밑이다." 하고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다가 구름이 옮겨가자 이에 자리를 떴다. 그 후로 이 일이 부모를 그리워하는 고사로 쓰이고 있다. 《舊唐書 卷88 狄仁傑列傳》 내세울만한 것 장물(長物)은 원래 두 가지 이상 가지고 있는 물건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몸에 많이 지닌 것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왕공(王恭, ?~398)이 아버지를 따라 회계(會稽)에서 서울로 왔을 때 친한 벗 왕침(王忱)이 그를 찾아갔다가 그가 깔고 앉은 6자 너비의 대자리를 보고는 달라고 하였다. 왕공은 그가 떠난 뒤에 즉시 대자리를 거두어 보내주고 자신은 언치를 깔고 앉았다. 뒤에 왕침이 이를 알고 매우 놀라자 왕공이 "나는 평소에 남는 물건이 없네.[吾平生無長物]"라고 하였다. 《晉書 卷84 王恭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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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잃다 失題 옷깃을 표연히 떨치고 떠나매 붙잡을 수 없나니갈림길에서 이별의 한 끊임없이 가슴에 사무치네기나긴 밤의 정담은 누구와 나눌까저물녘 높다란 난간에 이제 홀로 기대어 있겠지능라 휘장 차가운 등불에 혼은 쉬이 흩어지고비단 창 서늘한 바람에 눈물은 얼음처럼 맺히네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가서 낭군 돌아올 길 바라보는데다만 관산의 만 겹 눈만 보이는구나 征袂飄然挽不能臨岐脈脈恨塡膺長宵軟語知誰共落日危欄想獨憑羅幌燈寒魂易散綺窓風冷淚凝氷三時出望郎歸路惟見關山雪萬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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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언배율 七言排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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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주와 장평에서 왜적을 쳐부수고 올린 장계 吉州長坪破倭賊狀啓 신이 경성(鏡城)에 들어와 웅거한 이후로 회령, 명천의 남북으로 역적들이 있었는데, 외로운 성을 지키는 관계로 곧바로 토벌할 수 없었는데, 두 역적의 목을 베게 되자 육진(六鎭)에서 병사를 모집하여 차츰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난 10월 21일에 동관 첨사(潼關僉使) 이응성(李應星)을 유진장(留鎭將)으로 차정(差定)하고서 7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경성을 지키게 하였으며, 신은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명천현(明川縣)으로 진격하였는데 길주 목사(吉州牧使) 정희적(鄭煕績)과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망(崔東望)이 함께 와서 합쳤습니다.왜적 천여 명은 길주성(吉州城) 안에 웅거하고 3백여 명은 길주 남쪽 팔십 리 영동(嶺東) 지역에 있으면서 서로 왕래하며 성세(聲勢)를 서로 의지하였는데, 간혹 열 명, 백 명이 무리를 이뤄 산골짜기에서 나무도 하고 혹은 군사를 나눠 사방에서 출몰하며 양민을 죽이고 마을을 약탈하면서 방자하게 횡행하면서 조금도 거침이 없었습니다. 신은 중위장(中衛將)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과 함께 경성 이북의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명천에서 머무르며 정병 4백 명을 뽑아내어 두 길로 나눠서 고참(古驂) 지역으로 진군, 주둔하여 요로에 병사를 매복하였고, 좌위장(左衛將)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은 길주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바닷가에 주둔하면서 노략질하는 왜적을 감시하였습니다. 우위장(右衛將)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는 길주의 두 마을과 서북보(西北堡)의 토병(土兵)과 그리고 본보의 장수와 함께 보에 웅거하면서 정예병을 뽑아서 마을 어귀에 병사를 매복시켜서 나무하는 길을 끊었습니다.신의 종사관 전 인의(引儀)로 과거에 급제한 원충서(元忠恕)는 정병 2백여 명을 거느리고 길주의 북쪽 삼십 리 아간창(阿間倉)에 주둔하고서 산에 올라 왜적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같은 달 30일 이른 아침에 왜적 천여 명 정도가 깃발을 펄럭이면서 성을 나와 바닷가의 가파리(加坡里)로 향하여 가므로 앞의 원충서가 급히 각 곳의 복병장(伏兵將)에게 통보한 다음 자신의 부하를 거느리고 왜적의 귀로를 차단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적들은 마을을 불사르고 재산과 가축을 약탈하며 아녀자들을 포로로 삼고서 오후에 돌아오게 되자, 원충서가 왜적들과 접전을 벌여 앞장 선 두 놈을 참수하니 왜적이 패퇴하였습니다. 이에 기세를 타고서 추격하다가 왜적의 대군을 만나게 되자 보병에게 명령을 내려 산에 올라가 험준한 곳에 웅거하게 하고 저는 직접 정예병을 이끌고서 뒤쪽을 막은 뒤에 후퇴하여 수비하였습니다. 마침 고참의 복병장 방원 만호(防垣萬戶) 한인제(韓仁濟)가 소식을 듣고서 즉시 여러 장수와 병사 삼백여 기병을 거느리고서 2식(二息)186) 거리를 내달려와 원충서와 합세하여 왜적을 공격하였는데, 왜적은 여러 차례 전투에 이긴 것에 자만하여 그깟 쯤이야 하고 무시하며 노략질한 짐들을 싣고 길주를 향해 내달렸습니다.왜적의 괴수는 정승(政丞)이라 일컬으며 이름이 직정(直正)이란 자이며, 감사(監司)라 일컫는 이름이 도관여문(都關汝文)이란 자와 절도사(節度使)라 일컬으며 이름은 알 수 없는 장수 등 다섯 사람이 정예군 사백여 명을 거느리고서 죽음을 각오하고 돌진하여 철환(鐵丸)을 마구 쏘아대므로, 좌척후장 오촌 권관(吾村權管) 구황(具滉), 우척후장 안원 권관(安原權管) 강문우(姜文佑), 별장 옥련 만호(玉連萬戶) 안옥(安沃), 신의 종사관 조산 만호(造山萬戶) 인원침(印元忱), 경원 사람으로 급제한 군관 황사원(黃嗣元), 종성 부사 군관으로 급제한 박은주(朴銀柱) 등이 각자 부하를 거느리고 한꺼번에 돌진하였으며 마부와 종들까지도 모두 용기를 내어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대니 왜적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평지에서 싸우게 되었습니다.갑자기 조우하여 돌진하여 육박전을 벌이자 신시 초반부터 해가 지기까지 우리와 왜놈이 들락날락하면서 교전하였는데, 힘이 떨어지자 비로소 산으로 올라가 달아났습니다. 마침 좌위복병장 사절동 권관(斜卩洞權管) 고경민(高敬民)이 또한 부하를 거느리고서 산 위쪽을 막고 우리 정예군이 좌우로 끼고 달려 곧장 험준한 산으로 올라가 10여 리를 추격하였습니다. 일군의 왜적들은 등 위에 십여 개의 화살을 맞고서 거의 섬멸되었으며 장수 5명도 아울러 활을 쏴서 죽였는데, 화살에 맞고 벼랑에서 떨어진 자들은 너무 많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로잡힌 사람과 가축을 전부 도로 빼앗았으며 군 장비와 잡물도 아울러 획득하였습니다.참수하고 벤 왼쪽 귀 825개는 감봉(監封)하여 올려 보내며 말 118필은 각각 뺏은 사람에게 주었으며 환도는 빼앗은 군인들이 각자 차가 갔기 때문에 아직까지 미처 전부 추심(推尋)하지 못하였습니다. 깃대 20개, 갑옷 50벌, 투구 8벌, 창 16자루, 총통 26자루, 철환 646개, 화약통 15개 등의 물건은 보관하고 있습니다. 대개 전투에 지치고 날이 저물어 죽은 왜놈의 귀를 일일이 다 베지는 못하였는데, 화살을 맞고서 성으로 들어갔거나 산골짜기로 도망가 숨다가 죽은 자들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성안의 남은 적은 그 숫자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대부분 잔약한 자들이므로 내일이나 모래 사이에 일거에 탕진할 생각입니다.인심이 이반되어 흩어진 뒤에 비로소 이렇게 왜적을 격파하였으니 마땅히 등급을 나눠 공을 기록하여 군의 사기를 고무시켜야 하는데, 일이 아직 평정되기 전이라 먼저 작은 공로를 기록하여 조정에 아뢰는 것은 사체(事體)가 온당치 않으니, 장부에 모두 기록하였다가 일이 평정된 이후에 계문할 생각입니다. 다만 지금 계본(啓本)을 가지고 가는 경성의 유생 최배천(崔配天)은 맨 처음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힘을 다하여 노력하였을 뿐 아니라 이번에도 출전하기를 자원하여 왜적 한 놈의 목을 베었습니다. 포구 사이에 남은 왜적이 가득하여 공적이나 사적으로 왕래하는 동안 간혹 사로잡히기도 하여 사람들이 잘 다니려 하지 않는데, 스스로 활을 잘 쏘는 양민 이장춘(李長春)과 동의절 향교 종 억준(億俊)이 자원하기에 최배천과 함께 보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0년 임진년 11월 1일. 自臣入據鏡城之後, 會寧明川南北有叛, 坐守孤城, 未卽擧事爲白有如乎節, 兩逆授首, 六鎭徵兵, 稍稍來集爲白良沙。去十月二十一日, 潼關僉使李應星乙用良, 留鎭將差定, 率軍七百餘名, 使守鏡城爲白遣, 臣率軍千餘, 進住明川縣爲白乎如中, 吉州牧使鄭煕績·輸城察訪崔東望, 幷爲來會爲白齊。倭賊千餘段, 據吉州城內, 三百餘段, 在吉州南八十里嶺東地, 相爲往來, 聲勢相倚, 或十百爲羣, 樵採山谷, 或分兵四出, 殺掠村家, 恣意橫行, 略不顧忌爲白齊。臣與中衛將鍾城府使鄭見龍, 率鏡城以北軍千餘, 留明川抄出精兵四百, 分二道, 進屯古驂地, 設伏要路爲白遣, 左衛將高嶺僉使柳擎天乙用良, 領吉州軍千餘, 屯海汀, 以伺摽掠之賊爲白遣。右衛將慶源府使吳應台段, 率吉州兩里及西北堡土兵與本堡將, 據堡抄出精兵, 設伏洞口, 以斷樵採之路, 臣從事官前引儀土及第元忠恕段, 率精兵二百餘, 屯吉州北三十里阿間倉, 登山覘賊次, 同月三十日早朝, 倭賊可千餘名, 張旗出城, 向海汀加坡里爲白去乙, 同元忠恕, 亦卽卽馳報各處伏兵將爲白遣, 率其部下, 直要歸路次, 倭賊焚蕩村舍, 劫掠財畜, 虜其婦女, 午後回還爲白去乙, 元忠恕與賊接戰, 斬其先導兩賊, 倭賊北退爲白去乙, 乘勢追擊, 遇倭賊大軍, 令其步卒, 登山據險, 身率精銳捍後退保次, 古驂伏兵將防垣萬戶韓仁濟聞報, 卽時率諸將士三百餘騎, 馳往二息程, 與元忠恕合擊倭賊, 狃於屢勝, 以爲誰何, 先驅所掠卜駄, 向吉州。巨魁政丞稱號名直正者·監司稱號名都關汝文者及節度使稱號名不知將等五人, 率精勇軍四百餘名, 敢死突戰, 多放鐵丸爲白去乙, 左斥候將吾村權管具滉·右斥侯將安原權管姜文佑·別將玉連萬戶安沃·臣從事官造山萬戶印元忱·軍官慶源土及第黃嗣元·鍾城府使軍官土及第朴銀柱等, 各率所部, 一時突陣, 廝徒下卒, 無不鼓勇, 射矢如雨, 倭賊等, 皆下馬地鬪爲白如乎。猝遇突騎, 自申初至日昏, 兩軍出沒交兵, 力屈, 始爲登山北走爲白去乙, 適音左衛伏兵將斜卩洞權管高敬民, 亦率所部, 遮絶山上爲白遣, 我軍精勇, 左右夾馳, 直上峻山, 追至十餘里, 一賊背上矢中十數, 幾盡殲戮, 將帥五名, 幷爲射斬, 中箭墜崖, 不知其數。所擄人畜, 全數還奪, 軍裝雜物, 幷以獲得爲白齊。斬割左耳捌百貳拾伍箇段, 監封上送, 馬壹百拾捌匹段, 各授所奪人爲白遣, 環刀段, 亂軍各自佩持, 時未盡追爲白有齊。旗貳拾玖, 甲伍拾部, 胄捌部, 鎗拾陸柄, 銃筒貳拾陸柄, 鐵丸陸百肆拾陸箇, 藥桶拾伍箇等物段, 留上爲白在果。大槩酣戰日昏, 未能一一斬馘爲白良置, 中箭入城, 逃竄山谷以死者, 不知其數爲白齊。城中餘賊, 厥數不多叱分不喩, 率皆殘弱是如爲白乎等乙以, 來明日間, 一擧盡蕩計料爲白有旀, 人心叛散之餘, 始此破賊, 所當分等錄功, 聳動軍情是白乎矣, 事未畢定之前, 先錄小功以聞朝廷, 事體未安爲白乙仍于, 一一置簿, 事定後, 啓聞事, 妄料爲白有在果。惟只今去啓本陪持人鏡城儒生崔配天段, 當初倡義時, 始叱盡力周旋叱分不喩節段置, 自願赴戰, 斬馘一級爲白有旀, 浦港之間, 零賊充斥, 公私往來之際, 或被擒獲, 人不樂行乙仍于, 自募能射良人李長春·董義節校奴億俊乙, 幷爲發送爲白臥乎事是良厼。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年壬辰十一月初一日。 2식(二息) 식(息)은 거리의 단위이다. 1식은 30리를 말한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길주와 임명에서 왜적을 격파한 것과 육진의 역적을 찾아 목을 베고 오랑캐들에게 항복 받은 것에 대해 올린 장계 吉州臨溟破倭賊及六鎭叛黨搜誅藩胡招服狀啓 지난 해 11월 1일에 성첩(成貼)187)하여 올려 보냈던, 길주(吉州)에 주둔한 왜적과 접전을 벌여 목을 벤 사연을 적은 장계가 12월 9일에 행재소에 도달하여 접수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올해 정월 9일에 본도로 가지고 온 비변사에서 내려 보낸 다섯 통의 공문을 상고하였습니다.길주에 주둔한 왜적이 한번 패배한 뒤로는 견고한 성에 들어가 웅거하면서 머리를 움츠리고 나오지 않거늘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 등이 각자 부하를 거느려 모두 삼천여 명의 병사가 다시 찾아가 성을 포위하고서 종일 접전을 벌였습니다. 왜적 4백여 명이 성 위에 줄지어 서서 죽을힘을 다해 방비하므로 철환과 화살에 왜놈과 아군 모두 많은 병사가 부상을 당하니 빨리 함락할 형세가 아니었습니다. 이에 군사를 나눠 성 밖 2~3리 네댓 곳에 매복하고 밤낮으로 감시하면서 왜놈이 나오면 곧바로 죽이거나 사로잡으려 하였습니다. 세 위장은 모두 병사를 영동으로 옮겨 먼저 책문 안의 왜적을 섬멸한 뒤에 성 안의 왜적을 공격할 계획이었습니다.마침 군사를 옮기는 날, 영동(嶺東)의 왜적 사백여 명이 임명촌(臨溟村) 민가에 나와 불 지르고 노략질할 때 좌위장 유경천이 차정(差定)하여 보낸 복병장 길주 토병(土兵) 김국신(金國信)이 먼저 접전을 벌였으며, 한편으로는 대군에게 급히 통보하니 삼위장이 한꺼번에 그곳으로 돌진하였습니다. 육진의 정예병이 먼저 접전을 벌여 왜적이 패퇴하였는데, 삼위의 군사들이 활로 쏘거나 참수한 왜놈과 성 안에 남았다가 드나들 때 붙잡아 죽인 왜놈까지 모두 백여 급(級)으로, 왼쪽 귀를 함에 넣어 봉하고 군공을 모두 기록하여 장계하려고 하였습니다.그러던 차에 도순찰사(都巡察使) 윤탁연(尹卓然)이 저희들 마음대로 장계한다고 하여서 공문으로 추고(推考)하였습니다. 순찰사의 지휘를 낱낱이 거행하지 않았고 군중의 기밀도 때에 맞춰 보고하지 않았으며 북도 오랑캐의 난리도 또한 자세히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연달아 네 차례나 추고하였을 뿐 아니라,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병사들은 모두 길주 목사(吉州牧使) 정희적(鄭煕績)이 모집한 병사이며 공은 모두 사절동 권관(斜卩洞權管) 고경민(高敬民)의 공이라 하면서 '패군 장수 원충서(元忠恕)를 녹공(錄功)에 참여시키고 정희적과 고경민의 온전한 공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명천 현감(明川縣監) 장응상(張應祥)을 시켜서 평사(評事, 정문부)가 군기(軍機)를 그르친 것인양 다짐을 받아 올리도록 하였습니다.신은 나이가 어리며 어리석고 용렬한 백면서생으로 군사 일을 잘 알지 못할 분 아니라 문서 보고하는 절차에 대해서도 전혀 익숙하지 않습니다. 하루아침에 군무를 맡게 되었는데 일을 잘못 처리하여 중죄를 받게 되었으니 방황하며 근심하던 차에 순찰사의 공문에 '평사가 스스로 대장이라 칭하고 아울러 종사관을 거느리니 지극히 해괴하다.'라 하여 신의 대장직을 교체하고 회령 부사 정현룡으로써 대장을 바꾼다는 공문을 작년 11월 21일 성첩하여 보냈습니다. 이에 곧바로 체찰사의 지휘에 의하여 수하 장수와 병사 삼천여 명 모두를 정현룡에게 넘겨주고 신은 물러나 추고에 답하려고 하였는데, 북병사가 공문에 보내와 '평사는 육진(六鎭)을 순행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아울려 오랑캐를 진압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대장직에서 교체되었기에 감히 그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기에 군관과 휘하 50여 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육진을 순행하였습니다.경원(慶源)에 이르러 백성들을 효유하고 아울러 오랑캐들에게 음식을 보내 달랬습니다. 백성들은 왜적이 물밀 듯 밀고 올라올 처음에는 국가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면서 군민들이 그 수장을 내쫓고 드넓은 도로에서 약탈을 자행하며 서울에서 온 장수와 병사 및 피란 온 선비들을 간혹 붙잡아서 왜적에게 내주고 간혹 옷과 행장을 몽땅 빼앗았습니다. 신이 성에 들어온 뒤로 다른 관원들이 토착민들의 전날 악행을 낱낱이 들어 용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잃어버린 물건을 추심하는데 급급하니 민심이 불안하게 되었는데, 신은 '두 마음을 먹은[反側] 무리들을 진정시키는 처음에 이와 같은 행위는 적당한 방법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여 일절 금지하여도 왕의 권위를 빙자하여 이런 행위를 하니 금하여도 억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두 마음을 먹은 무리들은 의구심이 날로 깊어져 신이 회령(會寧)에 이를 때에는 본부(本府)의 백성들이 반적에 연루될까 두려워하여 반 이상이 도망가 버렸으니, 신이 임기응변의 말로 온화하게 효유하였으니, '이미 괴수는 죽였으니 위협에 의해 협조하던 이들은 다스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달래자 그제서야 차츰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경성과 온성(穩城)의 인심은 아직도 완전히 진정되지 않아 자못 의심을 가지고 주저하는 기색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경원 좌수(慶源座首) 정사기(鄭士麒)와 그 아우 사봉(士鳳)은 당초 왜적이 북쪽에 들어왔을 때 병사 이하 관군을 잡아서 왜적을 맞이하여 투항할 생각이었는데, 신이 경성에 들어가 장악한 이후로 여덟 차례나 징병령을 내렸지만 거역하고서 보내지 않았습니다. 백성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오랑캐 난을 방어하려고 길주에 진군한 부령 부사(富寧府使) 김범(金範)은 회령을 겸하여 다스리기에 회령으로 들여보냈고, 동관 첨사(潼關僉使) 이응성(李應星) · 유원 첨사(柔遠僉使) 이희량(李希良) · 훈융 첨사(訓戎僉使) 김자(金磁) · 온성 판관(穩城判官) 이눌(李訥) · 경원 판관(慶源判官) 오언량(吳彥良)은 본진(本鎭)으로 들여보내어 백성들과 오랑캐의 마음이 거의 진정되었습니다만, 정사기만은 도내의 거악(巨惡)으로 자신의 친족 무리를 군노사령(軍奴使令)으로 많이 심어놓으니 판관들도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신이 본부(本府)에 이르러 정사기와 사봉 및 그 당의 괴수 경흥 토병 최송(崔松)을 행영(行營)에 잡아와서 모두 참수하고서 효수하였습니다. 종성 통사(鍾城通事) 안억수(安億壽)는 전부터 변방 오랑캐들에게 토색질을 하였으며 왜란이 일어난 뒤에 나라에 기강이 없음을 틈타 온갖 물건을 토색질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는데, 통사의 눈앞에서도 오랑캐가 고한 말을 변조하여 거짓으로 전하였습니다. 신이 그 기색이 거짓되고 비밀스러움을 보고서 직접 중추하량개(中樞下良介)를 불러들여 우리나라 말로 문답을 하였는데, '육진이 왜변이 일어난 뒤 토병의 토색질로 변방의 근심을 빚어낸 것은 대개 다 비슷한데, 그 가운데서도 안억수는 가장 심하다.'고 하거늘 곧바로 참수하여 조리 돌림하여 일벌백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하량개란 놈도 흉측하기가 헤아리기 어려운 오랑캐라 우리나라 사람을 나쁘게 이야기하는데 여러 오랑캐가 보는 앞이라 경솔하게 처형하는 것은 아마도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 같아서 곧바로 칼을 씌워 부령부(富寧府)로 옮겨 가두고 순찰사의 처분을 기다렸습니다.오랑캐의 정세를 말씀드리자면, 회령 관내는 당시 배반하는 정황이 없으며, 경성의 오랑캐는 밖으로는 친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소원하니 그들의 하는 바를 헤아리기 어렵지만 또한 분명하게 도적질하는 일은 없으며, 온성의 오랑캐는 애초 왜변 때부터 우리나라와 인접해 있으면서도 흩어져 지내는 우리 백성을 한 명도 노략하지 않았을 뿐더러 판관이 진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다른 오랑캐들이 노략질한 사람과 물건을 먼저 돌려보내니 대단히 가상합니다. 신이 본부(本府)에 이르니 다른 진(鎭)의 예에 의거하여 술과 고기를 보내고 소금과 장을 주는 이외에 별도로 공이 있는 오랑캐를 따로 불러서 한 상 물러주어 술을 주고 소금과 장을 더 주면서 왜적을 모두 평정한 후에는 상과 벼슬을 서울에 가서 각각 특별히 시행할 것으로 이치를 들어 타일렀습니다.경원은 두두족(頭頭族) 추장 10여 명이 이따금 와서 고하며 우리나라에게 복종할 것처럼 거짓 꾸며 보이지만, 부내(府內)의 여러 오랑캐들은 모두 이미 우리나라를 배반하여 잠깐 귀순하는 척 왔다가 곧바로 떠나 함께 도적질을 하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분명합니다. 신이 북으로 갔을 때 타이르는 명령을 듣기 위해 왔었던 추장과 학생 도합 이백여 명은 우리 쪽에서 불러서 왔을 뿐 아니라 저들도 부름에 응하여 귀순한 것이므로 숨은 악행을 들춰내서 죄를 다스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전례에 의거하여 음식과 물품을 주고서 효유하기를 '도적질하는 오랑캐가 너희들이 사는 곳에서부터 침입해 올 경우 나라에서 죄를 물을 때 너희들도 함께 화를 입을 염려가 있으니 본분을 잘 지키며 상황을 보고하는 일을 각별히 유념하라.'라고 엄한 말로 타일렀습니다.경흥은 서수라일보(西水羅一堡)의 첩입군(疊入軍)과 조산보(造山堡)의 흩어진 백성과 토병을 함덕후(咸德厚)가 거느려 성을 시키고 있는데, 도둑질하는 오랑캐들이 네 번이나 성을 포위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을 뿐 아니라 도적 오랑캐의 부락 한 곳을 빈틈을 타서 불태웠습니다. 고립된 군대가 자신의 지역을 넘어 장수가 명령을 내지 않았는데도 이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은 비록 온당함에 어긋나는 것 같지만, 조그마한 외로운 성이 큰 도둑에 의해 길이 끊어져 제 때 지휘를 받기 어려운 상황인데 성을 온전히 보호하고 왜적을 무찔러 군기(群機)를 잃지 않았으니 실로 가상한 일이 일이기에 함덕후를 정장(定將)으로 삼고 회령 해창(海倉)에 있는 쌀 1백 석을 그쪽의 보(堡)로 운반하여 성을 지키는 군량미로 쓰게 하였습니다.경흥부와 그 관내인 조산(造山), 무이(撫夷), 아오지(阿吾地)와 경원 관내인 건원(乾元), 아사보(阿山堡)는 애초부터 지키지 못하여 도적질하는 오랑캐들이 마음대로 분탕질하고 거침없이 왕래하여 도둑들이 다니는 길이 되어버렸으니, 간혹 경흥의 바닷가에서 혹은 경원 지역에서 들어와서 활개를 치고 다니며 도둑질을 하여 산골의 사람과 가축을 노략질하니 대단히 분통이 터집니다. 그러나 육진의 정예병 2백여 명은 길주(吉州)에 나아가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게다가 왜적이 침입하여 마구간이 텅 비어버려 전날 말달리며 활 쏘던 군사가 지금은 말이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전투 기물[軍器]도 왜놈들에게 모두 불타버려 장전(長箭)과 편전(片箭)을 묶어 횃불로 사용할 정도입니다. 피난한 백성들 가운데 활과 화살을 지닌 자는 모두 왜적에게 죽음을 당하였으며 민간의 전투 기물도 거의 묻혀 섞어 버렸으므로 성에 웅거하며 방어하는 것도 오히려 힘에 부치는 상황이니 먼 곳까지 추격하는 것은 형편상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에 촌에 사는 백성들 모두에게 성안으로 들어오라고 통보하여 노략질 당함을 면하게 하였습니다.길주의 왜적의 세력이 이윽고 사그라지고 육진의 오랑캐의 난리가 점차 거세지므로 부득이하게 왜적과 싸우던 여러 장수 가운데 간간이 뽑아 들여보냈는데, 각 그 진장(鎭將)이 정예병을 뽑아 거느려서 요충지에 매복하여 횡행하는 길목을 끊어버렸습니다. 대개 북도는 길이 대단히 멀고 눈얼음이 쌓인 지역으로 순찰사가 있는 곳까지 10여 일이 걸리는데, 군중의 기무(機務)는 하루에도 수없이 변화하니 한결같이 지휘에 의해서 시행한다면 아마도 임기응변하는 병가(兵家)의 도리가 아닌 듯 하기에 그 간의 급한 일은 간혹 순찰사에게 통보하지 않고 시행하고서 후에 문서로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순찰사의 지휘에 '대장을 교체하여 도망병을 잡는 장수로 정했으니, 마천령과 단천 등지에서 군관을 거느리고 나아가서 도망한 병졸을 체포하라.'라 하였습니다. 신이 하찮은 작은 관리로 조그마한 공도 없이 문득 당상관에 오르니 임금의 은혜가 망극하여 어떻게 은혜를 갚고 죽어야 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피를 칼날에 바르고도 사양하지 않았는데, 다만 지금 길주와 영동을 아직 소탕하기 전이라 북쪽으로 도망간 우리 병사가 남쪽을 향하여 도망갈 이치는 없을 듯 하기에 일단 군중에 머물고 있습니다.신이 지난해 11월 21일 대장에서 교체되었을 때 12월 14일자로 보낸 비변사의 이문(移文)에 '평사는 바야흐로 대장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동안 날짜가 24일이나 지났는데 순찰사가 저의 죄를 청하는 장계가 당시에 행재소에 도달하지 않았는데 그 일이 의심스럽습니다. 회령 부사 정현룡은 대장이 된 지 한 달도 못되어 겸절도사로 교체하여서 육진을 순행하게 하고 다시 경원 부사 오응태를 대장으로 삼았으며, 신은 다만 북병사의 지휘에 의하여 제 마음대로 북쪽을 순시하였다고 추고하였습니다. 각 진의 장수로 예를 들면 무산 만호(茂山萬戶) 이난(李蘭) 등 무려 수십 명은 각자 본진(本鎭)의 토병(土兵)을 이끌고 와서 왜적을 토벌함에 참여하고서 순찰사에게 처음부터 계속해서 이름을 기록하여 보고하였는데, 각 보와 진의 장수를 거의 다 교체하여 간혹 한 진과 보의 장수에 2~3 사람을 거듭 임명하여 장수들도 자신의 본래 임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되고 병졸들도 자신의 장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군정(軍情)은 흔들리고 사기는 땅에 떨어졌어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하기에 대단히 염려가 되어 조정에 보고하려고 하였으나 제 마음대로 장계를 올린다고 죄를 얻을까 염려되어 감히 아뢰지 못하고 있던 가운데, 전에 올린 장계를 돌려보내는 사연과 및 비변사에서 보낸 다섯 통의 공문에 감히 답하지 않을 수 없어 1등의 군공을 세운 지방 사람으로 급제한 차응린(車應轔)이 자원하기에 전례에 의거하여 바닷길로 장계를 올립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1년 계사년 정월 12일. 前年十一月初一日, 成貼爲白在, 吉州留倭接戰斬馘辭緣書狀, 十二月初九日得達行在所受到付, 及備邊司啓下成貼關五度, 今年正月初九日, 齎還本道爲白有去乙, 相考爲白乎矣。吉州留賊一敗之後, 入據堅城, 縮頭不出爲白去乙, 鍾城府使鄭見龍·慶源府使吳應台·高嶺僉使柳擎天, 各率所部, 合兵三千餘, 再度圍城, 終日接戰爲白乎矣。倭賊四百餘名, 列立城頭, 抵死防備, 鐵丸射矢, 彼我俱傷, 勢難猝拔乙仍于, 分兵設伏城外數里許四五處, 晝夜候伺, 出則勦捕爲白乎旀, 三衛將幷以移兵嶺東, 先滅柵內之賊, 次及城中之寇計料爲白如乎。適音移兵之日, 嶺東倭賊四百餘名, 出來臨溟村舍, 焚蕩擄掠之際, 左衛將柳擎天, 定送爲白在伏兵將吉州土兵金國信, 爲先接戰爲旀, 一邊以馳報大軍爲白良在乙, 三衛一時馳突其中, 六鎭精兵爲先接刃, 倭賊敗奔, 三衛射斬及城中留賊出沒時捕斬, 合百餘級, 左耳函封, 軍功幷以磨鍊狀啓計料次, 都巡察使尹卓然, 亦擅自狀啓是如, 出公緘推考爲白乎旀, 巡察使節制一一擧行不冬, 軍中機務趁不馳報, 北道胡亂, 亦不這這馳報是如, 連四度推考叱分不喩, 某條以傳聞爲白乎喩, 兵皆吉州牧使鄭煕績召募之兵, 功皆斜卩洞權管高敬民之功是去乙, '敗軍將元忠恕, 亦參錄功, 鄭煕績·高敬民, 不以專功上聞'是如, 明川縣監張應祥乙用良, 評事失誤軍機樣, 以捧侤音, 上使亦爲白臥乎在亦。臣以年少迷劣白面書生, 不閑軍旅叱分不喩, 文報間曲折, 專不閒習爲白如可, 一朝臨戎, 誤蒙重罪爲白乎去, 彷徨悶迫之際, 巡察使節制內, '評事自稱大將, 兼率從事官, 至爲駭怪'是如, 遆臣大將之任, 會寧府使鄭見龍乙用良, 改定大將關子, 前年十一月二十一日, 成貼到付爲白良在乙, 卽依巡察使節制, 專以手下將士三千餘名, 鄭見龍處交付, 臣段, 退答推考爲白如乎, 北兵使節制內, '評事亦巡行六鎭, 鎭定人心, 兼鎭虜情'亦爲白有去乙, 臣已遆大將之任, 不敢不從乙仍于, 率軍官及麾下五十餘人, 北行六鎭。至慶源, 曉諭人民, 兼饋藩胡爲白乎矣。人心段, 當初倭賊長驅之時, 不復知有國家, 軍民逐其守將, 衢路恣行攘奪, 京來將士及避亂士人等, 或被捉致倭賊, 或被赤脫衣裝爲白有如可, 自臣入城之後, 歷擧土人前日過惡, 使無所容叱分不喩, 急於推得失物, 因致人心不安爲白去乙, 臣以謂'鎭定反側之初, 如此擧措, 甚非事宜'是如, 一切痛禁爲白如乎節段, 憑藉王靈, 禁不能抑, 反側之輩, 疑懼日深, 至於臣到會寧之日, 本府人民, 恐爲叛賊連累, 太半逃走爲白有去乙, 臣以權辭溫諭, 諭以'已殲巨魁, 罔治脅從之意'爲白良沙, 稍稍還集爲白乎旀。鍾城穩城人心段置, 亦未翕然鎭定, 頗有持疑顧望之端叱分不喩, 慶源座首鄭士麒及其弟士鳳段, 當初倭賊入北之時, 謀捉兵使以下欲爲迎降之計爲白如可, 臣入據鏡城之後, 八度徵兵, 拒逆不送爲白乎旀, 人心虜變鎭定防禦次, 以吉州赴戰爲白如乎, 富寧府使金範段, 會寧兼官, 以入送會寧爲白遣, 潼關僉使李應星·柔遠僉使李希良·訓戎僉使金磁·穩城判官李訥·慶源判官吳彥良, 入送本鎭爲白乎矣, 人心虜情, 太半鎭定, 而鄭士麒耳亦, 道內巨惡, 以多植族黨奴使, 判官莫敢措手爲白去乙, 臣到本府, 捉致士麒士鳳及其黨魁慶興土兵崔松于行營, 幷只斬首梟示爲白遣, 鍾城通事安億壽段, 自前始叱侵虐藩胡爲白如乎節, 倭變之後, 國無紀律爲白乎去, 向入侵徵雜物, 無所不至爲白乎矣, 眼前通事, 以胡人告訴乙, 變詐誣傳爲白去乙, 臣觀其氣色詭秘, 親引中樞下良介, 問答以我國言語爲白乎矣, '六鎭倭變之後, 土兵侵虐, 釀成邊患, 大槩同然, 其中安億壽爲甚'是如爲白去乙, 卽欲斬徇, 懲一勵百爲白乎矣, 唯只下良介段置, 桀驁難側5)之胡, 以來訴我人爲白去等, 諸胡所見處, 輕易行刑, 恐妨國體爲白乎去, 卽加枷杻, 移囚富寧府, 以待巡察使處置爲白有齊。虜情段, 會寧所管, 時無叛狀, 鍾城段, 外親內疎, 所爲叵測爲白良置, 亦無顯然作賊之事, 穩城段, 當初倭變時, 始叱接置我國, 散民一不擄掠叱分不喩, 判官還鎭聞奇, 他胡所掠人物乙, 爲先刷還, 極爲可嘉爲白乎等以。臣到本府, 依他鎭例, 饋酒肉給塩斗外, 別引有功胡人, 退床饋酒, 加給塩斗, 諭以倭賊盡平之後, 賞職上京, 各別施行, 亦擧理開喩爲白有齊。慶源段, 頭頭酋長十餘人, 間間進告, 佯示向國之狀爲白良置, 府境諸胡, 皆已叛國乙仍于, 乍去乍來, 同心作賊, 判然無疑爲白乎矣。臣北行時, 開喩聽令次以來到爲在, 酋長學生幷二百餘名段, 自我招來叱分不喩, 彼亦應招歸順爲白有去等, 摘發隱惡, 治罪不當乙仍于, 依前饋贈, 喩以'賊胡, 自汝等所居處, 由入爲在如中, 國家問罪之時, 恐有俱焚之患, 守護進告等事, 各別盡心,' 亦嚴辭開喩爲白有齊。慶興段, 西水羅一堡疊入, 造山散民土兵, 咸德厚領率守城, 賊胡四度圍城, 不勝退兵叱分不喩, 賊胡部落一處乙, 乘虛焚蕩爲白有臥乎所。孤軍越境, 不出將令, 如此擧措, 雖似乖當, 叢爾孤城, 大盜隔絶, 勢未能及期節制事良中, 全城斬賊, 不失軍機, 實爲可嘉乙仍于, 同咸德厚, 因爲定將, 會寧海倉, 運米一百石, 輸送本堡, 使爲城守之粮爲白有齊。慶興府及所管造山·撫夷·阿吾地, 慶源所管乾元·阿山堡段, 自初不守, 賊胡恣意焚蕩, 往來不忌, 因爲賊路, 或自慶興海汀, 或自慶源地境入來, 橫行作賊, 擄掠山谷人畜, 極爲痛憤爲白良置, 六鎭精兵二百餘名, 至吉州赴戰, 加以倭寇之餘, 馬羣一空, 前日馳射之士, 今爲無馬之軍叱分不喩, 軍器段置, 盡爲倭人焚蕩, 至以長片箭, 束作火炬爲白乎旀, 避亂人民等持弓箭者, 盡爲倭賊殺戮乙仍于, 民間軍器, 幾盡埋置腐敗爲白乎等以, 據城防禦, 猶患不足, 涉遠追擊, 事勢極難乙仍于, 村居人民全數, 知委疊入城內, 俾免虜掠之患爲白如乎節段。吉州倭勢已縮, 六鎭胡亂漸熾, 不得已赴戰諸將中, 間間入送, 各其鎭將抄率精兵, 要路伏兵, 以絶橫行之路爲白有齊。大槩北道, 亦道理絶遠, 氷雪積塞之地, 距巡察使所在處, 十餘日程是白去等, 軍中機務, 一日萬變, 一依節制施行爲白在如中, 恐非兵家制變之道乙仍于, 其間急務段, 或有不報巡察使施行, 從後牒報爲白如乎節段, 巡察使節制內, '大將遆改, 捕亡將定體, 磨天嶺及端川等地, 率軍官進駐, 捕捉亡卒'亦爲白有在果。臣以幺麽小官, 未有寸功, 遽陞堂上, 天恩罔極, 尤不知死所。蹀血鋒刃, 有所不辭是白在果, 唯只吉州嶺東未掃蕩前段, 我軍北地亡卒, 似無逃向南關之理乙仍于, 先可留住軍中爲白有齊。臣以去年十一月二十一日, 遆大將爲白在如中, 十二月十四日, 備邊司移文內, '評事方行主將之令'是如爲白有臥乎所, 其間日數二十四日之久是白去等, 巡察使請罪狀啓, 時未達行在爲白有臥乎喩, 事涉可疑爲白乎旀, 會寧府使鄭見龍段置, 爲大將未滿一月, 遆易以兼節度使, 巡行六鎭爲白遣, 更以慶源府使吳應台, 爲大將, 臣段只據北兵使節制, 任意北巡是如, 推考爲白乎旀, 各鎭將如茂山萬戶李蘭等, 無慮數十人, 各率本鎭土兵, 來會討賊事乙, 巡察使處當初始叱再再, 名錄牒報爲白有矣, 各堡鎭將乙, 幾盡遆易, 或一鎭堡將, 疊差二三人, 使將不知本任, 卒不知其將, 軍情搖漾, 士氣怠惰, 未知其由, 至爲悶慮, 欲報稟朝廷爲白良置, 擅自狀啓是如, 獲罪弦如, 不敢以聞爲白有如乎節, 前狀啓回送辭緣及備邊司關子五度, 不敢不答乙仍于, 自募軍功一等土及第車應轔乙用良, 依前由海路狀啓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正月十二日。 성첩(成貼) 문서에 서압을 하고 관인을 찍어서 마무리하는 일. 또는 그 완성된 문서를 가리킨다. 側은 測의 오자인 듯하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온성, 종성, 행영 세 진의 복병이 도적질하는 오랑캐를 격파하여 패주시킨 것과 육진의 정병을 불러서 본도에서도 다른 도의 예에 의하여 과거 시행할 것을 청하는 장계 穩城鍾城行營三鎭伏兵擊走賊胡及請徵還六鎭精兵本道依他道設科狀啓 지난해 12월 13일 순찰사(巡察使)의 지휘에 의거하여 대장에서 교체된 뒤에 또다시 북병사의 지휘를 받아 육진(六鎭)을 순행하여 흩어진 백성들을 안정시켜 모으고 오랑캐를 진정시키기 위해 경원(慶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종성의 경내에 있는 부계리(浮溪里)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 마을은 사통오달이라 도적질하는 오랑캐들의 요충지가 됩니다. 이에 온성(穩城), 종성(鍾城), 행영(行營) 세 진의 군사 각 50명을 뽑아 이곳에 매복시켜 적을 맞아 치게 하였습니다.온성 판관(穩城判官) 이눌(李訥)의 첩정에 '절해(節該).188) 세 진의 군사 각 오십 명을 평사의 지휘에 의하여 세 곳에 나누어 매복시켰는데, 정월 7일에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오랑캐들이 온성의 군사가 매복한 곳을 포위하여 공격하였습니다. 많은 오랑캐를 쏘아 죽이고 승전을 타서 추격하였는데, 토병(土兵) 박언주(朴彥柱)와 오득침(吳得沈)은 각각 한 명의 목을 베었습니다. 안장을 갖춘 오랑캐 말 두 필과 오랑캐의 활 한 장, 화살 아홉 개, 비단 칼집 한 부 등을 모두 도(道)에 올렸으며, 고을의 통사(通事) 도막동(都莫同)은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라 하였습니다. 위의 말들은 빼앗은 사람에게 주고 활과 화살, 기타 잡물은 경성영(鏡城營)에 올리고 오랑캐 머리 두 급(級)은 감봉(監封)하여 올립니다.행영과 종성의 복병장들의 보고에 '같은 날 도적질하는 오랑캐 백여 명이 매복한 곳에 쳐들어와 접전을 벌였는데, 행영과 종성 두 군대가 힘을 합쳐 추격하여 많은 오랑캐를 쏴 죽이고 오랑캐들이 붙잡아 가던 남녀 모두 33명, 말 한 필, 부(釜)와 정(鼎) 각각 두 개 등을 다시 되찾았으며, 전날 사로잡혀 갔던 역자(驛子) 박세정(朴世貞), 김억수(金億壽)는 오랑캐들과 뜻을 함께 하여 변복하고서 오랑캐가 되었다가 오랑캐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난 뒤에 사로잡아 경성부에 가두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위의 복병장 토병 이운로(李雲老)와 종성의 복병장으로 왜적을 토벌한 군공이 일등인 지방 사람 급제 강언수(姜彥壽)는 행영복병장(行營伏兵將)으로서 왜적을 토벌하러 의병을 일으킬 때 제일 먼저 호응한 공로로 공명고신(空名告身)의 안릉 참봉(安陵參奉)에 임명하였습니다. 신형(辛衡) 등은 그 당시 추격하여 혹은 오랑캐의 목을 베거나 혹은 우리 사람을 되찾아오는 공을 세웠으니 조정에서 명단을 마련하여 계획하여 시행해 주십시오.○ 순찰사가 신을 대장에서 교체한 후 회령 부사(會寧府使) 정현룡(鄭見龍)을 대신 대장으로 삼았다가 지난해 12월 그믐 무렵에 정현룡을 겸절도사로 전임시켜서 육진(六鎭)을 순시하게 하고 다시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를 대장으로 교체하였습니다. 올해 정월 13일에 도착한 순찰사의 관문(關文)에서 '오응태 대장을 교체하고 예전대로 평사를 대장으로 다시 정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달 10일에 도착한 전 대장 오응태의 첩정(牒呈)에서 '겸절도사 정현룡이 대장에서 교체되고 북으로 들어갈 때 육진의 정예병 백여 명을 모두 거느리고 돌아갔다.'라고 하였습니다. 절도사는 왜적을 토벌한 정병은 자기가 통솔하는 부하라고 하면서 자신 마음대로 거느리고 가서 보내주지 않는데, 요즘 날씨가 따뜻해져서 왜적의 기세가 점차 드세지는 때가 되니 왜적을 토벌하는 일이 대단히 염려스럽습니다. 이에 신은 관문을 통하여 그에게 병사를 요청하겠거니와 조정에서도 각별히 사목(事目)을 내려주고 그 숫자에 의거하여 징병할 수 있도록 방어사로 불리는 정현룡에게 분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또 요즘 듣자하니, 팔도 가운데 남도에서는 이미 과거를 보았다고 하는데 유독 북도에서는 아직도 과거를 시행하지 않으니 백성들을 고무시키는 의도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순찰사도 계청하지 않는 일을 보잘 것 없는 작은 관리가 계청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도내의 의병을 일으키는데 앞장서서 한 사람으로 경성의 전 훈도(訓導) 이붕수(李鵬壽), 좌수(座首) 서수(徐遂), 이기수(李麒壽), 경성으로 정배되었다가 풀려난 전 도사(都事) 나덕명(羅德明), 부령 좌수(富寧座首) 김전(金銓) 등이 있는 힘을 다해 분주히 노력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을 효유하였으니, 지금에 이르러 그 일이 성공한 것은 실로 그들의 공에 힘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전날 상을 논할 때 과거 공부한 유생과 내금위에게만 내렸으므로 억울한 것 같기에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경성 판관에 송안정(宋安廷)을 임명하였다고 하는데, 어느 곳에 머물고 있는지 아직도 부임하지 않고 있습니다. 본부(本府)도 또한 도회처라 적을 토벌하는 여러 도구를 장만하는데 유진 가장(留鎭假將) 전 감찰(監察) 오명수(吳命壽)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니 송안정을 재촉하여 부임하라고 하거나 조정에서 따로 처리하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1년 계사년 정월 16일. -아마도 같은 조목 아래 묶인 하나의 장계가 아닌 듯하다.- 前年十二月十三日, 巡察使節制, 據遆大將後, 又以北兵使節制, 巡行六鎭, 安集散民, 鎭定虜情次以行到慶源, 還由鍾城境浮溪里爲白如乎, 同里亦四通五達, 賊路要衝之地是白去乙, 穩城·鍾城·行營三鎭軍, 各抄五十名, 同處伏兵, 要擊亦爲白有如乎節。穩城判官李訥牒呈內, '節該三鎭軍各五十名, 依評事節制, 分三處設伏爲白有如乎, 正月初七日, 胡賊不知其數, 穩城軍伏兵處, 圍犯爲去乙, 多數射中, 勝戰追擊, 土兵朴彥柱·吳得沈, 各斬一級, 胡馬具鞍二匹, 胡弓一張, 胡矢九箇, 入羅鞱一部, 幷以上道爲旀, 府通事都莫同段, 逢箭身死'是如爲白有去乙, 同馬匹段, 所奪人還給, 弓矢雜物段, 鏡城營上, 胡馘二級段, 監封上送爲白齊。行營及鍾城伏兵將馳報內, '同日賊胡百餘名, 伏兵處來犯接戰, 兩軍同力追擊, 多數射中, 賊胡擄去爲如乎男女幷三十三名, 馬一匹, 釜鼎各二等物, 還奪爲旀, 前日被擄驛子朴世貞·金億壽段, 胡賊同心, 變服爲胡爲有如可, 賊胡不勝退兵時生擒, 鍾城府囚禁'是如, 馳報爲白有齊。上項伏兵將土兵李雲老, 鍾城伏兵將討倭軍功一等土及第姜彥壽, 行營伏兵將討倭倡義時, 爲先響應功, 以安陵參奉空名告身良中, 塡差爲白有在。辛衡等登時追擊, 或斬胡馘, 或奪我人之功乙良, 朝廷以磨鍊施行爲白只爲。○ 自臣遆大將後, 會寧府使鄭見龍乙用良, 代爲大將爲白有如可, 前年十二月晦間, 鄭見龍差兼節度使, 巡行六鎭亦爲白遣, 更以慶源府使吳應台, 改定大將爲白有如乎。今年正月十三日, 到付爲白在, 巡察使關內, 吳應台大將遆改, 依前評事, 以還定大將亦爲白臥乎在亦, 本月初十日, 到付爲白在, 前大將吳應台牒呈內, '兼節度使鄭見龍遆將入北之時, 盡率六鎭精兵百餘名入歸'是如爲有臥乎, 節度使稱云, 討倭精兵乙, 自己所率是如, 任意率去, 不爲出送爲白在如中, 當此日氣向暖, 倭勢漸張之時, 討賊之事, 極爲可慮爲白昆, 臣段置, 通關徵兵爲良音可爲白在果, 朝廷以各別授事目依數徵兵事, 防禦使稱號爲白在鄭見龍處下送爲白乎去望良白乎旀節。仄聞爲白乎矣, 入道南道, 至亦已爲科擧是如爲白去等, 獨此北道未得赴擧, 似乖聳動之本意爲白良置, 巡察使不爲啓請處置事良中, 幺麽小官, 啓請爲難爲白齊。道內倡義首人鏡城居前訓導李鵬壽·座首徐遂·李麒壽·鏡城定配蒙宥前都事羅德明·富寧座首金銓等, 極力奔走, 曉喩愚頑, 到今擧事, 實賴其功, 前日論賞之時, 擧業儒生內, 禁衛差下, 似爲冤悶, 不敢不聞爲白乎旀。鏡城判官段置, 宋安廷差下是如爲白乎矣, 某處留在爲白有臥乎喩, 迄未赴任, 本府亦都會大處, 以討賊諸具太半辦出爲白去等, 留鎭假將前監察吳命壽叱分, 以策應齟齬爲白昆, 同宋安廷乙, 催促赴任敎是去乃, 朝廷以別樣處置爲白乎去望良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正月十六日【疑非一啓繫圈下】 절해(節該) 문건이나 어떤 사람의 말을 전문 그대로 옮기지 않고 그 요지만 간추려 기재할 경우에 쓰는 용어이다. 《이문집람(吏文集覽)》에 의하면, 성지(聖旨)와 공문서에는 반드시 첫마디에 '절해(節該)'라는 두 글자를 덧붙이는데, 이는 곧 '그 구절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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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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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단천에서 왜적을 격파한 사연과 군기시 최동망과 이성길을 종사관에 임명해 주기를 청하는 장계 端川破倭賊緣由及請軍器崔東望李成吉從事官差定狀啓 지난해 12월에 신이 북으로 육진(六鎭)을 순행하고 올해 정월 13일에 길주(吉州)로 돌아오던 차에 경성(鏡城) 주촌(朱村) 도중에서 순찰사의 관자(關子)를 받아보니, 신을 다시 대장으로 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길주성 밖 10여 리에 있는 우위장(右衛將) 한인제(韓仁濟)의 군중으로 나아가 장수와 병졸들을 호궤(犒饋)하고 이달 18일에 본주(本州) 다신리(多信里)에 나아가 좌위장(左衛將) 유경천(柳擎天)과 중위장(中衛將) 오응태(吳應台)가 거느리는 장수와 병사들을 호궤하였습니다. 그리고 본처(本處)에 머무르면서 길성(吉城)과 영동(嶺東) 두 곳의 상황을 보고서 대응하려고 하였는데,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이 직접 군중에 와서 말하기를 '단천에 남아 있는 왜적이 제멋대로 횡포한 짓을 하여도 군사가 모두 보병이라 겁을 먹고서 지레 궤멸되어 손을 쓸 수가 없으니 기병과 사병(射兵)을 나눠 주십시오.'라 하며 간곡히 청하였습니다.길주는 군사를 두 곳으로 나눠 왜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군사를 다른 도로 옮기는 것은 형세상 좋지 않기에 이전부터 여러 장수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아직 출병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길주 두 곳의 왜적은 기세가 꺾여 머리를 움츠리고 있으니 강한 아군을 그대로 쉬게 하면서 한 나라 한 도의 왜적을 토벌하지 않는다면 사리로 보아 마땅하지 않습니다. 이에 즉시 정예 기병 이백 명을 뽑아 네 부대로 나눠 1대장은 구황(具滉), 2대장은 박은주(朴銀柱), 3대장은 인원침(印元), 4대장은 고경민(高敬民)을 나눠 정하고서 각각 50명을 거느리게 하였습니다. 이달 20일에 다신리를 출발하여 산길을 따라 22일 단천(端川)에 이르렀습니다.다음날 아침에 네 부대는 성 밖 이십 리 쯤에 매복하고 단천의 군사 30명으로 성 밖 5리까지 나아가 싸움을 걸게 하였습니다. 성안에 남아 있던 왜적이 연승에 자만하여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백여 명이 한꺼번에 성에서 나와 곧바로 단천의 군사를 추격하니, 거짓으로 패한 양 도망칠 적에 피곤한 말에 탔던 병사가 왜적에게 죽음을 당하자 왜적은 또다시 기세를 올리며 멀리까지 추격하여 곧바로 매복한 곳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에 네 부대의 복병이 한꺼번에 돌진하여 혹은 그 앞을 막고 혹은 그 중간을 자르며 혹은 그 뒤를 끊어 화살을 빗발치듯 쏘아댔습니다. 왜적들은 돌격하는 기병을 갑자기 만나 다급하여 어찌할 줄 몰라 철통을 마구 쏘아댔지만 모두 헛쏘기만 하고 맞히지 못하였으며, 달아나기에 여념이 없어 감히 대항하지 못하였습니다. 성 밑까지 추격하여 거의 모두 활을 쏴서 죽였으며, 살아남은 자는 겨우 30여 명으로 그들도 모두 화살에 맞아 성으로 들어갔습니다.대개 죽인 왜적의 숫자는 적어도 백여 명에서 내리지 않을 것인데 북도의 군사들은 기병이라 오로지 말을 타고 활을 쏘기 때문에 일일이 목을 베지는 못하였습니다. 이십여 리에 걸쳐 싸우는 동안 단천의 보병이 뒤를 따라오면서 귀와 목을 수습하였다고 하는데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네 부대가 죽인 것을 말하자면, 1대는 왼쪽 귀 21개, 2대는 14개, 3대는 15개, 4대는 11개로 모두 61개이니, 감봉하여 위로 올렸습니다.이달 19일 길주성 밖의 복병장(伏兵將) 원충서(元忠恕)의 보고에 '왜적 백여 명이 남문 밖 1리쯤에 나와 주둔하고 있는데, 왜장 한 명이 말 두 마리를 모는 두 부하를 데리고 남쪽으로 나와 2리쯤 가서 말을 모는 두 명의 왜놈을 뒤에 남겨두고 홀로 말을 타고 3리쯤 갔습니다. 이에 제가 또한 직접 정예 기병 십여 명을 이끌고 잠복하여 망을 보다가 한꺼번에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니 적장이 깜짝 놀라 말을 제어하지 못하다가 떨어졌습니다. 이에 제가 활로 쏴서 맞히고 종성의 갑사(甲士) 신수(申守)가 그 목을 베었습니다. 왜적 보병 한 명은 화살에 맞고 거꾸러졌는데 문 밖의 여러 왜놈들이 부축하고 성으로 들어가 목을 베지 못하였습니다. 적장의 왼쪽 귀를 잘라 또한 감봉하여 올려 보내며, 그가 입었던 비단 옷 3건, 환도 1자루, 비단 안장, 가죽 안장, 말은 접전을 벌여 공을 세운 사람에게 상은 논하여 나눠 주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길주 목사(吉州牧使) 정희적(鄭煕績)의 첩정에 '고을 백성의 사노비 사랑금(思郞金)이 왜적 목 하나를 베어 바쳤으며, 복병군인 절노비 윤희(尹煕)도 또한 목 하나를 베었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원충서의 보고에 '부령 정로위(定虜衛) 차덕홍(車德弘)이 목 하나를 베었습니다.'라고 하니, 모두 4개의 목을 올려 보내니 도합 65개의 목을 베었습니다. 무릇 이것은 왜적을 격파한 자잘한 일이라서 낱낱이 공을 기록하여 계문하지만, 벼슬과 상은 한계가 있고 왜놈의 귀는 한정이 없으니 조정에서 은혜 베풀 때 난처함이 있을 것이라 스스로 생각하였기에 전날 가부와 임명 두 곳에서의 전공은 모두 기록하여 계문하지 않았습니다.신이 대장에서 교체된 후로 회령 부사(會寧府使) 정현룡(鄭見龍)이 저를 대신하여 장수가 되었을 때 순찰사의 공문에 의거하여 모두 등급을 나눠 순찰사에게 첩보(牒報)하였으므로, 이번 단천의 전공을 아뢰지 않았다면 다만 전례를 어기며 사졸들의 희망을 어그러트리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천견으로 마음대로 억누른 것이니 또한 온당치 않기에 전례에 따라 전공을 기록하여 보고합니다. 빼앗은 물건은 또한 기록하여 계문할 것인데, 군수품이 다 떨어진 상황에서 군의 상품으로 내려 주려고 올려 보내지 못하니 대단히 황공합니다. 그 가운데 왜총통은 전날 비변사의 공문에 의거하여 파괴된 것 20개를 이미 올려 보냈으며, 이번에 뺏은 20개도 뒤미처 올려 보내겠습니다.본도의 군기가 탕진되어 조처하기에 급급한데, 그 중에서도 부레풀, 활시울, 화살꼭지가 가장 절실합니다만 장만할 방법이 없어 대단히 걱정되오니 조정에서 조치하여 내려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수많은 군마와 병무(兵務)가 번거로운데 용렬한 낮은 관리가 오로지 문서를 맡으니 걸핏하면 일이 어그러집니다.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망(崔東望)과 군자 직장(軍資直長) 겸성균관 권지학유(兼成均權知學諭) 이성길(李成吉)이 바야흐로 군중에 있으므로 종사관(從事官)의 칭호를 주고 문서를 맡게 할 생각이오나 보잘 것 없는 신으로서 나이가 많이 차이 나지 않는 동렬의 문관을 막좌로 임용하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하기에 감히 마음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문서를 지니고 가는 사람은 경성으로 귀양 온 진무(鎭撫) 김귀겸(金貴謙)으로 의병을 일으킨 처음부터 자원, 종군하여 칼날 아래서 접전을 벌여 군공을 참록(參錄)된 자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1년 계사년 정월 27일. 前年十二月分, 臣北行六鎭, 今年正月十三日, 回還吉州次, 以在鏡城朱村道中, 得巡察使關子, 以臣還定大將爲白有去乙, 進到吉州城外十餘里許右衛將韓仁濟軍中, 餉勞將士, 本月十八日, 進到本州多信里, 餉勞左衛將柳擎天·中衛將吳應台所率將士, 因爲留駐本處, 欲爲吉城嶺東兩處相機策應爲白如乎, 端川郡守姜燦親到軍中言內, '端川留賊, 恣意橫行爲良置, 兵皆步卒, 怯懶先潰, 下手不得, 分軍馳射,' 亦懇懇說道爲白齊。吉州段, 置兩處分兵, 與賊相持, 移兵他道, 勢似非便乙仍于, 自前諸將論議不一, 未果出兵爲白有如乎節, 思量爲白乎矣, 吉州兩賊, 勢挫縮頭爲白有去等, 坐休強兵, 不討一國一道之賊, 事理乖當爲白乎去。卽抄精兵二百騎, 分四隊, 一隊將具滉, 二隊將朴銀柱, 三隊將印元忱, 四隊將高敬民, 岐如定體, 各率五十名, 同月二十日, 多信里離發, 由山路, 二十二日到端川, 昱朝四隊藏兵於城外二十里許, 使端川軍三十名, 進次城外五里許, 挑戰爲白乎矣。城中留賊狃於屢勝, 略不顧忌, 二百餘名, 一時出城, 直追端軍爲白去乙, 佯敗還走之際, 疲馬之卒, 爲賊所殺, 賊又乘勝遠追, 直至伏處爲白去乙, 四隊伏兵, 一時突出, 或遮其前, 或截其腰, 或斷其後, 射矢如雨爲白乎矣。倭賊猝遇突騎, 倉皇失措, 多放鐵筒爲白良置, 皆爲虛放不中, 奔走無暇, 莫敢相抗。追至城底, 幾盡射斬, 僅餘三十餘名, 箇箇中箭入城爲白齊。大槩殺賊之數, 少不下百餘名是白良置, 北軍騎兵, 專以騎射, 未得一一斬馘, 轉戰二十餘里, 端川步卒, 從後拾得耳級是如爲白良置, 未知厥數幾何是白在果, 四隊所斬段, 一隊左耳二十一, 二隊十四, 三隊十五, 四隊十一, 合六十一箇, 監封上送爲白齊。本月十九日, 吉州城外, 伏兵將元忠恕馳報內, '倭賊百餘名, 南門外一里許出屯, 有一倭將, 挾兩倭雙牽馬, 向南出來, 至二里許, 牽馬二倭乙, 落後隱置, 單騎至三里許爲有去乙, 同元忠恕, 亦親率精騎十餘名, 潛伏伺候爲白有如可, 一時高聲突出, 賊將蒼黃不能制馬, 因爲墜落爲白去乙, 元忠恕射中, 鍾城甲士申守斬頭, 步倭一名中箭顚仆爲白有去乙, 門外諸倭, 扶曳入城, 斬頭不得, 同賊將左耳割取, 亦爲監封上送爲白乎旀, 所着錦衣三件, 環刀一柄, 錦鞍甲鞍馬段, 接戰有功人, 論賞分給'爲白有旀, 吉州牧使鄭煕績牒呈內, '州民私奴思郞金, 斬納一級, 伏兵軍寺奴尹煕, 亦斬一級,' 又元忠恕馳報內, '富寧定虜衛車德弘, 斬一級,' 合四耳, 亦爲上送, 都合六十五級是白齊。凡此些少破賊事良中, 一一錄功啓聞爲白在果, 爵賞有限, 倭耳無窮, 朝廷施報有所難處爲白乎去, 私自妄料乙仍于, 前日加夫臨溟兩處戰功乙, 皆不錄啓爲白有去乎。臣遆大將之後會寧府使鄭見龍代將時, 巡察使關據幷只分等, 巡察使處牒報是如爲白去等, 今此端川戰功, 不爲上聞爲白在如中, 非徒有乖前規, 士卒缺望, 一己淺見, 擅自沮抑, 亦爲未安乙仍于, 依例錄功報聞爲白齊。所奪物件, 亦爲錄啓爲白良置, 當此軍需板蕩之時, 軍賞用下次以上送不得, 極爲惶恐, 其中倭銃筒段, 前日備邊司關據破件二十箇, 已爲上送爲白有如乎節, 所奪二十箇, 追于上送爲白齊。本道軍器蕩盡, 措備急急, 魚膠弓絃弓箭帽最關爲白乎矣, 辦出無路, 極爲悶慮, 朝廷以措置下送爲白乎去望良白乎旀。許多軍馬戎務似煩, 迷劣下吏專掌文書, 事多乖錯弦如, 輸城察訪崔東望·軍資直長兼成均權知學諭李成吉, 方在軍中爲白乎等以, 從事官稱號帶率文書次知, 亦計料爲白良置, 臣以幺麽幕下之官, 不少同列文官乙, 任爲幕佐, 事甚乖當, 不敢擅便爲白乎旀。書狀陪持人段, 鏡城定配人鎭撫金貴謙, 當初倡義時, 自募從軍, 接戰鋒刃, 參錄軍功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正月二十七日。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왜적의 대군과 백탑교에서 전투를 벌여 왜적을 퇴각시킨 것에 대한 장계 與倭賊大軍戰白塔郊及倭賊退走狀啓 단천(端川)의 왜적을 토벌하고 사로잡기 위하여 네 개의 부대로 나누어 장수를 정해 보내니, 훈련 정(訓鍊正) 구황(具滉) 등이 밤새도록 내달려갔습니다. 정월 27일 길주(吉州)로 돌아와 보고하기를 '남도의 왜적 천여 명이 이미 마천령(磨天嶺)을 넘었습니다.'라고 하니, 신이 즉시 삼위(三衛)의 병사를 거느리고 길주의 임명(臨溟) 지역에 주둔하여 정예기병 6백 명을 뽑아 매복하고서 대기하였습니다. 그 왜적이 영동(嶺東)에 머물던 왜적과 합세하여 28일 이른 아침부터 임명 들판을 가득 채워 길주를 향해 들어오므로, 복병장 훈련정 구황, 첨정(僉正) 박은주(朴銀柱), 첨사(僉使) 강문우(姜文佑), 판관(判官) 인원침(印元忱), 고경민(高敬民), 정로위(定虜衛) 김국신(金國信) 등이 각각 부하들을 거느리고 뒤를 공격하여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에 삼위는 앞을 차단하고 허리를 자르며 전진하고 후퇴하면서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접전을 벌이면서 60여 리를 추격하였습니다.훈련 판관(訓鍊判官) 원충서(元忠恕)는 길주성 밖 20리 정도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또한 돌격하여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피차간에 화살과 철환을 쏘아대는 바람에 짧은 무기로 접전을 벌이지 못하고 다만 경기병으로 추격하여 넓은 지역에서는 양쪽에서 공격하고 좁은 지역에서는 꼬리를 공격하였습니다. 종사관(從事官) 학유(學諭) 이성길(李成)에게 전령을 보내 적의 진영까지 추격하여 싸움을 독려하게 하니, 왜적과 10여 보의 거리에서 종일토록 내달리고 쏘아 흐르는 피가 길을 가득 덮었으며 화살에 맞고 죽은 자는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는데 왜적들이 시체를 싣고 가버렸으므로 낱낱이 귀를 베지 못하였습니다.대개 본도의 군민들이 왜적들의 위세에 겁을 내고 있다가 갑자기 대적을 만나니 대부분 주저하는 마음을 품고 감히 대들어 결전을 벌이지 못하였다가 적으로 하여금 성에 들어오게 하니 대단히 분통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날 단천 군수(端川郡守)의 편지에 '왜적 이천여 명이 또 이성(利城)에 이르렀습니다.'라 하니, 먼저 온 적들과 영동, 길주의 왜적과 합세하면 이만여 명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것인데, 또한 이성의 이천 명이 이어서 온다면 왜적의 계략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깊이 아군 지역에 쳐들어와 독을 퍼트릴 근심이 없지 않습니다. 이에 삼위군이 서로 모여 약속하였으니, 중위와 좌위는 명천(明川)에 웅거하고 우위는 서북보(西北堡)를 지키며, 길주 목사는 좌위(左衛)에서 정예가 아닌 병사를 골라서 다신창(多信倉)의 곡식을 바다의 섬으로 옮기고, 신은 휘하 백여 명을 거느려 경성으로 들어가 민심을 진정시켜 성을 지킬 계획을 세웠습니다.중위와 우위에서 거느리는 군사들은 각각 위장을 따라 진영에 왔는데, 좌위군은 모두 길주의 군사들로서 목사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다고 핑계를 대고서 바다의 섬으로 들어갔으므로 좌위장은 겨우 척후병 및 좌부 모두 백여 명을 거느리고 명천으로 향해 들어가 버렸습니다. 여러 해 전투에 참여하여 이미 관군이 되었지만 한번 대적을 만나면 성 지키는 것을 회피하고 난을 피해 살아보려고 꾀를 내는데, 민심이 이와 같으니 대단히 한심스럽습니다.왜적들이 혈전을 벌이다가 성에 들어가서 시체를 거두어 관청에 쌓아놓고 그 시체를 불태웠으며, 다음날은 성안의 관청과 민가를 모두 불태우고서 밤을 틈타 몰래 달아나버렸습니다. 이에 우위장(右衛將) 우후(虞候) 한인제(韓仁濟)가 병사를 거느리고 내달려가서 곧바로 성안에 들어가 불을 끄니, 성안에 남았던 곡식은 태반이 온전하게 되었습니다.삼위장이 한꺼번에 추격하여 영동에 이르렀는데, 왜적들은 밥을 지어 먹을 시간도 없이 주야로 다급하게 달아나 남쪽을 향하여 돌아갔으므로 쫓아갔으나 공격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왜적이 물러간 뒤에 응당 다급하게 추격하여 밤낮이나 원근을 가리지 말고 적이 간 곳까지 뒤를 밟아 공격하는 것이 옳은 일이지만, 다만 정예병들이 단천(端川)을 오가면서 이틀 길을 하루에 달리는 통에 말에게 꼴도 먹이지 못하고 종일 고단하게 전투를 벌여 사람과 말이 지치고 피곤하여 걸음을 뗄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추격은 하루에 백오십리를 가야 하는데 마천대령을 넘을 수 없을뿐더러 단천 이남은 왜적이 이전부터 마음대로 횡행하여 민가와 곡식과 마초들이 모두 타 버리고 텅 비어서 병사들은 의지할 곳이 없고 말은 먹을 풀이 없는데, 미리 준비하지 않고 경솔하게 넘어갔다가는 중대한 행군 중에 졸지에 나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는 상황을 만나 굶주림만 겪게 될 것입니다.단천 군수에게 이문(移文)을 보내 꼴과 군량의 준비 여부를 물어보려 하오며, 한편으로는 북절(北卩)의 상선으로 군량과 꼴을 운반하고 정예병을 뽑아 남쪽으로 향하려고 생각합니다. 다만 왜적이 남쪽으로 급히 달아나 철령(鐵嶺)에 이르렀는데, 북도 군마의 양식과 꼴을 마련할 길이 없게 되면 형세가 끝까지 추격하기 어려울 것이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찌하면 좋겠습니까.신이 북도에 있을 때는 북병사(北兵使)가 그 당시 아직 그 지방에 오지 않았으므로 임시로 주장(主將)의 일을 맡았지만 요즘은 북병사가 남도에 있거늘 막하관이 마음대로 도내의 군마를 거느리는 것은 사체가 대단히 어그러진 것이므로 거느린 군마를 병사에게 이관할 생각입니다.28일에 전사한 자로, 주을온 만호(朱乙溫萬戶) 이희당(李希唐)은 온 힘을 다해 죽기로 싸우다가 날이 저물 무렵에 탄환에 맞아 죽었습니다. 경성에 거처하는 전 훈도(訓導) 이붕수(李鵬壽)는 처음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임무를 수행하고 적진에 드나들면서 그 허실을 정탐하였는데,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자원하여 앞장서다가 탄환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 밖에 사졸로 죽은 자는 25명이 됩니다. 왜적은 9명의 목을 베었으니 감봉하여 올려 보내오며, 말 15필을 빼앗았습니다. 화살에 맞아 죽은 시체를 싣고 성에 들어가 버린 것과 관청에서 불태운 시체는 무려 백여 명이 되나, 귀를 베어 올려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1년 계사년 2월 2일. 端川倭賊勦捕次, 以分四隊, 定將起送爲白有如乎, 訓鍊正具滉等達夜奔馳, 正月二十七日, 還到吉州言內, '南道倭賊千餘名, 已越磨天嶺'是如爲白去乙, 臣卽領三衛兵, 屯駐吉州臨溟地, 抄發精騎六百, 伏兵待候乎白有如乎。同倭賊嶺東留倭合勢, 二十八日早朝, 始叱瀰滿臨溟野中, 入向吉州爲白去乙, 伏兵將訓鍊正具滉·僉正朴銀柱·僉使姜文佑·判官印元忱·高敬民·定虜衛金國信, 各率所部, 尾擊接戰, 三衛段, 遮前截腰, 進退接戰, 自辰初至酉時, 追至六十餘里。訓鍊判官元忠恕段, 吉州城外二十里許, 伏兵爲白有如可, 亦爲突出接戰, 射矢鐵丸, 彼我俱發爲白乎等以, 未得短兵相接, 只以輕騎馳逐, 地廣則挾擊, 地窄則尾擊。從事官學諭李成吉給傳令, 迫至賊陣, 使之督戰, 與賊相距十數步, 終日馳射, 流血滿道, 中箭死者不知其數爲白良置, 倭賊載屍而去乙仍于, 未得一一斬馘爲白齊。大槩本道軍民, 爲倭賊積威所劫, 猝遇大賊, 多懷自沮, 不敢交雜快戰乙仍于, 使賊入城, 極爲痛憤爲白乎旀。同日端川郡守簡通內, '倭賊二千餘名, 又到利城'是如爲有去等, 先來之賊, 與嶺東吉州相合, 少不下二萬餘名, 又有利城二千繼至爲白在如中, 賊謀難測, 不無深入肆毒之患弦如, 三衛相會約束, 中衛左衛段, 據明川, 右衛段, 守西北堡, 吉州牧使段, 除出左衛不精軍, 移轉多信倉穀于海島, 臣段, 率麾下百餘名, 入向鏡城, 欲爲鎭定城守之計爲白如乎。中衛右衛所率軍段, 各隨衛將來到陣所, 左衛軍段, 皆是吉州軍是白乎等以, 托稱與牧使起義兵盡入海島乙仍于, 左衛將, 亦僅率斥候及左部幷百餘名, 入向明川爲白臥乎在亦, 經年赴戰, 已爲官軍爲白有如可, 一遇大賊, 謀避城守便生避亂之計, 民心如此, 極爲寒心爲白齊。倭賊等血戰入城, 收取死者, 積置官廳, 燒其屍身, 翌日, 盡燒城內公私廨, 乘夜潛遁爲白去乙, 右衛將虞候韓仁濟, 領軍馳到, 卽入城內, 滅火爲白乎矣。城中留穀, 太半全在爲白齊。三衛將一時追擊, 到嶺東爲白乎矣, 倭賊等晝夜奔忙, 不暇炊食, 南向出歸爲白乎等以, 追不及擊爲白齊。賊退之後, 所當急急追擊, 勿論晝夜遠近, 尾到賊到處爲白良音可爲白乎矣, 惟只精兵等往來端川, 倍日幷行之際, 不得秣馬, 盡日苦戰, 人極馬疲, 不能運步。又此追擊, 日行百五十里爲白有去等, 磨天大嶺, 末由踰越叱分不喩, 端川以南段, 倭賊自前恣意橫行, 閭家穀草, 焚蕩一空, 軍無依接之處, 馬無喂飼之草, 不爲預備, 輕自越去爲白有如可, 軍行大事, 猝未進退, 坐見饑乏弦如。端川郡守處移文, 蒭粮準備與否。探聽爲白乎旀, 一邊以北卩尙船輸運粮草, 選精兵南向計料爲白在果, 惟只倭賊急於南走, 至於鐵嶺爲白在如中, 北道軍馬糧草辦出無路事良中, 勢難窮追, 未知何如爲白乎旀。臣在北道時段, 北兵使時未到界乙仍于, 權行主將之事爲白如乎節, 北兵使在南道爲白有去等, 幕下之官, 擅率道內軍馬, 事體甚乖爲白乎等以, 所率軍馬乙, 移屬兵使計料爲白齊。二十八日戰亡人段, 朱乙溫萬戶李希唐, 極力死鬪, 日暮時, 中鐵丸身死, 鏡城居前訓導李鵬壽, 自初倡義時, 盡誠奔走, 出入賊中, 窺覘虛實, 忘身徇國爲白有如可節, 奮願先登, 中鐵丸身死, 其餘士卒死者, 二十五名是白遣, 倭賊段, 斬馘九級, 監封上送爲白乎旀, 奪馬十五匹爲白有齊。中箭載屍入城, 官廳燒屍段, 無慮百餘名是白良置, 割耳上送不得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二月初二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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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왜적이 물러간 뒤에 장수와 사졸들의 군공단자를 작성한 장계 倭賊退走後將士軍功磨鍊狀啓 정월 28일 남도(南道)의 왜적이 영동(嶺東)의 왜적과 합세하여 길주(吉州)를 향해 들어올 즈음에 임명(臨溟)의 들판에서부터 길주성 아래까지 종일 접전을 벌여 무수하게 쏘아 죽였으니 힘써 싸운 장수와 사졸들은 마땅히 군공을 마련하여 등급을 나누어 계문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다만 통쾌하게 싸워 큰 승리를 이루지 못하여 적으로 하여금 성에 들어가게 하고서 결국 밤에 달아나게 하였으며 전투 내내 귀를 벤 왜놈이 겨우 9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왜놈들이 수레에 싣고 가거나 불에 태워버렸으니, 9명의 귀를 벤 것만으로 공을 논하여 보고하는 것은 실로 온당치 않기에 왜놈의 목을 벤 사람은 등급을 나누어 나열하여 기록하지만 신은 형틀에 엎드려 죄를 기다립니다.만일 이 왜적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곧바로 남쪽을 향할 경우에 단천(端川) 이남 지역은 민가가 전부 불타고 없어서 군사와 말은 길에서 자야하므로 꼴과 군량은 준비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니, 차근차근 조치를 취하여야 비로소 행군할 수 있습니다. 이 지역 안의 왜적을 내쫓았는데도 그대로 앉아 추격하지 못하니 대단히 분통이 터져 간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본도는 여러 해 동안 왜적의 소굴이 되어 남자는 전투에 참여하고 노약자는 물자는 운송하는 일을 맡았으니 장차 절로 쓰러져 죽을 염려가 있지만, 군민이 모두 왜적과 함께 살아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유생들에 이르러서도 징발한 일이 없지만 또한 애초부터 자원하여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기까지 하였습니다. 조정의 사목(事目)에 '자원한 사람들의 공을 논함에 차등을 두어야 한다.'라고 하였으므로 자원한 각각의 사람을 책으로 만들고 각자의 이름 아래 공을 논하여 올려 보냅니다.지방 사람인 급제 안원 권관(安原權管) 강문우(姜文佑)는 의병을 처음 일으킬 때부터 공이 으뜸이었을 뿐 아니라 여러 차례 전투에 참여하여 앞장서서 힘을 다하여 큰 공을 세웠습니다. 지난해 11월 7일 하비(下批)189)하여 건공 장군(建功將軍) 미전 첨사(美錢僉使)로 임명하여 보냈다가 12월 8일에 또다시 창신 교위 훈련 판관(彰信校尉訓鍊判官)으로 계급을 낮춰 임명하였는데,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어 감히 아뢰니 대단히 황공합니다.장계를 받들고 가는 사람은 주부(主簿) 최배천(崔配天)으로 당초 창의와 군공으로 상직(賞職)을 받은 자인데, 두 번째 받들고 갈 것을 자원하였을 뿐 아니라 남쪽 왜적이 들어왔을 때에도 종일 힘써 싸웠기에 대단히 가상합니다. 그의 바람에 의해 두 번 보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1년 계사년 2월 3일. 正月二十八日, 南道倭賊與嶺東合勢, 入向吉州之際, 自臨溟野至吉州城底, 終日接戰, 無數射殺, 力戰將士, 所當軍功磨鍊, 分等啓聞事是白在果, 惟只未能快戰大捷, 使賊入城, 致有夜遁, 終始所斬只有九級, 餘皆載屍火燒爲白有去等, 斬馘九級叱分以, 論功上報, 實爲未安乙仍于, 所斬人叱分分等除良, 列書磨鍊, 臣段, 伏鑕待罪爲白乎旀。萬一此賊, 不分晝夜, 直向南路爲白在如中, 端川以南段, 一路人家全數焚蕩, 軍馬露宿是白乎乙去爲白在果, 蒭粮準備極難, 次次措置爲白良沙, 始爲行軍事是白去等, 出送境內之賊, 安坐不追, 極爲痛憤, 肝膽如裂爲白齊。本道經年爲盜賊之窟, 男丁赴戰, 老弱轉輸, 將有自斃之患是白良置, 軍民皆知不可與賊俱生乙仍于, 儒生等至亦徵發隅無, 亦當初始叱自募赴戰, 至於立功爲白有去等, 朝廷事目內, '自募人等論功有差'亦爲白乎等以, 自募各人等乙成冊, 各其名下論功上送爲白乎旀。土及第安原權管姜文佑, 自初倡義首功叱分不喩, 累次赴戰, 極力先登, 輒有大功爲白有如乎節。前年十一月初七日, 下批建功將軍美錢僉使差送, 十二月初八日, 又差彰信校尉訓鍊判官降資除受爲白有臥乎所, 未知其由, 敢此報稟, 極爲惶恐爲白齊。 狀啓陪持人段, 主簿崔配天, 當初倡義及軍功賞職, 以再次自願陪持叱分不喩節, 南倭入來時段置, 終日力戰至爲可嘉乙仍于, 依願再送爲白有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二月初三日。 하비(下批) 삼망(三望)을 갖추지 않고 한 사람만 상주하여 임명하는 것을 이른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순영 첩보 계사 2월 19일에 부침 巡營牒報【附癸巳二月十九日】 병마평사(兵馬評事)가 상고할 일입니다. 이달 17일에 도착한 단천(端川)의 왜적을 목 벤 장계의 사연을 첩보한 서목(書目)을 돌려 보내온 내용에 '평사가 11월 19일 패전한 뒤로 북으로 순행하려면 즉 병사(兵使)의 지휘를 순수히 받아야 하는데 귀를 베어 바칠 때 병사가 아직 그 지역에 오지 않았다고 하여 배척하여 쫓아버리고서 그 사이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 것과 또한 정월 28일 이후의 패배는 대장의 지휘가 아닌가에 대해 또한 수로를 통하여 장계할 것을 상고하여 보고할 것이다. 한 나라의 군대로 한 나라의 적을 토벌하는데 있어서 단천의 왜적을 토벌하는 군대는 실로 평사가 사사로이 여길 것이 아니거늘, 단천에도 또한 수로가 있으니 단천에서 얻은 적의 귀는 단천 군수도 장계를 올릴 수 있는데 전부 뺏어가서 자신의 공으로 삼았으니, 이는 자못 공로를 자랑하지 않는다는 군자의 행동이라 할 수 없다. 한백겸(韓伯謙)을 토포장으로 정한 차첩(差帖)을 급히 거두어 먼저 올려 보낼 것이다. 각사(各社)의 성책도 비변사의 관자(關子)을 등사하여 보낸 지 오래되었으므로 급속히 시행할 것이며, 왜말을 챙겨 보내라는 말은 우연히 한 것이 아니니 다시 상고하여 길주에서 포획한 왜말은 각 이름 아래 어떤 말은 누구누구에게 주고 어떤 말은 어떤 사또에게 올렸는지 하나하나 기록하여 속히 보고하라고 회송한다.'고 하였습니다.상고하건대, 11월 19일에는 평사가 명천(明川)에 있으면서 중위장(中衛將) 정현룡(鄭見龍), 좌위장(左衛將) 유경천(柳擎天), 우위장(右衛將) 오응태(吳應台)를 삼위(三衛)로 나누어 영동(嶺東)의 관창(館倉)으로 보내 포위하고서 영동책을 함락시켰는데 군졸들이 여러 차례 전투에서 이긴 것에 우쭐 거려 경솔하게 전진하다가 탄환을 맞아 죽거나 다치게 되었을 뿐 특별히 패주한 일을 없었으며, 가령 패배함으로 죄를 받는다면 일도(一道)의 명장 정현룡이 먼저 죄를 받을 것입니다. 귀를 베어 바치는 장계에 대해서는 팔도에서 병사를 일으킨 삭발승까지도 또한 곧바로 장계하여도 조정에서 금지하는 일은 없는데 평사는 귀를 바치는 장계를 조정에 직접 올리면 죽을죄에 빠진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정월 28일의 일도 남쪽 지방의 전례에 의거하면 경치나 구경하면서 보내주었다면 병졸 한 명도 다치지 않았을 것인데 평사는 옳지 않은 자신의 판단으로 접전을 벌여 피차간에 모두 부상한 병사가 나왔으니 특별히 패군한 일은 없었지만 또한 죽음을 무릅쓰고 장계를 올렸습니다. 단천의 남아 있던 왜적을 무찌를 때는 단천 사람이 실로 앞장서서 목을 베었으므로 구태여 북도의 군사 청하지 않았으며, 또한 각자가 벤 귀를 그대로 각자가 가지고 갔으므로 단천 군수에게 귀를 가져가지 못하였으며, 또한 남이 벤 귀를 빼앗아 자신의 공으로 삼는 것은 종기를 빨고 치질을 핥는 자190)들도 차마 하지 않는 일이거늘 평사가 비록 못났을망정 훤한 대낮에 감히 이런 일은 못할 것입니다.한백겸(韓伯謙)을 토포장(討捕將)으로 차첩한 것에 대하자면, 다만 눈으로 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실로 귀로도 듣지 못하였으므로 올려 보낼 수 없었습니다. 각사(各社)의 성책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하나 재촉하였지만 각 관원이 때에 맞춰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왜적의 말을 빼앗은 수는 무려 수백 마리나 되는데 숨겨두고 보여주지 않으니 일일이 찾을 수도 없으며, 장부에 기록한 백여 필의 말도 간혹 군공이라 하여 그 말을 빼앗은 이에게 영영 주어버렸습니다. 서 좌랑이 전한 말은 이전에도 알 수 없다고 이미 첩보하였습니다.대개 종사는 황폐해지고 임금은 몽진을 떠났는데, 신하된 자가 조금이라도 공리의 마음을 지니고서 왜적 토벌하는 것을 급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비록 사람의 재앙은 면할지라도 반드시 하늘의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이에 온 마음으로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왜적을 토벌하는 이외에 세상 인간사의 곡절은 돌아볼 겨를이 없이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 실행하여야 하는데, 타인의 모함을 받아 끝내 무거운 죄에 빠지게 되었으니, 참소하는 간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어두운 벽 사이에서 낄낄거리며 웃게 하는 것은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겸도순찰사에게 보고합니다. 兵馬評事爲相考事。本月十七日, 到付端川倭賊斬馘啓聞辭緣牒報書目回送內, ' 事亦十一月十九日見敗之後, 欲爲北巡, 則順受兵使節制, 而獻馘之時, 兵使乙未到界是如, 斥而黜之, 使不得與聞於其間爲旀。正月二十八日之後敗, 則非大將節制是喩, 亦爲水路狀啓爲喩, 相考馳報爲旀, 以一國之軍, 討一國之賊爲在如中, 端川討賊之兵, 實非評事私物之見處者是去等, 端川亦有水路, 端川所獲之馘乙, 端川郡守, 亦可狀啓是去乙, 全數奪去, 以爲己功爲有臥乎所, 殊非不伐君子之所爲是齊。韓伯謙討捕將定體差帖乙良置, 急速收取, 爲先上使爲齊, 各社成冊段置, 備邊司關子乙, 謄送已久爲有昆, 急速施行爲旀, 責送倭馬之說, 必非偶然是昆, 更良相考, 吉州所獲倭馬, 各名之下, 某馬段, 某某人許給, 某馬段, 某使道上使是如, 一一懸錄, 斯速牒報向事爲等如良置, 回送是置'有亦。相考爲乎矣, 十一月十九日段, 評事在明川, 中衛將鄭見龍·左衛將柳擎天·右衛將吳應台, 分三衛, 發送嶺東館倉, 圍抱拔柵亦爲乎矣, 軍卒等狃於累勝, 輕進逢丸, 仍致死傷叱分是遣, 別無敗走之事爲旀, 假說以敗受罪爲良置, 一道名將鄭見龍爲先受罪事是旀, 獻馘狀啓事段, 八道起兵削髮僧人至亦亦爲直啓, 別無朝廷禁斷事良中, 評事耳亦直啓獻馘, 仍陷死罪爲乎乙所知不得爲旀, 正月二十八日段置, 依南關例, 觀光致送爲在如中, 不傷一卒是乎事是去乙, 評事段妄意接戰乙仍于, 彼此俱傷, 別無敗軍之事乙仍于, 亦爲昧死狀啓爲有旀, 端川留賊勦捕時段置, 端川人實爲先登斬馘爲在如中, 不必請來北軍事是旀, 各人所斬乙, 仍各持歸乙仍于, 端川郡守處, 耳級乙進排不得爲旀, 奪人所斬, 以爲己功事段, 吮癰舐痔者之所不忍是去等, 評事雖無狀, 白日之下, 不敢爲此事爲旀, 韓伯謙討捕將差帖段, 非但目所不見, 實爲耳亦不聞乙仍于, 上使不得爲旀, 各社成冊段, 件件催促, 各官時未牒報爲有旀, 倭馬所奪數段, 無慮數百是良置, 隱匿不現, 一一搜覓不得, 置簿爲在百餘匹內, 或以軍功永給所奪人叱分是遣, 徐佐郞傳言段, 自前始叱知不得是如, 已爲牒報爲有齊。大槩宗社爲墟, 乘輿蒙塵, 爲臣子者少有功利之心, 不以討賊爲急爲在如中, 雖免人禍, 必有天殃乙仍于, 一心討賊外, 世情人事間曲折乙, 有不暇顧, 直行不疑爲如乎節, 爲人所搆, 終陷重律, 使讒奸之輩, 狸笑於暗壁之間爲乎乙可, 至爲悶慮爲臥乎事是良旀。牒報兼都巡察使。 종기를……자 《논어》 〈양화(陽貨)〉에 "비루한 자들과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부귀를 얻기 전에는 얻으려고 안달하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 걱정하니, 참으로 잃을까 걱정한다면 못 하는 짓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朱子)의 주(註)에 "작게는 등창을 빨고 치질을 핥는 것과 크게는 아비와 임금을 시해하는 것이 모두 부귀를 잃을까 걱정하는 데서 생길 뿐이다.[小則吮癰舐痔 大則弑父與君 皆生於患失而已]"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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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4 卷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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