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49212건입니다.

정렬갯수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찬 贊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족계권후찬 族禊券後贊 씨족을 고찰해보건대김씨의 조상은 금천이라아 훌륭하도다 우리 종조성스러운 조선에서 기원했네사향으로 이주하여지금까지 아홉 세대 전했네군자의 은택이 끊어지고선대의 가업1)이 실추되니효성과 화목이 있지 않다면어찌 선조를 계승하랴이제부터 시작해서그 계통을 새롭게 하고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답고형은 형답고 아우는 아우다 우리세대가 멀어져도 정은 친밀하고복은 다해도2) 뜻은 굳게 맺어영강이 띠처럼 가늘어지고금악이 숫돌처럼 닳도록3)대대로 준수하며공경히 복행하여 폐하지 말라 稽古氏族。 金祖金天。 於休我宗。 紀自聖鮮。 粤徙姒鄕。 世九今傳。 澤斬君子。 業墜靑氈。 不有孝睦。 何用承先。 式自此始。 維新厥係。 父父子子。 兄兄弟弟。 世疏情密。 服盡意締。 靈江若帶。 錦岳如礪。 世世遵守。 敬服無替。 가업 원문의 '청전(靑氈)'으로, 본디 푸른 모포를 말하는데, 가업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누워 있는 방에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모조리 훔쳐 가려 할 때, 그가 "도둑이여, 그 푸른 모포는 우리 집안의 유물이니, 그것만은 두고 가는 것이 좋겠다.[偸兒, 靑氈我家舊物, 可特置之.]" 하자, 도둑이 도망쳤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王羲之列傳》 복은 다해도[服盡] 5대조가 같은 사람의 상사(喪事)에는 간단하게 단문(袒免)차림으로 애도를 표시함으로써 동성(同姓)의 관계가 멀어진 것을 뜻하는데, 그 범위를 벗어나면 친족관계가 없어져 복(服)이 다했다고 말한다. 영강이……닳도록 장구한 세월을 말한다. '영강(靈江)'은 전라도 나주(羅州)를 지나는 영산강(榮山江)을, '금악(錦岳)'은 나주의 금성산(錦城山)을 가리킨다.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한 뒤 공신들을 봉작(封爵)하면서 맹세하기를, "황하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도록 나라를 영원히 보존하여 이에 후손에 미치게 하겠다.[使河如帶, 泰山若礪, 國以永寧, 爰及苗裔.]"라고 하였다. 《史記 高祖功臣侯者年表》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농포집(農圃集) 고서-집부-별집류 문집 국역 農圃集 鄭文孚 농포집(農圃集) 1 미상 미상 임란 의병 정문부(鄭文孚, 1565~1624)의 시와 산문을 엮어 1708년에 간행한 시문집.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서 敍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경성 유생이 순찰사 민공에게 올리는 글 鏡城儒生呈巡察使閔公書 경성에 사는 전 찰방(察訪) 박흥종(朴興宗) 등이 삼가 목욕재계하고서 합하에게 백 번 절하며 글을 올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흉적을 제거하고 난리를 평정하는 것은 신하의 대의이고 충렬을 드러내고 정려하는 것은 국가의 아름다운 은전입니다. 그런데 만일 한 때 무고를 당해 흉적이 이미 제거되고 난이 이미 평정되었으나 대의가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구천에서 원망을 안고 있는데 충렬이 드러나고 정려되지 않아 아름다운 은전이 영원히 베풀어 지지 않고 있으니, 이에 인인(仁人)과 군자가 길이 탄식하고 깊이 슬퍼하면서 반드시 밝게 드날린 이후에야 그만두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순상(巡相) 합하께서 평사(評事) 합하와 서로 의논하여 고 평사 정문부(鄭文孚) 공을 위해 본부(本府) 어란리(禦亂里)에 사당을 세우고 아울려 같은 시기에 의병을 일으켰다가 전투에서 죽은 유생을 배향하려고 하니, 이는 참으로 이른바 인인과 군자의 마음에 해당하며 풍교와 관계된 더할 수 없이 중대하고 훌륭한 일입니다.저희들은 변방에서 생장하여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받은 본성은 어리석지 몽매하지 않아 매번 정공의 일이 세상에 크게 드러나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일찍이 탄식하며 대단히 한스럽게 여기지 않음이 없으니, 이에 사당을 세워 제향을 지내 경모하는 마음을 부쳐보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지니고 있었으며, 지난 번 관찰사도 또한 이 일을 성취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지금 우리 합하께서 결단을 내려 이 일을 행하고서 조정에 알려 더욱 빛내려 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너무나 다행하게도 오늘날 훌륭한 일을 보게 되었으며 숙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인하여 삼가 생각해보니, 전대의 충현을 위하여 사우를 건립하는 일은 대부분 이 지방 인사들의 공론이 일제히 일어난 것에 말미암았는데, 간혹 방백과 고을 수령 가운데 의를 좋아하고 선을 존모하는 자들이 주장하면 그 일이 곧바로 성취되었습니다. 애초에 반드시 조정에 품의하여 허락을 기다린 뒤에 바야흐로 그 일을 성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개 조정이란 어진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뒤섞여 있어 의논이 갈래가 많으니, 이와 같은 일은 의견이 통일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드시 허락을 기다린 뒤에 그 일을 성취하려고 한다면 저희들은 천하와 국내에 고금의 사원이 대단히 많게 되는 성대함은 있지 않을 것이라 저어됩니다.지금은 태평시대이니, 참으로 이와 같은 염려는 없을 것이지만, 그러나 정공의 평소 사람됨이 준엄하고 강직하여 세상 사람들의 시기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그가 성취한 공훈은 또한 타인에 의해 가려지게 된 것도 이런 까닭인데, 하물며 말년에 역옥(逆獄)에 연좌되어 끝내 억울하게 죽는 것을 스스로 면치 못하였으니 또한 어찌 시기한 자가 많고 구원하는 자는 적은 것으로 인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합하께서 이 일로 조정에 알렸을 때 혹시 다른 의견이 생긴다면 조정에서 이 청을 인준할 것은 기필할 수 없으며, 조정에서 만약 허락하지 않는다면 잘 모르겠습니다만 장차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그 형세는 아마도 조정의 명령을 어겨가면서 억지로 그 일을 시행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희들이 평소 마음에 담아두고 드러내지 못하였다가 다행하게도 합하를 만나 그 숙원을 이루게 된 것이 또다시 헛수고로 돌아가게 되며 영원히 한 지방 천년의 한이 될까 두렵습니다. 이것은 비록 저희들의 지나친 생각이지만 그러나 일을 할 때는 처음 시작을 도모하는 것이 귀하니 생각이 이에 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저희들이 듣건대 평사의 일에 대해 합하의 선친 상국 택당공(澤堂公)께서 일찍이 태사의 붓을 잡고서 〈선조묘무사(宣廟朝誣史)〉13)를 삭제하여 바로잡으니, 세상의 의논이 모두 그 공변됨을 칭송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찍이 평사가 되었을 때 일도(一道)를 두루 다니면서 공의(公議)를 채방하여 정공의 일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였는데, 정공과는 막연히 서로 친분이 없다고 하니 그것이 지극히 공변된 기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들도 또한 일찍이 이 일을 기록한 바가 있어서 지금 택당께서 기록한 것과 비교해보니 합치하지 않음이 없는데, 다만 피차간에 자세하고 소략한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최유해(崔有海) 공이 일찍이 길주 목사(吉州牧使)가 되었을 때에도 또한 본부(本府)의 사적을 채방하여 정공과 지역 안의 의병에 종사했던 사람들을 자못 자상하게 기록하였는데, 합하께서 만약 가져다가 보신다면 당시 공렬의 뛰어남과 여론의 공정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 공론이 사람의 마음에 꽉 막히어 오래 지나도 발하지 못하다가 오늘 합하께서 순행하는 날에 발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사람을 기다려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일을 우리 지방 사람들의 귀와 눈을 통해 얻고 선배의 기록과 대조하고 다른 고을의 사적에 증험한 것이 부절을 맞춘 것처럼 합치될 뿐만이 아니며, 일도(一道) 여론의 공정함도 또한 자세히 알게 되어 의심할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변방 지역은 항상 안정되지 않으니 훗날 뜻하지 않은 변란을 예측할 수 없는데, 전대 큰 업적을 세운 사람이 무고를 당하여 그 공을 표창한 바가 없게 되었다가 시대가 점점 멀어지고 부로들이 모두 죽어서 그 사실이 사라져서 영원히 없어지게 된다면, 북관(北關) 일도(一道)의 일이 잘 되지 못할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국가에서 세상 사람을 면려하고 우둔한 백성을 고무시키며 교화를 수립하는 도에 대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에 저희들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공론이 일제히 일어난 지금을 이용하여 빨리 그 일을 시행하여서 우선 어란리에 사우를 세우고, 그 후에 합하께서 조정에 보고하여 혹 사당의 현판을 청하거나 혹은 의병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뒤미처 포상하라고 청한다면 일에 차례가 있어서 성공하지 못할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저희들은 모두 곤궁한 선비라서 재력을 모아 공사비용을 댈 수는 없습니다. 만약 합하께서 본부의 영미(營米) 약간 석과 곡식 삼백 석을 내어주어 비용으로 대 주신다면 높다란 묘우(廟宇)를 장차 짧은 시일 안에 지을 것입니다. 또한 북방의 백성들은 창고가 너무 많은 것에 고통을 받고 있으니 쌀을 내가고 들이는 사이에 도리어 백성들을 힘들게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이러한 일에 베풀어주시는 것을 합하께서는 아끼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희들이 일찍이 지은 《의려록(義旅錄)》 한 책을 아울러 바쳐서 참고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니, 저희들은 매우 황공하고 격앙된 마음을 놓을 길이 없으니 삼가 백번 절하며 글을 올립니다.저희들이 또 삼가 생각건대, 묘우를 이윽고 완성한 뒤에 지킬 이가 없어서 두어 칸의 건물이 황야 가운데 쇠락해 갈 것이니, 아니 도리어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유현을 제향 하는데 비교할 것이 아니니 비록 서원을 설치하지 못하더라도 만약 묘우의 근처에 서당을 세워 마을의 유생들이 그 안에서 책을 읽게 하고 인하여 사당지기 2~3호를 두어서 그들로 하여금 서당까지 아울러 지키게 한다면 묘우와 서당이 서로 힘입어 조심스럽게 지키지 못할까 하는 염려는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마을의 선비들이 많으나 읍의 관청까지는 하루 정도의 걸리는 먼 거리로 항상 향교에 가서 거처하면서 학업을 익힐 수 없었는데, 이제 사당에 제향 하는 일로 인하여 아울러 서당까지 도모한다면 실로 두 가지에 좋은 일입니다. 합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鏡城居前察訪朴興宗等, 謹齋沐百拜上書于閤下。伏以除兇靖亂, 臣子之大義, 顯忠旌烈, 國家之令典, 而如或被誣一時, 兇旣除亂旣靖, 而大義未彰, 抱冤九泉, 忠未顯烈未旌, 而令典永闕, 則此仁人君子之所以永歎深悲, 必欲其昭揭而後己者也。今我巡相閤下與評事閤下相議, 欲爲故評事鄭公文孚, 立廟於本府禦亂里, 兼以同時倡義死事之儒生配之, 此政所謂仁人君子之心, 而關係風敎莫大之盛擧也。某等生在邊陲, 無所知識。然秉彝之天, 有不容昧者, 每念鄭公事不大彰著於世, 未嘗不歎息痛恨, 思欲立廟享祀, 以寓景慕之誠, 有素矣, 而往者觀風之使, 亦有欲就此事而未果者矣。今我閤下斷然爲此擧, 至欲聞于朝廷, 以增重光耀。某等何幸, 今日得覩盛事而副宿願也。仍竊伏念, 凡爲前代忠賢, 建立祠宇之擧, 多由於鄕土人士公議齊發, 或方伯邑宰之好義慕善者, 有所主張, 則其事便就矣。初不必稟命于朝廷, 待其許, 而後方就其事也。蓋朝廷者, 賢否雜進, 議論多岐, 如此等事, 未易歸一。必欲待其許而就其事, 則某等恐天下國內, 古今祠院, 未有許多之盛也。今時則聖朝也, 固無如此之慮, 而第竊聞鄭公平生爲人峭直, 世人多有媢嫉者云。其所就功業, 亦被掩覆於人者, 爲此故也。況其末年, 絓於逆獄, 終於冤死, 其不能自免, 又安知其不由於媢嫉者多, 而救護者鮮而然耶。 然則今日閤下之以此事聞于朝廷也, 或有異議生焉, 則朝廷之準斯請, 有未可必, 而朝廷若不許, 則未知將何以處之耶。其勢恐不能違朝命, 而強擧其事。然則某等平生蘊畜而不能發, 幸遇閤下而得遂其願者, 又恐墮於虛地, 而永爲一邦千載之恨也。此雖某等之過計, 然作事貴於謀始, 不可不念及於此也。某等竊聞評事, 閤下之先相國澤堂公, 曾秉太史之筆, 刊正宣廟朝誣史, 世議咸稱其公云, 而曾爲評事時, 遍行一道, 採訪公議, 記鄭公事甚詳, 而於鄭公邈然無相知之分云。其爲至公之筆可知, 而某等亦嘗以此事, 有所記錄, 今以澤堂所記比較, 則無不合, 而但有彼此詳略之殊耳。至於崔公有海曾牧吉州時, 亦採本府事蹟, 記鄭公及境內從義人事頗詳, 閤下若取而觀之, 可知當時功烈之偉, 而物論之公也。只是公論鬱於人心, 久而未發, 發於今日閤下巡宣之日, 此豈非天意有俟而然耶。此事得之於吾土耳目, 質之於先輩記錄, 驗之於他州事蹟, 不啻如符契之合, 而一道物論之公, 亦可以詳悉而無疑耳。邊地未能常安, 日後不虞之變, 有不可測, 而前代立大功業之人, 使之被誣枉而無所表章, 時代漸遠, 父老盡喪, 消沈泯沒, 歸於永熄而已, 則北關一道事, 有不足言, 其於國家勵世磨鈍, 樹立風聲之道, 何如也。玆以某等愚慮, 莫如乘此公論齊奮之日, 亟擧其事, 先立廟宇於禦亂里, 閤下從而聞于朝廷, 或請廟額, 或請追褒從義之人, 則事有次第, 而無不成之慮矣。某等皆是窮儒, 不能收合財力, 以給功費。若蒙閤下捐給本府營米如干石穀三百石, 以資其需用, 則巍然廟宇, 將不日而成矣。且北路之民, 苦於倉積之太多, 糶糴之際, 反爲病民之資也久矣。今於此等事, 有所施給, 想惟閤下之無所惜也。某等所嘗著《義旅錄》一編, 幷此呈納, 以備參考, 某等無任惶恐激昂之至, 謹百拜上書。某等抑又伏念, 廟宇旣成之後, 無以守護, 數間屋舍, 寥落於荒野之中, 則無乃反爲傷心之歸乎。此擧非如享祀儒賢之比, 雖不可設爲書院, 若置書堂於廟宇近處, 使里中儒生讀書其中, 而仍置廟直二三戶, 使之兼護書堂, 則廟宇書堂, 可以相賴而無不謹守護之慮矣。此里士子衆多, 而距邑治一日程而遠, 常時不能來處鄕校而隷業, 今因廟享之擧, 兼謀此事, 則實爲兩幸, 閤下以爲如何也。 선묘조무사(宣廟朝誣史)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홍문관 대제학으로 있을 때 상차(上箚)하면서 선조 시기의 역사는 광해군의 권신 기자헌(奇自獻), 이이첨(李爾瞻)이 실록 등을 편찬하여 역사적 사실과 인물의 실적을 편파적으로 기술한 점을 지적하며, 사고(史庫)의 유문(遺文) 및 야록(野錄)의 가전(家傳) 등을 참고하여 바로잡아 편찬하도록 주청하였으며 이식이 직접 찬술하였다. 《國朝寶鑑 仁祖 19年》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창렬사에 읊다 곤륜 최창대 題彰烈祠【崑崙 崔昌大】 맨손으로 흉도 섬멸하며 어찌 공훈 생각했겠는가지금까지 깃발과 부월 절로 어지러웠네천 겹 쌓인 변방 지금까지 무사하니만고토록 중화와 오랑캐에 길이 알려졌네사당 가까운 산에 잣나무 새로 심었으니변방 바닷가 전장에 아직도 구름 둔치고 있네수양80)의 부로에 전해오는 사적 많은데누가 빗돌에 새겨 후세에 글을 전하겠는가­자주(自註)에 이르기를, "이때 비갈(碑碣)을 세우려고 하였기 때문에 마지막 구에 언급하였다." 라고 하였다.­ 徒手殲兇豈顧勳向來旌鉞自紛紛千重嶺扼今無恙萬古華夷永有聞祠屋近山新種栢戰場邊海尙屯雲睢陽父老多遺事誰勒碑碣3)傳後文【自註云"時欲營碑碣, 故落句云"。】 수양(睢陽) 당(唐)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14년(755)에 안녹산(安祿山)이 어양(漁陽)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향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려올 때,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두 장수가 이들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던 곳이다. 《舊唐書 卷187 忠義列傳下》 碑碣 대본에는'중승(中丞)'으로 되어 있는데 문맥상 연결되지 않고, 자주(自註)의 내용을 참조하여 '碑碣'로 고쳐 번역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창렬사 이광좌 彰烈祠 李光佐 누가 이곳을 먼 변방81)으로 보겠는가구름처럼 모인 열사 사방에 진동하네청자82)는 무능하니 누가 다시 기억하랴고명한 이름 만고에 임금 곁에 있으리 孰將玆土視要荒烈士如雲動四方靑紫無能誰復記高名萬古北辰傍 먼 변방 원문의 '요황(要荒)'은 요복(要服)과 황복(荒服)의 합칭으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지역을 가리킨다. 청자(靑紫) 한대(漢代)에 구경(九卿)은 푸른색 인끈을, 공후(公侯)는 자주색 인끈을 사용했기에 공경(公卿)의 지위를 가리킨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7 卷七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어떤 사람에게 주다 贈人 그대 일찍이 자하동 객 되었는데 君曾紫霞客나는 또한 무엇이 될지 我亦何爲者해 저물자 매화가 지고 日暮落梅花초당에 구름이 드리우려 하네 草堂雲欲下 君曾紫霞客, 我亦何爲者.日暮落梅花, 草堂雲欲下.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중간 서문(1) 農圃集重刊敍 농포 정 선생은 선조(宣祖) 임진년(1592)에 함경북도 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로서 의병을 일으켰으니, 왕자의 수레를 돌리고 역적의 수급을 바쳤으며, 왜적을 무찌르고 변방 오랑캐를 위협하여, 관북 일대가 안정되었다. 일이 이미 평정된 뒤에는 한미한 관직에 떠돌고 외직에서 분주히 일하며 20여 년을 보냈다. 인조(仁祖) 갑자년(1624)에 대간의 논핵을 받아 옥에서 운명하셨다. 현종(顯宗) 갑진년(1664)에 공을 이상(貳相)에 추증하였고19) 특별히 사당에 편액을 내렸으며 공의 자손을 녹용하라고 명했고, 숙종(肅宗) 계미년(1703)에 시호를 하사했다. 아! 여기에 이른 뒤에야 공의 훌륭한 공적이 드러나고 지극한 원통함이 풀려서, 소인배의 입을 다물게 하고 지사(志士)의 담력을 키워줄 수 있게 되었도다.공의 유집은 예전에 2책이 있었는데, 공의 후손들이 서울과 지방에 흩어져 있는 공의 일고(逸稿) 약간 편을 수습하고 연보를 덧붙여 4책으로 만들고, 나에게 서문을 부탁했다. 나는 후대에 태어나 공이 대장기를 잡고서 적들을 소탕한 광경을 미처 보지는 못했으나, 야사(野史)에서 상고하고 사람들에게 들어, 공의 일생의 훈공을 삼가 개괄한다.대개 이 충무공(李忠武公 이순신(李舜臣))과 곽 충익공(郭忠翼公 곽재우(郭再祐))이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에 비견될 만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의 한때 공로는 공에게 견줄 수 없으니, 충훈부(忠勳府)에 기재된 사람이라도 의당 혹여라도 공을 앞서지 못한다. 그런데 법률 담당 관원의 탄핵문서가 대뜸 나와서 뒤에서 비난하였도다. 어찌하여 하늘이 한 시대의 준걸을 내어 한 시대의 사업을 정돈하되, 그를 좌절시키고 곤란에 빠뜨려 이렇게까지 아껴주지 않는가. 아마도 충무공이 등자룡(鄧子龍)의 전함에서 불 속에 뛰어든 것20)과 충익공이 비슬산(琵瑟山)에서 벽곡(辟穀)한 것21)은 모두 공이 한 수 접어주더라도 공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로다. 천도(天道)가 아득히 멀어서 옛날에 이른바 '선인(善人)에게 보답해 준다'는 것22)은 시대마다 기약하기 쉽지 않으나, 공적이 있는데 드러나지 않고 억울함이 있는데 신원되지 않는 경우를 나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우선 이런 내용으로 적어 후대사람들을 면려하노라.숭정(崇禎) 기원후 다섯 번째 경인년(1890, 고종27) 중춘에 일선(一善) 김익용(金益容)이 서문을 쓰다. 農圃鄭先生, 以穆陵壬辰咸鏡北道兵馬評事, 倡義旅, 王子旋軌, 逆胥授馘, 蹂倭慴胡, 一路帖然。旣事平, 而浮沈散班, 捿遑外符, 二十餘年。長陵甲子, 被臺評, 隕身圜扉中。崇陵甲辰, 贈貳相, 特宣祠額, 命錄用子孫, 明陵癸未, 賜諡 嗚呼! 至此而後, 茂烈章至冤白, 有足以關宵人之喙, 張志士之膽歟! 公遺集舊有二冊, 公諸孫綴拾公逸稿散在京鄕者若干編, 附年譜爲四冊, 徵序於不侫。不侫生晩, 未及見公握蝥弧掃除攙搶, 而稽之外乘聽之輿人, 竊槪公始卒勳庸。蓋李忠武·郭忠翼之伊呂伯仲, 而餘人一時之勞, 未足倫擬, 則盟府丹書, 宜莫之或先, 而文吏白簡, 遽從而議後歟! 何天之生一代魁碩, 整頓一代事業, 而挫折之顚擠之, 不相惜至此歟? 豈忠武之蹈火鄧船、忠翼之辟穀瑟山, 皆所以贏公一着而爲不可以幾及者歟! 天道遼遠古, 所謂報施善人者, 未易以世代相期, 而有積無發, 有絀無伸, 卽不佞所未聞也。姑識此以勖後人。崇禎紀元後五庚寅仲春, 一善金益容敍。 이상(貳相)에 추증하였고 이상은 좌찬성과 우찬성을 일컫는 말이다. 《현종실록》 7년 5월 23일에 기사에서는 정문부를 우찬성에 추증했다고 했으나, 《숙종실록》 39년 3월 15일 기사 및 《농포집》의 〈시장(諡狀)〉·〈증직교지(贈職敎旨)〉 등에서는 좌찬성에 추증되었다고 하였다. 충무공이……것 등자룡(鄧子龍)은 명나라 장수로 1598년에 조선으로 출병했다.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등자료과 함께 적을 포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 《宣祖實錄 31年 12月 21日, 32年 2月 2日》 충익공이……것 곽재우는 1602년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거하여, 솔잎을 먹으면서 벽곡(辟穀)하였다. 《葛庵先生文集 卷29 嘉善大夫行咸鏡道觀察使兼巡察使兵馬節度使咸興府尹忘憂堂郭公諡狀》 옛날에……것 《사기》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사마천(司馬遷)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와 안연(顔淵) 같은 선인은 비참하게 살다 죽고, 도척(盜跖) 같은 악인은 천하를 횡행하며 오래 살다 죽었음을 대비하면서 "하늘이 선인에게 보답해 준 것이 어떻다고 하겠는가.[天之報施善人, 其如何哉?]"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1 卷一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시(오언고시) 詩(五言古詩)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오봉 호민3)의 사한정4) 시에 차운하다 3수 次李五峰好閔四寒亭韻 三首 천지 사이에 물아가형체는 다르나 절개는 같아라소나무는 추위에 서리를 견딜 수 있고대나무는 추위에 달빛을 띠는 법이지겨울 매화와 한미한 선비는모두 정신이 빙설처럼 정결하네이토록 추운 지경에 이르렀는가5)서로 마주하며 백발에 이르렀네상산사호 같은 은자가 되려 하니그 중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되지정자는 어느 때가 좋은가엄동설한이 좋다네소나무 대나무는 본래 사시사철 푸르고매화 또한 섣달에 핀다오정자 주인은 또 옥과 같으니눈서리 속에서 함께 늙어가네푸른 잎 노쇠한 얼굴에 비치고흰빛은 백발을 재촉하누나옛사람 중 그 누가 흡사할까구양수가 육일이라 자호했지6)섣달 겨울 천지의 기운 막힐 제차군의 절개 사랑스러워라또한 얌전한 여인의 혼령 있어저물녘 달 아래에서 기약하누나7)십팔공8)은 이 중 가장 굳세어우뚝하게 눈 서리에 서 있도다타고난 성품이 서로 부합하니털끝만큼의 틈도 용납못하네묻노니, 누가 정자 주인인가한미한 선비 김창일이라오 物我天地間殊形而一節松寒解凌霜竹寒宜帶月寒梅與寒士精神兩氷雪一寒如此哉相對至白髮擬作四皓隱不可無其一亭到何時好好是嚴冬節松竹自四時梅花亦臘月主人又如玉相與老霜雪蒼者映蒼顔白者催白髮古人誰得似歐陽號六一窮冬天地閉可愛此君節亦有靜女魂期在黃昏月十八公最勁亭亭立霜雪所性有相符間不容毫髮借問誰爲主寒士金昌一 오봉 이호민 1553~1634.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ㆍ남곽(南郭)ㆍ수와(睡窩)이다. 임진왜란 때 왕명으로 각종 글을 도맡아 작성하는 등 문장에 뛰어났고, 저서로 《오봉집》이 있다. 사한정 시 이호민(李好閔)의 〈사한정 시에 차운하다[次四寒亭韻]〉 시로, 《오봉집》 권6에 수록되어 있다. 사한정은 김창일(金昌一, 1548∼1631)의 정자로, 김창일이 송한(松寒)·죽한(竹寒)·매한(梅寒)과 자신의 한미함[己寒]을 함께 묶어 '사한(四寒)'이라 하였다. 이토록……이르렀는가 《사기》 〈범저열전(范雎列傳)〉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추위를 견디는 소나무·대나무·매화처럼 자신 역시 몹시 한미한 처지에 있음을 형용한 것이다. 전국 시대 위(魏) 나라 수가(須賈)가 진(晉)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범수(范睢)를 만나 보고는 "범숙이 이토록 한미한 지경에 이르렀는가?[范叔一寒如此哉?]"라고 하고, 명주 솜옷 한 벌[一綈袍]을 주었던 고사가 있다. 《史記 范雎列傳》 구양수가 육일이라 자호했지 김창일이 '사한'이라 자호(自號)하고 대나무·소나무·매화 사이에서 늙어간 것이 송나라 구양수(歐陽修)가 책·금서군·거문고·바둑판·술 사이에서 늙어가며 '육일'이라 자호한 것과 비슷하다는 뜻이다. 구양수가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 자호를 '육일거사'라 하였는데, 구양수의 〈육일거사전(六一居士傳)〉에 "우리 집에 책 1만 권이 있고, 삼대 이래의 금석유문 1천 권을 모았고, 거문고 하나, 바둑판 하나가 있고 항상 술 한 병이 놓여 있다.……나 한 늙은이가 이 다섯 가지 물건 사이에 늙어가니, 어찌 여섯 가운데 하나가 되지 않겠는가?[吾家藏書一萬卷, 集錄三代以來金石遺文一千卷, 有琴一張, 有棋一局, 而常置酒一壺……以吾一翁, 老於此五物之間, 是豈不爲六一乎?]"라고 하였다. 얌전한……기약하누나 매화의 정령을 여인으로 의인화한 것이다. 수나라 조사웅(趙師雄)이 추운 겨울 저물녘에 나부산(羅浮山)의 솔숲 사이의 술집에 들렀다가, 소복(素服) 차림에 옅게 단장한 여인으로부터 영접을 받았다. 조사웅이 고운 향기와 청아한 말에 매료되어 함께 술을 마시다가 잠이 들었는데, 깨어 보니 큰 매화나무 아래였다고 한다. 《五百家注柳先生集 龍城錄 卷上 趙師雄醉憩梅花下》 십팔공 소나무를 의미한다. 삼국 시대 오나라의 정고(丁固)가 자기 배 위에 소나무가 생겨나는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풀이하기를 "송(松) 자를 파자(破字)하면 십팔공(十八公)이 되니, 18년 뒤에는 공(公)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三國志 卷48 吳書 孫皓傳 裴松之 注》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궂은 비에 대한 탄식 苦雨歎 하늘에서 오랫동안 비 내리지 않자예전에는 상림에서 비를 빌었네11)늘 쨍쨍해도 진실로 재앙이요늘 비만 오는 것도 어찌 좋으랴그러기에 여러 달 계속되는 비가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구나밤낮없이 주룩주룩 비 쏟아져강하가 끝없이 불어났으니평지는 배 타고 노 저어가고높은 산은 섬이 되었으며산꼭대기 나무는 꺾여 버리고언덕 위 풀은 문드러졌네초목이 상하는 건 그래도 괜찮지만이 기장과 벼는 어이할꼬회상하노니, 처음 파종했을 때농지는 아직 이른 봄이었네노인과 아이 쟁기질하고아낙네들은 들밥을 내왔지땅이 척박하고 인력 부족하여잡초만 무성하고 모는 말랐네컴컴한 새벽에 잡초를 김매고12)하얀 달빛 받으며 돌아왔네장차 풍성한 가을걷이 기다렸으니고생 따위야 어찌 말할 것 있으랴어찌 짐작했으랴, 비바람 몰아쳐-원문 1자 결락- 벼가 다 쓰러질 줄을-원문 2구 결락-한 번 장맛비가 지나간 뒤로흙 무너져 웅덩이로 흘렀네이미 올해 수확 점쳐지니쌀 한 말이 노호 값 되리라13)-원문 1자 결락- 우리 집 여덟 식구위아래로 아이와 노인 돌아보네-원문 2구 결락-배고픔과 추위에 내몰리니쇠락한 가세 끝내 어찌 보존할거나말없이 앉아 -원문 3자 결락-이를 생각하니 마음 방아 찧는 듯하여라그 누가 이 허물을 책임질꼬나는 하늘에 돌리고자 하노라하늘이 어찌 그리했으랴만물이 모두 만든 결과로다또 우리 -원문 1자 결락- 임금과 재상백성 사랑을 보배로 여기네음양을 조화롭게 잘 다스리니훌륭한 정치가 환히 빛나리라하늘 탓도 아니요 사람 탓도 아니니이 이치는 궁구하기 어렵구나단지 천지 사이에뜬구름 날마다 자욱했기 때문이니때때로 삿된 기운을 타고서흙비가 변방과 도성을 덮었네이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니사람 애태우며 근심 시키네뇌사가 그 형세를 도왔으니풍백도 진정시키지 못했도다소상강 대나무14)를 베어다가빗자루로 엮어 마음껏 쓸어냈으면그런 뒤에야 하늘에 구름 없어져쨍쨍한 햇빛 시원히 보겠지 皇天久不雨昔有桑林禱恒暘固云灾恒雨亦豈好所以連月雨使我傷懷抱淫淫罔晝夜川原漲灝灝平地用舟楫高山作嶼島摧殘嶺頭樹糜爛原上草傷草木尙可奈此粱與稻憶初播種時西疇春尙早扶犂翁與兒饁耕姑及嫂地瘠人力綿草盛苗則槁埋穢侵晨黑歸來帶月皓且待秋穀登辛勤何足道豈料風雨漂【缺】禾盡傾倒【二句缺】一自霖雨後沙汰流行潦已占今年秋斗米直魯縞【缺】我八口家俯仰有幼老【二句缺】飢寒之所迫零落終何保黙坐【三字缺】念此心如擣伊誰執此咎我欲歸蒼昊蒼天豈其然萬物皆所造復我【缺】君相仁民以爲寶燮理陰陽化至治期凞皞非天亦非人此理難可考祗緣天地間浮雲日浩浩有時乘戾氣霾翳秦與鎬作此雨淋淋令人憂懆懆雷師助其勢風伯不能討願斫瀟湘竹束箒恣揮掃然後天無雲快覩日杲杲 상림에서 비를 빌었네 기우제를 지냈다는 뜻이다. 은(殷)나라에 여러 해 동안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탕왕(湯王)이 상림(桑林)에서 기도하며 여섯 가지 일로 자책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 수천 리에 큰비가 내렸다. 《荀子 大略》 잡초를 김매고 대본에는 '埋穢'로 되어 있는데,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의 〈귀전원거(歸田園居)〉 시에 "새벽에 일어나 잡초를 김매고, 달빛 띠고서 호미를 메고 돌아오네[晨興理荒穢, 帶月荷鋤歸.]"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埋'를 '理'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노호 값 되리라 쌀이 귀하여 매우 비쌀 것이라는 의미이다. 노호(魯縞)는 노(魯)나라 땅 곡부(曲阜)에서 생산된 흰색의 비단으로, 촘촘하면서도 두께가 얇기로 유명했다. 소상강 대나무 중국의 소상강(瀟湘江) 일대에 자줏빛 반점이 있는 대나무, 즉 소상반죽(瀟湘斑竹)이 자란다. 전설에 의하면 순(舜) 임금이 승하하자 두 비(妃)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눈물을 흘렸는데, 이 눈물이 대나무에 떨어져 얼룩이 생겼다고 한다. 《博物志 卷8》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눈 내리는 밤에 지 참봉 달원186)과 입으로 읊다 雪夜 與池參奉達源 口號 객지의 밤은 본디 잠들지 못하니밝은 눈과 달 어이할꼬고향 돌아가는 꿈 꾸고 싶건만밤새도록 끝내 꾸지 못했네 客夜元無寐如何雪月明欲作還家夢終霄竟不成 지달원(池達源) 1566~1638. 함경북도 경성(鏡城) 사람으로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사진(士進)이다. 임진왜란 때 정문부(鄭文孚)를 따라 활약했으며, 이때의 공으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강가의 정자에서 즉흥적으로 읊다 江亭卽事 바람은 강가의 풀에 고요하고 風靜江湄草물고기는 달 아래 물결에서 밭을 가네 魚耕月下波추운 밤 시름겨워 잠 못 이루는데 夜寒愁不寐안개 너머로 어부의 노래 소리 들려오네 煙外起漁歌 風靜江湄草, 魚耕月下波.夜寒愁不寐, 煙外起漁歌.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우연히 읊다 偶吟 어떤 사람인지 묻지 마오 莫問何爲者나는 천상계 신선 아니라네 吾非天上仙그림 같은 호수와 산에서 湖山盡圖裡길이 백구를 마주하여 잠을 잔다니 長對白鷗眠 莫問何爲者, 吾非天上仙.湖山盡圖裡, 長對白鷗眠.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부제학 학봉79) 김성일에게 올린 편지 上鶴峰金副題提學誠一書 성주80)께서 왜국에 사신의 임무를 받드신 뒤로 마음이 온통 걱정스러워 일찍이 먹고 쉬는 사이에도 감히 잊지 못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거센 파도를 잘 건너시고, 또 사신의 임무를 잘 처리하고81) 돌아와서 임금의 은혜에 감응하고 임금의 은총과 영광을 받으셨더군요. 이는 실로 정성이 금석(金石)을 뚫고 신물(神物)이 호위한 바이니, 변변찮은 저는 공경히 박수를 보낼 뿐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저는 행실이 신명(神明)을 저버려서 이런 기이한 화를 만나 칠십이 되신 늙은 아버지와 떨어져 삼천리 밖에 유배되었습니다. 불효의 죄는 스스로 속죄할 길이 없고, 엎어지고 고꾸라지는 고통은 거의 견딜 수 없을 지경이라 겨우 죽음만 모면했으니 다른 일이야 어찌 말씀 드리겠습니까. 믿을 것은 하늘의 태양 같은 임금의 밝고 밝음이 엎어진 항아리의 속의 어둠82)을 비추어 주시는 일 뿐입니다.별지(別紙)에 적은 슬픔과 간절함은 오로지 사랑으로 돌봐주시는 마음을 믿고 사사로이 품고 있던 생각을 솔직하게 토로한 것이니, 한 번 보시고 불에 태워 다른 이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해주십시오. 언제쯤 다시 빛나는 모습을 뵐 수 있겠습니까? 이 답답한 마음을 드러내고 나니, 다만 더욱 목이 메일 뿐입니다.별지기축(己丑 1589)년 겨울에 있었던 일83)을 생각하니 여섯 부자(父子)84)가 함께 중대한 옥사로 모함을 받을 적에 예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들은 한마디 말도 위로해준 적이 없었으나 오직 우리 성주께서 편지를 내려 위로해주셨고, 우리 일가족이 온전히 목숨을 보전하게 되기에 이르자 그것을 효성이 응한 소치로 돌리셨으니, 군자의 마음이 평탄하거나 어려움에 따라 지조를 바꾸지 않은 점에 삼가 탄복하고, 또한 보잘것없는 제가 어찌 성주의 지우를 입어 이와 같기에 이르렀는지 감탄하였습니다.스스로 도깨비나 살 것 같은 시골에 들어가 흙집에서 흙덩이처럼 엎드려 살면서 예전의 잘못들을 들추어보니, 대체로 평생의 제 행실은 단지 선(善)을 좋아하나 밝게 분별하지 못하고, 악을 싫어하나 미워함이 지나치게 심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소인배들이 농간을 부리고 말을 만들어내며 기회를 엿보아 모함에 빠지게 하여 그 재앙이 장차 친족을 모조리 죽일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게다가 남쪽 지방 선비들의 습속이 괴팍하고 심술이 그르다고 알려져 여우와 쥐새끼85) 같은 무리가 우르르 모여 벼룩이 호랑이나 표범에 달라붙은 형세를 이루어 위로는 사대부로부터 아래로는 벼슬하지 않은 선비까지 모조리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을 세웠거늘, 성상께서 위에서 해와 달과 같은 빛으로86) 보이지 않는 곳까지 통촉하시어 감히 그 흉악한 생각을 제멋대로 하지 못하게 하셨으니, 이는 종사(宗社)의 복이요, 사림(士林)의 행운입니다.아! 정적(鄭賊)87)은 애초에 마을 입구를 막고 사람을 겁박하는 도둑이 아니라 진실로 고상한 말로 사람을 속이는 간신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박학다식하여 사물의 이치에 막힘이 없다는 명목으로 세상에 명성을 떨쳤고 벼슬이 청요직에 이르렀으니, 비록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숨겨진 흉악함과 간특함을 미리 알아채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저와 같이 어둡고 아둔한 자야 어찌 그 사람이 거짓을 꾸며 온 세상을 속일 줄 알았겠습니까.예전 도성에서 노닐 적에 율곡 선생께서 일찍이 저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남쪽 지방에서 학문하는 선비 중에 정철이 최고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평소 선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일찍이 그 사람됨을 보고 싶어서 을유(乙酉 1585)년 봄에 어버이를 뵈러 도성에 올라갔다가 비로소 한번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과장되고 허황되었으며, 급기야 경연(經筵)에서 율곡 선생을 매우 심하게 공격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일찍이 형제간에 말하기를 "오랜 친구를 버리지 않는 것은 옛 사람도 경계한 일88)인데 빛과 어둠처럼 서로 등지게 되었으니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으로 그를 매우 의심하였기 때문에 왕래하고 지나면서 일찍이 한 번도 그 문에 이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병술(丙戌 1586)년 사이에 쇠약한 가문에 괴이한 변고가 있고 의론이 분분할 때 정적이 상도(上道)89)에 있으면서 시비를 주장하므로 도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과연 한 통의 편지를 써서 그 일의 전말을 논하였을 뿐이니, 어찌 받들어 존중하는 뜻이 있었겠습니까.성주께서 나주에 계실 때 일찍이 정적의 심술을 논하였는데 제가 추종하여 그의 단점을 지적했던 일이 또한 많았습니다. 결국 한 번 얼굴을 보고 한 번 편지를 보낸 일로 마침내 큰 재앙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는 실로 운명이 기구해서이니 어쩌겠습니까. 이 한 몸의 길흉화복은 마땅히 하늘의 뜻을 따르겠지만, 다만 연로하신 아버지의 노년을 생각하면 밤낮으로 통곡하게 될 것이니 자식 된 입장으로 마땅히 어떤 마음이 일어나겠습니까?대개 겸허하고 선을 좋아하는 선비 중에 세상을 속이는 사람에게 연루되어 큰 참화를 입은 사람이 많으니, 조정에 어찌 그 원통함을 마음으로 아파하고 한랑(寒朗)90)처럼 다스려 풀어주고자 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속으로 이해를 따지는 마음이 있고 겉으로 행적을 의심하여 그러한 일을 좌시하며 감히 한마디 말을 꺼내 구원하지 않으니,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으로 비록 소득이 있는듯하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아마도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오직 성주께서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서서 정성은 천지를 감동시키고 믿음은 신명과 통하여 이해와 행적을 초월하고 한결같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신다면 반드시 깊은 원한을 밝혀 씻어주어야 하는 책임을 갖고 한랑으로 하여금 앞시대의 아름다움을 독차지 하지 못하게 할 것을 생각하실 터인데,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성주께서도 이렇게 생각하시는지요? 곁에서 듣기로 조정에서 관대한 법을 적용하고 성스러운 덕이 또한 날로 새로워진다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깊은 원한을 밝혀 씻을 수 있는 한 번의 큰 기회입니다. 원컨대 성주께서는 깊이 헤아리시고 빠르게 도모하소서. 서애 유성룡 상공(相公)께서 조사하여 국문하시는 것이 공평하고 분명하여 잘 처리되어 석방된 자 또한 많으니 모든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고 민심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도(斯道)를 붙들고 나라의 명맥을 연장하는 책무를 더욱 사양하셔서는 안 됩니다. 원컨대 성주께서 협력하여 세상에 없던 공적을 도모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自城主奉使海國, 一心憂虞, 未嘗食息之敢忘, 今聞利涉鯨濤, 又能專對, 歸膺明恩, 受天寵光. 是實誠貫金石, 而神物所拱衛, 區區欽抃, 豈可以言語形容. 某行負神明, 遘此奇禍, 違七十老父, 拘三千里外, 不孝之罪, 無以自贖, 顚沛之苦, 殆不可堪, 僅免一死, 他何足言. 所恃者, 天日昭明, 應照覆盆之幽耳. 別紙悲懇, 專恃愛念之眷, 直討幽蘊之私, 一覽付丙, 毋掛他眼. 安得更接儀光? 訟此幽鬱, 但增嗚咽而已.別紙憶在己丑冬, 六父子俱陷重獄, 所識朋舊無一言以慰者, 而惟我城主賜書存撫, 至於保全一家, 歸之於孝感所致, 欽服君子之心不以夷險易操, 而又歎無狀何以見知於明公, 至於如是耶. 自入魑魅之鄕, 塊伏土宇, 抖擻前愆, 大槪平生行己, 只是好善而卞之不明, 惡惡而嫉之太甚, 故群小輩, 作弄造語, 乘機傾陷, 其禍將至赤族之地, 而況又南方士習壞心術誤知見, 群聚狐鼠之輩, 虱附虎彪之勢, 上自搢紳, 下及韋布, 盡爲網打之計, 而聖明在上, 离明燭幽, 不敢恣其胸臆, 是則宗社之福, 士林之幸也. 噫! 鄭賊初非逄州劫人之盜, 而實是高談罔人之奸. 故在當世以博洽鳴世, 而官至淸要, 雖智者, 不能逆探包裝凶慝, 況如生之昏愚, 豈知僞情飾冒, 以誣一世也哉. 在昔遊洛時, 栗谷嘗謂生等曰: "南中學問之士鄭爲最云." 以生平日好善之心, 嘗欲見其爲人, 而乙酉春覲親上洛, 始一見焉. 聽其言論浮誇, 及聞筵中攻栗谷已甚之語, 嘗語兄弟間曰: "不遺故舊, 古人所戒, 幽明相負, 乃至是耶." 心甚疑之, 故往來經過, 未嘗一至其門. 而丙戌間, 衰門怪變, 議論紛紜時, 鄭賊在上道, 主張是非, 故自京歸路, 果爲一書以論其事之顚末而已, 有何推重之意. 城主在羅時, 嘗論此賊之心術, 生之從以短之者, 盖亦多矣. 竟以一面之分一度之書, 而終陷大禍, 是實氣數之奇蹇, 奈何奈何. 一身禍福, 且當聽天, 而只念老父臨年, 日夜號痛, 爲人子者, 當作如何懷抱. 大抵虛恢好善之士, 坐誣欺世之人, 最被慘禍者多矣, 朝廷之上, 豈無心傷其寃, 欲其理出如寒朗者, 內有利害之心, 外爲形跡之疑, 坐視其然, 而不敢出一言以救之, 其於保身之道, 雖似得矣, 愛君憂國之誠, 恐不若是也. 惟明公正色立朝, 誠足以動天地, 信足以通神明, 能超乎利害形跡之外, 而一以愛君憂國爲己任, 則其必思有以昭雪幽寃之責, 而不使寒朗專美於前, 不審明公其亦念及否. 仄聞朝廷用寬典, 聖德又日新, 此正昭雪幽寃之一大機. 願明公深量而亟啚之. 西厓相公按鞫平明, 理出且多, 衆志咸服, 人心屬望, 扶斯道壽國脈之責, 益不可以辭也. 願明公恊贊之, 以圖不世之功, 幸甚幸甚.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68년 증광시 병과에 급제하였다. 1577년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ㆍ초유사ㆍ경상 우도 관찰사ㆍ순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학봉집(鶴峯集)》 등이 있다. 성주(城主)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을 가리킨다. 사신의 임무를 잘 처리하고 원문의 '전대(專對)'는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서 독자적으로 응대하며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자로(子路)〉에 "시경 삼백 편을 외우면서도 정치를 맡겼을 때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사방으로 사신 가서 혼자서 처결하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외운다 한들 어디에 쓰겠는가.〔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라는 말이 보인다. 엎어져서 …… 속까지 원문의 '복분(覆盆)'은 태양이 밝아도 땅에 엎어 놓은 동이 속에는 태양빛이 미치지 못한다는 뜻인데, 억울한 사정을 윗사람이 몰라준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포박자(抱朴子)》 〈변문(辨問)〉에 "해와 달도 비치지 못하는 곳이 있고, 성인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어찌 이 때문에 성인이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며 천하에 신선이 없다고 하겠는가. 이것은 바로 삼광이 엎어 놓은 동이 안을 비추지 못한다고 책망하는 격이다.[日月有所不照, 聖人有所不知. 豈可以聖人所不爲, 便云天下無仙. 是責三光不照覆盆之內也.]"라고 하였다. 기축년(1589) 겨울에 있었던 일 기축옥사. 1589년(선조22)에 일어났으며,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동인이 서인의 박해를 받은 옥사를 말한다. 여섯 부자(六父子) 아버지 나사침(羅士忱), 첫째 나덕명, 둘째 나덕준(羅德峻), 셋째 나덕윤(羅德潤), 넷째 나덕현(羅德顯), 다섯째 나덕신(羅德愼), 여섯째 나덕헌(羅德憲)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우와 쥐새끼 원문의 '호서(狐鼠)'는 여우와 쥐를 이른다. 본래는 사람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성안에 사는 여우와 사당에 사는 쥐[城狐社鼠]'라는 고어(古語)에서 온 말로, 흔히 임금 곁에서 알랑거리는 간소배(奸小輩)에 비유된다. 해와 달과 같은 빛으로 원문의 '이명(离明)'은 곧 일월(日月)의 밝음을 말한 것으로, 임금의 총명을 가리킨다. 《주역(周易)》 〈이괘 상(象)〉에는 "밝은 것 둘이 이를 만드니, 대인이 그것을 인하여 밝음을 이어서 사방에 비추니라.[明兩作離 大人以 繼明 照于四方]" 하였다. 정적(鄭賊) 기축옥사를 이끌었던 정철(鄭澈)을 말한다. 오랜 …… 경계한 일 《論語》의 〈泰伯〉에 나오는 말로 "군자가 친족에게 두터이 하면 백성들이 인에 흥기하고 옛 친구를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투기하지 않는다.〔君子 篤於親, 則民興於仁, 故舊不遺, 則民不偸.〕"고 하였다. 상도(上道) 남원(南原)ㆍ순천(順天) 일대의 전라도 동반(東半) 지역을 말한다. 한랑(寒朗)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자가 백기(伯奇)이다. 명제 때 초왕(楚王) 유영(劉英)의 역옥이 발생하였는데, 유영의 무리인 안충(顔忠)과 왕평(王平) 등이 함께 역모를 하였다고 끌고 들어간 사람 가운데 수향후(隨鄕侯) 경건(耿建), 낭릉후(郎陵侯) 장신(臧信), 호택후(護澤侯) 등리(鄧鯉), 곡성후(曲成侯) 유건(劉建) 등이 있었다. 한랑은 이때 알자수시어사(謁者守侍御史)로서 이 옥사를 다스렸는데, 함께 다스리는 사람들이 모두들 황제가 몹시 노한 데 겁을 집어먹고서 이들이 역모를 하였다는 내용으로 조서를 꾸몄으나, 한랑만은 이들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 이를 사실대로 말하여 풀려나게끔 하였다. 《後漢書 卷41 寒朗列傳》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참의 구암 명길 한백겸91)에게 보낸 편지 與久庵韓參議鳴吉百謙書 지난번 공께서 우연히 찾아오셨을 때 비록 식사하며 정담을 나누는 기쁨이 있었지만, 당상의 존귀함에 압도되어 자세히 대화를 나누며 평온하게 가르침을 받지 못하여 더욱 답답합니다. 요즘 날씨가 맑고 화창한데 삼가 몸조리를 조용히 보중하고 계신지요?제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지만, 백발로 세상 풍진을 겪었으니 무슨 심정이겠습니까? 몸소 큰 환란을 겪고, 또 노모와 오랜 벗들이 모두 신원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하여 이에 감히 평소 소신을 바꾸고 변변치 않은 일들로 분주하였으나 결국 이룬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 초복(初服)92)에 부끄러워 참으로 몹시 절로 슬픕니다.우리 조선 200년간 유학93)의 근원을 밝게 탐구하고 정주학(程朱學)94)을 계승한 이가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고려 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성리학을 처음 열었고, 그 후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네 분의 선생께서 서로 계승하여 도학을 일으켜 비로소 세상을 밝혔는데, 모두 뜻밖의 재앙을 면치 못하시어 그 도가 크게 행하지 못하였으니 기묘사화(己卯士禍)95)와 을사사화(乙巳士禍)96)의 참혹함을 차마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베어 죽이고 소멸시킨 나머지 자리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그 사이에서 출현하여 사문(斯文)을 창도하여 일으키셨습니다. 성상께서 초년에 유학을 높이고 도(道)를 중히 여기시어 일대의 어질고 재주 있는 이들이 무성히 세상을 위해 등용되니 사람들은 모두 선을 지향하게 되고 세상의 도(道)가 볼 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무리 또한 이러한 풍조를 듣고 흥기한 자들이고, 우리 형께서 이런 마음을 제기하셨으니 어찌 선현(先賢)들의【아마도 글자가 빠진 듯하다】 풍조에 힘입은 것이 아니겠습니까?아! 기축(己丑 1589)년의 변고가 진신(搢紳)들로부터 나왔을 때 만약 조정에서 협력하여 같은 마음으로 함께 분노하며 간적(奸賊) 정철(鄭澈)이 세상을 속였던 상황을 극진히 간언하였다면 어찌 사림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겠습니까. 간적 정철은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가 때를 틈타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려 이미 조정에 섰던 명사들을 죽이고, 산야에 은거하던 선비들마저 살해하였습니다. 벼슬길의 풍파는 옛날에도 있었지만, 어찌 산림에 숨어 수양하면서 도학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던 자들까지 아울러 역모를 꾸몄다는 화(禍)를 입힐 수 있겠습니까? 고금 천하에 참으로 원통함이 심합니다. 율곡은 비록 사람을 알아보는 것에 밝지 못하였으나 본심은 선량하니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일을 담당하게 했다면 반드시 살육의 재앙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찌 간적 정철처럼 사납고 강퍅하며 화를 잘 내는 사람과 같겠습니까.곤재(困齋) 선생께서 평생 사도(師道)를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고 성리학의 근원을 정밀히 연구하여 사도(斯道)를 창도하고 밝히셨으니, 후생 소자들이 모두 그의 문하에 나아가면 반드시 예법으로 자신을 단속하였는데, 저 정철은 해학하고 방종하였으니 절의로 맑고 담박하며 스스로 고상한 자들을 몹시 시기하는 바가 지극하였습니다. 이에 배절의론(排節義論)을 지어내어 때를 틈타 모함에 빠뜨리고 심지어는 북쪽 변방으로 귀양 보내어 죽게 하였습니다. 그 아우 정대청(鄭大淸)은 형이 비명에 돌아가심을 애통해하여 상복을 입고 슬피 울부짖다가 14년 만에 말라 죽게 되었으니, 떳떳한 본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이런 일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습니까?십여 년 이래로는 공의(公議)가 지극히 엄중하고 인심(人心)을 속이기 어려워 초야의 선비들이 자주 상소를 올려 은혜를 바랐고 조정에서도 대신들이 자주 진언을 하였으며, 옥당(玉堂)에서는 차자(箚子)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서로 먼저 죽자고 하는 친구가 조정에 없었고 지성으로 힘써 간쟁(諫爭)하러 나서는 자도 없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통곡이 나올만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삼가 생각건대 고명(高明)께서 반드시 함께 아파하고 불쌍히 여기며 계실 것인데 그 또한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존형께서 서관(庶官)97)의 반열에 있어 손을 쓸 처지가 아님을 알지만, 상서(尙書)의 두 대인(大人)께서 때때로 인재를 선발하거나 도를 논하는 책임이 있으시니, 형님께서 조용히 그 사이에서 억울한 죄상을 뒤집어쓴 원한을 풀어주신다면 무덤 속에서 감읍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사도(斯道)를 붙들고 국가의 명맥을 연장하는 큰 기틀이 될 것입니다. 오직 우리 형님의 깊은 계책을 믿고 성기(聲氣)98)에 의탁할 뿐입니다. 감히 마음속의 일을 진술하였으니 불쌍히 여기고 살펴 주시어 지극한 뜻에 부합되기를 바랍니다. 크게 바라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向也, 仍公偶進, 雖得一餉之款, 而壓尊堂上, 不克細話, 穩承緖論, 迨增憒憒. 卽日淸和, 令攝理毖重潤. 年踰五十, 始霑一命, 白首風埃, 有甚心情. 身經大患, 又有老母知舊, 咸謂伸雪階梯, 乃敢輒渝素守, 碌碌奔走, 未知畢竟所成何事, 有愧初服, 良切自悼. 我朝二百年間, 灼然有以探源乎洙泗, 接響乎洛建者, 有幾人哉. 麗末鄭圃隱始闡性理之學, 其後寒暄一蠹靜庵晦齋四先生, 相繼而起道學, 始明於世, 而皆不免奇禍, 其道不得大行, 己卯乙巳士禍慘矣, 尙忍言哉. 斬伐消鑠之餘, 退溪南冥出於其間, 倡起斯文. 聖明初年崇儒重道, 一代賢才, 蔚爲世用, 人皆向善, 世道可觀. 如吾輩亦聞風而興起者, 吾兄之提起此心, 豈非有賴於先正【恐缺遺字】風耶. 嗚呼。己丑之變, 出於搢紳, 如使朝廷諧協, 同懷共憤, 極陳鄭賊欺世之狀, 則豈有延及士類之理. 奸澈挾憾乘時, 陷人於機穽, 旣殺立朝名流, 又殺山野高蹈. 宦海風波, 古亦有之, 安有藏修林下以道學自任者, 幷被弑逆之禍耶. 古今天下, 寃亦深矣. 栗谷雖知人不明, 素心良善, 使斯人當此事, 必無殺戮之禍. 夫豈如奸澈狠愎悻悻者乎. 困齋平生, 以師道自任, 硏精性理之源, 倡明斯道, 後生小子, 咸造其門, 必以禮法自持, 彼其恢諧放曠, 以節義淸淡自高者, 深有所忌克至. 是乃出排節義之說, 乘時傾陷, 至於竄死朔北. 其弟大淸, 痛兄非命, 服喪悲號, 十四年而枯死, 人有秉彝, 孰不動心於斯乎. 十許年來, 公議至嚴, 人心難誣, 草野之士, 累上章乞恩, 朝廷亦有大臣敷奏, 玉堂陳箚. 而却緣無相先相死之友於朝, 不見出血誠力爭者, 可謂長痛哭處也. 竊念高明, 必同病相憐, 其亦念及於此否. 固知尊兄在庶官之列, 無下手地, 尙書兩大人有銓時論道之責, 令兄可從容其間, 以解覆盆之寃, 則豈但爲竁中之感泣, 抑亦扶斯道壽國脈之一大機. 惟吾兄熟計之恃, 有聲氣之托. 敢陳心裏之事, 幸加憐察, 以副至意. 不勝大願. 한백겸 1552~1615.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1579년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 관직 생활을 하였으나, 1589년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가 임진왜란으로 사면되고, 다시 벼슬에 기용되었다. 특히 선조가 인재를 천거하라는 명령에 정탁은 한백겸을 재략(才略)이 있는 인물로 추천하기도 하였다. 그는 《주역》에 뛰어났으며, 실증적이고 고증학적인 학술 경향이 있다. 저술로는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기전고(箕田考)》와 문집 《구암유고(久菴遺稿)》가 있다. 초복(初服) 벼슬하기 전에 입던 옷이라는 뜻으로, 벼슬을 떠나 처음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 은거함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의 "물러가 다시 나의 초복을 손질하리.〔退將復修吾初服〕"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유학 원문의 '수사(洙泗)'는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를 지나는 두 개의 강물 이름으로, 이곳이 공자의 고향에 가깝고 또 그 강물 사이의 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보통 유학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정주학(程朱學) 원문의 '낙건(洛建)'은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주희(朱熹), 또는 그들의 학문인 정주학을 가리킨다. 정호와 정이는 낙양(洛陽)에서, 주희는 복건(福建)에서 살며 강학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4년)에 일어난 사화. 훈구파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이상 정치를 주장하던 사림파(士林派)를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을 말한다.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원년)에 일어난 사화. 윤형원이 윤임 일파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윤임과 함께 했던 사림(士林)이 큰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서관(庶官) 6품 이하의 하급 관원을 이르는 말이다. 성기(聲氣)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한다.〔同聲相應 同氣相求〕"에서 나온 말로, 뜻이 맞는 사람을 말한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영의정 한음 이덕형99)에게 올린 편지 【1610년】 上領相李漢陰德馨書 【庚戌】 가을 기운이 싸늘한데, 삼가 대감의 기거가 평안하고 강녕하십니까?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하여 대감의 덕스러운 모습을 흠앙하였던 한결같은 제 마음은 감히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제 가문은 불행히도 흉화(凶禍)가 거듭 닥쳐와서 아우의 초상을 치른 지 오래되지 않아 형이 또 세상을 등졌으니 슬프고 참혹하여 스스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연로한 어머니의 노년에 양식을 마련할 길이 없어 구차하게 우관(郵官)100)을 보전하며 보잘것없는 것에 머뭇거리고 있으니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가만히 들으니 상국께서 밀어주고 끌어주신 뜻이 매우 크다고 하는데, 용렬한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지극한 뜻에 부응하겠습니까? 한갓 감회만 깊을 뿐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원통함을 푸는 일은 이윽고 임금의 뜻을 돌려 이승과 저승을 지극히 감동시켰으며 경사가 사림(士林)에 관계되는 일이니, 무릇 혈기가 있는 자 중에 누구인들 흔쾌히 여기며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조정의 처리와 결말이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관직만 회복시키고 적몰(籍沒)101)했던 재산만 지급해주는 정도라면 어떻게 민심을 기쁘게 하고 정기가 펼쳐지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경함(景涵)【이발(李潑)의 자(字).】 형제는 효성스럽고 공손한 사람인데 대궐문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죽음을 당하였으니 그 원통함이 아마도 천지에 다 하였을 것입니다. 곤재(困齋) 선생은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경서를 궁구하고 항상 스승의 도리로 자임하였으나 함께 잔혹한 수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아우 정대청은 슬픔을 머금고 상복을 입은 채 결국 말라 죽게 되었으니 천고의 고통 중에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습니까? 수우당(守憂堂) 최영경(崔永慶)은 오로지 기상과 의리를 숭상하여 한결같은 절조를 지닌 고상한 선비에 지나지 않았으며 포증(褒贈)102)이 이미 지극하였습니다. 곤재 선생께서 평생토록 이룩한 학문의 조예는 한 가지 절조만 지닌 선비와 견줄 수 없거늘, 세상에 도(道)를 아는 자가 없으니 누가 이분을 알 수 있겠습니까.생각건대 상공께서 선을 좋아하고 선비들을 사랑하심은 진심에서 우러나왔고, 억울함을 슬퍼하며 풀어주심은 정성스러운 마음에서 절로 나왔으니, 이러한 큰 기회를 맞이하여 마땅히 몸과 마음을 다해 덕을 드러내고 후세에 밝히심이 좋을 것입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고명께서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선진(先進)들께서는 쇠락(衰落)하거나 거의 다 돌아가셨는데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03), 두암(斗巖) 조방(趙垹)104), 사순(士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자(字).】, 숙부(肅夫)105)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자(字).】와 같은 여러 현인들도 이미 고인(故人)이 되셨으니 한 시대의 인물들을 돌아보면 아득해지니, 적을 물리쳐 깨끗이 소탕하는 공(功)을 상공께 바라지 않으면 누구에게 기대하겠습니까? 깊이 생각하시되 빨리 도모하시어 사우(士友)들의 마음에 부응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저처럼 온갖 걱정과 환란 속에서 갖가지 염려들을 덜어내려면 죽음을 각오할 뿐이며 다른 것에는 겨를이 없습니다. 【두 글자가 결락되었다.】 사우(師友)들의 뜻이 중하고 인정상 차마하지 못하였는데 황공하게도 알아주시고 장려해주셔서 마음속에 하나의 떡처럼 맺힌 부분을 직접 토로한 것이니, 다시 바라건대 너그러이 포용하시고 헤아려주십시오. 삼가 절하며 드립니다. 秋氣凉肅, 伏惟台候起居神相休福. 久不聞問, 仰德一心, 不敢少置. 德潤私門, 不幸凶禍荐至, 喪弟未久, 兄又見背, 哀傷慘惻, 不自堪忍. 老母臨年, 辦養無由, 苟保郵官, 碌碌逡巡, 他無足喩者. 仄聞相國推輓之意甚盛, 自惟蹇劣, 將何以副至意? 感懷徒深. 竊念伸寃事, 已得回天, 感極幽明, 慶關士林, 凡有血氣, 孰不欣忭. 第未知朝家處置結末如何, 只復其官, 只給籍沒, 則奚足以快人心, 而伸正氣乎. 景涵【李潑字也】兄弟, 以孝悌之人, 閤門騈首就戮, 其爲寃抑, 窮天極地. 至於困齋, 白首窮經, 常以師道自任, 而並爲毒手所陷. 其弟大淸, 含哀服素, 竟至枯死, 千古之痛, 孰甚於斯. 守愚堂專尙氣義, 不過一節之高士, 而褒贈已極. 困齋平生, 學問造詣, 非一節之可擬, 世無知道者, 誰能識此人. 惟相公好善愛士, 發於赤心, 悼屈伸枉, 出自悃愊, 當此大機會, 宜盡心力, 暴揚其德, 昭揚後世, 可也. 不審高明之秤量如何. 先進凋落殆盡, 如鵝溪斗巖士純【金鶴峯字也】肅夫【金東岡宇顒字也】諸賢, 皆已作古人, 顧瞻一世人物渺然. 摧陷廓淸之功, 非有望於相公而何願. 熟思而亟圖之, 以副士友之心, 幸甚幸甚. 如德潤憂患叢中, 百念消歇, 分死而已, 他無暇.【缺兩字】 師友義重, 情不自忍, 辱荷知獎, 直吐出胸中一餠結, 更冀寬容以裁之. 謹拜以聞.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이다. 우관(郵官) 우편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벼슬아치로, 역(驛)의 찰방(察訪), 역승(驛丞)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적몰(籍沒) 적록(籍錄)하여 몰수(沒收)하는 일을 말하는데, 중죄인의 재산 또는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재산을 관가의 문적(文籍)에 적고 모두 거둬들이는 것을 말한다. 포증(褒贈) 나라에서 포창하여 관직을 추증하는 것이다.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로, 1561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고 북인의 영수가 되었다. 1591년(선조24) 서인 측 대신인 좌의정 정철(鄭澈)로 하여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건의하게 만들고, 이를 빌미로 정철,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등 서인의 주요 인물들을 대거 축출하고 권력을 잡아 서인으로부터 소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조방(趙垹) 1557~1638.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극정(克精) 호는 두암(斗巖)·반구정(伴鷗亭)이다. 생육신 조려(趙旅)의 현손이다. 숙부(肅夫)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의 자(字)이다. 호는 동강(東岡)이며 시호는 문정(文貞). 조식(曹植)의 문인이며 경상북도 성주 출신으로 조선시대 병조참판, 예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상세정보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