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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길이 보내준 시에 차운하다 次朴季吉見贈韻 예로부터 별과 산악에 신령한 정기 내리니153)153) 별과……내리니 : 별과 산악의 정기가 모여 훌륭한 인물이 태어난다는 뜻이다. 《시경》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높고 높은 산악이 치솟아 하늘에 이르도다. 산악이 신을 내려 보와 신을 낳았도다.[崧高維嶽, 駿極于天. 維嶽降神, 生甫及申.]"라고 하였다.높이 청운에 오를 날 있을 줄 알겠네명월주 특이한 광채에 사람들 모두 놀라고양춘곡 새로운 소리에 뉘라서 다시 화답할거나154)삼 천리 떨어진 외진 변방에서 객지살이 하니청명한 시대의 제일가는 명류를 저버렸네육안155)이라 늦게 알게 된 것 스스로 부끄러우니이제부턴 세한의 맹세156) 길이 맺으리 由來星岳降神精高步靑雲認有程明月人皆驚異彩陽春誰復和新聲羈遊絶塞三千里孤負淸時第一名肉眼自慚相識晩從今永結歲寒盟 양춘곡은……화답할거나 박계길의 훌륭한 시에 화답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양춘곡은 고아한 시문을 비유하는 말로, 여기서는 박계길의 원시를 뜻한다. 초나라 서울 영(郢)에서 노래를 잘하는 어떤 사람이 처음에 통 유행가인 〈하리파인(下里巴人)〉을 부르자 그 소리를 알아듣고 화답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는데, 나중에 〈양춘백설(陽春白雪)〉이라는 수준 높은 노래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십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文選 卷28 對楚王問》 육안(肉眼) 불가에서 말하는 오안(五眼) 중 하나로, 지혜의 안목이 없는 범부의 눈이란 뜻이다. 자신의 눈 또는 안목에 대한 겸사로 쓰인다. 세한의 맹세 어지러운 세상에도 절조를 잃지 않겠다는 맹세를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송백(松柏)이 나중에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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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노첨에게 장난삼아 주다 戲崔魯詹 열두 구슬 누대 상제의 궁궐아득한 푸른 구름 어찌 하면 올라갈 수 있을까요지의 천도복숭아 천년 푸르고233)옥정의 연꽃은 열 길로 붉구나234)선녀는 높은 하늘 위에서 절로 한가롭고속세 사람은 비단 안에서 부질없이 늙어가네만약 다시 삼생의 약속을 지키려한다면나를 금문의 대은옹235)에게 데려다 주게나 十二瓊樓上帝宮綠雲超遞思何窮瑤池桃實千年碧玉井蓮花十丈紅仙女自閒霄漢上世人虛老綺羅中若爲更踐三生約邀我金門大隱翁 요지의……푸르고 곤륜산(崑崙山) 위에 있는 요지(瑤池)라는 연못은 선녀(仙女)인 서왕모(西王母)가 사는 곳이다. 서왕모가 키우는 반도(蟠桃)라는 복숭아는 3천 년에 한 번 꽃이 피고 3천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데, 이 복숭아 열매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고 한다. 《太平廣記 卷3》 옥정의……붉구나 옥정(玉井)은 여산 꼭대기에 있는 못 이름이다. 〈화산기(華山記)〉에서 "산꼭대기에 못이 있고 잎이 천 개 달린 연꽃이 피는데, 그것을 입으면 날개가 돋는다.[山頂有池, 生千葉蓮, 服之羽化.]"라고 하였다. 금문의 대은옹 금마문(金馬門)은 한대(漢代)의 궁문으로 학사(學士)들이 대조(待詔)하던 곳인데 궁문 옆에 동마(銅馬)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한 무제(漢武帝) 때 낭관(郞官)으로 있던 동방삭(東方朔)이 술이 거나할 때면 "속세에 숨어도 지내고, 금마문에서 세상을 피하기도 하네. 궁전 안에서도 세상 피하고 몸을 온전히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깊은 산속의 띳집 아래에 숨어 살겠는가?[陸沈於俗, 避世金馬門. 宮殿中可以避世全身, 何必深山之中蒿廬之下?]"라고 노래하였다고 한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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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안국76)이 《춘추집전》을 올린 것에 대한 전문 胡安國進春秋集傳箋 총명한 임금께서 번거로운 만기에 임하니경전 주석은 반드시 안사고에게 도움을 받았네.《춘추》는 백왕의 법이 되었는데강학은 은미함을 밝히는 것보다 중요한 게 없어라.이에 제가 들은 것을 드러내어감히 《집전》을 바치네.삼가 보건대 주나라의 수레가 돌아오지 않은 후로77)왕의 기강이 점차로 무너진 상태로 되었네.〈서리〉가 〈국풍〉으로 떨어지니오호라! 송성은 이윽고 끊어졌어라.78)전쟁으로 제향이 변하였으니다하였구나, 왕의 자취가 사라져버렸네.하늘이 그 사이에 성인을 낳아서이윽고 당대에 사문을 맡게 하였어라.무도함을 내가 바꿀 것이니사방의 법이 되길 바라네.행해지 않음을 내 아나니이에 만대에 모범을 드리우고 싶노라.이에 조화공의 붓을 휘둘러이에 사씨의 책을 정리하네.그 군주를 높이고 그 신하를 억누르니상하의 분수가 어지럽지 않게 되었고,오랑캐에 간략하고 중하에 자세하니내외의 구분이 엄격하였어라.그 서술 체제를 밝히면 기원으로 '년'을 삼았고대일통은 곧 달에 왕을 더하였네.재변을 기록하니 하늘과 사람의 이치가 다르지 않고봉함79)을 기롱하니 적처와 첩의 명분이 질서가 있어라.규구와 소릉80)을 칭송하니세상이 쇠한 것에 아파한 성인의 뜻에 근본 하였고,조돈과 허지81)를 단죄하였으니신하의 숨겨진 악을 처벌함에 엄격하였네.원수는 어찌 차마 하늘을 함께 이리오시해하면 반드시 토벌하기 전에는 장사 지내지 않음을 드러냈네.천자 이백 년 남면의 일을 대신 행하였으니애공 십사 년 서쪽으로 사냥할 때까지 이르렀네.성인의 마음으로 판단하였으니쓸 것을 쓰고 뺄 것은 빼었어라.한결같이 공의를 따랐으니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였네.간사한 자들은 심장이 서늘하였고난신적자들은 담이 오그라들었네.어찌 다만 죄를 토벌하는 부월 같을 뿐이랴아니 또한 의심을 결정하는 시귀라네.이 《춘추》에 어두우면 반드시 가장 나쁘다는 이름을 얻을 것이니82)신하된 자들은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며,그 말을 아는 자는 대사를 처리함에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오더구나 임금으로서 감히 소홀할 것인가.이는 참으로 백대의 스승과 같으니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용납하랴.지난번 잘못된 견해를 고집한 까닭으로드디어 세상과 관련된 대경을 배척하게 되었어라.경연에서 진독의 법을 폐하니위에서 옛날을 고찰할 토대가 없어지고,지공거가 선비 취하는 법에서 빼버리니아래에서 정도로 돌아갈 논의가 사라졌어라.세도가 어둡게 되어버려끝내 오랑캐가 침입하는 변란을 보게 되었네.생각이 이에 이르니저에 대해 다만 마음이 어찌하겠는가.삼가 생각건대, 상성의 자질로 중흥의 책임을 맡아옛날 왕실이 적천에 있다가 성주로 들어간 것83)을 생각하고지금 조정의 계책이 연운84)을 쓸어서 한업을 회복하려 하네.생각하시기를, 적을 이겨 영토 회복이 비록 무를 쓰는데 달렸지만경륜은 반드시 문을 높임을 먼저 해야 한다고.이에 적을 토벌하고 원수에 보복하는 시기에난을 다스려서 올바름으로 돌아가는 이 법을 중하게 여겼네.그러나 나를 알고 나를 죄준다는 깊은 뜻85)을실로 어리석은 선비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반드시 자신의 마음으로 그 마음을 헤아려서 그 뜻을 드러냄은모름지기 석유를 기다린 뒤에 성취할 수 있누나.신의 경우는 천 번 생각해야한마디 말을 놓을 수 있네.삼가 생각건대, 받은 품성이 다만 용렬하여도를 보아야 실천하는 정도라네.내가 가르침을 받은 바 있어공손홍의 곡학아세는 비록 부끄럽게 여기지만,네86)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동중서의 재이론87)으로 흘러갈까 두려워라.외람되이 주석을 찬집하라는 명을 받들었는데저술의 능치 못해 부끄러워라.선택이 정밀치 않고 말이 자세하지 않으니비록 말 너머에서 뜻을 얻지는 못하지만,그 말을 인하여 그 뜻을 구한다면역사 너머 전하는 마음을 거의 잃지 않을 것이라.연석을 보관한 것88)과 절로 같으며곧 요동 돼지를 바친 것89)을 본 뜬 것이라.혹여 전하께서 들어봐 주신다면초동 같은 말을 굽어 재택해주소서.학문은 반드시 강론해야 밝혀지니어찌 다만 궁리정심의 중요한 도뿐이랴.일은 마땅히 의로써 판단해야 하니실로 경세안민의 큰 기틀과 관련되누나. 四聰莅萬機之煩制治必資於師古一經爲百王所法講學莫要於明微玆效孤聞敢進集傳竊觀姬轍之不返馴致王綱之漸頹黍離降國風嗟呼頌聲之旣絶干戈變俎豆已矣王迹之云亡天生將聖於其間已任斯文於當世無道吾易也冀可爲法於四方不行我知之乃欲垂範於萬代爰揮化工之筆載修史氏之書尊其君抑其臣上下之分不紊略於夷詳於夏內外之辨式嚴明其用則紀元爲年大一統則加王於月記灾變而天人之理無間譏賵含而嫡妾之名有倫善葵丘善召陵本聖人衰世之意罪趙盾罪許止嚴臣子隱惡之誅讐豈忍於共天弑必著於不地行天子二百載南面之事至哀公十四年西狩之時斷自聖心筆則筆而削則削一徇公義是曰是而非曰非奸究寒心亂賊破膽豈但討罪之鈇鉞抑亦決疑之蓍龜昧是經則必蒙首惡之名在人臣猶必學也知其說者於處大事何有況國君其敢忽諸是固百世同師可容一毫異議頃緣執拗之謬見遂斥關世之大經經筵廢進讀之規上無稽古之地貢擧祛取士之式下蔑歸正之論馴致世道之昏終見胡塵之變言念至此彼獨何心欽惟以上聖資任中興責念昔王室居狄泉而入成周在今廟謨掃燕雲而恢漢業謂克復雖在於用武而經綸必先於崇文乃於討賊復讐之秋重此撥亂反正之典然知我罪我之蘊奧實非蒙士之可通必以心度心而發揮須待碩儒而能就如臣千慮可措一辭伏念賦性惟庸見道實淺曰吾有受雖恥公孫弘之曲阿非爾所知恐流蕫仲舒之灾異叨承纂集之命愧之著述之能擇不精語不詳縱未能言表得意因其辭究其旨庶不失史外傳心自同燕石之藏輒效遼豕之獻倘垂荃聽俯擇蕘言學必講而明豈特躬理正心之要道事當斷以義實關經世安民之大機 호안국 자는 강후(康侯),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왕안석(王安石)이 《춘추(春秋)》를 폐하여 학관(學官)의 대열에 끼지 못한 데서 《춘추》의 학문이 쇠퇴한 것을 탄식했다. 이 책을 연구하는 데 20여 년을 보내며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 30권을 저술하였다. 주나라의……후로 주(周)나라 평왕(平王)이 견융(犬戎)을 피해 동쪽 낙읍(洛邑)으로 수도를 옮긴 동천(東遷)을 말한다. 이후를 동주(東周) 혹은 성주(成周)라고 하며, 이를 기점으로 춘추 시대(春秋時代)가 전개되다가, 위열왕(威烈王) 23년에 한(韓), 위(魏), 조(趙)를 제후로 임명하면서 전국 시대(戰國時代)로 돌입한다. 서리가……끊어졌어라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왕도 정치의 자취가 종식됨에 시가 없어졌으니 시가 없어진 후에 춘추가 나왔다.[王者之迹熄而詩亡, 詩亡然後春秋作.]"라고 하였다. '왕도 정치의 자취가 종식되었다'는 것은 주(周)나라 평왕(平王) 때 동쪽으로 천도한 후 주나라의 정교(政敎)와 호령(號令)이 천하에 미치지 못하게 된 것을 이르고, '시가 없어졌다'는 것은 《시경(詩經)》의 〈서리(黍離)〉가 강등되어 국풍(國風)이 되면서 아송(雅頌)이 없어진 것을 이른다. 봉함 봉부증함(賵賻贈含)을 가리킨다. 이 네 가지는 모두 상가(喪家)에 물품을 보내는 것인데, 봉은 거마(車馬)를 보내는 것이고, 부는 재화(財貨)를 보내는 것이고, 증은 의복(衣服)을 보내는 것이고, 함은 주옥(珠玉)을 보내는 것이다. 상례에 임금이 내린 물품을 기록하여 적첩의 대우가 어긋난 것에 대해 기롱함을 의미한다. 규구와 소릉 규구의 회맹은 주(周)나라 양왕(襄王) 원년에 있었던 일로,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제후(諸侯)를 규구에 모아서 수호(修好)하고 왕실(王室)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孟子 告子下》 소릉의 맹약은, 제 환공이 초(楚) 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의 사자 굴완(屈完)과 소릉에서 맺은 맹약이다. 이때 환공은 초 나라가 주(周) 나라 왕실에 공물(貢物)을 바치지 않고 남쪽으로 정벌을 계속하는 죄를 물었다. 《春秋左氏傳 僖公4年》 조돈과 허지 춘추 시대 진(晉)나라 선공(宣公) 2년에 조돈(趙盾)의 사촌인 조천(趙穿)이 영공(靈公)을 도원(桃園)에서 시해하였는데, 조돈은 아직 국경인 산을 넘지 않았을 때 되돌아왔더니, 태사(太史) 동호(董狐)가 '조돈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다.'고 쓰고 그것을 조정(朝廷)에 내보였기 때문에 조돈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으나, 동호는 "당신은 한 나라의 정경(正卿)이면서 달아났으나 미처 국경을 넘지 못했고, 돌아와서도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당신이 아니라면 누구이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춘추》 소공(昭公) 19년 조에, 허(許) 나라 도공(悼公)이 학질을 앓아서 그 아들 지(止)가 약을 지어 드렸더니 도공이 죽었다. 그 사건에 대해 공자가 《춘추》에, "허(許) 세자 지가 그 임금을 죽였다."라고 쓴 것은, 아들이 어버이의 병에 약을 먼저 맛보고 드리는 법인데 허지가 약맛을 보지 않고 드렸으므로 이 도공이 죽었다고 본 것이다. 춘추에……것이니 《사기》 〈태사공자서〉에 "남의 군부(君父)가 되어 《춘추》의 의리에 통달하지 못하면 반드시 최악의 이름을 얻을 것이요. 남의 신자(臣子)가 되어 《춘추》의 의리에 통달하지 못하면 반드시 찬역과 시해의 죄에 빠진다."라고 하였다. 왕실이……것 노(魯)나라 소공(昭公) 22년에 주나라 경왕(景王)이 죽자 왕자 조(朝)가 변란을 일으켰고, 이에 경왕의 적자(嫡子)인 왕자 맹(猛)이 황(皇) 땅으로 파천하였다가 죽었다. 《춘추(春秋)》에서는 이에 대해 기록하기를 "왕실에 변란이 일어나자 유자(劉子)와 선자(單子)가 왕자 맹을 모시고 황(皇)에서 거주하였다. 가을에 유자와 선자가 왕자 맹을 모시고 왕성으로 들어갔는데, 10월에 왕자 맹이 졸하였다.[王室亂, 劉子單子以王猛居于皇. 秋劉子單子以王猛入于王城. 冬十月王子猛卒.]"라고 하였다. 이듬해에 경왕(敬王)이 즉위하였다가 쫓겨나 적천(狄泉)에 나가 있게 되었고, 그 틈을 타 윤씨(尹氏)가 왕자 조를 왕으로 세웠다. 《춘추》에서는 이에 대해 기록하기를 "천왕이 적천(狄泉)에 거주하였다. 윤씨가 왕자 조를 세웠다.[天王居于狄泉. 尹氏立王子朝.]"라고 하였다. 그 뒤 26년에 진(晉)나라 군대가 경왕을 복귀시키자 왕자 조와 윤씨 일족이 초(楚)나라로 도망쳤다. 《춘추》에서는 이에 대해 "겨울 10월에 천왕이 성주(成周)로 들어가고 윤씨와 소백(召伯), 모백(毛伯)이 왕자 조와 함께 초(楚)나라로 도망쳤다.[冬十月天王入于成周, 尹氏召伯毛伯以王子朝奔楚.]"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서는 왕실의 중흥을 말한다. 연운 연운(燕雲) 16주를 가리킨다. 이는 10세기에 요(遼)가 후진(後晋)에서 할양받아 지배한 곳으로 연(燕)은 연경을 중심으로 한 하북(河北) 북부, 운(雲)은 운주(雲州)를 중심으로 한 산서(山西) 북부를 말하는데 연운은 이 두 주(州)를 중심으로 한 만리장성 주변 지역에 해당한다. 휘종은 금(金)나라와 맹약을 맺고 남북으로 요(遼)나라를 협공하여 빼앗겼던 연운(燕雲) 16주를 수복하고자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군사력의 약체를 드러내고 만다. 이를 간파한 금나라는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전쟁 배상금 지불을 미루고 금나라에 대한 도발과 견제를 지속하던 송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남하하였다. 나를……뜻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춘추(春秋)》는 천자가 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는 것도 오직 《춘추》이며 나를 죄주는 것도 오직 《춘추》이다.' 하였다.[春秋天子之事也 是故孔子曰 知我者 其惟春秋乎 罪我者 其惟春秋乎]"라고 하였다. 네 여기서는 자신을 가리킨다. 동중서의 재이론 동중서는 한나라 초기의 학자이다. 그가 주장한 재이론의 요지는 '하늘이 재이를 내려서 군주를 경계시키되, 재이를 여러 차례 내려서 경고해도 태도를 뉘우치지 않으면 덕 있는 사람에게 개명(改命)하도록 한다.'라는 것이다. 《資治通鑑綱目 卷37中》 연석을 보관하는 것 비슷하지만 가짜인 것, 즉 사이비(似而非)라는 뜻이다. 연석(燕石)은 연산(燕山)에서 나오는 돌인데, 옥과 비슷하지만 옥이 아니다. 옛날 송(宋)나라의 어리석은 사람이 이 돌을 오대(梧臺)의 동쪽에서 얻고는 큰 보물이라 여겨 비단으로 몇십 겹을 싸서 잘 보관하였으나 결국 돌멩이로 밝혀져 비웃음을 샀다고 한다. 《琅琊代醉編 燕石》 요동……것 식견이 천박해서 부끄럽다는 뜻의 겸사이다. 요동(遼東)의 돼지가 머리가 흰 새끼를 낳자, 주인이 기이하게 여겨 조정에 바치려고 길을 떠났다가, 하동(河東)에 와서 돼지가 모두 흰 것을 보고는 부끄럽게 여겨 돌아갔다는 요동시(遼東豕)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3 朱浮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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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가가 질병을 물어보고 의원이 찾아온 것90)을 사절하는 전문 孟軻謝問疾醫來箋 참으로 장차 조회하려다가조제한 약이 작은 체구에 갑자기 탈이 났어라.'거의 질병이 나았습니까.'하고살펴봐주시니 남다른 보살핌에 큰 은혜 받았네.임금에게서 명이 내려오니몸 둘 곳이 없어라.삼가 생각건대, 신의 모친이 이사하며 가르쳐스승이 되어 학업을 전하였네.이에 원하는 바는 공자를 배우는 것이니장차 성인의 무리가 될 것이라.만일 혹 꿈에서 주공을 본다면전국시대에 어떻게 처할까.사람들은 다만 공리만을 숭상하고선비들은 대부분 양주, 묵적의 부류로다.어찌 맞이하는 폐백을 받을까비록 전야에서 빈천을 편안히 여긴다고 하여서.또한 인의가 있을 따름이니이에 그 임금과 백성을 요순의 임금과 백성으로 만들고자하네.등공이 정전법을 물음이 한갓 부지런하였고91)위왕의 흉년을 탓하는 것을 어찌 책망하리오.92)임금의 마음은 충분히 천하의 왕 노릇 할 수 있으며제나라는 거의 잘 다스려질 것이라네.지금의 음악과 옛날의 음악이 같다는 말은백성들과 좋은 것을 함께 나누라고 깊이 권하는 것이라.작은 용기와 큰 용기라는 말은실제로 삼왕과 아름다움을 짝하라는 것이네.밤에 안부가 어떠한가 자주 물으며바야흐로 조정에 대신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네.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쓸모없는 자질이이에 채신의 근심93)에 걸릴 줄을.공이 불러 가는데감히 멍에 매는 것을 천천히 하랴.오늘 병이 났으니느즈막이 들어가 인사를 올릴 것이라.명을 집에 하루 묵혔다는 벌이 스스로 두려우니도리어 살고픈 마음이 생겼어라.특사를 보내 위문하여 번거롭게 하였으니능히 임금의 존귀함을 잊을까.양의에게 진찰을 맡겨삼 대의 의술94)을 펼치도록 하였네.옥음이 한번 내려지자임금의 은총이 배나 더하였어라.어찌 다만 자제와 문생만 놀랐으랴실로 대부국 백성들의 본보기가 됨이랴.더구나 이미 병이 나았으니다만 집에서 받들 수가 없어라.귀수가 고황을 들어가지 않았으니감히 의원을 물리쳐 병을 속이랴.임금의 명이 초개처럼 헛되이 버려졌으니참으로 분수에 지나쳐 허물을 부를까 두려워라.이는 대개 대왕께서부모가 자식의 병을 걱정하는 마음으로천지가 살려주기 좋아하는 덕을 체득한 것이네.임금과 고갱의 신하가 한 몸이 되니내 몸에 병이 든 것처럼 여겼어라.작위와 나이와 덕은 모두들 삼존이라 여기니오직 서로 만날 즈음에 반드시 공경해야 하네.약을 쓰지 않고 낫는 가벼운 병인데세상에 없는 특별한 은혜를 그릇 내렸어라.신이 감히 아랫사람이 되어 충성을 바치고임금을 섬김에 예를 다하지 않으랴.그 주군을 공경하여 그 사신과 함께 앉은 것95)은공자를 본받지 못하였지만,사람이 항심이 없으면 의원이 될 수 없어96) 모욕을 받는 것은항상 《역》의 괘사에서 경계하였네.97) 固將朝也調劑遽失於微軀庶無疾歟問視兼荷於殊眷自天有命無地措躬伏念臣母遷敎成師傳業就3)乃所願學孔子將爲聖人之徒如或夢見周公奈處戰國之世人惟功利是尙士皆楊墨之流何以聘幣爲哉雖安貧賤於畎畝亦惟仁義而已乃欲堯舜其君民滕公之問井徒勤魏王之罪歲何責君心足以王矣齊國其庶幾乎今樂古樂之言深勸同好於百姓小勇大勇之說實欲匹休於三王數問夜如何其方待朝旣盈矣詎意散樗之質載罹采薪之憂自公召之行敢緩於俟駕今日病矣入莫遂於鞠躬自懼宿命之誅反紆欲生之愛煩訊問於專价能忘一人之尊委診視於良醫俾效三世之術玉音一下龍光倍增豈惟弟子門生之驚惶實爲大夫國人之矜式矧惟已瘳之疾不得祗承于家鬼竪不入膏肓非敢忌醫而諱疾君命虛委草芥正恐逾分而招尤玆盖伏遇大王以父母憂疾之心體天地好生之德元首股肱爲一體若痌癏于乃身爵位齒德通三尊惟交際之必敬至於勿藥喜之微恙謬加不世有之異恩臣敢不爲下克忠事君盡禮敬其主以及其使與坐未效於宣尼人無恒不可作醫承羞常戒於易卦 맹가가……것 《맹자》 〈고자하(告子下)〉에 맹자가 제나라 왕에게 조회하러 가려다가 제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 자신이 맹자를 찾아보려하였는데 감기에 걸려서 갈 수 없으니 조회에 나오시면 어떻겠냐고 하자, 맹자도 자신도 감기에 걸려서 갈 수 없다고 대답한 내용이 보인다. 등공이……부지런하였고 《맹자》 〈등문공상(滕文公上)에 보인다. 위왕의……책망하리오 《맹자》 〈양혜왕상(梁惠王上)〉에 보인다. 채신의 근심 몸에 병이 난 것을 말한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어제는 왕명이 있었지만 채신의 근심이 있어 조회에 나가지 못하였는데, 오늘은 병이 조금 나아 조정에 달려 나갔습니다.[昔者有王命, 有采薪之憂, 不能造朝. 今病小愈, 趨造於朝.]"라고 하였다. 병이 나면 땔나무를 하지 못하여 근심한다는 뜻으로 자신의 병을 겸손하게 지칭하는 표현이다. 삼 대의 의술 《예기(禮記)》 〈곡례하(曲禮下)〉에 "3대에 걸쳐서 치료해 줄 정도로 경험이 풍부한 의원이 아니면 그 약을 복용하지 않는다.[醫不三世, 不服其藥.]"라고 하였다. 그……것 《논어》 〈헌문(憲問)〉에 "거백옥(蘧伯玉)이 공자에게 사람을 보냈는데, 공자가 그 사람과 함께 앉아서[與之坐]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였는데, 그 주에서 주자는 "공자가 사람과 앉아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 주인을 공경하여 그 사람에게도 공경이 미친 것이다.[敬其主以及其使]"라고 하였다. 사람이……없어 《논어》 〈자로(子路)〉에 "남쪽 사람이 하는 말에 '사람이 항심이 없으면 무당이나 의원도 될 수 없다.' 하였다.[南人有言曰, 人而無恒, 不可以作巫醫.]"라고 하였다. 모욕을……경계하였네 《주역(周易)》 〈항괘(恒卦) 구삼(九三)〉에 "그 덕이 일정하지 못한지라, 혹 수욕을 당할 수도 있다.[不恒其德, 或承之羞.]"라고 하였다. '就'자는 변려문의 형식으로 내용으로 보아 연문(衍文)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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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 조정의 여러 신하들이 지름 한 자나 되는 구슬을 보배로 여기지 않음98)을 하례한 것에 대한 전문 齊朝羣臣賀不寶徑寸珠 두 임금이 연회 벌이는 우호를 마련하니규벽의 의식이 빛났어라.열 개의 연성의 보물99)을 천하게 여기니위대하구나! 금과옥조 같은 말이여.빛이 자리에 더하니그 광채는 이웃나라까지 비추도다.삼가 살펴보건대 국가가 흥성하고 쇠퇴하는 이유는실로 인물들이 훌륭하고 못남에 달려 있어라.요임금이 팔개100)를 등용하니능히 구슬을 내던지는 정치101)를 도왔으며,주가 삼인102)을 내쫓으니끝내 옥이 타는 화103)를 자초하였네.오직 공은 왕의 덕에 걸맞으니104)그 거울은 은나라에 있어라.삼가 생각건대, 보위에 날마다 임하니요도105)를 하늘이 열어주었네.재물을 길하게 여기지 않으니106)초나라 조정에서 박옥을 바치는 신하가 없으며,107)보배로 삼은 것은 다만 어진 이뿐이니상나라의 부열은 쇠를 다룰 때의 숫돌108)이 되리라.사용하는 물건의 귀함과 특이한 물건의 천함을 구별하면먼 곳의 사람이 이르고 가까운 곳의 사람이 편안하게109) 될 것이라.이에 의를 사모하는 임금과친목을 도모하는 예를 거행하였으니,어찌 명옥의 모임을 도모하여갑자기 구슬을 지녔다고 자랑하리오.앞뒤로 열 대의 수레를 비추는 광채는밝은 달에 뒤지지 않고,크고 작은 지름 한 치의 아름다운 모습은또한 야광주보다 뛰어나도다.어찌 진나라 사람을 포로로 삼으리오이것이 바로 위나라의 보배로다.110)그러나 대왕이 좋아하는 것은 이와 다르니저 하찮은 물건을 어찌 보물로 삼으랴.내 어느 겨를에 이런 것을 지니랴삼품 보기를 초개처럼 가볍게 여기네.나는 비난함이 없으니쌍남금111)보다 중한 네 신하가 있어라.112)이 사람들을 사방의 변경에 기용하니능히 천리를 비출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네.그 장단을 비교해보면빛으로 덮는 효과가 이미 현격하고,저가 사물로 하거든 나는 사람으로서 하니진심으로 숭상하는 실상을 볼 수 있으리라.장차 강직한 선비가 있거든그 조정에 서기를 원하리라.누가 경계시키랴, 발뒤꿈치 잘린 사람이깊이 숨어서 팔지 못하게 함을.오색의 곤룡포를 앞 다퉈 기우니환하게 한 나라의 빛이 되누나.이는 실로 왕도나 패도가 되는 큰 기틀이니어찌 사직의 큰 복이 아니리오.삼가 생각건대, 신들은 모두 하찮은데다행이도 밝고 밝은 임금을 만났으니옥섬돌에서 가슴을 열어서비록 낭간113)을 바칠 수는 없지만구슬 면류관에 절을 올리면서강릉의 축원114)을 펼치누나. 修兩君反坫之好粲然奎璧之儀賤十枚連城之珍大哉金玉之語光增一座彩動隣邦竊觀國家隆替之由實係人物輕重之分堯登八凱能贊投珠之治紂斥三仁終招焚玉之禍惟王恊帝厥鑑在殷恭惟寶位日臨瑤圖天啓非貨其吉楚庭無獻璞之臣所寶惟賢商弼效若金之礪別用物異物之貴賤致遠人邇人之格安玆與慕義之君誕擧修睦之禮何圖鳴玉之會遽以有珠爲誇前後照十車異彩不減於明月大小徑一寸奇形亦超於夜光何用晉人之俘斯乃魏國之寶然大王所好之異是彼小物豈足以爲珍我遑有哉視三品輕若一芥吾無間矣有四臣重於雙南是用于藩四方可謂能照千里量其長較其短光被之效旣懸彼以物我以人心尙之實可見將使有脛之士願立於朝誰戒刖足之人深藏不市爭補五色之袞蔚爲一國之光玆實王覇之大機豈非社稷之宏福伏念臣等俱以瑣瑣幸遭明明披腹瑤墀縱乏琅玕之獻拜手珠冕庶申崗陵之呼 제나라……않음 전국 시대에 제 위왕(齊威王)과 위 혜왕(魏惠王)이 회동했을 때, 위 혜왕이 제 위왕에게 말하기를, "과인(寡人)의 나라는 비록 작으나, 차량(車輛)을 앞뒤로 각각 12승(乘)을 환히 비출 수 있는 경촌(徑寸)의 구슬이 10매(枚)나 있습니다." 하니, 제 위왕이 자신은 훌륭한 신하들을 보배로 여길 뿐, 구슬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연성의 보물 화씨벽(和氏璧)의 이칭이다. 화씨벽을 연성이라고 한 것은 진(秦)나라 소왕(昭王)이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에게 15성(城)과 바꾸자고 청했기 때문이다. 《史記 廉頗藺相如列傳》 팔개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보이는 인물로 옛날에 고양씨(高陽氏)가 재주 있는 아들 여덟이 있었으니, 8개(凱)라 하였다. 구슬을 내던지는 정치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10〉 정관(貞觀) 10년에 "요순이 벽옥을 산에 버리고 구슬을 골짜기에 던졌다.[堯舜抵璧於山 投珠於谷]"라고 하였다. 이는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이 벽옥(璧玉)을 산에 던지고 진주를 골짝에 던져서 진귀한 보물을 좋아하는 음탕하고 간사한 욕심을 막았던 고사를 말한다. 삼인 《논어》 〈미자(微子)〉에 "미자는 떠나가고, 기자는 종이 되고, 비간은 간하다가 죽었는데, 공자가 '은나라에 세 사람의 인자(仁者)가 있었다.'라고 하였다.[微子去之 箕子爲之奴 比干諫而死 孔子曰 殷有三仁焉]"라고 하였다. 옥이 타는 화 《서경(書經)》 〈윤정(胤征)〉에 "곤륜산에 불이 나면 옥과 돌이 다 타고 만다."라고 하였으니, 나라에 난리가 나면 착한 사람이고 악한 사람이고 모두 화를 당한다는 말이다. 공은……걸맞으니 《서경》 〈순전(舜典)〉에 "옛날 순 임금을 상고해 보니 중화가 요 임금에 합치하였다.[曰若稽古帝舜 曰重華協于帝]"라고 하였다. 제나라 후작(侯爵)인 위왕이 천하의 왕이 될 만한 덕을 지녔다는 말이다. 요도 제왕의 세계(世系)를 이른다. 재물을……않으니 《서경》 〈주서 경명(冏明)〉에서 "사람을 길하다고 아니하고 재화를 길하다고 하면[非人其吉, 惟貨其吉.] 그 관직을 병들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의 의미를 반대로 구사하였다. 초나라……없으며 제나라 조정에서는 옥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초(楚)나라 변화(卞和)가 산중에서 박옥(璞玉)을 얻어 두 차례에 걸쳐 여왕(厲王)과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두 번 다 옥인(玉人)에 의해 박옥이 아닌 돌로 감정되어, 두 번에 걸쳐 좌ㆍ우측 발꿈치를 다 잘리었다가, 문왕(文王)이 즉위한 뒤에야 진짜 박옥임이 밝혀졌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韓非子 和氏》 쇠를……숫돌 《서경》 〈열명 상(說命上)〉에 "쇠를 다룰 때라면 너를 써서 숫돌을 만들고 큰 냇물을 건널 때라면 너를 써서 배와 노를 만들고 큰 가뭄이 든 때라면 너를 써서 비를 만들리라.[若金, 用汝作礪, 若濟巨川, 用汝作舟楫, 若歲大旱, 用汝作霖雨.]"라 하였다. 사용하는……편안하게 《서경》 〈여오(旅獒)〉에서 "무익한 일을 하여 유익한 일을 해치지 않으면 공이 이에 이루어지며, 특이한 물건을 귀하게 여기고 사용하는 물건을 천히 여기지 않으면 백성들이 이에 풍족하며, 개와 말이 지방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면 기르지 말며, 진기한 새와 짐승을 나라에 기르지 마소서. 먼 지방의 물건을 보배로 여기지 않으면 멀리 있는 사람이 오고, 오직 현자만을 보배로 여기면 가까운 사람이 편안할 것입니다.[不作無益, 害有益, 功乃成; 不貴異物, 賤用物, 民乃足. 犬馬非其土性, 不畜, 珍禽奇獸, 不育于國. 不寶遠物, 則遠人格; 所寶惟賢, 則邇人安.]"라고 하였다. 위나라의 보배로다 위무후(魏武侯)가 배를 타고 서하(西河)를 따라 내려가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오기(吳起)에게 "아름답구나, 산하의 견고함이여! 이것은 위(魏)나라의 보배다.[美哉乎山河之固 此魏國之寶也]"라고 말하였다. 쌍남금 보통 금보다 두 배의 값이 나가는 중국 남방에서 생산된 금을 이른다. 네 신하가 있어라 제위왕이 말한 네 신하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단자(檀子)라는 자에게 남성(南城)을 지키게 하면 초(楚) 나라 사람이 노략질하지 못하고, 반자(盼子)라는 자에게 고당(高唐)을 지키게 하면 조(趙) 나라 사람이 황하에서 물고기를 잡지 못하고, 검부(黔夫)라는 자에게 서주(徐州)를 지키게 하면 제 나라가 쳐들어올까 두려워 연(嚥) 나라 사람은 북문에서 제사 지내고 조 나라 사람은 서문에서 제사 지내며, 종수(種首)라는 자에게 도적을 방비하게 하면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줍지 않습니다. 이 네 신하는 장차 천 리를 비출 것이니 어찌 다만 12승뿐이겠습니까." 《通鑑節要 卷1》 낭간 옥(玉) 비슷한 일종의 아름다운 돌을 말하는데, 전하여 훌륭한 문사(文詞)나 또는 좋은 간언(諫言)을 비유한 것으로, 한유(韓愈)의 착착(齪齪) 시에, "구름을 헤치고 천문에 호소하여, 뱃속을 열어서 낭간을 바치련다.[排雲叫閶闔, 披腹呈琅玕.]" 한 데서 온 말이다. 강릉의 축원 《시경》 〈소아 천보(天保)〉에서 아홉 가지의 예를 들어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이른바 '구여지축(九如之祝)'이 나오는데, 그 중 "산마루와 같고 구릉과 같으며[如岡如陵]"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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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장이 왕봉의 파직을 청하면서 궁에 나아가 일식의 변고에 답한 것115)에 대한 전문 王章請罷王鳳就第以答日食之變 외척이 나라를 천단함을 이미 독차지하였으니태아검의 자루가 거꾸로 된 것을 바야흐로 걱정하네.상천이 견책을 보임이 참람되지 않으니큰 악당이 어찌 권력을 장악함이 마땅하랴.의심하지 말고116) 듣는 것을 감히 더럽히랴하늘이 실제로써 하면 응한다117)는 것을 돕기를 바라네.삼가 보건대, 여후와 곽황후118)가 바야흐로 성할 때둘 다 재이가 거듭 이르게 하였네.여산과 여록119)이 군대의 위엄을 나눠 담당하니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쳤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나라 역사책에 실려 있고곽우와 곽산120)이 함께 나라의 정권을 잡으니일식과 지진이 춘추시대보다 배나 일어났어라.이전 거울에 이에 있으니뒤의 수레는 마땅히 경계해야 하네.삼가 생각건대, 천자는 천지와 도가 합하고일월과 밝음을 짝하네.기자 〈홍범〉의 휴구의 징조121)를 고찰하여서순의 선기를 살펴 칠정을 가지런히 하고122)복희 《주역》의 소장의 이치를 살펴보아서요의 밝음을 잡아 뭇 간사한 이들을 비춰보네.어진 신하들이 도울 것을 바야흐로 기약하니높다란 하늘이 거듭 내린 명을 힘써 맞이하여라.다만 왕봉은 간특하여성상의 총명을 오히려 가리는데처음에는 황태후의 지친으로써높이 오른 것은 외람되이 사랑하는 태자를 세운 덕을 본 것이며마침내는 대장군의 중임을 맡았으니임금의 돌아봄은 실로 은혜를 넓히는 것에서 나왔어라.당시 임금의 총애함이 남다름은 생각하면비록 온 집안이 목숨을 바치더라도 어찌 보답하리오.걸맞는 충성을 바칠 것을 도모하지 않고도리어 방자하게 교만하고 사치하였네.한 집안 다섯 제후의 붉고 화려한 수레가 서로 이어지고사방 제군의 진귀한 뇌물이 다투어 이르네.많은 관리가 그 문에서 나오니한 사람 임금이 헛된 임명권만 잡고 있어라.말단이 커지면 근본은 꺾어지니삼자가 노나라를 전횡123)함에 헤아릴 수 있으며과일이 너무 많으면 뿌리가 다치니육경이 진나라를 쪼갬124)이 이미 그 조짐이라.참으로 마땅하여라, 하늘이 보는 것은 우리 백성에게서 시작하여125)일식이 나를 경계하게 하는 것이.기와 지가 교감함을 속일 수 없으니모양은 그림자를 살펴보면 헤아릴 수 있고하늘과 사람이 서로 어울림은 두려워해야 하니얼음은 반드시 서리를 밟을 때 조심해야 하네.저 간사한 사람이 이미 재앙을 불렀으니상헌에 반드시 용서 받을 수 없어라.문제의 관후함을 본받아비록 박소에게 차마 드러내놓고 죽이진 못하였지만126)소제의 영명함을 체득하여어찌 상관걸에게 가벼운 견책이 없겠는가.127)마땅히 자신의 집에서 자취를 숨기고공조에서 일을 맡게 하지 않아야 하네.이것이 결단하여서 성공한 것128)에 해당하니누가 두터이 대할 자에게 박하게 대한다129)고 하겠는가.몸에 돌이켜 실상을 자책함이비록 하늘에 응하는 일상적인 법이지만어진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들을 물리치는 것은이 또한 재앙을 막는 중요한 방법이라네.분별은 반드시 빨리 하는 게 귀하니뻗어나가면 끝을 잘 마치기가 어려워라.삼가 바라건대, 음이 양을 위협하는 조짐을 깊이 궁구하고신하가 임금을 좌우지 하는 형상을 통찰하여하늘이 미워하는 악을 특별히 배척하고상제가 주신 어진 이130)를 다시 선발하시길.그렇다면 안팎의 의심하는 실마리가 없어질 것이며두 성씨가 큰 복을 받을 것이고종사가 공고해지는 경사가 이어질 것이며훌륭함을 짝할 이에게 만세토록 길이 힘입을 것이라.이것이 바로 재앙을 바꿔서 복으로 만든 것이니어찌 다만 상으로 보이는데 응하지 않으리오.삼가 마땅히 마음은 나라를 걱정하고뜻은 국가를 안정시킴131)이 간절하네.왕릉이 청포에 엎드려 간쟁하는 것132)을 본받으니비록 백마의 맹세133)를 지키지 못하지만,서복의 땔나무를 옮기자는 청134)을 배운다면적제의 기반을 거의 안정시킬 것이네. 外戚之擅國旣專太阿方患於倒柄上天之示譴不僭巨奸豈宜於典權敢瀆勿疑之聽冀贊以實之應竊觀呂霍之方盛咸致災異之荐臻産祿分掌軍威山崩水溢之昭載國乘禹山共秉邦政日食地震之動倍春秋前鑑斯存後車當戒欽惟乾坤合度日月配明稽箕範休咎之徵在舜璣而齊七政察羲易消長之理秉堯哲而照羣邪方期良弼之恊恭懋迓穹昊之申命第惟王鳳之奸慝尙蔽聖上之明聰始以皇太后至親登崇濫荷於立愛終居大將軍重任倚眷實出於廣恩念當宁寵數之非常雖擧族糜捐而曷報莫圖稱效反肆驕奢一姓五侯朱輪華軸之相接四方諸郡寶賂珍幣之爭輸庶官皆出于其門一人徒擁乎虛器末大則本折三子之專魯可虞實煩者根傷六卿之分晉已兆固宜天視之自我而致日變之警予氣志之交感難誣形可占於察影天人之相與可畏氷必謹於履霜彼憸人旣已召灾於常憲必在罔赦法文帝之寬厚縱不忍顯戮於薄昭體昭廟之英明豈可無薄譴於官傑宜使屛跡於私第無俾典事於公朝是所謂惟斷乃成夫孰云所厚者薄反躬責實雖是應天之常經進賢退邪斯亦弭灾之要道辨必貴早蔓難善終伏望深究陰脅陽之徵洞察臣擅君之象特斥天厭之惡更選帝賚之良則絶內外疑逼之端兩姓誕膺乎遐福綿宗社鞏固之慶萬世永賴於匹休斯乃轉灾而爲祥豈但有象而無應謹當心存憂國志切安劉效王陵伏蒲之爭縱未保白馬之盟學徐福徙薪之請庶幾妥赤帝之基 왕장이……것 《역대사선(歷代史選)》 〈한기(漢紀) 효성황제(孝成皇帝)〉에서 "경조윤 왕장이 평소 강직하여 감히 말하였는데, 비록 (그를) 왕봉이 천거하였으나, 왕봉의 전권을 비난하여 왕봉을 친하게 따르지 않더니, 마침내 봉사(봉함 상소)로 아뢰어 말하기를, "일식의 허물(재앙)은 모두 왕봉의 전권으로 군주를 가리운 잘못입니다." 하고, 이에 왕장이 풍야왕이 충신하고 질박하며 정직하다고 추천하였는데, 상이 태자였을 때부터 여러 번 풍야왕의 명성을 들었으므로 바야흐로 (그 말에) 의지하여 왕봉을 대신하고자 하더니, 왕봉이 듣고서 상서로 하여금 왕장을 탄핵하게 하여, 그를 대역죄에 이르게 하여 마침내 옥중에서 죽게 하니, 이로부터 공경들이 왕봉을 볼 적에 곁눈으로 보았다."라고 하였다. 의심하지 말고 《서경》 〈대우모(大禹謨)〉에서 익(益)이 순(舜) 임금에게 아뢴 "간사한 자를 제거하되 의심하지 마소서.[去邪勿疑]"라는 말에서 나왔다. 하늘이……응한다 한(漢)나라 때 왕가(王嘉)가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백성을 감동시킬 때는 행동으로 해야지 말로 하지 않으며, 하늘에 응대하는 것은 실지로 해야지 꾸밈만으로 해서는 안 된다.[臣聞:動民以行, 不以言, 應天以實, 不以文.]"라고 하였다. 《漢書 卷45 蒯伍江息夫傳》 여후와 곽황후 '여(呂)'는 한 고조의 황후 여후(呂后)와 '곽(霍)'은 선제(宣帝)의 황후 곽황후(霍皇后)를 가리킨다. 여후는 척부인(戚夫人)을 인체(人彘)로 만들고 소제(少帝)를 살해하는 등 악명을 떨쳤다. 곽황후는 곽광(霍光)의 딸로 곽광의 후처 현(顯)이 선제의 황후 허씨(許氏)를 독살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들였는데, 곽황후 또한 온갖 악행을 자행하다가 폐위되었다. 《史記 卷9 呂后本紀》 《漢書 卷68 霍光傳》 《史略 卷2 西漢》 여산과 여록 한(漢) 나라 여 태후(呂太后)의 지친으로 여산은 양왕(梁王), 여녹은 조왕(趙王)에 각각 봉해졌다가 태후가 죽자 주발(周勃) 등에게 죽임을 당했다. 곽우와 곽산 한나라 때 곽우(霍禹)와 곽산(霍山)을 말한다. 곽우는 곽광(霍光)의 아들로 선제(宣帝) 때 우장군에 임명되고, 곽광 사후에 대사마에 올랐다. 곽산은 곽광의 증손자로 곽광의 공으로 낙평후(樂平侯)에 봉해졌다. 이들은 뒤에 모반을 꾀하다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漢書 卷68 霍光傳》 기자……징조 임금이 정치를 하는 데에 있어 다섯 가지의 요건, 즉 첫째 외모[貌], 둘째 말[言], 셋째 보는 것[視], 넷째 듣는 것[聽], 다섯째 생각하는 것[思]이 있다. 휴구(休咎)는 화복(禍福)과 같은 말로, 정치를 하는 데에 있어 이 다섯 가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화복이 정해진다는 뜻이다.《書經 洪範》 순의……하고 '칠정(七政)'은 일(日)ㆍ월(月)과 수(水)ㆍ화(火)ㆍ금(金)ㆍ목(木)ㆍ토(土)의 오성(五星)을 말한 것이다.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살펴서 칠정(七政)을 가지런히 한다[在璿璣玉衡齊七政]."라고 하였다. 삼자가 노나라를 전횡 노나라를 전횡한 자들은 대부인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 계손씨(季孫氏)를 가리킨다. 육경이 진나라를 쪼갬 춘추 말기 진나라의 범씨(范氏), 중행씨(中行氏), 지씨(知氏), 한씨(韓氏), 조씨(趙氏), 위씨(魏氏)의 육경을 말하는데, 이들 육경이 국정을 잡고 부국 강병을 도모하다가 서로 겸병(兼竝)하여 진나라를 와해시켰다. 《春秋左氏傳》 하늘이……시작하여 《서경(書經)》 태서 중(泰誓中)에 "하늘은 우리 백성의 눈을 통해 내려다보시고, 하늘은 우리 백성의 귀를 통해 들으신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는 말이 나온다. 문제의……못하겠지만 박소(薄昭)는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후궁인 박희(薄姬)의 남동생으로 한문제(漢文帝)에게는 외숙이 된다. 박소는 대왕(代王)으로 있던 문제를 맞이하여 황제에 즉위시키는 데에 큰 공을 세웠지만, 외척임을 믿고 교만 방자하게 굴었을 뿐만 아니라 문제가 보낸 사자를 죽이자, 문제가 백관을 거느리고 가서 조문하고 자살하도록 하였다. 《資治通鑑綱目 卷3下 文帝10年》 소제의……없겠는가 연왕(燕王) 유단(劉旦)은 한 무제(漢武帝) 셋째 아들로, 태자 유거(劉據)가 무고(巫蠱)의 화에 자결하고 제 회왕(齊懷王) 유굉(劉閎)이 또 죽자 서열상 자기가 즉위하리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무제는 곽광(霍光)만이 충심이 있음을 알고 주공(周公)이 어린 성왕(成王)을 업고 제후들의 조회를 받는 그림을 곽광에게 그려주며 소제(昭帝)를 지켜달라고 부탁하였다. 소제가 즉위하자 연왕은 좌장군(左將軍) 상관 걸(上官桀)과 모의하여 "대장군(大將軍) 곽광(霍光)이 교위(校尉)를 뽑아 늘리고 권세를 독차지하니 딴 뜻을 품었다."라고 모함하는 상소를 소제에게 올렸다. 이에 곽광이 공신각에 들어가 대죄하자, 소제가 곽광을 불러 이 상소가 거짓임을 이미 알고 있다고 하면서 안심시켰는데, 이때 황제의 나이가 14세였으므로 좌우가 모두 놀랐다고 한다. 연왕과 상관걸은 또 황제를 시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비밀이 누설되어 모두 삼족이 멸족되었다. 《漢書 卷68 霍光傳》 결단하여서 성공한 것 한유의 〈평회서비(平淮西碑)〉에서 "이 채주(蔡州)의 난을 평정한 공은 오직 결단을 해서 이룰 수 있었다.[凡此蔡功, 惟斷乃成.]"라는 말에서 나왔다. 두터이……대한다 《대학》 〈경일장〉에서 "그 근본이 어지러우면서 지엽이 다스려지는 자는 없으며, 후하게 해야 할 것에 박하게 하고서 박하게 할 것에 후하게 하는 자는 없다.[其本亂而末治者否矣, 其所厚者薄, 而其所薄者厚, 未之有也.]"라고 하였다. 상제가……이 《서경》 〈열명편(說命篇)〉에서 "공경하고 침묵하며 도를 생각하고 있으니, 꿈에 상제께서 나에게 훌륭한 보필을 주었다. [恭默思道, 夢帝賚良弼.]"라고 하였다. 국가를 안정시킴 '안유(安劉)'는 한(漢)나라 주발(周勃)이 여씨(呂氏) 일족을 무찌르고 유씨(劉氏), 즉 한(漢)나라의 왕실을 평안하게 하였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청포에……것 한 원제(漢元帝) 때에 황제가 병이 난 것을 기화로 태자(太子)를 폐하려 하였는데, 이때 사단(史丹)이란 신하가 청포 위에 엎드려 간함으로써 그 일을 막았다. 이로부터 올바르게 간하는 것을 "복포(伏蒲)"라 부르게 되었다. 《漢書 卷82 史丹列傳》 백마의 맹세 한 고조(漢高祖)는 재위 12년(기원전 195) 삼월 중순경 중병에 걸린 몸을 이끌고 조정의 신하들과 그의 부인 여후(呂后)를 한 곳에 모이게 하여 백마를 죽이고 그 피로 하늘에 맹세하는데, 이것이 바로 한나라 때의 백마지맹(白馬之盟)이다. 백마지맹은 두 가지 내용인데, 첫째는 한나라를 영원히 존속하며 후예들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것으로 한나라가 존속하는 한 신하들 및 그의 자손은 영원히 먹고 마실 것을 얻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고, 둘째는 유씨(劉氏)가 아닌 자가 왕이 되면 천하가 함께 그를 공격하고, 만일 공로가 없이 제후(諸侯)에 오르게 되면 천하가 모두 그를 죽인다는 내용이다. 서복의……청 '사신(徙薪)'은 곡돌사신(曲突徙薪)의 줄인 말로,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아궁이 근처의 나무를 딴 곳으로 옮겨서 화재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뜻이다. 서복(徐福)은 한 선제(漢宣帝) 때 곽씨(霍氏)의 세력을 억제하여 화를 미연에 방지하자고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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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 태수가 도원도를 올린 것에 대한 전문 武陵太守進桃源圖 광포한 진나라 세상을 피하여호리병속의 천지135)를 오랫동안 차지했어라.성인의 백성이 되어문득 그림속의 산수로 들어갔네.일지지에 비의하면구천의 문에 도달한 듯하여라.삼가 생각건대 칠국이 한창 전쟁을 한 뒤에시황제의 지극히 표독한 정치가 뒤를 이었네.만리장성을 쌓고 왕릉을 만들며바다로 들어간 동자들은 돌아오지 않았어라.선비를 파묻고 시서를 불태우며약초 캐러간 노인을 멀리 갔어라.이르기를 우리들도 또한 떠날 것이니장차 어디로 가야 그 장소를 얻을까 하네.저 무릉 시내의 원천을 바라보니세상에 숨은 사람들이 거처하기에 합당하여라.지역은 오와 초로 나뉘니천 산과 만 강의 고을이며사람은 신선과 속인으로 나뉘니구름 갈고 달을 낚는 즐거움이라.복숭아 심어서 꽃과 열매 얻으니달력이 없어도 봄과 가을을 알 수 있네.육백 년 동안 갑자가 자주 돌고해와 달이 머리 위에서 길이 한가로워라.영씨와 유씨의 흥망이 몇 번이나 변하였나그 풍진은 눈앞에 걸리지 않누나.우연히 어부가 나루를 헤매다가드디어 속세로 통하는 선경에 이르렀네.돌아오니 꿈과 같아그 골짜기 비록 다시 찾아가기 어렵지만지척으로 옮겨올 수 있으니단청을 실로 찾아가서 보는 것보다 편하네.만약 여도에 실리게 된다면이 또한 성세의 빛나는 일이 될 수 있네.더구나 국가 안위의 기미를사람의 거취에서 볼 수 있음에랴.도가 있으면 나오고 도가 없으면 숨는 것은동물의 영장도 오히려 그러하며,난세가 지나고 치세가 오니지각의 영물이라 마땅히 그러하네.참으로 한번 세상에 나오고 한번 숨는 즈음이토지와 백성을 소유한 사람의 경계가 되네.삼가 생각건대 오마가 강을 건너서 136)육룡이 왕의 자리에 올랐네.137)만리를 통하여 밝게 보니깊은 산과 골짜기가 모두 황제 교화 안에 있고사해를 어루만져 광림하니천지간 아주 조금이라도 모두 나의 문 안에 있어라.자지의 노래는 상안령에서 불려지기138) 그치고반도는 요지에서 올려지기를 기다리누나.신선을 조석으로 기약할 수 없지만하필 방외의 멀리서 구할 것인가.승경이 이목이 미치는 바에 있으니절로 가까이 그림 속에서 취할 수 있으리.그러나 한 사람이 순의 궁에서 깊이 팔짱을 끼고 앉았으니139)4년을 우의 발자취처럼 두루 돌아다니기 어려워라.마땅히 중당에 살아 있는 그림을 그려방악140)을 때로 순수(巡狩)하는 것을 대신하네.삼가 생각건대, 명승지에서 원님을 하면마음이 호사 누릴 것에 매이리라.하양의 도리에서반악이 심어 꽃핀 것을 우러르고,141)영가의 산천에서사령운이 나막신 신을 것을 부러워하네.142)감히 이르네, 인자와 지자의 좋아함143)으로에오라지 어부, 초동과 함께 노닌다고.청산과 백운은담소하면서 그 풍경을 십분 즐길 수 있고,떨어진 잎이 물에 흘러가는 것은그림 위 봄 경치의 한 편린이라네.어찌 다만 소인과 묵객으로 하여금 품평하게 하리오실로 따뜻한 햇빛과 미나리를 바치는 정성144)을 본받은 것이라.혹시 좌우에 두고서 감상하신다면\산천을 그렸다고 범범하게 보지 마시기를.이 백성들이 먼 변방에 숨어든다면진나라가 사슴145) 잃은 것을 경계할 것이라.지금 시대 중흥의 업적을 빛나게 하여서도림에 비의하여 소를 방목하시기를.146) 避狂秦世久占壺裏之乾坤爲聖人氓忽入圖中之山水擬一地誌達九天門竊惟七國戰爭之餘繼以始皇毒痡之極築長城營丘墓入海之童不還坑儒士焚詩書採藥之翁長往謂吾屬亦可去矣將安適得其所哉睠彼武陵之源合爲逸民所止地分吳楚千山萬水之鄕人隔仙凡耕雲釣月之樂種桃而得花與實無曆而知春復秋六百年甲子屢回日月長閒於頭上嬴劉氏興亡幾變風塵不掛於眼前偶因漁父之迷津遂致眞境之通俗歸來如夢洞壑雖難於再尋咫尺可移丹靑實便於歷覽苟爲輿圖所載是亦聖世之光矧國家安危之機于人物去就而見有道見無道隱毛羽之長猶然亂世去治世來知覺之靈宜爾信乎一顯一晦之際可爲有土有人所監欽惟五馬渡江六龍御極洞萬里而明見深山窮谷咸囿皇風奄四海而光臨寸地尺天皆在我闥紫芝休歌於商嶺蟠桃待獻於瑤池眞仙非朝夕可期何必遠求於方外佳境在耳目所及自可近取於圖中然一人深拱乎舜宮奈四載難遍於禹跡宜作中堂之活畵庸代方岳之時巡伏念作宰名區嬰情好事河陽桃李慕潘岳之裁花永嘉山川思靈運之着屐敢云仁智者之樂聊與漁樵子而遊靑山白雲談笑間十分風景落花流水畵圖上一片春光豈但使騷人墨客而品題實可效獻曝進芹之誠悃倘置左右而宸覽勿以山水而汎觀使斯民遐遯于荒戒秦家之失鹿彰今代中興之烈比桃林而放牛 호리병속의 천지 《후한서》 〈비장방열전(費長房列傳)〉에 비장방이 저자의 아전이 되었다. 저자에서는 어떤 노인이 약을 팔았는데, 가게에 병 하나를 매달아놓고서 저자가 파하면 문득 병 안으로 뛰어들었다. 비장방이 누대 위에서 그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가서 두 번 절하였다. 이에 노인이 그를 데리고 병속으로 들어가니, 옥당(玉堂)에 화려하고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가 그득하여 함께 술을 실컷 마셨다. 함께 술을 마시고서 나온 뒤에 노인이 이르기를 "나는 신선 가운데 사람인데, 허물을 지어 견책을 받았다. 이제 지금 그 일이 다 끝났으니 마땅히 마을을 떠나겠다."라고 하였다. 오마가 강을 건너서 서진(西晉) 이 망하고 황족(皇族) 사마씨(司馬氏) 들이 양자강을 건너갔는데, 그 중의 낭랑왕이 동진(東晉) 의 황제가 되었다. 그 당시에, "다섯 말이 강을 건너서 한 말이 용이 된다."는 동요의 예언이 있었다. 육룡이……올랐네 《주역》에 〈건괘(乾卦)〉의 육효(六爻)를 6용(龍)으로 상징하였는데, 6용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것은 왕의 즉위를 상징한 것이다. 자지의……불려지기 진(秦)나라 말기 상산사호(商山四皓)의 〈채지가(採芝歌)〉에 "높고도 높은 산에, 깊은 골짜기 구불구불하구나. 빛나고 빛나는 붉은 지초는, 굶주림을 달랠 수 있다네. 요순의 시대는 멀어졌으니, 나는 장차 어디로 돌아갈까.[莫莫高山, 深谷逶迤. 曄曄紫芝, 可以療飢. 唐虞世遠, 吾將何歸?]"라고 하였다. 상산사호는 상안산에서 은거하였다. 한……앉았으니 순(舜) 임금은 대궐에 깊이 앉아 팔짱을 끼고 있기만 해도 천하가 태평하게 다스려졌다는 의미로, 통치자의 훌륭한 통치력을 표현한 말이다. 한 사람은 왕을 가리킨다. 방악 사방의 진산(鎭山)을 가리킨다. 동악은 대종(岱宗), 남악은 형산(衡山), 서악은 화산(華山), 북악은 항산(恒山)이다. 하양의……우러르고 진(晉)나라 때의 반악(潘岳)이 하양 영(河陽令)이 되었을 때 그 고을에 도리(桃李)를 많이 심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하양은 온 고을이 꽃이다.[河陽一縣花]"라고 칭했다는 말에서 온 것이다. 《白氏六帖 卷21》 영가의……부러워하네 사령운은 영가 태수를 지냈다. 영가는 경치가 좋은 고장으로 그곳의 산수를 좋아하여 앞뒤의 굽이 다른 나막신을 신고 등산하였다고 한다. 인자와 지자의 좋아함 《논어》 〈옹야(雍也)〉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인한 사람은 산을 좋아하니, 지혜로운 사람은 활동적이고 인한 사람은 정적이며 지혜로운 사람은 즐거워하고 인한 사람은 장수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 知者樂, 仁者壽.]"라고 하였다. 따뜻한……정성 '헌폭(獻曝)'은 햇볕을 바친다는 뜻인데 송나라의 농부가 따뜻한 봄 햇볕을 쪼이며 그 아내에게 "햇볕의 따뜻함을 사람들이 모르니 이 햇볕을 가져다가 임금께 바치면 반드시 상을 내릴 것이다." 했다고 한다. '진근(進芹)'은 미나리를 바친다는 뜻인데 옛날에 미나리를 즐겨 먹던 가난한 농부가 그 지방 부호에게 미나리가 맛이 좋다고 자랑하여 그 부호가 맛을 보았는데 입만 쏘고 배만 아팠다고 한다. 《列子 楊朱》 사슴 《사기(史記)》 〈회음후전(淮陰候傳)〉에서 "진(秦)나라가 그 사슴을 잃으니 천하가 다 함께 쫓는다."라고 하였다. 즉 천하를 가리킨다. 도림에……방목하시기를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오다가 풍(豐)에 이르러 "말을 화산의 남쪽에 돌려보내고 소를 도림의 들판에 풀어놓아, 천하에 무력을 쓰지 않을 것임을 보였다.[歸馬于華山之陽, 放牛于桃林之野, 示天下弗服.]"라는 말이 《서경》 〈무성(武成)〉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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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관찰사 겸 순찰사 송□□ 을 축하하는 문서 賀咸鏡道觀察兼巡察使宋 名缺 狀 어지러움이 극에 달하면 다스림을 생각하는 법국운이 회태의 시기147)를 만났어라.겨울이 지나 봄이 오니천도는 건인의 달148)이 되었네.북쪽 땅으로 매서운 추위를 보내니남양에 아름다운 기운이 더하였어라.삼가 생각건대,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하고문과 무를 구비하였네.모친의 사랑 임금의 은총에색동옷 입고 황금 띠를 찼다네.지방관과 군용은감당149)에 집을 짓고 세류영150)에 주둔하리라.삼양의 절기151)에만복을 함께 하리라.삼가 생각건대, 다행이도 유문의 하늘152)을 이면서정령위의 고을153)을 지키게 되었네.오두미를 받으니비록 도잠이 허리를 굽힌 것154)처럼 부끄럽지만한 지역의 풍속을 보니송경의 다리155)를 만난 것 같아 기쁘네. 亂極思治國運當回泰之期冬後有春天道屬建寅之月送寒威於北陸增佳氣於南陽伏惟忠孝雙全文武俱備母恩君寵着班衣而帶黃金使華軍容舍甘棠而屯細柳三陽之節萬福攸同伏念幸荷孺文之天忝守令威之郡受五斗米雖愧陶潛之折腰觀一方風欣逢宋璟之有脚 회태의 시기 비색(否塞)한 운세가 끝나고 태평한 운세가 돌아온다는 뜻으로, '태(泰)'는 《주역》의 괘명(卦名)인데 건하곤상(乾下坤上)으로 천지 음양의 기운이 조화되어 만물이 태평해지는 상(象)이다. 건인의 달 고대의 역법(曆法)에서 북두성(北斗星)의 두병(斗柄)이 십이진(十二辰) 가운데 인방(寅方)을 가리키는 때를 말한다. 하(夏)나라의 역법에서는 이때를 정월로 삼았는바, 후대에는 정월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감당 《시경 소남(召南)》 〈감당(甘棠)〉에 "무성한 팥배나무를, 자르고 베지 말라. 소백이 초막으로 삼으셨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라고 하였다. 이는 주나라 소공(召公)이 남국(南國)을 순행하며 문왕의 정교(政敎)를 펼쳤는데, 그가 떠난 뒤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그가 자주 쉬던 감당 나무를 베지 말자며 읊은 노래이다. 흔히 지방장관의 치덕(治德)을 칭송할 때 '감당'이란 말을 사용한다. 세류영 세류영 : 한 문제(漢文帝)가 여러 군영(軍營)을 순찰하는 중, 다른 곳에서는 모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지만, 주 아부(周亞夫)의 세류영(細柳營)에 갔을 때는, 군문 도위(軍門都尉)가 장군의 영(令)이 없다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사절(使節)을 보내어 주 아부에게 통한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며, 군중(軍中)에서는 말을 달리지 못한다고 하여, 문제가 말고삐를 당겨 천천히 다녔고, 본영으로 가 주 아부와 군례로 서로 인사한 다음 돌아갔는데, 문제는 아부 군중의 이러한 일을 도리어 칭찬하였다는 것이다. 《십팔사략(十八史略)》ㆍ《서한기(西漢記)》. 삼양의 절기 삼양(三陽)의 달인 정월을 이름. 《주역(周易)》에서 정월(正月)이 태괘(泰卦)가 되는데, 태괘는 삼양(三陽)이 아래에 있기 때문에 이른다. 유문의 하늘 유문은 후한(後漢) 소장(蘇章)의 자(字)이다. 그가 기주 자사(冀州刺史)가 되었을 때 친구가 청하 태수(淸河太守)로 있었는데, 소장은 그의 죄를 알고서 불러 술을 마시며 즐겁게 즐긴 뒤에 "오늘 저녁 소유문이 옛 친구와 술을 마시는 것은 사은(私恩)이고, 내일 기주 자사로서 일 처리를 하는 것은 공법(公法)이다."라고 한 일을 가리킨다. 태수가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남들은 모두 하늘이 하나[一天]뿐이지만 나만은 하늘이 둘[二天]이다." 하였다. 그다음 날 소장이 친구의 죄를 들어 징계하니, 온 경내가 숙연해졌다. 《後漢書 卷61 蘇章列傳》 정령위의 고을 요동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도술을 배워 신선이 된 뒤, 천 년이 지나 학으로 변신하여 요동 성문 앞 화표주(華表柱)에 내려앉았다. 《搜神後記 卷1》 함경도 지방이 요동에 가까워 이렇게 말하였다. 도잠이……것 진(晉)나라 도잠(陶潛)이 팽택 현령(彭澤縣令)으로 있을 적에, 군(郡)에서 파견한 독우(督郵)의 시찰을 받게 되었는데, 아전이 도잠에게 의관을 갖추고 독우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고 하자, 도잠이 탄식하면서 "내가 쌀 다섯 말 때문에 허리를 꺾어 향리의 어린아이에게 굽실거릴 수는 없다.[我不能爲五斗米折腰向鄕里小兒]"라고 하고는, 즉시 수령의 인끈을 풀어 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94 陶潛列傳》 송경의 다리 당(唐)나라 송경(宋璟)이 수령으로 부임하는 곳마다 백성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 봄'이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開元天寶遺事 有脚陽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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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문 檄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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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라는 내용으로 함경도의 열읍의 수령과 사민들에게 알리는 격문 倡義討倭諭咸鏡道列邑守宰及士民檄 -이 글은 충추 허창의 집에서 얻었다. 대개 허창의 고조인 부사 허제는 글씨를 잘 써서 일찍이 선생의 이 격문과 〈배한신대장제(拜韓信大將制)〉를 썼는데, 그의 자손들이 보배로 여겨 전해 내려왔다. 작품의 끝에 쓰기를 '정 아무개의 두 번째 격문.'이라고 했으니, 첫 번째 격문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찾아서 아울러 간행하여 전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자못 한스럽다.-대개 듣건대, 충신은 몸을 바쳐 주군에게 보답하고지사는 때를 살펴 공을 도모하네.시험 삼아 보건대, 성조의 신민 가운데그 누가 어지러운 시기에 충성을 바쳤는가.생각해보면, 나라를 세운 지 이백 여 년에왕위를 전한 것이 열한 임금이네.은나라 선대 철왕보다 많아대대로 덕을 잃지 않았으며주나라의 문교를 숭상하여백성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였네.예악의 문치라전쟁이 멈추었네.어찌 생각이나 했으리, 바다 건너 왜구가감히 우리나라를 업신여길 줄을.처음에는 통신사를 보낸다는 감언을 하였고끝내는 길을 빌린다는 어려운 청156)을 내새웠어라.교린은 오히려 할 수 있거니와상국을 범하는 것을 어찌 따르리오.우리가 전쟁을 부른 것이 아니오저들이 독을 퍼트린 것이라.이에 온 나라를 동원하여이에 우리 영토를 침범하였네.만여 척의 배를 연결하니긴 창이 햇빛이 반짝였어라.접전을 벌인 지 얼마 되지도 않아영가 연간에 남쪽으로 피난 간 것157)처럼 참혹하고-도(渡)는 거성으로 아마도 옮겨간다는 의미나 달아난다는 의미인데, 자세하지 않다.-파죽지세로 도성까지 몰아닥치니천보 연간에 서쪽으로 파천한 것158)과 흡사하였네.도정에서 군대를 버리고 간 이보가 있었지만159)옹구에서 병사를 일으킨 장순160)은 없어라.방태위161)는 여러 왕자를 세우자는 계책을 아뢰어왕자를 여러 도에 나눠 보냈네.악소보162)는 일찍 태자를 정하자는 계책을 올려동궁에 민심을 모았네.우리 북방은왕업이 일어난 곳이요천험의 요새라.백성들은 아들 같이 사랑해주는 은덕을 품어서응당 상나라를 떠받드는 것163)과 같이 하네.변방 사람들이 알을 품어주는 듯한 사랑에 감동하니어찌 본조를 잊으랴.지리를 보면 높은 산에 험준한 고개요물산을 보면 건장한 말과 용맹한 사내라.지금 장성한 왕자가 와 있으니늙은 재상이 보호하고 있네.곽자의164)는 북방의 정병을 거느리고 있으니감히 근왕에 게으르랴.충사도165)는 산서의 건아를 거느렸으니응당 먼저 적에게 내달려 가야 하네.한번 북령의 험지를 잃고 나서서쪽 길이 통하지 않아소릉의 규합166)이 없어졌으니제후 그 누구와 함께 걱정하랴.하양에서 임금 위해 달려감이 없으니167)관군의 지킴을 내 어디에서 구할까.진의중은 오늘밤 도망을 갔고168)송의 화원은 한밤중 들어가 힘든 상황을 고하였네.169)말을 하고보니 통곡하고픈데저에 대해 어떤 마음이 들고.성상께서 어진 이를 고르고 능력 있는 이에게 일을 맡겨문무를 숭상하였으니나라 망하는 경계를오히려 태평한 시절에 다하였으며병사를 잘 다스리라170)는 가르침을항상 평안한 때에 강론하였네.장차 하늘이 우리 국운을 끊으려 함인가아니면 사람의 본성이 절로 그 떳떳함을 잃은 것인가.눈을 들어 바라보니 위국의 산하가참으로 보배 아님을 알겠어라.171)마음이 아프니, 당나라의 번진이어찌 신하가 되리오.공들은 혹 왕실의 지친이요혹 훈벌의 자손이며혹은 재상의 반열에서 관찰사가 되었고혹은 시종에서 지방관의 부신을 찼네.고관으로 총애하니낭심172) 같은 충신으로 쫓겨난 것이 아니오두터운 봉록을 하사하니주여숙173)을 알지 못했던 것과는 다르네.황금 인장 옆에 차고붉은 깃발 세우니그보다 큰 영광이 없어라.붉은 마음 열어서흰 칼날도 무릅쓰니죽음을 어찌 사양하리오.너희들 군민과 그 부로들에게 효유하노니선대왕들의 유택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니반드시 단번에 적을 섬멸하려 하노라.군신간의 대의가 아직 남아 있으니절로 같은 생각을 지니고서 응하는 자가 있으리.맹명은 세 번 패한 이후에 공을 세웠으니174)뒤의 일이 그 앞의 허물을 덮을 만하네.소강은 십리 땅에서 왕업을 일으켜작은 고을에서 큰 공적을 도모하였어라.175)생각건대, 저 왜적은무도함으로써인을 지닌 우리를 공격하였네.그 형세를 비교하면 저들은 객이 되고그 말을 따져보면 우리가 곧도다.비록 독사처럼 독을 퍼뜨릴지라도반드시 고래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요176)천도로써 말하자면회오리바람과 소나기는 아침나절도 못가고매서운 추위 다음 따뜻한 봄이 오는 것은 절로 차례가 있네.인도로써 말하자면무력를 믿고 잔인함을 편하게 행함은 망하는 도요군대를 내달려 깊이 쳐들어옴은 패할 형세라네.천도와 인도에 비춰 따져보면승패를 헤아릴 수 있어라.이에 내 편폭의 격문을 날려우리 동맹에게 고하노라.임금의 수레 어디로 갔는가문천상처럼 들어와 호위하는 이 보이지 않고왕성은 누가 지키는가종택177)이 황하를 건넜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어라.조정에서 신하를 대하는 것이 어떠하기에신하들이 조정에 보답하는 것이 이와 같은가.귀한 바는 다만 의리니사랑할 대상이 임금이 아니랴.심산유곡에서혹 한 때의 목숨을 건질지언정청천백일 아래한 평생의 몸을 용납받으랴.아! 너희 부로들아나라가 망하면 집안은 온전할 수 있으며아버지가 계시는데 자식이 어디를 가랴.너희 자제들을 간곡히 타일러서우리 국가를 저버리지 말라.공업을 이룰 수 있다면장상도 어찌 따로 정해짐이 있으랴.더구나 지금 하늘이 재앙 내린 것을 후회하는데욕수178)가 가을을 맡았네.북쪽 지방은 일찍 추워남풍이 기세를 다투지 못하네.말은 살지고 활은 굳세어전사는 용맹을 떨칠 마음이 솟구치학의 울음과 바람소리에도179)적들은 승리에 익숙한 기운이 꺾였네.우리들이 작은 마을에서 충신한 이들을 모아한 지역에서 의열을 격려하노니힘이 약하고 성이 외로워비록 만전의 형세는 없더라도명분이 바르고 말이 옳으니한번 승첩의 공훈을 기약하노라.하란처럼 시기하지 말고180)원컨대 부섭의 강개함181)을 본받으시라.제공은 각자 병사와 전마를 거느리고쓸어버릴 것을 기약하라.군상의 차등은조정에서 자세히 살필 것이라.아녀자처럼 연연하여끝내 장부의 웅도를 그르치지 말라.오호라! 태산과 홍모에 경중을 잘 살펴서182)강의 물고기와 곰발바닥에 취사를 정해야 하네.183)처자에게 죽음의 죄를 끼치지 말고영원히 자손에게 영광을 끼칠 것이라.나라의 법전이 엄격하니내 두 번 말하지 않겠노라.모두들 일심협력하여격문을 어기지 말라. 【此文得於忠州許昶家. 蓋昶之高祖府使稊善書, 嘗寫先生此檄及拜韓信大將制, 其子孫珍藏流傳矣. 章末書云, 鄭某再檄, 其有初檄明矣. 無由求得幷刊而傳, 殊可恨也.】蓋聞忠臣捐軀而報主志者相時而圖功試觀聖朝之臣民孰效亂日之忠志洪惟立國二百載傳序十一君多殷先哲王世無失德右周家文敎人不知兵禮樂文哉干戈休只豈意海寇敢侮我邦始有通信之甘言終發借途之難請交鄰猶可爲也犯上豈能從乎非我召兵自彼生毒乃擧其國乃侵于疆萬艘連環長戈耀日交鋒未浹于旬朔禍慘永嘉之南渡破竹已及於都城事迫天寶之西幸都亭有委師之夷甫雍丘無起兵之張巡房太尉陳衆建之謀分王子於諸道岳少保獻早定之策係民望於東宮惟我北方王業攸基天險之地民生懷子惠之德應知戴商蕃種感卵4)育之仁豈能忘漢地利則高山峻嶺物產則健馬勇夫今者長君來臨老相保護郭子儀擁朔方之精卒敢怠勤王种師道領山西之健兒宜先赴敵一自北嶺失險西路不通邵陵無糾合諸侯誰則同恤河陽絶奔問官守我之何求陳宜中有今日之逃宋華元告半夜之病言之可哭彼其何心聖上簡賢任能崇文尙武其亡之戒尙軫於豐豫之時克詰之謨恒講於恬嬉之日將天意欲絶我寶命抑人性自失其秉彝擧目魏國之山河誠知非寶痛心唐家之藩鎭何用爲臣公等或王室之親或勳閥之冑或自宰列而建節或由侍從而佩符寵以高官非狼瞫之見黜食以厚祿異柱厲之不知橫黃金建紅旗榮亦莫大披赤心冒白刃死何敢辭諭爾軍民曁厥父老祖宗之遺澤不斬必欲一擧以殲之君臣之大義猶存自有同聲而應者孟明得功於三敗後事可掩其前愆少康興業於一成大勳庶圖於小邑惟彼倭賊以其無道讐我有仁較其勢則彼爲之賓軌其辭則我爲之直雖肆蛇虺之毒必受鯨鯢之誅以天道言之飄風驟雨不終朝沍寒陽春自有序以人道言之阻兵安忍亡之道懸軍深入敗之形究諸天人卜玆勝敗飛吾片幅告我同盟乘輿何歸未見天祥之入衛王城誰守不聞宗澤之過河朝廷之待臣子者何如臣子之報朝廷者若是所貴惟義可愛非君窮谷深林或可偸一時之命靑天白日其能容百年之身嗟汝父老國破家可全父在子焉往敦諭爾子弟無負我國家功業可以成將相寧有種矧今皇天悔禍蓐收行秋北地早寒南風不競馬肥弓勁士奮賈勇之心鶴唳風聲敵摧狃勝之氣某等鳩忠信於十室激義烈於一方力弱城孤雖無萬全之勢名正言順可期一捷之勳勿以賀蘭之猜疑願察傅燮之慷慨諸公各領兵馬克期掃淸軍賞等差朝旨詳實莫以兒女之戀終誤丈夫之圖於乎審輕重於泰山鴻毛定取舍於河魚熊掌罔貽妻孥之戮永遺子孫之榮國典有嚴余言不再咸一心力無違檄文 길을……청 1591년 왜(倭)의 관백(關白)인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사신을 보내 명나라를 정벌하려 하니 길을 빌려 달라[假道]고 하였다. 영가……것 서진 영가 말년에 흉노가 한(漢)이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킨 뒤 낙양(洛陽)을 함락시켜 결국 서진(西晉)이 멸망하였다. 종친인 사마예가 양쯔강 남쪽으로 피난을 가서 같이 피난을 온 교성(僑姓)과 원래 강남에서 살았던 오성(吳姓)에게 추대를 받아서 동진을 세웠다. 천보……것 당 현종 때 안녹산의 난으로 인해 현종이 서촉으로 몽진을 갔었다. 도정에서……이보 이보는 왕연(王衍)의 자이다. 왕연(王衍)은 진(晉)나라 사람으로, 자가 이보(夷甫)이다. 당시에 시국이 어수선하였으므로 왕연은 자신을 보호할 계책을 세워 그의 동생인 왕징(王澄)을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족제(族弟)인 왕돈(王敦)을 청주 자사(靑州刺史)로 보내고는 "삼굴(三窟)의 계책이 이루어졌다."라 하였다. 그 뒤에 여러 사람들의 추대에 의해 원수(元帥)가 되었다가 석늑(石勒)에게 패하여 처형당하였다. 《晉書 卷43 王衍列傳》 옹구에서……장순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원 현령(眞源縣令)으로 있던 장순은 옹구(雍丘)에서 기병하여 저항하였으며, 지덕(至德) 2년(757) 수양 태수(睢陽太守) 허원과 함께 수양성(睢陽城)을 끝까지 지키다가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혀 장렬히 죽었다. 《舊唐書 卷187下 忠義列傳下》 방태위 당(唐)나라 현종(玄宗)ㆍ숙종(肅宗) 연간의 상신(相臣) 방관(房琯)을 가리킨다. 악소보 송나라 태위소보(太尉少保)인 악비(岳飛)를 가리킨다. 상나라를……것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백성들이 상나라를 떠받든 것이 오래되었네.[民之戴商, 厥惟舊哉.]"라고 하였다. 곽자의 당 숙종(唐肅宗) 때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반란을 평정하고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졌다. 덕종(德宗) 때부터 상보(尙父)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무려 20년 동안 천하의 안위(安危)를 한 몸에 짊어졌던 불세출의 명장이다. 충사도 충사도는 송나라 말기의 명장으로, 흠종(欽宗) 때 금군(金軍)이 쳐들어오자 이강(李綱) 등과 함께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으나 투항을 주장하는 자들의 반대에 밀려 실패하고 군권(軍權)을 빼앗겼다. 이후 금군이 다시 개봉성(開封城)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돌아갈 때, 아우인 충사중(种師中)의 군대를 이용하여 후미를 공격해서 금군의 정예군을 말살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다시 반대론자들의 반대에 막혀 수포로 돌아갔으며, 금군이 돌아간 뒤에 차선의 대책으로 대군을 황하(黃河) 양안에 주둔시켜 금군의 2차 침입을 막아야 한다고 건의하였으나 이 역시 반대론자들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宋史 卷335 种世衡列傳 种師道》 소릉의 규합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4년 기사에 근거하여 '邵'를 '召'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소릉은 초나라의 지명이다. 제나라 관중(管仲)이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에 가서 그들에게 왕실(王室)에 공납(貢納)하지 않은 일에 대해 사리를 따져 추문하자, 초왕이 굴복하여 굴완(屈完)을 시켜 소릉에서 제나라와 맹약하도록 하였다. 이는 싸우지 않고 맹약을 이루어 낸 사례로서 널리 일컬어진다. 《春秋左氏傳 僖公4年》 하양에서……없으니 현종이 서촉으로 몽진 갈 때 당의 대군은 이광필(李光弼)의 지휘 아래 하양에서 사사명(史思明)의 대군을 막고 있었다. 여기서는 이러한 이유로 현종의 몽진에 근왕하지 못함을 말한다. 진의중은……갔고 남송(南宋) 말기의 재상으로, 자가 여권(與權)이다. 육수부(陸秀夫) 등과 함께 익왕(益王)을 옹립하였으나 큰 소리만 쳤을 뿐 실제적인 대비책에는 아무것도 조처한 것이 없어 결국 송나라가 원(元)나라에 패망하였다. 남송이 멸망했을 때 식솔을 이끌고 점성(占城)으로 가서 그곳에서 군대를 빌려 원(元)나라에 대항하고자 하였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점성이 원나라에 점령되자 다시 섬라(태국)로 달아나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宋史 卷480》 송의……고하였네 《춘추좌씨전》 〈노선공하(魯宣公下)〉에서 "초나라가 송(宋)나라를 포위하였다. 이에 송나라는 겁을 내어 화원을 보내어 밤에 초나라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나를 보내어 우리나라의 고충을 고하게 하니 즉 우리나라가 현재 자식을 식량과 바꾸어 먹고, 해골을 쪼개어 밥을 짓는 땔감으로 쓰고 있으나 성하의 맹약[城下之盟]은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따를 수 없으니, 우리나라에서 30리를 물러간다면 초나라가 명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하셨다."고 하였다. 병사를 잘 다스려라 《서경》 〈입정(立政)〉에 "너의 군병을 잘 다스리라.[其克詰爾戎兵]"라고 하였다. 위국의……알겠어라 위무후(魏武侯)가 배를 타고 서하(西河)를 따라 내려가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오기(吳起)에게 "아름답구나, 산하의 견고함이여! 이것은 위(魏)나라의 보배다.[美哉乎山河之固 此魏國之寶也]"라고 말하였다. 여기서는 이 고사의 의미를 반대로 사용하였다. 낭심 춘추 시대 진(晉)나라 장수이다. 진(秦)나라와 팽아(彭衙)에서 싸울 적에 자기의 부대를 이끌고 돌격하여 전사하자, 진(晉)나라 군대가 이에 편승하여 진(秦)나라를 대파하였다. 그가 상관인 선진(先軫)의 조치에 분노하면서도 화풀이를 하려 하지 않고 떳떳하게 전투에 임한 것을 두고 군자라고 칭찬한 말이 《춘추좌씨전》 문공(文公) 2년에 나온다. 주여숙 춘추 시대 거(莒) 나라 오공(敖公)을 섬기다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자 그를 떠나 해변에서 살았는데, 오공이 환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급히 달려가 목숨을 바치려고 하면서 "내가 장차 그를 위해 죽으려고 하는 것은 신하를 몰라주는 후세의 임금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다.[吾將死之, 以醜後世之人主不知其臣者也.]"라고 말했던 고사가 있다. 《列子 說符》 맹명은……세웠으니 맹명(孟明)은 춘추 시대 진나라의 어진 신하 백리해(百里奚)의 아들로 이름은 시(視)이다. 그가 정(鄭)나라를 치다 3차례나 패했는데도 진 목공이 오히려 써주어, 뒷날에 목공이 패자(霸者)가 될 기초를 닦아 놓았다. 《春秋 文公》 소강은……도모하였어라 소강은 하우(夏禹)의 6세손으로 제상(帝相)의 아들이다. 요(澆)가 제상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라 하우의 왕통이 끊어진 지 40년이 되었을 적에, 소강이 사방 십 리 되는 땅[一成]과 5백 명[一旅]의 병력으로, 마침내 과(過)와 과(戈)를 멸망시키고 우왕(禹王)의 기업을 회복한 뒤에, 하나라 역대 왕을 종묘에서 제사 지내며 천명으로 왕이 되었음을 밝혔다.[祀夏配天] 《春秋左氏傳 哀公元年》 고래처럼……것이요 고래는 흉포한 왜구를 비유한다. 당나라 이백(李白)의 〈임강왕절사가(臨江王節士歌)〉에 "장사는 분노하는데 큰 바람이 일어난다. 어이하면 의천검(倚天劍)을 얻어서 바다 건너 큰 고래를 벨거나.[壯士憤, 雄風生. 安得倚天劍, 跨海斬長鯨.]"라고 하였다. 종택 종택은 송(宋)나라 흠종(欽宗) 정강(靖康) 원년에 자주(滋州)를 맡았는데, 태원(太原)이 금(金)나라에 넘어가자 의병을 모아 금나라에 대항하였다. 휘종(徽宗)과 흠종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뒤에 동경 유수(東京留守)가 되어 의병을 모으고 악비(岳飛)를 장수로 등용하여 여러 차례 금나라 군대를 패배시켰다. 《宋史 宗澤列傳》 욕수 가을을 맡은 신으로 '금정(金正)'이라고도 한다. 《예기》 〈월령(月令)〉에 "가을 3개월을 주관하는 신이 욕수이다.[孟秋三月 其神蓐收]"라고 하였다. 학의 울음과 바람소리에도 학려풍성(鶴唳風聲)은 학의 울음과 바람 소리로, 겁먹은 사람이 작은 소리에도 몹시 놀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동진(東晉)의 효무제(孝武帝)는 전진(前秦) 부견(苻堅)의 100만 대군이 쳐들어오자, 사현(謝玄)과 사석(謝石)에게 8만의 군사를 주고 나가 싸우게 했다. 비수(淝水)에 진 치고 있던 부견이 명하기를, "전군을 조금 후퇴시켰다가 적이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돌아서서 반격하라." 하였으나, 후퇴 길에 오른 전진군(前秦軍)은 반격은커녕 멈춰 서지도 않아 동진군에 크게 패하였다. 나머지 군사들은 갑옷을 버리고 북쪽으로 달아나며 '학의 울음과 바람 소리'만 들어도 동진의 군사가 온 줄 알았다고 한다. 《晉書 卷79 謝玄列傳》 하란처럼 시기하지 말고 하란은 당(唐)나라 사람으로 하란 진명(賀蘭眞明). 숙종(肅宗) 때 하남 절도사(河南節度使)로서 임회(臨淮)에 주둔하고 있었다. 윤자기(尹子奇)가 수양(睢陽)을 포위하자 장순(張巡)이 남제운(南霽雲)을 임회로 보내 구원을 요청했으나, 장순의 명성이 높고 자기보다 공이 많은 것을 질투하여 구원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수양이 함락당하게 하였다. 《唐書 玄宗本紀》 부섭의 강개함 후한(後漢) 때 적군이 한양(漢陽)을 포위하고 한양 태수 부섭을 향리로 보내려 하자, 부섭이 "내가 어디로 가겠는가. 나는 반드시 여기에서 죽으리라."라고 탄식하며 부하들을 지휘하여 싸우다가 전몰하였다. 《柳河東集注 卷5 君睢陽廟碑》 태산과……살펴서 태산과 같이 더없이 귀중한 목숨을 사물 가운데 가장 가볍다는 기러기 털처럼 여겨 미련 없이 버렸다는 말이다. 사마천(司馬遷)의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사람이라면 모두 한 번은 죽게 마련인데, 어떤 사람의 죽음은 태산보다도 무거운 반면에, 어떤 사람의 죽음은 기러기 털보다도 가볍다.[人固有一死 或重于泰山 或輕于鴻毛]"라고 하였다. 강의……하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어물도 내가 원하는 바요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어물을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하였다. 물고기는 목숨을 곰발바닥은 의를 비유하였다. 원문에는 '卯'로 되어 있으나 내용상 '卵'이 맞는 것 같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장계 狀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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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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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의를 주창하여 병사를 일으켜 경성으로 들어가 지킨 뒤에 왜적을 공격하여 참수하고서 올린 장계 倡義起兵入守鏡城後擊斬倭賊狀啓 철령(鐵嶺)을 지키지 못해 서쪽길이 끊어진 뒤로 조정의 명을 듣지 못하였기에 절도순찰사 겸관찰사(節都巡察使兼觀察使) 김명원(金命元)의 관자(關子)와 유지(有旨)가 길이 막혀 전해지지 않던 차에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주을온 만호(朱乙溫萬戶) 이희당(李希唐), 옥련 만호(玉連萬戶) 안옥(安沃), 오촌 권관(吾村權管) 구황(具滉) 등이 덕만동(德萬洞) 촌민들이 전해준 글을 가지고 도착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삼가 유지를 보고서 행재소에서 잘 지내신다는 것과 칠도에 왜적이 거의 섬멸되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기쁨에 손뼉을 치며 망극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당초 북방의 일은 지난 6월 12일에 철령의 병력이 궤멸된 이후에 남도(南道) 열읍의 군민이 굳게 지키려는 뜻이 사라져 기세만 바라보고도 달아나 흩어져버렸기에, 왜놈들이 승승장구하는 기세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에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신 김귀영(金貴榮)이 북도(北道)에서 병사를 징집하였고, 북병사(北兵使) 한극함(韓克諴)도 또한 자신이 맡았던 병사를 거느리고 직접 나아갔습니다. 마침 육진(六鎭)의 여러 오랑캐들이 틈을 엿보고서 휘파람을 불어 무리를 불러 모으니, 장차 앞뒤로 적을 맞닥뜨리는 근심이 있을 것 같기에 병사는 길주(吉州)에 머물러 주둔하여 남북으로 지원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사절동 권관(斜卩洞權管) 고경민(高敬)에게 명하여 정병 2백 명을 거느리고 함흥으로 내달려 가게하고, 또한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영(李瑛)에게 명하여 정병 4백 명을 거느리고 그 뒤를 이어 북청(北靑)으로 가게 하였습니다.그러나 적의 세력이 더욱 거세 방어할 수 없어서 이영 등의 병력은 마천령(磨天嶺)을 넘어 퇴각하여 북병사와 합쳤는데, 병사 1천여 명이 길주의 임명 지역에 주둔하였다가 왜적과 접전을 벌여 왜놈 7명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렇지만 '부령 부사(富寧府使) 원희(元喜)가 싸우다가 죽었다'는 해괴한 말들이 떠돌게 되자 군사들은 더욱 동요되어 북쪽 정예병의 태반이 밤에 달아나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적병이 와서 습격하니 남은 군사들이 일시에 무너져, 병사 이하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서 경성(鏡城)으로 물러나 수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심은 이미 흩어지고 성안은 비로 쓴 듯 텅 비어 부득이하게 이영은 회령(會寧)을 지키려고 하였고 한극함은 종성(鍾城)을 지키려고 하던 차에 지난 7월 23일에 회령 역졸 이충경(李忠卿), 친군위(親軍衛) 김세언(金世彥), 향리(鄕吏) 국경인(鞠景仁) 등이 앞장서서 외쳐 난리를 일으켜서 왕자 두 분과 상락부원군 김귀영,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 전 승지(承旨) 황혁(黃赫), 선전관(宣傳官) 조인징(趙仁), 남병사(南兵使) 이영(李瑛), 회령 부사(會寧府使) 문몽헌(文夢軒), 함흥 판관(咸興判官) 이혜(李蕙) 등을 사로잡아 왜적에게 넘겼습니다.회령의 변란 이후로 종성 이북의 인심은 모두 이반되어서 북도 우후(北道虞侯) 이범(李範), 온성 부사(穩城府使) 이수(李銖), 병사 한극함 등은 또한 본도 사람들에게 사로잡혀 왜놈에게 넘기게 되었으며, 그 나머지 수령과 진장(鎭將) 등은 자신의 휘하에게 습격을 당하여 스스로 보호하지 못하고 간신히 목숨만 건지게 되었습니다. 신도 또한 이 지역 사람들에게 활로 공격을 당해 거의 죽을 뻔 했다가 간신히 살아나서 경성의 바닷가 마을로 오게 되었습니다.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 전 좌수(座首) 서수(徐遂), 당시 좌수 이기수(李麒壽), 이 고을 사람 안원 권관(安原權管) 강문우(姜文佑), 급제(及第) 박은주(朴銀柱), 전 권관(權管) 강수연(姜壽延), 유학(幼學) 최배천(崔配天), 정병(正兵) 강수하(姜壽遐), 온성 판관(穩城判官) 이눌(李訥), 경원 판관(慶源判官) 오언량(吳彥良), 훈융 첨사(訓戎僉使) 김자(金磁), 유원 첨사(柔遠僉使) 이희량(李希良), 미전 첨사(美錢僉使) 김범(金範), 무산 만호(茂山萬戶) 이난(李蘭), 옥련 만호(玉連萬戶) 안옥(安沃), 주을온 만호(朱乙溫萬戶) 이희당(李希唐), 황자파 권관(黃柘坡權管) 함이량(咸以良), 오촌 권관 구황, 병사 군관(兵使軍官) 전 감찰(監察) 오명수(吳命壽), 전 만호 김귀장(金龜), 훈련 봉사(訓鍊奉事) 허대임(許大任), 내금위(內禁衛) 이팽령(李彭齡), 충의(忠義) 이응운(李應雲)과 이귀서(李貴瑞), 정로위(定虜衛) 손걸(孫傑), 우림위(羽林衛) 이응란(李應鸞), 보인(保人) 홍대연(洪大連), 종성 부사(鍾城府使) 군관(軍官) 전 만호 최경원(崔慶元), 충의위 어기영(魚起瀛), 전 사복(司僕) 엄준억(嚴俊億), 정로위 정춘기(鄭春氣), 별시위(別侍衛) 이수근(李壽根), 보인 정시룡(鄭時龍), 보인 이종신(李宗信), 보인 곽사(郭俟), 종성 군관(鏡城軍官) 전 내금위 이현(李鉉), 온성 판관(穩城判官) 군관 정로위 이광진(李光辰)과 이천룡(李天龍), 유원 첨사(柔遠僉使) 군관 전 내금위 김대관(金大寬), 갑사(甲士) 최명옥(崔命玉)과 신구학(申九鶴), 훈융 천사(訓戎僉使) 군관 정로위 정려(鄭勵), 별시위 이장형(李長亨)과 김흥복(金興福)과 고영진(高永珍)과 박종례(朴從禮), 교생(校生) 한득(韓得)과 주덕남(朱德男), 미전 첨사(美錢僉使) 군관 별시위 안덕수(安德壽), 갑사 방인학(仁鶴), 충순위 장붕(張鵬), 갑사 이찬(李贊), 황자파 권관(黃柘坡權) 군관 별시위 전흥개(田興漑), 보인 최용담(崔龍潭), 갑사 이몽복(李夢福), 서올에서 피난 온 성균관 권지(成均館權知) 학유 이성길(李成吉), 전 직장(直長) 신석린(申石潾), 생원 신노(申櫓), 유학 이정려(李精李精), 유학 신부(申桴)와 신격(申格), 이 지역에 들어와 살고 있는 임정언(林廷彥), 유학 신미(申楣), 서리(書) 최언붕(崔彥鵬), 보인 오경남(吳慶男)과 오응남(吳應男) 등이 원근에서 와서 모여 신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계책을 세웠습니다.이에 이달 9월 16일에 경성으로 들어가 방비하기로 하였는데, 창고와 성과 해자는 왜적들이 오래 머물면서 어지럽게 헤쳐져 있어서 서수(徐遂)와 이기수(李麒壽) 및 관노 등이 타고 남은 것들을 모았으며 더러운 것을 파묻고 부서진 것은 수리하여 신들을 기다렸습니다. 이달 18일 사시에 길주에 주둔하던 왜적 92명이 문득 성 아래에 이르렀는데, 한 왜장이 앞으로 나오더니 갑자기 성문을 향해 돌진하였습니다. 미전 첨사 김범이 거느린 관노 국생(鞠生)이 검으로 팔뚝을 자르고, 그의 부친 관노 세필(世弼)이 왜장을 붙잡아 말에서 끌어내려 곧바로 사로잡아서 군중에 효수하였습니다. 그 나머지는 성 아래에 줄을 지어 서 있었는데, 김범과 주을온 만호 이희당이 활을 많이 쏘아서 왜적과 말들을 맞추자 비로소 퇴각하였습니다. 안원 권관 강문우가 앞에서 이끌고 오촌 권관 구황과 주을온 만호 이희당 등 15명이 자원하여 추격하다가 본 지역의 전 만호 급제 김대진(金大振)과 중도에서 만나 힘을 합쳐 추격하였습니다. 일식(一式 30리) 남짓 거리를 가면서 10여 차례 전투를 벌여 상당수의 왜적을 활로 쏴서 맞히니, 시체를 싣고서 급히 달아나 흐르는 피가 길바닥을 적셨으며 마필과 의복 등 잡물들을 모두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강문우가 두 명의 왜적 목을 베었는데, 날이 어두워 더 이상 추격하지 못하였습니다. 참수한 목과 자른 귀 둘은 함께 산길을 통해 보냈는데 관찰사또가 자신이 공이라고 위로 사신을 보내 보고하였습니다.184)본부 토병(土兵) 전 별시위 유억수(庾億壽)와 이 지역에 들어와 사는 갑사(甲士) 이태옥(李泰玉) 등은 당초 왜적이 성에서 웅거할 때 자신을 돌보지 않고 분투하여 활을 쏘아 왜적을 사살하고서 묻어두었다가, 신이 성에 들어간 후에 유억수는 수급 둘, 이태옥은 수급 하나, 정병 강득횡(姜得璜)은 수급 하나와 아울러 빼앗은 환도를 저에게 바쳤습니다. 도내 경흥(慶興), 경원(慶源) 등지의 변방 오랑캐와 깊이 숨은 여러 왜놈의 우두머리에게 동시에 글월을 화살에 묶어 쏘아서 보냈습니다.경흥부와 그 소관인 네 보는 전부 함락되어 노략질 당하고 백성들은 거의 죽음을 당하였을 뿐더러, 경원 소관인 아산(阿山)과 건원(乾元) 두 보(堡) 및 고아산의 고건원창(古乾元倉), 유신창(有信倉), 해창(海), 온성의 덕명창(德明倉), 덕산창(德山倉), 해창(海倉), 종성 부계(俯溪) 장풍리(長豐里)와 방산리(方山里)의 녹야창(鹿野倉), 조산리(造山里)의 해창(海倉), 회령 역산창(櫟山倉), 고랑거리창(古郞巨里倉) 등도 또한 노략질을 당하였습니다. 흩어진 병졸을 다시 모아 남쪽으로 길주의 왜적을 도모하고 북쪽에 가득한 오랑캐를 막으려고 하니, 대단히 고민이 될 뿐만이 아닙니다. 경성부는 또한 육진의 요충지로 길주까지 이틀거리요 회령까지도 또한 이틀거리인데, 두 곳의 왜적 사이에 끼어 있어서 병사를 징발할 곳이 없고 군량을 계속 보급할 계책도 없으니 더욱 고민입니다.대개 왜적 숫자의 많고 적음을 비록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이성(利城)과 단천(端川), 영동(嶺東)과 길주(吉州) 네 곳에 남아 있는 숫자는 각각 4천여 명이라 하는데, 공격과 수비의 편의를 제장과 상의하여 힘을 다하여 조치하면서 주제넘게 이것저것 헤아려보았습니다. 그러나 신은 또한 인신(印信)이 없는 관리로써 이런 변란의 시기를 당하였는데, 백문185)으로 봉계하는 것은 부신의 증험이 없는 것 같아서 임시로 부령부의 인신을 사용하였으니 대단히 황공합니다만,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0년 임진년 9월 20일 自鐵嶺失守, 西路阻絶, 未聞朝命爲白有如乎, 節都巡察使兼觀察使金命元關子及有旨段, 路塞不通次, 慶源府使吳應台·朱乙溫萬戶李希唐·玉連萬戶安沃·吾村權管具滉等, 以持德萬洞村氓傳書, 來到爲白是去乙。臣伏見有旨, 始知行在萬安, 七道倭賊幾盡勦滅, 不勝感泣欣抃, 罔極爲白齊。當初北方事段, 去六月十二日, 鐵嶺兵潰後, 南道列邑軍民, 罔有固志, 望風奔散, 仍致長驅之勢爲白去乙, 上洛府院君臣金貴榮, 徵兵北道爲白良在乙, 北兵使韓克諴, 亦所當領兵親赴事是白乎矣。適音六鎭諸胡伺釁嘯聚, 將有腹背受敵之患乙仍于, 兵使段留鎭吉州, 以爲南北聲援爲白遣, 卽令斜卩洞權管高敬民, 率精兵二百名, 馳赴咸興, 又令會寧府使李瑛, 率精兵四百名, 繼往北靑爲白有如乎。賊勢益熾, 不能防遏, 李瑛等兵, 退踰磨天嶺, 與北兵使合, 兵一千餘名, 軍于吉州臨溟地, 接戰斬倭七級。富寧府使元喜戰沒, 妖言流聞, 軍情益搖, 北地精銳之兵, 太半宵遁。 翌朝, 賊兵來襲, 餘軍一時自潰, 兵使以下僅以身免, 欲退守鏡城爲白良置。人心已散, 城內如掃, 不得已李瑛段, 欲守會寧, 韓克諴段, 欲守鍾城次, 去七月二十三日分, 會寧驛子李忠卿·親軍衛金世彥·鄕吏鞠景仁等, 唱首作亂, 王子君兩分及上洛府院君金貴榮·長溪府院君黃廷彧·前承旨黃赫·宣傳官趙仁徵·南兵使李瑛·會寧府使文夢軒·咸興判官李蕙等乙, 捉給倭賊。自會寧作變之後, 鍾城以北人心, 幷爲離叛, 至於北道虞侯李範·穩城府使李銖·兵使韓克諴等, 亦爲本道人所捉給乙仍于, 其餘守令鎭將, 爲其下所圖, 不能自保, 僅以身免。臣段置, 亦爲土人所射, 幾死得免, 來在鏡城海村爲白有如乎。鍾城府使鄭見龍·前座首徐遂·時座首李麒壽·本府人安原權管姜文佑·及第朴銀柱·前權管姜壽延·幼學崔配天·正兵姜壽遐·穩城判官李訥·慶源判官吳彥良·訓戎僉使金磁·柔遠僉使李希良·美錢僉使金範·茂山萬戶李蘭·玉連萬戶安沃·朱乙溫萬戶李希唐·黃柘坡權管咸以良·吾村權管具滉·兵使軍官前監察吳命壽·前萬戶金龜長·訓鍊奉事許大任·內禁衛李彭齡·忠義李應雲·李貴瑞·定虜衛孫傑·羽林衛李應鸞·保人洪大連·鍾城府使軍官前萬戶崔慶元·忠義衛魚起瀛·前司僕嚴俊億·定虜衛鄭春氣·別侍衛李壽根·保人鄭時龍·保人李宗信·保人郭俟·鏡城軍官前內禁衛李鉉·穩城判官軍官定虜衛李光辰·李天龍·柔遠僉使軍官前內禁衛金大寬·甲士崔命玉·申九鶴·訓戎僉使軍官定虜衛鄭勵·別侍衛李長亨·金興福·高永珍·朴從禮·校生韓得·朱德男·美錢僉使軍官別侍衛安德壽·甲士方仁鶴·忠順衛張鵬·甲士李贊·黃柘坡權管軍官別侍衛田興漑·保人崔龍潭·甲士李夢福·京來避亂人成均館權知學諭李成吉·前直長申石潾·生員申櫓·幼學李精瓈·幼學申桴·申格·入居林廷彥·幼學申楣·書吏崔彥鵬·保人吳慶男·吳應男等, 遠近來會, 與臣共謀倡義, 今九月十六日, 入守鏡城, 倉穀城池, 倭賊久留板蕩之餘, 徐遂·李麒壽及官奴等, 收其餘燼, 封閉修輯, 以待臣等爲白有齊。本月十八日巳時量, 吉州留屯倭賊九十二名, 奄至城下, 有一倭將意謂如前, 突入城門爲白去乙。美錢僉使金範所領官奴鞠生, 以釰斫臂, 其父官奴世弼, 挾執下馬, 仍爲生擒, 梟示軍中爲白遣。其餘段, 列立城底爲白有去乙, 金範及朱乙溫萬戶李希唐, 多數發射, 中賊中馬爲白良沙, 始爲退還爲白去乙, 安原權管姜文佑倡首, 吾村權管具滉·朱乙萬戶李希唐等十五名, 自願追擊, 與本土及第前萬戶金大振, 中路相逢, 幷力追至一息餘程, 合戰十餘度, 多數射中倭賊, 載屍奔北, 流血濺道, 馬匹及衣服雜物乙, 幷爲棄走, 姜文佑斬首二級, 因日昏未得窮追爲白有齊。同斬馘割耳二級段, 由山路, 觀察使道以己爲上使爲白有齊。本府土兵前別侍衛庾億壽·入居甲士李泰玉等, 當初倭賊據城時, 奮不顧身, 射殺倭賊, 埋置爲白有如可, 臣入城後, 庾億壽段二級, 李泰玉一級, 正兵姜得璜一級, 幷其所奪環刀, 來納爲白齊。道內慶興·慶源等地藩胡與深處諸酋, 一時傳箭。慶興府及所管四堡, 全數陷掠, 民人殆盡爲白是沙餘良, 慶源所管阿山·乾元二堡及古阿山·古乾元倉·有信倉·海倉·穩城德明倉·德山倉·海倉·鍾城俯溪長豐里·方山里鹿野倉·造山里海倉·會寧櫟山倉·古郞巨里倉等, 亦盡爲搶掠爲白是去等。新集散卒, 以南圖吉州之倭, 北捍充斥之胡, 極爲悶慮叱分不喩。鏡城府, 亦六鎭要衝之地, 距吉州二日之程, 距會寧亦二日之程是白去等, 介於兩賊之間, 兵無徵發之處, 粮無繼運之策, 加于憫慮爲白齊。大槩賊數多少, 雖不詳知爲白良置, 利城·端川·嶺東·吉州四處留在之數, 各四千餘名是如爲白臥乎等用良, 攻守便宜, 與諸將相議, 盡力措置, 妄料爲白乎旀, 臣亦無印信官, 以當此變亂之時, 白文封啓, 似無符驗乙仍于, 權用富寧府印信, 至爲惶恐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年壬辰, 九月二十日。 관찰사또가……보고하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 26년 1월 1일자 기사에 "관찰사 윤탁연은 정문부를 시기 질투하였다. 문부가 전후로 세운 전공(戰功)을 탁연이 모두 사실과 반대로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문부의 부하가 수급(首級)을 가지고 관남(關南)을 지나면 그가 모두 빼앗아 자기 군사에게 주었다. 그리고 문부의 행동이 불궤(不軌)스럽다고 조정에 아뢰었다."라고 하였다. 백문 관인이 찍히지 않은 문서를 이르던 말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반란의 역적 회령의 국경인과 명천의 말수 등을 죽이고 올린 장계 誅叛賊會寧鞠景仁明川末秀等狀啓 신이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과 함께 계책을 내어 병사를 모집한 연유에 대해서는 이미 뱃길로 장계하였거니와, 거센 파도와 왜놈들 사이에서 혹 도달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다시 진달하옵니다. 장계에 다 올리지 못한 사연과 근래의 조처한 일 등에 대해 아뢰자면, 신이 처음에 이성인(李聖仁),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등과 함께 경성(鏡城)에 들어가서 군민(軍民)들을 효유하여 함께 지킬 생각이었는데, 백성들의 의혹이 너무 심하여 백에 하나도 믿지 않을뿐더러 서울에서 온 장수와 사졸도 또한 뜻이 견고하지 못하여 대부분 남쪽으로 도망하려고 하니 부득이하게 각자 흩어져 혹은 산길로 혹은 바닷길로 향하여 관군에게 가려고 하였습니다.신이 바닷가 마을에 와 있다가 배를 타려고 하던 차에 마침 길에서 전하는 말을 들으니, 구황 등이 순찰사의 공문을 가지고 북쪽으로 돌아온다 하기에 신은 곧바로 정현룡에게 통지하고지방사람 및 여러 진의 장수들과 모의하여 경성에 들어가 웅거하기로 하고서 들에 성 안의 군민을 모아 국가의 중흥을 위해 마음을 돌려 적을 토벌하자는 의리로써 효유하였으며, 공문으로 원근의 병마를 불러서 반역자를 토벌하고 왜적을 섬멸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왜적의 기세가 바야흐로 강성하고 사람들은 두려워 주저하니 다만 모군(募軍)에 응하는 자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회령(會寧)의 역적 아전 국경인(鞠景仁)은 왜놈이 주는 벼슬을 받아 판형(判刑)이라 칭하고서 온 부중(府中)을 위압하며 육진의 병사를 부를 길을 막았으며 몰래 왜적과 통하여 항상 경성을 양쪽에서 공격하려고 하였습니다. 명천사(明川寺)의 종 말수(末秀)는 대장이라 자칭하며 전령을 보내 물자를 끊임없이 운반하여서 길주(吉州)의 왜놈들과 결탁하였으며 지방의 호족들을 도살하여 의병이 일어나는 것을 막았기에 경성의 수비가 고립되고 약하여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습니다. 오랑캐와 왜적이 협공하는 형세에 남북으로 반란의 역적이 있어서 간신히 지탱하면서 죽음으로 지킬 생각이었습니다.이번 달 2일에 회령 향소의 공문에 '본부(本府)에 거처하는 향리 국경인은 본래 악독한 놈으로 평소 일을 처리할 때 온갖 못된 짓을 저질렀으나 대단한 일이 아니기에 내버려두고 다스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적이 갑자기 쳐들어오니 경향(京鄕)의 사람들이 옷과 관을 거꾸로 뒤집어쓰고 허둥대었는데, 본도(本道)의 산천은 험하고 높으며 거리는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약간의 사대부 뿐 아니라 왕자 두 분과 그를 모시고 온 영부사(領府事)와 부원군(府院君), 승지(承旨) 등이 왜병을 피하고자 이 성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왜적이 부령에서 곧바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앞에 보이는 국경인이 들어 알고서 왜장에게 아첨하려고 자신의 무리들로 하여금 왜적을 위해 공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이에 은밀하게 친군위(親軍衛) 김세언(金世彥), 역자(驛子) 이충경(李忠卿·), 관노 승수(承水)와 경이(京伊) 및 그가 아는 잡놈 등으로 하여금 왕자 두 분과 부인, 영부사, 부원군, 승지 등과 그 부인들이 각각 자신의 처소에 있을 때 밤을 타고 돌입하여 불의에 잡아 결박하여 군영에 단단히 가두고서, 그 당시 부사와 판관으로 손을 쓰지 못하게 하며 군대의 위엄을 매섭게 펼쳐 놓았습니다. 부사(府使) 군관(軍官) 전 만호(萬戶) 이함(李涵), 내금위(內禁衛) 김덕신(金德新), 판관(判官) 군관 최덕흥(崔德興) 및 부조 방장(府助防將) 우후(虞侯) 군관 장응별(張應鱉), 정인신(鄭仁信) 등과 및 부하들을 시켜 이전에 미워하던 향리 공억복(貢億福), 관노 청룡(靑龍) 등의 목을 베어 위엄을 보인 뒤에 왜적이 고풍산(古豐山)이 이르자 반란 아전 국경인은 왕자를 잡아 가두었다고 왜장이 있는 곳에 자신이 친하게 지내던 향리 임민(林岷)을 내달려가서 고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그 당시 성안의 군민들은 모두 난을 피하여 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향소에도 위로는 관원이 없고 아래로는 군민이 없었기 때문에 저 또한 산으로 들어갔다가 왜적이 성에 들어간 뒤에 돌아왔는데 군민들도 천천히 돌아왔습니다. 앞에 보이는 역적 아전 국경인이 왜장에게 벼슬을 청하여 '판형(判刑)' 두 글자라는 이름을 받아 성안에서 권세를 드날리며 자신의 무리들을 불러 모을 생각을 드러내었으며, 또한 위세를 떨치며 무고한 군민 십여 명을 제 마음대로 참수하고서 생존한 백성들로 하여금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날로 길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으니, 향소의 교생과 군민들이 비록 분통한 뜻이 있더라도 위세에 겁을 내어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김세언, 이충경, 승수, 경이, 한복 등은 기회를 타서 참수하였습니다.그러나 역적의 괴수 국경인은 위세가 당당하고 그 족속들은 삼대처럼 많아서 기회를 얻을 틈이 없었기에 위의 김세언 등을 벤 목을 여러 진에 효수하지 못하였습니다. 감사의 공문에 '의병을 뽑아서 보내라.'라고 거듭거듭 분부하였지만, 위의 국경인이 또한 감사의 공문을 도외시하고 하나도 거행하지 않으므로, 온 고을의 군민이 그가 의병을 보내지 않은 것에 분통을 터드려 한곳에 모두 모여 군대의 위엄을 크게 펼쳐 이전 역적 아전 국경인과 및 그와 함께 모의하여 난을 일으킨 그의 처남의 안종 박림(朴林), 김림(金琳), 그의 수양아들 최린수(崔麟水) 뿐 아니라 김윤복(金允福), 오복수(吳福水), 종 언준(彥俊) 등을 전투를 벌여 일시에 활로 쏴 죽이고 그날로 목을 베었습니다. 국경인은 손발을 자르고 박림 등은 머리를 베었는데 모두 일곱의 목을 품관 색리 등에게 주어 모두 함에 담아서 보냈으며 의병도 내일 정도에 뽑아서 보낼 것이니, 역적 아전 국경인을 잡을 때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게 차례대로 등급을 나누어 책으로 만들어서 올려 보내겠다는 뜻으로 첩보를 올렸습니다.배후의 강한 도적은 비록 이미 죽였으나 목전의 반도들은 아직도 왜놈의 기세를 끼고서 먼저 명천을 점령하였고 다음으로 길주(吉州)를 도모하려던 차에 명천(明川)의 품관과 촌민들 수백 명이 모여서 길을 나눠 습격하였으나 반란의 역적들이 성에 웅거하면서 화포를 많이 발사하자 오합지졸의 병사들은 곧바로 무너져 뿔뿔이 달아났습니다. 이에 신은 오촌 권관(吾村權管) 구황(具滉)과 안원 권관(安原權管) 강문우(姜文佑)를 보내 각각 정예기병 30명을 거느리게 하였으며, 신의 군관 경원(慶源) 전 별감(別監) 정응복(鄭應福), 경성 친군위(鏡城親軍衛) 전덕룡(全德龍) 및 종성 부사 정현룡의 군관 경성 사람 급제 박은주(朴銀柱), 서자 정시룡(鄭時龍) 등도 적을 치러 갈 것을 자원하여 밤낮으로 내달려 명천에 이르니, 말수 또한 자신의 형세가 막다른 것을 알고서 몸에 무기를 차고서 산골로 도망가 웅거하였습니다. 깊은 산속까지 추격하였는데, 경성 토병(土兵) 전덕인(全德仁)이 먼저 그 흔적을 찾았으며 본부 영군사(營軍士) 김천년(金千年)이 산채로 포박하였고 그의 무리 경성 안종 논손(論孫), 명천 관노 문형(文亨), 귀양 온 장응호(張應豪) 등을 잡아 목을 베어 군중에 효수하니 잔당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달아나 혹은 왜적에게 가거나 혹은 산속으로 달아나 전부 체포하지는 못하였습니다.이전 회령에서 죽인 국경인과 명천 말수의 머리와 손발을 모두 함에 넣어 보내며, 그 나머지 목은 벤 13명의 수급은 산길이 눈에 얼어 운반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부득이 왼쪽 귀를 베어 쪽지에 이름을 써서 올려 보냅니다. 역적의 재산은 법으로 마땅히 몰수해야 하니 마땅히 기록하여 아뢴 뒤에 처리하겠습니다만, 고을 곳간이 탕진되었기에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모아 권장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권도(權道)로 군중의 상품으로 사용하였으니 황공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밭과 집은 마땅히 계문(啓聞)하여 역적을 잡거나 토벌한 이에게 주려고 생각하였으니, 앞의 두 역적은 다만 일개 하찮은 놈들이라 역적을 토벌한 사람들을 등급을 나눠 공을 기록하는 것이 오히려 번거로울 듯하며, 또 새로 모인 병사들에게 만일 고무시키는 조치가 없으면 호응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기에 전하께 이처럼 아룁니다.두 역적의 머리를 베고 난 뒤에 남북이 비로소 통하여 온성 이남의 진보(鎭堡)에서 불러 모은 병사들이 차츰 올라오는데, 다만 경원의 군사는 현재 아직 방비하는 곳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진보의 여러 장수들은 경성을 방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혹은 북관에서 남으로 내려오고 혹은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북으로 돌아와 모두 경성에 들어와 신의 지휘를 받고 있으니, 방원 만호(防垣萬戶) 한인제(韓仁濟), 동관 첨사(潼關僉使) 이응성(李應星), 영건 만호(永建萬戶) 정예국(鄭禮國), 보로지 권관(甫老知權管) 유대남(柳大男),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 보화보 권관(寶化堡權管) 이언상(李彥祥), 삼삼파 만호(森森坡萬戶) 한대방(韓大防), 장군파 만호(將軍坡萬戶) 오대남(吳大南), 조산 만호(造山萬戶) 인원침(印元忱), 어유간 만호(魚遊澗萬戶) 방우주(方佑周), 세천 권관(細川權管) 박예범(朴禮範) 등이 차례대로 와서 모였습니다. 사절동 권관(斜卩洞權管) 고경민(高敬民)은 순찰사의 공문을 가지고 별해보(別害堡)에서 왔으며, 병조 좌랑(兵曹佐郞) 서성(徐渻)과 귀양 온 나덕명(羅德明)은 바깥 마을에 있다가 마을에 거주하는 군정을 타일러 모두 성으로 들어왔습니다.육진은 한번 왜적이 지나간 뒤에 군기와 창곡이 겨우 10분의 1~2정도 남았는데 각각 봉하여 닫아두었는데, 말이 모두 왜적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므로 운반하여 타지와 통할 형세가 되지 못합니다. 경성에는 다행히 장전(長箭)과 편전(片箭) 각각 7백여 부와 천 명이 반 년 먹을 식량이 있으므로 군사 1천 7백여 명을 모았는데, 그 가운데 다른 고을의 관군은 산료(散料)를 관에서 주고 이 고을 사람은 모두 자비로 먹게 하였습니다. 대개 앞뒤로 이 지방 사람으로 하여금 두세 번 길주의 성으로 들어가게 하여 적의 허실을 엿보게 하였는데, 적의 숫자는 만여 명으로 관청과 개인 집에 나눠 거처하면서 성 안에 따로 깊은 해자와 높은 망루를 설치하여 주야로 망을 보면서 순찰한다고 하니, 경솔하게 병사를 일으켰다가는 욕을 볼 것을 깊이 헤아려 모쪼록 형세를 보아 기습하여 먼저 그들의 예봉을 꺾은 연후에 일거에 섬멸시키고 다음으로 영동(嶺東)과 단천(端川)에 미칠 생각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0년 임진년 10월 14일. 臣與鍾城府使鄭見龍, 共謀集兵緣由, 已爲由水路, 狀啓爲白有在果, 風濤盜賊之間, 恐未得達爲白乎去, 更良陳達爲白在果。狀啓未盡辭緣及近日措置事段, 臣初與李聖仁及慶源府使吳應台等入鏡城, 曉喩軍民, 以爲共守之計爲白良置, 民惑已甚, 百不一信叱分不喩, 京來將士, 亦無固志, 多欲南出乙仍于, 不得已各散, 或向山路, 或向海道, 欲達官軍。臣來在海村, 欲爲乘舟次, 適聞道路傳言, 具滉等持巡察使關子, 北還之奇爲白遣, 臣卽通于鄭見龍, 謀與土人及諸鎭將, 入據鏡城, 庭集城中軍民, 諭以國家中興, 回心討賊之義, 帖召遠近兵馬, 以爲討叛滅倭之計爲白良置, 賊勢方張, 人心疑懼, 非但應募無幾叱分不喩, 會寧叛吏鞠景仁段, 受倭官稱判刑, 威制一府, 以塞六鎭徵兵之路, 潛通倭賊, 常爲挾擊鏡城之計爲白遣。明川寺奴末秀段, 稱大將用傳令, 輸載絡繹, 締結吉州之倭, 屠殺土豪, 以遏義旅之興爲白乎等以, 鏡城守禦孤弱不振, 胡倭挾勢, 南北有叛, 僅僅支保, 死守是計爲白有如乎。本月初二日, 會寧鄕所牒呈內, '本府居鄕吏鞠景仁, 亦本是頑惡之人, 以平時用事之日, 多般作惡爲白良置, 非大段事是乎等用良, 置而不治爲如乎次節, 倭賊猝發, 衣冠顚倒, 京外遑遑, 本道乙山川險高, 道路隔遠是去, 凡干士大夫是沙餘良, 王子君兩分及陪來領府事·府院君·承旨等, 欲避倭變, 委入此城爲有去乙, 倭賊自富寧直入之奇乙, 上項鞠景仁, 亦聞知爲遣, 欲媚倭將, 使其徒立功於倭賊爲乎矣。陰令親軍衛金世彥·驛子李忠卿·官奴承水·官奴京伊及其矣所知雜類等率良旀,同王子兩分及夫人與領府事府院君承旨等夫人敎是等乙, 各其所在處, 乘夜突入, 不意執捉結縛, 堅囚軍營爲遣, 其時府使判官以使不得下手, 盛陳軍威。府使軍官前萬戶李涵·內禁衛金德新·判官軍官崔德興及府助防將虞侯軍官張應鱉·鄭仁信等及府下人, 前月有嫌爲在, 鄕吏貢億福·官奴靑龍等, 斬首示威後, 倭賊到古豐山爲有去乙, 同叛吏鞠景仁, 亦王子執捉拘留是如, 倭將處, 其矣所厚鄕吏林岷, 以馳告爲乎矣。' 其時段, 城中軍民, 幷只避亂入山乙仍于, 鄕所等段置, 上無官員, 下無軍民是乎等用良, 亦爲入山爲有如可, 倭賊入城後, 還來爲乎亦中, 軍民等徐徐還來爲良置。向前叛吏鞠景仁, 亦要名於倭將, 受判刑二字之名, 擅權於城內, 逞一己嘯聚之計, 又立威權, 恣斬無辜軍民十餘名, 使生存之民, 不得下手, 日增道路耳目是乎等用良, 鄕所校生軍民等, 雖有痛憤之志, 亦怯於積威, 莫敢下手爲有如乎次, 金世彥李忠卿承水京伊漢福等段, 乘機斬首爲有乎矣。 同賊首鞠景仁, 亦威勢堂堂, 族類如麻, 乘機無隙是置有等以, 上項金世彥等斬首乙, 梟示列鎭不得爲有如乎。道關內義兵抄送事, 再再分付爲有乎矣。上項鞠景仁, 亦道關乙, 置之度外, 一不擧行爲去乙, 一邑軍民, 憤其義兵不送, 咸聚一處, 大陳軍威, 向前叛吏鞠景仁及同謀作亂爲如乎其矣妻甥內奴朴林·金林, 其矣義子崔麟水是沙餘良, 金允福·吳福水·奴彥俊等, 一時相戰射殺, 同日斬首爲乎矣。鞠景仁段, 處斬手足, 朴林等段, 斬首, 合七首乙, 品官色吏等準授, 幷只函送爲遣, 義兵段置, 來明日, 抄送爲在果, 叛吏鞠景仁執捉時功勞人等乙, 秩秩分等成冊, 上道爲白臥乎味, 牒呈是白有亦。背後劇賊, 雖已就戮, 目前叛竪, 尙挾倭勢乙仍于, 先定明川, 次圖吉州計料次, 明川品官及村民等, 相聚數百, 分道掩襲爲白如乎, 叛賊據城, 多放火炮, 烏合之衆, 旋卽潰散是如爲白去乙, 臣遣吾村權管具滉·安原權管姜文佑, 各率精騎三十名, 臣矣軍官慶源前別監鄭應福·鏡城親軍衛全德龍及鍾城府使鄭見龍軍官鏡城土及第朴銀柱·庶孽鄭時龍等, 自願往討, 晝夜幷行, 比到明川, 則同末秀亦自知勢窮, 身佩戎器, 竄據山谷爲白有去乙, 追至深山, 鏡城土兵全德仁, 先得其蹤, 本府營軍士金千年執縛生擒, 幷捉其黨鏡城內奴論孫·明川官奴文亨·定配人張應豪等斬首, 梟示軍中爲白遣, 餘黨四散, 或投倭賊, 或竄山間, 時未盡捕爲白有齊。向前會寧所誅鞠景仁及明川末秀段頭及手足, 幷只函送爲白遣, 自餘斬馘十三級段, 山路氷雪, 輸送甚難乙仍于, 不得已左耳割取, 小牌書名, 上送爲白齊。逆賊財產, 法當籍沒, 所當錄啓處置事是白乎矣, 唯只府庫板蕩之餘, 召募散民, 勸勵慰悅次, 以權用於軍中賞格, 不勝惶恐爲白乎旀, 田民家舍段, 從當啓聞, 給付捕討人爲乎乙去, 計料爲白在果, 向前兩賊, 特一幺麽小竪良中, 討賊人分等錄功, 恐涉煩瑣爲乎矣。新集之卒, 若無聳動之擧, 則響應甚難, 弦如冒瀆上聞爲白齊。兩逆授首之後, 南北始通, 穩城以南鎭堡徵兵, 稍稍來到, 唯只慶源軍, 時未到防爲白齊, 鎭堡諸將等聞鏡城守禦之奇, 或自北關南出, 或自南程北還, 皆入鏡城, 受臣節制爲白在果, 防垣萬戶韓仁濟·潼關僉使李應星·永建萬戶鄭禮國·甫老知權管柳大男·高嶺僉使柳擎天·寶化堡權管李彥祥·森森坡萬戶韓大防·將軍坡萬戶吳大南·造山萬戶印元忱·魚遊澗萬戶方佑周·細川權管朴禮範等, 次次來會爲乎旀, 斜卩洞權管高敬民段, 持巡察使關子, 自別害來到爲白遣, 兵曹佐郞徐渻·定配人羅德明, 在外村, 曉諭村居軍丁爲白如乎節段, 幷只入城爲白有齊。六鎭一經倭賊之後, 軍器倉穀, 僅餘十分之一二爲白良置, 各自封閉叱分是白遣, 馬匹盡歸倭賊乙仍于, 無有轉運相通之勢爲白齊, 鏡城段, 幸有長片箭各七百餘部, 千人半年之粮爲白乎等以, 聚軍千七百餘名內, 他官軍段, 官給散料, 本府人段, 幷只自備以食爲白齊。大槩前後使土人, 再三入吉州城中, 覘賊虛實爲白乎矣。賊徒萬餘, 分據公私廨, 城內別作深溝高壘, 晝夜候望巡更爲白去等, 輕擧見辱爲白乎去, 百分詳量, 某條觀勢出奇, 先挫銳氣, 然後一擧盡殲爲白遣, 次及嶺東·端川計料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年壬辰十月十四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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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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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역적 경성의 국세필을 죽이고 올린 장계 誅叛賊鏡城鞠世弼狀啓 북도 지역 사람들은 왜적이 침입한 이후로 남쪽 길이 막혀 다시 국가가 존재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반란민들은 그 수령을 잡아 묶고 역적의 졸개들은 그 진의 장수를 내쫓아 버리고서 각자 스스로 장수라 칭하면서 왜적을 맞아들였습니다. 경성(鏡城)의 관노인 국세필(鞠世弼) 역시 회령(會寧)의 역적 아적 국경인(鞠景仁)과 같은 집안의 삼촌 숙부로 회령의 변란에 함께 모의하였습니다. 인하여 왜놈에게서 예백(禮伯)이라는 벼슬을 받아 왜놈과 함께 거처하면서 서로 표리가 되어 온 부중(府中)을 위압하면서 왜놈을 받들었을 뿐 아니라 산골짜기에 숨은 여러 진의 장수와 서울에서 온 선비들을 육진에 통문(通文)을 보내서 사로잡아 왜놈들에게 내주었습니다.왜놈들이 길주로 물러난 뒤에 신과 이성임(李聖任) 등은 본부(本府, 경성)으로 들어와 의병을 일으키기로 모의하였는데, 앞의 국세필은 여전히 왜적의 위세를 빌어 매우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면서 나라에 배반하려는 잔꾀를 맘대로 부려 의병을 일으키려는 일을 방해하여 그만두게 하였습니다. 신들은 고립되어 기세가 약하였기에 그를 죽여서 효시하지 못하고 각자 흩어져 남쪽으로 나와 관군에게 가려고 하던 즈음에 별해보(別害堡)에서 오는 순찰사의 공문을 이성임은 산길에서 보았고 저는 바닷가에 와 있다가 도로에서 전하는 그 공문을 보게 되었습니다.품관 서수(徐遂), 이기수(李麒壽) 등이 먼저 신과 호응하였으니, 저희들은 서울에서 온 장수와 사졸 및 토병(土兵) 수십 명과 함께 경성으로 들어가 공격하여 성을 차지한 뒤 수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곳 사람들은 이미 미혹되어 왕의 교화가 미치지 못한데다가 남쪽으로 명천의 역적 놈이 왜적의 기세를 배경으로 삼고 있고 북쪽으로 회령 역적의 아전이 육진에 위세를 떨치고 있는데, 국세필은 그들과 성세(聲勢)를 서로 의지하고 있는 역적으로 은연중에 같은 배를 탄 원수처럼 다뤄야 했습니다. 만약 임기응변으로 그를 속여서 나라를 배반하려는 그의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게 않게 하지 않으면 경성을 차지한 노회한 역적이 선수를 칠 걱정이 없지 않았으므로 부드러운 말로 타일러 허물을 버리고 잘못을 씻자고 깨우쳤으며, 아비와 아들의 공을 기록하여 공을 세워서 죄를 면하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한편으로는 군중의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회령에서 몰래 염탐하는 길을 끊은 다음에 회령과 명천(明川) 두 역적의 머리를 베니 군세가 차츰 떨치고 기강이 점차로 바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천하에 용납하지 못한 역적이 훗날 법망에서 벗어날 염려가 있기 때문에 곧바로 군중에서 목을 베어 조리 돌리고 함에 머리와 손발을 넣어 보내오며 그 아들 국생(鞠生)의 머리와 귀도 잘라 올려 보냅니다.대개 난리를 겪은 이래로 백성들을 제어함이 없어서 간혹 왜적을 끌어들여 촌가를 노략질하여 죽이거나 혹은 산속에서 같은 부류들을 불러 모아 대낮에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지금 나라가 다시 서고 전형(典刑)이 새로워졌다는 소식을 듣고서 사람들이 자신이 처벌받을까 하는 의심을 품고서 자못 주저하는 상황일 뿐 아니라 서울에서 온 장수와 병사 및 본토의 양민들이 그들의 과거 악행을 미워하여 간혹 그 때 일을 들춰내어 말을 하니, 육진의 병사를 불러 모아야 하는데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오지 않은 자들이 있어 염려가 되는 상황입니다. 이에 신이 막하의 낮은 관리로 마음대로 처리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다만 일을 맡고 있는 신하이므로 부득이 권도로써 탕척령(蕩滌令)을 시행하여 그 수괴는 없애버리고 위협을 받아 수괴를 따랐던 이들은 용서해 주어 징병에 참여하는 길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모든 계문(啓聞)은 지금 길이 막혔기 때문에 올려 보내기가 매우 어려우니 장계를 가지고 갈 사람을 사람은 자원하는 자를 뽑아서 보내오며, 은전으로 상을 내리는 것은 중요한 일이니 아랫사람이 감히 함부로 청할 바가 아니오나 그 무리들의 공로를 상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0년 임진년 10월 모일. 北道, 自倭寇之後, 南路阻絶, 不復知有國家, 亂民縛其守宰, 叛卒逐其鎭帥, 各自稱將, 以迎倭賊爲白有如乎。鏡城官奴鞠世弼, 亦以會寧叛吏鞠景仁同姓三寸叔父, 通謀會寧之變, 因受倭賊禮伯之官, 與倭同處, 相爲表裏, 威制一府, 供奉倭奴叱分不喩, 諸鎭將及京來士人避亂山谷者乙, 通文六鎭, 捉致倭賊爲乎旀。 倭退吉州之後, 臣及李聖任等來入本府, 謀欲擧義次, 同世弼尙假倭威, 黨與寔繁, 逞其反側之謀, 沮敗倡義之擧乙仍于。臣等孤立勢單, 不能顯戮, 各散南出, 圖赴官軍爲白如乎節, 巡察使關子, 自別害來到, 李聖任段, 遇於山路爲白遣, 臣段, 來在海汀, 得見道路傳書爲白齊。 品官徐遂·李麒壽等, 爲先響應, 謀與京來將士及土兵數十人, 同入鏡城, 以爲攻守之計爲白良置, 當此人心已惑, 王化不究之日, 南有明川逆竪, 近挾倭勢, 北有會寧叛吏, 威行六鎭, 世弼以聲勢相倚之賊, 隱然爲舟中之敵是白去等, 若非權謀紿說, 先釋其反側之心爲白在如中, 盤據老賊, 不無逞手之虞乙仍于, 溫辭開諭, 曉以棄過滌垢之意, 父子錄功, 示以立功免罪之端。一以定羣下疑懼之心, 一以絶會寧陰伺之路爲白有如乎節, 會寧·明川兩逆授首, 軍勢稍振, 紀律漸張爲白有去等, 覆載難容之賊, 恐有他日網漏之患絃如, 卽於軍中, 處斬梟示, 函送頭級手足爲白遣, 其子鞠生段, 斬首割耳, 上送爲白齊。大槩經亂以來, 民無防禁, 或有連引倭賊, 殺掠村家, 或有嘯聚山藪, 白晝殺越者, 不知其數, 今聞國家再造, 典刑維新爲白遣, 人懷自疑, 頗有顧望之端叱分不喩, 京來將士及本土良民等, 嫉其旣往之惡, 或發指斥之言爲白乎等乙以, 六鎭徵兵, 或有畏罪而不來者, 至爲可慮爲白昆, 臣以幕下小官, 擅便爲難爲白在果, 最只當事之臣, 以不得已權行蕩滌之令, 除其首惡, 捨其脅從, 以廣應募之路爲白乎旀, 凡干啓聞事段置, 當此路塞之時, 上達甚難, 陪持人等乙, 募其願往者起送爲白去乎, 恩賞重事, 非自下所敢擅請是白良置, 其矣徒等功勞段, 不敢不達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年壬辰十月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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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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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체직되어 경사로 돌아가는 부백 정자허와 작별하다 송계 장세경 奉別府伯鄭子虛遞歸京師【松溪 張世經】 예전에 연방을 함께 하고47)지금 이곳에서 다시 만났네용성48) 천 리 길에 달 뜨니봄에 산장서 술 한잔 하세나어찌 생각이나 했겠나 만난 곳에서되려 석별하는 사람 될 줄을습지49)에 저녁 해 기울어가니희끗희끗한 머리에 시 멈추오 疇昔同蓮榜如今更見眞龍城千里月山舘一盃春豈意相逢地翻成惜別人習池斜日暮吟斷鬢絲新 예전에……하고 연방(蓮榜)은 소과(小科), 즉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던 과거 시험의 합격자 명단을 말한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연보(年譜)〉를 보면, 정문부는 1584년(선조17)에 생원·진사의 초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장세경은 1585년(선조18)에 생원시에 합격한 것으로 나온다. 용성(龍城) 함경북도 경성(鏡城)의 옛 별호이다. 습지(習池) 습가지(習家池)의 준말로, 진(晉)나라 산간(山簡)이 양양(襄陽)에 있을 적에 항상 그곳에 찾아가 만취(滿醉)했다고 한다. 《世說新語 任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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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회사 感懷詞 인생에 늙음이 이르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人生到老寧不悲잎 지고 풀 시드니 홀로 사립문 닫았네 落葉秋草獨掩扉어찌 세상 사람들만 찾아오지 않으리 豈特世人之不問매우 친한 자와 또한 소원하네 抑亦至親者亦踈도연명이 교유를 끊고 적공이 큰 글씨를 쓴93)까닭이니 所以淵明息交翟公大書만 겹 구름 낀 골짜기로 영원히 돌아가리 萬重雲壑永言歸歟강가의 재실은 쓸쓸하고 江齋寂寂산에 뜬 달은 창창한데 山月蒼蒼흰 갈매기 날아오니 白鷗兮飛來오래도록 그대와 소요하리 長與君兮倘佯 人生到老寧不悲, 落葉秋草獨掩扉.豈特世人之不問, 抑亦至親者亦踈.所以淵明息交翟公大書, 萬重雲壑永言歸歟.江齋寂寂, 山月蒼蒼.白鷗兮飛來, 長與君兮倘佯. 적공이 큰 글씨를 쓴 한(漢)나라 적공(翟公)이 정위(廷尉)로 있을 때는 빈객이 문에 가득하더니 관직에서 축출되자 문밖에 참새 그물을 쳐도 될 만큼 썰렁하였는데, 그 후 그가 다시 정위가 되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에 적공이 문에 큰 글씨로 적기를,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서 벗의 우정을 알 수 있고, 한 번 빈한하고 한 번 부유함에서 벗의 태도를 알 수 있으며,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함에서 벗의 우정이 드러난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120 汲鄭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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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렬사를 지나며 감회가 있다 북평사 신익상 過彰烈祠有感【北評事 申翼相】 새로운 창렬사 큰 이름 드러내니영원히 북방에 풍교를 수립했네누가 알았으리오 작은 어랑리가나라 지킨 공신의 만리성일 줄을 彰烈新祠表大名北方千載樹風聲誰知一片漁郞地衛國功賢萬里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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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사에게 주다 贈朴進士 주량은 큰 바다를 기울일 정도이고 飮量傾滄海문필은 항왕4)과 대적할 만하구나 詞鋒敵項王어찌하여 늙을수록 씩씩한지 如何老益壯거울 속 백발 이길 수 없네 不勝鏡中霜 飮量傾滄海, 詞鋒敵項王.如何老益壯, 不勝鏡中霜. 항왕 한 고조(漢高祖)와 천하를 다툰 영웅으로 우(羽)는 자(字)이고, 이름은 적(籍)이다. 초 패왕(楚覇王)이 되었다가 5년 만에 한 고조에게 패망하여 자살하였다. 《사기(史記)》 7권 〈항우본기(項羽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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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사의 시에 차운하다 次朴進士韻 땅거미 지는 푸른 산 속에 日暮碧山裡채찍 멈춰 찾아오는 이 없네 無人來住鞭그대의 마음 한적하기만 하니 夫君意閑適이곳에 흥취가 유연하구나 於此興悠然 日暮碧山裡, 無人來住鞭.夫君意閑適, 於此興悠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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