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씨(愼氏)【성필(聖弼)】에게 답하는 편지 答愼【聖弼】書 일전에 소은공(素隱公)110)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소미성(小微星)이 빛을 숨기는 아픔111)을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혹서와 질병으로 인해 아직까지 편지 한 통을 올려 위로를 드리지 못하였는데, 이렇게 손수 쓰신 편지를 먼저 받게 되니 열어서 읽고 난 뒤 부끄러운 마음 끝이 없습니다. 하늘이 어찌 유독 우리 호남에만 이렇게까지 액운을 내리신단 말입니까? 학문이 우리나라에 크게 행해진 뒤로 훌륭하고 뛰어난 재사(才士)들이 호남에 많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가법(家法)을 마음에 둔 사람은 존재(存齋)112) 한 분 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0년 사이에 다행히 성암(惺菴)113)이 나왔으니, 후학들의 기대가 어떠하였습니까? 그러나 우러러볼 곳을 잃은 아픔114)이 농부가 가을 추수를 바라는 듯이 하는 날에 갑자기 일어났으니, 이른바 하늘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또 생각건대 선생께서 의발(衣鉢)을 전해주신 것이 불행히도 더욱 드무니, 마음으로 전하신 뜻을 계승하여 선생의 명성을 영원히 실추시키지 않을 자는 또한 현공(賢公) 형제 중에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 현공께서 자임(自任)하실 중임은 평소 함장(函丈)115)을 가까이서 모실 때와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현공께서는 힘쓰십시오.보내주신 편지를 자세히 읽어 보니, 슬프고 애통하며 간절하고 애처로운116) 말에서 저를 비루하다고 하여 외면하시지 않는 뜻을 충분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주제넘고 경솔하게 이러한 점을 언급하였으니, 도리어 두렵고도 부끄럽습니다.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日前聞素隱公捐館之音。不任小微隱光之痡。顧以酷炎病苦。尙稽一奉書以慰。玆承以手書先之。開讀之餘。愧騂無極。天何獨厄於我南湖一至於此歟。自b036_382a斯學之大行於鰈邦。豪才傑士。非不多於南湖。而至以程朱家法存心者。存齋一人而已。而百年之間。幸得惺菴之出。則後學之望如何如何。而安仰之痛。遽發於如農望秋之日。所謂天者不可諶矣。且念先生衣鉢之傳。不幸又鮮。紹述心傳之旨。永不墜門墻之聲者。亦不在於賢公伯仲間耶。自此賢公自任之重。有大異於平日跬步函丈間也。惟賢公勖之。細讀來書。悲哀懇測之辭。足見不以卑鄙爲外之意。僭率及此。還覺悚愧。伏惟情諒。 소은공(素隱公) 신천익(愼天翊, 1592~1661)을 가리킨다. 소은(素隱)은 그의 호.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백거(伯擧)다. 1612년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 이조 참의를 지냈는데, 광해군의 실정을 보고 사직하여 전라남도 영암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 홍문관‧사간원의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54년에 다시 나와서 홍문관 부제학, 대사간, 이조 참의, 이조 참판, 한성부 우윤 등을 역임한 뒤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소미성(小微星)이……아픔 '소미성(少微星)'은 처사(處士)를 상징하는 별이다. 이 별이 희미해지거나 떨어지면 인간 세상의 처사(處士)가 죽는다고 한다. 진(晉)나라 사부(謝敷)는 자가 경서(慶緖)인데, 성품이 맑고 욕심이 없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태평산(太平山)에 10여 년 동안 은거하였다. 하루는 달이 소미성을 범하자 점치는 사람이 "처사가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당시 명망이 높았던 대규(戴逵)가 죽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사부가 죽었다고 한다. 《晉書 卷94 隱逸列傳 謝敷》 존재(存齋)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을 가리킨다. 존재(存齋)는 그의 호.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다른 호는 고봉(高峯)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 병조 좌랑, 이조 정랑,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사헌부 헌납 등을 역임하였고,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이후 대사성, 대사간, 공조 참의 등을 지낸 뒤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에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발췌하여 《주자문록(朱子文錄)》을 편찬하는 등 주자학에 정진하였다. 이황과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란을 편 일이 유명하다. 성암(惺菴) 이수인(李壽仁, 1601~1661)을 가리킨다. 성암(惺菴)은 그의 호.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유안(幼安)이다. 1633년 과거에 급제하여 전적, 병조좌랑,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642년 재차 전적에 제수되었으나 사은한 뒤 바로 전리(田里)로 내려갔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우러러볼……아픔 원문은 '안앙지통(安仰之痛)'이다. 훌륭한 스승이 죽은 데 대한 슬픔을 말한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대들보가 꺾이는구나. 철인이 시드는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 노래하였는데, 자공(子貢)이 이 노래를 듣고는 "태산이 무너지면 우리가 장차 어디를 우러러보며, 대들보가 꺾이고 철인이 시들면 우리가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는가.[泰山其頹 則吾將安仰 梁木其壞 哲人其萎 則吾將安放]"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禮記 檀弓上》 함장(函丈) 한 길[丈]을 용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스승과 강론하는 자리를 의미하며, 스승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만약 음식을 대접하는 손님이 아니고 스승과 강론하는 자리이면 자리를 펴되 한 길쯤 되는 공간을 띄운다.[若非飮食之客 布席 席間函丈]"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애처로운 원문은 '측(測)'인데, 문맥을 살펴 '측(惻)'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