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경문목【물은 사람이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다】 心經問目【夫詳問子何人】 《심경(心經)》의 차서(次序)는 《서경(書經)》이 가장 처음이고, 《시경(詩經)》ㆍ《주역(周易)》ㆍ《논어(論語)》가 그다음이며, 《중용(中庸)》ㆍ《대학(大學)》ㆍ《예기(禮記)》 〈악기(樂記〉ㆍ《맹자(孟子)》가 그다음입니다. 이 차서는 학문에 나아가는 차례로 선후(先後)의 순서를 삼은 것입니까. 성현이 지은 시기로 순서를 삼은 것입니까. 만일 지어진 시기의 선후로 순서를 삼은 것이라면 《중용》이 《대학》의 뒤에 있어야 하고, 학문에 나아가는 차례를 순서로 삼은 것이라면 더욱 주자(朱子)의 설을 따라 《대학》을 가장 먼저 하여야 하니,74)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서산(西山)75)은 무슨 연유로 《중용》을 대학보다 먼저 차례한 것입니까.또 《대학》의 경일장(經一章)은 바로 공자(孔子)의 문하에서 심법(心法)을 전수한 것으로, 체용(體用)과 본말(本末)의 맥락이 분명합니다. 심학(心學)의 요체가 여기에서 벗어남이 없는데, 서산은 다만 전이장(傳二章)만을 취하고 경일장은 취하지 않았으니, 그 뜻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어떤 이는 말하기를 '경일장은 천하와 국가를 겸하여 말하였으므로 《심경》에 취하여 들이려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중용이란 도를 닦는 가르침이요, 천지가 편안히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지는 극치(極致)이니,76) 천하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의 지극한 공력이 아니겠습니까. 심체(心軆)가 지극히 넓어지면 천지와 만물이 진실로 일체(一軆)가 되는 법이니, 지엽적인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이유로 근본이 되는 명덕(明德)을 빠트려서는 안 될 듯합니다. 알지 못하겠으나, 이 말이 어떠합니까.노재 왕씨(魯齋王氏)가 말하기를, "대개 '원자(原字)'는 밖으로부터 미루어 들어오는 것이니, 본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으므로 미묘하다고 말하였고, '생자(生字)'는 물(物)에 감응하여 동한 것이니, 본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으므로 위태롭다고 말한 것이다. '정자(正字)'와 '사자(私字)'는 모두 외면에 나타나기 때문에 인심(人心)을 인욕(人慾)이라고 이를 수 없는 것이다."77)라고 하였습니다. 제 생각에는 망령되이 '원(原)'이라는 말은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성명(性命)이 발동(發動)하는 곳이 곧 도심(道心)이니, 이는 근원이 시작되어 나온 곳이 곧 물줄기인 것과 같습니다. 물의 근원은 안에 있는데 그 물줄기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니, 그렇다면 '원자(原字)'는 밖으로부터 미루어 들어온다고 말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이기(理氣)가 사람에게 품부됨에 진실로 말할 수 있는 선후의 순서가 없으니, 이(理)가 있으면 곧 기(氣)가 있고, 기가 있으면 곧 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 기를 가지고 있어서 인심이 동하면 곧 이 안으로부터 나오니, 인심의 근원은 또한 본래부터 있는 물사(物事)이므로, 성명의 바름이 안으로 말미암아 밖으로 나타날 리가 전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은 밖에서 동하여 안에 나타나므로, '정자(正字)'와 '사자(私字)'를 또한 모두 밖에 나타난다고 말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러나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그 뜻을 알 수 없으니, 나아가 질정(質正)하고자 합니다.〈인심도심도(人心道心圖)〉는 '정자(正字)'가 형기(形氣)의 위에 있고 '미자(微字)'가 성명(性命)의 아래에 있으며 '사자(私字)'가 형(形)에 속해 있고 '위자(危字)'가 기(氣)에 속해 있으니, 그 지의(指意)의 소재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밝게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주역》의 〈건괘 문언전(坤卦 文言傳)〉 육이효(六二爻)에 "경(敬)과 의(義)가 확립되면 덕(德)이 외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외롭지 않다고 한 것은 깊이 음미하여야 할 말인 듯한데, 《심경부주(心經附註)》에는 충분히 설파(說破)해 놓지 않았습니다. 정전(程傳)78)을 살펴보건대, "경과 의가 확립되면 그 덕이 성해진다."라고 하였고, 《주역본의(周易本意)》79)에는 "외롭지 않다는 것은 큼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략적으로 말한 것일 뿐입니다. 저의 생각에는 '고(孤)'는 '고편(孤偏, 한쪽으로만 치우침)'이라는 말과 같은 듯합니다. 한갓 안을 곧게 하는 것[直內]에만 종사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사위(事爲)하는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한다면 의로 방밖을 방정하게 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덕이 끝내 한쪽으로만 고립되는 것이요, 한갓 밖을 방정하게 하는 것[方外]만을 일삼고 경을 잡아 지키는 것[持敬]을 소홀히 한다면 밖을 중시하고 안을 경외시하는 잘못이 있게 될 것이니, 이는 덕이 또한 한쪽으로만 고립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경과 의를 양쪽에 끼고 잡아 지키며 안과 밖을 모두 기른 뒤에야 이 덕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이 양쪽 모두 수양되고 둘 다 진보되어 한쪽으로 고립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이 옳은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각헌 채씨(覺軒蔡氏)가 "정할 때의 주일(主一)이 그 태극(太極)의 경계(境界)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삼가 '「태극의 본체(本體)」라 하여야 하는데 경계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감히 단정하여 말하지는 못하고 그 말에 대해 의문을 가진 말일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대개 상수(象數)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그 이(理)만 갖추어진 상태를 태극(太極)이라고 하고,80) 사단(四端)이 아직 발하기 전에 온갖 이치가 구비되어 있는 상태를 정일(靜一)이라고 합니다. 정일이란 바로 내 마음의 태극의 전체인데, 만일 태극의 경계라고 한다면 정일이란 태극의 경계를 나누는 변경(邊境)인 것이니, 정일에 앞서서 또 따로 태극의 전체가 있는 것이 어찌 가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이 옳은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여자약(呂子約)81)이 "듣는 것이 없고 보는 것이 없는 것이 미발(未發)이다."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이를 매우 비난하였습니다.82) 《중용》에서는 보지 않는 바와 듣지 않는 바를 가지고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의 본체를 존양(存養)하는 것으로 삼았습니다.83) 이른바 듣는 것이 없고 보는 것이 없다는 것은 바로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는 것과 어세(語勢)가 서로 부합되는 듯한데, 주자가 매우 비난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그 사이에 반드시 은미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없고 보는 것이 없다고 할 때의 문(聞)과 견(見)은 이목(耳目)의 차원에서 말한 것이고,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고 할 때의 도(覩)와 문(聞)은 심성(心性)의 차원에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뜻이 절로 같지 않은 것입니다. 부디 일전어(一轉語)84)를 해주시어 저의 몽매함을 깨우쳐 주십시오. 心經次序。書以首之。詩易論語次之。庸學樂記孟子次之。是次序以進學次第爲先後之序歟。聖賢所著之時爲序歟。若以時之先後爲序。中庸當在大學之後。以進學爲序。尤當從朱子之說以大學爲先。未知西山何以而以中庸先於大學歟。又按大學經一章。是孔門傳授心法。體用本末。脉絡分明。心學之要。無出於此。而西山只取傳二章而不取經一章。其意安在歟。或曰經一章。兼天下國家而言。故不肯摭入於心經。愚意以爲中庸修道之敎。位育之極。非治天下之極功歟。心軆至廣。天地萬物。固爲一軆。則不可以治平之末而遺明德之本。未知此言如何。魯齋王氏曰盖原字自外推入。知其本有。故曰微。生字感物而動。知其本無。故曰危。正字私字。皆見于外。故人心不可謂之人慾云云。愚意妄以爲原之爲言源也。性命發動處便是道心。猶源始發底便是流也。水源在內。其流發外則原字恐不可以自外推入爲言也。理氣之賦於人。固無先後之可言。有理卽有氣。有氣卽有理。旣有是氣而人心之動。便從這裏出。則人心之源。亦本有底物事也。恐不可謂之全無性命之正。由內而發外者也。形氣之私。動於外而發於內者也。正字私字。亦恐不可謂之皆見于外者也。反復思惟。未得其義。願就正焉。人心道心圖。正字在形氣之上。微字在性命之下。私字屬于形。危字屬于氣。未知其指意所在。伏願明敎。易坤之六二。敬義立而德不孤。不孤云者。似當深味。附註未有十分說破。按程傳曰敬義立而其德盛矣。本義曰不孤大也。盖大槩言之矣。愚意以爲孤猶孤偏也。徒然從事於直內。而忽於言動事爲之間則義不方矣。此德終孤於一偏也。徒事方外而忽於持敬。則有重外輕內之失而此德又孤於一偏矣。必也敬義夾持。內外交養。然後此德之全軆大用。兼脩幷進。無孤於一偏之弊矣。如是看得。未知是否。覺軒蔡氏曰云云。靜之主一。其太極之境界歟。愚竊以爲當曰太極之本體。而曰境界何也。不敢質言。疑之之辭也。盖象數未形。其理已具。謂之太極。四端未發而衆理具足。謂之靜一。靜一卽吾心太極之全軆。若謂之境界則靜一是太極分界之邊境。而靜一之先。又有太極之全軆。烏可乎哉。如是看得。未知是否。呂子約謂未有聞未有見。爲未發。朱子甚非之。中庸則以所不覩所不聞。爲存養未發之軆。所謂未聞未見者。卽與不覩不聞。語勢似相合。而朱子甚非之何歟。其間必有微意。聞見就耳目上言。覩聞就心性上言。故其旨自不同歟。幸賜一轉語。以發蒙蔽。 주자(朱子)의……따라 주자가 학문에 있어 《대학》을 가장 먼저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가리킨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4에 "먼저 《대학》을 읽어서 그 규모를 정하여야 한다.[先讀大學, 以定其規模.]"라고 하였고, 또 "《대학》은 바로 학문을 하는 강목이니, 먼저 《대학》을 읽어 강령을 세워 정하면 다른 책은 모두 잡설로 이 안에 들어 있다. 《대학》을 통달한 다음 다른 경서를 보면 이것이 격물ㆍ치지의 일이며, 이것이 성의ㆍ정심의 일이며, 이것이 수신의 일이며, 이것이 제가ㆍ치국ㆍ평천하의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大學, 是爲學綱目. 先讀大學, 立定綱領, 他書, 皆雜說在裏許. 通得大學了, 去看他經,方見得此是格物致知事, 此是誠意正心事, 此是修身事, 此是齊家治國平天下事.]"라고 하였다. 서산(西山) 《심경(心經)》을 편찬한 진덕수(眞德秀, 1178~1235)의 호이다. 자는 경원(景元),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천지가……극치(極致)이니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편안히 있고, 만물이 잘 생육될 것이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고 하였다. 노재 왕씨(魯齋王氏)……것이다 주희(朱熹)가 "마음의 허령지각(虛靈知覺)은 하나일 뿐인데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다름이 있다고 한 것은, 혹은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겨나고[生] 혹은 성명(性命)의 바름에서 근원[原]하여 지각하는 것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혹은 위태로워[危] 편안하지 못하고 혹은 미묘하여[微]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가 없으므로 비록 상지(上智)의 사람이라도 인심(人心)이 없을 수 없고, 또한 이 성(性)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가 없으므로 비록 하우(下愚)의 사람이라도 도심(道心)이 없을 수 없다. 인심과 도심 두 가지가 방촌(方寸 마음)의 사이에 섞여 있어서 다스릴 방도를 알지 못하면 위태로운 것[人心]은 더욱 위태로워지고 미묘한 것[道心]은 더욱 미묘해져서 천리(天理)의 공(公)이 마침내 인욕(人欲)의 사(私)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 데 대하여 한 말이다. 정전(程傳) 송나라 정이(程頤)의 《이천역전(伊川易傳)》을 가리킨다. 《주역본의(周易本意)》 주희(朱熹)가 지은 것이다. 대개……하고 주희(朱熹)가 지은 《역학계몽(易學啓蒙)》에 나오는 말이다. 여자약(呂子約) 여조검(呂祖儉, 1137~1181)으로, 자약은 그의 자이다. 호는 대우(大愚), 시호는 충(忠)으로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의 아우이다. 여자약이……비난하였습니다 정좌하고 있을 때에 앞에 지나가는 사물을 "보아야 하는가 보지 말아야 하는가[還見, 不見]"라는 질문을 받고, 정자(程子)가 제사(祭祀)와 같은 대사(大事)가 있을 때에는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아야 하겠지만[不見不聞]', 만약 일이 없을 때에는 '눈은 마땅히 보아야 하고 귀는 마땅히 들어야 한다[目須見, 耳須聞.]'라고 대답하였는데, 이에 대해 여자약(呂子約)이 "듣는 것이 없고 보는 것이 없는 것이 미발이다.[未有聞未有見, 爲未發.]"라고 하자, 주자가 정문(程門)의 묻고 기록한 자에게도 책임이 있고, 후인들 역시 제대로 읽지 못하는 병폐가 있다고 비평한 일을 가리킨다. 《중용》에서는……삼았습니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도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보지 않는 바에도 경계하고 삼가야 하고, 그 듣지 않는 바에도 두려워해야 한다.[道也者, 不可須㬰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일전어(一轉語) 원래는 불교의 참선에서 참선자가 미혹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하는 말을 이른다.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크게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말씀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