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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山海關 뛰어난 지형 예로부터 가장 명성 독차지했으니요동과 연경의 옛 경계 여기서 서로 부딪쳤지하늘은 삼천 리 발해에 닿아 있고땅은 일만 겹 음산에 접해 있네태평성대엔 진시황처럼 원망 쌓을 것 없고204)뛰어난 공업은 도리어 한 무제 등봉을 비루하게 여기네205)관문 방비할 자 지금 누구일꼬듣건대 수만 군대가 소범의 흉중에 있었다지206) 形勝從來最擅雄遼燕舊界此交衝天連渤海三千里地接陰山一萬重聖代不勞秦築怨豐功還陋漢登封關門鎖鑰今誰是見說兵藏小范胸 태평성대엔……없고 진 시황(秦始皇)처럼 굳이 만리장성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진 시황이 만리장성을 쌓느라 백성들을 고된 부역에 동원하자 이를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뛰어난……여기네 등봉(登封)은 황제가 산에 올라가 봉선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한 무제(漢武帝)가 봉선(封禪) 많이 행한 것을 비루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한 무제는 거액의 비용을 들여 태산(泰山)에서 봉선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그밖에도 사방 여러 곳에서 봉선 의식을 거행했다. 《漢書 卷6 武帝紀》 수만……있었다지 소범(小范)은 송나라 인종(仁宗) 때의 명신 범중엄(范仲淹)을 일컫는다. 범중엄이 지연주(知延州)에 제수되어 서하(西夏)를 방비할 계책을 갖추자, 서하 사람들이 "연주에 뜻을 두지 말라. 지금 소범노자(小范老子)의 가슴속에는 수만의 군대가 있으니[胸中自有數萬甲兵], 대범노자(大范老子) 범옹(范雍)처럼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경계했다고 한다. 《宋史 范仲淹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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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해루. 서장관의 시에 차운하다 觀海樓 次書狀韻 만리장성 앞 백 척 높이 누대객이 올라 바라보니 아득하여 시름을 더하는구나요동과 연경이 할거하니 산하는 그대로 있고진나라 한나라가 경영했으니 세월 아득하여라넓은 바다 저 먼 끝에 오직 태양 떠오르고푸른 하늘 나직한 곳에 더이상 모래섬 없네취기 올라 갑자기 일어서니 추사에 슬퍼지고서풍에 고개 돌리니 흘러가는 강 보이네 萬里城頭百尺樓客來登眺逈添愁遼燕割據山河在秦漢經營歲月悠滄海窮邊惟日出碧天低處更無洲酒酣忽起悲秋思回首西風見水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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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덕원에 대한 만사 林德源輓 당당하고 장대한 평생의 뜻구구한 책상물림이 아니어라고기 먹을 호랑이 머리270)인줄 일찍이 알았는데원숭이 팔뚝으로 제후에 봉해지지 못할 줄271) 뉘 알았으리늙어 외려 죽기 각오하니272) 장군은 건장하였고청렴함은 현어273)에 비교되니 태수는 뛰어났어라남긴 한은 방촌의 인끈 버리지 못한 것이니꿈속에서 금산으로 몇 번이나 돌아갔던가 昂昂落落平生志不是區區翰墨流早識虎頭當食肉誰知猿臂未封侯老猶裹革將軍健淸比懸魚太守優遺恨未抛方寸印幾回歸夢錦山秋 고기……머리 후한(後漢) 반초(班超)가 집이 가난해서 관청의 문서를 베껴 쓰며 모친을 봉양하던 중에, "그대는 제비의 턱에 범의 머리라서 날아다니며 고기를 먹는 상이니, 이는 곧 만리후가 될 상이다.[燕頷虎頭 飛而食肉 此萬里侯相也]"라는 관상가의 말을 듣고 분발한 결과, 서역(西域)에 나아가 큰 공을 세워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진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 원숭이……줄 원비는 원숭이 처럼 팔이 길어서 무릎 아래로 내려온다는 뜻으로, 활을 잘 쏘는 위엄 있는 무부(武夫)를 지칭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한 문제(漢文帝) 때 이광(李廣)은 '원비장군(猿臂將軍)'으로 불렸는데 북평 태수(北平太守) 등 여러 변방의 태수를 지냈고, 특히 대장군(大將軍)으로서 흉노(匈奴)와 70여 차례의 전쟁을 하여 매우 큰 공훈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부하 장수들 모두가 제후로 봉해졌는데도 정작 그만은 끝내 높은 관작에 봉해지지 못했으므로, 운명의 탓으로 돌리며 탄식을 금하지 못했다는 '이광미봉(李廣未封)'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 죽기 각오하니 원문의 '과혁(裹革)'은 가죽에 싼다는 뜻으로, 전장에서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뒤 말가죽에 싸여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사나이라면 마땅히 전쟁터에서 죽어 말가죽에 시체를 싸서 돌아와 묻혀야 하니, 어찌 아녀자의 손에 죽을소냐.[男兒當以馬革裹尸還葬, 安可死於兒女手乎?]"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현어 생선을 걸어 놓는다는 뜻으로, 관리의 청렴결백을 비유하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양속(羊續)이 남양 태수(南陽太守)로 있을 적에 요속(僚屬)이 생선을 바치자, 이 생선을 뜰에 걸어 놓아 다시는 바치지 말라는 뜻을 보인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後漢書 卷31 羊續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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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척에 대한 애사 申滌哀詞 천상에 누대가 완성되자 적선이 돌아가니279)시혼은 지금 옥황상제의 앞에 있어라양주의 학280)이 떠나자 구름은 부질없이 서늘하고오동나무 난새 외로워지자281) 달은 홀로 둥글구나안개 속에서 몇 해나 범의 가죽을 윤택하게 하였는가282)갑 속 세 척의 용천검은 울어대누나283)영여에 멍에를 매던 날 내 장차 보내려니젊어서 종유했던 이들 가련하게 여기는 세상을 부끄럽게 여기네 天上樓成返謫仙詩魂今在玉皇前楊州鶴去雲空冷梧樹鸞孤月獨圓霧裏幾年鞱豹炳匣中三尺吼龍泉靈輿駕日吾將送少小從遊辱世憐 천상의……돌아가니 진(晉)나라 때 소소(蘇韶)가 죽은 뒤에 넋이 돌아와 그의 아우에게 "저승에 갔더니 공자의 제자 안회와 복상(卜商)이 지금 지하 세계의 조정에서 수문랑을 맡고 있더라."한 고사와 당(唐)나라 이하(李賀)가 27세로 병들어 죽으려 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붉은 용을 타고 내려와 "옥황상제가 지금 그대를 불러와 새로 지은 백옥루(白玉樓)의 기문을 짓게 하라 하였소." 하고서 천상으로 데리고 갔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흔히 문인 재사(才士)가 일찍 죽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는 뜻으로 쓰인다. 《太平廣記 卷319 鬼四 蘇韶》 《李義山文集箋註 卷10 李賀小傳》 양주의 학 인간이 바라는 여러 가지 것을 신척이 다 지닌 것을 말한다. 예전에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 소원을 말하였는데, 한 사람은 많은 돈을 갖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고, 한 사람은 학(鶴)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고, 한 사람은 경치 좋은 양주의 자사(楊州刺史)가 되는 것이 소원이라 하자, 이를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많은 돈을 허리에 차고서 학을 타고 양주 고을의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이 소원이라 했던 데서 나온 말이다. 《淵鑑類函 鳥部三 鶴》 오동나무 난새 외로워지자 신척을 사별한 뒤 부인이 홀로 슬퍼하며 지냈다는 말이다. 옛날에 계빈왕(罽賓王)이 난새 한 마리를 잡았는데, 난새가 우는 소리를 매우 듣고 싶었으나 울게 할 방도가 없었다. 금으로 된 울타리를 쳐주고 진귀한 먹이를 주어도 시름시름 앓기만 하고 삼 년 동안을 울지를 않았다. 그러자 계빈왕의 부인이 말하기를 "새는 자기 무리를 본 뒤에 운다고 들었는데, 어찌하여 거울을 걸어서 비치게 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그 말에 따라 거울을 걸어 주었더니, 난새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는 하늘에 사무치도록 슬피 울다가 숨이 끊어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후에 이를 '난경(鸞鏡)' 또는 '고란조경(孤鸞照鏡)'이라 하여 금슬 좋던 부부가 배우자를 사별(死別)한 뒤 쓸쓸하게 지내는 것을 비유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 《太平御覽 卷916 鸞鳥詩序》 안개……하였는가 한나라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 〈도답자처(陶答子妻)〉에 도답자가 도(陶) 지역을 다스린 지 3년이 되었는데, 명성은 들리지 않고 집안의 재산만 세 배로 늘었다. 그의 아내가 간하기를 "남산에 검은 표범이 사는데, 안개가 끼거나 비가 내리면 칠일 동안 먹이를 먹으러 내려오지 않으니, 그것은 그 털을 윤택하게 하여 표범의 무늬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개와 돼지는 음식을 고르지 않고 먹어서 그 몸을 살찌우지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갑……울어대었네 용천검이 주인을 잃고 우는 것으로 신척의 죽음을 비유하였다. 진(晉)나라 때 장화(張華)가 일찍이 두성(斗星)과 우성(牛星) 사이에 자기(紫氣)가 감도는 것을 보고 예장(豫章)의 점성가(占星家) 뇌환(雷煥)에게 물으니, 보검의 빛이라 하였다. 이에 풍성(豐城)의 감옥 터에서 춘추 시대에 만들어진 전설적인 보검인 용천검(龍泉劍)과 태아검(太阿劍)을 발굴했다고 한다. 《古文眞寶 後集 卷2 滕王閣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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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의 계축에 제하다 題寧邊契軸 관서는 멀리 오랑캐 땅과 이웃하고 있으니장성은 예로부터 사람에게 달렸어라장군은 절로 흉중에 철갑이 있고막객은 항상 좌상의 봄이 되누나한가한 날 계산에서 두루 유상하나니훗날 그 모습 그림으로 볼 수 있으리강주의 늙은 수령 어찌 그리 늦게 왔는고노둔하여 후배들에게 낄 수가 없구나 西土遙將虜境鄰長城從古在於人將軍自有胸中甲幕客常爲座上春暇日溪山遊賞遍他年面目畵圖新江洲老守來何暮駑劣無由仄後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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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를 받고119) 느낌을 읊다 2수 증손 진사 집 延諡感吟【二首 曾孫 進士楫】 은혜롭게 연이어 내린 글 바삐 봉함 열어보니증조부께 시호 내려질 거라 알려 왔네다투어 피는 뜰의 꽃도 기쁜 마음 알고지저귀는 산새도 즐거운 심정 아네오늘 밤 잔약한 자손은 손뼉 치며 기뻐하니어느 때 영광스런 시호 공경히 맞이하려나이 늙은이의 짧은 여생 스스로 생각해보니소년들아 관직의 성취 기대한다 하지 말라일찍이 임진년과 계사년 변란 당한 선조홀로 무한한 북방의 공적 거두었네당시의 풍렬 아직까지 관북에 남아 있고여사로 지은 문장 해동 밝게 비추네선왕의 관작 추증 영광 이미 지극한데오늘 내리신 시호 은총 새롭고 성대하네임금의 은혜 갚고자 해도 나는 노쇠했으니아이들에게 각각 충성 바치라고 권할 뿐이네 惠連書倒坼緘忙報道曾公已易名爭笑庭花知喜氣解歌山鳥識歡情孱孫此夕惟忻忭榮號何時得祗迎自念老夫餘日短少年休說待官成先祖曾丁壬癸中獨收無限朔方功當時風烈留關北餘事文章照海東贈爵先朝榮已極易名今日寵新隆君恩欲報吾衰矣只勉兒曹各效忠 시호를 받고 계사년(1713, 숙종 39)에 '충의(忠毅)'라는 시호의 비준을 받았다. 《農圃集 年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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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계에서 경차관에게 주다 江界贈敬差官 근래 술에 젖어 해가 늦도록 잠을 자는데일어나 봄 경치 찾았으니 분수 넘어 드문 일이라네밤비는 방초에 흔적을 남기고저물녘 바람은 낙화를 하늘거리며 떨어지게 하누나경차관은 웃으며 말하니 따뜻한 옥과 같고곱게 단장한 기녀는 걸음걸음 연꽃 같아라다시 백 잔 술 들어 한 번 취하니내가 노강309)가에 있는 줄을 알지 못하겠구나 近來中酒日高眠起訪韶華分外鮮夜雨餘痕芳草地晩風新態落花天繡衣笑語溫溫玉粉面梳粧步步蓮更擧百杯成一醉不知身在魯江邊 노강 강계에 있는 독노강(禿魯江)을 가리킨다. 봄철의 유흥을 즐기니 변방에 와 있는 줄 알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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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명장전 이계 홍양호 海東名將傳 【耳溪洪良浩】 정문부(鄭文孚)의 자는 자허(子虛)로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젊어서 독서를 좋아하였고 글을 잘 지었다. 선조 무자년(1588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괴원(槐院, 승문원)에 속하였다가 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로 나갔다. 임진란에 행장(行長)과 청정(淸正)이 임진강을 건너 임금의 수레가 혹시 북관(北關)에 들어간 것을 예상하고서 길을 나누어 갈 것을 약속하였다. 행장은 서쪽으로 향하여 가고 청정은 북쪽으로 향하여 가는데, 용맹은 왜적 중에 제일이며 거느린 병사는 더욱 날래고 사나웠다. 곡산(谷山)으로부터 노리현(老里峴)을 넘어 철령(鐵嶺)으로 나아가니 북방을 지키던 군사가 궤멸되었다. 청정은 하루에 수백 리를 다녀 형세가 비바람과 같았는데 지나간 곳은 노략으로 닭과 개는 물론 땅 위에 아무 것도 남겨 두지 않았다.감사(監司) 유영립(柳永立)은 산골짜기로 피하여 들어갔는데, 반민(叛民)들이 왜병을 인도하여 그를 붙잡았다. 북청부(北靑府) 사람 김응전(金應田)이 거짓으로 감사의 종[奴]이라고 칭하고 적중에 들어가 밤에 틈을 타서 업고 도망하여 행재소에 돌아왔다. 판관(判官) 유희진(柳希津)은 반민에게 잡혀 항복하였고, 병사(兵使) 이혼(李渾)은 갑산(甲山)으로 달아났으나 반민에게 죽음을 당하였으며, 갑산 사람들은 또 부사(府使)를 죽이고 왜적에게 항복하였다.왕자 순화군(順和君)이 철원(鐵原)에 들어갔다가 왜적이 강원도로 들어간다는 소문을 듣고 드디어 철령(鐵嶺)을 넘어 함경남도에 들어가 임해군(臨海君)을 따랐었다. 이에 이르러 두 왕자는 또 남도로부터 군사를 피하여 북도(北道)에 들어갔다. 청정이 함경북도에 들어오자 병사(兵使) 한극함이(韓克諴)은 전투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고, 남병사(南兵使) 이영(李瑛)도 마천령(磨天嶺)에서 패하게 되자 주군(州郡)이 모두 함락되었다. 이전에 두 왕자는 사나운 종놈을 풀어서 민간을 소란스럽게 하여 민심을 크게 잃었는데, 회령(會寧) 향리 국경인(鞠景仁), 경성(鏡城) 관노 국세필(鞠世弼), 명천(明川) 사노(寺奴) 정말수(鄭末秀) 등이 각각 성을 점거하고 두 왕자 및 배신(陪臣)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등 수십 명을 맞아들여 항복시킨 뒤에 붙잡아 두었다.청정이 승승장구하며 두만강에 이르러 육진(六鎭)의 성보(城堡)를 다 빼앗았다. 그리고 국 경인을 왜의 관직인 판형(判刑)으로 삼았고 국세필은 예백겸본도병사(禮伯兼本道兵使)로 삼았고 말수도 대장(大將)으로 삼아 북관을 나누어 통솔하게 하였다. 이때 정문부가 평사(評事)로서 경성(鏡城)에 있다가 난을 만나 탈출하여 산중에 숨어 있었는데, 경성 유생 이붕수(李鵬壽)와 최배천(崔配天)이 정문부를 보고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청하니 정문부가 흔연히 그 말을 따랐다. 드디어 정문부를 장수로 추대하고 토병(土兵)을 모집하였는데 장사(壯士)가 수백과 현지 수령의 변장(邊將)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었다.북쪽 오랑캐가 기회를 틈타 여러 번 변방을 노략질하니 국세필은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최배천은 원래 국세필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혼자 말을 타고 가서 거짓으로 의탁하는 것처럼 하니 국세필의 어미가 경계하여 말하기를 "최생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니 쉽게 여겨서는 안 된다."라 하였으나 국세필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최배천이 틈을 타서 달래기를 "북쪽 오랑캐가 만약 크게 쳐들어오면 진실로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 평사는 위엄과 덕망이 있으니 능히 맞아들여 함께 오랑캐를 지키면 그리 염려할 것이 없다."라고 하니, 국세필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여겼다. 최배천이 돌아와 정문부에게 고하니 정문부가 곧 격문을 보내어 타일렀다. 국세필이 의심을 하여 군사에게 엄명하고 기다리니 정문부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 아래 이르러 국세필을 보고 친히 달래고 타이르니 국세필이 비로소 맞아들이고 병사의 부신(訃信)을 바쳤다. 그러자 정문부가 영을 내리기를 "높거나 낮은 백성과 병사들에게 예전에 법을 범한 것은 묻지 말라."라 하고 세필로 하여금 전같이 군사를 맡도록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국세필을 죽이고자 하니 정문부가 허락하지 않았으며 또 반병(叛兵) 가운데 일찍이 자기를 쏘아 상처를 입힌 자를 발탁하여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그러나 국세필은 여전히 방심하지 않았으며 그 심복으로 하여금 정문부의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어 동정을 살피도록 하였다. 정문부가 이에 그 무리를 시켜 사졸과 함께 성에 올라 전투를 연습하게 했는데, 밤에 이르러 파하였으며 매일 이렇게 하였다.왜인이 경기병(輕騎兵)으로 문득 와서 성을 두드리거늘 정문부가 국세필을 시켜 왜장을 꾀어 문에 들어오도록 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안원 권관(安原權官) 강문우(姜文祐)에 명령을 내려 나머지 병사들을 추격하게 하고 드디어 주군에 격문을 돌려 반병(叛兵)의 항복을 받았다. 육진(六鎭)에서는 정문부가 이미 배반한 자들을 석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차례로 투항하였다. 이에 장수와 군사, 호걸들이 서로 다투며 모집에 응하였다. 이에 주변의 성보(城堡)를 다 회복하니 북도의 인심이 점차 안정되었다.정문부가 회령(會寧)에 격문을 보내 국경인에게 자신에게 와 항복하도록 타일렀으나, 국경인은 따르지 않고 길주에 주둔한 적과 더불어 경성을 협공하려고 꾀하였다. 한편 회령 사람 오 윤적(吳允迪) 등이 향교에 모여 국경인을 쳐서 정문부에게 호응할 것을 꾀하였다. 국경인이 염탐하여 알고는 급히 향교를 포위하고 주모자를 나오라고 위협하므로, 오윤적이 몸을 빼어 자수하니 국경인이 그를 체포하였다. 그런데 부(府)의 아전 신세준(申世俊)이 몰래 국경인의 요각(鐃角)을 훔쳐 객사 문 밖에서 부니 반병(叛兵)들은 국경인이 영을 내렸나하고서 일시에 모여드니 숲을 이룬 듯했다.신세준 등이 그들을 통솔하여 그의 영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인 다음 여러 사람들을 고무시켜 나아가 국경인에게 말하기를 "성 안의 병사가 이미 다 나한테 귀속되었다. 네가 오윤적을 내놓으면 마땅히 군사를 파하겠다."라 하니, 국경인이 겁을 먹고 이를 따랐는데, 드디어 국경인의 참수하여 그 머리를 경성에 전해주었다. 오윤적이 군사를 거느리고 정문부에게 간 뒤에 명천 사람들이 자제를 단결시켜 말수를 치고서 정문부에게 응하기로 했는데 말수에게 패하였다. 정문부가 몰래 오촌 권관(吾村權官) 구황(具滉)과 안원 권관 강문우를 보냈다. 이들이 60여 기병을 거느리고 주야로 행군하다가 갑자기 명천(明川)에 쳐들어가니 말수가 겁을 내어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지만 관군이 추격하여 사로잡아 죽였다. 이에 영북(嶺北)의 성과 읍은 다 회복하였으나 오직 길주만 왜적이 차지하고 있었다.정문부가 이에 군민(軍民)을 편안하게 모여 살게 하니, 모집된 병사가 3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여러 병사들이 다 적을 쳐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려고 하였다. 정문부가 이에 대장기를 세우고 남문루(南門樓)에 올라 여러 장수의 인사를 받으면서 말하기를 "이제 장차 왜적을 치려고 하는데 나라의 반적이 아직 군중(軍中)에 있으니 먼저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라 하였다. 드디어 앉은 자리에서 국세필을 체포하고 아울러 그 무리 13명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에게 조리돌리면서 말하기를 "당초에 앞장서서 반란한 놈들은 이 무리들이므로 나머지는 문책을 하지 않는다."라고 하니, 이것이 정문부가 본래 계획한 것이었다. 군대의 함성이 크게 진동하고 사기가 십 배나 되었는데, 곧 장계를 갖추어 최배천(崔配天)을 행재소로 보내어 아뢰니 주상이 이를 가상히 여기고 정문부에게 옷과 신, 환약을 내리었다.부사(府使) 정현룡(鄭見龍)이 경성에 머물러 틈을 기다리고자 하므로 정문부가 말하기를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국가를 위함이다. 이제 다만 스스로 지키기만 하고 병사를 진격하여 왜적을 격파하지 않으니 반도들을 본받으려 함인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봅시다."라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을 남문 밖에 모이게 하여 이 두 사람의 다툰 바를 말하고 누가 옳고 누가 옳지 않은가 결정하라 하니, 여러 사람이 다 정문부가 옳다고 하였다.이 당시 왜장 직정(直正), 도문(道文), 도관(都關), 여문(汝文) 등이 길주를 점거하여 주둔하고 또 영동(嶺東)에다가 군사를 배치하고 책(柵)을 설치하여 남북도의 길을 통하게 하고서 왕래하며 불 지르고 노략질하였다. 정문부가 소속된 군사를 거느리고 명천에 나아가 주둔하면서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 방원 만호(防垣萬戶) 한인제(韓仁濟), 종사관(從事官) 원충서(元忠恕)를 몰래 보내어 길주 성 밖 세 곳에 병사를 매복시키고 엿보게 하였다.병진일 먼동이 틀 무렵 왜적이 병사 6백 명을 거느리고 나가 가파리(加坡里)를 불 지르고 노략질하고서 노략질 한 것들을 핍박하며 돌아오는데, 원충서가 2백 명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먼저 달려가 그들을 맞이하여 왜적의 선도(先導)를 격파하니 왜적이 놀라 달아났다. 이 때에 적의 대진(大陣)이 성 안에서 계속 지원하니 원충서는 산이 험한 곳으로 물러갔다. 한인제가 구 황, 강문우 등 3백여 기병으로 달려와서 원충서와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크게 전투를 벌였는데, 직정(直正), 도관(都關), 여문(汝文)이 선봉의 정예 군사 4백 명으로 앞장서 올라가니 관군이 돌기병(突騎兵)으로 출몰하면서 격파하였다. 전투가 날이 저물 때쯤 되자 왜적의 앞뒤 진들이 다 궤멸되었다. 유경천이 군사를 보내어 그 귀로를 차단하고 관군이 양쪽에서 협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직정, 도관, 여문 등 다섯 장수의 목을 베었고 8백 여 수급(首級)과 군 장비 기계 1천여 점을 노획하였고, 노략당한 것을 다 빼앗아 돌아왔다. 구황과 강문우는 북방의 장수 가운데 가장 날래고 용맹한 자들이다.정문부가 싸움에서 이긴 여세를 타고 길주를 진격하는데 여러 날이 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영동(嶺東)의 적이 대규모로 몰려오니 정문부는 쌍개포(雙介浦)에서 맞아 싸워 그들을 격파하였으며, 군사를 이동하여 영동책(嶺東柵)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드디어 길주성 아래에 줄지어 진을 치고서 왜놈의 약탈을 막고 군량을 운반하는 길을 끊어 지구전을 꾀하였다.이보다 앞서 재신(宰臣) 윤탁연(尹卓然)이 왕자를 모시고 북으로 들어오다가 간사하게 남을 속이는 꾀로써 중도에 뒤쳐져 머물렀다가 방향을 틀어 갑산(甲山)으로 들어와 별해보(別害堡)에 이르렀는데, 행조(行朝)에서 윤탁연을 본도 감사로 삼았다. 이에 이르러 윤탁연은 정문부가 왜적을 물리친 공에 대해 듣고 시기하여 사실과 반대로 행조에 알렸으며, 또한 정문부의 병권을 빼앗고서 경성 부사 정현룡을 대신 북병장(北兵將)을 삼으니 군중(軍中)이 울분을 토하며 흩어져 떠나가 버렸다. 정문부가 드디어 병권을 놓고 북으로 육진을 순행하면서 군민(軍民)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모여 살게 하였다. 북쪽 오랑캐들이 여러 번 변방에 들어와 약탈하므로 정문부가 매복했다가 그들을 격파하매 북쪽 오랑캐가 모두 귀순하였으니, 또 납지(蠟紙)로 그런 내용을 치계(馳啓)하였다.유생 이회록(李希祿)과 김응복(金應福)이 윤탁연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청하므로 윤탁연이 행조에 치계하고서 무과를 열어 백여 명을 취하였다. 무과 출신 유응수(柳應秀), 이유일(李惟一), 박중립(朴中立), 정해택(鄭海澤), 생원 한경상(韓敬商) 등이 군사 3천여 명을 모집하여 여러 번 싸워 다 승리하였다. 윤탁연이 말하기를 "이들이 능히 적을 토벌하였으니 적을 근심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갑산 부사 성윤문(成允文)으로 대장을 삼고 묘파(廟坡) 권관 백응상(白應祥)을 함흥 판관으로 삼아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독산(獨山) 아래로 나아갔는데, 왜적이 밤에 관군을 습격하니 성윤문이 어쩔 줄을 모르다가 몸을 빼내어 달아나니 일군(一軍)이 다 함락되었다.이유일, 유응수, 박중립, 정해택 등이 별도로 진을 치고 적을 치는데 간혹 돌격하여 왜놈의 머리를 베어왔다. 한인제(韓仁濟), 유응수, 이유일은 다 함흥 사람이다. 전공으로써 이름이 알려졌으니, 이들을 지목하여 함흥 삼걸이라 하였다. 한인제는 공으로써 북우후(北虞侯)가 되었다. 백응상은 연안(延安) 사람으로, 용맹함을 지녀 잘 싸웠는데 마침내 진에서 죽었다. 당시 북변을 수토하는 신하들은 물러서서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은 남북의 사이에 끼어 사방을 돌아봐도 구원이 없으므로 군사를 모집하여 적을 쳤으니, 당시의 의론이 그를 가상하게 여겼다.윤탁연이 정문부의 군사를 빼앗고 자주 대장을 바꾸어 전투의 기회 그르친 것이 많았으니, 그는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다시 정 문부를 기용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정문부가 대장으로 직임에 나아가 사졸을 실컷 먹이고서 구황으로 하여금 2백 명의 기병을 선발하게 하여 단천 군수 강찬을 돕게 하니 그가 왜적 2백 명을 성 아래에서 죽이고 돌아왔으며, 원충서가 또 적장을 길주성 아래에서 죽였다.청정(淸正)이 행장의 패전한 통보를 듣고 경기(京畿)에 들어와서 장차 철군하여 돌아오려고 하였는데, 바야흐로 길주는 정문부에게 제압되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드디어 2만의 군졸로 마천령(摩天嶺)을 넘어 영동(嶺東)의 왜적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와서 구원하는데, 정문부가 이를 염탐하여 알아내고 군사 3천여 명을 먼저 임명(臨溟)에 웅거하여 매복시켜 기다렸다. 계미일 날이 밝아올 때 왜적의 군대는 정문부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서 돌아보지 않고 지나가므로 정문부가 군사를 움직여 그 뒤를 차단하고 좌우로 포위하여 날쌘 기병을 풀어서 내달리며 활을 쏘니 살상(殺傷)당한 자가 매우 많았고 피가 흘러 들이 벌겋게 물들었다. 이붕수와 이희당(李希唐)은 탄환에 맞아 죽었다.청정이 혈전을 벌이면서 퇴로를 열려고 관군과 더불어 60여 리에 걸쳐 접전을 벌였다. 이때 길이 막혀 황해도와 평안도의 소식이 두절되었는데, 정문부 등이 적의 형세가 다시 거세진 것을 보고 그들의 세력이 다시 쳐들어올까봐 걱정하여 명천(明川)으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다. 이 날 밤 청정이 시체를 쌓아 불 지르고, 몰래 군사를 거두어 밤을 틈타 성을 넘어 밥 지을 겨를도 없이 달아나는데, 남쪽 우리 병사가 공격하여 퇴로를 끊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함관령(咸關嶺)을 넘지 못하고 바다를 따라 달아났는데, 이유일이 병사를 거느려 그들을 추격하였다. 청정은 길성(吉盛)·중륭(重隆) 등과 함께 강원도의 모든 주둔군을 다 철수시켜 함께 한양에 모였다.정 문부가 장계를 올려 장수와 병졸에게 상 줄 것을 청하였는데, 윤탁연이 중간에서 저지하였다. 그러나 이유일은 군공(軍功)으로써 볼하 첨사(乶下僉使)가 되었고 유응수는 삼수 군수(三水郡守)에 임명되었으며 정문부는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어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임명되었다. 북로(北路)의 장사(壯士)들은 모두 의병을 풀고 떠났으며, 난이 평정됨에 정문부의 일을 말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정문부는 한직에서 한가하게 지냈다.인조 때에 이르러 북방의 경계46)가 발생하니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 명하였는데 정문부를 원수로 천거하였다. 정문부가 이를 듣고 탄식하기를 "나는 죽을 것이다."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정문부가 지은 시를 습득하여 죄안(罪案)을 만들어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가하다가 그를 죽였다. 이에 북방 사람들이 그것을 원통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뒤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북평사가 되어 북방 사람들의 칭송을 채집하여 조정에 알리게 되니, 공론이 비로소 돌아 그의 원통함을 씻고 그의 공을 포상하였으며, 북방 사람들이 경성(鏡城)에 나아가 사원을 세우고 제사지냈는데, 사액하기를 '창렬사(彰烈祠)'라 하였다. 鄭文孚, 字子虛, 海州人也。少好讀書, 善屬文。中宣廟戊子文科, 隸槐院, 出爲北道兵馬評事。壬辰之亂, 行長與淸正, 渡臨津, 慮車駕或入北關, 約分路, 行長向西, 淸正向北, 勇冠諸倭, 所領兵尤精悍。從谷山踰老里峴, 出鐵嶺, 北守兵潰。淸正日行數百里, 勢如風雨, 所過赤地, 鷄犬不遺。監司柳永立避入山峽, 叛民引賊兵襲執之。北靑府人金應田, 詐稱監司奴, 入賊中, 乘夜竊負, 逃歸行在。判官柳希津, 爲叛民所執降, 兵使李渾, 奔入甲山, 爲叛民所殺, 甲山人, 又斬府使而降賊。王子順和君入鐵原, 聞賊入江原道, 遂踰鐵嶺, 入咸鏡南道。隨臨海君。至是兩王子, 又自南道避兵入北道。淸正入咸鏡北道, 兵使韓克諴, 戰敗被擒, 南兵使李瑛, 亦敗於磨天嶺, 州郡皆陷。先是兩王子, 縱豪奴擾民間, 大失民心, 會寧鄕吏鞠景仁·鏡城官奴鞠世弼·明川寺奴鄭末秀等, 各據城, 迎降兩王子及陪臣金貴榮·黃廷彧等數十人被執。淸正長驅, 至豆滿江, 盡取六鎭城堡, 以鞠景仁爲倭官判刑, 鞠世弼爲禮伯兼本道兵使, 末秀爲大將, 分統北關。是時, 文孚以評事, 在鏡城, 遭亂脫身, 匿於山中, 鏡城儒生李鵬壽·崔配天, 見文孚請起兵討賊, 文孚欣然從之。遂推文孚爲將, 團集土兵, 壯士數百人, 所在守令邊將, 皆附之。北虜乘機, 屢掠邊境, 世弼憂懼, 配天素與世弼善, 單騎佯投之, 弼母戒曰: "崔生非凡人, 不可狎也。" 世弼不從。配天遂乘間說曰: "北虜若大至, 誠難與敵。鄭評事有威望, 苟能延入共守, 虜不足慮也。" 世弼心然之。配天歸告文浮, 卽馳檄諭之, 世弼持疑, 嚴兵以待。文浮率兵至城下, 見世弼親自說諭, 世弼始迎入, 納兵使符信。文浮下令曰: "大小民兵, 勿問舊犯。" 令世弼領兵如故。諸將欲斬世弼, 文浮不許, 又擢用叛兵嘗射己者爲裨將。世弼猶未放心, 使其腹心, 夾侍文浮左右, 伺察動靜。文浮乃使其屬幷士卒, 登城習戰, 至夜乃罷, 逐日如之。倭人以輕兵奄至叩城, 文浮命世弼誘倭將入門擒之, 令安原權官姜文祐, 擊走餘兵, 遂移檄州郡, 招降叛兵, 六鎭聞文浮已釋反側, 次第送款。將士豪傑, 爭先應募, 於是悉復緣邊城堡, 北道人心稍定。文浮移檄會寧, 諭敬仁來降, 敬仁不從, 與吉州屯賊謀夾攻鏡城。會寧人吳允迪等, 聚鄕校謀伐敬仁, 以應文浮, 敬仁諜知, 急圍鄕校, 脅出首唱, 允迪挺身自首, 敬仁囚之。府吏申世俊潛偸敬仁鐃角, 吹於客舍門外, 叛兵疑敬仁出令, 齊會如林。世俊等仍領之斬其不從令者, 鼓衆而前, 謂敬仁曰: "城中兵已盡歸我, 爾出吳允迪, 當罷兵。" 敬仁駭慄從之。遂斬敬仁, 傳首鏡城, 允迪領兵繼赴 後明川人團結子弟攻末守欲應文浮, 爲末守所敗, 文浮潛遣吾村權官具滉·安原權官姜文祐, 率六十餘騎, 晝夜幷行, 猝入明川末守惶怯, 棄城走, 官軍追擒斬之。於是嶺北城邑盡復, 惟吉州, 爲倭所據。文孚乃安集軍民, 募兵至三千餘人, 衆咸欲擊賊自效。文孚乃建大將旗, 上南門樓, 受諸將齊進曰: "今將討賊, 而國之叛賊, 尙在軍中, 不可不先討之。" 遂於坐席, 執世弼, 幷其黨十三人, 斬以徇衆曰: "當初首唱, 止此輩, 餘無問。" 此文孚本謀也。軍聲大振, 士氣十倍, 卽具啓遣崔配天, 聞行在, 上嘉之, 賜文孚衣履丸藥。府使鄭見龍欲住鏡城, 以俟釁, 文孚曰: "本興義兵, 爲國耳。今但自守, 不進兵擊賊, 欲效叛徒爲耶, 請聽于輿人。" 詰朝集衆南門外, 諭以兩人所爭, 孰可孰不可, 衆皆是文孚。是時倭將直正·道文·都關·汝文等, 屯據吉州, 又置兵設柵於嶺東, 以通南北路, 往來焚劫。文孚率所部, 進屯明川, 潛遣高嶺僉使柳擎天·防垣萬戶韓仁濟·從事官元忠恕, 設三覆於吉州城外, 以覘之。丙辰昧爽, 賊出兵六百, 焚掠加坡, 驅所掠而還, 忠恕率二百騎, 先馳邀之, 擊賊先導, 賊驚北。會, 賊大陣, 自城中繼援,忠恕退保山險。仁濟以具滉文佑等三百餘騎, 馳至與忠恕連兵大戰, 直正·都關·汝文, 以前鋒銳卒四百先登, 官軍以突騎出沒擊之。戰至日昏, 賊前後陣皆潰, 擎天遣兵截其歸路, 官軍兩面夾擊大破之, 斬直正都關汝文等五將, 獲首八百, 軍裝器械, 千餘計, 盡奪所掠而歸。具滉·姜文佑, 北將中最驍勇者也。文孚乘勝, 進攻吉州, 數日不克, 嶺東賊大至, 文孚邀于雙介浦敗之, 移兵攻嶺東柵, 又不克, 遂列屯吉州城下, 絶其剽掠, 阻其粮道, 以爲支久之計。先是, 宰臣尹卓然, 陪王子入北, 以詭計落留中道, 轉入甲山, 至別害堡, 行朝以卓然爲本道監司。至是, 卓然聞文孚成功嫉之, 反其功以聞, 又奪文孚兵懽, 以鏡城府使鄭見龍, 代爲北兵將, 軍中憤惋, 多散去。文孚遂釋兵, 北巡六鎭, 拊集軍民。蕃胡累寇邊, 文孚設伏破之, 胡蕃皆歸順, 又以蠟紙馳啓。儒生李希祿·金應福請卓然起義兵, 馳啓行朝, 設武科, 取百餘人, 武出身柳應秀·李惟一·朴中立·鄭海澤·生員韓敬商, 募兵得三千餘人, 屢戰皆捷, 卓然曰: "此輩尙能討賊, 賊不足憂也。" 以甲山府使成允文爲大將, 廟坡權管白應祥爲咸興判官, 統諸軍進于獨山下, 賊夜襲官軍, 允文不知所爲, 脫身逃走, 一軍盡陷。惟一·應秀·中立·海澤等, 別屯勦賊, 或突擊斬馘。韓仁濟·柳應秀·李惟一, 皆咸興人也。以戰功知名, 目爲咸興三傑, 仁濟以功爲北虞侯, 應祥, 延安人也, 勇果善戰, 竟殉於陣。當時北邊守土之臣, 莫不以退避爲得計, 而端川郡守姜燦, 介於南北之間, 四顧無援, 而能募兵討賊, 時論嘉之。尹卓然奪文孚兵, 數易將帥, 多誤戰機, 懼其得罪, 復起文孚爲將。將就職犒饗士卒, 使具滉簡二百騎, 往助端川郡守姜燦, 殺賊二百於城下而還, 元忠恕又擊殺賊將於吉州城下。淸正聞行長敗報, 入京畿將謀撤還, 吉州方爲文孚所扼, 不能自拔, 遂以二萬人踰磨天嶺, 與嶺東賊合兵來援, 文孚諜知之, 悉兵三千餘人, 先據臨溟, 設伏以待。癸未黎明, 賊兵見文孚兵少, 不顧而過, 文孚發兵, 截其尾, 繞左右, 縱輕騎馳射, 殺傷甚衆, 流血被野。李鵬壽·李希唐, 中丸而死。淸正血戰開路, 與官軍戰鬪六十餘里。時, 道梗, 兩西消息隔絶, 文孚等見賊勢更盛, 疑其再逞, 退屯明川。是夜, 淸正積尸燒之, 潛撤兵, 乘夜跳城, 不暇炊爨而走, 恐南兵勦絶, 不敢踰咸關嶺, 循海走。李惟一勒兵追之, 淸正又與吉盛重隆等, 盡撤江原道諸屯, 俱聚于京城。文孚又馳啓, 請賞將士, 而卓然從中沮抑, 李惟一, 以軍功爲乶下僉使, 應秀得拜三水郡守, 文孚陞通政拜吉州牧使。北路壯士, 無不解體, 亂平, 無人言文孚事者。優遊散地, 至仁祖朝有北警, 命擧將才, 有以文孚應元帥薦, 文孚聞之歎曰: "吾其死矣。" 未幾, 有摭文孚詩句, 成案逮獄栲死, 北人無不冤之。後澤堂李植爲北評事, 採北人之頌, 聞于朝, 公議始行, 雪其冤而褒其功, 北人就鏡城, 建祠祭文, 賜額曰彰烈祠。 북방의 경계 이괄(李适)의 난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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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쌍포도 발문 이득화 雙浦圖跋 【李得華】 옛날 임진(壬辰), 계사(癸巳)의 액운을 어찌 차마 말하리요. 이 한 폭의 그림은 바로 농포(農圃) 정공과 그리고 우리 선조 창주공(滄洲公)이 의병을 규합하여 옛 길주성에서 섬 오랑캐를 무찌른 유물이다. 내가 죄를 지엇 남쪽에 귀양 갔다가 이것을 농포공 후손 정게(鄭垍)씨의 집에서 얻었으니, 아! 참담한 그림의 모습을 보면 완연히 오랑캐가 눈앞에 있는 것같이 보인다.아득한 옛 성은 음산한 구름이 아직도 가리었고 끊임없는 바닷물에는 뿌려진 핏방울에 여전히 비린내가 나는 듯하다. 그때에 왜놈들이 혹은 울며 혹은 아우성치고 달아나기도 하다가 엎어지기도 하며 죽은 시체가 서로 베고 쌓여서 한 대의 수레도 돌아가지 못하였으니, 그날의 열렬했던 충성과 당당했던 기상은 늠름히 바람과 천둥을 타고 해와 달을 육박하는 듯하여 지금도 한 폭의 종이 위에 빛나고 빛난다.불초한 후생이 두 분 어른을 뵈는 듯한 마음47)에 손을 씻고 눈물을 닦는데, 더구나 이 해가 마침 다시 돌아오니 절로 슬퍼진다. 아! 관북의 높고 위대한 공열은 이미 역사가의 표창하는 기록에 갖추어져 벼슬과 시호를 내리고 제향을 지내 융숭하게 보답하니, 어찌 감히 내 의견을 붙여 스스로 참람한 죄를 범하겠는가. 다만 두 집안 후손들이 백 대를 두고 서로 우의를 다졌던 것은 여태껏 저 만시 한 편에서 거울로 삼을 수 있으리라. 往昔龍蛇之厄, 尙忍言哉。今玆一幅之繪, 卽農圃鄭公曁吾先祖滄洲公, 糾集義旅, 勦破島夷於古吉州遺蹟也。不侫以罪南遷, 得此於農圃公後垍氏家藏, 噫, 慘憺意匠, 宛然如虜在目中矣。莽蒼古壘, 陰雲尙曀, 不盡滄溟, 臊血猶腥。于斯時也, 倭奴之或啼或號, 且奔且蹶, 僵屍相枕, 隻輪不返, 則伊當日, 烈烈之忠, 堂堂之氣, 凜然若駕風霆薄日月, 至今炳炳於尺紙上矣。不肖後生, 盥手抆涕於羹墻之感, 而重自悲斯歲之適回也。烏呼, 關北之豐功偉烈, 旣備於太史氏表揚之筆, 贈以爵諡, 享以崇報, 則更何敢竊附已意, 自速僭越之誅哉。惟兩家後承之百世相好者, 尙可鑑於輓詩一篇矣夫。 뵈는 듯한 마음 '갱장(羹墻)'은 죽은 사람에 대한 간절한 추모의 정을 말한다.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이 3년 동안 사모하는 정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밥을 먹을 때에는 요 임금의 얼굴이 국그릇 속[羹中]에 비치는 듯하고, 앉아 있을 때에는 담장[墻]에 요 임금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했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63 李固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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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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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사33)에 도착해서 태수에 부치다 到法泉寺寄太守 바다의 객 자연스레 놀다가34) 사찰에 오니 海客天遊到梵宮만 겹의 붉은 비단이 앞산을 에워쌌네 萬重紅錦擁前峰풍류스러운 태수는 아름다운 계절 만나 風流太守佳期在계수나무 우거진 속에서 생각이 무궁하리 桂樹叢中思不窮 海客天遊到梵宮, 萬重紅錦擁前峰.風流太守佳期在, 桂樹叢中思不窮. 법천사 전남 무안군 몽탄면 승달산에 있는 사찰이다. 725년 서아시아 금지국(金地國)에서 온 정명(淨明)이 창건하였다. 1030년에 불에 탄 뒤 약 100년 동안 폐사로 남아 있던 것을 1031년에 원나라 임천사(臨川寺)에서 온원명(圓明)이 중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자 불상 등을 산내 암자인 목우암(牧牛庵)으로옮겼다. 1662년 영욱(靈旭)이 중창하였으나, 1896년 다시 폐허가되었으며 1913년 나주에서 온 정병우(丁丙愚)가 암자를 짓고, 1964년 활연(活然)이 법당을 짓는 등 불사를 진행하여 오늘에 이른다. 자연스레 놀다가 원문의 '천유(天遊)'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연스러운 상태로 노니는 것을 뜻하는 말로, 《장자》 〈외물(外物)〉에 "사람의 몸 안에는 텅 빈 공간이 있어 마음이 그 속에서 천리(天理)에 따라 자연스럽게 노닌다.[胞有重閬, 心有天遊.]"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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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시연120) 자리에서 느낌을 읊다 5대손 진사 한웅 延諡宴席感吟【五代孫 進士漢雄】 임진왜란 때 무공 떨쳤던 대장부 몇인가우리 선조 적은 군사로 북변 평정하였네기린각 공신 화상에 홀로 공훈 빠지니사헌부의 문자 화액 유독 치우쳤네두 구절 시호로 추증하여 공론 펼쳐주었고한 가지 선행121) 특별한 은장으로 성은 입었네백관이 감동하여 아름다운 일 듣던 날이니한 집안의 사사로운 영광일 뿐만이 아니네 龍蛇宣武幾男兒吾祖單師靖北陲麟閣丹靑勳獨漏烏臺文字禍偏奇貳句褒贈伸公議壹惠殊章荷聖慈百辟動容聞美日榮光非直一家私 연시연(延諡宴) 조상에게 내린 시호를 받고 경축하기 위하여 여는 잔치를 말한다. 정묘년(1747, 영조23) 3월에 서울 소격동(昭格洞)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시호를 하사한 교지를 맞이하였다. 《農圃集 年譜》 한 가지 선행 이는 시호를 내려 그 이름을 높이되 여러 가지 선행을 다 들기 어렵기에 가장 큰 것을 들어 요약한 것을 말한다. 《예기》 〈표기(表記)〉에 "선왕이 시호로써 이름을 높이고, 한 가지 선행으로써 요약했다.[先王諡以尊名, 節以壹惠.]"라고 한 데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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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사 시축에 읊다 題靈藏師詩軸 사람들은 영장이라고 나는 대사라고 하는데 人曰靈藏我曰師십년 전부터 해마다32) 글을 지어 주고받았네 十年前歲以書隨속세와 떨어진 산사의 창가에 달이 비추니 風埃一隔山寮月흰 얼굴과 푸른 눈썹을 꿈에서 보네 雪面靑眉夢見之 人曰靈藏我曰師, 十年前歲以書隨.風埃一隔山寮月, 雪面靑眉夢見之. 해마다 원문에는 '세(歲)' 아래에 "아마도 일(日) 자의 오류인 듯하다.〔恐日字之誤〕"라는 소주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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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환체(連環體)217) 連環體 하늘의 은하수 흰 명주처럼 맑고 평평하니두 난간머리에 밤기운이 맑네작은 봉우리에 숨어 빛이 쏘아 나오고넓은 들판과 이어져 그림자 어지럽네지나가는 선인(仙人) 흔적 없이 찾아오고봉황 소리 잘 내는 왕군(王君) 떠나갔어도 소리가 들리네218)눈은 형외(形外)의 부림을 당할 필요 없으니자족한 마음 드러내며 나의 삶 보내리라 天河漢練澄平二闌頭夜氣淸隱小峯光射出連大野影縱橫經仙人來無跡鳳王君去有聲目不須形外役章自足過吾生 연환체(連環體) 시의 마지막 구절을 다음 시의 첫 구절로 하여 짓는 시를 말한다. 회문시(廻文詩)라고도 한다. 앞 시구(詩句)의 끝글자를 다음 구의 첫자로 습용해서 내려 읽어도 말이 되고 거꾸로 읽어도 말이 되므로, 시종(始終)이 불분명하여 마치 동그라미가 연쇄식으로 이어져 있는 듯한 시체(詩體)를 말한다. 고리처럼 연하였으므로 연환체라 하기도 하고 다음 구의 첫 자가 위의 구 끝 자에 감추어져 있으므로 장두체(藏頭體)라고 하기도 한다. 봉황……들리네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인 왕자교(王子喬)는 피리를 매우 잘 불어 피리로 봉황새의 울음소리를 낼 수 있었다. 뒤에 신선이 되어 떠난 지 30여 년 만에 하남성(河南省) 구지산(緱氏山) 정상에 백학(白鶴)을 타고 내려왔다가 며칠 머무른 뒤 사람들과 작별하고 다시 떠나갔다고 한다. 《列仙傳 王子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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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상계축도 塞上契軸圖 장사들이 죽음에서 살아나 壯士生於死누선36)에서 날카로운 무기 안고 있네 樓舡擁兌戈앞다투어 진나라 조적37)이 되어 爭爲晉祖逖함께 위나라 산하38)에 웅거하네 共據魏山河칼을 차니 고래39)가 울고 倚劍鯨鯢泣잔을 돌리니 초목도 평화롭네 飛觴草木和용면40)처럼 훌륭한 일을 전하니 龍眠傳勝事호방한 기상이 푸른 물결에 가득하네 豪氣滿滄波 壯士生於死, 樓舡擁兌戈.爭爲晉祖逖, 共據魏山河.倚劍鯨鯢泣, 飛觴草木和.龍眠傳勝事, 豪氣滿滄波. 누선 누각이 있어 사람이 들어가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배로, 흔히 전선(戰船)을 말한다. 조적 266~321. 자는 사치(士稚)이다.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 혼란한 사회를 피해 남쪽으로 피난 갔다. 예주 자사(豫州刺史)가 되어 북벌을 주장하였으며 몇 년 만에 황하 이남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당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서 중원을 회복하겠다고 맹세한 일화가 전해진다. 위나라의 산하 위나라는 산천이 험하고 견고하여 적의 침략을 받기 어려웠다. 전국 시대 때 위나라 무후가 배를 타고 서하(西河)로 내려가다가 말하기를 "장하다, 산천(山川)이 험하고 견고하구나. 적국이 침범하기 어려우니 이것은 위국(魏國)의 보배로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65 吳起列傳》 고래 원문의 '경예(鯨鯢)'는 각각 거대한 고래의 수컷과 암컷을 가리키는데,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기 때문에 악인(惡人)의 괴수를 비유한다. 《춘추좌씨전》 선공 12년조에 "옛날에 명왕(明王)이 불경한 자들을 정벌하여 그 경예를 잡아다가 죽여서 무덤처럼 쌓아 두어 크게 치욕을 주었다." 하였다. 용면 송(宋)나라 때의 유명한 화가 이공린(李公麟)의 호이다. 이공린이 벼슬을 그만두고 용면산(龍眠山)에 들어가 지내며 자호를 용면거사(龍眠居士)라 하였다. 여기서는 훌륭한 화가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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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의정 두암 김응남41)을 애도하다 挽左相金斗巖應南 종묘사직이 존망하는 날이 宗社存亡日신민에게는 생사의 때네 臣民生死時나라의 동량이 갑자기 꺾였으니42) 棟樑忽自折조정을 마침내 누가 지탱할까 大廈竟誰支해역은 비가 막 개었으나 海域雨初霽강성에는 바람이 다시 불네 江城風更吹산인들이 끝없이 통곡하는 것은 山人無限哭비단 사사로운 정 때문만은 아닐세 不獨爲吾私 宗社存亡日, 臣民生死時.棟樑忽自折, 大廈竟誰支.海域雨初霽, 江城風更吹.山人無限哭, 不獨爲吾私. 두암 김응남 1546~1598.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중숙(重叔), 호는 두암,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1568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583년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좌천되었지만, 선정을 베풀어 기민(飢民)을 구휼하고 2년 뒤 우승지(右承旨)를 제수받았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했으며, 1594년 우의정, 1595년에 좌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안무사(按撫使)로 영남에 내려갔다가 풍기(豐基)에서 병을 얻어 서울에 돌아온 뒤 관직을 사퇴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나라의 …… 꺾였으니 좌의정 김응남이 죽은 것을 표현 것이다. 위개가 죽고 나서 사곤(謝鯤)이 그를 위해 통곡했는데, 어떤 사람이 통곡하는 이유를 묻자 사곤이 "기둥과 대들보가 꺾였으니, 나도 모르게 애통할 뿐이네.〔棟梁折矣, 不覺哀耳.〕"라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晉書 卷36 衛玠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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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7 卷之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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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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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잡저】 傳【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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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항전【병서】 公孫航傳【並序】 공손항(公孫航)24)은 강동인(江東人)이다. 혹자는 육인(六人)이라고도 한다. 자는 해경(海卿)으로 황제(黃帝)의 아들이다. 황제는 형호(荊湖)25)에서 솥을 주조하였다. 공고(共鼓)와 화적(化狄)26)이 따르고 있었는데, 호수 가운데 뜬 잎을 보고 황제가 감응하여 항(航)을 낳아서 두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되게 하였다. 황제가 용을 어거하여 멍에하고 하늘로 올라가자27) 항은 호해(湖海) 사이에 살면서 공손(公孫)이라는 성(姓)을 썼다.우(禹) 임금 때 이르러 우 임금을 도와 물길을 유도하는 데 공적이 있었고, 용문(龍門)을 뚫은 일28)과 물길을 강한(江漢)으로 흘러가게 하는 데29) 항의 공적이 많았다. 우 임금은 현규(玄圭)를 올려 치수의 완성을 아뢰고30) 항을 임명하여 구주(九州) 통진백(通津伯)으로 삼았다. 일찍이 우 임금과 강을 건너는데 배가 황룡의 등에 얹히는 바람에 거의 건널 수 없게 되었다. 항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선제(先帝)께서 정호(鼎湖)에서 용을 어거하였는데 나 또한 용의 등에 얹혔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안색을 변치 않았는데 곧 용이 사라지고 말았다.항이라는 사람은 신장이 수 십 장(丈)이요 몸집의 크기가 백 여 아름인데 헌걸차고 씩씩하니 맨 발로 황하를 건널 힘과 바다를 항해할 위력이 있었다. 그 성품은 능히 세상과 함께 부침할 수 있으며 사람을 대하는데 선악 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귀의한 자들을 모두 수용하였다. 다만 산을 유람하며 육지로 다니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우 임금이 붕어하고 하(夏)나라의 덕이 쇠퇴하자 항 또한 늙었다. 이계(履啓)31)가 즉위하여서는 날마다 음란과 포학을 일삼으면서 항과 함께 주지(酒池)에서 밤새도록 즐겼다. 항의 아들인 도(刀)가 간언을 했으나 듣지 않으니, 도는 무광(務光)32)과 함께 강호로 들어가서 끝내 나오지 않았다. 탕(湯)이 걸(桀)을 주벌하게 되자 항은 초택(楚澤)33)으로 달아났다. 주(周)나라 소왕(昭王)이 남방을 순수(巡狩)하여 초나라에 이르렀는데 초택에서 같이 배를 탔다가 왕과 함께 익사했다.34)항은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함(艦), 막내는 방(方)이고, 도(刀)는 바로 가운데 아들이다. 은(殷)나라 말기에 도(刀)는 여상(呂尙)과 동해에서 낚시를 하고 살았는데 서백(西伯)이 사냥을 나가서 여상이 주(周)나라로 귀의하자35) 도는 정색하며 불쾌해하고 강 입구 맑은 물가를 오가다가 그 몸을 마쳤다. 그 자손은 천택(川澤)에 흩어져 살았는데 모두 청고(淸高)하게 스스로 면려하면서 벼슬자리에 나간 적이 없었으니 모두 도의 유풍(遺風)이었다. 그 뒤에 월(越)나라 범려(范蠡)·한(漢)나라 엄자릉(嚴子陵)·진(晉)나라 도원량(陶元亮)·당(唐)나라 장지화(張志和)·송(宋)나라 임군복(林君復) 같은 청절지사 들이 모두 도의 자손들과 함께 어울렸다. 항의 막내아들인 방(方)은 별다른 기예나 능력이 없어 대대로 나루터 관리가 되어 그 삯을 취하여 살아갔다.장남 함(艦)은 사람됨이 굉걸(宏傑)하고 관대하며 원대한 지략이 있었는데 아버지 항을 따라서 초나라에서 살았다. 진시황(秦始皇) 때 서불(徐市)과 서로 좋게 지면서 서불에게 말하기를 "시황이 탐욕스럽고 포학하여 백성들을 들볶으니 물이 더욱 깊어지는 것 같은데36) 그대는 어찌하여 신선술로 황제를 설득해서 도생(圖生)의 바탕으로 삼지 않는가." 하였다. 서불이 이에 서쪽으로 관문에 들어가 황제를 뵙고 청하기를 "동남동녀(童男童女) 3천 명과 함께 바다로 들어가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을 구하겠습니다." 하였다. 황제는 바야흐로 신선술을 찾고 있었기에 서불의 말을 믿고 따라주니 서불은 함과 함께 3천명을 싣고 바다 섬으로 들어가 살았다. 산동(山東)의 호걸들이 모두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무리 수 천 명과 함께 해안을 따라 황하에 도착해서, 장차 패공(沛公)과 병력을 합쳐 관중(關中)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이 때 장한(章邯)37)이 조(趙)나라를 공격하자 초(楚)나라가 구원하였다. 항적(項籍)은 경자관군(卿子冠軍)38)을 살해하고 군대를 거느려 황하에 도착하였다. 함이 항우(項羽)를 설득하며 말하기를 "장한을 공격할 것도 없다. 조고(趙高)39)가 궁중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데 장한과 틈이 벌어졌으니 이는 안과 밖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지금을 위한 계책으로는 나와 함께 황하로 떠가서 직접 함곡관에 이르러 패공와 합세하여 진(秦)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좋다. 뿌리를 제거하고 나면 장한은 공격할 것도 없다." 하였다.항우가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십만의 무리를 통솔하여 무도한 진(秦)나라를 공격하려는데 함이 얄팍한 꾀로 나를 흔들어 대고 병사들의 마음을 꺾는다." 하면서 함을 황하에 가라앉히고 그의 무리 수천 명도 모두 가라앉혔다.40) 함은 몰래 탈출하여 그의 무리와 함께 남쪽으로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로 흘러가서 장차 한왕(漢王)과 합종하려 하였다. 마침 항우가 강 가운데서 의제(義帝)를 시해하자, 한왕이 삼로(三老)의 계책41)을 써서 흰 상복을 입고 항우를 주벌하고 남쪽으로 장강과 한수로 배를 타고 내려왔다.함은 비장(裨將)인 소(艘)로 하여금 십만의 무리를 이끌고 왕을 따라 팽성(彭城)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함은 황하로부터 관중(關中)으로 들어가서 소하(蕭何)와 더불어 육로와 수로로42) 군량을 운송하니 시종 식량이 끊어지지 않았다. 한나라가 이로써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고조(高祖)는 함을 봉하여 하간왕 겸 전운사(河間王兼轉運使)로 삼았다. 무제(武帝)가 사방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모두 육군으로 승리를 취했는데 함은 육상전투를 익히지 않았으므로 공적이 없었다.예관(兒寬)과 복식(卜式)43)의 무리가 소금과 철로 이익을 삼기에 미치자 함은 군량 운송으로 공을 세워 크게 총애를 받았다. 마침내 그의 죽음에 미쳐서 그의 아들 축(軸)은 광무제(光武帝)가 호타하(滹沱河)를 건널 때 미처 따라가지 못했고 이 때문에 축출을 당했다.44) 촉한(蜀漢)의 적벽(赤壁) 전쟁에서는 와룡(臥龍)45)을 따라서 큰 공을 세웠다. 이 때부터 그 자손은 대대로 수군의 장수가 되었고 공을 세운 자도 이루 다 기술할 수가 없다.가장 애석한 것은 송(宋)나라 때 애산(崖山)의 전쟁46)이다. 축(軸)의 자손 만여 무리가 장세걸(張世傑)의 통솔을 받았는데 세걸의 전략이 뛰어나지 못하여 마침내 수만의 무리를 견양(犬羊) 같은 적에게 먹히게 하고 말았으니 하늘에 사무치는 통분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래서 그 자손으로 사방의 오랑캐 땅에 흩어져 사는 자가 천하에 가득했다. 다만 북호(北胡)의 땅에서는 살지 않았는데 북호는 또한 외축(畏縮)되어 감히 그 틈을 탈 수가 없었다. 상고시대 신명(神明)의 종족으로 아! 기특하도다.사관은 판단하여 말한다."인재를 쓸 때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 있는 자가 잘 쓰면 천하에 어질지 않은 자가 없고 잘 쓰지 못하면 천하에 악하지 않는 자가 없다. 공손항은 한 몸이로되 우임금을 도와 공을 세우고 물과 땅을 평정하였으니 걸출하여 볼 만하였으나, 끝내는 걸임금과 음탕에 빠졌고 결국 초택(楚澤)에서 아교가 풀리어47) 죽었으니 어찌 그리도 잘못되었던가!또한 출신을 가지고 인재를 써서는 안 된다. 항의 아들 도(刀)는 청고(淸高)함이 비할 바가 없었고, 함(艦)은 웅장한 지략이 매우 뛰어났으며, 방(方)은 나루터 아전으로 늙어 남에게 부림을 받았다. 한 뿌리에서 나왔으나 현우(賢愚)와 청탁(淸濁)이 이렇게 현저히 다르다. 이 때문에 선왕(先王)이 대대로 봉록은 주되 대대로 관직을 주지는 않았던 것이니 인재를 쓰는 자는 신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도(刀)의 후손으로 이름이 부(桴)48)인 자와 가장 친한데 장차 그와 함께 타고 바다에 뜰 뜻49)이 있다. 그래서 그의 세계(世系)를 특히 자세하게 기술하는 바이다." 公孫航江東人也。 或曰六人。 字海卿。 黃帝子也。 帝鑄鼎於荊湖。 共化狄從焉。 見浮葉在湖中。 帝感而生航。 使二人爲傅。 及帝御龍駕而賓天。 航乃居于湖海間。 ▩公孫姓。 至禹時。 佐禹導水有功。 龍門之役。 江漢之注。 航之功居多焉。 及禹玄圭告成。 拜航爲九州通津伯。 嘗與禹濟江。 爲黃龍所負。 幾不渡。 航笑曰: "先帝御龍於鼎湖。 予又爲龍所負。 豈非命歟?" 顔色不變。 俄而龍乃去。 航爲人身長數十丈。 大可百餘圍。 軒騰磊落。 有憑河之力駕海之威。 其性能與世浮沉。 接人不分善惡貴賤而皆受容歸。 但不喜遊山與陸行矣。 及禹崩夏德衰而航亦老矣。 履啓卽位。 日事淫虐。 與航爲長夜之樂於酒池中。 航之子刀諫不聽。 刀與務光走于江湖終不出。 至湯伐桀。 航走于楚澤。 周昭王南廵至楚。 同載于楚澤中。 與王同溺焉。 航有三子。 長曰艦。 季曰方。 刀乃其中子也。 殷末刀與呂尙釣于東海。 及西伯將獵。 呂尙歸周。 刀愀然不悅。 去來江口淸涯。 以終其身。 其子孫散居川澤者。 皆以淸高自厲。 未嘗至於宦海要津。 盖刀之遺風也。 其後越范蠡·漢嚴子陵·晉陶元亮·唐張志和·宋林君復淸節之士。 皆與刀之子孫同遊焉。 季子方無他技能。 世爲津吏。 以取其直爲生。 其長子艦。 爲人宏傑寬大有大略。 從父航居於楚。 秦始皇時。 與徐市相善。 謂市曰: "始皇貪戾暴虐。 生民煎熬。 如水益深。 子何不以神仙之術說上。 仍爲圖生之地?" 市乃西入關。 見上請與童男女三千人。 入海求三神山不死藥。 上方求仙術。 信市言從之。 市乃與艦載三千人入居海島。 聞山東豪傑並起。 與其徒數千。 沿海至河。 將與沛公合兵入關。 時章邯擊趙。 楚救之。 項籍殺卿子冠軍。 以兵至河。 艦說羽曰: "邯不足擊也。 趙高用事于中。 與邯有隙。 是內外不相應也。 爲今之計。 不若與艦浮于河。 直抵函谷關。 與沛公合勢攻秦。 根本旣鋤則邯不足擊也。" 羽怒曰: "我方率十萬之衆。 攻無道秦。 艦乃以淺謀撓我。 以沮士卒心。" 乃沉艦于河。 其徒數千皆沉焉。 艦潛出。 與其徒南流江漢。 將與漢王合從。 會羽弑義帝於江中。 漢王用三老策。 縞素伐羽。 南浮江漢而下。 艦使裨將艘將數十萬衆。 從王下彭城。 艦自河入關。 與蕭何轉漕運糧。 終始不絶。 漢以此得天下。 高祖封艦爲河間王兼轉運使。 至武帝征伐四夷。 皆以陸軍取勝。 艦不習陸戰。 故無功。 及兒寬卜式之徒。 以塩鐵爲利。 艦以轉漕立功。 大得寵焉。 及卒其子軸當光武渡滹沱河時。 不及從焉。 以此見黜。 及蜀漢赤壁之戰。 從臥龍大有功焉。 自此其子孫世爲水軍帥。 立功者不可勝記。 惟最可惜者。 宋崖山之戰。 軸之子孫萬餘衆。 統於張世傑。 世傑謀猷不長。 竟使數萬之衆。 爲犬羊之所呑。 通天之痛。 曷其極哉? 故其子孫散居四方外夷者。 彌漫天下。 而獨不居北胡之地。 北胡亦畏縮不敢乘其間。 上古神明之種。 吁亦奇矣。 史斷曰: "用人材。 不可不愼也。 在上者能用之則天下莫不賢。 不能用之則天下莫不惡。 航一軆也。 佐禹立功。 平定水土。 傑然可觀也。 卒與桀沉淫。 竟死於楚澤之解弛。 何其累也! 亦不可以世類用人材也。 航之子刀淸高莫比。 艦壯略魁偉而方老津吏。 爲人所役。 一本之出而賢愚淸濁若此懸絶。 此先王之所以世祿而不世官者也。 用人材者。 可不愼歟? 余與刀之族裔名捊1)者最相親。 將有同載浮海之志。 故述其世傳獨加詳焉。" 공손항전 우임금이 탔던 배[航]를 의인화하여 쓴 것이다. 형호(荊湖) 형산(荊山) 아래 있는 정호(鼎湖)를 가리킨다. 옛날 황제(皇帝)가 여기에서 솥을 주조하였던 곳이다. 《史記 封禪書》 공고(共鼓)와 화적(化狄) 황제의 신하로 배와 노를 만든 사람들이다. 《설문(說文)》 〈주부(舟部)〉에 "옛날에 공고와 화적이 나무를 깎아 배를 만들고 나무를 깎아 노를 만들어서 통하지 못했던 곳을 건넜다.[古者共鼓,貨狄刳木爲舟, 剡木爲楫, 以濟不通.]"고 하였는데 서개계(徐鍇繫)의 전(傳)에 "공고와 화적 두 사람은 황제의 신하이다.[共鼓,貨狄二人, 黃帝臣也.]" 하였다. 하늘로 올라가자 원문의 '빈천(賓天)'으로, 하늘의 손님이 되었다는 뜻인데 존귀한 사람의 죽음을 뜻한다. 용문(龍門)을 뚫은 일 '용문'은 산 이름이다. 《사기(史記)》 〈이사열전(李斯列傳)〉에 "우 임금이 용문을 뚫고 구하(九河)를 소통시킬 때 손발이 부르트고 얼굴이 누렇게 초췌하였다.[禹鑿龍門, 疏九河, 手足胼胝, 面目黧黑.]" 하였다. 강한(江漢)으로……데 '강한(江漢)'은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를 이른다. 《서경》 〈우공(禹貢)〉에 "파총산에서 양수를 유도하여 동쪽으로 흘러 한수(漢水)가 되게 하며……남쪽으로 강수(江水)에 들어가게 하셨다.[嶓冢導漾, 東流爲漢……南入于江.]" 하였다. 현규(玄圭)를……아뢰고 '현규'는 검은 옥이다.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권한을 맡겨 수토(水土)를 평정하게 하였는데 "우가 현규를 올려 그의 성공을 순 임금에게 아뢰었다.[禹錫玄圭, 告厥成功.]" 하였다. 《書經 禹貢》 이계(履啓) 하(夏)나라의 폭군인 걸(桀)의 이름이다. 무광(務光) 탕(湯) 임금이 하(夏)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왕위를 그에게 양보하려 했던 인물이다. 《莊子 讓王》 초택(楚澤) 옛날 초(楚)나라 지역에 운몽(雲夢) 등 7개의 연못이 있었다. 주(周)나라……익사했다 소왕이 초(楚) 땅을 순수하다가 강가에서 배를 타게 되었는데 초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여 아교로 접합시킨 배를 바치니 이에 소왕이 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아교가 녹아 배가 해체되어[膠液船解]' 물에 빠져 죽은 일이 있다. 《帝王世紀 周》 서백(西伯)이……귀의하자 서백(西伯)은 주 문왕(周文王)을 말한다. 서백(西伯)이 사냥을 나갔다가 위수 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여상을 만나 함께 돌아와 사(師)로 삼았다. 《史記 齊太公世家》 물이……같은데[如水益深] 학정이 더욱 심해진다는 말이다. 《孟子 梁惠王下》 장한(章邯) 진섭(陳涉)을 멸망시키고 항량(項梁)과 위구(魏咎)를 격파한 진(秦)나라의 맹장(猛將)이었다. 그런데 간신 조고(趙高)의 전횡에 실망하여 그 후 항우(項羽)에게 항복하여 옹왕(雍王)이 되었다가 유방(劉邦)에게 패하여 자살하였다. 《史記 項羽本紀》 경자관군(卿子冠軍)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상장군(上將軍)인 송의(宋義)를 가리킨다. 진(秦)나라 장감(章邯)이 황하를 건너 조(趙)나라를 공격하여 거록(鉅鹿)을 포위하자 회왕은 송의를 상장군으로 삼고 항우(項羽)를 차장(次將)으로 삼아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송의가 안양(安陽)에 이르러 46일간을 형세만 엿보며 공격하지 않자, 답답하게 여긴 항우는 송의가 제(齊)나라와 모의해 초나라를 배신하려 한다며 그를 살해하였다. 《史記 項羽本紀》 조고(趙高) 진(秦)나라 때 환관이다. 진 시황(秦始皇)이 죽자 승상(丞相) 이사(李斯)와 거짓 조서를 만들어 장자(長子) 부소(扶蘇)에게 죽음을 내리고 이세(二世) 호해(胡亥)를 세웠으며, 이사를 죽이고 승상이 되어 대소사를 제멋대로 하다가 진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함을……가라앉혔다 항우(項羽)가 진(秦)나라와 싸우러 가면서 하수(河水)를 건넌 뒤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沈船破釜甑]' 솥과 시루를 깨뜨리고, 막사를 불태우고, 사흘 양식을 지니고서 사졸에게 반드시 죽을 것임을 보여 주었던 것을 비유한 것이다. 《史記 項羽本紀》 삼로의 계책[三老策] 삼로(三老) 동공(董公)의 계책을 말한다. 항우가 의제(義帝)를 시해한 사실을 알게 된 유방(劉邦)이 삼로(三老) 동공(董公)의 진언을 받아들여 의제를 위해 상(喪)을 발표하고 통곡한 다음, 군사들에게 소복을 입히고 천하의 제후들에게 항우를 토벌할 것을 호소하자, 많은 제후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유방은 이들을 거느리고 항우를 죽이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漢書 高帝紀上》 육로와 수로로 원문의 '전조(轉漕)'로 식량을 운반할 때, 육로(陸路)를 통해 수레로 운반하는 것을 전(轉)이라 하고, 수로(水路)를 이용하여 배로 운반하는 것을 조(漕)라 한다. 예관(兒寬)과 복식(卜式) 예관과 복식은 한(漢)나라 무제(武帝) 신하들이다. 축출을 당했다 이때는 배를 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와룡(臥龍) 와룡은 제갈량(諸葛亮)의 호이다. 애산(崖山)의 전쟁 '애산(崖山)'은 광동성(廣東省) 신회현(新會縣) 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는 산인데, 형세가 험하기로 유명하다. 남송 말기에 원병(元兵)의 공격을 받았을 때, 보강군 승선사(保康軍承宣使) 장세걸(張世傑)이 위왕(衛王) 병(昺)을 모시고 애산으로 가 있었다. 원병이 다시 애산을 공격해 오자, 장세걸은 군함 10여 척을 가지고 도망을 쳤고, 좌승상(左丞相) 육수부(陸秀夫)는 형세가 어찌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마침내 위왕 병을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한편 장세걸은 뒤에 다시 애산에서 군졸을 수습하여 송나라 황실의 후예를 찾아서 황제로 추대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바다의 큰바람을 만나서 익사하고 말았다. 이로써 남송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宋史 忠義列傳》 아교가 풀리어 아교로 접합시킨 배를 탔다가 아교가 풀리고 배가 해체되어[膠液船解] 물에 빠져 죽은 것을 말한다. 《帝王世紀·周》 부(桴) 원문은 '捊'로 되어 있는데 공손항의 후손들의 이름은 모두 '배'와 관련된 것이므로 '桴'의 잘못이다. 바다에 뜰 뜻 '부해(浮海)'는 은거하겠다는 뜻이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천하가 어지러움을 탄식하여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뜨리라.[道不行, 乘桴浮于海.]" 하였다. 捊 공손항의 후손들의 이름은 모두 '배'와 관련된 것이므로 '桴'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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