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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교일기 하 南郊日記(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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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1661) 辛丑 1661년(현종2) 윤7월 8일 을유(乙酉) 대음(大陰)종제 나선(羅䙋)1)이 와서 절하였다. 이 편에 그의 종질 나두삼(羅斗三)2)이 편지를 부쳐 그 선친인 운봉(雲峯) 군3)을 임시로 안장하는 예법에 대해 질문하였다. 대개 산운(山運)이 길하지 않아 임시로 안장해야 한다는 지관의 주장에 대해 그 부형의 논의가 합일되지 않았으므로 서신을 띄워 질문한 것이다.윤7월 9일 병술(丙戌) 소음(少陰)나선이 돌아갔다. 나두삼의 별지(別紙)에 대해 이렇게 답하였다."풍수가의 금기설이 마구 횡행하고부터 임시로 안장하였다가 길운이 들기를 기다리는 시속이 비로소 생겨났습니다. 위로 형장(兄長)을 둔 인인(仁人)과 효자는 독단할 수 없으니 앞으로 어떻게 닦아야 속기도 범하지 않고 경례(經禮)에도 어긋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이러한 경우에 처한 자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대부분 관례에 따라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효(大孝)4)는 고례(古禮)를 근거로 삼아 반드시 대사를 극진히 치르고자 하니 순수한 효성이 지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나는 식견이 천박하고 고루하여 평소 예학에 밝지 못하니 어찌 감히 망녕되게 한마디 말을 내어 대효의 큰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성스러운 효성에 감격하여 감히 끝내 효자의 애절한 간청을 거절할 수 없겠기에 한두 가지 억설을 대략 갖추어 아래에 열록(列錄)합니다.이미 송빈(松殯)이나 토빈(土殯)이라고 한다면 유고하여 빈소를 옮기는 예와 같습니다. 또 이미 빈소를 옮긴다고 한다면 조전(祖奠)을 올려 영결하는 절차가 없은 뒤에야 비로소 빈(殯)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미 임시로 안장한다고 하였으니, 상여 줄을 잡고 발인한 다음 풍비(豐碑)를 세우거나 폄석(窆石)에 매달아 하관(下棺)하는 절차는 온전히 장례를 준용하면서 예증(禮贈)과 제주(題主) 두 조목만은 제외하고 거행하지 않고 '이는 빈례(殯禮)이다.'라고 한다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우제(虞祭), 졸곡(卒哭), 부례(祔禮) 또한 없애고 거행하지 않아도 된단 말입니까. 광중(壙中)을 파서 하관하고 흙을 채우고 봉분하면 이는 유택(幽宅)이고 둔석(窀穸)인 것이니 반혼(返魂)하고 우제를 지내 신(神)을 편안하게 하는 예를 어찌 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즉시 제주하고 나서 축문을 품는 의절도 거행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반복해서 생각해 보건대 대효가 지금은 장례를 준용하고 뒤에 개장례(改葬禮)를 준용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수도에서 관료로 생활하다가 사망한 중국 사람의 경우 만 리 길을 돌아와 장례를 치르는 것이 형편상 용이하지 않기 때문에 송빈이나 토빈의 풍속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경은 토질이 건조하고 기후가 차서 벌레나 뱀, 습기로 인한 시신의 손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해양국이라 벌레나 뱀, 개미 떼의 소굴이니 어찌 벌레나 뱀, 습기로 인한 시신의 손상이 정녕 없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설사 정녕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더라도 효자와 인인의 마음은 끝끝내 틀림없이 꺼림칙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반년 동안 임시로 안장하더라도 대략 석회와 격판(隔板)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어떻게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광중이나 유실(幽室)은 택(宅)이라 하고 묘지나 영역(塋域)은 조(兆)라고 합니다. 비록 수개월 동안 임시로 안장하더라도 수개월 동안은 택조가 되는 것이니 토지신(土地神)에게 고유하는 글에 언급하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을 듯합니다. 더구나 퇴도(退陶 이황(李滉))는 구경산(丘瓊山 구준(丘濬))의 학설을 바꿀 수 있으나 일반인이 주자(朱子 주희(朱熹))의 학설을 쉽게 변경할 수 있겠습니까.장자(張子 장재(張載))가 이르기를 '대공(大功) 이하의 상에는 윤달을 계산하고, 기년(朞年) 이상의 상에는 기년으로 끊고 윤달은 계산하지 않는다.'5) 하였고, 제복(除服)한 자가 장례에 참석하는 경우는 응당 〈상복소기 (喪服小記)〉의 주설(註說)을 따라야 합니다. 다만 〈옥조(玉藻)〉 주석의 '아버지가 상중에 있으면 자식은 순길복(純吉服)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6)는 설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보내온 편지에 상측(喪側)에서 백대(白帶)를 착용한다는 말은 시공복(緦功服)7)에서 적용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러나 제사에 참석하는 경우는 조복(弔服)을 착용하고 참석할 수 있을 듯합니다. 어떻게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장지가 비록 지근거리라고 해도 대여(大轝)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신중함과 공경을 지극히 다하는 태도가 아닐 듯합니다. 더구나 자제가 부형을 섬기는 것은 부형이 자제를 장사 지내는 예와는 크게 다르니 모든 의절(儀節)과 도수(度數)는 구차하게 사용하여 편의를 좇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장례를 치르기 전 지구(知舊)들에게 서신을 띄워 상례(喪禮)의 어려운 점을 질문하는 것은 옛 학자도 그렇게 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하였다.금성 현감(錦城縣監) 원두추(元斗樞)가 당상관 품계에 처음 가자(加資)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는 포상하기를 청한 어사 김수흥(金壽興)의 서계(書啓) 때문이었다.8) 원두추가 부임한 초기에는 엄명하다고 일컬어졌으나 근래에는 온 고을이 떠들썩하게 증오하고 있다. 지금 당상관의 품계에 가자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온 고을 사람들은 원두추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원수 대하듯 김수흥을 거명하며 욕하고 있다.6월 군민들이 한창 굶주려 고생하던 시기에 민간에 양맥(兩麥)을 독촉해 징수하면서 수도 없이 매질을 가하였다. 또 소금에 절인 조그마한 물고기 덩어리 한 개를 민간에 분배해 주고 대맥(大麥) 3말을 독촉하여 징수하였는데, 3말을 납부하는 과정에서 군민들은 6말을 썼다. 또 기한 내에 납부하지 못한 자가 발생하자 40여 명을 작은 방 하나에 가둬 놓고 그 문을 잠근 다음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돌에 불을 지펴 사람들이 모두 초주검이 된 뒤에야 꺼내 옥에 수감하니 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고 한다.이런 무자비한 일이 한두 사례만 들리는 게 아니라 이루 다 기록하지도 못할 정도이다. 과거에 듣기로 이 자가 과거 유종(儒宗)의 문하에서 공부하고9) 더러 청렴하고 강직하며 공정하다고 호평한 자도 있었다고 하였는데 고을의 정사가 이러하니 무슨 이유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다. 한탄스럽기 그지없다.윤7월 25일 임인(壬寅)아침에 윤숙(尹俶)10)이 편지를 보내 "지강(砥江)의 가을 흥취가 한창 아름다우니 어찌 구경 가지 않을쏜가." 하였다. 이에 식후에 나는 말채찍을 휘둘러 가서 강가의 송정(松亭)에서 종일 소요하였다. 윤생 등은 나를 위해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았다. 흥치가 매우 적의하여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이날 강가에서 절구(絶句) 2수11)를 읊어 이루었는데 "수면은 명징하여 텅 빈 듯이 맑다.[水面澄明湛若空]"와 "한 줄기 맑은 냇물은 비단처럼 푸르네.[淸流一帶翠如羅]" 등의 구절이 있다.윤7월 27일 갑진(甲辰) 대양(大陽)이방(吏房) 정우열(丁遇說)이 와서 진휼하는 일에 대한 감사12)의 장계를 보여 주었다. 장계에 수록된 9개 조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재해를 입은 고을의 전세(田稅)를 탕감하여 징수하지 않고 초실(稍實)한 산군(山郡)의 전세를 옮겨 재해를 입은 고을의 백성을 진휼하기를 청하는 것이다. 둘째는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지 않는 각 읍의 공물을 각 관에서 거두어 들여 구황할 수 있도록 청하는 것이다. 셋째는 대동법을 시행하는 각 읍에서 아직 거두지 못한 춘등미(春等米) 7말씩을 탕감하여 징수하지 않고, 추등미(秋等米) 6말씩은 거두어 각 읍에 보관해 두어 관수(官需)나 진공(進供)하는 물종(物種)의 값을 충당할 수 있도록 청하는 것이다. 넷째는 지대가 높은 밭으로서 재해를 입은 곳은 재결(災結)을 인정해 주기를 청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재해를 입은 읍의 모든 요역을 모조리 면제하고 군장(軍匠)의 가포(價布)도 모두 경감해 주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값을 내려 관직을 팔기를 청하는 것이다. 일곱째는 교생(校生)의 납속(納粟)을 청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시노비(寺奴婢)나 관노비(官奴婢), 향리가 곡물을 헌납하고 면역(免役)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아홉째는 이 밖에 아직 고안하지 못한 건은 계속해서 장계로 보고할 수 있도록 청하는 것이다.말이 매우 간절하여13) 백성을 사랑하고 시국을 근심하는 마음이 언외에 드러났다. 근래 이와 같이 훌륭한 감사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하였다. 다만 조정에서 그의 청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며 감사도 시종일관 그 마음을 간직할는지는 모르겠다. 이후로 응당 두고 보겠다.8월 1일 정미(丁未) 대음(大陰)신성필(愼聖弼)14)이 특별히 사람을 보내 편지를 띄워 이성암(李惺菴)15)의 장삿날을 통고해 주고 만사(挽詞)를 쓸 종이도 곁들여 보냈는데 편지의 말이 간절하였다. 아울러 질의하기를 "사계(沙溪)는 어린아이가 상사를 주관할 경우 우제(虞祭)의 축사(祝辭)에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 잠들 때까지[夙興夜處]'나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에 편안치 못하였습니다.[哀慕不寧]'라는 등의 말은 고쳐 써도 무방하다고 하였는데16) 만약 고친다면 그 말을 어떻게 써야 하겠습니까? 장인의 계후자(繼後子)가 현재 13세이므로 감히 묻습니다." 하였다.8월 9일17) 을묘(乙卯) 대음(大陰)영암(靈巖) 문생(文甥) 봉의(鳳儀)18)로 하여금 성암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이날 빗소리가 밤중까지 그치지 않았다. 홀로 앉아 있노라니 초연하여 절구(絶句) 한 수를 입으로 읊어 이루었는데 "소슬한 가을비 소리가 초가 처마를 울리네.[蕭蕭秋雨響茅簷]"라는 구절이 있다.신성필에게 답장을 보내고 이 편에 만시(挽詩) 배율(排律) 13운(韻)과【제2권 오언배율에 자세히 보인다.】19) 제문(祭文)을【12권 〈이 성암에 대한 제문[祭李惺菴文]〉에 자세히 보인다.】 아울러 작성하여 보냈다.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8월 12일 무오(戊午) 소양(少陽)오후에 날씨가 청명하여 가을 심사가 맑고 상쾌하였다. 집안을 말끔히 소제하고 단정하게 앉아 책상을 마주하니 사념이 솟지 않고 사지육체가 평안하였다. 어찌 항상 이러한 기상을 잡아 지킬 수 있겠는가. 옛사람이 말한 가을달이나 차가운 얼음의 비유도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8월 22일 무진(戊辰) 소음(少陰)오시(午時)에 서풍이 불고 비가 내리더니 한참 만에 그쳤다. 문을 닫고 혼자 앉아 어제 김중원(金仲源)20)과 나눈 대화를 생각해 보았다. 중원은 내 과실에 대한 광주(光州) 사람들의 지적을 들어 하나하나 언급하였다. 그중에는 더러 결점을 너무 악착같이 찾아내려고 한 것이나 시론(時論)에 치우친 자의 비난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 내가 몸단속이 엄격하지 못하고 마음 다스림이 엄밀하지 못하며 학문을 열심히 하지 않고 말 삼가기를 독실하게 하지 않아 이런 비방을 불렀으니 이 어찌 심히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21)다만 세상이 한창 논의가 분열되어 인물을 끌어들이고 시비를 분변함에 각각 영합하는 바를 두어 명리를 넘보고 있는데 나는 한 몸으로 모든 세파에 부딪히는 가운데 마음가짐은 공정하게 하고자 하고 처신은 중도를 지키고자 하여 세속의 경도된 풍조로 처신하지 않고 홀로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않으니 여러 사람의 구설이 집중되는 것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나 스스로 잘못을 하여 남들의 비난을 얻은 것은 이제부터 통렬히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의(時議)를 추종하고 그 마음을 바꾸어 유행하는 세태에 동화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있겠는가. 인하여 기록하고 경계하는 바이다.8월 23일 기사(己巳) 소양(少陽)북풍이 살짝 일더니 날씨가 청량해졌다. 오전에는 단정히 앉아 심신을 수렴하여 다잡았다. 오후에는 동복(童僕)에게 명하여 마당에 있는 콩대와 들깨를 거두게 하고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 그 사이를 왕래하였는데 낫을 들고 콩대를 베기도 하고 지팡이를 짚고 원경을 조망하기도 하고 머리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기도 하니 자못 지극한 즐거움이 있었다. 어느새 석양이 서산에 내려앉자 돌아가는 새가 숲에【다른 본에는 숲[林]이 처마[簷]로 되어 있다.】 깃들었다. 나 역시 유유히 돌아오니 궤안이 깨끗하고 조용한 가운데 경전이 책상에 놓여 있어 즐겁게 훑어보았다. 모두 마음을 맑히고 즐겁게 하는 것이니 어찌 굳이 외물(外物)을 사모할 것이 있겠는가.8월 24일 경오(庚午) 소양(少陽)오재발(吳再發)22)이 서신을 보내 이르기를 "가을 기운이 참으로 상쾌하니 구담(龜潭)의 맑은 물결을 완상할 만합니다. 지금 오랜 벗 한두 명과 강가의 서덜 굽이에서 만나 환담하기로 약속하여 술상을 삼가 마련하였습니다. 혹 어르신을 모시고 하루 동안의 맑은 완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글을 보고 즉시 출발하여 조금 뒤 도착하였다. 사인(士人) 이소(李韶)와 그 아우 이경(李䪫),23) 오재발 형제, 이운단(李雲槫)24) 등 여러 사람이 어른, 아이 8, 9명과 함께 자리를 펴고 앉아25) 수석 가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나를 맞아들였다. 강가 서덜 위에 죽 벌여 앉아 서로 안부 인사를 주고받고 나서 술을 몇 잔 마시게 하는데 아우 해영(海英)26)이 광주목(光州牧)의 처소에서 도착하였다. 뒤이어 어부가 뗏목을 이용하여 바위 가에 기대어 쏘가리, 잉어 몇 마리를 올리니 아이들에게 명하여 회를 뜨게 하였다. 술을 돌려 마시는 틈틈이 한담을 섞으니 흥치는 흡족하여 매우 즐거웠고 못은 거울처럼 명징하였다. 어슴푸레한 황혼 빛이 언덕의 한 길을 따라서 푸른 잔디에 은은히 비쳐 오자 마침내 함께 작별하고 호탕하게 돌아왔다. 풍진세상의 좋은 놀이였으니 또한 한 가지 즐거운 일이었다.9월 1일 정축(丁丑) 대양(大陽)이날 우연히 《초씨역림(焦氏易林)》27)을 펴 보고 64괘(卦) 384효(爻)를 1년 360일에 분배하는 법을 파악하였다. 64괘 가운데 진괘(震卦), 이괘(離卦), 태괘(兌卦), 감괘(坎卦)를 덜어 내어 사정(四正)28)으로 삼아 각각 1일에 분배하여 4일을 얻고 60괘는 6 X 6=36이므로 360일을 얻어 총 364일이 된다. 작년 11월 20일 동지를 복괘(復卦)의 첫 효로 기산(起算)하여 금년 11월 1일 동지에 이르면 364효를 전부 활용하게 된다. 내일부터 날짜에 분배하여 괘를 기재할 계획이다. 다만 10월 28일은 곤괘(坤卦) 상육효(上六爻)에서 분배가 끝나고 그믐날이 남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이후로 응당 다시 상고해 봐야겠다.9월 3일 기묘(己卯)29) 간괘(艮卦) 육오(六五)이날 《초씨역림(焦氏易林)》과 소씨(邵氏)의 도(圖)30)를 참고하여 64괘를 24절기에 분배하는 도와 도설(圖說)을 만들었다. 따로 기록하고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9월 5일 신사(辛巳) 겸괘(謙卦) 초육(初六) 소양(少陽)태수(太守) 조억(趙億)31) 군이 내방하고 떠났다. 그에게 이달 24일 증광 생원진사시(增廣生員進士試)를 설행하고 10월 13일 증광 문무과(增廣文武科) 과장을 설행한다는 말을 들었다. 세자가 탄생한 경사 및 두 자전(慈殿)에게 휘호(徽號)를 올리고 선대왕을 부묘(祔廟)한 경사 때문이었다.32) 아울러 성상께서 본도 관찰사가 계청한 9개 조목으로 구성된, 백성들을 진휼하는 데 대한 상소를 윤허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민생이 소생할 수 있게 되었으니 성상의 은택이 하늘과 같다.효종대왕이 다섯 명의 공주를 낳아 금상은 형제가 없고 즉위한 지 3년이 되도록 세자를 보지 못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위태롭고 불안하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 세자가 탄생한 경사를 듣게 되니 그 기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8월 15일 진시(辰時)에 탄생하였다고 한다.9월 12일 무자(戊子) 비괘(否卦) 육이(六二) 소음(少陰)전 금성 판관(錦城判官) 유준(柳浚)33) 공이 졸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공은 40년 세월을 벼슬하지 않고 집안에서 지내면서 법도 있게 집안일을 처리하고 서재를 건립하여 후학을 교육하다가 올해 78세로 졸하였다. 상복을 입고 상례를 거행한 제자가 40여 인이었다. 아들 유성오(柳誠吾)는 회덕 현감(懷德縣監)으로 있고 나머지 두 아들인 유창오(柳昌吾), 유형오(柳亨吾)와 손자 유상운(柳尙運)은 문재(文才)를 갖추어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9월 19일 을미(乙未) 췌괘(萃卦) 육삼(六三)가서 현감을 만났다. 접때 현감이 내방해 준 예에 사례하기 위함이었다. 옛사람들은 공적인 일이 아니면 관할 수령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지방에 거주하는 동안 현감들이 매번 내방하여 예를 다하고 누차 예물을 보내주기도 하여 마지못해 가서 사례하였다. 나같이 거친 사람이 자주 관아에 들어가는 것은 더없이 불편하다. 그러나 선영이 이곳 남평(南平)에 있고 보면 이곳의 현감으로 있는 사람이 예의와 공경을 다하는데도 전혀 답례하지 않는다면 의리에 또한 온당하지 않으므로 이렇게 부득이한 일을 한 것이다. 한탄스럽기 그지없다.10월 7일 계축(癸丑) 관괘(觀卦) 육삼(六三) 소양(少陽)경차관(敬差官) 여증제(呂曾齊)34)가 현(縣)의 백성에게 잔혹한 형벌을 자행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보다 앞서 본도는 3년 동안 기근이 매우 혹심하였는데 올해 좌도(左道)는 산읍(山邑)의 농사가 해읍(海邑)보다는 조금 괜찮았다. 그러나 본현의 농사는 해읍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감사 이태연(李泰淵) 공이 재해를 입은 군현에 본현을 함께 열거하여 장계로 보고하였다.금성 현감(錦城縣監) 원두추(元斗樞)는 우의정 원두표(元斗杓)의 아우로 성질이 본래 잔혹하였다. 과거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재직할 당시 이태연 공이 충청 감사로 재직하면서 어떤 일로 원두추를 태거하여 쫓아내었다. 올가을에 원두추가 말미를 받고 서울에 올라와서 어느 재상에게 말하기를 "남평의 농사는 풍년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가 남평 현감과 오랜 친구 관계이므로 재해를 입어 황폐해졌다고 꾸며 조정에 허위로 보고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재상이 성상에게 보고하니 이로 인해 좌도에 경차관을 파견하여 검증하게 한 것이다. 대체로 남평의 읍정(邑井)이나 하천을 따라 위치한 몇몇 리는 조금 농사가 되었으므로 원두추가 이를 빙자하여 감사에게 화를 덮어씌워 과거의 원한을 갚고자 하였기 때문이다.9월 12일에 여증제가 영암(靈巖)에서 본읍에 도착하여 전야(田野)는 전혀 자세히 조사하지도 않은 채 도감(都監) 윤선갑(尹先甲), 도서원(都書員) 송대춘(宋大春)에게 장을 쳤다. 송대춘은 거의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다. 또한 거처가 쾌적하지 않다는 이유로 매우 잔혹하게 관아 아전들에게 장을 쳤다. 어제는 또 능주(綾州)에서 현에 도착할 때 향중 인사(鄕中人士)인 전 참봉 서행(徐荇)35) 등 70여 인과 촌에 거주하는 상놈들 100여 인이 길가에 엎드려서 상서(上書)하여 애걸하고 이어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실상을 진달하였다. 그러자 여증제가 크게 노하여 서행을 모욕하고 그의 종과 상놈들을 옥사에 가두고 감관과 서원(書員) 등 7, 8인에게 혹형을 가하였다.이보다 앞서 재해를 입어 황폐해진 본읍의 1900여 결(結)을 모두 태거(汰去)하였으나 여증제는 다만 기존 재결(災結)에서 600여 결만 남기고 빼 버렸다. 감사는 하는 수 없이 차재읍(次災邑)으로 조정에 재차 보고하고 곡식과 부역에 대해 징수를 독촉하라고 공문을 보내 알렸다. 이에 사람들의 억장이 무너지고 원망이 하늘에 사무쳤다. 부랑하다가 죽는 화가 금방 눈앞에 닥쳤는데 본읍뿐만 아니라 가는 곳마다 형장이 잔혹하여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백성들에게 또 형륙(刑戮)까지 가해지니 차마 무어라 말할 수도 없는 지경이다.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여증제의 화가 기근보다 혹심하다." 하였다.11월 1일 병자(丙子) 복괘(復卦) 초구(初九) 소양(少陽)하루 종일 재계하며 지냈으니 오늘은 곧 동짓날이다. 지은 절구(絶句)36)에 '야반천심(夜半天心)' 등의 시어가 있다.12월 11일37) 병진(丙辰) 무망괘(无妄卦) 구사(九四) 대양(大陽)새벽에 일어나 외조부38)의 기제(忌祭)를 지냈다. 날씨가 따사로워 제법 봄기운이 있었다. 굶주린 백성들의 고초가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 도로 위에 굶어 죽은 시신이 즐비하다. 무안(務安) 고막교(古漠橋)39) 위에 한 여인이 두세 살짜리 아이를 안고 앉아서 한나절이나 통곡하다가 저녁 무렵에 다리 아래로 그 아이를 던지고는 대성통곡하고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도 굶주림으로 모자가 모두 생존하지 못하는 형편 때문이었을 것이다. 듣고서 너무너무 슬프고 가여웠다.12월 12일40) 정사(丁巳)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 대양(大陽)종질(從姪) 김이상(金履相)이 능주(綾州)에서 곡식을 구입해 왔다. 내가 이르기를 "옛날 계로(季路)는 100리 밖에서 쌀을 져 와 어버이를 봉양하였다.41) 자식이 어버이에 대하여 힘이 미칠 수 있는 것은 모두 응당 갖은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한다. 요즘 사람들은 이러한 대기근을 맞아 몸소 집안일을 책임지려고 하지 않아 그 어버이가 굶주리는 지경에 이르도록 하는 자가 많다. 네가 이러한 일을 해내어 어버이를 봉양하는 일에 뜻을 두니 내가 몹시 측연하구나." 하였다.12월 15일 경신(庚申) 명이괘(明夷卦) 육이(六二) 대양(大陽)아침에 짙은 안개가 사방을 가득 채워 100보 떨어진 사물의 형상도 식별할 수 없다가 해가 높이 올라온 뒤에 그쳤다. 오늘은 곧 입춘절(立春節)인데 음산하고 독한 기운이 이러하니 이것이 무슨 징후란 말인가. 백성은 굶주려 죽지 않으면 옮겨 다니는데 전염병이 또 따라서 생겨났다. 첫 절기에 음울한 기운이 어둑하게 가득 차니 결코 길한 조짐이 아니다. 놀라운 마음으로 기록한다.12월 16일 신유(辛酉) 명이괘(明夷卦) 구삼(九三) 대양(大陽)날씨가 푹하여 중춘과 다를 바 없었다. 낮에 충의(忠義) 윤경(尹儆)42)의 상에 조문하였다. 반혼(返魂) 때 쓰는 유거(柳車)의 제도는 《가례(家禮)》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으나 세속에서는 상고해 내어 그것을 제작하는 자가 없다. 내가 김재화(金載華)를 시켜 상가에 말하게 하여 그 제도를 자세히 가르쳐 주고 그것을 제작하게 하였다. 그 제도가 더없이 좋아서 호상(護喪)한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고맙다는 뜻을 표하였다.다만 복토(伏兎)의 제도는 본문을 따르기 어려운 점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긴 장대에 별도로 작은 기둥을 세우고 대의 위쪽 부근에 널의 높이를 헤아려 둥근 구멍을 만들어 작은 방형의 평상43)에 세운 작은 기둥의 둥근 구멍과 서로 맞게 한 다음 가로 빗장을 만들어 끼우면 기울기가 매우 심한 언덕이나 비탈을 오르내려도 널이 항상 수평을 이루고 반듯하게 된다. 자식 된 자들이 상사를 치르는 대사에 이로부터 그 제도를 서로 전하여 잘못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12월 29일 갑술(甲戌) 기제괘(旣濟卦) 육사(六四) 소음(少陰)집안을 청소하고 하루 종일 재계하며 지냈으니 오늘은 곧 섣달 그믐날이다. 한 해 농사의 전체적인 상황을 두루 상고하여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봄비가 적기에 내려 백성들이 풍년을 기대하였으나 여름 가뭄이 극성을 부려 농경지가 재해를 입고 황폐해졌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 굶어 죽은 시신이 즐비하고 도적이 제멋대로 날뛰는 데다 전염병까지 따라서 치성하였다. 유랑민과 노약자들이 쏟아져 나와 도로가 저잣거리 같았다. 그러나 혹리(酷吏)와 탐관(貪官)은 형륙을 자행하여 백성들의 괴로움은 날로 심화되고 달로 증가하였다. 훌륭한 정사가 비록 밝으신 성상에게서 나오더라도 혜택이 아래로 백성들에게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나같이 재야에 있는 자의 근심이 비록 간절하더라도 어쩌겠는가.붓 가는 대로 사실을 기록하고 또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1년 300일 동안 허송세월하여 낮에는 일어나 있고 밤에는 엎드려 있었으니 무슨 일을 이루었겠는가. 엄밀하게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여 학문은 조금의 진전도 없고 엄격하게 스스로를 단속하지 못하여 비방은 산처럼 쌓였다. 나 자신을 반성하여 스스로 생각해 보니 하늘을 우러러도 부끄럽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럽다. 내년에는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과거의 허물은 얼음이 녹듯이 사라지고 새로운 지식은 점점 진전되기를 바란다. 그리한다면 노경에 허물이 적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탄스럽기 그지없다.이날 미시(未時), 신시(申時)에 신방(申方)에서 천둥소리가 나고 번갯불이 일더니 이내 비가 내리고 햇빛이 어두워졌다. 폭풍과 소나기가 잠깐 사이 그쳤다 쳤다 하고 천둥소리와 번갯불이 별안간 일었다 사라졌다 하였다. 아주 괴상한 현상이었다. 閏七月初八日。 乙酉。 大陰從弟羅䙋來拜。 其從侄羅斗三付書。 仍問其考雲峯君權葬之禮。 蓋以地家山運不吉權葬。 而其父兄論議不一。 故發書來問。初九日。 丙戌。 少陰羅䙋還。 答羅斗三別紙曰: "自堪輿家拘忌之說肆行。 權厝待吉之俗始起。 仁人孝子之上有兄長。 不得自專。 將何修而無犯於俗忌。 不悖於經禮耶? 世之遭此者不一。 而擧皆循例行之。 大孝援據古禮。 必欲極盡於大事。 足見純孝之至也。 但鄙人識淺見陋。 素眛禮學。 何敢妄容一言。 以塞大孝之盛望哉? 感孝意之勤。 不敢終孤哀懇。 略具一二臆說。 列錄于左。 旣曰松殯土殯。 則與有故移殯之禮等矣。 旣曰移殯。 則無祖奠永訣之節。 然後方可謂之殯。 今旣曰權葬。 則牽紼發引。 樹豐懸窆之節。 全用葬禮。 而獨於禮贈題主二條。 棄而不行。 曰是殯禮云爾。 則未知如何耶? 然則。 虞卒哭祔禮。 亦可廢而不行耶? 穿壙下棺實土封塋。 則是幽宅。 是窀穸也。 返魂虞安之禮。 何可廢哉? 卽題主懷祝之節。 不可不擧。 反復思之。 大孝今用葬禮。 後用改葬者。 似爲得宜。 中國之人宦遊京師。 萬里歸葬。 勢不可易。 故有松殯土殯之俗。 然北京土氣寒。 無虫蛇水濕之患矣。 吾東窮海之陬。 乃虫蛇螻螘之窟。 安保虫蛇水濕之必無乎? 設使必無是事。 孝子仁人之心。 終必有未安者矣。 故愚意以爲雖半年權葬。 略用石灰隔板。 可也。 未知如何? 壙中幽室。 謂之宅。 墓地塋域。 謂之兆。 雖數月權葬。 尙可爲數月之宅兆。 告土之詞云云。 似無所疑。 况退陶之於丘瓊山。 可得改也。 凡人之於朱子。 容易改換耶? 張子曰: '大功以下筭閏。 自朞以上以朞斷。 不計閏云。' 除服者之會。 葬者當從喪服小記註說。 但以〈玉藻〉註'父有喪。 子不可純吉'之說推之。 來喩在喪側白帶之說。 似不可施於緦1)功之服矣。 然來參祭祀。 則似可以吊服來與矣。 未知如何? 葬地雖至近。 不用大轝。 恐非致謹致敬之至。 且子弟之事父兄。 與父兄葬子弟之禮大異。 凡儀節度數。 恐不可苟用從便。 葬前發書。 問難喪禮於知舊。 古之學者亦有行之者。" 聞錦城縣監元斗樞。 新加堂上階。 蓋用御使金壽2)興褒啓也。 斗樞莅官之初。 以嚴明稱。 近來一境譁然仇㤪。 今聞階加堂上。 闔州之人不怨斗樞。 號辱壽3)興如讎矣。 六月民方飢苦之日。 督捧兩麥於民間。 笞鞭狼藉。 又頒鹽魚一小塊于民間。 督收大麥三斗。 三斗之納。 民費六斗。 有不及納者。 囚四十餘人于一小房。 鎖其戶。 以火烘其突。 自朝至暮。 人皆垂死。 然後出囚于獄。 哭聲徹天云。 如此酷烈之事。 非一二聞之。 不可勝記。 前聞此人曾從事於儒宗之門。 或有以淸介公正稱之者。 邑政如此。 未知何故而至此。 可嘆可嘆。二十五日。 壬寅朝尹俶以書來言: "砥江秋興方佳。 盍往觀之?" 食後余揮鞭赴之。 終日逍遙於江上松亭。 尹生等爲余設網得魚。 興致甚適。 日暮而歸。 是日。 江上吟成二絶。 有"水面澄明湛若空"及"淸流一帶翠如羅"等句。二十七日。 甲辰。 大陽吏房丁遇說。 以監司賑救狀啓來示。 啓中九條。 一。 請災邑田稅蕩減不捧。 而以稍實山郡之稅。 移賑災邑之民。 一。 請未行大同各邑貢物。 收捧於各官。 以爲救荒。 一。 請行大同各邑未收春等米七斗。 蕩滌不收。 秋等六斗之米。 則捧留各邑。 以爲官需及進供物種之價。 一。 請高田之被災者給災。 一。 請災邑一應徭役。 盡皆蠲免。 軍匠價布。 亦皆許減。 一。 請減價賣官。 一。 請校生納粟。 一。 請寺奴婢官奴婢鄕吏許納糓免役。 一。 請此外未及思得者。 連續啓聞。 辭意懇惻4)。 愛民憂時之心。 見於言外。 近來監司之賢者。 未聞如此。 但未知朝廷。 何以處其請? 而監司。 亦終始保守此心否? 從當觀之。八月初一日。 丁未。 大陰愼聖弼。 專人致書。 告以李惺菴葬日。 且送挽紙。 書辭懇切。 且問沙溪云: "小兒主喪者。 於虞祭祝辭。 '夙興夜處'。 '哀慕不寧'等語。 改書無妨。" 如改之。 其詞何以書之耶? 舅氏繼後孤。 今十三歲。 故敢問云。初九5)日。 乙卯。 大陰使靈巖文甥鳳儀致祭于惺菴。 是日雨聲至夜不止。 獨坐悄然。 口成一絶。 有"蕭蕭秋雨響茅簷"之句。 愼聖弼答書。 且製送挽詩排律十三韻【詳見第二卷五言排律。】及祭文。【詳見十二卷〈祭李惺菴文〉。】 不錄于此。十二日。 戊午。 少陽午後。 日氣晶明。 秋思淸爽。 淨掃堂宇。 端坐對案。 思慮不起。 百體靜泰。 安得恒持此氣象乎? 古人所謂秋月寒氷之譬。 能如此否?二十二日。 戊辰。 少陰午西風雨作。 移時而止。 闔戶獨坐。 仍思昨日與金仲源語。 仲源。 仍擧光州人等指摘余過擧處。 一一言之。 其間。 或多有吹毛者之已甚。 偏時者之斥言。 然皆余律身不嚴。 治心不密。 爲學不勤。 愼言不篤而致此口舌。 此豈非6)可戒可懼之甚者耶? 但世方論議分歧。 引物辨色。 各有所阿。 希覬利名。 而余以一身。 當衆流之衝。 持心欲公。 處身欲中。 不以世俗所偏自處。 而特立不倚則衆口之集。 安得免乎? 至於自失而得非於人者。 自此痛加繩墨可也。 至於仍時議而易其中。 混於流俗。 余忍爲哉。 仍書而警之。二十三日。 己巳。 少陽北風微起。 日氣淸凉。 午前端坐收束。 午後命兒僕收園中豆箕水荏。 杖屨往來于其間。 或手鎌刈豆。 或住杖望遠。 或擧頭仰天。 頗有至樂。 而已夕陽下山。 歸鳥投林。【一作簷】 余亦悠然而還。 几案淨靜。 經傳在床。 欣然寓目。 無非澄心悅意之具。 何必外慕爲哉?二十四日。 庚午。 少陽吳再發以書來曰: "秋氣良爽。 龜潭之澄浪可玩。 今與一二知舊。 相約會敍于江磯澳。 具酒樽。 謹以辦矣。 倘倍杖屨而爲一日之淸賞乎?" 余聞言卽駕。 俄頃而至。 士人李韶其弟䪫。 吳再發兄弟,李雲槫諸人。 竝童冠八九人。 班荊而坐。 開樽于水石之涯。 迎余而入。 列坐于江磯之上。 叙寒暄訖。 命酒數酌。 而海英弟自光州牧所至矣。 而已漁人因筏。 而倚于巖邊。 進錦鱗赤鯉數箇。 命童子切膾。 傳酒之暇。 雜以閑談。 興致佳適。 澄潭若鏡。 暝色依微。 循岸一路。 隱暎靑莎。 遂與別。 浩然而歸。 塵中一良遊。 亦爲一樂。九月初一日。 丁丑。 大陽是日。 偶披《焦氏易林》。 得以六十四卦三百八十四爻。 分配一年三百六十日之法。 六十四卦。 除震離兌坎爲四正。 各配一日。 得四日六十卦。 六六三十六得三百六十日。 共三百六十四日。 起前年十一月二十日冬至。 復之初一爻。 至今年十一月初一日冬至。 三百六十四爻盡用矣。 自明日配日爲記是計。 而但十月二十八日。 坤之上六畢配。 而晦日爲剩。 是則未可知也。 從當更考。初三日。 己7)卯。 艮六五是日。 參考《易林》及邵氏圖。 作六十四卦配二十四氣之圖及說。 別錄不記此。初五日。 辛巳。 謙初六。 少陽太守趙君億。 來訪而去。 聞以今月二十四日設增廣生進試。 十月十三日文武科設場云。 蓋以世子誕生慶及兩慈殿上徽號及先王祔廟之慶也。 又聞聖上從本道方伯啓請九條賑民之狀。 民生可甦。 聖恩如天。 孝宗大王誕五公主。 今上無兄弟。 卽位三年。 世子未育。 一國人心危疑。 今聞世子誕生之慶。 其喜可言? 蓋八月十五日辰時始誕云。十二日。 戊子。 否六二。 少陰聞錦城前判官柳公浚卒。 柳公不仕家居四十年。 處家事有法。 立書齋敎養後學。 年今七十八而卒。 弟子持服行喪者四十餘人。 子誠吾懷德縣監。 二子昌吾亨吾。 孫尙運。 具有文才。 皆登司馬。十九日。 乙未。 萃六三往見邑宰。 蓋謝頃日主倅來見之禮也。 古人非公事不見邑宰。 余居鄕。 邑宰每有來見致禮。 或累致禮物。 不得已有往謝之禮。 踈野之蹤。 頻入官門。 極有非便。 而先塋在此土則爲此地主者。 屈禮致敬。 而寞然無慰答之禮。 於義亦未安焉。 故有此不得已之擧。 可嘆可嘆。十月初七日。 癸丑。 觀六三。 少陽聞敬差官呂曾齊肆虐刑于縣人。 先是。 本道三年饑饉甚酷。 而今年左道山農稍勝於海邑。 然本縣之農。 無異於海邑。 故監司李公泰淵以本縣同列於災郡啓聞。 錦城縣監元斗樞。 乃右相斗杓之弟。 性本殘虐。 曾於忠州牧使時。 李公泰淵爲忠淸監司。 以事汰斗樞而逐之。 今年秋。 斗樞受由抵京。 言于宰執曰: "南平之農。 無異豐年。 而監司與南平倅故舊。 故冐以災荒。 瞞報朝廷。" 於是。 宰執白上。 仍遣敬差官于左道以檢之。 蓋南平邑井沿水數里。 稍得成農。 故元藉此。 欲嫁禍於監司而報往日之㤪故也。 九月十二日。 呂曾齊自靈巖抵本邑。 全不審覈田野。 杖都監尹先甲都書員宋大春。 大春抵死而甦。 又以居處不適。 杖官吏甚酷。 而昨日。 又自綾州到縣時。 鄕中人前參奉徐荇等七十餘人。 村漢等百餘人。 伏于路傍。 上書哀乞。 仍陳飢寒之狀。 曾齊大怒。 僇辱徐荇。 囚其奴及常漢等于獄。 酷刑監官書員等七八人。 先是。 本邑災荒一千九百餘結盡汰去。 只存六百餘結而去。 監司不得已以次災邑更報于朝。 食糓及賦役。 懲督行會。 人心若崩。 怨瀆徹天。 流死之禍。 迫在朝夕。 非徒本邑。 到處刑杖殘酷。 飢寒之民。 又加以刑戮。 不忍言不忍言。 人皆曰: "曾齊之。 酷於饑饉。"十一月初一日。 丙子。 復初九。 少陽齋居終日。 今日。 乃冬至日也。 有絶句"夜半天心"等語。十二月十一8)日。 丙辰。 无妄九四。 大陽晨起。 行外祖考忌祭。 日氣溫和。 頗有春氣。 飢民之苦。 日復日深。 道路之上餓殍相望。 聞務安古漠橋上。 有一女抱二三歲兒而坐。 半日哭泣。 臨夕投其兒于橋下。 大哭而去云。 蓋以飢餒勢不能母子兩活故也。 聞極悲憐悲憐。十二9)日。 丁巳。 无妄九五。 大陽從侄履相。 貿糓于綾州。 余謂曰: "昔季路百里負米以養親。 人子之於親。 力之可及者。 皆所當自盡。 今人値此大饑。 不肯躬執家事。 使其親至於飢餒者多矣。 汝能辦此事。 以奉親爲意。 余甚惻然云。"十五日。 庚申。 明夷六二。 大陽朝陰霧四塞。 不能辨百步物色。 日高而止。 今日。 乃立春節也。 陰毒之氣如此。 此何影也? 生民飢饉不死而徙。 而厲疫又從而起矣。 首節之陰霾之氣。 昏塞否暗。 決非吉象。 憮然而記。十六日。 辛酉。 明夷九三。 大陽日氣和煦。 無異仲春。 午吊尹忠義儆。 返魂柳車之制。 詳載《家禮》。 而世俗無有考出而製之者。 余使金載華言于喪家。 詳敎其制度。 而造之。 其制極好。 護喪諸人。 皆致謝於余矣。 但伏兎之制。 似有難從本文。 故別立小柱於長杠。 杠之近上。 度柩高而設圓鑿。 與小方狀10)小柱圓鑿相當。 而設橫扃通貫之。 上下原坂傾側甚偏。 而柩常平正。 庶使爲人子送終大事。 自此相傳其制而不失云。十二月二十九日。 甲戌。 旣濟六四。 少陰灑掃庭宇。 終日齊居。 今日乃歲除日也。 歷考一年歲功之終始。 而記之曰: "春雨時降。 人民望豐。 夏旱亢極。 田畝災荒。 秋冬之間。 餓莩相望。 盜賊恣橫。 厲疫又從而熾發。 流民老弱。 道路如市。 酷吏淫官。 刑戮縱肆。 而生民之困。 日深月滋。 美政雖發於聖明。 膏澤不究於赤子。 林下之憂雖切。 奈何? 信筆記事。 又反而思之。 一年三百日。 虛度光陰。 晝起夜伏。 所成者。 何事? 治心不密。 學無寸進。 律己不嚴。 積謗如山。 反躬自思。 仰愧俯怍。 庶幾來歲改心易慮。 舊過氷解。 新知漸進。 庶可作晩景小過之人耶? 可嘆可嘆。 是日未申時。 雷聲電光申方。 仍下雨。 日光晦暝。 顚風急雨。 乍止乍作。 雷聲電光倏起倏滅。 勢甚非常。" 나선(羅䙋) 1634~?. 자는 정경(整卿),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정개청(鄭介淸)의 문인인 나덕준(羅德峻)의 손자이고, 나경소(羅經素)의 아들이다. 1675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 사헌부 장령, 용강 현령(龍岡縣令), 마전 군수(麻田郡守) 등을 지냈다. 나두삼(羅斗三) 1635~?. 자는 태서(台瑞), 본관은 나주이다. 나염(羅袡)의 아들이다. 1666년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제원 찰방(濟源察訪), 사섬시 직장, 공조 좌랑, 태인 현감(泰仁縣監) 등을 지냈다. 운봉(雲峯) 군 나두삼의 부친인 나염(羅袡, 1611~1661)이다. 자는 자상(子尙)이다. 생부는 나위소(羅緯素)인데, 나위소는 나덕준의 아들로 남포의 외친이다. 나염은 1642년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은진 현감(恩津縣監), 공조 정랑, 태인 현감(泰仁縣監), 운봉 현감(雲峯縣監) 등을 지냈다. 현감으로서 치적을 많이 쌓았고, 특히 운봉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남원(南原)의 수령을 잠시 겸직하였는데 남원 주민들이 그를 남원의 수령으로 부임하게 해 달라고 관찰사에게 청원하기도 하였다. 대효(大孝) 간찰 등에서 상을 치르고 있는 상대방을 지칭하는 말이다. 대공(大功)…… 않는다 《장자전서(張子全書)》 권8에 수록된 〈제사(祭祀)〉에 보인다. 아버지가…… 된다 《예기(禮記)》 〈옥조(玉藻)〉의 "호관에 검은 무를 다는 것은 아버지가 상중에 있을 때 자식의 관이다.[縞冠玄武, 子姓之冠也.]"라는 구절에 대한 진호(陳澔)의 주에 "호로써 관을 만듦은 흉복이고, 무가 검은색인 것은 길복이다. 길복과 흉복이 서로 반씩 인 이유는 아버지가 상중에 있으면 자식은 순길복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以縞爲冠, 凶服也, 武則玄色, 吉也. 所以吉凶相半者, 蓋父有喪服, 子不可用純吉.]"라고 하였다. 시공복(緦功服) 원문은 '腮功之服'인데, 일반적인 용례에 근거하여 '腮'를 '緦'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금성 현감(錦城縣監)……때문이었다 《나주목읍지(羅州牧邑誌)》에 의하면, 원두추는 1660년 8월 14일에 도임하여 1663년 4월 16일에 이임하였다. 또 《현종실록(顯宗實錄)》 2년 6월 4일 기사에 의하면, 어사 김수흥의 서계로 인하여 금성 현감 원두추 등이 포상을 받았다. 한편 김수흥의 원문은 '金守興'인데, 《현종실록》 이 기사 및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현종 2년 3월 22일 기사에 근거하여 '守'를 '壽'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 '金守興'은 모두 동일하게 처리하였다. 이 자가……공부하고 원두추는 원두표(元斗杓)의 동생으로,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에게 수업하고 이의길(李義吉), 김극형(金克亨) 등과 종유하였다. 《南溪集 권73 廣州府尹贈左贊成元公墓碣銘》 윤숙(尹俶) 1612~1669. 자는 태초(太初), 호는 양진재(養眞齋),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종형 윤검(尹儉)과 함께 병자호란 때 의병을 결성하여 근왕하고자 하였다. 만년에 도이봉(道伊峯) 아래 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절구(絶句) 2수 본서 권4에 수록된 〈맑은 가을날 지강에 배를 띄우다[淸秋泛舟砥江]〉이다. 감사 1661년 6월 5일 전라 감사에 임명된 눌재(訥齋) 이태연(李泰淵, 1615~1669)이다. 《承政院日記 顯宗 2年 6月 5日》 말이 매우 간절하여 원문은 '辭意懇測'인데, 문맥을 살펴 '測'을 '惻'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신성필(愼聖弼) 1626~1674. 자는 여뢰(汝賚), 호는 경암(敬庵),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생원 신광익(愼光翊)의 아들이다. "신 효자(愼孝子)"라고 불릴 정도로 효행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성암(李惺菴) 이수인(李壽仁, 1601~1661)이다. 자는 유안(幼安), 호는 성암,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의 증손이며, 이태길(李泰吉)의 아들이다. 1624년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633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다. 졸기에 의하면, 천성적으로 관직을 좋아하지 않아 고향에 물러나 지내면서 소명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좋은 평판을 얻었다고 한다. 특히 역학(易學)을 심도 있게 연구하였다. 신성필은 그의 사위이다. 사계(沙溪)는……하였는데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사계전서》 제39권 〈의례문해(疑禮問解) 상례(喪禮) 제주(題主)〉에 보인다. 9일 원문은 '初十日'인데, 간지에 근거하여 '十'을 '九'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문생(文甥) 봉의(鳳儀) 남포의 생질인 문봉의(1638~1709)이다. 자는 성서(聖瑞), 호는 송구(松邱),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문우상(文遇尙)의 아들이다. 영암 장암리(場巖里)에 거주하였다. 제2권……보인다 본서 제2권 오언배율 〈만이성암 수인(挽李惺庵 壽仁)〉을 가리키며, 이 외에도 본서 제4권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남포가 지은 동일 제목의 만시가 보인다. 김중원(金仲源) 김오(金浯, 1617~1676)이다. 자는 중원, 호는 칠매(七梅),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명암(鳴巖) 김형(金逈)의 손자이며, 진사 김성로(金成輅)의 아들이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의 문인이다. 1660년 증광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것이……아니겠는가 원문은 '此豈可戒可懼之甚者耶'인데, 문맥을 살펴 '豈' 뒤에 '非'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오재발(吳再發) 본관은 낙안(樂安)이다. 남포의 장인 매백헌(梅栢軒) 오희일(吳喜馹)의 손자이다. 사인(士人)……이경(李䪫) 이소 형제는 본관이 전의(全義)로,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의 손자들이다. 이소는 이신의의 장남인 이정길(李貞吉)의 둘째 아들이고 이경은 셋째아들이다. 《宋子大全 권159 石灘李公神道碑銘》 이운단(李雲槫) 이소(李韶)의 큰형인 이호(李頀)의 아들이다. 자리를 펴고 앉아 원문의 '반형(班荊)'은 풀을 펴고 앉은 것으로, 길에서 옛 친구를 만나 싸리를 깔고 앉아 정담을 나눔을 말한다. 《春秋左氏傳 襄公26年》 아우 해영(海英) 남포의 종제인 김해영(金海英)이다. 호는 광곡자(廣谷子)이다. 초씨역림(焦氏易林) 전한(前漢)의 초연수(焦延壽)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점서이다. 《초공역림(焦貢易林)》 혹은 줄여서 《역림》이라고도 한다. 64괘를 겹쳐 4096개의 변괘(變卦)를 만들어 풀이하였다. 사정(四正) 《주역(周易)》의 8괘 가운데 감괘, 이괘, 진괘, 태괘로서 곧 4개의 정괘(正卦)이다. 겨울, 여름, 봄, 가을의 사시(四時)를 각각 나누어 주관한다. 기묘(己卯) 원문은 '乙卯'인데, 전후 간지를 살펴 '乙'을 '己'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소씨(邵氏)의 도(圖) 소옹(邵雍)의 〈선천도(先天圖)〉를 가리킨다. 조억(趙億) 남평 현감(南平縣監) 조억(1615~1670)이다. 자는 자수(子壽), 호는 환성자(喚醒子),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의 아들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그는 1661년 6월 29일 남평 현감에 임명되어 7월 12일에 하직하였다. 세자가……때문이었다 《현종실록(顯宗實錄)》 2년 8월 20일 기사에 의하면, 당시 네 가지의 경사 즉 숙종의 탄생과 효종의 부묘 및 장렬왕후(莊烈王后)와 인선왕후(仁宣王后)에게 휘호를 올린 일,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책례(冊禮)를 기념하여 대증광시(大增廣試)를 거행하기로 하였다. 유준(柳浚) 1584~1661. 자는 징원(澄遠), 호는 사교당(四矯堂),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유몽익(柳夢翼)의 아들이다. 1606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감찰, 판관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여증제(呂曾齊) 자는 여로(汝魯), 호는 동은(洞隱),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형조 판서 여이재(呂爾載)의 아들이다. 164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2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661년 8월 25일에 전남좌도 경차관(全南左道敬差官)으로 부임하였다. 서행(徐荇) 자는 이택(而澤), 호는 용악(龍岳), 본관은 이천(利川)이다.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되었다. 병자호란 때 사재를 다 털어 의병을 모집하여 진사 조수성(曺守誠)과 함께 여산(礪山)에 집결하였다가 청주(淸州)에 이르러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 돌아왔다. 절구(絶句) 본서 권4에 수록된 〈동지(冬至)〉이다. 11일 원문은 '十二日'인데, 간지에 근거하여 '二'를 '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외조부 나원길(羅元吉)이다. 자는 길재(吉哉),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나경(羅絅)의 아들이다. 1606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남평에 거주하였다. 1615년에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문묘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막교(古漠橋)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나주목(羅州牧) 교량(橋梁)〉에는 '古幕橋'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고막포(古幕浦)에 있는 다리로 소개되어 있다. 현재 함평의 고막천 석교(古幕川石橋)가 이것이다. 12일 원문은 '十三日'인데, 간지에 근거하여 '三'을 '二'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옛날……봉양하였다 자로(子路)가 일찍이 공자를 뵙고 말하기를 "예전에 제가 양친을 섬길 때는 항상 명아주와 콩잎만 먹는 형편이었으므로, 어버이를 위하여 백 리 밖에서 쌀을 져다가 봉양하곤 했습니다.[昔者由也, 事二親之時, 常食藜藿之實, 爲親負米百里之外.]"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孔子家語 致思》 윤경(尹儆)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귀와정(歸臥亭) 윤정훈(尹廷勳)의 둘째 아들이다. 작은 방형 평상 원문은 '小方狀'인데,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등에 의거하여 '狀'을 '牀'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腮 緦。 守 壽。 守 壽。 測 惻 十 九 非 보충 乙 己 二 一。 三 二。 狀 牀。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임인년(1662) 壬寅 1월 26일 경자(庚子) 동인괘(同人卦) 구오(九五) 소양(少陽)근래 일이 없어 고요히 앉아 심신을 수렴하는 여가에 한가로이 《송사(宋史)》를 읽어 보았다. 광종(光宗)과 영종(寧宗) 연간에 이르러 간신이 권력을 장악하고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이라고 지목하니44) 이를 살펴보고 견딜 수 없이 답답하였다. 이를 보면 오늘날의 일과 같아서 수백 년 전의 일인 줄도 모를 정도이니 책을 덮고 탄식하였다.1월 27일 신축(辛丑) 동인괘(同人卦) 상구(上九) 소양(少陽)나는 전에 인심(人心)의 오묘함은 본래 하늘에 부합하나 다만 한 겹의 사심을 뚫고 위로 천리를 통달해야 세상만사를 총괄하여 꿸 수 있고 이를 이루지 못하면 비록 모든 역사를 두루 살펴보더라도 결국은 나의 일에 유익함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역사책을 읽어 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근래 한가로이 지내는 여가에 《송사》를 두루 읽어 보니, 엄숙하여 마치 내 자신이 조정에 있으면서 위로는 군부를 따르고 아래로는 재상의 반열에 들어 안으로 각종 정무를 처결하고 밖으로 국경의 변란을 방어하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나도 모르게 정신은 안정되고 숙연해지며 외면은 단정하고 엄숙해져서 태만한 기운이 심신에 일지 않고 궤안(几案)과 당실(堂室)이 엄숙하여 마치 조정인 것 같았으니 내가 학문을 하는 데 크게 보탬이 되었다. 이는 역사책을 읽는 방법으로 삼을 만하므로 기록해 둔다.1월 28일 임인(壬寅) 임괘(臨卦) 초구(初九) 대음(大陰)동풍이 때때로 일고 비가 내릴 기미가 다분하였다. 조용히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미 지나간 세월을 때때로 되돌아보니 사소한 허물과 큰 잘못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하늘에 부끄러워졌다. 이제부터 우뚝하게 뜻을 세우고 의연하게 분발하여 옛 습속을 제거하고 날마다 새롭게 터득한다면 죽기 전에는 허물이 적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선정(先正)이 말하기를 "몸의 과실을 없애기는 쉽거니와 마음의 과실을 없애기는 어렵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몸의 과실이 있으면 사람들이 책망할 수 있거니와 마음의 과실이 있으면 신이 비난할 수 있다." 하였으니,45) 이 말은 응당 종신토록 외워야 한다.1월 30일 갑진(甲辰) 임괘(臨卦) 육삼(六三) 소양(少陽)하루 종일 조용히 지냈다. 오후에 일어나 동쪽 언덕에서 매화를 구경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절구(絶句) 한 수46)를 읊었다.듣건대 동산에 벌써 매화가 폈다 하기에지팡이 짚고 이끼 덮인 길을 한가로이 거닐었네꽃 찾는 흥취를 아무도 아는 이 없어서나 혼자 소매 가득히 맑은 향기 담아 돌아왔네봄비가 막 개니 고아한 정취가 이와 같았다.2월 14일 무오(戊午) 절괘(節卦) 구오(九五) 소양(少陽)문팔주(文八柱)가 와서 삼인도(三寅刀)를 주었다.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에 제련하여 주조한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세 번의 인일에 걸쳐 제련하여 주조한 것입니다. 금년 1월 4일이 무인일이고 16일이 경인일이고 28일이 임인일이니 이 3일에 걸쳐 이 도를 완성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임인년, 임인월, 임인일에 완성하고 또 중간에 무인일과 경인일에 걸쳐 완성한 것이다. 무(戊)는 중앙의 정색(正色)47)이고 경(庚)은 서방(西方)의 정금(正金)48)이고 임(壬)은 북방(北方)의 매서운 기운49)인 데다 5개의 인(寅)은 맹호의 신(神)이다. 그 기운들을 합하여 이 도에 모았으니 신물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장차 주옹(主翁)의 쓰임이 되려는가.2월 19일 계해(癸亥) 중부괘(中孚卦) 육사(六四)한식절(寒食節)에 큰 비바람이 치던 날씨가 오늘에야 갰다. 그러자 따사로운 기운이 충만하여 만물의 형상이 드러났다. 언덕의 매화는 반이나 떨어지고 정원의 풀은 막 돋아났다. 사물을 관찰하여 이치를 고찰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아 마음을 살피니 새롭게 터득하는 재미가 있고 옛 습속의 싹이 없어졌다. 《심경(心經)》을 강학하러 온 사인(士人)이 있어 단정히 공수(拱手)하고 조용히 읽으니 깊은 의미를 더욱 깨닫게 되었다. 가령 내가 이와 같은 기상을 길이 보존하여 본심을 보존하고 주장하여 잃지 않는다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진보할 것이다. 그러나 신체에 질병이 많아 외모가 장엄하지 않고 마음이 본래 나약하여 속의 뜻이 확고하지 않은지라 마음이 다스려지는 날은 적고 어지러운 날은 많으며 공경하여 깨어 있는 상태는 적고 혼매하고 나태한 기운은 공경하는 마음을 이김으로써 천리가 발현함은 매우 드물고 외물에 유혹됨은 매우 많게 하니 통탄스러운 마음을 이길 수 있겠는가. 마음이 발하는 바를 붓 가는 대로 기록하여 스스로 경계하는 말을 갖추는 바이다. 다만 붓을 거두고 일기책을 덮은 뒤에 이 생각이 이미 사라지고 다른 생각이 또 생겨나는 것이 두려우니 삼가고 삼가야 한다.이날 화제(花堤)의 평민이 와서 배알하고 말하기를 "본현에 적을 두고 있는 기민에게 죽을 쑤어 먹였습니다. 그런데 기민의 수가 1000명을 헤아릴 정도라서 먹을 사람들은 이미 대단히 많으나 먹을 죽은 매우 적은 데다 관아의 아전들이 또 이를 악용해 농간을 부려서 죽에다 물을 부어 불려서 먹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황달을 앓고 사망자도 매일 1, 2명씩이나 됩니다. 다른 현에서 흘러들어 온 백성들은 죽을 먹이는 것이 또 본현 사람만 못하므로 길가에 버려진 굶어 죽은 시신들이 즐비합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서 참담해졌다.이어 기억하건대 며칠 전 내가 광주 목사(光州牧使)50)와 대화할 때 굶어 죽은 기민의 시신이 낭자한 문제를 언급하자 광주 목사는 대답하기를 "이들은 비록 풍년이 들더라도 농사와 길쌈에 즐겁게 종사하지 않고 하는 일이 없으니 산다고 해도 세상에 유익함이 없고 죽는다고 해도 국가에 손해가 없습니다." 하니, 내가 이르기를 "재주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각각 자기 아들이라 말할 것입니다.51) 저들이 비록 잔민(殘民)이라 하더라도 부모 된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애휼의 정은 백성이 현명하거나 우매하거나 간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목민관이 되어서 그 언사가 이와 같고 속리(俗吏)의 견해가 늘 이런 식으로 나오니 이 곤궁한 이들이 가엾다52)고 할 만하다.2월 25일 기사(己巳) 귀매괘(歸妹卦) 구사(九四) 소양(少陽)광주(光州)의 송후(宋垕)53)가 생원, 진사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박치도(朴致道)54)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치도는 고 진사 박충정(朴忠挺)의 아들이다. 박충정의 아비55)가 부유하여 도적에게 피살되었는데 박충정은 도적이 한 마을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3년 뒤 박충정이 그의 종을 시켜 도적 집에서 세포(細布)를 구입하게 하였는데 그 서명을 보니 곧 그 아비의 수표(手標)였다. 또 다른 종을 시켜 도적을 미행하게 하였더니 가게에 의복을 팔았는데 바로 그 아비의 의복이었다. 박충정은 몰래 주관(州官)에게 가서 그 사유를 울면서 고하였다. 이에 주관이 급히 도적들을 체포하여 형신하니 도적들이 곧 자복하였으므로 그 무리를 사형에 처하였다. 박충정은 그 아비가 비명에 죽은 것을 애통해하여 그 아비가 이식을 낸 재물 문권을 가져다가 소각하였다. 또 종신토록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문을 닫고 거의 외출하지 않으니 향리에서 그 얼굴을 본 자가 드물었다.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3년 동안 염탐하여 차분하게 도리를 다함이 이러한 데까지 이르렀다. 문권을 소각하고 과거를 그만두어 영리(榮利)를 초탈하였다. 또 난적에게서 그 아비를 구하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여 종신토록 자책하여 두문불출하였다. 그러니 그 독실한 효성은 가상히 여길 만하다. 그 아들 박치도는 젊은 나이로 소과에 합격하고 재주가 있는 사람이니 사람들이 장차 원대하게 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아마 박충정이 행한 효행의 보응인 듯하다.각 읍에서 기민들에게 죽을 쑤어 주는 곳에 시신이 쌓여 있는데 본읍이 한층 심각하여 사망자가 날마다 4, 5인 이상이므로 관아 거리와 골목길에 쌓인 시신이 낭자하여 차마 보지 못할 정도로 참혹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말을 듣고서 참담해졌다.2월 29일 계유(癸酉) 규괘(睽卦) 구이(九二) 소양(少陽)현리(縣吏)가 이조의 관문(關文)을 받들고 와서 배알하였다. 그 관문의 내용을 살펴보니 '이달 9일 정사(政事)에서 신(臣) 만영(萬英)을 거두어 서용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하였으므로 제때 공무를 행하도록 독책하라.'라는 내용이었다. 성상의 하늘 같은 은혜가 미친 바이니 황감하기 그지없다.3월 2일 을해(乙亥) 규괘(睽卦) 구사(九四) 소양(少陽)스스로 생각건대 초야의 어리석고 비루한 내가 관직에 임명된 것이 지금까지 세 조정에 이르렀으나 평소의 자취는 조정과 동떨어져 있었다.56) 그런데 관직에 임명하는 과분한 은혜를 외람되이 누차 받게 되니 비록 순박함을 지키면서 분수에 만족하여 감히 무릅쓰고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항상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두렵고 부끄러워진다. 어쩌면 이로 인하여 경계하여 밤낮없이 전전긍긍 삼가면서 글을 읽고 허물을 반성하며 나태한 태도를 채찍질하여 죽기 전에 혹 비루한 기질을 변화시켜 미세하게나마 진보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만분의 일이나마 누조(累朝)의 큰 은혜에 보답하고 한편으로는 하늘이 부여한 본연의 선량한 품성을 회복한다면 행여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어 사람이 된 도리57)에 부끄러움이 없게 될 것이다. 인하여 여기에 기록하여 마음과 뼈에 새기는 경계로 삼는다.3월 4일 정축(丁丑) 규괘(睽卦) 상구(上九) 소양(少陽)하루 종일 조용히 앉아 맛이 없는 가운데의 맛을 음미하였다.58) 인하여 절구(絶句) 한 수59)를 이루니 "고요함을 주장해야 마음이 비고 전일해진다.[主靜方虛一]"라는 구절이 있다.3월 7일 경진(庚辰) 이괘(履卦) 육삼(六三)60)하루 종일 북풍이 불어 누런 먼지가 사방에 자욱하였다. 낮에 임면(任冕)이 내방하였다. 그를 통해 우암(尤庵) 송공(宋公 송시열(宋時烈))이 병조 판서에 임명되고 동춘당(同春堂) 송공(宋公 송준길(宋浚吉))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 공은 효종의 지우를 입어 작위가 지극히 높아졌으나 금상이 즉위하고 나서 칩거하며 소명에 응하여 나아가지 않은 지가 지금까지 4년이 되었다. 이번에 큰 관직에 임명되어 과연 수레에 멍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달려갈 것인지 모르겠다.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때에 하늘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아 기근이 거듭 닥친 결과 들에는 굶어 죽은 시신이 쌓여 있다. 인심은 이반되고 조정의 기강은 문란하고 대신은 연달아 사망하였다. 그러니 기왓장이 깨지듯 흙이 무너지듯 나라가 망하는 형세가 머잖아 닥칠 것이다. 초야의 천하고 어리석은 나 같은 자도 나도 모르게 한밤중에 일어나 탄식하고 의지할 데가 없는 슬픔을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선왕의 특별한 지우를 입어 작위가 이미 삼공에 오른 두 공은 오히려 오두막에서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겠는가. 말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나도 모르게 들보를 쳐다보며 장탄식을 하게 된다. 인하여 여기에 기록해 둔다.3월 8일 신사(辛巳) 이괘 구사(九四)61)날씨는 어제와 같되 북풍과 뿌연 먼지는 더욱 심하였다. 몸이 편치 않아 문을 닫고 꼼짝 않고 앉아 신심(神心)을 완양(完養)하였다. 저녁에 들으니 읍에 마련된 죽을 쑤어 주는 곳에서 하루 동안 사망한 자가 7명이나 되고 두 처를 둔 이웃 마을 백성이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는데 두 처가 달아나서 마을의 개가 그 시신을 다투어 물어뜯는데도 족인(族人)들 역시도 수습하지 않았으며, 또 두 아들을 둔 어미가 길가에서 사망하여 개 떼가 다투어 물어뜯는데도 그 아들들이 상관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참혹한 인심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가슴 아프기 그지없다. 곧 죽어 가는데도 부자와 부부조차 서로를 지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날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을까. 가슴 아프기 그지없다.3월 22일 을미(乙未) 대축괘(大畜卦) 상구(上九)남구만(南九萬) 공이 진휼 어사(賑恤御史)62)로 영남에 갈 때 상이 인견하여 인재를 발굴하라고 명하였다. 남구만은 물러나 상소63)하여 아뢰기를, "이전에 신이 조정에 김만영(金萬英)을 천거하였으나64) 상께서는 임용하려는 의사가 없었습니다. 지금 신이 비록 인재를 발굴하더라도 결국 나라에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상이 특별히 전조(銓曹)에 전지(傳旨)를 내려 조속히 관직에 붙이라고 명하였기 때문에 동몽교관을 제수한 것이고, 이조 참의 유계(兪棨) 공도 논하여 천거하였다는 말을 들었다.5월 5일 정축(丁丑) 구괘(姤卦) 초육(初六)5월은 벽괘(辟卦)65)가 구괘66)인 때이면서 이번 단오는 또한 구괘의 초육이 되니 천시(天時)와 괘기(卦氣)67)가 이와 같이 절로 서로 부합하였다. 천도(天道)의 유행은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하나의 음(陰)이 막 싹트는 초기에 대해 옛사람이 경계하는 말을 세운 것이 지극하였다. 엄동설한의 매서움은 한여름에 음(陰)이 처음 생겨나는 초기에 싹트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크게는 국가의 군자와 소인의 진퇴(進退) 소장(消長)의 기미와 은미하게는 내 마음의 천리와 인욕의 공사(公私)와 사정(邪正)의 구분과 그대로 합치하지 않음이 없다. 그 단서는 매우 은미하여 보기 어렵고 그 자라남은 천지에 가득 미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 오묘하고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가운데 하나의 음(陰)의 숙연한 기운이 여러 양(陽)의 아래에 이미 조짐이 드러났다. 돌이켜 나의 마음에서 찾아볼 때 남은 알지 못하고 나만이 홀로 아는 곳이 몇 번 음이 자라고 몇 번 양이 회복되었는지 모르겠다. 순 임금이 말한 유정(惟精) 공부68)는 이때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가만히 천시를 대하여 여기에 기록함으로써 스스로를 성찰하는 바이다.5월 19일 신묘(辛卯) 정괘(鼎卦) 구삼(九三) 대음(大陰)아침에 종가에서 연제(練祭)를 거행하였는데 나는 몸이 편치 않아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아침에 문을 열고 내다보니 푸른 소나무가 골짝에 가득하고 푸르른 나무가 섬돌을 따라 서 있었으니 옛일을 생각하여 감개에 젖는 회포를 가누지 못하였다. 나의 고조이신 진사공(進士公)69)의 생질인 박사암(朴思庵 박순(朴淳))이 선묘조(宣廟朝) 때 정승이 되어 휴가를 청해 귀향하여 외선조의 묘소를 살폈다. 진사공께서 이를 영예롭게 여겨 이곳에 재소(齋所)를 건립하여 흥경사(興慶寺)라고 명명하셨는데 정유재란 때 사찰이 병화로 무너졌다. 나의 조부공70)께서 터의 동북쪽에 작은 집을 짓고 벽송당(碧松堂)이라고 명명하셨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다. 현재의 이 벽송당은 내가 여러 족인과 함께 도모하여 건립한 것이다. 인하여 생각건대 어릴 적에 선부형(先父兄)과 여러 어른을 따라서 선대의 묘소를 왕래하며 보살피고 이곳에 나아가 묵었던 것이 완연히 어제 일 같은데 벌써 30년이 지난 옛 자취가 되었다. 가만히 깊이 생각하매 마음을 가누기 어렵다.6월71) 27일 무진(戊辰) 송괘(訟卦) 구사(九四) 소음(少陰)저녁에 문삼고(文三古)72)가 영암(靈巖)에서 와서 절하였는데 곧 나의 외가 친척 동생이다. 그가 묻기를 "형께서 전에 강진(康津)의 청련(靑蓮)을 모신 사우(祠宇)73)에 보내는 통문(通文)을 작성하여 성암(惺庵) 이수인(李壽仁)을 본사(本祠)에 배향해야 한다고 하셨다는데, 그런 일이 있습니까?" 하니,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가 이르기를, "영암의 사인(士人)들은 대부분 성암은 본사에 배향할 만한 인물이 못 될 뿐더러 권하여 배향하도록 한 것은 또한 지나친 처사라고 하면서 비난하는 말을 시끄럽게 전하고 들은 자들도 휩쓸리고 있습니다. 형께서는 그 비방에 대해 해명할 말이 없습니까?" 하니, 내가 이르기를 "그럴 만도 하겠지. 명월주(明月珠)나 야광벽(夜光璧)을 어두운 밤길을 가는 사람에게 던져 줄 경우 칼을 어루만지지 않을 사람이 없는 것은 어째서이겠나?74) 과거에 드물게 보던 것을 갑자기 대하면 마음이 떨리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자신도 모르게 대로하기 때문이니 이는 곧 인지상정이라네. 지금 이공(李公)은 궁벽한 골짜기에 깊이 은거하여 사람들이 공의 얼굴을 보는 일이 드물었고 비록 어쩌다 사람들과 접하는 경우라도 말하고 웃거나 행동하는 것이 남들과 같고 음식을 먹거나 기거하는 것이 남들과 같아서, 공을 본 자들이 평소 내심 공을 만만하게 봤다가 이제 큰일을 도모하는 나의 말을 듣고 모두들 놀랍고 괴이쩍게 여기는 것이니 또한 인지상정이네. 지금 속인들은 속으로 유자(儒者)의 생김새나 안색, 먹는 음식이나 행동은 반드시 일반 사람과는 판이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막상 만나보고 다른 사람들과 같으면 '저 사람 역시 평범한 사람이지 유자가 아니다.' 하니, 이것이 맹자(孟子)가 부득이 요순(堯舜)도 일반 사람과 똑같으셨다75)고 발언한 까닭이네. 저 이공은 만년에 깨달아 학문에 뜻을 두어 문을 닫아걸고 뜻을 구한 인물이라네. 그 행위와 언동은 본래 세속을 놀라게 하는 사업은 없었으니 오늘날 속인들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나." 하였다. 그가 이르기를 "유자는 일반 사람들과 다를 수는 없습니까?" 하니, 내가 이르기를 "깊이 은벽(隱僻)한 이치를 찾은 뒤라야 속인의 마음을 놀라게 할 수 있다거나 지나치게 괴이한 짓을 행한 뒤라야 세인의 이목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이 두 가지 말은 유가(儒家)가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일세. 그래서 군자의 말은 일반인과 같으면서도 같은 가운데 절로 같지 않은 것이 있고, 군자의 행실은 일반인과 같으면서도 같은 가운데 또한 같지 않은 것이 있네. 같은 것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같지 않은 것은 어찌 일반인의 이목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겠나. 미처 알지 못한 이상 그들이 공을 폄훼하는 것은 고의적으로 공을 폄훼한 것은 아니네." 하였다.8월 13일 계축(癸丑) 돈괘(遯卦) 초육(初六)날씨는 환하고 상쾌하며 당실은 한갓진 가운데 홀로 책상 앞에 앉거나 누워서 고서를 보았다. 절구(絶句) 한 수76)를 입으로 읊었는데 "푸르고 맑아라 가을 하늘 개니[碧淨秋天霽]"라는 구절이 있다.9월 10일 경진(庚辰) 점괘(漸卦) 육사(六四)《역도설(易圖說)》77)을 보고 느낌이 있어 이런 절구(絶句) 한 수를 이루었다.주역의 도 밖에 존재하는 천지는 없거니와복희와 문왕은 그림자와 형체를 그렸을 뿐이네모름지기 천지의 이면을 따라서괘획의 이름을 점검해 보아야 하리《주역》의 도는 천지간에 유행하여 모든 초목금수와 멀게는 고금, 가깝게는 한순간까지 한 물건, 한 시각도 역이 아닌 것이 없으니 역의 전체가 천지에 깃들어 있거니와 저 복희의 괘획(卦劃)과 문왕의 괘사(卦辭)는 다만 그림자와 형체를 그려냈을 따름이다. 상지(上智)는 괘획과 괘사가 없어도 진실로 하늘에 있는 역을 묵묵히 알 수 있고, 중지(中智) 이하의 선비 또한 괘사를 통해 괘획을 알고 괘획을 고찰하여 하늘을 알 수 있다.10월 18일78) 무오(戊午) 췌괘(萃卦) 육이(六二) 대양(大陽)금성(錦城)의 유점(柳簟)이 내방하였는데 효자 유공신(柳公信)79)의 아들이고 나에게 외가 8촌이다. 유공신은 어릴 적에 부모님을 여의자 장성해서 6년 동안 추복(追服)하고 종신토록 묘소 아래 거처하면서 조석으로 성묘하되 날씨가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그만두지 않으니 묘전(墓前)의 부복(俯伏)한 곳은 이 때문에 풀이 자라지 못하였다. 목사 이여익(李汝翊)80)이 그의 효행에 대해 듣고서 그를 내방하고 문밖에 있는 고송(孤松)을 봉하여 효자송(孝子松)이라고 명명하였다. 뒤에 조정에서 그의 효행에 대해 보고를 받고 그 문에 정표(旌表)하였다.10월 29일 기사(己巳) 관괘(觀卦) 구오(九五) 소음(少陰)종을 시켜 황두(黃豆) 4말을 가지고 시장에서 목(木)을 구입해 오게 하였으나 구입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금년 봄과 여름 사이에 굶어 죽은 시신이 언덕을 이룰 정도로 쌓인 가운데 목 1필에 대해 미(米) 2되 값을 쳐 주고 두(豆) 4되로 교환하고자 해도 사람들이 오히려 구입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그런데 몇 달 뒤 작황이 평작보다 조금 나아지니 목 1필이 조(租) 8, 9말 값이 되고 두 5, 6말에 교환되며, 물고기 1미(尾)는 곡물 몇 말 값이 되었다. 또 시장에 주육(酒肉)이 넘쳐나고 여항(閭巷) 구석구석에서 떼 지어 가무를 하니 낭비하기 좋아하고 안일해지기 쉬운 인정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현재는 농사가 비록 평작보다 조금 낫다고 해도 다년간 체납된 공채(公債)며 사채(私債)에 대해 일시에 징수를 독촉하고 대동법(大同法)을 이 시기에 또 시행하여 다년간 거두지 못한 각 관사의 공물(貢物)에 대해 또 긴급하게 규정대로 독촉하고 있다. 백성들이 먹을 식량의 여유분이 얼마 되지도 않는데 민심이 우매하여 미거(未擧)하게도 경계할 줄 모르니 국사와 민심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보인다. 서글픈 마음으로 기록한다.11월 11일 신사(辛巳) 복괘(復卦) 육삼(六三)동짓날이니 새벽에 일어나 가묘(家廟)를 참배하였다. 눈보라가 아주 매서워 하루 종일 문을 닫고 앉아 미양(微陽)을 길렀다.81) 지은 시에 "일양이 회복된 것이 천근이다.[一陽來復是天根]"82)라는 시구가 있다.12월 7일 병오(丙午) 서합괘(噬嗑卦) 육삼(六三) 대음낮에 이서(里胥)가 와서 환곡을 매우 절박하게 독촉하였다. 또 산성에 쌀을 운반하고 경대동미(京大同米)를 납부하고 관사에 땔감을 납부하는 등의 역(役)에 대해 매우 철저하게 독촉하였다. 3년 동안 큰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장기간 관곡(官穀)을 거두지 않다가 올해 농사가 조금 잘되었다고 하여 다년간 체납된 빚에 대해 일시에 징수를 독촉하고 다른 군에 옮겨 진휼하거나 산성에 운반하는 쌀과 대동의 무거운 부세를 중첩적으로 각박하게 거두고 있다. 올해 농사가 다소 풍년이 들었다고는 하나 유랑하는 백성들이 아직 안착하지 못하였고 굶주려 고달픈 고통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하였다. 올해 목화 농사가 또 너무도 시원찮아 굶주림을 겪고 난 백성들이 몸에 온전하게 옷을 갖추어 입은 자가 없다. 군현의 감옥은 꽉 차 있는데 더군다나 한정(閑丁)을 색출하여 충정(充定)하라는 명령이 아침저녁으로 성화처럼 다급하여 일족들까지 침탈을 당하는 화가 소란스럽게 여염에 가득하다. 근심에 젖어 탄식하는 얼굴빛과 목 놓아 우는 소리가 도로에 넘쳐나고 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이르기를 "연전의 기근 때 죽지 못하여 이런 온갖 재앙에 걸려들게 된 것이 한스럽구나." 한다. 아, 민생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도 은택을 베풀기를 건의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고 심지어 견감(蠲減)해 주라는 명령이 비록 성상의 하교로 내려지더라도 부세 징수가 주현에 극도의 해악을 끼치고 있으니 한탄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 있겠는가. 한갓 칠실(漆室)의 이부(嫠婦)가 한탄하는 마음83)을 품고 누추한 집에서 탄식만 할 뿐이니 말해 무엇 하랴.12월 30일 기사(己巳) 비괘(賁卦) 육이(六二) 대음(大陰)하루 종일 재계하며 지내면서 세밑을 보내었다. 올해는 봄여름에 대기근이 들어 굶어 죽은 시신이 언덕을 이룰 정도로 쌓였다. 또 농사가 비록 평작보다 조금 낫다고 해도 부세 징수가 너무도 가혹하여 여염에는 해를 넘길 거리가 없다. 대체로 여름 동안 주현에 쌓인 시신이 낭자하고 곤경에 처하여 떠도는 유민들이 도로를 가득 메웠는데도 수령은 감사에게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감사는 한갓 수령의 말만 믿고 또한 조정에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관채(官債)의 상환이나 대동법의 설행, 군정(軍丁)에 대한 다급한 수괄(搜括)로 위태롭게 독촉하고 그 화가 일족이나 이웃에까지 미쳤다. 그리하여 군현의 감옥에는 수감된 자가 시장에 몰려든 사람처럼 많고 관정 (官庭)에는 매 맞아 흘린 피가 흥건하였으니 차마 말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한 해가 장차 저물어 가는 이때 나의 한 해 동안의 몸과 마음의 일이 일상생활에 드러난 것을 묵묵히 생각해 보면 비록 큰 허물은 없었으나 은미한 사려나 학문을 진전시키는 공부, 물들어 버린 기질, 비루한 구습의 측면에서 보자면 확연하게 변화시킨 공효가 없었다. 방 안에 고요히 앉아 이미 지나간 일을 점검해 보니 나도 모르게 하늘을 우러러도 부끄럽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워진다. 여기에 기록함으로써 내년에 두려워하고 반성하는 근본으로 삼는 바이다.나는 어릴 때 서책의 면지(面紙)나 공행(空行)에 글씨 쓰는 것을 좋아하였다. 열일곱 살 때 정헌(靜軒) 고공(高公)84)을 뵈었는데【공은 선생의 부인의 외조부이고 제봉(霽峯)의 셋째 아들로 관직은 정랑이다.】 공은 예학(禮學)에 심오하고 기풍이 매우 단중(端重)하였다. 공을 모시고 이야기할 때 마침 서책의 면지에 난잡하게 쓰인 초서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 공이 대뜸 이르기를 "나는 평소 서책을 더럽히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더구나 성현의 경전은 신명처럼 공경하고 부모처럼 존경해야 하거늘 어찌 묵필(墨筆)로 긁적일 수 있단 말인가. 마음 씀이 단정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알 만하구나."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자마자 두려워지고 얼굴이 발개진 채로 지난날의 잘못을 크게 깨닫고 이때부터는 서책에 점 하나도 함부로 찍지 않았다. 아, 내가 만약 일찍 현명한 스승을 따라서 배움에 힘썼더라면 오늘에 이르러 사람됨이 이와 같겠는가. 우연히 옛일이 생각나서 서글픈 마음으로 기록한다. 正月二十六日。 庚子。 同人九五。 少陽近日無事。 靜坐收斂之暇。 閑閱《宋史》。 至光寧之間。 奸鬼用事。 指道學爲僞。 寓目不堪鬱。 見之若今日事。 不覺累百年前事。 掩卷咄嗟。二十七日。 辛丑。 同人上九。 少陽余嘗以爲人心之妙。 本與天合。 但透一重私己。 上達天理。 人間萬事。 可以總貫。 此而不得其成。 雖歷覽萬古。 竟無益於吾事。 是以余未暇及於讀史。 近者齋居之暇。 閱遍《宋史》。 肅然若身處本朝。 上應君父。 下班宰列。 內辦庶務。 外禦邊事。 自不覺其心神定肅。 外體端嚴。 惰怠之氣。 不起於心身。 而几案堂室。 儼然若朝廷。 於吾爲學。 所補大矣。 此可爲讀史法。 故記之。二十八日。 壬寅。 臨初九。 大陰東風時起。 多有雨勢。 靜坐潛心。 時或念及已往年月。 微愆大過。 不一而足。 追思不覺有愧于天。 自此庶可挺然立志。 毅然發憤。 消除舊習。 日有新得。 未死之前。 得爲寡過之人歟! 先正有言曰: "無身過易。 無心過難。" 又曰: "有身過。 人得而責之。 有心過。 神得而非之。" 此語當終身誦之可也。三十日。 甲辰。 臨六三。 少陽終日靜處。 午後。 起而看梅于東臯。 故吟一絶。 "聞道東山已放梅。 一筇閒步穿莓苔。 無人識得尋芳興。 滿袖淸香獨自回。" 春雨新晴。 雅意如此。二月十四日。 戊午。 節九五。 少陽文八柱來贈三寅刀。 寅年月日所鑄冶。 或曰: "經三寅日鑄冶者也。 今年正月初四日戊寅。 十六日庚寅。 二十八日壬寅。 經此三日而成此刀云。" 然則以壬寅年壬寅月壬寅日成之。 而中經戊寅庚寅。 戊爲中央正色。 庚爲西方正金。 壬爲北方慄烈之氣。 而五箇寅爲猛虎之神。 合其氣鍾于此刀。 其爲神物宜矣。 其將爲主翁之用乎!十九日。 癸亥。 中孚六四寒食之節。 大風雨氣候。 至今日開霽。 和氣藹然。 萬象逞露。 原梅半落。 庭草初生。 觀物察理。 反己省心。 有新得之趣。 無舊染之萌。 士人有來講《心經》者。 端拱靜讀。 益覺深味。 使我長存似此氣象。 存主不失。 其進豈可量哉? 而身多疾病。 外貌不莊。 心本懦弱。 內志不固。 治日少而亂日多。 敬惺寡而昏惰勝。 使天理之發。 一薜居州。 而外物之誘。 衆於宋人。 可勝痛哉? 心之所發。 隨筆而記。 以備警箴。 但恐斂筆掩卷之後。 此念已消而他念又生。 愼之愼之。 是日花堤平人來謁言: "本縣籍飢民設粥飼之。 其數以千計。 口旣煩多。 而所喫之粥稀而小。 官吏又因緣作奸。 和水於粥飼之。 人皆黃病。 而死者日一二人。 他縣之流民。 飼之又不如縣人。 路傍之殍相望云。" 聞之慘矣。 仍記日者。 余與光牧言。 言及飢民之餓殍相藉。 光牧答曰: "此輩雖在豐年。 不能樂業耕織。 無所事爲。 生無益於世。 死無損於國。" 余曰: "才不才。 各言其子。 彼雖殘民。 自其父母者見之。 愛恤之情。 何間於賢愚哉?" 至今思之。 爲牧民之官。 其言如此。 俗吏之見。 每出如此。 可謂哀此煢獨也!二十五日。 己巳。 歸妹九四。 少陽聞光州宋垕參生進兩科。 朴致道參進士。 致道。 故進士忠挺之子。 忠挺之父富給。 爲盜所殺。 忠挺知盜在同閭。 三年後。 忠挺。 使其僕貿細布于盜家。 見其署。 乃其父手標也。 又使他僕潛從盜。 而市衣於肆。 乃其父衣也。 忠挺。 潛往州官。 泣言其故。 急捕盜屬。 而刑之。 盜乃服之。 大戮其類。 忠挺。 痛父非命。 取其父出息資財文券焚之。 終身不赴科試。 杜門罕出。 鄕里見其面者鮮矣。 其爲父報讎。 三年伺察。 從頌盡道。 至於如此。 焚券廢科。 杜絶榮利。 痛不能救其父於亂賊之中。 終身引罪。 閉門囚跡。 其篤於誠孝。 可尙也已。 其子致道。 少年登庠。 而其才也。 人將期於遠大。 或者。 忠挺孝行之報應歟! 聞各邑飢民設粥之所。 死人相積。 本邑尤甚。 死者日不下四五人。 官街巷路。 積屍相藉。 慘不忍見云。 聞之酷矣。二十九日。 癸酉。 暌九二。 少陽縣吏奉吏曹關文來謁。 考其關辭。 以本月初九日政。 收敍臣萬英除童蒙敎官。 責以及期行公云云。 天恩所曁。 惶感無地。三月初二日。 乙亥。 暌九四。 少陽自念余以畎畝愚陋。 獲竊祿秩。 于今三朝。 平生蹤跡。 隔絶朝市。 而除拜誤恩。 猥蒙累次。 雖守愚安分。 不敢冐進。 每念及此。 不覺惶愧。 庶或仍此警惕。 夙夜兢戰。 讀書省愆。 鞭辟頹惰。 未死之前。 或有變化陋質。 進步尺寸。 一以報累朝盛恩之萬一。 一以復天賦本然之良性。 倘無愧於得名爲人之道耶? 仍記于此。 以爲銘心鏤骨之戒。初四日。 丁丑。 暌上九。 少陽靜坐終日。 有味乎無味之中。 仍成一絶。 有"主靜方虛一"之句。初七日。 庚辰。 履六11)三北風終日。 黃塵四塞。 午任冕來見。 聞尤庵宋公拜兵判。 同春堂宋公拜都憲。 二公遭遇孝廟。 位極顯隆。 今上當宁。 杜門不赴命者今四年矣。 未知今蒙大除拜。 果不俟駕耶否? 以余見之。 方此之時。 天心未豫。 饑饉荐臻。 野積餓殍。 人心解離。 朝綱陵替。 大臣連喪。 瓦解土崩之勢。 朝暮且迫。 若余之畎畝賤愚。 不覺中夜起嘆。 有瞻烏爰止之痛。 况二公蒙先王之殊遇。 位已極於台鼎。 尙能安眠於蔀屋之下耶否? 言之至此。 自不知仰樑長吁。 仍記于此。初八日。 履九12)四日氣如昨。 而北風昏塵益甚。 心氣不平。 閉戶凝坐。 完養神心。 夕聞邑中設粥所。 一日死者七人。 隣村民有兩妻者。 以染病死。 兩妻出走。 村犬爭咬其尸。 而族人亦不收。 又有兩子母死于道傍。 群犬爭咬。 而其子不顧云。 人心之慘至此耶? 痛痛。 蓋以死亡將迫。 父子夫妻。 亦不相保故也。 古亦有如是事否? 痛痛。二十二日。 乙未。 大畜上九聞南公九萬以賑恤御史13)往嶺南。 上引見。 命以採訪人才之意。 九萬退。 而上疏言: "臣曾薦金萬英于朝。 自上無採用之意。 今臣雖採訪人才。 竟何補於國哉?" 上特下旨銓曹。 命斯速付職。 故有敎官之除。 而吏曹參議兪公棨。 亦有論薦云矣。五月初五日。 丁丑。 姤初六五月在辟卦爲姤。 今端午又爲姤之初六。 天時卦氣。 自相符合如此。 天道流行。 安可誣也? 一陰初萌之始。 古人之設戒也至矣。 氷雪融寒之慘。 未嘗不萌於夏半陰始之初。 則大而國家君子小人進退消長之幾。 微而吾心天理人慾公私邪正之判。 無不合。 其端甚微而難見。 其長漫天而極地。 可不懼哉? 今日妙冥難測之中。 一陰肅然之氣。 已兆於衆陽之下矣。 反而求之吾心。 人所不知。 己所獨知之地。 未知幾姤而幾復也。 舜之所謂惟精工夫。 可用力於此際矣。 嘿對天時。 用識于此以自省云。十九日。 辛卯。 鼎九三。 大陰朝。 宗家行練祭。 余以氣未平不能參祭。 朝開戶視之。 蒼松滿壑。 綠樹循除。 不勝感古之懷。 蓋我高祖進士公甥侄朴思庵。 作相於宣廟朝。 乞暇還鄕。 參省于外先墓山。 進士公榮之。 作齋所于此地。 仍名曰"興慶寺"。 丁酉之亂。 寺毁于兵火。 我王父公構小屋于基東北。 名之以碧松堂。 歲久而毁。 此室則余與諸族人謀建者也。 仍念兒時陪先父兄諸丈。 往來參省于先墓。 仍就宿此地。 完然昨日事。 而已作三十年舊跡矣。 俯仰思惟。 難以爲懷也。二14)十七日。 戊辰。 訟九四。 少陰夕文三古自靈巖來拜。 卽余外眷戚弟也。 問曰: "戚兄曾作通文抵康津靑蓮祠宇。 喩以李惺菴壽仁配享於本祠云。 然耶否?" 曰: "然。" 曰: "靈巖士人。 多以有惺菴不足配於本祠。 勸而配之。 亦過矣。 口舌喧傳。 聞者附和。 戚兄其無以解其誚乎?" 曰: "固矣。 明月夜光。 以暗投人。 人莫不按劍。 何哉? 曾所罕見。 猝然遇之。 心駭目動。 不覺怒魄。 乃人之情也。 今李公深居窮谷。 人罕其面。 雖或與人接者。 言笑動靜同於人。 飮食起居同於人。 見之者心忽之於平日。 今聞余大言。 莫不驚怪。 亦常情也。 今俗人之心。 以爲儒者之形貌顔色。 飮食事爲。 必頓別於衆人。 及見之。 與別人同。 則曰: '彼亦凡人。 非儒者也。' 此孟子之所以不得已而發堯舜與人同之之語也。 彼李公晩悟志學。 杜門求志之人也。 其事爲言動。 固無驚俗動世之事業。 則俗人今日之此言。 不亦宜乎?" 曰: "儒者。 不能不同於人哉?" 曰: "深求隱僻之理。 然後可以驚俗人之心。 過爲詭異之行。 然後可以動世人之耳。 此二者。 儒家之諱言者也。 是以君子之言。 同於衆人。 而所同之中。 自有不同者。 君子之行。 同於衆人。 而所同之中。 亦有不同者。 其所同者。 人人之所可見。 其不同者。 則豈凡耳目之所可瞻聆者也? 旣不能及知。 則其毁之也。 非故毁之也。"八月十三日。 癸丑。 遯初六天氣明爽。 堂室蕭然。 獨坐牀上。 或臥看古書。 口吟一絶。 有"碧淨秋天霽"之句。九月初十日。 庚辰。 漸六四看《易圖說》。 感成一絶曰: "易外無天地。 羲文畫影形。 須從天地裏。 點檢畫中名。" 蓋大易之道。 流行於天地之間。 一草一木。 一禽一獸。 遠之古今。 近之瞬息。 無一物一時之非易。 則易之全體。 寓於天地。 而彼羲之畫文之辭。 特畫出影形而已。 上智不待畫與辭。 而固可默識在天之易矣。 中智以下之士。 亦可因其辭而知畫。 考其畫而知天矣。十月初15)八日。 戊午。 萃六二。 大陽錦城柳簟來見。 孝子公信之子。 於吾外眷八寸也。 公信少喪父母。 及長六年追服。 終身居于墓下。 晨昏省墓。 寒暑不廢。 墓前俯伏處。 草爲之不生。 太守李汝翊。 聞其孝。 而往見之。 封其門外孤松。 名曰"孝子松"。 後朝廷聞其行。 旌表其門。二十九日。 己巳。 觀九五。 少陰使奴將黃豆四斗買木于市。 不得買而來。 今年春夏間。 積莩成邱。 一匹之木。 直米二升。 易豆四升。 而人猶恐不及買。 數月之後。 得農稍稔。 一匹之木。 直租八九斗。 易豆五六斗。 一尾之魚。 其直數斗。 市場之間。 酒肉狼藉。 閭巷之曲。 歌舞成群。 人情之好糜費而易怠安。 一至此耶! 今農雖曰稍稔。 積年逋欠。 公私之債。 一時懲督。 而大同法又行於此時。 各司積年未捧之貢。 程董又急。 民之所食所餘者幾何。 而民心愚闇。 昏不知戒。 國事民心。 似無可爲者。 悵然而記。十一月十一日。 辛巳。 復六三冬至日也。 晨起。 參拜于家廟。 風雪慘烈。 終日閉關而坐。 以養微陽。 有"一陽來復是天根"之句。十二月初七日。 丙午。 噬嗑六三。 大陰午里胥來。 督還糓甚切。 且以山城運米,京大同納米,官司納柴等役。 董刻甚至矣。 蓋以三年大侵。 久未收官糓。 以今年小稔。 積年逋欠。 一時懲督。 而他郡移賑及山城運米大同重賦。 層疊刻捧。 今農雖曰稍登。 而流徙之民。 尙未安集。 飢困之毒。 尙未蘇健。 而今年綿種之農。 又極不實。 飢餘之民。 體無完衣者。 郡縣之獄。 充塞矣。 加以括充閑丁之令。 朝暮星急。 一族侵漁之禍。 擾塡閭里。 愁嘆之色。 號泣之聲。 道路相望。 人人相謂曰: "恨不死於年前之飢。 而逢此百罹也。" 嗚呼! 民事至此。 國將奈何? 而無一人建白施恩者。 至有蠲減之命。 雖下於聖敎。 而懲輸極毒於州縣。 可勝嘆哉! 徒懷柒室嫠婦之嘆。 而咄咄於蓬蓽之下。 謂之何哉?三十日。 己巳。 賁六二大陰終日齊居。 以送舊歲。 是歲也春夏大饑。 積殍成邱。 農雖稍稔。 賦斂極苛。 閭里之間。 卒歲無資。 蓋夏間州縣積尸相藉。 流民㒹徙者。 塡塞道路。 而守令不以實報于監司。 監司徒信守令之口。 亦不以實聞于朝廷。 是以官債之償。 大同之設。 括丁之急。 水火督董。 延及于一族。 隣里郡縣之獄囚者如市。 官司之庭。 杖血淋漓。 不忍言矣。 一年將暮。 默念余一年身心上事。 著之于日用事爲者。 雖無大過。 思慮之微。 進學之工。 氣質之染。 舊習之陋。 未有能廓然變化之效。 靜坐一室。 點檢已往之事。 不覺仰愧俯怍。 持筆于此。 以爲明年恐懼修省之本云。 余少時。 於書冊面紙。 或空行處。 好寫文字。 年十七歲。 拜靜軒高公。【公卽先生內夫人外祖。 霽峯第三子。 官正郞。】公深於禮學。 氣甚端重。 陪話之際。 適見書冊面紙有雜書草字。 公遽曰: "吾平生甚惡點汚書冊。 况聖經賢傳。 敬之如神明。 尊之如父母可也。 其可以墨筆塗抹耶? 足見其用心不端矣。" 余聞言卽懼然。 面發赤色。 大覺前日之非。 自是。 未嘗妄加一點於書冊。 嗟夫! 使余早從明師而勉學。 則至于今日。 作人如此哉? 偶思古事。 愀然而記。 광종(光宗)과……지목하니 간신 한탁주(韓侂胄)가 주희의 학문을 위학(僞學)이라 하여 금단한 이른바 경원당금(慶元黨禁)의 사건을 말한다. 영종 경원 연간에 한탁주와 조여우(趙汝愚)가 권력 쟁탈전을 벌일 적에 주희 등이 조여우 편을 들었는데, 한탁주가 득세한 뒤 승상 조여우 이하 59인을 모조리 몰아내는 한편, 도학을 위학이라고 규정하고 일절 금지하도록 하였다.《宋史 권434 蔡元定列傳, 권474 韓侂胄列傳》 선정(先正)이……하였으니 앞 구절은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권12 〈관물편(觀物篇)〉에 보인다. 뒤 구절은 정확한 출전을 찾을 수 없다. 다만 〈관물편〉에 "입으로 말하는 것이 몸으로 행하는 것만 못하고, 몸으로 행하는 것이 마음을 다하는 것만 못하다. 입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고 몸으로 행하는 것은 사람들이 볼 수 있고 마음을 다하는 것은 신만이 아니 사람의 총명도 오히려 속일 수 없는데 하물며 신의 총명에랴.[言之于口, 不若行之于身, 行之于身, 不若盡之于心, 言之于口, 人得而聞之, 行之于身, 人得而見之, 盡之于心, 神得而知之. 人之聰明, 猶不可欺, 況神之聰明乎?]"라는 구절이 있는데 《심경부주(心經附註)》 권1 불원복장(不遠復章)에 인용되어 있다. 또 《장자(莊子)》 제23편 〈경상초(庚桑楚)〉에 "사람들이 보고 있는 데서 불선을 저지르는 자는 사람들이 그를 처벌하고, 사람들이 보지 않는 데서 악을 행한 자는 귀신이 처벌한다.[爲不善乎顯明之中者, 人得而誅之, 爲不善乎幽閒之中者, 鬼得而誅之.]"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를 인용한 첩산 사씨(疊山謝氏)의 말이 《심경부주》 권1 시이우군자장(視爾友君子章)에 나온다. 절구(絶句) 한 수 본서 권4에 수록된 〈동쪽 언덕에서 매화를 구경하다[看梅東臯]〉이다. 무(戊)는 중앙의 정색(正色) 정색은 간색(間色)의 반대말로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 다섯 가지 순정한 오방색(五方色)을 가리킨다. 천간(天干) 무는 황색에 해당하며 황색은 오방색 가운데 중앙에 위치한다. 경(庚)은 서방(西方)의 정금(正金) 천간 경은 오방색 가운데 백색에 해당하며, 백색은 서쪽에 위치한다. 또한 오행으로 보면 정금에 속한다. 임(壬)은……기운 천간 임은 오방색 가운데 흑색에 해당하며, 흑색은 북쪽에 위치한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승정원일기》 현종 2년 7월 12일 기사 및 《광주읍지(光州邑誌)》 등을 참조할 때 이광재(李光載)라는 인물로 보인다. 자는 계장(季章), 본관은 부평(富平)이다. 진사시와 문과에 합격하였다. 재주가……것입니다 이 말은 안연(顔淵)이 죽었을 때 그 아버지 안로(顔路)가 공자의 수레를 팔아서 외관(外棺)을 만들기를 청하자, 공자가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 즉 공자는 "재주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또한 각각 자기 아들이라 말할 것이니, 내 아들 리가 죽었을 때에도 관만 있고 외관은 없었다.[才不才, 亦各言其子也. 鯉也死, 有棺而無槨.]"라고 하였다. 《論語 先進》 남포는 어리석은 백성들이라고 하더라도 보살펴 주어야 하는 존재라는 뜻으로 이 말을 인용하였다. 이……가엾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정월(正月)〉에 "부자들은 괜찮거니와, 이 곤궁한 이들이 가엾다.[哿矣富人, 哀此煢獨.]"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이 구절은 다시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도 인용되어 있다. 송후(宋垕) 이 당시 생원시와 진사시 방목(榜目)에 의하면 후(垕)가 후(堠)로 되어 있다. 자는 자후(子厚), 본관은 홍주(洪州)이다. 송수(宋燧)의 아들로 1608년에 출생하여 광주에 거주하였다. 박치도(朴致道) 1642~1697. 자는 학계(學季), 호는 검암(黔巖),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1662년 증광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광주에 거주하였다. 박충정의 아비 박언감(朴彦瑊, 1578~1644)이다. 자는 시헌(時獻)이다. 관직에……있었다 남포는 인조 때 내시교관(內侍敎官), 효종 때 세마(洗馬), 현종 때 동몽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사람이라는……도리 《심경부주(心經附註)》 서문(序文)에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어 삼재에 참여하여 만 가지 조화를 낼 수 있는 것은 본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人之得名爲人, 可以參三才而出萬化者, 以能不失其本心而已.]"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맛이……음미하였다 경전(經傳)을 읽어 음미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절구 한 수 본서 권1에 수록된 〈주정(主靜)〉이다. 육삼(六三) 원문은 '九三'인데, 전후 간지와 효의 순서에 근거하여 '九'를 '六'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구사(九四) 원문은 '六四'인데, 전후 간지와 효의 순서에 근거하여 '六'을 '九'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진휼 어사(賑恤御史) 원문은 '賑恤御使'인데, 일반적인 용례에 근거하여 '使'를 '史'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상소 《승정원일기》 현종 3년 2월 2일 기사에 부사과 남구만이 올린 이 상소의 대개(大槪)가 보인다. 김만영(金萬英)을 천거하였으나 남구만의 문집인 《약천집(藥泉集)》 제3 〈인성변진소회소(因星變陳所懷疏)〉에 남구만이 남포와 담양(潭陽)의 유학(幼學) 유진석(柳震錫)을 천거한 내용이 보인다. 벽괘(辟卦) 벽(辟)은 임금[君]이란 말로, 주관 혹은 통솔의 의미이다. 1년 12개월을 《주역(周易)》의 괘에 배치시키는 것으로, 자월(子月)인 11월은 양(陽) 1획인 복괘(復卦), 축월(丑月)인 12월은 양 2획인 임괘(臨卦), 인월(寅月)인 정월은 양 3획인 태괘(泰卦), 묘월(卯月)인 2월은 양 4획인 대장괘(大壯卦), 진월(辰月)인 3월은 양 5획인 쾌괘(夬卦), 사월(巳月)인 4월은 양 6획인 건괘(乾卦), 오월(午月)인 5월은 음(陰) 1획인 구괘(姤卦), 미월(未月)인 6월은 음 2획인 돈괘(遯卦), 신월(申月)인 7월은 음 3획인 비괘(否卦), 유월(酉月)인 8월은 음 4획인 관괘(觀卦), 술월(戌月)인 9월은 음 5획인 박괘(剝卦), 해월(亥月)인 10월은 음 6획인 곤괘(坤卦)에 각각 배치시키는 것이다. 구괘 이는 '음이 처음 생겨 장차 자라는[陰始生而將長]' 괘이다. 괘기(卦氣) 《주역》의 괘를 사시(四時), 월령(月令), 기후(氣候) 등에 배치한 것을 말하며, 서한(西漢)의 맹희(孟喜)가 처음 창안하고 경방(京房)이 발전시켰다. 유정(惟精) 공부 유정은 정(精)하게 살핀다는 의미이다. 《심경부주》 권1 서인심도심장(書人心道心章)에 순임금이 말한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하니 정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야 진실로 중도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나의 고조이신 진사공(進士公) 김두(金㪷)이다. 자는 가균(可均), 호는 모암(慕庵), 본관은 당악(棠岳)이다.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나주(羅州)의 진사 11명과 함께 조광조를 신원하는 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조부공 김원록(金元祿)이다. 사암(思庵) 박순(朴淳)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으로 일가가 화를 입게 되자 이로부터 과거를 단념하였다고 한다. 6월 원문에는 없는데, 간지에 근거하여 '六月'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문삼고(文三古) 1633~1699. 자는 태초(太初),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문현(文玹)의 아들이다. 강진(康津)의……사우(祠宇) 강진 서봉서원(瑞峯書院)을 가리킨다. 청련(靑蓮)은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의 호이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이수인(李壽仁)은 이후백의 증손이다. 명월주(明月珠)나……어째서이겠나 이는 《사기(史記)》 〈추양열전(鄒陽列傳)〉의 "신은 들으니, 명월주나 야광벽을 어두운 밤 길 가는 사람에게 던져 줄 경우, 칼을 어루만지며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까닭 없이 보물이 앞에 이르기 때문입니다.[臣聞明月之珠夜光之璧, 以闇投人於道路, 人無不按劍相眄者, 何則? 無因而至前也.]"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는 이수인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주는 이가 세상에 없다는 의미이다. 요순(堯舜)도……똑같으셨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보인다. 절구(絶句) 한 수 본서 권1에 수록된 〈책을 보다[看書]〉이다. 역도설(易圖說) 남송 오인걸(吳仁杰)이 지은 책으로, 《주역(周易)》의 괘와 효의 변화 및 점치는 법을 그림으로 설명하였다. 18일 원문은 '初八日'인데, 간지에 근거하여 '初'를 '十'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유공신(柳公信) 1579~1655. 호는 송계(松溪),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이여익(李汝翊) 1591~1650. 자는 비경(棐卿), 호는 수봉(秀峯),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이응원(李應元)의 아들이다. 1649년(인조27)에 나주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이듬해 재임 중 관소에서 사망하였다. 미양(微陽)을 길렀다 미양은 곧 동지에 일양(一陽)이 처음 생기는 아주 미약한 양을 가리키는데, 그것을 안정시켜 기른다는 뜻이다. 《주역(周易)》 복괘(復卦) 상사(象辭)에, "우뢰가 땅속에 잠재한 것이 복이니, 선왕이 그것을 인하여 동짓날에 관문을 닫는다.[雷在地中復, 先王以, 至日閉關.]" 하였는데, 이에 대해 정이(程頥)는 "양이 처음 생겨남에 매우 미미하니 안정한 뒤에야 자랄 수 있다. 그러므로 복괘의 상사에 '선왕이 이것을 보고서 동짓날에 관문을 닫는다.' 하였다.[陽始生, 甚微, 安靜而後能長. 故復之象曰'先王以, 至日閉關.']"라고 하고, 주희는 "하나의 양이 처음 회복함에 양기가 매우 미미하니, 수고롭게 동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안정하여 미미한 양을 길러야 하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선한 마음이 막 싹트려고 할 적에 바로 안정하여 기르고자 하여야 비로소 성대해지는 것과 같다.[一陽初復, 陽氣甚微, 不可勞動. 故當安靜以養微陽, 如人善端方萌, 正欲靜以養之, 方能盛大.]" 하였다. 일양이……천근이다 본서 권5에 수록된 〈동짓날에 느낌이 있어 읊다[長至日有感]〉에 보이는 구절이다. 천근(天根)은 소옹(邵雍)의 말인데 그의 시 〈관물음(觀物吟)〉에 "건이 손을 만난 때 달의 굴을 보게 되고, 지가 뇌를 만난 곳에 하늘의 뿌리를 볼 수 있다.[乾遇巽時觀月窟, 地逢雷處見天根.]" 하였다. 천근은 양효(陽爻) 하나가 맨 밑에서 생겨난 지뢰복(地雷復)괘를 뜻한다. 칠실(漆室)의……마음 분수에 지나친 근심을 뜻하는 말이다. 춘추 시대 노(魯)나라 칠실이라는 읍에 과년한 처녀가 자신이 시집가지 못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나라의 임금이 늙고 태자가 어린 것을 걱정하여 기둥에 기대어 울자 이웃집 부인이 비웃으며 "이는 노나라 대부의 근심이지 그대가 무슨 상관인가."라고 하였다. 《列女傳 권3 漆室女》 정헌(靜軒) 고공(高公) 고순후(高循厚)이다. 자는 도상(道常), 호는 정헌,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아들이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남포의장인인 매백헌(梅栢軒) 오희일(吳喜馹)이 그의 사위이다. 그는 고경명의 넷째아들인데 삼남인 고준후(高遵厚)가 일찍 사망한 관계로 본서에서 셋째아들이라고 일컬은 듯하다. 九 六 六 九 使 史 앞에 六月을 보충해야 함 初 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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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년(1663) 癸卯 2월 8일(정미) 임괘(臨卦) 육삼(六三)3경(更) 4점(點)에 일어나 손과 얼굴을 씻었다. 공복(公服)을 입고 홀(笏)을 쥐고 성묘(聖廟)에 나아가 석전례(釋奠禮)를 행하였다. 늘어선 성현의 모습이 엄숙하여 향을 피우고 술을 붓자니 양양(洋洋)히 앞에 계신 기상을 뵌듯하여 내 마음이 저절로 공경스러워졌다. 예를 마치고 문을 나서니 날이 이미 새벽이 되었다. 공복을 벗고 다시 재(齋)로 나아가 앉았다. 한낮에 생도들과 준여(餕餘)를 조금 마시고 돌아왔다.7월 13일 무인(戊寅) 승괘(升卦) 상육(上六) 대양(大陽)광주 부윤(廣州府尹)85) 원두추(元斗樞)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사람은 평소에 혹리(酷吏)라고 일컬어졌다. 금성(錦城)에서 광주(廣州)로 옮겨 제수되자 이졸(吏卒)들이 형벌로 죽은 자가 많았다. 적도(賊徒)들이 한밤중에 도성(都城)에서 소리치며 그가 금성에 있을 때 보낸 사운선(私運船) 2척이 막 경강(京江)에 정박했다고 하자 잡아오라는 명이 비로소 내려졌다. 원두추는 은밀히 먼저 듣고 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그의 사인(舍人)은 그가 상한(傷寒)을 앓았는데 땀을 내지 않아 죽었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 말은 길가에 떠도는 소문이라 믿기 어렵지만 두 번 세 번 거듭 전했기 때문에 우선 적어 둔다. 다만 금성 사람들은 백성마다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통쾌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그가 크게 인심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9월 4일 무진(戊辰) 둔괘(遯卦) 육이(六二)금성 현감(錦城縣監) 윤부(尹)가 대간(臺諫)에게 논척을 당해 돌아가려 한다고 들었다. 공은 관직을 맡은 지 몇 달 만에 치적(治績)으로 명성이 크게 일어났다. 백성들과 조례를 정하고 권계(勸戒)를 게을리하지 않아 고을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정언(正言) 소두산(蘇斗山)86)이 공의 나이가 많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고 탄핵하였으나 상께서 윤허하지 않으시자 사간원의 계사(啓辭)가 그치지 않았다. 공은 기별을 듣고 즉시 수레를 내어 돌아갔다. 고을 사람들이 문을 지키고 수레를 붙잡아 문을 나서지 못하였다고 한다.봄 무렵 무관(武官) 홍우익(洪宇益)이 영암(靈巖)을 다스리면서 치적으로 인한 명성이 도내에 으뜸이었는데 탄핵을 당해서 떠나고, 윤공도 엄중한 탄핵을 당하였다. 사람들이 노래하기를 "좋은 수령이라는 명성을 보존하고자 한다면 백성들에게 학정을 펼치는 것이 상책이라네. 그대는 홍우익과 윤부를 보게나. 백성을 사랑하면 엄중한 탄핵을 당한다네.[欲保美守令 虐民爲上策 君看洪與尹 愛民被重劾]"라고 하였다.10월 5일 기해(己亥) 건괘(蹇卦) 구삼(九三) 대양(大陽)경차관(敬差官) 이관징(李觀徵)이 오늘 현에 들어왔다고 들었다. 올해 재해로 인한 손실이 참혹하였지만 나라에서 재결(災結)을 처리하는 정사를 엄격히 금지하였다. 관리들이 동정을 살피느라 두려워하여 과반(過半) 정도 재해로 손상을 입은 화곡(禾糓)은 전혀 재결에 넣지 않았고 10분의 7 이상인 경우만 겨우겨우 장부에 적어두었다. 본읍의 재결이 겨우 700여 결(結)이었지만 감사는 오히려 재전(災田)이 지나치게 많다고 화를 내고 재해로 손상을 입은 것이 10분의 8 이하인 경우는 모두 제외하였다. 백성들의 실망이 마치 부모를 잃은 듯하였다. 나머지 다른 고을도 모두 그러하였다. 가을 무렵 혹독한 가뭄의 여파로 주상께서 특별히 애통한 마음을 담은 하교를 내려 백성을 위로하시니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히 솟아나 듣는 자들이 감격하고 기뻐하였다. 하지만 백성을 보호하는 실제 일이 이처럼 공허하니 이른바 지극한 은택이 백성들에게 이르지 않는 것이 어찌 우리 임금의 잘못이겠는가. 통탄스럽다.12월 30일 계해(癸亥) 수괘(隨卦) 상육(上六)이날은 제석(除夕)이다. 한 해의 일을 하나하나 헤아려 보니 날씨가 절기에 맞지 않아 삼농(三農)이 여물지 못하여 백성이 먹고살기가 어려웠고 포흠(逋欠) 난 것을 갚으라는 독촉에 민심이 흉흉하였다. 재이(災異)가 자꾸 발생하고 우역(牛疫)이 매우 심하고 조수(鳥獸)가 저절로 죽으니 이것이 무슨 영향일까?돌이켜 내 몸과 마음을 점검해 보았다. 1년 동안 행위가, 이 마음은 고요한 때보다 흔들리는 때가 많았고 안정된 순간보다 혼란스러운 순간이 많았으며 일을 하는 순간마다 겉으로 드러났다. 집안을 다스리는 예법도 남을 대하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허물은 없었더라도 자질구레한 생각이나 혼자 한가하게 있을 때면 간혹 하늘에 부끄럽고 사람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평소에 힘을 쓴 것이 한 치의 마음과 일곱 자의 몸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위로 하늘의 뜻을 받들고 주변 사람에게 물어서 바로잡는 일에도 여전히 집안 가득한 부끄러움이 있다.삼가 죄의 근원을 살펴보자면, 그 싹은 실로 입심(立心)이 견고하지 못하고 기질(氣質)에 편협함이 많아 찌꺼기를 없애지 못하고 외물(外物)에 쉽게 이끌리는 데서 나오고, 병의 근원이 오로지 심지(心志)가 분명하지 않고 이치를 정밀하게 밝히지 못한 데 있어 선악의 기미에 대해서 용맹하게 표준을 수립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묵묵히 헤아려 보건대 내년이면 41세가 되니 척연(惕然)함이 심해져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二月初八日。 丁未。 臨六三三更四點。 起坐澡洗。 服公服執笏。 入就聖廟。 行釋奠禮。 聖賢列位肅穆。 上香酹爵。 若或見乎洋洋如在之氣象。 此心自然主敬莊一矣。 禮畢出門。 日已昧爽。 釋公服。 復就齋坐。 日午與諸生。 小酌餕餘而歸。七月十三日。 戊寅。 升上六。 大陽聞廣州府尹元斗樞之死。 是人素稱酷吏。 自錦城移拜廣州。 吏卒多死於刑。 賊夜呼都城。 告其錦城時私運船二隻。 方泊京江。 拿命始下。 斗樞潛先聞之。 仰藥自死。 其舍人稱傷寒不汗而死云。 此言塗聽難信。 而傳之者再三。 故姑書之。 但錦城之人。 一夫一婦。 聞其死。 無不快之。 可見其大失人心矣。九月初四日。 戊辰。 遯六二聞錦城縣監尹。 被臺論將歸。 公莅官數月。 治聲大起。 與民條約。 勸戒不怠。 邑人大悅。 正言蘇斗山劾年老不治。 自上不允。 而院啓不止。 公聞奇。 卽駕而歸。 邑人守門擁車。 不得出門云云。 春間武官洪宇益宰靈巖。 治聲最于道內。 被劾而去。 尹公又被重劾。 人謠曰: "欲保美守令。 虐民爲上策。 君看洪與尹。 愛民被重劾云云。"十月初五日。 己亥。 蹇九三。 大陽聞敬差官李觀徵。 今日入縣。 今年災損慘矣。 而國家切禁用災。 官吏望風畏慴。 禾糓過半災傷者。 全不入災。 七分以上者。 僅僅置藉。 本邑之災。 才七百餘結。 而監司猶且怒其災田之過多。 八分災以下。 盡汰之。 民望如喪。 其他餘邑盡然矣。 秋間苦旱之餘。 自上特下哀痛之敎。 慰問生民。 藹然生意之發見。 聞者感悅。 而至於保民實事。 如此空踈。 則所謂至澤不止於民者。 豈吾君之過歟? 可歎!十二月三十日。 癸亥。 隨上六是日除夕。 歷計一年之事。 雨暘不節。 三農不登。 民食艱難。 逋欠督償。 人心洶懼。 災異層出。 牛疫酷甚。 鳥獸自斃。 此何影也? 反檢吾身心上。 一年事爲。 此心動多於靜。 亂多於治。 發之於事爲之間。 家法之際。 雖無對人形顯之過。 一念之微。 閒居之獨。 或未免仰愧俯怍之擧。 則平生用力。 不出於一寸之心七尺之軀。 而對越在上。 質之在傍。 猶有屋滿之羞。 按伏罪源。 其萌實出於立心不堅。 氣質多偏。 査滓未化。 外物易牽。 病根專在於心志未明。 燭理不精。 善惡之機。 不能勇立標準故也。 默計明年四十一歲。 可不惕然甚懼哉! 광주 부윤(廣州府尹) 원문은 '廣州府君'인데, 문맥을 살펴 '君'을 '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소두산(蘇斗山) 1627~1693. 자는 망여(望如), 호는 월주(月洲),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울분 끝에 병사하였다. 서인 집권하에서도 처신이 근신하지 못하여 공의(公議)에 버림받았고, 향촌에 있을 때는 무단(武斷), 수령 재임 때에는 탐관오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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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년(1664) 甲辰 1월 5일 무진(戊辰).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 소음(少陰)유생 홍일뢰(洪一耒)가 말하기를 "지난해 12월 24일에 중수하고 봉안하는 일을 의논하기 위한 황산 서원(黃山書院)의 모임에 저도 가서 참여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서원에서는 이전에 이 문원(李文元 이언적(李彦迪)), 이 문성(李文成 이이(李珥)), 성 문간(成文 성혼(成渾)) 세 분 선생을 배향하였다. 이번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중수하는 일을 주관하여 이문순(李文純 이황(李滉))과 조문정(趙文正 조광조(趙光祖)) 두 분 선생을 주향(主享)으로 하였다. 함께 모인 양호(兩湖) 지방의 인사가 200여 인인데 송 판서[송시열]가 수헌(首獻)하고 참의 이유태(李惟泰)가 부헌(副獻)하고 공주 목사(公州牧使) 정영한(鄭英漢)이 종헌(終獻)하였다. 송시열, 이유태 두 공은 심의(深衣)에 복건(幅巾)을 쓰고 제례를 거행하고 정군(鄭君)은 시복(時服) 차림으로 일을 거행하였다고 한다.1월 21일 갑신(甲申) 기제괘(旣濟卦) 구삼(九三) 소양(少陽)새벽에 일어나 제례를 행하였다. 이 지방은 선군자(先君子)께서 나고 자란 마을이라서 어버이의 넓고 큰 은혜가 평소보다 만 배나 크게 느껴진다. 이날 선조의 산소를 하나하나 배알하였고 벽송당(碧松堂)에서 형제와 조카들이 모여 하루를 묵었다.1월 27일 경인(庚寅) 가인괘(家人卦) 구삼(九三) 소양(少陽)서울의 사인(士人) 이로(李潞)가 나를 만나러 왔다. 전 이조 판서 조경(趙絅)의 외손자인데 말솜씨가 온당하여 예전에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윤휴(尹鑴), 윤선도(尹善道), 허목(許穆)이 예를 논한 시말을 얘기할 수 있었다. 그의 외조부 역시 한마디 말을 한 뒤에 당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았는데 때마침 포천(抱川)의 촌사(村舍)로 물러나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또 말하기를, "숙부인 이군 성징(李君聖徵)이 현재 동래(東萊)의 이군 성징 임소(任所)에 있는데, 전해 겨울 진봉(進封)하는 행렬을 영솔해 온 왜인(倭人)을 접대할 때 주량을 다투느라 도리를 어기고 교만하였다. 이군이 시종일관 굽히지 않자 왜인이 검을 뽑아 난동을 부려 부산 첨사(釜山僉使)와 부사(府使)의 군관(軍官) 이하는 모두 달아나 숨고 하리(下吏) 1인만 죽음을 무릅쓰고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일이 진정되자 달려가 보고하였고, 첨사는 잡혀가 곧장 옥에 갇혔다."고 하였다.2월 2일 갑자(甲子) 손괘(損卦) 상구(上九) 소양(少陽)읍리(邑吏)가 다음 날 수령인 채후(蔡侯) 충립(忠立)의 여츤(旅櫬 객사한 사람의 널)이 내일 발인을 하여 돌아온다고 고하였다. 가서 만났더니 상주가 만사(挽詞)를 부탁하기에 그를 위해 율시 한 편을 지었다. 대체로 채후는 꾸밈이 없고 관대하고 검소하였지만 정사(政事)에는 재주가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가 사납지 않은 것은 좋아했지만 융통성이 없는 것을 단점으로 꼽았다. 상(喪)을 치를 때 고을 사람인 윤선갑(尹先甲), 홍종화(洪鍾華)가 치상(治喪)을 주관했는데, 베로 만든 이불과 짧은 바지 외에는 관아에 보관된 옷이 없어 염관(斂棺)할 방도가 없었다. 향인(鄕人)들이 함께 부의(賻儀)를 보내 주어 이불과 바지를 사서 염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만사를 지었는데, 3, 4구는 "정사에 부드러운 채찍을 사용하여 은혜를 우러러보았으며, 관을 채울 옷이 없으니 비로소 청렴했음을 알겠구나.[政用鞭皮方仰惠 衣無充棺始知淸]"이고, 7·8구는 "제주배(齊州盃)87)의 물을 술잔에 붓고, 거듭거듭 만가(挽歌)를 부르며 떠나는 공을 전송하네.[酌彼齊州盃上水 紼謳三唱送公行]"이다. 대체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2월 15일 정축(丁丑) 귀매괘(歸妹卦) 초구(初九) 대양(大陽)율지곡(栗枝谷)에서 외조부와 외조모의 묘소에 제사를 지냈다. 대체로 내 외조부께서 만년에는 번잡한 성시(城市)에 염증을 느껴 일년 내내 도촌면(道村面)의 농사(農舍)에 머무셨다. 대를 이을 자손이 없으며 숭정(崇禎) 연간 신미년(1631, 인조9년)에 돌아가셨다. 나는 어린 나이라서 고향에 반장(返葬)하지 못하고 이곳에 임시로 장사하였다. 나 또한 형제나 아들, 조카가 없어 봄가을로 성묘하되, 어버이의 산소가 멀리 있었기 때문에 절일(節日)에 제사를 치르지 못하고 흔히 하듯이 날짜를 가려 거행하였다. 나는 여덟 살에 처음으로 외조부에게 《천자문(千字文)》과 당송 시문(唐宋詩文)을 배웠다. 그해 12월에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곧고 굳은 뜻과 고고한 자태를 우러러보고 있다. 오늘 향을 사르자니 처연한 감회가 마음에 가득하지만 또한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 수 없으니 서글프기만 할 뿐이다.윤6월 21일 신사(辛巳) 미제괘(未濟卦) 구이(九二)묘시(卯時)와 진시(辰時)에 햇무리가 졌다. 남풍이 천천히 불어오고 조금 지나서 북풍도 함께 일기 시작하였다. 남쪽과 북쪽 방향에서 구름이 일시에 풍산(楓山)의 서쪽으로 모였다. 내 집 동쪽에서 우레와 번개가 치더니 큰비가 쏟아 붓듯 하였는데 참으로 기이한 볼거리였다. 남쪽과 북쪽에서 바람이 마주하고 함께 불어와 사방의 구름이 한곳으로 모여들어 거센 빗줄기를 이루었다. 신의 공능(功能)과 귀신의 자취를 찬란하게 엿볼 수 있었다. 아, 그중에는 이 일을 주장하는 자가 없는 듯하건만, 호령하여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변화무쌍한 굴신(屈伸)이 어찌 이처럼 신묘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난 뒤 시원한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구름이 걷히고 비가 그치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 역시 신묘하였다. 그대로 묵묵히 바라보다가 적어 둔다.이날 이조 참판 유공 계(兪公棨)88)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군(兪君)은 강직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일 때문에 금산(錦山)으로 귀양을 가 골짜기에 직접 서까래 몇 개로 된 초가집을 지었고 기장밥과 나물국조차 아침저녁으로 잇지 못하였지만 독서를 멈추지 않고 편안하였다. 해배(解配)되어 돌아와서는 무안 현감(務安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청렴하고 근실하며 공정하고 검소함으로 칭송을 받았다. 현의 직임을 떠나서는 간관(諫官)에 제수되었다. 인조(仁祖)의 시호(諡號)를 올리는 날에는 직언하여 성상의 위엄을 범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인산(因山) 뒤에 부령(富寧)으로 유배 되었다. 우재(尤齋) 송공(宋公 송시열(宋時烈))이 효묘(孝廟)를 뵙고 그의 죄가 아니니 풀어 주어 돌아오게 하도록 상소하였다. 곧이어 왕을 보필할 인재로 천거되어 차례차례 청요직(淸要職)에 올랐다. 금상이 왕위를 계승하자 오래도록 옥당(玉堂)에 있다가 부제학이 되었다. 참의로 이조에 들어가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체차되었다.유군(兪君)이 무안에 있을 때 내게 편지를 보낸 뒤 줄곧 왕래하면서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여러 해였다. 당시 내가 조모의 상을 당하여 장례와 제사 일에 얽매어있어서 찾아뵙고 만나기로 한 약속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공은 관직을 그만두고 떠났다. 그래서 이름을 듣고 그 사람을 보기를 원하였는데 지금 그의 부고를 들으니 나를 처연하게 하였다.12월 14일 신미(辛未) 명이괘(明夷卦) 육이(六二) 소양(少陽)우재(尤齋) 송공(宋公 송시열(宋時烈))이 지방관을 매우 공경스럽게 대하여, 회덕 수령(懷德守令)과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찾아오면 반드시 뜨락에 내려와 맞이하고 전송하며 용모와 말투가 매우 공손하였다고 들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성주(城主)가 군부(君父)에게 명을 받아 나를 다스리기 위해 왔으니, 성주에게 거만한 것은 곧 군부에게 거만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인(夫人)의 조카가 서원현(西原縣)【청주(淸州)의 명호(名號)가 강등되었을 때이다.】을 다스릴 때 그가 찾아오자 역시 뜨락으로 내려와 맞이하고 전송하여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는 대체로 속인이 아내의 조카를 자기 친족처럼 대하는 것과는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12월 20일 정축(丁丑) 비괘(賁卦) 육이(六二) 소양(少陽)이계현(李啓玄)은 경기 고양(高陽)에 사는 상놈의 아들이다. 젊은 시절 승려가 되었고, 고(故) 상국(相國) 남이웅(南以雄)89)의 산재(山齋)에 우거하였다. 남 상국은 그가 지닌 재주를 아까워하여 독서를 권하였다. 한 번만 읽으면 바로 암기하였으며 많은 책을 널리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자 남 상국이 그에게 환속(還俗)을 권하였다. 풍수학으로 시속(時俗)에 이름이 나자 어버이의 장례를 치르는 공경대부들이 앞 다투어 그를 맞이하였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전한(典翰) 이수인(李壽仁)의 집에서 북으로 돌아올 때 나도 조부의 장지가 길하지 않았기 때문에 옮겨 묻을 자리를 골라 달라고 하였지만 내 뜻에 만족스럽지 않아서 아직 그 자리를 사용하지 않았다.올해 서봉령(徐鳳翎)이 자기 부모를 이장하려고 경기, 강원 지역 등을 뒤져서 그를 맞이하여 왔다. 그의 사람됨을 보았더니 추위가 극성을 부리는 겨울인데도 홑옷만 입고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차가운 샘물에 들어가 목욕을 하기도 하고, 길을 갈 때는 말을 타지도 않고 하루에 수백 리를 달리고도 피곤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이 살던 옛 마을이나 선산(先山)을 찾아가 지난 길흉을 말하면 마치 부절을 맞춘 듯이 정확하였다. 그래서 경사(卿士) 이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미혹되어 도인(道人)이라 일컬었다. 내가 보기에는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고 시골의 늙은 창기(娼妓)에게 빠져서 생각이나 행적이 모두 드러나 취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만 풍수에 관한 술법이 평범한 지관(地官)들보다 조금 나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나도 한두 번 그를 불러 선산(先山)을 점쳐 보았지만 역시 가볍게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12월 30일 정해(丁亥) 기제괘(旣濟卦) 상육(上六) 소양(少陽)오늘은 섣달 그믐날이다. 일년 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헤아려 논해 보니, 봄과 여름이 교차할 때 비가 내리고 해가 뜨는 날이 심하게 어긋나지 않은 것이 남쪽 지방의 들판에 있는 약간의 고을뿐이었다. 7, 8월 간에는 윗사람들이 농가의 득실을 자세히 조사하지 않고 풍년이라고 일컬었다. 서리가 내린 뒤 벼가 태반은 여물지 않았건만 윗사람들이 또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 그래서 들판에는 흉년의 조짐이 있지만 부세는 풍년이 든 해처럼 징수하여 백성들의 고통과 원망이 많았다. 골짜기에 있는 군(郡)에서는 수재(水災)가 모두 심해서 백성들은 산이 무너져 압사당하고 오곡은 거센 계곡물에 떠내려가기까지 하였다. 더구나 목면(木綿)이 재해를 입어 손상된 것은 산이나 들판이나 똑같건만 대동미(大同米)를 포(布)로 환산하여 거두어들였으니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민심이 소란스럽고 몸에 제대로 된 옷을 걸치지 못하였다.상천(上天)이 경계를 보여 일월성신이 동요되고 서로 부딪치는 변화를 눈이 있는 자라면 모두가 보았으며, 산천초목과 짐승이 벌이는 괴이한 증상이 모두 드러났다. 인심이 놀랍도록 잘못되고 세도가 추잡하고 야박하기가 얘기할 가치도 없었다. 수령은 일락(逸樂)에 빠져 귀에 들리는 게 없는 듯하고 조정은 인원만 갖추었고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하였다. 덕행을 갖춘 사대부들은 당론(黨論)만 숭상할 뿐이고, 혼탁한 관리들은 뇌물에만 힘쓸 뿐이어서 300년 종사(宗社)를 비호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무슨 시대인가.민간의 비루한 사람인 데다 문지(門地)도 미천하고 자취도 소원하니 뜨거운 심정이 뱃속에 가득하여 분격하지 않은 날이 없지만 또한 어찌하지 못하였다. 오로지 날씨의 맑고 흐림을 적어 두는 조그만 책자 끝에다 오직 심정의 만 분의 일만 적으면서 마음에 쌓인 기분을 펼쳐 놓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라의 일은 나만 홀로 근심할 바도 아니고 또한 내 심력(心力)으로 미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심신이 올바른지 그렇지 않은지, 수양이 됐는지 그렇지 않은지만이 내 분수에 해당하는 일이다. 1년 동안 있던 일을 돌이켜 보니 보아줄 만한 실상이 백에 하나도 없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도를 모르지도 않고 수신의 공부를 익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마음과 일이 괴리되고 일상의 동정(動靜)이 어긋나 360일 가운데 헛되이 떠돌지 않는 날이 없었다. 내 나이를 손꼽아 보니 이미 42세가 되었다. 묵은해를 보내는 이 밤에 나도 모르게 놀라고 깨달아 삼가 여기에 적어 잘못을 바로잡고 자신을 꾸짖는 도구로 삼는다. 正月初五日。 戊辰。 无妄九五。 少陰洪儒一耒言: "前年十二月二十四日。 黃山書院重修奉安之會。 渠亦往參云。" 院前享李文元李文成成文三先生。 今宋尤菴時烈。 主事重修。 以李文純趙文正二先生主享。 兩湖人士會齊者。 二百餘人。 宋判書首獻。 李參議惟泰副獻。 公州牧鄭英漢終獻。 而宋李二公。 以深衣幅巾行祭。 鄭君以時服行事云。二十一日。 甲申。 旣濟九三。 少陽晨起行祭。 此地乃先君子榟桑之鄕。 昊天罔極。 萬倍于常。 是日歷謁先祖群塋。 兄弟侄子會宿于碧松堂。二十七日。 庚寅。 家人九三。 少陽京中士人李潞來見。 前吏判趙絅之外孫。 言語頗穩。 能道曩日二宋二尹一許論禮始末。 其外祖。 亦一言之後。 尙擯於時。 時方退居于抱川村舍云。 又言: "其叔父李君聖徵。 時在東萊任所。 去年冬。 倭人進封領來者接待時。 爭酒悖慢。 李君終始不屈。 倭人拔劍作亂。 釜山僉使及府使之軍官以下。 皆遁走。 惟下吏一人死守不去。 事定走聞。 僉使拿就繫獄云。"初二日。 甲子。 損上九。 少陽邑吏告明日主倅蔡侯忠立。 旅櫬發引而歸。 往見之。 喪主請挽辭。 爲賦一篇律語。 蓋蔡侯質朴寬儉。 而無才於政事。 故民雖愛其不猛。 而短其無變通。 及其喪也。 邑人尹先甲洪鍾華。 典治其喪。 布被短袴之外。 衙無所藏。 無以斂棺。 鄕人共賻。 買被與袴而斂之云。 故余挽辭三四云: "政用鞭皮方仰惠。 衣無充棺始知淸。" 其七八云: "酌彼齊州盃上水。 紼謳三唱送公行云。" 蓋記實矣。十五日。 丁丑。 歸妹初九。 大陽祭外祖考妣墓于栗枝谷。 蓋余外祖。 晩年厭煩城市。 終年於道村農舍。 旣無嗣胤。 而逝於崇禎辛未。 余在冲年。 不能返葬故山。 權窆于此。 余亦無兄弟子侄。 春秋掃塋。 以親塋遠在。 故不能行祭于節日。 例常擇日行之。 余於八歲。 初受千字文及唐宋詩文於外祖。 其年十二月下世。 猶及望見貞固之守介特之姿。 薰蒿今日。 凄感滿懷。 亦有人所不及知余意者。 可哀也已。閏六月二十一日。 辛巳。 未濟九二日卯辰。 南風徐徐而起。 俄而北風竝起。 南北方雲氣。 一時會翕于楓山之西。 我家之東。 雷電從中起。 大雨如注。 信奇觀也。 南北之風。 相對竝起。 四方之雲。 囊括一處。 合成沛然之澤。 神功鬼跡。 賁然可窺。 噫! 其中若無主張是者。 其號令聚散變化屈伸。 安能若是之神也? 旣然已。 爽風一聲。 雲捲雨收。 而斂無迹矣。 吁! 亦神矣。 仍默觀而記。 是日聞吏曹參判兪公棨之逝。 兪君剛直好學。 嘗以事謫錦山。 手結數椽草舍于峽中。 黍飯菜羹。 朝夕不給。 而不撤讀書怡如也。 放還調務安縣事。 以廉謹公儉稱。 去職拜諫官。 當仁祖進謚之日。 直諫觸犯雷霆之威而不撓。 因山後配富寧。 尤齋宋公。 遭遇孝廟。 䟽其非罪放還。 尋薦以王佐之才。 歷陟淸要。 今上嗣服。 久在玉堂。 爲副提學。 入東銓以參議。 拜參判。 未久而遞。 君之在務安。 以書抵余。 仍往來通簡數年。 而時余遭王母之喪。 罹葬祭之故。 未遂執贄相就之約。 而羆官而去。 故聞其名。 而求見其人。 今聞其訃。 令人悽然。十二月十四日。 辛未。 明夷六二。 少陽聞尤齋宋公於地主。 待之甚敬。 懷德倅淸州牧來謁。 必下庭送迎。 容辭極恭。 嘗曰: "城主受命君父。 來治我也。 慢城主。 卽慢君父也。" 夫人之侄。 治西原縣。【淸州降號時】來謁。 亦下庭送迎。 無異他人。 蓋甚非俗人之視妻侄如己族故也。二十日。丁丑。 賁六二。 少陽李啓玄。 京畿高陽常漢之子。 少時爲僧。 寓於故相國南以雄山齋。 南相惜其有才。 勸之讀書。 一覽輒誦。 博觀群書。 無不通焉。 南相勸之還俗。 以堪輿之術鳴於時。 公卿大夫之葬其親者。 爭延接焉。 丁酉年間。 自李典翰壽仁家北歸時。 余亦以祖考葬地不吉。 故邀占移樹之地。 不滿余志。 尙不用其地。 今年徐鳳翎。 欲移葬其親。 追蹤於京畿江原等地邀來。 看其爲人。 當冬盛寒。 衣單衣不寒。 或入洌泉浴焉。 行不騎馬。 日走數百里而不疲。 過人舊村先山。 已往吉凶。 言之若符契。 故卿士以下。 人皆惑焉。 以道人稱之。 以余見之。 所行多乖誤。 而近溺於鄕之一老娼。 心跡盡露。 無可取者。 但地術稍勝於庸士而已。 是以余亦一二邀占先山矣。 而亦不可輕信。 故尙不用其說矣。三十日。 丁亥。 旣濟上六。 少陽今日。 歲除日也。 歷計一年已然之事而論之。 春夏之交。 雨暘無甚愆忒者。 南中野邑若干地而已。 七八月之間。 上之人。 不詳考驗農家之得失。 而以豐年稱之。 至於霜降之後。 嘉糓過半不實。 而上之人。 亦不審察。 故野有凶歉之象。 而賦有豐年之徵。 民多苦怨。 至於山峽之郡。 水災備甚。 人民壓死於山崩。 五糓漂淪於激湍。 而况木綿災損。 山野同然。 而大同米作布之擧。 民心騷然。 體無完衣矣。 上天示警。 日月星辰。 震蕩相薄之變。 有目皆覩。 山川草木鳥獸之怪。 莫不畢見。 而人心之駭僻。 世道之汚澆。 有不足言者。 守令荒淫。 而耳若無聞。 朝廷備員。 而目若無見。 淸流之所尙。 黨論而已。 濁吏之所務。 財賂而已。 至於三百年宗社。 無一人顧護者。 此何時哉? 山野陋人。 地賤迹踈。 滿腹丹悃。 無日不激。 而亦無如之何矣。 聊書萬一于記陰晴小冊之末。 以敍五內之積氣焉。 雖然。 國家之事。 非吾之所獨憂。 而亦非吾之心力所可及矣。 若夫吾之一箇身心正不正治不治。 乃吾分內事也。 而回首一年之事。 百無可觀之實。 治心之道。 非不知也。 正身之學。 非不講也。 而心與事乖。 動與靜違。 三百六十。 無非浮泛底日子。 屈指吾年。 已至四十二矣。 送舊此夕。 不覺驚悟。 謹書于此。 以爲補過自訟之具焉。 제주배(齊州盃) 제주(齊州)를 다스리면서 청렴함으로 이름 높았던 조궤(趙軌)의 고사를 빌린 시어(詩語)이다. 《隋書 趙軌列傳》 유공 계(兪公棨) 1607~1664.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예학과 사학에 정통하였다.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윤선거(尹宣擧), 이유태(李惟泰) 등과 더불어 충청도 유림의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졌다. 남이웅(南以雄) 1575~1648.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적만(敵萬), 호는 시북(市北)이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까지 왕을 호종했고 그 공으로 좌찬성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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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누락 題缺 땅이 비옥해 잎 길게 자라나고비 흠뻑 내려 싹이 돋아나네굳이 금단을 단련할 것 없으니도랑물 삼켜 흑발 남기네 土肥抽葉長雨足生芽茁不必鍊金丹呑渠留漆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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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운한 시를 부기하다 김현래 附次韻 金玄來 삽 메고 영험한 뿌리 베어광주리에 잘 자란 풀 담는다체에 걸러 비결대로 하니거울 속에 흰머리 없어졌네 帶鍤斲靈根領筐貯肥茁篩和依秘方鏡裏除華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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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 이붕수209)를 애도하다 哀李監察鵬壽 문에 들어서자 혼백이 아른아른하는데늙은 형을 남겨두고 어머니도 저버렸구나천년 뒤의 장순과 허원210)이니구중의 저승길 혹여 함께 가려나 入門魂魄想依依有老兄存母亦違千載張巡與許遠九重泉路倘同歸 이붕수(李鵬壽) 1548~1593). 본관은 공주(公州)이며 자는 중항(仲恒)이다. 그의 형인 李麒壽와 함께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 정문부(鄭文孚)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별장(別將)이 되어 부령(富寧)을 수복하고 반역자 국경인(鞠景仁) 등을 처형하였다. 이듬해 패퇴하는 왜적을 추격하여 옥탑평(玉塔坪)에서 싸우다가 유탄(流彈)에 맞아 전사하였다. 장순과 허원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인물이다. 장순은 안록산의 난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당시 수양 태수(睢陽太守)였던 허원은 수양성으로 온 장순에게 자신이 통솔하던 병사와 물자를 모두 넘겨주고 함께 수양성을 지켰다. 적에게 포위되어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몇 달을 버티었으나 끝내 적에게 함락되어 함께 사절(死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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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주의 객관에 지달원211)과 머무르며 吉州客館 留池達源 관문에 정오되자 한낮의 닭이 우니꼬끼오 소리 한밤중 닭소리와는 사뭇 다르네진나라의 법이 주법보다 엄하였다면응당 관문 열고 맹상군 내보내지 않았으리212) 關門日午午鷄鳴咿喔殊非夜半聲秦法若嚴於酒法不應開出孟嘗行 지달원(池達源) 1566~1638. 함경북도 경성(鏡城) 사람으로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사진(士進)이다. 임진왜란 때 정문부(鄭文孚)를 따라 활약했으며, 이때의 공으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맹상군……않았으리 맹상군(孟嘗君)은 전국 시대 제나라 사람이다. 진(秦)나라에서 도망쳐 나올 때 함곡관(函谷關)에 도착하였으나 한밤중이어서 관문이 열리지 않았는데, 마침 식객(食客) 한 사람이 닭 울음소리를 잘 흉내 내어 성문을 열게 한 덕분에 무사히 탈출했다. 《史記 孟嘗君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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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성에서 〈향사당에서 활 솜씨를 겨루다〉 시에 차운하다218) 5수 穩城射堂挑戰韻【五首】 강한 힘 지닌 그대는 함곡관 가진 듯하고승리 취한 나는 북산을 차지한 듯하네219)다만 날 저물면 한 번 겨루길 기다리니황금을 걸더라도 또한 어찌 아까우랴한 번 가서가 동관을 잃은 뒤로220)오랑캐 말을 오산에 세우도록 내버려 두었네어여뻐라, 서북쪽 중흥의 땅은하늘이 우리 동방 성군을 위해 아껴둔 곳이로다앞에 늘어선 용사 장비와 관우 같으니한량 없는 술과 안주 산해진미로다붉은 색 보고 푸르다 하는 지경221)에 이르렀으니구기자와 국화로 가난을 읊지 말라222)옥문관에 들어오지 못한 반초 같은 신세요223)산에서 제사 지낸 곽거병 같은 공 없네224)남아로 나라에 충성 바치는 것 평소 뜻이니일편단심 아끼지 않고 바치리한양의 형승 변경보다 나으니억 길 높은 성에 만길 산이로다그 당시 조정에서 좋은 계책 없었으니경예225)에게 빌려주고 조금도 아끼지 않았네 負強君似擁函關取勝吾如據北山直待晩來爭一戰黃金爲注亦何慳一自哥舒失潼關從敎虜馬立吳山可憐西北重興地天爲吾東聖主慳猛士羅前張與關酒肴無量海兼山到得看朱成碧處休將杞菊賦寒慳身似班超未入關功微去病可封山男兒報國平生志輸了一丹心不慳漢都形勝勝秦關億丈高城萬仞山當時廊廟無長策借與鯨鯢不少慳 온성……차운하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농포집》 후쇄본에는 제목이 〈덕재의 '향사당에서 활솜씨를 겨루다' 시에 차운하다[次德哉射堂挑戰韻]〉로 되어 있고, 5수 중 제1수와 제2수만 실려 있다. 북산을 차지한 듯하네 조나라 장수 조사(趙奢)가 진(秦)나라 대치하고 있을 때, 군사(軍士) 허력(許歷)이 조사에게 "먼저 북산(北山)에 올라가서 점거하는 자는 이기고 뒤에 오는 자는 패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조사가 그 말을 따라 먼저 북산을 차지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史記 廉頗藺相如列傳》 한……뒤로 가서는 돌궐 출신의 장군 가서한(哥舒翰, ?~757)이고, 동관(潼關)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 가까이에 있는 지역이다. 안녹산(安祿山)이 일어났을 때 병마부원수 가서한이 동관을 지키고 있다가 안녹산의 군대에게 대패하여, 적에게 항복하고 적중에서 죽었다. 붉은……지경 안화(眼花)로 인해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형용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술에 취해 눈이 어른거리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구기자와……말라 구기자와 국화는 은자의 소박한 음식을 일컫는 말로, 송사나 소식(蘇軾)이 당나라 육귀몽(陸龜蒙)의 〈기국부(杞菊賦)〉를 모방하여 〈후기국부(後杞菊賦)〉를 지었다. 옥문관에……신세요 정문부가 외직에 있다는 말이다. 반초(班超)는 후한의 장군이고, 옥문관(玉門關)은 서역(西域)으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인데, 반초가 서역을 평정하여 공을 세운 뒤 정원후에 봉해져 19년 동안 서역에 있었는데, 훗날 고향 생각이 나서 황제에게 글을 올려"신은 주천군(酒泉郡)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고 다만 살아서 옥문관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班超列傳》 산에서……없네 변경을 지키는 관리로서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곽거병(霍去病)은 한 무제(漢武帝) 때의 명장으로, 수십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대군(代郡)으로 나가 흉노를 크게 물리치는 공을 세운 뒤 낭거서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다. 《한서》 〈곽거병전(霍去病傳)〉에 "낭거서산에 돌라 하늘에 제사지내고, 고연산에서 봉선(封禪)을 했다.[封狼居胥山, 禪於姑衍.]"라고 하였다. 경예 경(鯨)과 예(鯢)는 둘 다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고래인데, 악인의 괴수나 약소국을 병탄하려는 무도한 나라에 비유된다. 여기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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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 요동성에서 감회가 일어 追記 遼城有感 한 조각 외로운 성에 석양이 비추니지금 남겨진 성첩에 나는 까마귀만 보이네만약 선학을 다시 찾아오게 한다면사람이 변했을 뿐 아니라 성도 또한 변했네263)-성첩(城堞)이 무너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一片孤城當落暉只今殘堞見烏飛若令仙鶴重來訪不獨人非城亦非 선학이……변했네 정령위의 고사를 끌어와 쓴 것이다. 한나라 때 요동(遼東) 사람인 정 영위(丁令威)가 도를 닦아 신선이 되어 떠난 지 천년 만에 학으로 변하여 돌아와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은 모두 옛사람 아니구나, 어찌 신선술 안 배우고 무덤만 이리도 즐비한고.[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冢纍纍.]"라고 라고 하였다. 《搜神後記 卷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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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관의 시에 차운하다 이때 연산관(連山關)의 경보를 들었다. 次書狀韻 時聞連山警報。 밤에 느릅나무 잎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 들렸으니새벽에 일어나 칼집 속 칼을 새로 가네연산의 가을풀 난 길 잘 아니오랑캐 이제 막 활 당기고 말도 이제 날뛰는구나 夜聞楡葉墜蕭蕭曉起新磨匣裏刀慣識連山秋草路虜弦初勁馬初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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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주하 八洲河 가을 강은 맑고 얕으니 참으로 좋아할 만한데게다가 그물에 걸린 은빛 물고기도 신선하네문득 생각건대, 한강의 낚시질하는 벗들몇 사람이나 달밤에 배에 올랐을거나 秋河淸淺正堪憐更有銀鱗入網鮮却憶漢濱釣魚侶幾人乘月上江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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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촌 흠 의 원운296)을 부기하다 附申象村 欽 元韻 세상사 분분하여 몹시 쉬지 못했는데중양절에 입직하니 더욱 시름겨워라사람에게 풍계동을 다시 생각나게 하니단풍잎 국화로 가을빛 가득할테지 世事紛紛苦未休重陽滯直更堪愁令人却憶楓溪洞赤葉黃花滿意秋 상촌 신흠의 원운 《상촌고(象村稿)》 권19에 〈중양절에 입직하면서 김상헌에게 부치다[重陽滯直寄仙源]〉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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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승려의 시축에 차운하다 2수 次金剛僧軸韻【二首】 꿈속에서 금강산 몇 번째 봉우리 갔는가깨고 보니 진경이 별안간 허상이 되었네세상에 그 무엇이 실체가 있다 하랴묘하게 깨닫는 것은 오직 선가와 취옹이라흰 구름 일 많아 기이한 봉우리 만드니본디 비어있는 선심에는 미치지 못하네구하는 바 없다면서 시구 다급히 구하니나는 농포이지 어찌 시 짓는 늙은이랴 夢到金剛第幾峰覺來眞境忽成空世間何物能爲有妙悟惟禪又醉翁白雲多事作奇峰不及禪心本自空可是無求求句急我爲農圃豈詩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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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시축에 짓다 題僧軸 우리의 유도(儒道)는 참으로 큰 길과 같으니또한 황로학이 무엇이며 신선이 무엇인가세간에 작은 길 많은 것 안타까우니다시 산림에서 그릇되게 선학을 배우는구나 吾道眞如大路然亦何黃老亦何仙世間若恨多磎逕更向山林枉學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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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로 사람을 보내며 送人關西 관서까지 천 리 먼 길 아득하니시든 풀 쓸쓸한 구름 시야 가득 가을이라그대 이별한 뒤에 자주 돌아볼 줄 알겠으니밝은 달밤에 홀로 어느 누각에 오르려나 關西千里路悠悠衰草寒雲滿目秋知君別後頻回首明月獨登何處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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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응제 迎祥應製 새벽 대궐에 자욱하게 아침 이내 깔려 있는데인풍이 화창하여 옷깃에 퍼지네태평성대 문명의 교화 알고자 하면태사의 신년 점괘에 규성에 모일 조짐362) 있다네 曉闕葱葱曉靄迷仁風條暢播襟黎欲知昭代文明化太史新年占聚奎 규성에 모일 조짐 북송(北宋) 5년에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오성이 규성(奎星)에 모이는[五星聚奎] 길조가 있었다. 오성이 문창성(文昌星)인 규성(奎星)에 모이면 문운(文運)이 크게 번창한다고 한다. 《宋史 卷1 太祖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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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원일의 아침 조회〉 시에 차운하다 次稼亭元日早朝韻 임금께서 구중궁궐에 팔짱 끼고 계시니38)백관이 함께 칼과 패옥 차고 조회에 나왔네화려한 의장 그림자 섬돌 위아래로 옮겨가고상서로운 구름 빛이 전각 동서에 반짝이네봄은 버들빛이 맑은 경치에 알맞도록 재촉하고향기는 매화 흔들어 어둑한 바람 속에 풍겨오누나참으로 궁전에 즐거운 일 많으니임금께서 하늘과 나란히 만수무강 하시리 玉旒深拱九重宮列辟趨朝釰佩同綵仗影移階上下祥雲光閃殿西東春催柳色宜晴景香動梅花裊暗風正是金宮多樂事齊天聖壽保無窮 구중궁궐……계시니 성군(聖君)이 무위지치(無爲之治)를 펴는 것을 의미한다. 《서경》 〈무성(武成)〉에 "의상을 드리우고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垂拱而天下治.]"라고 하였으며,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도 "황제와 요순은 의상을 드리우고 있으매 천하가 다스려졌으니, 건괘, 곤괘에서 취하였다.[黃帝、堯、舜垂衣裳而天下治, 蓋取諸乾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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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역의 제영시에 차운하다 次磨谷驛題咏韻 관산을 두루 다님에 만사가 뜬구름과 같으니천리의 풍광이 상세한 논의에 들어오네꽃은 눈물 흔적을 띠고 촉백을 슬퍼하고134)풀은 이별의 한 더해져 왕손을 원망하네135)하늘 높이 솟은 고목 벼랑길 따라 있고강 저편 외로운 연기는 강기슭 곁 마을이라고향을 돌아보아도 돌아가지 못하니남쪽으로 가는 건 오직 꿈속의 넋뿐이로구나 關山踏盡萬事雲千里風烟入細論花帶啼痕傷蜀魄草添離恨怨王孫參天古木緣崖路隔水孤烟傍岸村回望故園歸不得南飛惟有五更魂 꽃은……슬퍼하고 두견화 고사를 차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촉백(蜀魄)은 두견새의 별칭으로, 촉나라 망제(望帝)가 죽어서 두견새가 되었는데 항상 한밤중에 피를 토하면서 불여귀(不如歸)라고 하는 듯한 소리를 내며 몹시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견새가 토한 피가 묻어 붉게 된 꽃을 두견화라고 한다. 《華陽國志 卷3 蜀志》 풀은……원망하네 고향 떠난 사람의 수심을 불러일으키는 정경을 형용한 것이다. 〈초은사(招隱士)〉에 "왕손이 떠나가 돌아오지 않으니, 봄풀은 자라서 무성하도다.[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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