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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두삼】태서의 별지에 답하다【나두삼이 예에 대해 물었으므로 선생이 답한 것이다.】 答羅【斗三】台瑞別紙【羅斗三問禮 故先生答之】 허첨고족(虛簷高足)은 그 뜻이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다만 문세(文勢)를 가지고 옛말을 참고하여 살펴보건대, 고문(古文)에는 모립(帽笠)에 가장자리가 있는 것을 '첨(簷)'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지붕에 처마가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건대 옛날에 관을 만드는 자가 보기에 아름답게 하려고 위에는 허첨(虛簷)을 두고 아래에는 고족(高足)을 설치한 듯하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경계한 것일 것이다.서견첩의(舒絹疊衣)54)는 그 뜻이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다만 문세(文勢)를 가지고 상고해 보건대, 서견(舒絹)이란 명주옷의 안팎을 평평하게 펴서 주름이 지거나 접히지 않게 한다는 말과 같고, 첩의(疊衣)란 여러 벌의 옷을 펴 늘여 놓은 다음 포개어서 대략 베개 모양과 비슷하게 한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활간(活看)55)하여야 하고, 모름지기 너무 심오하게 보아 따로 의혹을 품어서는 안 될 듯하다.'벽령각참부판일촌(辟領各攙負版一寸)'이라고 한 것은 참(攙)은 옥편(玉篇)에 '초(楚)와 어(御)의 반절음(反切音)이요, 꿰고 바느질한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대개 후활중(後闊中 뒷고대)은 8치이고 좌우의 적(適)56)이 각기 4치이니 합하여 1자 6치이고, 부판(負版)57)은 넓이가 1자 8치이다. 부판으로 엮어서 1자 6치 되는 벽령58)의 아래에다 꿰어 바느질하면 부판의 넓이가 좌우 적의 양쪽에 남는 것이 각기 1치인 것이다.승중(承重)하는 자59)의 아내는 시어머니가 살아 계시면 조부에 대한 복을 입지 않는다고 한 것은 《가례》에 아내는 남편의 복을 따른다고 분명히 말하였고 시어머니가 살아 계시면 조부에 대한 복을 입지 않는다는 글은 없다. 그러므로 《상례비요(喪禮備要)》60)를 따른다.61) 예는 후하게 하는 쪽을 따라야 하는 법이니, 《통전(通典)》62)은 따를 수 없을 듯하다.망건(網巾)63) 조선 시대 때 성인 남자가 상투를 틀 때 머리털을 위로 걷어 올리기 위해 이마에 쓰는 건(巾)을 말한다. 말총을 직사각형으로 엮어서 만드는데, 윗부분을 당, 아랫부분을 편자라 하며, 망건에 달아 상투에 동여매는 줄을 당줄이라고 한다.은 명(明)나라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상(喪)에 임하여 쓰기도 하고 쓰지 않기도 하는데, 예에 명확한 글이 없으니, 후학이 어찌 감히 설을 세우겠는가.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어머니 상에 머리를 풀어헤치지 않는다고 한 것은 《가례》에는 남자가 남의 후사가 되었거나 여자가 시집을 간 뒤에는 머리를 풀어헤치지 않는다고는 하였는데,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어머니를 위하여 머리를 풀어헤치지 않는다는 글은 없는데다가 달리 상고할 것이 없다.제사를 지내야 할 때에 상을 들은 경우에 대해 말한 것은 《예기》 〈증자문(曾子問)〉에 "대부의 제사에 정조(鼎俎)를 이미 진열하고 변두(籩豆)를 이미 늘어놓았는데도 예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는 몇 가지나 됩니까?" 하고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아홉 가지이다. 천자가 붕어했거나, 황후의 상을 당했거나, 국군이 서거했거나, 국군 부인의 상을 당했거나, 임금의 태묘(太廟)에 화재가 났거나, 일식이 있거나, 삼년상을 당했거나, 자최(齊衰)와 대공(大功)의 상을 당했을 때는 모두 중지하는데, 외상(外喪)은 자최 이하일 경우에는 제사를 행한다."라고 하였고, '사(士)의 경우에는 시마복(緦麻服)의 상을 당해서도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그러나 죽은 자가 제사 지내는 자에 대해서 복(服)이 없는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제사를 지낸다.64)'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살펴보면 자최 이하는 내외의 상을 구분하여 대처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내상(內喪)은 대문 안에 함께 사는 이의 상이고, 외상은 대문 밖에 따로 거처하는 이의 상이니, 만일 복이 없으면 비록 내상이라 하더라도 또한 제사를 지내지 않아야 할 듯하다.65)시체를 잃어버린 경우에 제주(題主)66)에 관해 말한 것은 이러한 경우 등의 변례(變禮)는 예에 근거할 것이 없으니, 어찌 감히 창작하여 스스로 설을 세우겠는가. 다만 사람의 자식이 갑자기 이러한 변을 만난 경우는 혹 전쟁하다 죽었거나 혹 바다에 빠진 것이니, 이미 시체를 찾을 수 없다면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가. 정리(情理)로 미루어 보건대, 그 남긴 의복을 거두어다가 혹 손톱이나 모발 등으로 설위(設位)하여 제사를 지내고, 장기(葬期)67)의 날이 되면 정침(正寢)에 제주(題主)하는 것이 온당할 듯 하기는 하나, 옳은지는 알지 못하겠다. 虛簷高足。其義未詳。但以文勢。參以古語而見之。古文以帽笠之有垂邊者謂之簷。盖以若屋之有簷也。意古之治棺者。有爲觀美。上有虗簷。下設高足。故以此戒之耶。舒絹疊衣。其義未詳。但以文勢考之。舒絹猶言平舒衣絹之內外。勿令皺摺也。疊衣猶言重鋪累衣以疊之。略似枕形而已。如此等處。恐當活看。不須看得太重。別生疑惑。辟領各攙負版一寸云云。攙玉篇楚御切。貫刺也。盖後闊中八寸。左右適各四寸。合一尺六寸也。負版則廣一尺八寸也。以負版綴而貫刺於領辟領一尺六寸之下。則負版之廣。剩於左右適之兩傍者各一寸也。承重者之妻。姑在不服云云。家禮明言從夫服。而無姑在不服之文。故喪禮備要仍之。禮宜從厚。通典恐不可從。網巾之出。自明始製。臨喪着不着。禮無明文。後學安敢立說。父在母喪不披髮云云。家禮言男爲人後。女子已嫁皆不披髮云。而無父在爲母不披髮之文。他無所考。祭時聞喪云云。禮曾子問。曰大夫之祭。鼎俎旣陳。籩豆旣設。不得成禮廢者幾。孔子曰九。天子崩后之喪。君薨夫人之喪。君之太廟火,日食,三年之喪,齊衰大功皆廢。外喪自齊衰以下行也。士緦不祭。所死於祭者無服則不。以此見之。齊衰以下。恐當分內外喪處之可也。內喪大門內同居之喪。外喪大門外異居之喪也。若無服則雖內喪。恐亦當祭。亡失尸體題主云云。如此等變禮。禮無所據。何敢創自立說。但人子之卒遇是變者。或戰亡或溺海。旣不得尸則何以處之乎。以情理推之。收其遺衣服。或爪髮等。設位祭之。及葬期之日。題主於正寢。似爲便當。未知可否。 서견첩의(舒絹疊衣) 소렴(小斂)의 절차 가운데 일부이다. 《가례(家禮)》 〈상례(喪禮)〉에 "시신을 소렴상 위로 옮겨 먼저 베개를 치우고, 비단으로 만든 겹옷을 펴서 머리를 괸다.[遷于小斂牀上, 先去枕, 而舒絹疊衣, 以藉其首.]"라고 하였다. 이 해석에는 크게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뉜다. 하나는, '명주와 겹옷을 펴서'이고, 또 하나는, '명주를 펴고 옷을 겹쳐서'이다. 활간(活看) 글을 볼 때에 어떤 글자나 글귀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의 뜻을 널리 보아 본의를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적(適) 상복의 옷깃 양쪽의 어깨 부위에 붙어 있는 너비가 4촌인 네모진 베 조각을 말한다. 벽령(辟領)이라고도 한다. 부판(負版) 상복(喪服)의 등쪽에 붙어 있는 너비가 1척 8촌인 네모진 베 조각을 말한다. 부(負)라고도 한다. 《의례(儀禮)》의 주(注)에 "효자(孝子)의 복(服)은 앞에는 최(衰)가 있고 뒤에는 부판이 있다." 하였고, 소(疏)에는 "그 슬픔을 등에 짊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벽령(辟領) 원문은 '領辟領'인데, '領'을 연문으로 보아 빼고 번역하였다. 승중(承重)하는 자 아버지가 죽은 적장손(嫡長孫)이 조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에 상주(喪主)가 되는 것을 말한다. 《상례비요(喪禮備要)》 원래는 조선 초기의 학자 신의경(申義慶)이 주희(朱熹)가 지은 《가례(家禮)》의 원문을 위주로 하고 고금의 여러 예설(禮說)을 참고하여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서술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후대에 김장생(金長生)이 증보하여 간행하였고, 그 아들 김집(金集)이 다시 수정하고 증보하여 간행하였다. 여기에서는 김장생의 《상례비요》를 가리킨 듯하다. 《상례비요》를 따른다 김장생은, 고례(古禮)에서는 부인이 남편의 친족을 위해 입는 복은 모두 한 등급 낮추어 입게 되어 있지만, 송대 이후 논의가 바뀌어 며느리는 남편을 따라 시부모를 위해 참최(斬衰) 삼년복, 자최(齊衰) 삼년복을 입어야 하며, 승중한 손자와 그 처도 조부모를 위해 똑같이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설을 따르겠다는 말이다. 《통전(通典)》 당(唐)나라 두우(杜佑, 735~812)가 총 200권으로 편찬한 책으로, 중국의 전장 제도(典章制度)를 총망라한 통사(通史)이다. 시기로는 당우(唐虞)의 전설 시대부터 당나라 때까지이며, 분야로는 식화(食貨), 선거(選擧), 직관(職官), 예(禮), 악(樂), 형(刑), 주군(州郡), 변방(邊防) 등 여덟 개 항목으로 나누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후대 정초(鄭樵)의 《통지(通志)》,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와 합쳐 삼통(三通)이라 한다. 망건(網巾) 말총으로 망(網)을 만들어 머리털을 싸매는 것이다. 명 태조(明太祖)가 아직 등극하기 전에 신락관(神樂觀)에 가서 도사(道士)가 실로 망을 얽어 머리털을 싸맨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더니, 그 뒤에 명하여 천하에 그것을 행하도록 하였다. 만력(萬曆) 연간에 이르러 비로소 빠진 말총으로 실을 대신하였다. 죽은……지낸다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는 "제사 지내는 대상자가 죽은 자에 대해서 복(服)이 없는 경우에는 제사를 지낸다.[士緦不祭, 所祭於死者無服則祭.]"라고 되어 있다. 제사를……듯하다 원문은 '恐亦當祭'인데, 문맥에 근거하여 '祭' 앞에 '不'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제주(題主) 장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신주에 죽은 이의 관함을 쓰고, 그 옆에 상주(喪主)의 방주를 쓰는 것을 말한다. 장기(葬期) 상(喪)을 당(當)한 날로부터 장사(葬事)를 치르는 날까지의 기간(期間)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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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을사년(1665) 乙巳 2월 5일 임술(壬戌) 손괘(損卦) 육사(六四)영암(靈巖)의 인사들이 최산당(崔山堂)90)을 존양사(存養祠)에 배향하고 나에게 봉안 제문(奉安祭文)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최 산당의 봉안 제문과 존양위전 고문(存養位前告文) 2편을 지었다.【제문(祭文)과 고문(告文)은 12권에 자세히 보인다.】존양(存養)은 성이 최(崔)이고 이름은 덕지(德之)이며 완산인(完山人)이다. 단종조(端宗朝)에 관직이 직제학에 이르렀지만 세묘(世廟)의 왕업이 점점 융성하는 것을 보고는 몸을 추슬러 물러났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머물면서 조그만 누각을 지어 존양(存養)이라고 편액을 걸고 연촌거사(烟村居士)라고 자호하였다. 한가하게 지내면서 심신을 수양하고 조용히 자신을 다스리고 벼슬에 마음을 두지 않았으니 참으로 진(晉)의 징사(徵士)인 도연명(陶淵明)과 같은 부류였다.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고 그에게 제사를 지냈다.공의 손자인 최충성(崔忠誠)은 어려서부터 사학(斯學)에 뜻을 두고 과거 공부를 하지 않았다. 한훤(寒暄) 김 선생(金先生 김굉필(金宏弼))께서 앞장서 성학(聖學)을 천명하여 후생(後生)을 권면한다는 말을 듣고 책상자를 짊어지고 가서 공을 따랐다. 뜻을 독실하게 품고 학문에 힘을 쏟았으며 일찍이 스승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혼례를 행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혼례를 치른 뒤 즉시 스승의 문하로 가서 다시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김 선생께서 대륜(大倫)을 폐할 수 없다고 권했지만 공은 학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사양하면서 "학문에 의심스러운 바가 없고 대체(大體)가 수립된 뒤 집으로 돌아가더라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선생도 강요하지 못하였다. 선생의 숙부인 김총(金聰)이 영보(永保)에 살았다. 선생은 공 때문에 직접 숙부의 집에 가서 몇십 일을 묵고 돌아갔는데 공은 또 선생을 따라갔다. 뜻이 독실하고 학문에 근실하기가 이와 같았다.그의 학문은 《소학(小學)》으로 자신의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고 거경(居敬)91)에 유념하였다. 역학(易學)에 밝았으며 가난을 걱정하지 않고 유유자적하는 모습이 소옹(邵雍)과 다르지 않았다.92) 자호(自號)는 산당서객(山堂書客)이며 나이 33세에 돌아가셨다. 약간의 저술이 집에 보존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그는 입언(立言)이 구차하지 않고 시문에 담긴 뜻이 통쾌하여 진정한 심학 정인(心學正人)의 말이었다. 그의 탁월한 학문은 대략 《경현록(景賢錄)》에 보인다. 정유년(1657, 효종8) 전에는 순천부(順天府)의 경현서원(景賢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지금은 현풍서원(玄風書院)에 배향되어 있다고 한다. 존양사(存養祠)에는 아직도 합사(合祀)하는 의례(儀禮)를 거행하지 않아 사론(士論)이 한스럽게 여겼는데, 이번에 도내에 공의가 일제히 일어나 성대한 제의(祭儀)가 장차 이루어진다면 유림(儒林)에게 다행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글솜씨가 모자란다고 사양하지 않고 제문을 지어 돌려보냈다.3월 9일 을미(乙未) 태괘(泰卦) 초구(初九) 소양(少陽)오재발(吳再發)이 나를 찾아왔다. 내일 신주를 고쳐 쓰는 일로 의례 절차를 묻기 위해서 온 것이다. 대체로 을유년(1645, 인조23) 연간에 조부는 살아 계신데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임진년(1652, 효종3)에 조부상을 당해서 조부상의 길제(吉祭) 때 신주를 고쳐 쓰고 체천(遞遷)해야 하였지만 그 당시에 오재발은 나이가 어려서 예를 익히지 못한 상태라 거행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매번 시행하기를 권하였지만, 이제야 예를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3년상을 마친 뒤 즉시 시행하지 못하고 추후에 제사를 지낼 경우 고사(告辭)의 축문(祝文)은 응당 상례(喪禮)의 본문(本文)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그 예를 조금 바꾸어 내일은 먼저 연유를 고하고 대(代)마다 신주를 고쳐 쓴 다음에 모레 조부 이상을 합제(合祭)하되 시향(時享)의 예를 사용하고, 그런 다음에 친진(親盡)한 신주를 즉시 묻게 하였다.이 절차가 과연 권도(權道)를 행하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지 모르겠다. 내가 예에 익숙하지 못하지만 이러한 변통(變通)이 한집안에서 있는 일이니 예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변통이 없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억견(臆見)으로 판단을 내렸다. 아마도 중도를 지키는 예를 잃어 뒷사람을 잘못 인도할 듯하여 기록해 둔다. 응당 예를 아는 군자에게 질정을 받아야 할 것이다.3월 16일 임인(壬寅) 대축괘(大畜卦) 구이(九二) 대양(大陽)이웃의 친구들과 남석(藍石) 강가에서 배를 띄우기로 약속하였다. 주인이 배를 대고 술을 마련하여 노에 기대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말에서 내려 배에 올랐다. 술이 몇 순배 돈 뒤에 옷자락을 걷고 물가로 내려와 푸른 물결을 손으로 희롱하고 맑은 물을 일게 하여 발을 씻고 상류로 올라가 얼굴을 씻었다. 관을 털고 옷깃을 떨치고 다시 배에 올라 노질을 하지 않고 바람을 따라 배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조금 있자 거문고를 짊어진 몇몇이 바위틈에서 나와 우리를 맞이하여 배를 옮겨 가까이 오도록 하였다. 비록 시속(時俗)의 음조(音調)이고 소리가 듣기 힘들었지만 물과 바람이 음악을 늘어지게 하여 촉급한 음이 길어지고, 깊은 연못에 소리가 울려 시끄러운 음이 조화로워지고, 바위 골짜기가 곡조를 그윽하게 하여 천박한 것이 깊이가 있어지고, 돌 여울이 울어대어 탁한 음이 청아해지고, 강가 새들의 날개 짓하는 소리에 음탕한 음이 깨끗하게 느껴졌다. 끝내 속되고 천한 곡조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황홀함이 마치 백아(伯牙)의 유수고산곡(流水高山曲)93)이 내 귀에 들어오는 것 같았으니, 모두 산수(山水)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저 거문고로 연주하는 음악도 이와 같은데 더구나 나의 마음은 본래 산의 고요함[山之靜], 물의 움직임[水之動]과 더불어 깨끗함[淨]과 맑음[淸]을 함께하여 피아의 구별이 없으니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때 시우(時雨)가 그치고 화창한 날씨가 한창이고, 산에 핀 꽃은 반쯤 져버리고 물가의 풀들은 향기를 다투며, 푸른 복숭아와 붉은 살구는 마을의 대나무숲 바위틈에 있는 소나무 사이에서 은은히 비추니 참으로 조물주의 기이한 행적이었다. 이때에 잔잔한 바람이 천천히 불어와 물결이 비단 같은 무늬를 이루고 작은 배 하나가 호젓하게 강 가운데로 흘러가니, 소식(蘇軾)이 말한 '세상을 잊고 홀로 서 있으며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올라간다.'라는 것이 참으로 헛된 말이 아니었다.94)조금 있으려니 구름이 걷히고 달이 모습을 드러내며 파도는 가라앉고 바람은 고요해졌다. 배를 돌려 바위에 대어 놓고 뱃전에 기대어 생각하였다. 유구한 모든 사물 가운데 천지와 같은 것이 없다. 일원(一元)이 다하면 천지도 한갓 꿈에 불과하다. 장강(長江)과 벽산(碧山)은 수명이 하늘과 나란하지만 만물이 가려진 뒤에는 강산도 한갓 꿈일 뿐이다. 하물며 우리 인간의 삶과 죽음은 아침저녁 사이로 순식간에 다하여 저 강기슭의 풀이나 바위에 핀 꽃과 더불어 짧은 시간 동안 꾸는 하나의 잔몽(殘夢)으로 함께 돌아가는 것이니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흩어진 뒤에 자취가 자연의 조화에 따라 사라지면 곧 천지도 또 하나의 나이고 강산도 또 하나의 나이다. 그 가운데 실질적인 이치를 함께 깨우치는 것은 천지, 강산도 나와 차이가 없으니, 내가 어찌 그 사이에서 다른 의견이 있겠는가. 망연하게 길게 탄식하고 우주를 둘러보고 시비가 뒤섞인 속세를 돌아보니 시기의 눈빛이 가득하고 득실을 근심하는 무리가 어찌 한 번 비웃음거리조차 되겠는가.이윽고 팔을 베고 한숨 잤더니 술이 막 깨어 비로소 수레를 타고 돌아왔다. 달빛은 매헌(梅軒)으로 들어오고 새벽닭이 막 울려 하였다.6월 그믐날, 윤군 선삼(尹君先三), 문생 팔주(文生八柱), 조카 정세경(鄭世經) 등에게 경계하는 편지를 주었다.【제9권 〈서찰〉에 자세히 보인다.】 二月初五日。 壬戌。 損六四靈巖人士。 配享崔山堂于存養祠宇。 請製奉安祭文于余。 余製崔山堂奉安祭文曁存養位前告文二篇。【祭文告文。 詳見十二卷。】存養。 姓崔。 名德之。 完山人。 魯山朝。 官至直提學。 見世廟王業漸隆。 奉身引退。 居于靈巖之永保村。 起小樓。 扁曰存養。 自號烟村居士。 閒居養性。 恬靜自牧。 絶意仕宦。 眞晉徵士陶元亮之流也。 鄕人立祠祀之。 公之孫忠誠。 自少有意斯學。 不事擧子業。 聞寒暄金先生。 倡明聖學。 勸進後生。 負笈往從之。 篤志力學。 未嘗小離函丈。 以行昏禮歸鄕。 成昏後。 卽往師門。 更無歸意。 金先生勸以大倫不可廢。 公以學未成爲辭曰: "學無所疑。 大者旣立。 然後歸家。 亦未晩也。" 先生不能强。 先生叔父金聰。 居于永保。 先生爲公躬往叔父家。 留數旬而歸。 公又從往焉。 其篤志勤學如此。 其爲學也。 以《小學》飭躬。 以居敬存心。 明於易學。 而有堯夫弄丸擊壤之樂。 自號山堂書客。 年三十三而卒。 其叙述若干篇。 存于家。 觀其立言不苟。 措意洞快。 眞心學正人之言也。 其學問高妙。 略見於《景賢錄》矣。 丁酉之前。 配享於順天府景賢書院。 而今方從享於玄風書院云。 存養之祠。 尙不行配祀之儀。 士論恨之。 今者道內公議齊發。 褥儀將成。 則儒林之幸矣。 故不以不文辭。 而著還祭文耳。三月初九日。 乙未。 泰初九。 少陽吳再發來拜。 以明日改題主事。 來問禮節也。 蓋在乙酉年間。 祖在而其父先亡。 壬辰年遭其祖喪。 祖喪吉祭。 當改題遞遷。 而其時再發年幼。 未習於禮。 不能行焉。 余每勸之行。 今始遵禮。 但三年喪除後。 未卽行之。 追後祭之。 則告辭祝文。 恐不當用喪禮本文。 故余使稍變其禮。 以明日先告其由。 代各改題。 然後以再明日合祭父祖以上。 用時享禮。 然後親盡之主。 卽埋置焉云。 未知此節。 果不悖於行權之道耶? 余不習於禮。 此等變通。 在於一家之間。 不可以不習於禮。 頓無變通。 故不得已以臆見斷焉。 恐失於得中之禮。 以誤後人。 故記之。 從當稟質於知禮之君子云。十六日。 壬寅。 大畜九二。 大陽約諸隣舊泛舟于藍石江邊。 主人裝船設酒。 倚棹而待。 余下馬登舟。 酒數行後。 褰衣下灘。 手弄滄浪。 激淸而濯吾足。 上流而頮吾面。 彈冠振衣。 而復登舟。 不施棹枻。 放舳從風。 俄有荷琴數輩。 來迓於巖磯之間。 命移舟而近之。 雖時音俗調。 吪鳴難聽。 水風引其聲。 促者長。 潭淵響其音。 噪者和。 巖洞幽其曲。 淺者邃。 石灘鳴例。 而濁者淸。 江禽戛翮 而淫者淨。 竟不覺其卑俚之調。 而怳然若流水高山之入我耳。 皆山水之所助也。 彼琴音若此。 而况吾人一心。 本與山之靜水之動。 合其淨而同其淸。 無彼我之別者乎? 于時時雨新晴。 和氣藹然。 山花半謝。 渚草爭芬。 碧桃紅杏。 隱映於村竹巖松之間。 眞造化奇跡也。 於是微風徐起。 縠紋成章。 一棹蕭然。 汎汎中流。 蘇氏子所謂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者。 眞不虛語矣。 俄而雲開月出。 波伏風恬。 回舟艤巖。 倚舷而思之。 凡物之悠久者。 莫如天地。 一元之盡。 天地亦一夢也。 長江碧山。 壽與天齊。 而閉物之後。 江山亦一夢也。 况吾人死生。 朝暮倏忽。 與彼岸草巖花。 同歸於片時中一殘夢者哉? 雖然。 旣散之後。 其跡之乘化泯滅。 則天地一吾。 江山一吾也。 其中實理之同得者。 則天地江山。 亦與我無上下矣。 吾何間然於其間哉? 爽然長吟。 俯仰宇宙。 回首塵寰是非叢中。 睢盱猜忌患得患失之流。 豈足滿一笑哉? 已而枕肱一眠。 酒力初醒。 乃命駕而歸。 月入梅軒。 而曉鷄欲鳴矣。六月晦日。 與尹君先三曁文生八柱鄭侄世經等戒書。【詳見第九卷書札類。】 최산당(崔山堂) 1384~1455.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명은 덕지(德之),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이다.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으며, 문종이 즉위하자 예문관 직제학에 임명하였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영암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存養祠)라 이름 지었다. 거경(居敬) 마음과 몸가짐을 조심하여 덕성을 닦는 것을 이른다. 소옹(邵雍)과 다르지 않았다 송(宋)나라 소옹은 학문이 깊고 역리(易理)에 훤하여 세상만사에 아무 거리낌 없이 살면서 자기가 있는 곳을 안락와(安樂窩)라고 하고, 자기 자호를 안락 선생(安樂先生)이라고 할 만큼 모든 것을 초월하여 일생을 유유자적하게 지냈다. 《宋書 권427》 백아(伯牙)의 유수고산곡(流水高山曲) 백아(伯牙)는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이다. 백아의 음악을 알아주는 사람이 종자기(鍾子期)였다. 백아가 고산곡(高山曲)을 타니, 종자기가 듣고 "아, 산이 높구나[山巍巍]"하고, 또 유수곡(流水曲)을 타니, 종자기가 듣고 "아, 물이 출렁거린다[山洋洋]" 하였다. 《列子 湯問》 소식(蘇軾)이……아니었다 소식의 〈적벽부(赤壁賦)〉에 "표연하게 속세를 벗어나 홀로 서서 날개를 달고 신선이 된 것 같다.[飄飄乎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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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후록 日記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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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후록 日記後錄 기해(1659, 효종10) 5월 4일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 승하하셨다. 금상이 대신(大臣)과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대왕대비의 복제(服制)를 의논하게 하였다. 이조 판서 송시열(宋時烈), 병조 판서 송준길(宋浚吉) 등이 의견을 아뢰어 기년복(朞年服)으로 정하였다. 다음 해 경자년(1660) 봄에 장령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기년복이 예에 맞지 않음을 논하였다. 그 대략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의례기(儀禮記)》의 가공언(賈公彦) 소(疏)에 '차장(次長)을 세우더라도 3년으로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효종대왕께서 차장(次長)으로 대통(大統)을 이어 사직을 다스리셨으니 대왕대비께서는 참최(斬衰) 3년95)으로 상을 치르셔야 합니다. 중자(衆子)의 복제로 상을 치러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상께서 대신(大臣)과 유신(儒臣)들에게 논의하라고 명하자 좌찬성 송시열, 좌참찬 송준길 등이 이전 견해를 고집하여 의견을 아뢰기를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상 때 인조대왕(仁祖大王)과 대왕대비께서 3년 동안 복상(服喪)을 하셨습니다. 지금 또 삼년상을 치른다면, 이것은 종법(宗法)이 엄격하지 못하고 윤서(倫序)가 명확하지 못한 일입니다. 허목의 의견은 따를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호군(護軍)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예법에 대한 두 유신의 논의가 잘못되었음을 극론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공언의 소에서 주장한 '차장(次長)의 경우에도 참최(斬衰) 3년으로 한다.'라는 문구를 근거로 "두 유신이 종통(宗統)을 소현세자에게 돌리고 효종을 지파(支派)로 대우한 것은 천리를 거역하고 《예경(禮經)》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그들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소가 올라오자 상께서 진노하여 방귀전리(放歸田里)96)하라고 명하자, 언관(言官)은 형률에 따라 죄를 다스려 삼수군(三水郡)에 안치(安置)하기를 청하였다. 좌윤(左尹) 권시(權諰)가 상소하여 거듭 윤선도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거들고 과감하게 직언(直言)한 것임을 밝혔으나 언관이 '흉악한 인물의 논계(論啓)를 거들었으니 파직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경자년(1660, 현종1) 가을 홍공 명하(洪公命夏)97)가 전장(銓長 이조 판서)이 되었을 때 전 장령 허목을 의망(擬望)하여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삼자 대신(大臣)이 상에게 "이 사람은 여차여차하니 등용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 사람은 늙고 병들었으니 험한 변방에 보임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즉시 이조에 묻기를 "허목이 늙고 병들었다고 하는데, 과연 변경 지역을 감당하지 못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조에서 그의 기력이 감당할 수 있다고 회계(回啓)하자 상께서 마침내 가도록 명하라고 비답을 내리니,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그해 겨울 우재(尤齋) 송공(宋公 송시열)이 여러 차례 대사헌과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효종대왕께서는 영명하고 과단성이 있고 지략이 원대하며 조용하면서도 도량이 넓으셨다. 소현세자에게 원자(元子)가 있었지만 인조께서 폐위하고 효종을 세웠으니, 대체로 문왕(文王)과 같은 뜻이었다. 효종은 즉위 11년에 걸쳐 나라를 다스리는 데 온 마음을 쏟았다. 안으로는 유가의 학술과 경학(經學)을 갖춘 선비를 구하여 아침저녁으로 치국의 도리를 강구하고, 밖으로는 병졸을 훈련하는 방도를 배양하는 일에 심력을 다하여 개연히 평성(平城)의 치욕98)을 씻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일찍이 행행(行幸)할 때면 갑작스럽게 말을 내달아 신하들이 뒤따르지 못하였다. 후정(後庭)에 활을 쏘고 말을 달리는 길을 마련하여 국사(國事)를 돌보는 여가에 활을 당기고 말을 달려 정성을 다하여 무예를 익히셨다. 무술년(1658, 효종9) 연간에는 말을 달리다 떨어져 부상을 당해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가 다시 소생하셨다. 다음 해 기해년(1659) 5월, 귀밑 부분의 종기 때문에 갑자기 승하하시니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땅으로 꺼지는 듯하였다. 식자들은 또 이와 같은 군주가 있건만 아래에 왕을 보필할 인재가 없어 끝내 지극한 치리(治理)를 보지 못하게 된 것을 한스럽게 여겼으니 어찌 애통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인조조(仁祖朝)에 성균관, 사학(四學)의 유생들과 초야의 유생들이 소장을 올려 우계(牛溪 성혼(成渾))와 율곡(栗谷 이이(李珥))을 문묘(文廟)에 배향하기를 청하였지만 상께서 윤허하지 않으셨다. 영남의 유생들은 상소하여 종사(從祀)해서는 안 된다고 논하였다. 효종 1년 경인년(1650)에 성균관과 사학(四學), 지방의 유생들이 또 소장을 올려 사정을 진달하고 청원하였지만 또 윤허하지 않으셨다. 영남의 유생들과 서울에 있는 의견이 다른 자들이 또 상소하여 불가하다고 극론하였다. 금상(今上 현종(顯宗)) 1년 기해년(1659)에 서울과 지방의 유생들이 또 소장을 올려 사정을 진달하고 청원하였지만 또 윤허하지 않으셨다. 이번에는 다른 의견을 지닌 상소가 일어나지 않았다.경자년(1660) 봄 전적(典籍) 홍종문(洪鍾聞)이 서울에서 와서 말하기를 "서울에 있는 인사들이 간혹 서로 말을 전하기를 '김사계(金沙溪 김장생(金長生))가 일찍이 우계(牛溪)와 율곡(栗谷)은 충(忠)과 효(孝)에 대해서 모두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으니 배향하는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문하의 제자들 가운데 같은 때 그 말을 들은 자들은 모두 배향하는 문제를 의논하는 데 감히 주장하지 못한다. 양송(兩宋) 또한 사계 문하의 뛰어난 제자들이지만 그들의 의향도 이와 같다. 그래서 효묘(孝廟)에게 지우(知遇)를 입었지만 감히 배향하는 일에 대해서 건의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비록 전해 들은 말이라서 믿기에는 부족하지만 이 또한 한 시대의 사론(士論) 가운데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적어 두고 훗날의 고찰에 대비한다.장사를 위해서 부산(釜山)으로 와서 정박하는 왜노(倭奴)들은 국가에서 으레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접대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대체로 이웃 나라와 교류하는 의리이다. 그 예법은 부사가 북쪽 벽 아래에서 의자에 앉아 왜노로 하여금 북면(北面)하여 부사를 향하게 하였다. 중간에 왜노는 사납게 굴고 부사는 지치고 힘이 없어 남면(南面)하는 예법이 폐지되고 동서로 서로를 마주하는 규정이 만들어져 식자들이 치욕스럽게 여겼다.무오년(1678, 숙종4) 연간에 민공 정중(閔公鼎重)99)이 동래를 다스릴 때 분개하여, 남면하고 의자에 앉는 규정을 회복하였다. 왜인들이 크게 반발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하였지만, 민공은 변고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부 안의 정예병을 보내어 군진(軍陣)을 배열하고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자 왜인들은 그 위세를 꺼려 감히 방자하게 굴지 않았지만 조정에서는 이를 근심하였다. 이어서 민공을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고 이만웅(李萬雄)을 대신 임명하였다.왜노들이 점점 악행을 저지르고 백성을 약탈하고 겁박하자 이군(李君)이 그들의 괴수 2인을 붙잡아 참수하고 관문(關門) 밖에 매달았다. 이어 상소하여 정병(精兵) 수만을 갖추어 적의 소굴을 소탕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이만웅(李萬雄)을 잡아 가두라고 명하자 왜인들이 관문을 비우고 떠났다. 나라 안이 시끄러워 변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걱정하였지만 끝내 아무 일도 없었다.무술년(1658, 효종9) 7월 21일 내가 객과 당(堂)에 앉아 있는데 시각이 밤 술시(戌時)쯤이었다. 용마루만 한 큰 별[長星]이 나타났다. 광채가 마치 불이 난 듯하고 동북 방향에서 나와서 곧장 하늘 한가운데를 지나 남서쪽으로 들어갔는데 시각이 오래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기해년(1659) 12월 초 무렵에 그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또 동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전년도와 같았으며 크기는 약간 작았다. 무술년부터 기해년까지 온갖 변괴가 나타나 해인사(海印寺), 상계사(雙溪寺)의 흙으로 만든 불상이 땀을 흘리고, 사람 머리에 뿔이 돋고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꼬리가 소꼬리 같고 도성 안의 흑하(黑霞)에서 비린내가 나고, 남산(南山)의 소나무가 바람도 없건만 저절로 부러지고,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고, 금성(錦城)의 사호강(沙湖江)100) 물이 사흘 동안 붉은색을 띠었다. 기해년 11월 10일에는 종일토록 흙비가 내려 원근을 분간하지 못하였고 해는 홍적색(紅赤色)이었다. 이와 같은 재이(災異)를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지만 괴이하여 적는다. 아, 통탄스럽다.옛날에는 국휼(國恤)에 달려가 곡을 하는 예가 없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는 명묘(明廟 명종)의 상 때 국장(國葬)을 기다리지 않고 벼슬에서 물러나 초야로 돌아갔다.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상에도 역시 대궐로 나아가 곡을 하지 않았다. 인조(仁祖)의 상(喪)에 이르러서는 전함(前銜)의 관원이 대궐로 나아가 곡을 하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간혹 대궐로 나아가지 않아서 견책을 입은 자도 있었다. 효종(孝宗)의 상에는 일명(一命) 이상은 비록 산관(散官)의 반열에 있더라도 서둘러 대궐로 나아가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그대로 규례로 굳어졌다.경자년(1660, 현종1)에 대왕대비의 복제에 대하여 예법을 논의할 때 대신(大臣)들의 의견과 양송(兩宋)의 의견이 서로 부합하였다. 오직 원평(元坪) 원상(元相)만 허공 목(許公穆)의 논의와 서로 부합하였다. 당시 호군(護軍)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예의(禮儀)를 의론하여 양송의 잘못을 극론하고, 지평 윤휴(尹鐫)가 장령 허목 및 승지 이유태(李惟泰)에게 편지를 보내 기년복이 매우 근실하지 못함을 논하였다. 이때 물론(物論)이 비등하고 시비가 서로 엇갈려 간혹 양송의 죄를 논하며 군주를 기만하고 나라를 잘못되게 한다고 지목하기까지 하였다. 우재 송시열은 다른 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해윤(海尹 윤선도(尹善道))의 대문(大文)과 여윤(驪尹 윤휴(尹鑴))의 주각(註脚)으로 우리는 어디서 죽을지 모르게 되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일시의 의논이 부합하지 않아 되풀이되다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 사림(士林)이 둘로 갈라졌으니 나라가 장차 어찌 되려는가.이 당시 이른바 서인(西人) 중에는 산서(山西), 청서(淸西), 탁서(濁西)라는 지목이 있었다. 유술(儒術)에서 일어난 자들을 산서(山西)라고 이르고, 청론(淸論)을 지닌 경사(卿士)들을 청서(淸西)라고 이르고, 전부터 섞여 있던 훈구(勳舊)를 탁서(濁西)라고 하였다. 동인(東人) 가운데 대북(大北)이라 이르는 것은 이제 듣지 못하지만, 이들도 소북(小北)과 남인(南人)으로 갈라졌다. 조그마한 나라가 인심이 이렇게 분열되었으니 난세에 의지할 곳 없는 백성은 누구 집에 머물지 알 수가 없다. 슬프다.전주(全州)의 문관(文官) 이흥발(李興浡)101)과 그의 아우 이기발(李起浡)이 모두 문과(文科)로 조정에 나아가 현요직(顯要職)에 이르렀다. 병자호란 이후, 두 형제는 늙은 어머니를 보시고 운암산(雲巖山)으로 들어가 물고기를 잡고 농사를 짓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임금이 부르는 조서가 여러 차례 내려왔지만 자신의 뜻을 지키며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조정에서 이흥발을 금성 현감(錦城縣監)으로 제수하여 현의 아전이 산속 계곡 사이로 그의 집을 찾아갔다. 도중에 대나무 삿갓을 쓰고 물고기를 낚아 낚싯대를 메고 땔감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을 만났다. 아전이 읍하고 말하기를 "이 현군(李縣君)의 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나를 따라오라." 하였다. 얼마 뒤 한 촌락에 이르렀다. 몇몇 집이 울타리를 두르고 숲에 의지하여 있었다. 그 사람이 들어가 대나무 평상에 앉아 아이를 불러 물고기를 삶고 기장밥을 지어 아전을 먹이더니, "너는 돌아가거라. 나는 나가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때서야 아전은 비로소 그가 이 현감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다. 이기발도 여러 번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끝내 한 번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영암(靈巖)에 신공 천익(愼公天翼)이 있는데 사부(詞賦)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두루 지냈지만 병자년(1636, 인조14), 정축년(1637) 이후로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효종이 즉위하여 간절히 불러들이자 한 번 몸을 일으켰다. 당시 신독재(愼獨齋) 김공 집(金公集)과 이군 유태(李君惟泰)가 함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아가 주상의 질문에 답하게 되었다. 상께서 매우 정중하게 자문하시자 김공은 상께 성의 정심(誠意正心)을 권하고 이군은 복수(復讎)로 상의 마음을 열어 주었다. 상께서 신공(愼公)을 돌아보며 "그대는 할 말이 없는가?"라고 하자, 신공은 "김집이 성정(誠正)을 아뢰고 이유태가 복수를 아뢰었으니 신은 더 이상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말하기를, "신이 초야에서 왔기에 용안(龍顔)을 알지 못합니다. 성상의 위의(威儀)를 한번 우러러보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 일어나 앉아 서로 마주하도록 명하였다. 얼마 뒤 종종걸음으로 나가면서 상 앞에 있던 근신을 불러 묻기를 "나갈 때도 배례(拜禮)를 행하는가?"라고 물으니 상께서 미소를 지으셨다. 근신들이 모두 찬탄하면서 말하기를 "산야(山野)에 머무는 이의 태도가 아름답도다."라고 하였다. 대체로 공은 항상 시와 술로 소일하며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수양하여 겸허한 태도를 지니고 청아한 풍도(風度)로 고상한 품위를 지키며 평소에는 문을 닫고 지내서 이웃 마을에서도 그의 얼굴을 잘 보지 못하였다.경자년(1660, 현종1) 1월 송공 준길(宋公浚吉)을 이조 판서에서 체차하고 홍공 명하(洪公命夏)를 대신 임명하였다. 효종대왕 때부터 유학에 뜻을 두고 현자를 예우하는 데 마음을 다하여 한 시대의 사류 가운데 한 가지 명성, 한 가지 재예(才藝)라도 지닌 자라면 관직의 반열에 얽매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가운데 선왕(先王)의 고굉 심복(股肱心腹)이 되어 동전(東銓 이조(吏曹))과 서전(西銓 병조(兵曹))을 전적으로 맡기고 의지하며 가까이한 자가 송공 시열, 송공 준길 2인이다. 내직과 외직을 출입하면서 10여 년 안에 지위가 높은 반열에 이른 자가 권공 시(權公諰)102)이다.양송(兩宋)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추천하여 선조(先朝) 때 이르러 대각(臺閣)을 출입하고 새로 즉위한 임금에게 더욱 융숭한 지우(知遇)를 입어 지위가 상대부(上大夫)에 이른 자가 이군 유태(李君惟泰)이다. 선조 때 일로 배척되어 10년을 전원에 머물다가 송공이 한 번 천거하자 굽혔던 몸을 크게 펴 높은 지위에 오르고 명성이 드러난 자가 유공 계(兪公棨)이다. 대각에 출입하거나 경악(經幄)에 드나들었던 자가 허공 목(許公穆)과 이상(李翔)103)이다.처음부터 지금까지 물러나기만 하고 나아간 일이 없으며 임금이 부르는 명이 아침저녁으로 계속 내려와도 줄곧 몸을 움직이지 않은 자가 윤문거(尹文擧), 윤선거(尹宣擧), 윤원거(尹元擧), 이수인(李壽仁)이다. 낭서(郞署)의 직임에 있으면서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한 자가 신석번(申碩蕃), 이기후(宋基厚), 임위(林㙔), 최휘지(崔徽之) 등 몇 사람이다. 한 시대에 소문만 듣고도 흥기하여 학문의 세계를 향해 나아간 자가 서울과 지방에 자못 많았으며 사림의 기상이 날로 배양되었으니, 윗사람이 올바른 방도로 이끌고 인도하면 문왕(文王)을 기다려 흥기하는 것104)은 시대에 고금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느닷없는 재난의 발생도 그 사이에 조짐이 숨어 있으니 선견지명을 갖춘 선비라면 깊이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이 당시에 또 희중(希仲) 윤휴(尹鐫)가 있었다. 선조 때 매우 융숭하게 예우하고 일찍이 인견(引見)하고자 하여 성의와 예우를 다하였지만 자신의 지조를 지키며 나오지 않았다. 금상 초엽에 특별히 지평에 제수하였으나 네 번씩이나 상소하여 체차되었다. 지금의 화순 현감(和順縣監) 김극형(金克亨)과 가깝게 지내면서 도의(道義)로 맺은 교우라고 칭탁하였고, 사류들 또한 의지하고 중시하는 자가 자못 많았다. 그러나 양송(兩宋)과 이공 유태는 이단(異端)이라고 배척하였다.혹자가 송공(宋公)에게 "공은 성상에게 위임을 받았건만 시책을 건의하고 시행한 일이 지금 얼마나 됩니까?"라고 하자, 송공이 "지금 상황에서 해야 하는 첫 번째 의리도 아직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다른 것을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혹자가 "첫 번째 의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자, 송공이 "이론(異論)이 방자하게 횡행하건만 아직 물리치지 못하였다. 이것이 첫 번째 의리를 거행하는 것이라고 이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윤희중(尹希仲)을 지목한 듯하다.송공의 문하에 황세정(黃世禎), 송규정(宋奎禎) 2인이 있는데 이들이 희중(希仲)과 벗으로 의좋게 지냈다. 이공(李公)이 고향에서 송공에게 편지를 보내 "황세정, 송규정과도 아울러 절교하였다."라고 했다고 한다. 사림 간에 간혹 서로 화합하지 못하니 한심하다 이를 만하다.호남에는 또 윤선도(尹善道)가 있다. 광해조(光海朝)에 상소하여 지조를 세웠으며 인조(仁祖)와 효종(孝宗)께서 모두 매우 융숭하게 예우하여 지위와 명성이 높아졌다. 나이가 올해 80이며 사림과 의논이 합치되지 않아 물러나 초야(草野)에 있다. 己亥五月初四日孝宗大王禮陟。 今上命大臣儒臣議大王大妃服制。 吏曹判書臣宋時烈。 兵曹判書臣宋浚吉等獻議。 定以朞年之服。 越明年庚子春。 掌令臣許穆。 上疏論朞服之非禮。 其大略蓋曰: "《禮疏》以爲'立次長亦爲三年云'。 則孝宗大王。 以次長入承大統。 宗主社稷。 大王大妃當服斬衰三年。 不可以服衆子之服服之云云。" 上命議大臣儒臣。 左贊成臣宋時烈。 左參贊臣宋浚吉等。 執前見獻議。 以爲"昭顯世子之喪。 仁祖大王與大王大妃。 旣服三年之喪。 而今又服三年。 則是宗法不嚴。 倫序不明矣。 許穆之見。 恐不可從"。 於是護軍臣尹善道。 上疏極論兩儒臣議禮之非。 終始據《疏》說次長亦斬之文。 以爲"兩儒臣以宗統歸之昭顯。 而支派待孝宗。 逆天理悖禮經。 其意所在 不可知云云"。 疏上。 上震怒。 命放歸田里。 言官請案律治罪。 安置于三水郡。 左尹臣權諰。 上疏申救其非罪。 明其敢言。 言官以爲"救護兇人論啓。 罷其職。" 庚子秋。 洪公命夏爲銓長時。 擬前掌令許公穆。 爲三陟府使。 大臣有白于上曰: "此人不當用之如此。 况此人老病。 不當補劇藩。" 上卽問于吏曹。 "許穆老病云。 果不堪邊藩否?" 吏曹回啓其氣力可堪之意。 上遂批之命往。 識者惜之。 是冬。 尤齋宋公。 累拜都憲銓判。 皆不起云。 孝宗大王。 有英毅大略。 沉默洪量。 昭顯有元子。 而仁祖廢之。 而立之。 蓋文王之意也。 孝宗卽位十一年。 勵精圖治。 內求儒術經學之士。 朝夕講治。 外修鍊兵訓卒之具。 極盡心力。 慨然有欲灑平城之恥之志。 嘗行幸之際。 挺馬突馳。 群下不能及。 於後庭中。 治射馳之路。 萬幾之暇。 彈弓躍馬。 精習武藝。 戊戌年間。 仍馳馬墜傷。 幾至大漸而復蘇。 越明年己亥五月。 以髮際暴薨。 一國人心。 若崩厥角。 識者又以有君如是。 而下無王佐之才。 竟不見至治爲恨焉。 可勝痛哉! 仁祖朝。 館學儒生等及草野儒生。 上章請牛溪栗谷從享聖廟。 自上不允。 而嶺南儒生等。 上疏論其不可從祀。 孝宗元年庚寅。 館學外方儒生。 又上章陳請。 又不允。 而嶺儒及京中之異其議者。 又上疏極論其不可。 今上元年己亥。 中外儒生。 又上章陳請。 又不允。 而携貳之疏。 則不起焉。 庚子春。 典籍洪鍾聞。 自京來言: "京中人士。 或相傳言。 '金沙溪嘗言。 牛栗於忠孝二字。 具被人言。 從享之事。 未知如何云云。' 故其一時門弟之及聞其說者。 皆於從享之議。 不敢主張。 兩宋亦其門之高弟。 意向亦如此。 故遭遇孝廟。 不敢建白從享之事云云。" 此雖傳聞不足信。 而亦一時士論之至重處。 故記之以備後考。 商販倭奴來泊釜山者。 國家例令東萊府使享之。 蓋交隣之義也。 其禮府使椅坐北壁下。 使倭奴北面而向之。 中年倭奴猖猂。 府使疲劣。 南面之禮廢。 而爲東西相對之規。 識者恥之。 戊戌年間。 閔公鼎重守東萊。 慨然復坐椅南面之規。 倭人大怒。 將欲作亂。 閔公預知有變。 令發府內精卒。 列陣而待之。 倭憚其威。 莫敢肆。 朝廷憂之。 仍召閔公還朝。 以李萬雄代之。 倭奴漸使其惡。 掠㥘人民。 李君執其魁二人斬之。 懸于關下。 仍上疏請得精兵數萬。 橫行賊窟。 於是命拿囚李萬雄。 而倭人空關而去。 國中囂喧。 恐有變起。 卒得無事。 戊戌七月二十一日。 余與客坐于堂。 時夜可戌時。 有長星大如棟者。 其光如火。 出自艮方。 直經天腹。 而入于坤方。 移時不滅。 己亥十二月初間。 忘其日子。 又自東至西。 如去年差小矣。 自戊戌至己亥。 變怪百出。 海仁雙溪寺土佛流汗。 人頭生角。 初生小兒。 有尾如牛。 都內黑霞有腥臭。 南山松木。 無風自折。 雌鷄化爲雄。 錦城沙湖江水。 三日赤色。 己亥十一月初十日。 終日霾霧。 不辨遠近。 日色紅赤。 如此等災異。 不可盡記。 怪而記之。 吁! 可嘆矣。 國恤奔哭。 古無其禮。 退溪於明廟之喪。 不待國葬而退歸。 文定王后之喪。 亦不赴哭。 至仁祖之喪。 前銜之官。 莫不赴哭。 或有不赴而獲譴者。 孝宗之喪。 一命以上。 雖在散班。 莫不奔赴。 仍成規例。 庚子大王大妃服制議禮時。 諸大臣之議。 與兩宋相合。 惟元坪元相與許公穆。 論議相合。 時護軍尹公善道。 上疏議禮。 極論兩宋之非。 尹持平鐫。 移書許掌令穆及李承旨惟泰。 又論其朞服之非甚勤。 是時。 物議喧騰。 是非交錯。 或有論兩宋之罪。 至於慢君誤國之目。 尤宋與人書有曰: "海尹大文。 驪尹註脚。 吾輩不知死所云。" 一時議論之不合。 轉輾而至於此極。 士林兩歧。 國將奈何? 是時。 所謂西人之中。 有山西淸西濁西之目。 從儒術起者。 謂之山西。 卿士之持淸論者。 謂之淸西。 勳舊之從前渾淆者。 謂之濁西。 而東人之中。 所謂大北者。 今未聞。 而小北南人。 亦有分歧。 偏小之邦。 人心分裂至此。 未知瞻烏之止于誰之屋耶? 悲夫! 全州文官李興浡與弟起浡。 皆以文科立朝。 官至顯要。 丙子胡變後。 兄弟奉老母。 入于雲巖山中。 漁釣耕農爲業。 徵召累降。 堅守不起。 朝廷拜興浡錦城縣監。 縣吏尋往其家於山溪之間。 遇一人冐竹笠釣魚。 荷竿負薪而去者。 吏揖曰: "李縣君家安在?" 答曰: "從吾來焉。" 俄至一村。 數家籬落。 依林而在。 其人入據竹牀而坐。 呼兒烹魚炊黍。 而食其吏曰: "爾其去矣。 吾不赴焉。" 於是吏始知其爲李縣監云。 起浡亦屢拜官。 竟不一起。 靈巖有愼公天翼。 以詞賦鳴于世。 早登第歷官淸要。 丙丁以後。 累官不起。 孝宗卽位。 懇召一起。 時愼獨齋金公集李君惟泰。 同彼召登對。 上顧問甚慇懃。 金公勸上誠意正心。 李君啓以復讎。 上顧謂愼公曰: "君無一言耶?" 愼對曰: "金集以誠正爲言。 惟泰以復讎爲言。 臣更無所言。" 仍曰: "臣從草野來。 不識天顔何如。 願一仰望聖儀。" 上命起坐相對。 俄而趍出。 呼問上前近臣曰: "出去時。 亦行拜禮乎?" 上微哂。 近臣皆贊曰: "美哉。 山野之態!" 蓋公常以詩酒放逸。 自牧虛詼。 淸致自高。 平居閉門。 隣里罕見其面。 庚子正月。 宋公浚吉遞銓判。 洪公命夏代之。 自孝宗大王。 傾意儒學。 盡心禮賢。 一時士類之有一名一才者。 無不羈縻於命爵之列。 其爲先王股肱心腹。 東西兩銓。 專任倚毗者。 宋公時烈宋公浚吉二人也。 或出或入。 而十年之內。 位至崇班者。 權公諰也。 兩宋推薦以爲一代第一人物。 至在先朝。 出入臺閣。 逮嗣聖眷遇愈隆。 而位躋上大夫者。 李君惟泰也。 在先朝。 以事見斥。 十年田園。 而一以宋公之薦。 大伸其屈。 佑秩通顯者。兪公棨也。 或出入臺閣。 進退經幄者。 許公穆及李翔也。 自始至今。 有退無進。 徵召之命。 朝夕繼降。 而一向不起者。 尹文擧尹宣擧尹元擧李壽仁也。 職在郞署。 或進或退者。 申碩蕃宋基厚林㙔崔徽之數人也。 其一時聞風而起。 以向學指點者。 中外之間。 頗多其人。 而士林之氣。 日以培植。 可見上之人。 導率以其方。 則待文王而興起者。 時無古今之異焉。 而駭機之發。 又有所隱兆於其間。 則士之先見者。 其可不深有察焉。 是時。 又有尹希仲鐫者。 在先朝。 禮遇隆甚。 嘗欲引見。 盡其誠禮。 而自守不出。 至今上初。 特拜持平。 四上疏見遞。 與今和順縣監金克亨友善。 託以道義交。 士流亦頗有倚重之者。 而兩宋曁李公惟泰。 斥之以異端。 或有問於宋公曰: "公爲聖上委任。 建白施設。 今做幾許事?" 宋公曰: "當今第一義事。 尙未擧行。 他尙奚爲?" 或曰: "第一義者。 甚事?" 曰: "異論肆行。 而未能辭而闢之。 可謂做第一義乎!" 蓋指尹希仲也。 宋公門下。 有黃世禎宋奎禎二人。 與希仲友善。 李公在鄕抵書于宋公曰: "竝與其黃宋。 而絶之也云。" 士林之間。 或有不相合。 可謂寒心。 湖南又有尹公善道。 在光海朝。 上書立節。 仁祖孝宗。 皆禮待甚隆。 位至通顯。 年今八十。 與士林不合論議。 擯在草間。 참최(斬衰) 3년 허목의 주장은 자최(齊衰)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고 참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본문은 착오이거나 오기(誤記)이다. 방귀전리(放歸田里) 죄인을 서울에서 추방하여 시골로 돌려보내는 처벌로, 중죄를 지은 죄인에게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내릴 때 사용되었다. 홍공 명하(洪公命夏) 1607~1667.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대이(大而), 호는 기천(沂川)이다. 1646년(인조24)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한 뒤 교리, 헌납 등을 지내고 암행어사로 부정한 관리를 적발하여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평성(平城)의 치욕 평성은 한 고조(漢高祖)가 40만의 흉노병(匈奴兵)에게 포위당했던 지명이다. 여기서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치욕을 가리킨다. 민공 정중(閔公鼎重) 1628~1692.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기사환국(1689년) 때 벽동(碧潼)에 유배되어 죽었다. 사호강(沙湖江) 담양부(潭陽府)의 용천산(龍泉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광주의 동쪽에 이르러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황룡천(黃龍川)과 만난다. 《海東繹史 地理考 山水》 이흥발(李興浡) 1600~1673.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유연(悠然), 호는 운암(雲巖)이다.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급제하여 집의까지 올랐으나 1636년 청나라 사신이 와서 화친을 청하자, 척화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뒤 1637년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가 명나라를 위하여 절개를 지키며 학문을 닦았다. 권공 시(權公諰) 1604~167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성(思誠), 호는 탄옹(炭翁)이다. 예송 문제가 불거졌을 때, 송시열과 송준길에 대립하여 윤선도를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같은 서인의 규탄으로 파직되어 광주(廣州)의 선영에 머물러 살았다. 이상(李翔) 1620~1690.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운거(雲擧) 또는 숙우(叔羽), 호는 타우(打愚)이다. 송시열(宋時烈)을 통하여 김집(金集)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숙종 연간에 노론과 소론이 분기할 때에는 송시열을 따라 노론의 편에 서서, 남인의 등용을 주장하는 소론에 반대하였다. 문왕(文王)을……것 문왕 같은 성군이 나타나면 평범한 백성도 감화되어 분발하게 된다는 뜻이다. 《孟子 盡心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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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6 卷之十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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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세통전 經世通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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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육과(六科)로 나누다[人分六科] 人分六科【總目】 ◎ 총목(總目)사(士) : 상(上) 중(中) 하(下)농(農) : 상(上) 중(中) 하(下)공(工) : 상(上) 중(中) 하(下)상(商) : 상(上) 중(中) 하(下)승(僧) : 상(上) 하(下)병(兵) : 상(上) 중(中) 하(下) 士 : 上 中 下農 : 上 中 下工 : 上 中 下商 : 上 中 下僧 : 上 下兵 : 上 中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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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에서 밤을 줍다 後園拾栗 후원에서 여장 짚고 걸으며시리 내린 숲에서 밤 줍네어린 아들 애써 찾아 와서말 전해 취한 나를 놀래키네 杖藜步後園收栗霜林下稚子强來覓引語驚醉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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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운한 시를 부기하다 김현래 附次韻 金玄來 바람 앞에서 많은 밤알 떨어지니서리 아래서 밤송이 갈라졌네완전히 가난하진 않다고 스스로 믿노니팔 굽혀 베고 애오라지 누워 자네 累顆落風前深房坼霜下自信不全貧曲肱聊偃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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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에 그늘이 짙다 柳亭濃陰 높은 정자에 꽃과 버들 그늘 드리우고푸른 산에 저녁 안개 갰구나부르는 소리에 낮잠을 깨니위에는 유창한 꾀꼬리 소리 유창하네 花柳蔭高亭晩烟晴抹綠喚回午夢醒上有鶯聲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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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렬사지 외재 이단하 彰烈祠志 【畏齋李端夏】 성상 5년 갑진년(1664년)에 다시 함경북도 평사(咸鏡北道評事)를 다시 설치하였는데, 내가 임금을 곁에서 모시다가 제일 먼저 뽑혀서 보내졌다. 당시 조정에서는 북방을 걱정하고 있던 차에 장차 시행되지 않는 것을 정비하여 거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나는 재주와 식견이 졸렬하고 어두워 군막에 들어온 지 한 해가 되었어도 계책을 내지 못하였는데, 그러나 한 가지 일만은 경영한 것이 있었다.대개 만력 병진년(1616년)에 나의 선친이 북평사(北評事)가 되어 관찰사의 지휘에 의하여 남북도의 사적을 널리 탐문하여 〈북관지(北關志)〉를 저술하였는데, 한 본은 함경도 감영에 남겨 두었다가 잃어버렸으며 한 본은 집안의 화재에 불타버렸다. 다만 수초본(手草本) 잡기 두어 장만이 휴고(休稿)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고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가 임진왜란 때 이 지방에 사는 유생들과 의병을 일으켜 역적을 죽이고 왜구를 토벌한 일을 기록한 것이었다.정공 및 여러 의사가 큰 공을 수립하였는데 당시 도신(道臣, 관찰사)이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아 선발되어 포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도내의 사람들은 모두 다 억울해 하며, 국가에서 충신을 격려하는 도리로 보아도 일이 이미 지나갔다고 하여 방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선친의 문자가 마침 다시 유고에서 발견되어 오늘날 공안(公案)이 된 것은 마치 하늘의 뜻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내가 북방에 들어온 후 곧 경성(鏡城) 유생과 더불어 상의하였으니, 즉 그 일을 드러내어 정공을 윤 문숙공(尹文肅公)18)의 사당에 배향하고자 하여 글로써 방백(方伯) 민정중(閔鼎重) 공에게 품의하였다. 그랬더니 민공(閔公)이 이를 즐겁게 듣고 회답을 보내 왔는데 처음 의병을 일으킨 어란리(禦亂里)에 별도로 사당을 세우고 난 뒤에, 조정에 계문(啓聞)을 하여 더욱 빛나려 한다고 하였다.돌아보건대 정공이 시안(詩案)에 연좌되어 죽었으니 백성들이 모두 그의 원통함을 말하는데, 그것을 씻어주는 은전은 있지 않았다. 이제 만약 즉시 조정에 사당을 세울 것을 청하였는데, 조정의 의론이 혹 허락하지 않는다면 일은 마침내 뜻대로 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에 선비들이 방백에게 글을 올려서 이곳의 공론으로써 우선 사우를 세우려고 하였는데, 방백이 대신들에 통보하여 함께 의론하고서 좋다는 소식을 얻은 뒤에 선비들에게 허락하였고, 또 감영의 봉록에서 덜어 내어 공사의 비용으로 삼았다.이때 나의 벗 사문 홍석귀(錫龜)가 단천 군수(端川郡守)로 있었는데 원래 재주가 많아 감여술(堪輿術)까지 통달하였다. 나와 어란리에서 모이기로 약속하고 드디어 사원의 터를 무계호(茂溪湖)가에 정하였다. 무계는 곧 감찰(監察)에 추증된 이붕수(李鵬壽)가 살던 곳으로, 이붕수는 실로 정공(鄭公)을 맞이하여 이 곳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소반 같은데 한쪽 맞은편 두 산이 맞닿는 곳에 호수가 있어 산의 안팎이 모두 호수를 이루었는데, 내호수가에 구림(丘林)이 있다. 구림의 서남쪽 수백 보쯤에 산록이 평평하고 넓은 곳이 있는데 바로 사원의 터이다. 어란리는 일명 어랑(漁郞)이라고도 하는데 풍기(風氣)가 엉겨 모여 북쪽 지방의 명승지가 되며, 무계는 마을 가운데 가장 경치 좋은 곳이다.터는 모좌 모향으로, 을사년 4월 26일 터를 파서 처음 일을 시작했고 9월에 준공을 보았다. 그달 25일에 봉안제를 거행하여 정공이 주벽이 되고 감찰 이공을 배향하였다. 최배천(崔配天) 공, 지달원(池達源) 공, 강문우(姜文佑) 공 등은 모두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로 또한 아울러 배향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처음에 경솔하게 거행할 수 없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여론이 펼쳐지지 못하였다고 여기니 내가 방백에게 의론하여 그들을 추가로 배향케 했다. 그리고 또 생각하여 보니 사우를 이미 완성한 뒤에 아마도 수호하는 사람이 없을까 싶어 이에 별도로 사원의 담밖에 서당을 지어 '촉룡(燭龍)'이라 명명하고서 마을 선비들이 여럿이 기거하면서 학업을 닦는 곳을 삼고 제사 지낼 때면 제관들이 재숙할 곳으로 삼기로 했으니, 사우가 모두 두어 칸, 서당이 모두 두어 칸이었다.이 일을 감독한 사람은 유생 이순욱(李純郁)과 현이기(玄以機)이다. 또 유생 가운데 명망이 있는 이를 선발하여 서당의 유사(有司)로 삼았는데 이발영(李發榮)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목재를 명천부(明川府) 경내에서 벌목하는데 부사(府使) 영공 남숙(南淑)이 그 일을 힘써 주관하였고, 병사(兵使) 영공 이여발(李汝發)과 경성 판관(鏡城判官) 이규진(李奎鎭) 공, 부령 부사(富寧府使) 임상유(林商儒) 군, 수성 찰방(輸城察訪) 조상한(趙相漢) · 길주 목사(吉州牧使) 강호(姜鎬) 공, 종성부사(鍾城府使) 이지온(李之馧) 공 및 단천(端川)에서 함께 일을 도왔다.이때 농사철을 당하여 거듭 백성의 힘을 번거롭게 하기에 역사(役事)에는 경성(鏡城) · 명천(明川) · 길주(吉州) 세 고을의 승군을 동원하였으며, 역사하면서 양식으로 사용하고 남은 피곡(皮穀) 50석은 바로 서당 유사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옛 사창의 제도처럼 변리를 취하게 하여 여러 학생이 배우는 식량으로 준비하게 하였다. 이에 방백이 이를 듣고 감영의 곡식 1백 석을 희사하여 넉넉하게 해주었으며, 또한 관에 소속된 노비 다섯 사람을 주어 묘지기 겸 서당을 지키도록 했다. 병사가 또 둔전의 일부를 떼어 주어 제전(祭田)으로 삼았고, 판관(判官)도 어선 한 척을 주어 제수 및 여러 학생의 비용을 마련하게 하였다. 내가 또 방백과 상의한 뒤에 남북도의 임진년 때 의사의 사적을 채록하여 모두 20명의 성명을 얻었는데, 방백이 조정에 계문(啓聞)하여 추가로 포상의 은전을 청하니 이를 묘당에 내려 의론하여 모두 청한 대로 해 주었다. 그 계문에 빠진 자는 방백이 자손들에게 면강첩19)을 주고 또 음식을 주었다.내가 또 부름을 받아 조정에 돌아온 뒤에 상소하여 정공의 원한을 씻어줄 것과 포상하여 높은 벼슬을 추증할 것을 청하니 임금도 허락하였다. 이에 도내 의사에게 증직의 은전을 일시에 거행하였다. 오직 사우(祠宇)의 사액만은 아울러 청을 올리고자 하였으나 조정의 의론이 '너무 급하여 차근차근하지 않는다.'고 여기기에 일단 천천히 기다렸다. 생각하여 보건대 임진년에 왜구가 팔도에 상처를 입혔고 반민(叛民)이 아울러 일어나 높은 벼슬아치를 다투어 결박한 것은 오직 북로에만 그러했으니, 그들의 인심을 가히 알 수 있다. 만약 충성과 지략을 갖춘 선비가 의병을 규합한 거사가 아니었다면 관북 일대는 마땅히 우리 소유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공업을 이미 이룬 뒤 또 남에 의해 공이 가려져서 70년에 이르도록 업적이 가려졌으니, 이것이 내가 선친의 문자에 감동되어 이 일에 정성을 들이게 된 까닭이다.마침 현재의 걱정거리가 바야흐로 북쪽 변방에 있는데, 의열을 밝게 빛나게 하고 교화를 수립하는 것은 실로 눈앞에 제일의 급선무이기 때문에 듣는 자들이 우활하다고 여기지 않아 일을 마침내 성취하였다. 그러나 방백 민공(閔公)이 몸소 세도(世道)를 맡아서 평소 이런 일에 힘쓰지 않으며, 또 병상(兵相) 이하 여러 공들이 의를 좋아하여 협조한 힘이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이 일을 급히 이룰 수 있겠는가?내가 이미 정공이 창의한 때의 장계(狀啓) 및 사우를 지을 때의 약간의 문자를 모아서 이를 편찬하여 한 책을 만들어 서당에 넘겨주었으며, 또한 일의 전말을 기록하여 뒷날 상고하도록 하였다.병오년 늦봄 하순에 쓴다. 聖上之五年甲辰, 復設咸鏡北道評事, 余從近侍, 首當差遣。維時朝廷有北顧憂, 將修擧廢墜, 而顧余才識劣昏, 入幕周年, 無所籌畫。第有一事所經營者, 蓋於萬曆丙辰, 維我先君爲北評事, 以方伯指, 博採南北道事蹟, 述〈北關志〉, 而一本留咸營, 見失, 一本燼於家火。惟手草雜記數紙, 見遺於休稿中, 卽記故評事鄭公文孚, 當壬辰之亂, 與土居儒生, 倡義誅叛賊, 討倭寇事者也。鄭公及諸義士樹此大功, 而爲當時道臣掩蔽, 未蒙甄賞, 誠爲道內人心所共憤惋, 其在國家激勸之道, 不可以事在旣往置之, 而先人文字, 適復見遺, 爲今之公案者, 似有天意存焉。故余入北後, 卽與鏡城儒生輩相議, 思欲表章其事, 欲以鄭公祀享于尹文肅之廟, 以書稟議于方伯閔公鼎重, 閔公樂聞而復之, 使別立祠宇於禦亂里首事之地, 而欲啓聞于朝廷, 以增重光耀。顧念鄭公坐詩案以死, 國人咸稱其冤, 而未有伸雪之典。今若遽請立祠于朝廷, 而朝議或不之許, 則事終難諧。故於是士人等呈文于方伯, 欲以此地公論, 先立祠宇, 方伯通議于大臣, 得其報可而後許之, 且捐營捧, 爲工役費。時余執友洪斯文錫龜守端川郡, 素多藝, 旁通堪輿術。余約會于禦亂里, 遂定祠基於茂溪湖之上, 茂溪, 卽故贈監察李公鵬壽所居, 而鵬壽實邀致鄭公, 仍謀起義兵於此地也。四山環擁如盤中, 而一面兩山合襟處, 有湖水, 山之內外皆成湖, 而內湖之上, 有丘林焉。丘之西南數百步許, 山麓平曠地, 卽祠基也。禦亂里, 一名漁郞, 風氣凝聚, 爲北土名勝之區, 而茂溪又里中之最勝處也。基用某坐某向, 乙巳四月二十六日, 開基始役, 九月告訖。以其月二十五日, 行奉安祭, 鄭公位主壁, 以監察李公配之。崔公配天池公達源姜公文佑, 俱是倡義之人, 亦有幷享之議, 初未敢輕擧, 僉議咸以爲屈, 余議于方伯, 使之追配。且念祠宇旣成之後, 恐無以守護, 於是別營書堂于祠墻之外, 名以燭龍, 爲里中士子羣居修業之所, 而祭時則爲祭官齋宿之處。祠宇凡幾間, 書堂凡幾間。監蕫其事者, 儒生李純郁玄以機也。又選儒士之望, 爲書堂有司, 李發英, 其人也。伐材于明川府境, 府使南令公淑, 力幹其役, 兵使李令公汝發·鏡城判官李公奎鎭·富寧府使林君商儒·輸城察訪趙君相漢·吉州牧使姜公鎬·鍾城府使李公之馧及端川, 幷有所助。時當農節, 重煩民力, 役用鏡明吉三邑僧軍, 役糧用餘, 有皮穀五十石, 仍付書堂有司, 使之取息, 如古社倉之制, 以備諸生學糧。方伯聞之, 又捐營穀一百石以贍之, 且給屬公奴婢五口, 爲廟直兼護書堂。兵使又割給屯田, 以爲祭田, 判官又給漁船一隻, 俾爲祭需及諸生之供。余又與方伯相議, 採訪南北道壬辰義士事蹟, 凡得二十人姓名, 方伯啓聞于朝, 請追加褒典, 下廟堂議, 悉如所請。其未與啓聞者, 方伯又給子孫免講帖, 且給食物。余又承召還朝, 上疏請伸鄭公之冤, 褒贈崇職, 上亦許之。與道內義士贈職之典, 一時擧行。獨惟祠宇賜額, 幷欲上請, 而朝議以爲'太遽無漸', 故姑徐以俟耳。 仍念壬辰倭寇創殘八路, 而叛民幷起, 爭縛長吏者, 惟北路爲然, 其人心可見也。若非忠智之士, 糾義之擧, 關北一道, 當不爲我有, 而功業旣就之後, 又被掩覆於人, 迄兹七十年間, 聲烈翳然, 此余所以有所感發於先人文字, 而惓惓於是事者也。適會時憂方軫北邊, 其所以昭揭義烈, 樹立風聲者, 實爲目今第一急務, 故聞者不以爲迂, 而事竟得就。然非方伯閔公身任世道, 素用力於此等事, 又非兵相以下諸公好義協助之力, 又安能就此之亟也。余旣裒集鄭公倡義時狀啓及經營祠宇時凡干文字, 編爲一冊, 付之書堂, 且記事之首末, 俾爲後考云。丙午暮春下浣, 志。 윤 문숙공(尹文肅公) 고려시대 숙종, 예종 시기에 활약했던 윤관(尹瓘)을 가리킨다. 그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104년 추밀원사로서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을 정벌하다가 실패하였다. 그 뒤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 1107년(예종 2) 여진 정벌군의 원수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진, 이때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복주(福州)·길주(吉州)·공험진(公嶮鎭)·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의 9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이듬해 봄에 개선하였다. 면강첩 조선시대 교생(校生)이 강경시험(講經試驗)에서 떨어져 군역에 나가게 되는 것을 방지하게 위해 강경을 면제해 주는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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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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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열사지 서문 지재 민진후 彰烈祠志序 【趾齋 閔鎭厚】 옛날 선조 임진년에 왜적들이 와서 노략질하고 우리나라를 짓밟았는데 관북(關北) 일대가 가장 많은 참상을 입었다. 행재소(行在所)는 멀리 막혀 있고 역적들이 안에서 호응하여 철령(鐵嶺) 밖의 땅이 장차 우리의 소유가 아닐 뻔하였다. 이때에 평사(評事) 농포(農圃) 정공이 두세 동지와 더불어 새처럼 피해 다니는 도중에 분연히 일어나 오합의 무리들 분격시켜 충성을 다하고 의리를 따르게 하며 기이한 꾀를 내어 승리하여 끝내 기세등등한 왜적을 크게 무찔러서 국토를 회복의 공적을 이루었으니, 그 얼마나 장한 일인가. 그러나 관찰사가 공을 시기하여 공적을 거짓으로 날조하였으나 변방이 아득히 멀어서 이를 밝혀 드러낸 자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1백여 년 동안 조정에서 끝내 그 사실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고 세상에서도 또한 시비의 진위를 캐는 사람이 없었다.나의 선친 문정공(文貞公)20)께서 효종조에 헌관(憲官)으로서 외직인 경성 통판(鏡城通判)에 보직되었다. 이윽고 경성에 이르러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 묻고서 그 모습을 상상을 하고 감개에 젖었는데, 이(李) · 강(姜) · 최(崔) · 지(池) 네 공21)의 묘소가 경성 안에 있다는 것을 듣고 드디어 글을 짓고 찾아가 제사를 지냈다. 그 후에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 문충공(文忠公)22)께서 함경도에 관찰사가 되었는데, 외재(畏齋) 이 상공(相公)23)이 마침 북평사(北評事)로 있어서 그와 함께 상의하여 그 사실을 더 탐문하고서 조정에 뒤미처 포장(褒獎)을 베풀라고 청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처음 의병을 일으켰던 곳에 사우를 세웠으며 또한 사원 밖에 서당을 세웠으니, 사원의 이름은 창렬(彰烈)이며 서당 이름은 촉룡(燭龍)으로 규모와 배치는 모두 외재가 정해 주었다.외재가 이미 이 일과 관계있는 공사(公私)간의 문자를 모아 한 책으로 편성하여 ≪창렬사지(彰烈祠志)≫라 명명하고서 경성의 제생에게 주었으니, 곧 선왕 병오년(1666년)이었다. 제생이 인하여 병오년 이후의 문자로 자잘한 것과 중요한 것을 빠뜨리지 않고 계속해서 가다듬고 모아서 인쇄하여 서당에 보관하였다. 이에 나에게 글을 보내 고하기를 "선부군 어른께서 제사를 올린 뒤부터 제공이 남긴 공렬이 비로소 세상에 크게 드러나 포상을 받았으며, 제향의 은전은 문충공(文忠公) 어른에 이르러 크게 갖춰졌습니다. 전에 공이 평사가 되었을 때에 일찍이 사우에 절을 올리고 서당을 배회하다가 돌아가서 또 농포(農圃) 및 지헌(持憲)의 후손들에게 벼슬을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농포의 시호를 청한 글이 공의 손에서 나왔으니 이 사원의 자초지종은 자못 공의 가업과 같은데, 이 뜻이 이루어졌으니 공이 어찌 한 마디 말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이에 내가 벌떡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불초가 몸소 외람되게 선대의 아름다움을 빙자하여 이 일에 이름을 붙이니 참으로 지극한 영광이다. 모든 선비들이 명하는 것을 어찌 감히 글을 잘하지 못한다고 사양하리요."라고 하였다. 일찍이 들으니 소강절이 말하기를 '천하의 일에 죽기는 쉽고 천하의 일을 성취하기는 어렵다.'24)라 하였다. 대개 소강절이 어찌 살신성인을 작은 일이라 여겼겠는가. 대개 그 일을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하였을 뿐이다. 지금 농포(農圃)와 여러 공이 의로써 규합하고 협력하여 능히 큰 공을 세웠다. 그중에는 싸우다가 후퇴하지 않고서 죽어도 후회하지 않은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죽은 것이 일을 성취한 근본이 되니, 이것은 참으로 소강절의 말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며 아니 나아가 그의 말보다 더한 점이 있다.아! 죽는 것과 일을 성공하는 것이 모두 일군(一軍)에 달려 있으니, 이것은 고금에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한 때만 용맹을 세우고 공을 세운 자와 더불어 비교하여 의론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평일 소양이 두텁지 않다면 결코 이 일을 성취할 수 없었을 것이니, 그 학력에 바탕을 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의론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무기를 사용하는 변방에는 문교(文敎)를 베풀 필요가 없다.'라 하면서 선비를 다 내쫓아 군대에 편입하려고 한다. 아! 만약 이러한 주장이 시행된다면 장차 다시 윗사람을 친애하고 수장(首長)을 위하여 죽는 의가 있음을 알지 못할 것이며, 오랑캐의 풍속으로 변하게 것이다. 이것이 과연 변방을 굳게 지키고 환란을 방지하는 도가 되겠는가? 매우 사려 깊지 못한 말이로다.내가 막관(幕官)이 되어 북방에 문화가 크게 시행되어 선비들이 학문에 흥기하니 현송(絃誦)25)의 풍속이 성대하여 볼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았는데, 근래에는 전일의 풍화에 비할 것이 아니라고 하니 이것이 어찌 성조(聖朝)에서 문교를 배양한 효과가 아니겠는가? 만일 걱정할 일이 발생하면 반드시 강개하고 격앙하여 나라를 위해 빛을 내어 앞 사람의 풍렬(風烈)을 계승할 자가 있을 것이니, 여러 선비들은 각자 힘써야 할 것이다." 昔在宣廟壬辰, 島夷來寇, 蹂躙我東, 而關北一路, 最被創殘。行朝隔絶, 妖孽內應, 鐵嶺之外, 將不爲我有矣。時則評事農圃鄭公, 與數三同志之士, 奮起鳥竄之中, 激勵烏合之衆, 竭忠仗義, 出奇制勝, 卒能大鏖方張之賊, 以成恢復之功, 何其壯也。然而藩臣忌嫉公, 肆誣捏, 而荒塞遐遠, 又莫有辨暴者, 爾來百餘年, 朝廷訖未詳其事實, 而世亦無是非之眞矣。我先君子文貞公, 當孝廟朝, 以憲官出補鏡城通判。旣至, 詢問故老, 想像感慨, 聞李·姜·崔·池四公之墓在鏡內, 遂操文而往祭之。厥後, 先仲父文忠公, 按節本道, 畏齋李相公適爲北評事, 與之合謀, 益加摭實狀, 請于朝追施褒獎, 仍立祠宇于當日始事之地, 且搆書堂於祠外, 祠曰彰烈, 堂曰燭龍, 規模制置, 皆畏齋之所指授也。畏齋旣又裒集公私文字之有關於此事者, 編成一冊, 名之以《彰烈祠志》, 付之鏡之諸生, 卽先王朝丙午也。諸生仍以丙午以後文字, 無遺細大, 不住修輯, 剞劂而藏之堂, 馳書告不侫曰: "自先大爺奠酹之後, 諸公遺烈, 始得闡明而褒尙, 祀享之典, 至于文忠大爺而大備焉。 向公之爲評事也, 亦嘗拜于祠而徘徊于堂, 歸又請官農圃及持憲之後孫。農圃節惠之狀, 又出於公手, 此祠始末, 殆同公之家業, 玆志之成, 公豈可無一言。" 不侫蹶然而起曰: "夫以不肖身猥藉先徽, 托名於斯役, 誠至榮也。況諸章甫所以命之者, 其安敢以不文辭。嘗聞邵子曰: '死天下事易, 成天下事難。' 夫邵子, 豈以殺身成仁者小之哉。蓋就其成事之難而言之耳。今農圃諸公協力糾義, 克樹大勳, 其中又有戰不旋踵而死無侮者, 而其所以死之者, 又爲成事之本, 是則眞無愧於邵子之言, 而抑有過焉者矣。噫, 死事與成事者, 幷萃於一軍, 此古今之所至難也。其可與一時之立慬立功者, 比論之哉。然非平日所養者厚, 則決不能成就得此事, 其有資於學力, 亦可知已。而今之議者, 乃謂'邊鄙用武之地, 不當施之以文敎', 至欲盡驅衿紳以編行伍。嗚呼, 若使此說得行, 其將不復知有親上死長之義, 而變爲左袵之俗矣。是果有益於固邊圉防患難之道哉。其亦不思之甚矣。 余爲幕官, 已知北方文化大行, 士多興起於學, 絃誦之風, 蔚然可觀, 近來又非前日之化云, 玆豈非聖朝培養之效乎。萬一有虞, 其必有慷慨激昻爲國之光, 以追繼前人之風烈者, 諸章甫, 其各勉之哉。 문정공(文貞公) 민유중(閔維重)을 가리킨다. 이……공 이는 이봉수(李鵬壽)를, 최는 최배천(崔配天), 지는 지달원(池達源), 강은 강문우(姜文佑)를 가리킨다. 이들 네 사람에 대해서는 권4 〈종의인별록(從義人別錄)〉에 자세히 나와 있다. 문충공(文忠公) 민정중(閔鼎重)을 가리킨다. 이 상공(相公) 택당 이식의 아들 이단하(李端夏)를 가리킨다. 천하의……어렵다 《성리대전(性理大全)》 권10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4 관물내편(觀物內篇)7〉에 나온다. 현송(絃誦) 북방의 작은 고을이지만 예악에 의한 교화로 다스려지는 것을 말한다. 현송(絃誦)은 현가와 같은 말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읍재로 있었는데, 공자께서 무성에 가시어 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으셨다. 공자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고 말씀하시니, 자유가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듣자오니, 군자(벼슬아치)가 도(道)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백성)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하셨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공자는 '제자들아, 자유의 말이 옳다. 방금 내가 한 말은 농담이다.' 하셨다.[子游爲武城宰 子之武城 聞絃歌之聲 夫子莞爾而笑曰 割雞焉用牛刀 子游對曰 昔者 偃也聞諸夫子 曰 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 子曰 二三子 偃之言 是也 前言 戱之耳]"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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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룡26)서당기 서하 이민서 燭龍書堂記 【西河 李敏敍】 북관(北關)은 옛날 숙신(肅愼)과 말갈(靺鞨)의 터전으로 도성에서 가장 먼 지역인데, 여러 성조들이 근심하고 모신(謀臣)들이 경영함에 변방 수비를 견고히 하고 외적을 막는 일을 급무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변경의 성곽을 담당하는 신하는 대부분 무인을 등용하였으니, 본래 절의(節義)와 명교(名敎)의 방도를 널리 퍼트릴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 때문에 국가에서 이 지역을 소유한 지 거의 2백 년이 지났으나 비루한 토속(土俗)이 다 일신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훌륭한 인재가 나오지 않아 어리석은 백성들이 보고 감화되는 바가 없으니 종종 사납고 교활한 기운을 믿고 혼란한 시기에 배반한다.하늘이 인재를 내릴 때 도성 안팎, 지방의 멀고 가까움에 따라 차이를 두지 않았으니, 어찌 북쪽 지역의 인사(人士) 중에 훌륭한 재주와 특별한 능력, 문학과 의로운 행실이 다른 고을 사람에게 비할 이가 유독 없으랴. 다만 가르치고 인도할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북방의 일을 경영하는 자가 이것을 보면 어찌 심사숙고하여 조금이라도 도모하지 않을 수 있으랴.북평사(北評事)를 두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데, 성상이 등극하신 지 4년째 되던 해에 비로소 다시 두었다.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 있던 이단하(李端夏) 공이 먼저 여기에 선발되었고 또 민정중(閔鼎重) 공을 관찰사로 임명하였는데, 두 사람이 매우 마음이 맞아 북방의 일에 대해 거행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함께 상의한 뒤에 시행하였다. 이에 함께 도모하기를 "사람들이 방향을 모르니, 무비(武備)는 믿을 것이 못 된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절의를 드러내고 명교(名敎)를 세울 방법을 도모하여 부로(父老)를 찾아가 정문부(鄭文孚) 공이 창의하여 왜적을 토벌한 일을 발굴해서 조정에 보고하여 표장(表章)하였다. 또 거사를 일으킨 지역에 사당을 세우고 거사를 함께했던 의사(義士) 약간 명과 아울러 향사하였다. 또 사당 옆에 학사(學舍)를 지어 '촉룡서당(燭龍書堂)'이라 이름 짓고 그 지역 사인(士人) 중에 독서하여 의리를 사모하는 이를 머물게 하였다. 이군(李君)이 실로 그 일을 주관하였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또한 관찰사 공의 조력 덕분이었다.아, 요즈음 외지를 맡은 이들은 교화에 뜻을 두는 이가 드물며 더구나 북평사의 직무는 군사 업무로 절도사를 보좌하면 그만이니, 두 사람이 일의 본말을 참으로 알아서 국가를 위해 깊이 고심하는 자가 아니었다면 어느 누가 정해진 업무 외에다 힘을 쏟아 부지런히 이러한 일을 하려 하겠는가.또 정공(鄭公)이 떠돌며 숨어 지내다가 기이한 계책을 떨치고 큰 어려움에 맞서 안으로는 적당(賊黨)을 제거하고 밖으로는 한창 확장되는 외적을 섬멸하였으니, 그 공덕과 계획이 훌륭하다 할 만하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이 묻혀서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다가 지금에야 두 사람을 만나서 크게 드러나게 되었으니, 어떤 일이 드러나고 묻히는 것은 본래 때가 있는가 보다. 황량한 절역(絶域)에서 사람들은 예의(禮義)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선비들은 시서(詩書)의 교훈을 익히지 못하여 어리석고 야만스러워 서울로 가는 길을 스스로 끊어 버렸는데, 지금 열사(烈士)의 풍성(風聲)으로 드러내 주고 문학과 행실을 강습하는 길로 나아가게 하여 그 미혹된 점을 이끌어주고 그 어두운 점을 인도해 주어 마치 촉룡(燭龍)이 해와 달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밝혀 주는 것처럼 시원하니, 가르침이 흥성하고 폐지되는 것은 또한 그 적당한 사람을 기다림이 있는 것인가 보다.그렇다면 두 사람의 뜻은 아마도 이 지역 사람들로 하여금 이로 인해 단서를 열어서 옛날의 가르침을 익혀 고무되고 진작되어 풍속을 선하게 하고 그 비루함을 바꾸며 나아가 배우는 자들은 모두 재주 있고 어진 이가 되게 하여 국가의 문교(文敎)의 혜택이 먼 지역에까지 입혀지기를 바라는 데에 있으니, 두 사람이 이 지역에 은혜를 내려 가르침이 후대에 이루어져 후인들로 하여금 그 자취를 보고 그 가르침에 감복하여 추모하고 칭송하며 잊지 못하게 하는 것이 또한 어찌 끝이 있으랴. 그런데 그 가르침이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 이 서당에서 비롯될 것이므로 내가 흔쾌히 기문을 짓는다. 그 서당을 명명한 의미는 북평사 군이 전해 받은 내력이 있을 것이다. 北關, 古爲肅愼·靺鞨之墟, 於京師最遠, 列聖之所顧憂, 謀臣之所經營, 莫不以固邊守捍外侮爲急, 而封疆城郭之臣, 率皆選用武人, 固未遑於節義名敎之方也。是以國家有此土, 迨將二百年矣, 而土俗之陋, 未盡變, 而俊造不興, 愚民無所觀感而化, 則往往負其桀黠之氣, 反側於危亂之時。夫天之降才, 非有內外遠近之殊也, 豈北之人士, 獨無長才異能, 文學行義, 與他州比者哉。特以敎導之無其具耳。營度北方之事者, 觀於此, 豈不可以長慮却顧而少爲之圖也。北評事之不置, 久矣。上之四年, 始更置之, 李侯端夏, 以弘文館修撰, 首膺是選, 而又得閔公鼎重, 爲觀察, 使二君相得甚驩, 於北方事, 事有可擧, 必與之咨度而後行之。於是相與謀曰: "人未知方, 武備不足恃也。" 乃圖所以表節義立名敎者, 訪於父老得鄭公文孚倡義討賊之事, 聞于朝而表章之。又立祠於其起事之地, 與同事者義士若干人, 而幷祀焉。又置學舍於其傍, 名之曰: "燭龍書堂", 以處其士人之讀書慕義者, 李君實主其事, 而終始有成者, 亦觀察公之力也。嗚呼, 今之居方州者, 鮮克置心於敎化, 況評事之爲職, 只可以戎事佐節度, 非二君之眞知本末, 爲國家深長思者, 誰肯出力於文法之外, 勤勤而爲此哉。且夫方鄭公羈旅竄伏, 奮奇計抗大難, 內鋤賊黨, 外殲方張之寇, 其功謀可謂壯矣, 而抑塞湮鬱, 不克彰徹於世, 今乃得二君而大顯, 事之顯晦, 固自有時哉。而荒遐僻絶之域, 人不知禮義之訓, 士不習詩書之敎, 蠢愚羯羠, 自絶於上國, 而今乃暴之以烈士之風聲, 進之於文行講習之塗, 導其迷而牖其冥, 廓然如燭龍之爲明於日月之所不及, 敎之興廢, 抑亦有待於其人乎。然則二君之意, 其欲使夫此邦之人, 因此發端, 講習古訓, 鼓舞奮振, 以至於善風俗易其陋, 而學者皆爲才且良, 庶國家文敎之澤, 被於遐遠也, 則二君之嘉惠此邦, 敎成於來世, 使後之人, 覽其跡服其敎, 追思頌歎而不能忘者, 亦豈有窮也哉。而其敎之所由興, 將自此書堂始, 故余樂爲之書焉。其名堂之義, 評事君蓋有所受云爾。 촉룡(燭龍) 촛불을 입에 물고 비춰 주는 용이라는 뜻이다. 전국 시대 초(楚)나라 굴원(屈原)의 〈천문(天問)〉에 "태양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을 텐데, 촉룡이 어째서 비춰 주는가.[日安不到 燭龍何照]"라는 말이 나오는데, 후한(後漢) 왕일(王逸)이 해설하기를 "하늘의 서북쪽에 해가 없는 어둠의 나라가 있는데, 그곳은 용이 촛불을 입에 물고 비춰 준다.[天之西北有幽冥無日之國 有龍銜燭而照之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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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유사 遺事 외재 이공이 북평사가 되었을 때 북방의 공론에 의하여 선생을 위해 사원을 세우고자 하여 편지로 선생의 유사를 서하 이공에게 물었다. 서하공이 선생의 사적을 그 자손에게 구하여 보고 대략 전말을 기록하였으며 이윽고 《서하집》에 그 기록을 실었다.공은 젊어서 문명(文名)이 드러났으며 일찍 과거에 급제하였다. 공의 시문과 변려문[騈語]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어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았다. 공이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들어온 뒤 항상 충절(忠節)을 다하는 것으로 평소의 뜻으로 삼았다. 만력 신묘년(1591) 북평사(北評事)에 임명되어 나갔다. 임진년(1592) 왜구가 삼도(三都)를 함락한 뒤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가 멀리 북도까지 쳐들어와 열읍(列邑)이 와해되었다. 회령(會寧)의 역적 국경인(鞠景仁)과 경성(鏡城)의 국세필(鞠世弼) 등이 난리를 일으켜 왜적을 인도하여, 두 왕자와 배신(陪臣)이 모두 왜적에게 붙잡혔지만, 직책을 맡은 관원과 수령들은 도망쳐 숨어 버렸고 감히 대적할 기운을 내지 못하였다.이에 공이 처음 나라에 보답할 뜻을 실천에 옮겼는데, 그 방략(方略)의 적절한 대책이나 사공(事功)의 전말은 나라 역사에 실려 전할 뿐 아니라 함경도 사람들이 전기(傳記)를 만들어 기록하여 잊지 않고 멸실되지 않을 자료로 삼았는데,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려고 하였으나 공이 원통하게 죽었기 때문에 감히 실행하지 못하였다.응교(應敎) 민유중(閔維重)이 지난번 경성부에 있었을 때 공의 당시 사실을 상세히 들었으며 또 전기 기록을 얻어서 가져왔기에 뒤에 이를 한 통 베꼈다. 나라 역사의 경우에는 대제학(大提學) 택당(澤堂)이 《선조실록》을 수정할 때, 공이 북관(北關)을 평정한 일을 특별히 강(綱)을 세우고 목(目)을 서술하여 공의 충성과 노력을 매우 상세히 드러내었고 또한 일찍이 사람들에게 칭송받았다고 말했다고 한다.공이 전란에 임해서 능력을 펼친 사실이 이처럼 밝고 분명한데 당시 함경 감사(咸鏡監司) 윤탁연(尹卓然)은 공의 공로가 자기의 업적을 가릴까 미워하여 행재소에 거짓 계문(啓聞)을 보냈다. 그러므로 공의 큰 업적은 세상에 드러내어 상격(賞格)을 받지 못하고 다만 국세필을 죽인 공으로 길주 목사(吉州牧使)에 승진하였다. 그 뒤 함경도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상소를 올려 공적을 호소하였으므로 포상과 찬미가 비로소 이르러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로를 자랑하지 않았고 남과 만날 때도 왜란 때 했던 북변의 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으니 공을 아는 사람은 더욱 공에게 심복하였다. 공은 성품이 욕심이 없고 물러나기를 좋아하였고 당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높이거나 따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맑은 조정에서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다.광해군(光海君) 임자년(1612년) 이후 시대 상황이 크게 어긋나는 것을 목도하였으며 또한 흉적(兇賊) 정조(鄭造)27)가 불행하게도 가까운 집안사람이었기 때문에 두문불출하고 행적을 감추었다. 혹시 정조가 오는 것을 보면 크게 취해서 인사불성인 척 하거나 눈을 감고 말을 하지 않기도 했기 때문에 그 무리들에게 대단히 배척받았다. 또 이이첨(李爾瞻)과는 한 동네 떨어져 살았는데, 이이첨이 공의 문재(文才)를 인정하여 항상 교유를 맺으려고 하였으나 공은 한번도 그의 집에 인사를 가지 않았으므로 공이 재야에 있으면서 관직을 얻지 못한 것이 모두 10여 년이었으며, 그 사이에 간혹 지방 수령을 맡기도 했지만 이 또한 부임지에서 1년을 머문 적이 없었다.기미년(1619년) 이후 폐모(廢母)의 변이 발생하자, 정청(廷請)이나 수의(收議)28)할 때에 공은 매번 지방으로 나가 피함으로써 한번도 반열을 따라 참여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이때부터 술에 빠져 살았고 집안사람들도 얼굴을 거의 볼 수 없었으니, 이는 술로 자신을 더럽히고 스스로 폐인이 된 것이다.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 상공(相公)은 바로 공의 중표(中表, 내외종 사촌) 형제이다. 계해년(1623년) 봄에 공의 거처를 자주 방문하였는데, 그때마다 공이 취한 채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공의 자제들에게 "대영공(大令公)께서는 앞으로 과음하지 마시고 내가 다시 오는 걸 기다리시게 하라."라 하였으니, 학곡의 의도를 알 수 있었지만 공은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다.이해 3월에 인조께서 반정(反正)을 하셨다. 묘당(廟堂)에서는 공이 문무(文武)의 재능이 있다고 여겨 원수(元帥)의 천거를 받았고, 또 공이 혼조(昏朝, 광해군) 때 배척되었던 사람이라 하여 장차 크게 등용하려고 했는데, 공이 부모 봉양을 위해 지방 수령을 요청하여 4월에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임명되었다. 7월에 대부인(大夫人) 상을 당하여 한양 거처로 돌아와 여막에서 지냈는데, 거상(居喪) 기간 동안 질병이 계속 이어져 하체 쪽에 큰 종기가 생겨 오래도록 낫지 않았다. 갑자년(1624년) 1월,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주상께서 장차 공산(公山, 공주)으로 가려고 할 때 공을 기복(起復, 상중에 관직에 임명함)하여 부총관(副摠管)으로 삼았다. 공이 병든 몸을 끌고 따라가 용인(龍仁)에 도착했더니 종기의 병세가 더욱 심해져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주상을 호종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공은 통탄하며 여러 날 동안 미음도 먹지 못하였다. 얼마 뒤 역적이 평정되자 상례를 마칠 수 있었다.이해 10월 박내장(朴來章) 등이 역적모의를 하면서 몰래 의논하기를 "정 아무개는 장수의 재주가 있어 대장에 적합하다. 듣자니, 의원(醫員) 이대검(李大儉)이 종기 치료로 정모의 집을 왕래한다고 하니, 이대검을 시켜 언질을 주자……."라 하였다. 그 일이 발각된 뒤에 이 말이 역적의 공초(供招)에서 나와 공이 체포되었다. 이어 이대검과 대질심문을 하였는데, 이대검이 "이 말을 과연 박내장 등에게 들었지만, 한번 종기 치료를 위해 침을 놓은 의원이 어떻게 이런 말을 정모에게 발설하겠습니까."라고 했을 뿐이니, 공의 억울함이 여기에 이르러 밝혀져서 장차 석방되려고 하였다. 그런데 대간의 시안(詩案)에 대한 논계가 뒤이어 일어나 공이 결국 원통하게 형장에서의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대개 공은 무오년(1618년) 무렵 창원(昌原) 임소에 있었는데, 고을이 한가롭고 일이 없어 〈영사(詠史)〉 10편을 지었고, 그중 하나가 초 회왕(楚懷王)에 대한 일이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초 비록 세 집만 남더라도 진을 멸망시키리라 楚雖三戶亦秦亡예언한 남공의 말1)1) 예언한 남공의 말 : 남공(南公)은 초나라의 도사(道士)로 음양에 밝은 자였다고 한다. 삼호(三戶)에 대해서는 세 가구[戶]라는 설, 지명(地名)이라는 설, 초나라의 삼대성(三大姓)이라는 세 가지의 설이 있는데, 번역은 세 가구라는 설에 따랐다. 남공이 예언한 말은 《사기(史記)》 권7에 "초수삼호 망진필초야[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 하였다.맞는 것 아니었네. 未必南公說得當무관에 들어가자2)2) 무관에 들어가자 :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의 고사. 초 회왕은 위왕(威王)의 아들로 이름은 웅괴(熊槐). 진 소왕(秦昭王)이 혼인을 약속하고 만나기를 희망하자 굴원(屈原)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관에 들어갔는데, 진나라 군대에 의해 강제로 진나라로 끌려갔다 끝내 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사기(史記)》 권40.백성 희망 끊겼는데 一入武關民望絶여린 손자 어이 또 회왕이 됐다더냐.3)3) 여린……됐다더냐 : 전국 시대 초 회왕의 손자인 심(心)을 말한다. 진말(秦末)에 범증(范增)이 초나라의 후손을 세워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항양(項梁)을 설득하자 초 회왕의 손자인 심을 찾아 회왕으로 세웠다. 후에 항적(項籍)에게 피살되었다. 《사기(史記)》 권7.孱孫何事又懷王이는 한때 읊었던 시로 난고(亂稿) 안에 있었는데, 갑자년(1624년) 상중에 휴지로 꺼내어 여막(廬幕)을 도배하면서 이 시도 벽 사이에 도배되어 붙어 있었다. 판서(判書) 최내길(崔來吉)은 공과 인척관계에 있는 사람으로, 또한 격의 없이 대하는 사이였다. 하루는 공을 방문하여 오래 앉아 있다가 그 시를 보고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상세히 보고 간 뒤, 자기 형제와 친구들에게 전하여 외워 주었다.이 때가 되어 대간이 시의 의미에 저의가 있다고 하고서 논계하여 형신(刑訊)을 가하였다. 그 당시 택당(澤堂) 이 상공과 포저(浦渚) 조 상공이 문사낭청(問事郞廳)으로 있으면서 그 시를 가지고 위관(委官)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이는 시인(詩人)이 역사를 읊은 작품이고 또한 담고 있는 의도가 없으니, 어떻게 이 시를 가지고 이 사람을 죄주겠습니까."라고 하였지만,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죄주라고 떠들어 대는 속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겠는가. 택당은 매번 공이 취조 당할 때의 원정(元情, 1차 진술) 문서를 외울 때마다 원통함을 품고 죽은 데 대해 슬퍼했기 때문에 역사를 편찬할 때에 또한 공의 충렬과 공적을 밝혔던 것이다.아! 공은 충효(忠孝)로 마음을 세우고 염정(恬靜)으로 지조를 삼았으며 평소 지닌 재략(才略)으로 일찍이 공적을 세웠으나, 한번도 시세(時勢)를 좇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공을 알아주는 사람은 적고 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결과 공을 구하려 논계하고 이치를 들어 신원한 일이 없었으니, 그 억울함을 지금까지 사람들이 아파하는 것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단서(丹書)29)에 실린 모든 사람들이 두루 사면되는 은혜를 입었으니 공 또한 분명 그 가운데 들어가야 했는데, 공의 자손이 화란을 겪은 뒤에 영외(嶺外)로 유락하는 바람에 조정에서 성대한 은전(恩典)을 베풀 적에 상고하여 밝힐 수 없었다. 하지만 공이 형신(刑訊) 아래 운명했을 뿐, 특별히 단정할 만한 죄안(罪案)은 없다. 【畏齋李公爲北評事時, 因北地公論, 欲爲先生立祠, 以書訪先生遺事於西河李公。西河公求見先生事蹟於子孫, 故略記顚末, 因載《西河集》中。】公少著文名, 早登科第。其詩章騈語, 膾炙人口, 迄于今不已焉。公旣出身立朝, 常以效忠盡節爲平生志。萬曆辛卯, 出拜北評事, 壬辰, 倭寇旣覆三都, 賊將淸正長驅入北道, 列邑瓦解。會寧賊鞠景仁·鏡城賊鞠世弼等, 作亂導倭, 兩王子及陪臣皆就擒於賊, 而官守竄伏, 莫敢出氣。公於是始售報國之志, 其方略機宜, 事功顚末, 非徒垂載國乘, 北人立傳爲記, 以爲不忘不泯之地, 至欲立祠俎豆之, 以公冤死不敢焉。閔應敎維重頃在鏡府時, 詳聞公當時之事, 且得其傳敍而來, 故兹寫一通于後矣。至於國乘, 則澤堂太學士釐正《宣廟實錄》, 於公平定北關事, 特筆立綱敍目, 著公忠勤甚詳, 亦嘗稱道於人云。公之臨亂宣力, 若是其彰明, 而伊時咸鏡監司尹卓然, 惡公聲績掩己, 誣啓以聞行朝, 故公之大功, 不被顯賞, 只以誅鞠賊功, 陞拜吉州牧使。厥後北人爲公陳疏訟功, 褒美始到, 復陞嘉善階。公則終始不伐, 對人未嘗話北事, 知公者尤服公焉。公素性恬退, 不曾趨向時好, 故竟未大顯於淸朝。及光海壬子後, 目見時事大乖, 兇人鄭造又不幸近出門族, 故因杜門屛跡, 若見造來, 則或沈醉不省, 或瞑目不語, 以是大爲其黨所擠。且與李爾瞻, 隔洞而居, 爾瞻許公文才, 常亦納交, 而公一不造其門, 故邅廻不調者, 凡十餘年, 其間或佩郡紱, 而亦未曾一年淹於任所。己未後, 廢母之變旣發, 廷請收議之時, 公每出避在外, 一無隨參之累。自是縱酒沈湎, 雖族人罕得見其面, 蓋欲以酒自汚自廢也。洪鶴谷相公, 卽公中表兄弟也。癸亥春間, 數訪公居, 輒値公醉臥, 語公子弟曰: "大令公, 後勿過飮, 待我更來云", 則可見鶴谷之意, 而公竟不省悟。是年三月, 仁廟改玉, 廟堂以公有文武才, 被元帥薦, 且以公昏朝時屛斥人, 將大用, 而公爲親乞養, 四月拜全州府尹。七月丁大夫人喪, 歸洛居廬, 草土之中, 疾病連綿, 大腫發於下部, 久未完合。甲子正月, 李适叛, 上將幸公山, 命起復公, 爲副摠管。公力疾載曳, 追到龍仁, 腫勢添劇, 不得運身, 未果參執靮之列, 公痛恨不進粥飮者累日。俄而賊平, 得終喪制。是年十月, 朴來章等謀逆, 私相議曰: "鄭某有將才, 可合大將。聞醫人李大儉, 以治腫事往來鄭某家, 可使大儉言及云云。" 及事覺後, 此言出於賊招, 公被逮, 仍與大儉面質, 則大儉曰: "此言果聞於來章等, 而一番治腫下針之醫, 安得發此言於鄭某乎云爾。" 則公之冤, 至此乃白, 將爲放釋, 而臺論詩案繼發, 則公竟未免梧棘之冤矣。蓋公於戊午年間, 在昌原任所, 官閑無事, 賦〈咏史十絶〉, 其一乃楚懷王事也。詩曰: "楚雖三戶亦秦亡, 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 孱孫何事又懷王。" 一時諷詠之作, 置在亂稿中, 甲子居憂時, 搜出休紙, 塗背廬幕, 此作亦爲背帖壁間矣。崔判書來吉, 卽公連家之人, 而亦無所嫌郤者也。一日來訪公, 坐久因見其詩, 近面詳視而去, 乃爲傳誦於其兄弟親友間矣。及是臺諫, 謂詩意有所指, 論啓刑訊。其時澤堂李相公及浦渚趙相公, 爲問事郞, 執其詩, 就委官前曰: "此乃詩人詠史之作, 且無包藏底意思, 何可以此詩罪此人也云。" 而安得見施於衆咻中耶。澤堂每誦公置對時原情文字, 哀其抱冤而死, 修史時, 亦發明公之忠烈功業也。噫, 公以忠孝立心, 恬靜爲操, 素有才略, 早建功業, 而曾不趨附時勢, 故當時知公者少, 不知公者多, 終無論救伸理之事, 而其冤枉, 則人到于今稱之也。丙丁亂後, 凡在丹書之類, 遍蒙宥澤, 則公名必在於其中, 而公之子孫, 禍變之後, 流落嶺外, 朝家霈典, 不得考明, 而第公殞於刑訊, 別無斷定罪案矣。 정조 1559~1623.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시지(始之)이다. 광해군 때 이이첨의 측근으로 폐모론을 제기하여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 세도를 부리다가 인조반정 후 세 동생과 함께 처형되었다. 정청(庭請)이나 수의(收議) 정청은 백관들이 함께 궁정(宮庭)에 나아가 일을 계품(啓稟)하고 하교(下敎)를 기다리는 것이다. 수의는 국가의 중대한 일에 관해 임금이 대신과 유신들에게 의견을 물어 수합(收合)한 문서이다. 단서(丹書) 쇳조각에 지워지지 않게 붉은 글씨를 써서 공신(功臣)에게 주어 그 자손(子孫)이 죄를 지어도 죄를 면하도록 하던 일종의 증서이다. 《漢書 高帝紀》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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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임진년 의병을 일으킨 일을 기록하다 택당 이식 記壬辰擧義事 【澤堂李植】 만력 20년 -선조 26년이다.30)- 인 임진년 6월에 왜장 가등청정(加等淸正)이 승승장구하며 북으로 쳐들어오자, 병마사(兵馬使) 한극함(韓克諴)이 마천령(磨天嶺)을 지켜 관북을 보호하고자 했는데 군대가 궤멸되자 달아났다. 적들이 마침내 길주(吉州), 명천(明川), 경성(鏡城), 부령(富寧) 등의 진(鎭)에 침입하고 회령(會寧)에 침입하여 왕자들을 붙잡았으며 강을 건너 노토부락(老土部落)31)을 공격하고 노략질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종성(鍾城)과 문암(門嚴)을 거쳐 강을 건너 온성(穩城), 경원(慶源), 경흥(慶興)의 바닷길로 두루 침입하고는 도로 경성으로 내달렸다. 이에 진보(鎭堡)의 배반한 군사들이 앞 다투어 수령과 변장을 포박하고 성을 바쳐서 적에게 붙었다. 경성에서 사노(寺奴) 국세필(鞠世弼) -세필은 곧 관노(官奴)이다. '사(寺)' 자는 오자(誤字)인 듯하니, 아마 사노였다가 관노로 이속되었을 것이다.- 이 우두머리가 되어 왜서(倭署)를 받아 관호(官號)를 두어 명성과 위세가 더욱 커져갔다.8월에 가등청정이 편장(偏將) 한 명으로 하여금 수천 명의 보병을 나눠주어 이끌고 길주를 점거하여 여러 진(鎭)을 모두 거느리게 하고 자신은 남도(南道)로 돌아가면서 북청(北靑)과 안변(安邊)에 각각 강한 군대를 두어 배후에서 지원하였다. 이때 대장부터 대부에 이르기까지 난리를 피해 북쪽으로 달아났던 자들이 적의 수중에 떨어져 거의 다 죽었지만, 오직 평사(評事) 정문부는 오래전부터 그곳의 토박이 유생들과 잘 지냈던 까닭에 여러 번 어려움을 겪었으나 죽음은 모면하였다. 마침내 전 감사(監司) 이성임(李聖任),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경흥 부사(慶興府使) 나정언(羅廷彦),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망(崔東望), 유배객 한백겸(韓百謙) 및 나덕명(羅德明)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부성(府城)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국세필이 적의 세력을 믿고 공갈협박을 하자 모두 이리저리 흩어졌는데, 어떤 이들은 샛길을 따라 남쪽으로 달아나기도 하였다.정문부는 다시 상황이 어려워져 어란리(禦亂里)32)의 민가에 숨자, 유생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왔다. 정문부가 해도(海道)를 경유하여 남쪽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유생들이 다시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고 요청하였다. 정문부는 그들에게 진실한 마음이 있는지 살피다가 그들이 강청(强請)한 뒤에야 허락하였다. 곧장 몇몇 무리로 하여금 근처에 있는 오응태 등과 종성 부사(鐘城府使) 정현룡(鄭見龍),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을 불러오게 하니 모두 와서 모였다. 정문부가 정현룡에게 맹주(盟主)를 양보했지만 정현룡도 단호하게 사양하였다. 사민(士民)들도 정문부에게 소속되기를 원하자 마침내 그를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정현룡과 오응태를 차장(次將)으로 삼으니 흩어져 도망쳤다가 차츰 모인 이들이 모두 300여 명이었다.9월 15일에 병사들을 이끌고 부성(府城)에 도착하였다. 국세필이 문을 닫아걸고 들이지 않으며 질책하기를 "너희들은 우리의 곡식을 축내려고 하느냐! 빨리 떠나라!"라고 하였다. 정문부가 한편으로는 협박하고 한편으로는 달래자 국세필이 갑자기 성안으로 그들을 맞아들였다. 여러 장수들이 먼저 국세필을 베려고 하자 정문부가 "급작스레 처단하는 것은 계획된 일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국세필에게 명하여 관아의 일을 담당하게 하였고 또 예전에 화살을 쏴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던 반병(叛兵)을 등용하여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비장' 두 글자는 초본에 먹으로 지웠는데 고쳐 쓴 글자가 없다. 그래서 우선 이렇게 그대로 둔다.-얼마 지나지 않아 왜적 1백여 명이 노략질하다가 성의 남쪽에 이르렀다. 정문부가 군사들에게 문을 열라 명하고 적 몇 명의 목을 베자 적들이 달아났다. 육진(六鎭)의 배반한 자들은 정문부가 배반한 자들을 풀어줬다는 소식을 듣고 앞다투어 투항하자 민심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이에 비로소 장졸들을 보내어 반란의 우두머리를 쫓아가 토벌하게 하니, 명천(明川)의 말수(末秀)와 회령의 국경인(鞠景仁)이 연달아 붙잡혔다. 마침내 이들을 국세필 등 13인과 함께 모두 베어서 여러 진에 조리돌림 하였다. 병사들이 모집에 꽤 응하여 그 무리가 6천 명에 이르렀는데, 정현룡이 경성을 지키면서 틈을 엿보려고 하니 정문부가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나라를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저 자신을 지킬 뿐 나아가 적을 공격하지 않으니 배반한 무리를 본받으려는 것입니까. 여론을 들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남문 밖에 사람들을 모아 두 사람의 논쟁에 대해 누가 옳은지 물었더니 사람들은 모두 정문부를 옳게 여겼다.10월 2일에 명천(明川)과 길주(吉州)의 경계로 진병(進兵)하였다. 이때부터 연달아 적과 싸워 장덕산(長德山)에서 크게 이기고 쌍개포(雙介浦)에서 재차 이겼으며 길주성과 영동책(嶺東栅)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고개를 넘어 단천군(端川郡)을 구한 뒤 가등청정과 백탑교(白塔郊)에서 전투를 벌여 전후로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 사실은 《길주사적(吉州事蹟)》에 실려 있다. 이때 관찰사(觀察使) 윤탁연(尹卓然)33)이 정문부의 명성과 공적이 자기보다 뛰어남을 질시하여 큰소리로 비난하며 "정문부는 본래 한 장수의 막좌(幕佐)로 스스로 대장이 되어서는 안 되기에 자기의 절도를 어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문부가 양보하지 않자 윤탁연은 매우 화를 내며 사실과 반대로 행재소(行在所)에 알리고 수급(首級)을 모조리 빼앗아 휘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뇌물로 줄 것을 도모하였다. 또 정현룡 등을 불러 들여 정문부의 군대를 맡게 하면서 장군을 여섯 번이나 바꾸자 군인들이 그때마다 흩어져 달아나 어쩔 수 없이 정문부를 일으켜 그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그사이 전기(戰機)를 그르친 것은 대부분 이 때문이었다.정현룡이 처음에는 겁을 먹어서 앞장서려고 하지 않았는데, 공을 세우게 되자 다시 정문부와 틈이 생겼다. 이에 앞서 약탈을 당한 사대부들이 많이 정문부에게 나아가 재산과 보물을 찾아서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정문부는 백성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사대부들이 다시 정현룡에게 요구하니 그가 듣고서 허락하였는데, 정문부가 또 책망하며 그만두게 하였다. 이에 정현룡은 마침내 유언비어를 날조하는 데 참여하고 관찰사가 몰래 그 일을 주관하여 매번 군법에 따라 정문부를 죽이고자 하였으며, 정문부의 장좌(將佐)들은 이따금 불려가 매질과 고문을 당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군정(軍情)은 더욱 격분하였으니, 공적을 세웠는데도 해를 입었다고 하여 정문부를 배반하지 않았다.이듬해 조정에서는 정현룡을 방어사(防禦使)로 발탁하고 이윽고 절도사(節度使)로 옮겨주었다. 정문부가 비로소 병권을 놓고 북쪽으로 육진에 가서 변방의 오랑캐들을 타일러 투항하게 하고 배반한 무리를 찾아 죽이자 관북이 마침내 평정이 되었으니, 대개 모든 것이 그의 힘이었다. 아! 관북은 풍속이 본래 오랑캐와 같으며 길이 멀고 험하여 절로 다른 구역이 되니 옛날 이른바 '병목의 요새'였다. 그럼에도 가등청정이 승세를 탄 병사로 그 입구를 움켜쥐고 배반한 적들이 성읍(城邑)과 연대해서 짝을 이루어 합세하니 사람 하나 땅 한 자도 이미 우리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러나 서너 명의 유생들이 한 사람의 종사관을 잘 추대할 줄 알았기에 달아나 숨어 있던 중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적은 수로 많은 무리를 공격하여 빈기(邠歧)34) 같은 옛 날 영토가 오랑캐의 땅35)이 되지 않게 하였다. 그러니 그 공을 충분히 이야기할 만하고 우리나라가 문치(文治)를 닦아 풍속을 변화시킨 효험 또한 볼 수 있다.그러나 정문부는 역적 국세필을 죽인 공로로 회령 사람들과 함께 겨우 3품에 오르고 어려운 일에 따른 병사들은 한 사람도 고신(告身)36)도 받지 못한 채 도리어 모욕을 당하였다. 이에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울분을 느끼고 한탄하며 왕사(王事)를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하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돌아보면 애당초 조정은 거리가 멀어서 그를 무고하는 한두 장계에만 근거하여 그대로 믿어 버렸는데 그 뒤 20년간 사신이 행차하여 묻는 일이 없지 않았으나 으레 이전의 일이라서 마음에 두지 않고 간혹 조정의 허튼 소문에 미혹되어 끝내 그 실상을 기록한 자가 없었다. 근래 일을 마친 여가에 늙은 군교 및 퇴역한 병졸들에게 즐겨 물어서 깊은 산속과 궁벽한 변방에까지 이목(耳目)이 두루 미쳤는데 들어 알게 된 사실이 한결같았으니, 비록 윤탁연과 정현룡의 무리에게 좌우되는 사람일지라도 감히 더하거나 꾸미지 못하였다. 그런 뒤에 단연코 의심하지 않게 되었으니, 그 개략을 간략하게 써서 사적의 끝에 외람되이 붙인다.무릇 정문부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다음과 같다. 서울 사람 권관(權管) 고경민(高敬民), 봉사(奉事) 오대남(吳大男), 경성(鏡城) 사람으로 출신(出身)인 권관 강문우(姜文佑), 훈도(訓導) 이붕수(李鵬壽) -전사하였다-, 박은주(朴銀柱), 유생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 박유일(朴惟一), 김여광(金麗光) -전사하였다-, 오윤적(吳允迪), 부령(富寧) 사람으로 출신인 차응린(車應麟), 박극근(朴克謹), 유생 김전(金銓), 김경(金鏡), 차득도(車得道), 경원(慶源) 사람 정윤걸(鄭允傑)과 정응성(鄭應聖) 부자(父子), 경성 사람으로 출신인 김사주(金嗣朱), 최경수(崔敬守), 남계인(南繼仁) -본래 관노였다.- 온성(穩城) 사람 여정(余貞) -본래 관노였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신립(申砬)을 따라 전공을 세웠다. 이때 영동(嶺東)의 전투에서 죽었다.- 등이다.이상은 선부군의 사실을 기록한 말단에 정공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의 성명으로, 겨우 초고에서 분별한 것이다. 또한 여정의 이름의 소주 아래에 길주(吉州)와 명천(明川) 네 글자를 나란히 쓰고 그 아래는 빠져 있으니, 아마도 두 고을의 의사를 채록하려 했으나 고증할 수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 또 들으니 경성(鏡城)과 육진에도 빠진 사람이 있다고 하니, 내가 추가로 채방하여 아래에 별록을 만들었다. -순찰사 민공에게 보고한 토적의사(討賊義士)의 별록에 보인다.- 아들 이단하는 절하며 삼가 기록한다. 萬曆二十年【宣祖二十六年】壬辰六月, 倭將淸正長驅寇北, 兵馬使韓克諴欲守磨天嶺, 以保關北, 軍潰而走, 賊遂入吉·明·鏡·富等鎭, 入會寧擄王子, 從渡江攻掠老土部落, 還由鍾城·門巖, 渡江歷入穩城·慶源·慶興沿海路, 還趨鏡城。於是鎭堡叛兵, 爭縛守將, 擧城附賊。鏡城則寺奴鞠世弼【世弼乃是官奴, 寺字或誤, 疑卽寺奴而移屬官奴。】爲酋, 受倭署, 置有官號, 聲勢尤張。八月淸正使一偏將, 分領數千步兵, 據吉州, 以總攝諸鎭, 身歸南道, 北靑安邊各置重兵, 以爲聲援。當此時, 自大將以下至士夫, 避亂落北者, 陷賊殆盡, 獨評事鄭文孚, 以故與土居儒生相善, 故累窘迫, 獲脫免。遂與前監司李聖任·慶源府使吳應台·慶興府使羅廷彥·輸城察訪崔東望·謫人韓伯謙·羅德明等, 起義兵, 入據府城。世弼挾賊勢恐喝, 皆潰散, 或從間道南奔。文孚復窘匿禦亂里民家, 儒生等聞而赴之。文孚欲由海道南還, 儒生要與復興義兵, 文孚察其有忱懇, 強而後許。乃使數輩, 號召近境吳應台等及鍾城府使鄭見龍·高嶺僉使柳擎天, 皆來會。文孚讓見龍主盟, 見龍固辭, 士民亦願屬文孚, 遂推爲大將, 見龍應台爲次將, 散亡稍集, 幷三百餘人。九月十五日, 引兵到府城, 世弼懸門不納, 叱曰: "爾輩欲耗我粮耶, 亟去。" 文孚且脅且誘, 世弼遽迎納, 諸將欲先斬世弼, 文孚曰: "遽也, 非計也。" 仍命世弼句管官事, 又用叛兵嘗射傷已者爲裨將。【裨將二字, 本草以墨抹去, 而無改下字, 故姑此仍存。】 未幾, 倭賊百餘人, 掠至城南, 文孚命軍士開門, 擊斬數人, 賊退走, 六鎭聞文孚且釋反側, 爭相送款, 人情稍定。始發遣將士, 追討反魁, 明川末秀·會寧鞠景仁, 連次就執, 遂幷世弼等十三人, 斬以徇諸鎭。兵頗應募, 衆至六千人, 鄭見龍欲保鏡城以俟釁, 文孚曰: "本興義兵, 國耳。今但自守, 不進擊賊, 欲效叛徒爲耶。請聽于輿人。" 詰朝集衆南門外, 諭以兩人所爭孰可, 衆皆是文孚。十月二日, 進兵明吉界, 自是連與賊遇, 大蹂于長德山, 再捷于雙介浦, 屢圍吉州城及嶺東栅, 踰嶺救端川郡, 與淸正戰白塔郊, 前後斬千餘級, 語在《吉州事蹟》。是時, 觀察使尹卓然嫉文孚聲績掩己, 嘖言, "文孚本一將幕佐, 不當自爲大將, 違已節度。" 文孚不爲遜, 卓然大怒, 反其實以聞行在, 盡抄其首級, 分與麾下人, 以謀賂遺。又邀見龍等, 主文孚軍, 六易將軍, 人輒散去, 不得已起文孚領之。其間誤戰機, 多以此故。見龍初恇㥘, 不欲爲標首, 及有功, 又與文孚相郤。先是, 被掠士大夫多就文孚, 求搜還財寶, 文孚慮擾民不許, 又求於見龍, 見龍聽許, 文孚又訶, 止之。遂與造飛語, 觀察使陰主之, 每欲以軍法殺文孚, 文孚將佐, 往往被追榜掠危死, 然軍情益激, 不以無功受毒, 貳於文孚。明年, 朝廷擢見龍防禦使, 俄遷節度使。文孚始釋兵, 北行六鎭, 招服藩胡, 搜誅反黨, 關北卒就平定, 大抵皆其力也。嗚呼, 關北俗本戎羯, 地深阻, 自爲一區域, 古所稱甁項塞, 而淸正以勝兵扼其口, 叛賊連帶城邑, 雌雄合勢, 一人尺土, 已非我有, 而數三儒生能知推擧一介從事, 於逋竄之中, 抵觸危險, 以少擊衆, 使邠岐舊疆, 免淪於左袵, 其功有足談者, 我國家修文變俗之效, 亦可覩矣。然文孚僅以誅鞠賊功, 與會寧人同陞三品秩, 從難之士, 未得一告身, 返被僇辱, 至于今, 人情憤惋, 以爲王事不可成也, 豈不惜哉。顧當初朝問隔遠, 只據一二誣啓爲信, 厥後二十年間, 非無原隰諮詢, 而例不以前事爲意, 或爲內朝浮聞所惑, 終未有記其實者。頃於從役之暇, 竊好問老校退卒, 深山窮塞, 耳目殆遍, 而所聞知如一, 雖爲卓然見龍輩所左右者, 亦不敢有所增餙, 然後斷然不疑, 略書其槩, 僭付于事蹟之末。凡同文孚起兵者, 京人權管高敬民·奉事吳大男·鏡城出身權管姜文佑·訓導李生鵬壽【戰死】·朴銀柱·儒生崔配天·池達源·朴惟一·金麗光【戰死】·吳允迪·富寧出身車應麟·朴克謹·儒生金銓·金鏡·車得道·慶源人鄭允傑應星父子·鏡城出身金嗣朱·崔敬守·南繼仁【本官奴】·穩城余貞【本官奴癸未從申砬有戰功至是死於嶺東之戰】右, 先府君記事末端, 同鄭公起兵人姓名, 僅辨於草稿中。且余貞名小註下, 列書吉州明川四字, 而其下缺, 蓋必採錄兩邑義士而無可攷, 又聞鏡城及六鎭, 亦有闕漏之人, 不肖追加採訪, 有別錄見于下。【見下報巡察使閔公討賊義士別錄中】 男端夏拜手謹識。 선조 26년이다 1592년은 선조(宣祖) 25년으로, 오기(誤記)이다. 노토락부(老土部落)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는 '노토부락(老兔部落)'으로 되어 있다. 어란리(禦亂里) 경성부(鏡城府) 남쪽 100리 지점에 있다. 윤탁연 1538∼1594.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왕의 특명으로 함경도 도순찰사가 되어서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 방어 계획을 세우는 등 시국 타개를 위해 노력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빈기(邠岐) 주나라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는 원래 빈(邠)에 도읍하였는데, 북적(北狄)의 침공을 받아 기산(岐山) 아래로 천도하였다. 주나라는 뒤에 이곳을 근거로 왕업(王業)을 이루었다. 후에 제왕의 발상지를 이르는 말로 쓰였는데, 여기서는 이성계의 고향 영흥(永興)이 있는 함경도를 가리킨다. 영흥(永興)에는 그의 어진(御眞)을 모신 선원전(濬源殿)이 있다. 오랑캐의 땅 원문의 '좌임(左衽)'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의 풍속을 말한다. 고신(告身) 조선시대에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수여할 때 발급하던 임명장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의려록 전적 박흥종 義旅錄 【典籍朴興宗】 임진년 7월에 왜적이 승승장구하여 함경도에 들어가서 마쳔령(磨天嶺)을 넘었는데 병사들의 기세가 매우 강성하였으니, 절도사(節度使) 한극함(韓克諴)이 싸움에서 패한 뒤로 여러 고을이 따라서 와해되었다. 14일에 역적들이 경성(鏡城) 지역에 들어가 드디어 왜놈을 인도하여 북으로 가게 되어 강가를 따라 왜적이 가득하였으니,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산으로 들어갔으므로 다시 이 지역을 수복할 희망이 없었다. 그런데 흉도들이 몰래 일어나 왕왕 역적들과 더불어 당여(黨與)를 지으니 명천(明川)의 말수(末秀), 목남(木男)과 경성(鏡城)의 국세필(鞠世弼), 회령(會寧)의 국경인(鞠景仁)이 다 적당의 괴수였다. 국세필은 군사를 거느려 성을 점거하여 왜적과 더불어 후원하는 형세를 맺고 백성을 위협하여 장차 산림을 수색하여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를 모조리 죽이고자 하니 의관을 갖춘 선비들이 머리를 움츠리고 숨어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유생 이붕수(李鵬壽)가 탄식하고서 울분을 토하며 말하기를 "나라가 어지러워 흥망을 알 수 없는데, 흉도가 틈을 타서 난을 일으켜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라 하고 이에 드디어 거의(擧義)하여 적을 토벌할 것을 꾀하고 문무의 재주를 갖추고 인망이 있는 자를 구하여 주장(主將)을 삼으려고 했는데 그런 사람을 얻지 못하였다. 처음에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가 적에게 함락되었던 중에 탈출해서 도망하여 떨어진 옷을 입고 부령(富寧), 청암(淸巖) 지역을 다니면서 걸식하였는데, -이 당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우주의 가운데 칠척의 몸, 아득한 곳에 홀로 서니 이웃할 그림자도 없네. 다만 청산에 길을 빌릴 수 있으니, 석양에 오랫동안 오가는 사람이로다.[宇宙中間七尺身, 蒼茫獨立影無隣. 惟有靑山能借路, 夕陽長作往來人]"-, 굶주려 능히 다니지 못하고 더러는 나물을 먹었다.용성(龍城)에 이르러 무인(巫人) 한인간(韓仁侃)의 집에 찾아갔는데, 한인간이 자세히 보고 말하기를 "평사공(評事公)이 아니십니까?"라 하니, 평사가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나는 서울 상인인데 난을 만나 돌아가지 못하고 걸식하다가 여기까지 왔으니 그대는 어찌 망언을 하느냐?"라 하였다. 한인간이 속으로 그인 줄 알고 즉시 집안으로 맞아들여 후하게 대접하였다. 추석에 한인간이 그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제수(祭需)로써 평사에게 올리니 평사가 말하기를 "예에 이처럼 할 수 없다."라 하였다. 한인간이 말하기를 "나의 조상은 천한 사람입니다. 가령 생존하셨는데 평사가 계셨다면 진실로 감히 그 음식을 먼저 맛보지 못하실 것입니다."라 하였으니, 그가 공경하고 예를 다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평사가 후에 길주 목사가 되어 한인간 부부를 맞이하여 관아에 앉히고 그 은덕을 두터이 보답하였다.-이곳에 기거한 지 5~6일이 되어 평사가 샛길을 따라 남으로 가다가 서생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을 만났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의를 좋아하는 자이다. 혹 업기도 하고 끌기도 하면서 가다가 다른 사람이 평사를 찾을까 두려워하여 몸을 풀 사이에 숨겼고 혹 사람들이 보면 반드시 정 서방이라 불렀다. 드디어 그들과 더불어 동행하여 어랑리(漁郞里) 무계(武溪)의 이붕수(李鵬壽)의 집에 이르렀는데, 이붕수가 나와 보고는 크게 기뻐하여 드디어 가산을 기울여 가며 침식을 제공하고 인하여 주장(主將)으로 추대하고 그가 지휘할 것을 여쭈었다. 그리고 최배천, 지달원 등과 모의하여 그 동류를 끌어들이고 서로 말을 전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으니 경내의 사람들이 점점 모였다. 강문우(姜文佑)가 제일 먼저 왔고,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이 또 왔는데 무계에 머문 지 거의 한 달이 되었다. 이붕수가 몸소 양식을 지고 산길과 샛길을 따라 숨어 다니면서 길주로 달려가서 몰래 왜병이 출입하는 형세를 관찰하였다. 이와 같이 두 번 하였는데, 왜인이 국세필과 더불어 상통하고 왕래가 끊어지질 않거늘 강문우 등으로 하여금 길에서 맞아서 다 죽이게 하였다.이에 드디어 평사를 창의 대장(倡義大將)으로 삼고서 이붕수가 창의 별장이 되었고 종성 부사 정현룡은 창의 중위장이 되었으며 강문우는 척후장이 되었다. 이 때에 북쪽 오랑캐들이 도둑질하러 내지까지 들어왔는데 부령 고현(古縣)까지 침입하여 인민들을 협박하고 노략질하니 곧 사자를 국세필에게 보내 오랑캐를 막는 데 협력하여 줄 것을 일렀었다. 9월 10일이 되어 창의 대장 정문부가 군사를 일으켜 경성에 들어가 유정(柳亭)에 진을 쳤고 -바로 경성에서 5리 정도의 거리에 있다.- 또 사자를 국세필에게 보내어 형세를 살펴보는데, 국세필은 병사의 위세를 성대하게 펼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창의의 병사는 겨우 1백여 명이므로 중과(衆寡)의 차이가 현격하여 형세가 매우 위태로웠는데, 창의 대장은 조금도 겁을 내지 않고 드디어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들어가서 국세필과 마주하고서 그 이해(利害)를 말하는데 언사가 여유가 있고 민첩하며 이치에 적합하니, 이 때문에 능히 흉악한 예봉을 거두고 감히 행동하지 못하였다. 국세필이 친속으로서 좌우에 모시도록 하고 그 동정을 엿보았는데, 창의 대장은 그 친속과 사졸들을 시켜 성에 올라 성첩(城堞)에 나누어 서서 군법에 의하여 전투를 연습하는데 밤에 이르러 그쳤다. 그 이튿날 새벽에 또 성에 올라 어제 저녁처럼 하였다.평사가 대장의 기를 세우고 남문루(南門樓)에 올라가서 자리를 바르게 하고 앉아서 두 잔 술을 마셨는데 조금 있다가 제장(諸將) 이하 모두 다 들어와 국궁(鞠躬)하고 예를 행하였다. 국세필이 먼저 들어오거늘 강문우 등에게 그를 잡아 그 활과 칼을 빼앗고 남문 밖에 포박하여 나가 그 죄를 열거하고 먼저 사지(四肢)를 자른 연후에 그 머리를 베어 조리 돌리고 그의 위협에 따른 자들을 사면하면서 이 뒤에 공을 세우도록 책망하였다. 이에 군대의 함성이 진동하고 장사의 기운이 배가 되어 드디어 그 군대를 통솔하였다. 당일로 그들을 이끌고 남으로 와 명천(明川)에 주둔하고서 말수(末秀)와 목남(木南) 등의 목을 베어 죽였으며, 모병을 하는데 남북 사람이 다 호응하여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11월 15일에 왜적과 길주(吉州) 장평(長坪) 석을고개(石乙古介)에서 싸웠는데 아군이 승세를 타서 크게 승리하였으니, 귀를 벤 숫자는 다 헤아릴 수 없었으며 왜장이 후퇴하여 성벽 안으로 들어갔다. 12월 10일에 또 길주 쌍포(雙浦)에서 싸웠는데 아군이 철기(鐵騎)로써 빠르게 내달려 그 진의 왜병을 들이받고 한 번 불을 지르니 손댈 틈이 없이 다 후퇴하여 뿔뿔이 흩어졌다. 아군이 드디어 승리의 틈을 타서 크게 격파하였다. -창의 대장이 격서를 왜장에게 던져 주며 말하기를 "장평에서 귀를 벤 것이 헤아릴 수 없으니 응당 죽은 뒤에도 도망 다닐 놈이 될 것이며, 쌍포에서 거세당한 자가 매우 많으니 다만 살아 있을 때의 남자일 뿐이다."라고 하였다.-이듬해 계사년 정월 26일에 단천(端川) 지마흘(地馬屹) 지역에서 싸웠는데 세 번 싸워 세 번 다 이겼으며, 드디어 길주에 회군하여 그 군사와 말을 휴식하게 하였다. 얼마 뒤에 왜장이 대병을 보내 길주에 주둔한 왜군을 맞이하여 남도로 철수한다는 첩보를 듣고 대장은 군사를 거느리며 싸우고 추격하여 백탑교(白塔郊) 남칠목(南潻木) 아래에 이르렀다. 별장 이붕수가 한 왜장을 활을 쏘았는데 활시위 소리가 나자마자 왜장이 쓰러졌다. 이붕수가 곧 몸을 빼내 대장의 말 앞에 나가 섰는데 문득 탄환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주을온 만호(朱乙溫萬戶) 이희당(李希唐)도 같은 날에 죽었는데 이때가 28일이었다. -대장과 나덕명(羅德明) 두 분이 시를 지어 애도하였다. 그 후에 찰방(察訪) 이성길(李成吉)이 또한 장편시를 지었다. 평사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문에 들어오니 혼백은 눈에 선한데, 연로한 형만 두고 어머니도 저버렸어라. 천 년 전 장순과 허원37)이, 구중의 황천길에 행여 함께 돌아가리.[入門魂魄想依依, 有老兄存母亦違. 千載張巡與許遠, 九重泉路倘同歸.]"라 하였다. 이성길의 시는 다음과 같다. "오직 공이 다행히 장인길38)의 점괘 만나, 강개하여 함께 적의 괴수 죽이기를 기약하였네. 몸을 범 아가리에 던져 중과를 시험하면서, 역적 무리 바라보기를 어린아이 같이 하였네.[惟公幸遇丈人吉, 慷慨期同誅賊魁. 投身虎口試衆寡, 阿睹賊徒如嬰孩.]"라 하였으며, 또한 "사람들은 모두 뒤에 쳐졌는데 그대 먼저 올랐으니, 분개한 마음은 속에 가득하여 자재하기 어려웠어라. 뜻밖에 조총의 탄환이 영혼을 흩으니, 비로소 충성이 화근이 된 줄 알겠네.[人皆後殿于先登, 憤惋彌中難自裁. 無端鳥丸散英魂, 始覺忠誠爲禍媒.]"라 하였으며, 또한 "장군의 절개 기록하여 구중궁궐에 아뢰고, 은전을 내려 후대에 전해지게 하여야 하네. 서생은 싸우다 죽고 무장은 온전하니, 여러 진에서 의견이 분분하니 참으로 비웃을 만하네. 공에게 드러난 은전 없고 상도 없으니, 세상에 시기하는 자 많은 것을 또한 알겠네.[將軍錄節奏九重, 褒贈要令傳後來. 書生戰死武夫全, 列鎭紛紛良可咍. 公無顯典將無賞, 也知世路多嫌猜.]"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시의 대략이다.-이에 최배천을 시켜 첩서(捷書)를 품고 사잇길을 따라 가서 행재소에 아뢰니, 선조 대왕이 그를 인견하고 눈물을 흘렸다. 최배천에게 조산 대부(朝散大夫)의 작질(爵秩)을 보태주며 명주 1필을 내렸고 이붕수는 사헌부 감찰로 추증하였다.평사가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에 고립된 군대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여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 남의 의표를 찔렀으니 능히 적으로 하여금 감히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서 두 손을 마주잡고 죽게 하였다. 사람 기용을 잘하여 각각 그 재주에 맞도록 하고 호령이 엄하여 사람이 감히 법을 어기지 못하였으니, 이 때문에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 싸우게 만들어서 강토를 회복한 것이다. 최배천과 지달원은 시종 모의에 참여하여 힘을 쓴 것이 가장 많았다. 강문우도 호걸의 장부로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키며 의기를 중히 여겼으니, 매양 선봉장이 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적에 달려들어 싸우면 반드시 공을 세웠다. 壬辰七月, 倭賊長驅, 入咸鏡道, 逾磨天嶺, 兵勢甚盛, 節度使韓克諴戰敗, 列郡從而瓦解。十四日, 賊入鏡城界, 遂引而北, 瀰滿沿江, 諸郡人民避亂入山, 無復有恢復之望。兇徒竊發, 往往與賊爲黨, 明川之末秀·木男, 鏡城之鞠世弼·會寧之鞠景仁, 皆賊黨魁首也。鞠世弼擁兵據城, 與倭結爲聲援, 威脅人民, 將欲搜括山林, 屠戮其不從令者, 衣冠士子, 縮首潛匿, 而不敢出。儒生李鵬壽, 慨然發憤曰: "邦國板蕩, 未知興亡, 兇徒之乘隙作亂, 乃至此乎。" 於是遂謀擧義討賊, 求文武才有人望者爲主將, 而未得其人。初, 北評事鄭文孚, 陷賊中, 脫身逃走, 弊衣行乞於富寧淸巖境,【時有詩曰, 宇宙中間七尺身, 蒼茫獨立影無隣。惟有靑山能借路, 夕陽長作往來人。】 飢乏不能行, 或食野菜。至龍城, 投巫人韓仁侃之家, 仁侃熟視曰: "豈評事公耶。" 評事惕然曰: "我乃京商人, 遭亂不得歸, 丐乞至此, 子何妄言耶。" 仁侃心知之, 卽引入其家, 而厚遇之。秋夕日, 仁侃祭其祖先, 以祭饌進於評事, 評事曰: "禮不可如此。" 仁侃曰: "吾祖賤人, 假令生存, 有評事在, 則固不敢先嘗其食。" 其致敬盡禮, 類如此。【評事後爲吉州牧, 迎仁侃夫妻, 置衙內而厚報其德。】 居五六日, 評事從間道南行, 遇書生崔配天·池達源, 此二人, 皆好義者也。或負或携而行, 恐人物色之, 竄身草間, 而人或見之, 則必以鄭書房呼之。遂與之同行, 至漁郞武溪李鵬壽家, 鵬壽出見大喜, 遂傾家奉之, 仍推爲主將, 稟其指揮, 而與配天達源等協謀, 引其同類, 傳相招諭, 則境內之人, 稍稍赴集。而姜文佑最先至, 鍾城府使鄭見龍亦來會, 住武溪者幾一月矣。鵬壽身自負粮, 從山路間行, 趨吉州, 密觀倭兵出入形勢, 如是者凡再度, 而倭人與鞠世弼相通往來不絶, 使姜文佑等, 邀於路盡殺之。於是遂以評事爲倡義大將, 李鵬壽爲倡義別, 將鍾城府使鄭見龍爲倡義中衛將, 姜文佑爲斥候將。當是時, 北狄入寇內地, 至富寧古縣, 劫掠人民, 卽遣使于鞠世弼, 喩以協力禦狄。至九月初十日, 倡義大將鄭文孚, 起兵入鏡城, 結陣于柳亭,【卽鏡城五里程】 又遣使于世弼, 觀形勢, 則世弼盛陳兵威, 以待之, 而倡義兵僅百餘人, 衆寡懸絶, 形勢甚危, 而倡義大將, 略不動容, 遂領兵入城, 與世弼相見, 語其利害, 言辭贍敏, 而順於理, 以此能戢其兇鋒而不敢動。世弼以親屬, 夾侍左右, 伺其動靜, 倡義大將, 乃使其屬幷士卒登城, 分立城堞, 依軍法習戰, 至夜乃罷。翌日平明, 又使登城, 如昨夕焉。評事建大將旗上南門樓, 正位而坐, 飮二巵酒, 俄而諸將官以下, 皆入鞠躬行禮, 而鞠世弼先入, 使姜文佑等執之, 奪其弓釰, 縛出南門外, 列數其罪, 先斷四肢, 然後斬其頸以徇, 赦其脅從者, 而責立後功。於是軍聲遂振, 壯士氣倍, 遂領其衆, 卽日引而南, 屯于明川, 斬末秀木男等, 募兵, 南北人皆響應, 衆至數千人。十一月十五日, 與倭合戰于吉州長坪石乙古介, 我軍乘勝大捷, 斬馘不可勝計, 倭將退入壁。十二月初十日, 又戰于吉州雙浦, 我軍以鐵騎疾入, 衝突其陣倭兵, 一番放火後, 不及措手, 皆辟易散亂, 我軍遂乘勝大破之。【倡義大將, 以檄書投倭將曰: "長坪之斬耳無數, 應作死後之逃奴。雙浦之割勢甚多, 只是生前之男子云。】 越明年癸巳正月二十六日, 戰于端川地馬屹境, 三戰三勝, 遂還軍吉州, 休其士馬。俄聞倭將遣大兵, 迎吉州所駐倭, 撤還南道, 大將帥師, 且戰且追, 至白塔郊南潻木下。別將李鵬壽射一倭將, 應弦而倒, 鵬壽卽挺出大將馬前而立, 忽中丸死。朱乙溫萬戶李希唐, 亦同日死, 時則二十八日也。【大將及羅德明, 幷爲詩以哀。其後察訪李成吉, 亦爲製長篇一首。評事詩曰, 入門魂魄想依依, 有老兄存母亦違。千載張巡與許遠, 九重泉路倘同歸。李詩曰, 惟公幸遇丈人吉, 慷慨期同誅賊魁。投身虎口試衆寡, 阿睹賊徒如嬰孩。又曰, 人皆後殿于先登, 憤惋彌中難自裁。無端鳥丸散英魂, 始覺忠誠爲禍媒。又曰, 將軍錄節奏九重, 褒贈要令傳後來。書生戰死武夫全, 列鎭紛紛良可咍。公無顯典將無賞, 也知世路多嫌猜。此其大略也。】 乃使崔配天懷捷書, 從間路, 奏行在所,【時乘輿播越永柔縣】 宣祖大王引見流涕, 加配天朝散大夫, 而賜帛一疋, 追贈李鵬壽司憲府監察。評事初起兵時, 以孤軍入虎穴, 臨危處變, 出人意表, 能使賊不敢動, 而斂手就戮, 又善於用人, 各盡其才, 而號令嚴明, 人不敢犯法。以此能得人死力, 而恢復疆土。崔配天·池達源, 終始參謀, 宣力最多, 姜文佑, 亦豪健丈夫, 能立然諾, 重意氣, 每爲先鋒將, 能冒死赴敵, 而戰必有功。 장순과 허원 당 현종(唐玄宗) 때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일거에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함락하였는데, 이때 진원 현령(眞源縣令) 장순(張巡)과 수양 태수(睢陽太守) 허원(許遠)이 강회 지역의 보장(保障)이라고 일컬어지는 수양성(睢陽城)에서 안녹산의 장수 윤자기(尹子奇)가 이끄는 대군을 막아 낸 일을 말한다. 후에 구원병이 오지 않고 군량도 떨어져 결국 성은 함락되고 장순과 허원은 적에게 사로잡혔으나, 두 사람 모두 적에게 굴복하지 않고 전사하였다. 《舊唐書 忠義列傳下 許遠》 장인길 《주역》 〈사괘(師卦)〉에 "사(師)는 바르니, 장인이라야 길하고 허물이 없으리라.[師貞, 丈人吉, 無咎.]" 하였다. 사(師)는 군대를 거느리는 자를 말하며, 장인은 존엄한 어른을 말한다. 전(傳)에 말하기를, "사(師)의 도는 정도(正道)를 근본으로 삼는다. 군대를 통솔하고 무리를 거느림은 사람들이 존신(尊信)하고 외복(畏服)하는 자가 아니면 어찌 인심의 따름을 얻겠는가."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시장 예조판서 민진후 諡狀 【禮曹判書閔鎭厚】 선조 때의 명신 전주 부윤(全州府尹) 농포(農圃) 정공(鄭公)이 세상을 떠난 지 80년 만에, 그의 증손 전 주부(主簿) 삼(杉)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의 증조부 문부(文孚)가 임진년 난리 때에 북평사(北評事)로서 의병을 일으켜, 토적을 무찌르고 왜구를 격파하여 관북을 평정했건마는, 관찰사가 사실을 숨겨 공적과 포상이 실제에 걸맞지 아니하였습니다. 인조(仁祖)께서 반정한 처음에 불행히 횡액으로 옥사에 연루됨에 걸려들어 마침내 시안(詩案) 때문에 옥중에서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선왕조에 이르러 그 원통함을 씻어 주고 작위를 내리고 공로를 녹훈하였으며, 후에 그를 이어 사당의 편액을 특별히 하사하여 융숭한 보답의 은전이 크게 갖추어졌습니다. 그러나 오직 시호를 주는 일 한 가지만은 아직 실시되지 못했으니 어찌 성조의 한 가지 빠진 일이 아니오리까?"라 하였다. 이에 그것을 해당 관청에 내리니, 그곳에서 아뢰기를 "문부의 공렬과 절의는 선배 명신들이 말한 것이 많으니 다시 더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라의 옛 법에 실제 직함 정2품 이상이 아니면 시호를 얻지 못하는 것이 준례이오나, 취할 공적이 있어서 시호를 내리는 자에게는 또한 반드시 거기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니 삼의 말이 옳습니다."라 하니, 주상께서 곧 그것을 허락해주었다.그 뒤 10년이 지나 삼의 재종제 되는 구(構)가 공의 문집과 가장(家狀) 한 통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선조(先祖)의 시호는 이미 임금의 재가를 얻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형 삼이 병으로 죽고 태상(太常)의 시장이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았는데 세상에서 나의 선조 사적을 아는 이로는 그대처럼 자세한 아는 사람이 없으므로 감히 부탁하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나는 두 번 절하며 그것을 받고서 말하기를 "그렇다. 옛날 우리 선친 문정공(文貞公)39)이 경성 통판(鏡城通判)으로 계셨을 적에 공의 유풍을 듣고 충의를 사모함이 대단히 지극하여 제문을 지어 공과 더불어 같이 거의(擧義)한 이들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고, 또 돌아가신 중부(仲父) 의정공(議政公)40)이 일찍이 북도를 안찰했을 적에 공의 사당을 세워 길이 교화의 터전을 만들어 백성으로 하여금 분발케 한 바 있었습니다. 진후는 비록 못났지마는 오히려 어진 부형 둔 것을 기뻐할 줄은 알거늘 이제 공에 대한 글 수고쯤이야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자는 자허(子虛)요, 농포(農圃)는 그의 호다. 계통은 해주(海州)에서 나왔는데, 고려 시중(侍中) 숙(肅)의 후손이다. 조선 왕조에 와서는 찬성사(贊成事) 정도공(貞度公) 역(易)이 가장 현달하였으며, 그 아들 동지중추부사 충석(忠碩)은 효성과 우애로써 널리 알려졌다. 동지의 아들은 참의(參議) 침(忱)이요, 참의의 아들은 부사(府使) 연경(延慶)이다. 부사로부터 3대가 지나 공의 아버지 신(愼)은 대사간(大司諫)을 지냈으며 예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정부인 김씨로 장사랑(將仕郞) 흥례(興禮)의 따님이다.공은 가정(嘉靖) 을축년(명종 20, 1565년) 2월 19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의젓하고 큰 뜻을 지녀 장난할 때도 반드시 편을 갈라 진을 치고 적을 마주하여 서로 싸움하는 모습을 보였다. 공이 한가운데에서 호령하면 뭇 아이들은 모두 그 약속이나 한 듯 명령을 받들었다. 일찍이 범 잡는 것을 구경할 적에 포효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자 뭇 아이들은 엎어지며 피해 달아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공만은 혼자 태연히 그대로 앉아 있으므로 보는 이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또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서 글을 읽는데 한 번 눈을 거치기만 하면 외웠으며, 7~8세 때에 지은 시 구절은 당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간간이 활쏘기를 익혀 멀리서도 버들잎을 맞추는 솜씨41)가 있었고, 천문과 산수 같은 것도 모두 통달했다.을유년(1585년)에 생원, 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고, 무자년(1588년)에 명경(明經) 갑과 제 2등에 올라, 예에 의하여 한성 참군(漢城參軍)에 보직되었다. 만력 신묘년(1591년)에 북평사(北評事)에 임명되니, 평사는 실로 학교를 관장하면서 모범을 보이는 책임을 겸하고 있다. 공이 부임하여 법으로써 가르치고 예로써 접대하여 모든 학생들의 마음을 얻었다. 이듬해 여름에 왜구가 쳐들어와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하였다. 적장 청정(淸正)은 승승장구하여 북쪽에 침입했을 때 북병사(北兵使) 한극함(韓克諴)이 마천령(磨天嶺)을 지키려 하다가 군사가 궤멸되어 달아나자, 적이 마침내 쳐들어와 강가 연해 여러 고을에 가득하니 인심은 소란해지고 반란자들이 몰래 일어났다. 명천(明川)의 말수(末秀)와 목남(木南), 회령(會寧)의 국경인(鞠景仁)과 경성(鏡城)의 국세필(鞠世弼) 등은 모두 반란한 역적들의 괴수인데, 국세필은 왜서(倭署)를 받아서 관호(官號)를 두었으니 명성과 위세가 더욱 커져갔다.그 당시 임해군(臨海君), 순화(順和君) 두 왕자와 대신 김귀영(金貴榮), 부원군 황정욱(黃廷彧)과 그 아들 승지 혁(赫)이 병화를 피하여 북도에 있었는데 국경인이 잡아 묶어 왜적에게 넘겨주었으며, 남북의 병사(兵使)와 여러 고을 수령, 진보(鎭堡)의 변방 장수들도 거의 모두 반적에게 함락되었다. 공은 마침내 몰래 산 속에 숨었다가 길에서 반적을 만나 잡혀가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한 서생이 농기구를 가지고 반적을 쳐 죽이고서 공을 탈출시켰으며, 또 토착민이 쏜 화살에 거의 죽을 뻔하였다가 죽음은 면하기도 했다.공은 전 감사(監司) 이성임(李聖任)이 또한 피난 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방을 두루 찾아 서로 만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같이 의논하고 인하여 경원 부사 오응태(吳應台), 경흥 부사 나 정언(羅廷彥), 수성 찰방 최동망(崔東望), 귀양 와 있던 한백겸(韓百謙), 나덕명(羅德明)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경성에 들어갔으나 군중이 국세필의 위협에 겁내어 순식간에 궤멸되어 흩어지므로 공은 부득이 샛길로 남쪽으로 달아났다. 용성(龍城)에 이르러 무당 한인간(韓仁侃)의 집에 찾아들었는데, 한인간은 마음속으로 정공임을 알고 후하게 대접하였다. 국세필이 사람을 보내 수색하였으나 끝까지 숨기고 고발하지 아니했다. 며칠을 묵고 있다가 마침 경성 유생 최배천(崔配天)과 지달원(池達源)을 만나 함께 어랑리(漁郞里) 이붕수(李鵬壽)의 집으로 갔다. 이붕수는 의사라, 공이 오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가산을 기울여 모셨다.공은 마침내 이붕수 등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자 이에 서로 전하고 부르며 차츰 호응하는 사람들이 생겼으니, 장사(壯士) 강문우(姜文佑)가 제일 먼저 왔고, 종성 부사 정현룡(鄭見龍) 및 각 진을 지키던 장수와 피난 와 있던 조정의 관리 서성(徐渻)과 이성길(李成吉) 등이 또한 모여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공을 추대하여 맹주를 삼으려하자 공은 스스로 나이 젊고 지위가 낮음을 들어 정현룡에게 사양하였으나, 정현룡은 감히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며 또 다른 장사들도 또한 공에게 소속되기를 원하므로 이에 공은 대장이 되고 정현룡은 부장, 이붕수는 별장, 강문우는 척후장이 되어 부서가 정해진 다음 먼저 국세필에게 사람을 보내어 국가가 장차 중흥될 경사가 있음을 알리고 공을 세워 스스로 충절을 바치라는 뜻으로 타일렀다.9월 12일에 군사들을 이끌고 고을의 성에 이르니 국세필이 문을 걸고 항거하므로 협박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자, 비로소 맞아들이는데 공은 국세필의 군대 형세가 지극히 강성한 것을 보고도 조금도 겁내는 빛이 없이 천천히 반역과 순종에 대하여 변론하면서 되풀이하며 깨우쳤더니, 반적이 두려워 굴복하며 감히 움직이지 못했었다. 국세필은 그의 심복 부하를 시켜 공의 좌우에서 모시며 모든 문서를 모두 몰래 보게 했는데, 공은 장계를 올릴 때 국세필의 일에 대해서는 짐짓 완곡한 말을 만들어 그 초본을 책상 위에 두었더니 국세필이 그것을 보고 과연 기뻐하였다. 이에 공은 국세필에게 명령하여 관청 일을 맡겼다.어떤 사람이 공에게 국세필을 일찍 없애버리라 권하자 국세필은 그 말을 듣고 겁을 내니, 공은 밤에 사람들을 물리치고 홀로 앉아 국세필을 불러 함께 이야기하며 의심하지 않는 기색을 보여 주었다. 마침 왜병 90여 명이 성 아래로 육박하므로 공은 장수와 병사에게 명령을 내려 공격하여 물리치게 하자 국세필은 그 아들과 함께 왜장 한 놈을 사로잡았다. 공은 국세필 부자의 공로를 기록하여 장계하니 국세필은 스스로 안심하였으며, 공이 또 일찍이 자기를 쏘았던 자의 죄를 용서하여 비장(裨將)으로 삼자, 이에 육진(六鎭) 사람들은 공이 배반자를 놓아 주었다는 말을 듣고 서로 다투어 투항하였다.회령의 아전과 선비들이 국경인과 그 무리 여섯 명을 목 베어 그것을 군문에 바쳤다. 명천 사람도 또한 말수의 목을 베려 하다가 도리어 적에게 패하였는데, 공이 강문우와 구황(具滉)을 보내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습격하여 목을 베었다. 이 두 역적의 목을 벤 뒤에 남북이 비로소 통하여 징발한 군사가 점점 많이 모여 들게 되었으니, 고령(高嶺) 첨사 유경천(柳擎天) 등 여러 진장(鎭將)들도 또한 공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공은 호령이 엄숙하고 상벌이 분명하여 군중이 감히 법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어느 날 갑자기 두 역졸이 까닭 없이 큰소리를 치는 것이었는데, 공은 그것이 국세필의 흉계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 곧바로 두 역졸을 목을 베고 이어서 영을 내려 성에 올라 전투를 훈련시키게 하되 밤중에야 파하며 이튿날에도 또 그렇게 했다. 공은 대장기를 세우고 남문루에 앉자 국세필이 모든 장수들과 함께 군례를 올렸는데, 공은 강문우에게 명령하여 국세필을 끌어내려 목을 베어 조리돌리고 협박에 못 이겨 그의 명을 따른 자들은 모두 용서하여 다스리지 않으면서 훗날에 공을 세우게 하니 이에 군의 위세가 크게 떨쳐지게 되었다.공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군사를 내어 왜적을 치기로 의논하였는데 정현룡은 경성을 지키면서 기회를 엿보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제 다만 자신만을 지키는 것이 어찌 당초 의병을 일으킨 뜻이겠는가. 그러나 대중에게 물어서 결정하자."라 하고서 다음날 군중을 남문 밖에 모으고 가부를 물으니 모두 다 공의 말이 옳다 하였다. 이에 동관(潼關) 첨사 이응성(李應星)으로 하여금 경성에 머무르게 하고, 정현룡은 중위장을 삼고 유경천은 좌위장, 오응태는 우위장, 방원(防垣) 만호 한인제(韓仁濟)와 사절동(斜卩洞) 권관 고경민(高敬民)을 좌우복병장으로 삼았다. 10월 21일에 삼위병을 거느리고 성을 나와 몇 리를 가니, 어떤 이가 공을 맞이하면서 고하기를 "적의 형세가 매우 드세니 싸우면 반드시 이롭지 못할 것이요, 아직은 성을 지켜 스스로 보전하는 것이 옳습니다."라 하므로 공은 "네가 감히 적을 위하여 우리 군사를 막으려 하느냐."라 하고는 곧 그 머리를 베어 깃대에 매어 달고 명천으로 진군하여 주둔하고서 모든 장수들에게 방략을 지휘했다.그믐날에 왜적을 길주(吉州) 장평(長坪)에서 만나 모든 군사가 양 옆에서 공격하고 복병이 번갈아 나오자 마부와 하졸들도 용기를 내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적이 패하여 도망하므로 추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그 괴수 다섯 명을 죽였으며 82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산골로 도망간 자들도 사방으로 불을 놓아 모두 타죽게 하였으며, 또 화살에 맞아 벼랑에 떨어져 죽은 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말은 118 마리를 노획하고 적에게 노략당한 사람과 가축 및 군기 등 물건을 도로 빼앗아 온 것이 매우 많았으니 논하는 자들이 인조반정 이후 여기에 비길 만한 승첩은 없었다고들 하였다.길주에 머무는 왜적이 성에 웅거하여 굳게 지키니 여러 위장들이 여러 번 포위하여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공은 이르기를 "지금 만약 급히 뺏으려 하다가는 군사들이 많이 상할 터이니 군사를 영동(嶺東)으로 옮겨 먼저 책문 안에 있는 적을 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책문 안의 적이 평정되면 성안에 있는 적은 형세가 외롭고 후원이 끊어져 새장 속에서 새 잡는 것과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날로 영동으로 향해 옮겨 임명(臨溟)의 쌍포(雙浦)에 이르렀는데, 마침 책문 안에서 나와 노략질하는 왜적을 만나게 되자, 삼위의 날랜 기병이 한꺼번에 들이쳐 백여 명의 목을 베고 그들의 배를 갈라 창자를 내어 길가에 십여 리나 늘어놓았다. 그대로 진군하여 적의 책문을 포위하고 왜장에게 격문을 던졌는데, 그 안에 "장평에서 귀를 베인 무수한 놈들은 응당 죽은 뒤에도 도망 다닐 놈이요, 쌍포에서 거세당한 놈들은 다만 생전에서만 남자 구실한 놈들이다."라는 말이 있었다.이에 앞서 피난 온 사대부들이 토착민들에게서 무수히 약탈을 당했다가 공이 반적을 토벌하게 되자 모두 공에게로 와서 그것을 도로 찾게 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일체 들어주지 아니하였으며, 정현룡이 이 일로 백성을 소란케 하자 공이 꾸짖어 못하고 하고 곧 영을 내렸다. 정현룡은 본래 공의 성공한 것을 시기하여 여러 사대부들과 함께 유언비어를 만들어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의 귀에 들어가게 하자, 윤탁연도 본래부터 공의 명성과 업적이 자기보다 나은 것을 미워하며 마침내 공문을 발송하여 공의 죄를 따지고 대장을 바꾸어 정현룡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전후의 전공을 모두 속여 정현룡에게로 돌리고서 조정에 이를 아뢰니, 정현룡은 마침내 크게 승직되고 공은 다만 국적(鞠賊)을 죽인 것으로 당상관의 자급에 올랐다.윤탁연은 또 공을 포망장(捕亡將)으로 삼아 마천령에 머물게 했으나, 공은 사양하여 가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길주의 적을 아직 소탕하지 못하였는데, 북방 적병들이 어찌 남쪽으로 도망할 이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북병사(北兵使)가 남도에 있으면서 공으로 하여금 멀리 육진(六鎭)을 순행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오랑캐들을 억누르라고 하니 공은 마침내 부하 약간 명을 거느리고 육진을 향해 출발하여 공 있는 사람은 표창하고 죄 있는 자는 목을 베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방어하며 싸우고 지키는 것을 모두 마땅하게 하니 백성과 오랑캐들이 모두 경외하며 감히 다시 난리를 꾀하지 못했다.정현룡이 대장 된 지 한 달이 못 되어 윤탁연은 그를 다시 겸절도사(兼節度使)로 옮기고, 오응태로써 대신하게 하더니 또 한달 남짓하여 도로 공으로 대장을 삼았다. 그것은 대개 군중이 공을 잃고부터는 분하게 여기며 불평하고 의사들 대부분 흩어져 떠나니, 왜적이 이를 갈며 틈을 엿보고 반역의 남은 무리들도 또 다시 일어날 기미가 있어서 식자들이 모두 허물을 윤탁연에게로 돌렸기 때문에 이런 조처가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이가 공에게 말하기를 "공은 사퇴하지 못하겠는가."라 하니 공은 말하기를 "처음에 내가 죽음을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킨 것은 다만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바치고자 한 것이다. 이제 죽을 곳을 얻었는데, 어찌 작은 혐의를 고려하여 위급한 국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계사년(1593년) 정월에 마침내 길주에 이르러 삼위장의 군사를 먹이고 위로하니 장수와 병사들이 공이 오는 것을 보고 용기가 배나 솟아 흩어져 도망갔던 자들도 도로 모여들었다. 단천(端川) 군수 강찬(姜燦)이 달려와 공을 보고 말하기를 "단천에 남은 왜적들이 마음대로 횡행하니 군사를 나누어 칩시다."라고 하니, 공은 대답하기를 "우리가 방금 강병을 쉬고 있는 중이요, 단천은 같은 도인데 어찌 서로 구원하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곧 정병 2백을 뽑아서 구황(具滉) 등 네 장수로 하여금 각각 50명씩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고개를 넘어가 성 밖 20리쯤에서 병사를 매복하고, 단천의 군사 30명으로 하여금 싸움을 걸다가 거짓 패하는 척하게 하였다. 이에 왜적 2백여 명이 승세를 타고 멀리 쫓아 매복이 있는 곳까지 이르므로, 네 부대가 함께 나와 좌우로 내달려 돌격하여 도망하는 자를 추격, 거의 다 쏘아 죽이고 목을 베니, 부상을 입고 성으로 들어간 자는 겨우 30여명이었다.이윽고 남도의 왜적 한 개의 큰 부대가 영동의 왜적과 합세하여 마천령을 거쳐 북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공은 도로 임명(臨溟)으로 돌아와 머물면서 정병 6백을 뽑아 요충지에 매복시켰는데, 과연 왜적이 들을 덮어 침입하여 오므로 복병이 모두 일어나 힘을 다해 싸우고, 공도 또한 삼위병을 지휘하여 말을 채찍질해 나가면서 "오늘 나는 나라를 위해 죽으리라."라고 하니 장수와 사졸들이 모두 그를 따르며 물러가는 자가 없었다. 60여 리를 옮겨가며 싸우다가 백탑교(白塔郊)에 이르러서는 화살이 비 오듯 하며 피는 흘러 길에 가득하였는데, 적의 목 9급을 베었으며 말 15필을 빼앗았다. 그 가운데 화살에 맞아 죽은 시체를 적이 싣고 성으로 들어가 한데 모아 불태워 버렸는데, 대개 그 수가 백여 명 정도 되었다. 청정(淸正)이 그 무리를 거두고 밤을 타고 도망하여 고개를 넘어 남으로 도망하면서 밥 지을 겨를도 없었는데, 공은 그들을 쫓아 영동까지 갔다가 돌아왔으니, 이로부터 관북이 마침내 평정되었다.대개 공은 일을 처리하는 데 정밀하고 분명하였으며, 적정을 파악하는 데는 귀신 같았다. 더욱 사람 쓰는 데 능하여 각각 적재적소에 등용하므로 사람들이 죽음을 잊어버리고 공에게 기용되는 것을 즐겁게 여겼다. 마침내 수천 명밖에 안 되는 고립된 군사로 한창 기세를 드날리는 정예의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으니, 비록 옛날의 명장인들 어찌 이보다 뛰어날 수 있으랴.윤탁연은 공이 자신 마음대로 제 공로를 기록하고서 이문(移文)했다고 하면서 성을 내어 공문으로 꾸짖으며 말이 몹시 이치가 없었으나, 공은 변론하고 분석하기를 밝게 하며 굴하지 않았다. 윤탁연은 더욱 크게 성내어 군법으로써 공을 죽이려고 하였으며, 공의 보좌관을 잡아다가 고문하기까지 하였지만 죄를 얽을 단서를 얻지 못하고 마침내 모함하는 말을 지어 사실과 반대되게 장계를 올렸다. 공은 본시 외로이 일어섰고, 또 그를 위해서 한 마디 말도 해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공의 전후 공적이 저같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모두 알지 못했었다.길이 뚫리게 되자 병사가 비로소 북으로 오게 되니 공은 자기가 거느린 병마를 이끌고 가서 그에게 귀속했었다. 3월에 영흥 부사(永興府使)에 배수되고, 을미년(1595년)에 온성 부사(穩城府使)로 옮겼으며, 병신년(1596년)에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옮기고, 정유년(1597년)에 어사(御史)가 공의 치적을 위에 아뢰어 안팎의 옷감을 하사하여 포상하였으며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옮겼다가 다시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옮겼다. 당시 바야흐로 외방 진관(鎭管) 제도를 수정하는데, 상공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공이 먼저 공으로 하여금 군정을 정돈하게 하고서 열읍으로 하여금 본받게 하라고 청하였다. 무술년(1598년) 봄에 부임하였다가 가을에 체임되어 돌아왔는데, 그 뒤 5~6년 동안은 잇달아 지방 고을로 나갔고,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군직을 맡거나 혹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신축년(1601년)에 북쪽 인사들이 상소하여 공의 공적을 칭송함으로 인하여, 가선 대부에 올랐다. 갑진년(1604년)에 부친상을 입었다가 탈상한 뒤에 장단 부사(長湍府)에 임명되었다. 경술년(1610년)에 사은 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다녀왔다. 신해년(1611년)에 남원 부사(南原府使), 임자년(1612년)에 다시 길주 목사에 임명되었다. 이 당시 광해의 정치가 어둡고 어지러웠는데, 흉인(凶人) 정조(鄭造)42)는 마침 공의 가까운 일가였다. 공은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었으며 정조가 오는 것을 보면 혹 취한 척 깊이 잠자고 또는 눈을 감고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을묘년(1615년)에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게 되자 항상 술만 마시니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며, 부총관(副摠管)과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무오년(1618년)에는 창원 부사(昌原府使)가 되었다.계해년(1623년) 3월에 인조 대왕이 등극하여 정치의 계획을 세울 적에 조정의 의논이 공을 크게 쓰려고 하여 원수(元帥)에 추천되었고 또 장차 현달한 높은 자리에 두려고 하였는데, 공은 노모를 편하게 봉양하는데 급하여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원하였다. 그런지 몇 달이 못 되어 어머님이 관사에서 세상을 떠나므로 공은 상(喪)을 받들고 서울로 돌아왔는데, 인하여 몸이 손상되어 병이 되었으며 또 큰 종기가 나서 오랫동안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었다. 갑자년(1624년) 정월에 이괄(李适)이 난리를 일으켜 임금이 공주로 행차하였는데, 공에게 기복(起復)43)을 명하여 부총관을 삼아 출전하게 하려다가 그의 병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였으며, 적이 평정된 이후 상례를 마치도록 허락했다.이 해에 박래장(朴來章) 등이 모반을 꾀하면서 공이 장수의 재질이 있다 하여 의원 이대검(李大儉)으로 하여금 모반에 대하여 언급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이대검이 공을 대하여 감히 그 말을 발설하지 못하였으므로 공은 실지로 그것을 듣지 못하였다. 일이 발각되어 역옥이 이뤄지자, 공은 이름이 반역자들의 공초(供招)에서 나와 체포되었으나 여러 죄수들의 공술(供述)이 서로 다르지 않아 공의 억울한 사정이 밝혀졌으니 으레 마땅히 석방되어야 하는데, 다시 시안(詩案)의 화가 일어나게 되었다.공이 일찍이 창원 부사로 있을 때 공무의 여가에 우연히 〈영사(詠史)〉 10절을 지었는데, 그 한 수는 다음과 같다.초에 비록 세 집만 남더라도 진을 멸망시키리라 楚雖三戶亦秦亡예언한 남공의 말4)4) 예언한 남공의 말 : 남공(南公)은 초나라의 도사(道士)로 음양에 밝은 자였다고 한다. 삼호(三戶)에 대해서는 세 가구[戶]라는 설, 지명(地名)이라는 설, 초나라의 삼대성(三大姓)이라는 세 가지의 설이 있는데, 번역은 세 가구라는 설에 따랐다. 남공이 예언한 말은 《사기(史記)》 권7에 "초수삼호 망진필초야[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 하였다.맞는 것 아니었네. 未必南公說得當무관에 들어가자5)5) 무관에 들어가자 :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의 고사. 초 회왕은 위왕(威王)의 아들로 이름은 웅괴(熊槐). 진 소왕(秦昭王)이 혼인을 약속하고 만나기를 희망하자 굴원(屈原)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관에 들어갔는데, 진나라 군대에 의해 강제로 진나라로 끌려갔다 끝내 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사기(史記)》 권40.백성 희망 끊겼는데 一入武關民望絶여린 손자 어이 또 회왕이 됐다더냐.6)6) 여린……됐다더냐 : 전국 시대 초 회왕의 손자인 심(心)을 말한다. 진말(秦末)에 범증(范增)이 초나라의 후손을 세워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항양(項梁)을 설득하자 초 회왕의 손자인 심을 찾아 회왕으로 세웠다. 후에 항적(項籍)에게 피살되었다. 《사기(史記)》 권7.孱孫何事又懷王그 시를 그대로 휴지 뭉치 속에 두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여막의 벽에 도배를 했는데, 어떤 공신이 찾아와서 벽을 눈 여겨 보고 간 뒤에 친구들 사이에 널리 전파하였다. 대관(臺官)이 '시의 뜻이 무엇을 지적한 바가 있다'고 논계하여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공과 포저(浦渚) 조익(趙翼) 공이 당시 문사낭청이 되었는데, 위관에게 말하기를 "시인이 역사를 읊은 작품이 깊은 뜻이 있지 않은데 무슨 죄가 되겠소."라 하고 힘써 무죄를 다투었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마침내 고문을 당하여 옥중에서 죽으니 바로 11월 19일이다. 원 근간에 이 소식을 들은 사람으로 원통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대개 공은 평소에 말이 적었고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논하는 일이 없었으며, 성품이 엄격하고 굳세어 비록 친하게 잘 지내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바르지 못한 곳이 있음을 보면 다시는 서로 사귀지를 아니하였다. 월사(月沙) 이 문충공(文忠公, 李廷龜)은 평소 공과 친교가 두터웠는데,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정자허의 인물과 재질은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지만 다만 그의 강직함이 너무 지나친 것이 아쉽다."라 하였으니 대개 공이 화를 입을까 걱정한 것인데 과연 그 말이 맞았다고들 하였다. 광해 때에 어떤 권세 있는 대신이 그를 끌어 자기의 편을 삼으려 하여 공을 보고 풍자해 말하기를 "그대의 가난과 고생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아프게 하거늘 어찌 스스로 그것을 견디는가."라 하자, 공은 곧 대답하기를 "나는 장차 활과 화살을 가지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맹호를 쏘아 그것으로 살아갈지언정 분수 넘치는 부귀는 나의 원하는 바가 아니오."라 하니, 그 사람은 부끄러워하며 돌아가 버렸다. 이이첨(李爾瞻)과는 한 동리를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그가 공의 문재(文才)를 사모하여 사람을 시켜 여러 번 공에게 뜻을 보냈으나, 공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또 서로 잘 아는 어떤 사람이 정인홍(鄭仁弘)에게 편지를 받아 가지고 와서 그의 권세에 힘입으려 하므로 공은 매를 때려 쫓아 버렸다. 대개 훈신 귀족의 요청을 일체 들어 주지 아니하여 공의 강직함이 이와 같았으니, 이것이 바로 공이 화를 부르게 된 까닭이었던 것이다.공의 효성과 우애는 타고난 성품이어서 부모를 섬김에 사랑과 공경함을 다하였다. 판서공(공의 부친)은 자제 가르침이 매우 엄격하여 조금만 뜻에 맞지 않으면 문득 매를 치더니, 그가 돌아가신 뒤에 공은 항상 "내가 다시 매를 맞고자 한들 어디 가서 매를 맞겠는가?"라 하고 매양 흐느끼며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했었다. 큰 형이 아내를 잃고 홀로 살았는데, 공은 여러 조카들 어루만지기를 자기가 낳은 자식들처럼 하였다. 몸가짐은 맑고 검소하게 하여 세상의 이익이나 탐하고 재물이나 좋아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항상 침을 뱉으며 비루하게 여겼다. 평생 살림을 경영하려는 생각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갈 때는 그 행장이 쓸쓸하였으며 집에 이르는 날에는 또한 남에게서 꾸어다가 밥 짓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가법에 더욱 엄격하였으니 집안이 비록 화목했으나 안과 밖을 자른 듯이 구별하여 지금껏 자손들이 대대로 지켜 실추하지 않아 사대부 집안에서 모두들 칭송하는 바가 되었다.처음에 택당공이 일찍이 북평사가 되었을 때에 그 곳 백성들의 말을 채록하여 공이 적을 토벌하던 내력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아직 업적을 드러내어 표창하지는 못하였다. 현종 갑진년(1664년) 무렵에 이단하(李端夏) 상공은 택당의 아들로서 뒤를 이어 북평사로 나갔는데, 공의 충의에 감격하였으나 그 원한을 드러내 밝히지 못한 것을 마음 아프게 여겨 사우를 세워 제향할 것을 처음으로 주창하였다. 조정으로 돌아와서는 또 소장을 올려 공을 위해 힘써 신원을 변론하였으며, 높은 품계의 벼슬을 추증하여 포상할 것을 주청하니 주상은 묘당에 명하여 의논하도록 하였다. 대신 정태화(鄭太和) 공 등 여러 사람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찬성하였다. 이에 공을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하고 겸직은 정해진 규례대로 추증하였으며, 또한 자손을 녹용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사우의 편액을 내렸으니, 이것은 상공 여성제(呂聖齊)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나도 일찍이 외람되이 평사로 나간 적이 있었는데, 조정에 돌아와서 주상에게 아뢰기를 "정문부, 이붕수와 같은 충절로도 조정에 벼슬하는 자손이 하나도 없는 것은 공을 갚고 선을 권면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마땅히 전조(銓曹)에 명을 내려 특별히 뽑아 쓰도록 하소서."라 하니, 주상께서 곧바로 윤허하였다. 그러나 이제 20년이 거의 되었으되 아직도 명을 받들어 시행한 사람이 없으니 사뭇 개탄할 일이다. 생각하건대 공의 위대한 공적과 지극히 원통한 일은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환히 드러나 있고, 또 절로 석실(역사)의 좋은 기록에도 있으니 도리어 어느 겨를에 구구하게 감탄하면서 찬양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에 감히 두드러진 사행과 이력을 대강 기록하여 유사(有司)에게 삼가 고하여 채택하는 자료로 삼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생략하였으니 이것 또한 옛 사람들이 시호를 청하는 체제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살펴주기 바란다.승정 대부 행예조판서 민진후는 삼가 짓는다. 宣廟朝名臣全州府尹農圃鄭公, 旣沒之八十年, 其曾孫前主簿杉上疏言, "臣之曾祖父文孚, 當壬辰板蕩之際, 以北評事倡義起兵, 誅土賊破倭寇, 以克定關北, 而臬司掩蔽, 功賞未稱。仁祖反正之初, 不幸橫罹獄援, 卒以詩案, 枉死於桁楊, 及至先王朝雪其冤枉, 而贈爵錄, 後又從而特宣賜額, 崇報之典大備, 惟是贈諡一事, 尙未之擧, 豈非聖朝之一闕事也。" 事下該曹, 覆奏曰: "文孚功烈節義, 前輩名臣多言之, 無復可議。國家故事, 非實職正二品以上, 例不得諡, 而有所取而諡之者, 亦不拘此限, 杉之言。是也。" 上亟許之。又其後十年, 杉之再從弟構, 袖公文集及家狀一通, 來謁于鎭厚曰: "先祖易名, 旣蒙聖允, 而未幾而兄杉病死, 太常之狀, 至于今未就。世之知吾祖事蹟者, 莫如子詳, 敢以爲托。" 鎭厚再拜而受之曰: "然。昔我先君子文貞公, 通判鏡城, 聞公之風而慕義特至, 至操文致酹於與公同事諸人之墓, 先仲父議政公, 嘗按北藩, 立公之遺祠, 以永樹風聲, 而使民有所興勵。鎭厚雖甚不肖, 猶知樂有賢父兄, 則今於公文字之役, 其烏敢辭之哉。" 謹按公字子虛, 農圃其號也。系出海州, 高麗侍中肅之後。入我朝, 有贊成事貞度公易, 最顯, 其子同知忠碩, 以孝友聞。同知之子曰, 參議忱。參議之子曰府使延慶, 自府使三世而至公之考愼, 大司諫, 贈禮曹判書, 妣, 貞夫人金氏, 將仕郞興禮之女。公以嘉靖乙丑二月十九日生, 幼而嶷然有大志, 其遊戲必分曹布陣, 爲對敵相戰狀。公居中號令, 而羣兒皆奉其約束。嘗往視捕虎, 咆哮之聲振天地, 羣兒無不顚仆辟易, 而公獨安坐自若, 見者異之。又聰穎絶人, 讀書過目成誦, 七八歲時所綴詩句, 已膾煑一世。間習射藝, 有穿楊之竗, 如天文籌數, 亦皆通曉焉。乙酉中生員進士兩試, 戊子登明經甲科第二名, 例付漢城參軍。萬曆辛卯除北評事, 評事實兼學校表率之任。公至則敎之有法, 而待之以禮, 甚得諸生之心。翌年夏, 倭寇陸梁, 乘輿西狩。賊將淸正長驅入北, 北兵使韓克諴, 欲守磨天嶺, 軍潰而走, 賊遂入瀰滿沿江諸郡, 人心壞亂, 兇徒竊發, 明川之末秀木男·會寧之鞠景仁·鏡城之鞠世弼, 皆叛賊之魁, 而世弼至受倭署, 置有官號, 聲勢尤張。時, 臨海順和兩王子及大臣金貴榮·府院君黃廷彧·其子承旨赫, 避兵在北, 景仁縛之, 以給倭, 南北兵使·諸邑守宰·鎭堡邊將, 幾盡陷於叛賊。公遂潛匿於山中, 路遇叛卒, 將執之以去, 賴有一書生, 以所持農器, 擊殺叛卒, 脫公而送之。又爲土人所射, 幾死而免。公聞前監司李聖任, 亦在奔逬中, 窮尋往見, 共謀倡義, 仍與慶源府使吳應台·慶興府使羅廷彥·輸城察訪崔東望·謫人韓百謙·羅德明等, 起兵入鏡城, 衆畏世弼威脅, 俄皆潰散, 公不得已, 亦從間道南走。至龍城, 投宿巫覡韓仁侃之家, 仁侃心知爲公, 待之甚厚, 世弼遣人搜括, 而終匿不告。居數日, 適遇鏡城儒生崔配天·池達源俱行, 至漁郞里李鵬壽家。鵬壽, 義士也, 見公至大喜, 傾家以奉之。公遂與鵬壽等, 謀再擧義兵。於是傳相號召, 稍稍響應, 壯士姜文佑最先至, 鍾城府使鄭見龍及各鎭守將及避亂朝士徐渻·李成吉等亦來會, 衆皆推公主盟, 公自以年少位卑, 讓於見龍, 見龍不敢當, 諸壯士亦願屬公。於是公爲大將, 見龍爲副將, 鵬壽爲別將, 文佑爲斥候將, 部署略定, 先送人於世弼, 報以國家中興之慶, 諭以立功自效之意。九月十二日, 勒兵向府城, 世弼懸門而拒之, 且脅且諭, 始乃迎納。公見世弼兵勢甚盛, 而略無怖意, 徐以逆順之辨, 反復譬曉, 賊畏服不敢動。世弼使其親屬, 侍公左右, 凡諸文書, 輒皆偸視, 公將馳啓, 而於世弼事, 故作婉辭。以其草本置之案上, 世弼見之, 果喜, 公命世弼, 仍管官事。人有勸公早除世弼者, 世弼聞而懼, 公夜屛人獨坐, 招世弼與語, 示以不疑之色。適會倭兵九十餘薄城下, 公命將士擊退之, 世弼與其子擒一倭將。公一體錄功而啓之, 世弼乃自安, 公又赦嘗射己者罪, 以爲褊裨, 於是六鎭人聞公釋反側, 爭相送款。會寧吏士斬景仁及其黨六人, 獻馘軍門, 明川人亦欲誅末秀, 反敗於賊, 公遣姜文佑·具滉, 率精騎揜擊斬之。兩逆授首之後, 南北始通, 徵兵稍集, 而高嶺僉使柳擎天等諸鎭將, 亦皆受公節制, 公號令嚴肅, 賞罰明信, 軍中無敢有犯法者。一日忽有兩驛卒, 無端大呼, 公知其出於世弼之兇計, 卽斬兩卒, 而仍下令登城習戰, 夜分乃罷, 翌朝又如之。公建大將旗, 坐南門樓, 世弼與諸將行軍禮, 公命姜文佑拿下斬之以徇, 其脅從, 幷赦勿治, 俾立後功, 於是軍聲大振。公與諸將, 議出兵擊倭, 鄭見龍欲保鏡城以俟釁, 公曰: "今但自守, 豈當初起義兵之意耶。然當謀于衆以決之。" 明日聚衆于南門外, 詢其可否, 咸以公言爲是。乃使潼關僉使李應星留鏡城, 鄭見龍爲中衛將, 柳擎天爲左衛將, 吳應台爲右衛將, 防垣萬戶韓仁濟·斜卩洞權管高敬民爲左右伏兵將, 十月卄一日, 率三衛兵出城, 行數里, 有人迎告於公曰: "賊勢甚盛, 戰必不利, 宜且守城自保。" 公曰: "汝敢爲賊沮吾軍耶。" 卽斬其首, 懸旗竿, 進次明川, 指揮諸將方略。晦日, 遌倭於吉州長坪, 諸軍挾擊, 伏兵迭出, 廝徒下卒, 無不鼓勇, 賊潰而奔北, 追擊大破之, 殺其巨魁五人, 斬馘八百二十餘級。其逃竄山谷者, 四面縱火而盡燒之, 中箭墜崖而死者, 亦不知其數, 得馬一百十八匹奪, 其所擄人畜及軍器等物甚多, 論者謂中興以來, 未有此捷比云。吉州留倭, 據城堅守, 諸衛將累圍而不得拔, 公以謂'今若急取, 多傷士卒, 不如移兵嶺東, 先擊柵內之賊, 柵內之賊旣平, 則城中之賊, 勢孤援絶, 取之如籠中鳥耳。' 卽日移向嶺東, 到臨溟之雙浦, 適遇柵內賊出掠者, 三衛精騎, 一時奮擊, 斬首百餘級, 剖腹露腸, 列之路傍, 連亘十餘里。仍進圍賊柵, 以檄書投倭將, 有曰: "長坪之斬耳無數, 應作死後之逃奴, 雙浦之割勢甚多, 只是生前之男子云。" 先是避亂士夫, 多爲土民所掠奪, 及公討叛賊, 皆從公請推還, 公一切不聽, 鄭見龍以此事擾民, 公又呵止, 而仍下令。見龍本忌公成功, 乃與諸士夫共造飛語, 使入於觀察使尹卓然之耳, 卓然固嫉公聲績掩己, 乃移文數公罪, 而遞大將, 以見龍代之。因以前後戰功, 誣歸於見龍, 而聞于朝, 見龍遂大被陞擢, 而公只以誅鞠賊授堂上階。卓然又以公爲捕亡將, 使住磨天嶺, 公辭不行曰: "吉州之賊, 尙不掃蕩, 北地之卒, 豈有南逃之理乎。" 北兵使在南道, 遙令公巡行六鎭, 以定民心鎭虜情, 公乃率麾下若干人, 發向六鎭, 褒有功誅有罪, 撫禦戰守, 咸得其宜, 民夷畏愛, 不敢更謀爲亂。鄭見龍爲大將, 未滿一月, 卓然移授兼節度使, 而以吳應台代之, 又月餘, 還以公爲大將, 蓋軍中自失公, 憤惋不平, 義士多散去, 而倭賊狺然伺釁, 叛民餘黨, 亦有復起之幾, 識者皆歸咎於卓然, 故有是擧。或謂公曰: "公未可辭歟。" 公曰: "始吾出萬死起義兵, 只欲爲國家效忠耳。今得死所, 其何可顧小嫌, 而不念國事之危急哉。" 癸巳正月, 遂馳到吉州, 餉勞三衛將之軍, 將士見公來, 勇氣自倍, 散去者亦還集。端川郡守姜燦馳謁公曰: "端之留倭, 恣意橫行, 願分兵以擊之。" 公曰: "吾方坐休強兵, 而端是同道, 何可不爲之相救乎。" 卽抄精兵二百, 使具滉等四將, 各將五十, 逾嶺而去, 伏於城外二十里許, 使端軍三十, 挑戰佯敗, 賊二百餘名, 乘勝遠追, 至伏兵處, 四隊齊出, 左右馳突, 追亡逐北, 幾盡射斬, 其帶傷入城者, 僅餘三十矣。 俄聞南道倭一大隊, 與嶺東倭合勢, 由磨天北來, 公還住臨溟, 抄精兵六百, 潛伏於要衝處, 倭果蔽野而至, 伏兵盡起鏖戰, 公亦麾三衛兵, 策馬而進曰: "今日, 吾當爲國一死。" 將士從之, 莫有退者。轉鬪六十餘里, 至白塔郊, 射矢如雨, 流血滿道, 斬馘九級, 奪馬十五匹, 其中箭而死者, 賊皆載屍而入城, 收聚燒燼, 蓋亦百數矣。淸正盡撤其衆, 乘夜逃迍, 逾嶺南奔, 不暇炊飯, 公追至嶺東而還, 於是關北遂淸。蓋公慮事精明, 料敵如神, 尤善於知人, 用各當才, 故人皆忘死而樂爲用, 卒能以數千孤軍, 擊却方張之銳寇, 雖故名將, 何以過此哉。尹卓然怒公擅自錄功移文, 詰責語多無倫, 公辨析甚明而不爲屈, 卓然益大恚, 欲以軍法殺公, 拿公將佐, 至加榜掠, 而終不得搆罪之端, 乃作誣語, 反其實以啓。公本孤立, 又無爲之一言者, 是以公之前後所成就, 如彼卓爾, 而朝廷皆莫之知也。道旣通, 兵使始北來, 公乃以所率軍馬, 屬之以歸。三月除永興府使, 乙未, 移穩城, 丙申, 移吉州牧使, 丁酉, 御史上公治行, 賜表裏以褒之, 移安邊府使, 又移公州牧使。時方修外方鎭管之制, 西厓柳相公成龍, 請先使公整頓軍政, 使列邑取效。戊戌春赴任, 秋遞還, 是後五六年, 連出宰郡邑, 而入則或付軍銜, 或爲判決事。辛丑, 因北路人上疏, 頌公之功, 陞嘉善階。甲辰丁外憂, 服闋除長湍府使。庚戌, 以謝恩副使朝京。辛亥南原府使, 壬子再牧吉州。是時, 光海昏亂, 而凶人鄭造, 又公之至親也。公杜門屛跡, 見造來, 則或托醉沈眠, 或閉目不語, 及乙卯廢母之論起, 則居常縱酒, 人不得見其面, 除副摠管兵曹參判而皆不就。戊午爲昌原府使。癸亥三月, 仁祖大王御極圖治, 朝議欲大用公, 旣被元帥薦, 而又將置之通顯, 顧公急於便養, 求爲全州府尹。未數月, 大夫人歿於官舍, 公奉喪歸洛, 因毀成疾, 又生大腫, 久阽於危。甲子正月, 李适叛, 上將幸公山, 命起復公, 爲副摠管, 使出戰, 聞其病劇而止, 賊平許終喪。是歲朴來章等, 謀不軌, 以公有將才, 因醫人李大儉要令言及, 而大儉對公, 不敢發, 公實不聞。及事發獄成, 公以名出逆招被逮, 諸囚以實供無異辭, 公冤狀自白, 例當見原, 而詩案之禍, 又出矣。公曾在昌原, 公餘偶作〈詠史十絶〉, 其一曰: "楚雖三戶亦秦亡, 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 孱孫何事又懷王。" 仍置之休紙軸, 至是塗壁於廬幕, 有一勳臣來訪, 就壁熟視而去, 傳播儕友間。臺官以'詩意有指', 啓請鞠問。澤堂李公植·浦渚趙公翼, 時爲問事郞, 言於委官曰: "詩人詠史之作, 非有深意, 何可爲罪也。" 力爭而不能得, 終至栲死於獄中, 卽十一月十九日也。遠近聞者, 莫不冤之。蓋公平居簡默, 未嘗論人長短, 而性本嚴毅, 雖所親善, 見其有不正處, 不復與之相款。月沙李文忠公素與公厚, 嘗謂人曰: "鄭子虛人物才器, 誠不可易得, 而獨恨其剛直太過。" 蓋以取禍爲慮, 而其言卒驗云。光海時有權臣, 欲引爲己援, 見公而諷之曰: "君之貧苦, 令人傷心, 其何以自堪。" 公卽應曰: "吾將帶弓矢, 入深山, 射猛虎, 以資生, 匪分富貴, 非吾願也。" 其人慚而去。李爾瞻隔洞而居, 慕公文才, 因人累致意於公, 而公終不答。有相識者, 受簡於鄭仁弘, 欲以藉重, 公杖而逐之, 凡勳貴請囑, 一切無所聽施, 公之峭直, 類如此, 而此其所以招禍之道也。公孝友出天, 事父母, 極其愛敬。判書公敎子弟甚嚴, 少失意輒撻之, 及大故之後, 公常曰: "吾雖欲復受杖, 尙可得乎。" 每嗚咽不自勝。伯兄喪耦獨居, 公撫視諸侄若己出。持身淸約, 聞世之貪利嗜貨者, 常唾鄙之。平生未嘗爲經營產業計, 其罷官而歸, 行李蕭然, 至家之日, 亦不免假貸而爲食, 尤嚴於家法, 閨門雖雍睦, 而內外截然有別, 至今子孫世守不墜, 而搢紳家亦皆傳誦焉。始澤堂公, 嘗爲北評事, 採訪遺民之言, 記公討賊始末甚詳, 而未有以褒顯之。顯廟甲辰間, 李相公端夏, 以澤堂之胤, 繼先躅出佐北幕, 感公忠義, 而心傷其冤恨之未暴, 旣倡議建祠而俎豆之, 歸又上封章, 爲公伸辨甚力, 且請褒贈崇秩, 上下廟堂議。大臣鄭公太和諸人, 咸一辭贊之, 乃贈公議政府左贊成, 兼如式, 而又命錄用子孫, 其祠額之宣, 則用呂相公聖齊之言也。鎭厚亦曾忝爲評事, 旣還朝而告于上曰: "以鄭文孚·李鵬壽之忠節, 其子孫無一立朝者, 甚非所以酬功興勸之道, 宜令銓曹, 別爲調用。" 上卽賜頷可, 而今幾二十年, 尙未有奉承者, 殊可慨然耳。竊惟公之豐功偉烈, 至冤深痛, 昭在人耳目, 而又自有石室之良筆, 顧奚暇區區贊歎而揄揚之哉。玆敢粗錄其事行履歷之表著者, 敬告有司, 以備採擇, 而餘皆略之, 蓋亦古人請諡之體然也, 幷冀垂察焉。崇政大夫行禮曹判書閔鎭厚謹狀。 문정공(文貞公) 민유중(閔維重)을 가리킨다. 의정공(議政公) 민정중(閔鼎重)을 가리킨다. 활쏘기를……솜씨 《사기(史記)》 권4 〈주본기(周本紀)〉에 "초(楚)나라에 사는 양유기(養由基)라는 사람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다. 백 보(步) 떨어진 곳에 있는 버들잎에 화살을 쏘면 백 번 발사에 백 번을 맞힌다."라고 하였다. 정조 1559~1623.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시지(始之)이다. 광해군 때 이이첨의 측근으로 폐모론을 제기하여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 세도를 부리다가 인조반정 후 세 동생과 함께 처형되었다. 기복 기복출사(起復出仕)의 준말인데, 상중(喪中)에는 벼슬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으나 국가의 필요에 의하여 상중의 몸으로 벼슬자리에 나오게 하는 것을 이른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신도비명 병서 神道碑銘 【幷序】 大提學黃景源撰【吏曹判書李鍾愚書禮曹判書徐承輔篆】 대제학 황경원은 짓다. 이조판서 이종우가 쓰고 예조판서 서승보가 전서(篆書)를 쓰다.현종(顯宗) 6년(1665년) 12월 무인일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신(臣) 태화(太和)가 아뢰기를 "왜노 청정(淸正)이 북방에 들어와 성곽을 도륙하고 불태울 때와, 소하강(蘇下江) 동북쪽의 말갈(靺鞨)이 날랜 기마를 몰아 무산(茂山)ㆍ부령(富寧) 땅 깊숙이 들어와 짓밟았을 때, 병마평사(兵馬評事) 신 문부(文孚)가 몸소 의병을 거느리고 청정을 토벌하여 6진 밖에서 적군의 기를 뽑았으며, 백탑(白㙮) 아래에서 적군을 대파하였습니다. 위엄으로 말갈을 복종시켜 변경을 온전히 하였고 오랑캐의 기운을 꺾어 빛나는 공훈을 세웠으니, 만력 이래의 선무 공신(宣武功臣)인 여러 장수들 중에는 있지 않은 바입니다. 인조께서 반정을 하셨을 때 원수(元帥) 천거에 들었으나 남의 무고를 입고 하옥되었고, 또 지은 영사시(詠史詩)로 죄에 걸려 옥중에서 죽었으니 신이 속으로 슬프게 여깁니다.행장(行長)이 관서지방으로 들어왔을 때, 신종황제(神宗皇帝)가 대장군 이여송(李如松)에게 명하여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왜노를 평양성(平壤城) 아래에서 쳐부수게 했습니다. 그러나 북방 산천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이 신종황제가 구원할 수 없었고, 대장군이 방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문부는 일개 평사(評事)로서 병사 6천 명을 모집하여 힘껏 싸워 왜노를 몰아내고 북방 22주를 회복하였건만, 큰 공로도 봉작(封爵)을 얻지 못하고 이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결국 부당한 법령 앞에 죽었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생각건대 마땅히 유사에게 명하시어 정문부에게 작위를 주어 북방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심이 옳을 듯합니다."라 하니, 상이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도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總府都總管)을 추증하였다.공의 성은 정씨(鄭氏)요, 자는 자허(子虗)로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젊어서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에 보임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가 되었다. 만력(萬曆) 20년(1592년)에 평수길(平秀吉)이 반란을 일으켜 6월에 청정(淸正)이 북방으로 들어왔다. 회령부(會寧府) 아전 국경인(鞠敬仁)이 왕자 임해군(臨海君) 진(珒), 순화군(順和君) 토(?) 및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영(李瑛) 등을 잡아 군중에 가두었다가 임민(林珉)을 시켜 청정에게 바치었다. 며칠이 지나 국경인의 숙부 국세필(鞠世弼)이 경성(鏡城)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정말수(鄭末秀)가 명천(明川)에서 반란을 일으켜 청정의 앞잡이가 되어 북방이 크게 어지러워졌고, 절도사(節度使) 한극함(韓克諴)ㆍ우후(虞候) 이범(李範) 등을 잡아 청정을 맞이하니 6진(六鎭)으로부터 함관령(咸關嶺)에 이르기까지 1000여 리가 모두 왜노의 수중에 들어갔다.공이 발분하여 은밀히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ㆍ경흥 부사(慶興府使) 나정언(羅廷彥) 등과 더불어 경성에 들어가 북방을 회복하기를 도모하였는데 사람들이 국세필을 두려워하여 모두 흩어져서 다시 모을 수가 없었다. 공이 포기하고 떠나서 떨어진 옷을 입고 동냥을 하며 부령(富寧)의 정암산(靖巖山) 속으로 들어가 나물을 캐어먹었다. 한참 있다가 용성(龍城)에 이르러 무격(巫覡) 한인간(韓仁侃)의 집에 의탁하였다. 한인간이 자세히 쳐다보며 말하기를 "그대는 병마평사가 아니십니까?"라 하고서 마침내 후하게 대우하였다.8월 중에 공이 포의(布衣) 최배천(崔配天)ㆍ지달원(池達源) 두 사람과 더불어 혹은 지고 혹은 끌고 하며 샛길을 따라 남쪽으로 무계(武谿)에 이르렀다. 무계의 처사 이붕수(李鵬壽)가 공의 모습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맞이하여 그 집으로 갔다. 한 달이 지나 공이 바다에 배를 띄워 동남쪽으로 내려가려고 하니 이붕수가 개연히 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왜적 토벌을 건의하고자 하여 장수 노릇을 할 수 있는 열사(烈士)를 은밀히 구하였으나 아직 마땅한 사람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공이 찾아왔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 북방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인하여 공을 머물게 하고 의병을 불러 모았다. 경성(鏡城)의 장사(壯士) 강문우(姜文佑),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이 선봉이 되기를 원하였다. 충숙공(忠肅公) 서성(徐渻)이 공의 소문을 듣고 또한 귀부하였다.이붕수가 몸소 군량을 지고 샛길로 길주(吉州)로 달려가 왜노 군중의 허실을 엿보았다. 그때 청정이 안변(安邊)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국세필과 더불어 염탐하는 일이 끊어지지 않았다. 공이 근심하여 이에 강문우로 하여금 기병 몇을 거느리고 도중에서 맞아 모두 죽이도록 하니, 마침내 염탐하는 일이 끊어졌다. 정현룡 등이 공에게 호칭을 세우기를 권하였으나 공이 듣지 않았는데, 이붕수가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한 연후에야 허락하였다. 무리가 마침내 공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정현룡ㆍ오응태를 차장으로 삼았다. 공이 스스로 나이가 어리고 지위도 낮다고 하여 정현룡에게 양보하니 정현룡이 감당할 수 없다고 굳이 사양하였고, 여러 장사들도 또한 공에게 예속되기를 원하였다.마침 말갈(靺鞨)이 소하강(蘇下江)으로부터 훈융(訓戎)ㆍ아산(阿山)ㆍ무이(撫夷)ㆍ조산(造山) 네 진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살해하고 약탈하였다. 공이 이 때문에 군사의 맹약을 주장하여 즉시 국세필에게 사자를 보내어 힘을 합하여 방어하자고 회유하였다. 9월에 공이 어랑리(漁郞里)로부터 유정(柳亭)에 이르러, 또 사자를 보내어 국세필과 부중(府中)에서 모이기를 청하자 국세필이 군대를 성대하게 거느리고 기다렸다. 공이 휘하 100여 기를 이끌고 말을 달려 부중으로 들어가 이해(利害)를 가지고 반복하여 비유하여 타이르니, 국세필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에 친속을 시켜 공의 곁에 거처하게 하고 그 기미의 변화를 살폈다.사람들 중에 공에게 국세필을 죽이기를 권하는 사람이 있으니 세필이 듣고서 매우 두려워하였다. 공이 밤중에 사람들을 물리치고 세필과 더불어 부중(府中)의 일을 말하였는데 의심하는 기색이 없으니 세필이 매우 기뻐하였다. 얼마 있다가 왜노 90여 명이 밤중에 성 아래로 접근하자 공이 장사들에게 명하여 쳐서 참살하게 하였다. 이에 세필이 그 아들과 더불어 왜노 장수를 사로잡으니 공이 그 공을 기록하여 아뢰었다. 세필이 더욱 기뻐하여 이에 스스로 안심하였다.공이 또 부중의 반란군을 사면하고, 일찍이 자신을 쏜 자를 비장(禆將)으로 삼으니 6진의 병사들이 모두 감격하여 휘하에 속하기를 원하였다. 얼마 안 있어 회령의 유생 오윤적(吳允廸)이 공의 의기를 좇아 부학(府學)에서 말하기를 "국경인(鞠敬仁)은 참수해야 합니다."라 하였다. 부중의 의사 신세준(申世俊)이 이에 뿔나팔을 부니 사졸들이 모두 모였다. 유생 윤립(尹岦) 등 6명이 사졸들에게 영을 내려 국경인 및 그 수양아들 최인수(崔鱗水) 등을 참수하게 하였다.겨울 10월에 명천의 사민(士民) 200명이 함께 말수를 쳤으나 패배하여 부중이 궤멸되었다. 의사 김천년(金千年)이 말수와 그 무리 장응호(張應豪) 등을 생포하였다. 이로부터 남북이 통로를 얻게 되어 징집된 병사가 점점 이르렀다. 이튿날 공이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남문루(南門樓)에 올라 세필 등 13명을 포박하고 모두 참수하여 그 군대에 돌렸다. 이에 위엄과 명성이 북방에 진동하니 여러 진영의 장사(壯士)로서 모집에 응한 자들이 6000명에 이르렀다. 공이 여러 장수들과 출사를 의논하니 정현룡이 이르기를 "왜노가 지금 한창 강성하니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경성을 지켜 그 틈을 엿보아야 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공이 분발하여 이르기를 "내가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나라를 위해서일 뿐이다. 지금 성 하나를 지키면서 나가 싸우려 하지 않으니, 규문의 여자가 하는 일을 본받으려 하는가?"라 하였다. 이에 군대를 3위(衛)로 나누어 영강역(永康驛)을 나가 몇 리를 갔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고하기를 "왜노의 군사가 많으니 공이 더불어 싸우면 반드시 불리할 것입니다. 마땅히 성을 지켜서 스스로 보전해야 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공이 노하여 이르기를 "너는 왜노를 위해 우리 군대를 저지하는가?"라 하고서 즉시 그 머리를 베어 깃대 위에 걸었다.명천(明川)에 이르러 방원(防垣)의 병마만호(兵馬萬戶) 한인제(韓仁濟)를 복병장으로 삼았다. 또 종사(從事) 원충서(元忠恕)에게 명령하여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길주 북쪽 30리 되는 곳에 진을 치고 왜노와 해정(海汀)에서 싸우게 하여, 그 선봉장 2명을 베니 왜노가 달아났다. 원충서가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장평(長平)에 이르렀을 때, 왜노 직정(直正)이 장군 도관(都關)ㆍ여문(汝文)과 더불어 대군을 이끌고 죽기를 각오하고 맞붙어 싸웠다. 강문우와 원충서가 좌우로 나누어서 기병을 놓아 돌진하고 한인제의 복병이 또 번갈아 전진하며 시도(廝徒)와 우졸(郵卒)도 용맹을 떨치지 않음이 없었으니, 직정이 말에서 내려 마침내 걸으며 싸웠다. 신시(申時)에서부터 술시(戌時)까지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이 우박처럼 모여드니, 왜노가 힘이 다하여 비로소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강문우와 원충서가 모두 말을 채찍질하여 앞뒤로 끼고 달려 가파른 언덕으로 올라가니 직정의 군사들이 궤멸되어 마침내 패주하였다. 강문우가 추격하여 장덕산(長德山)에 이르러, 도관ㆍ여문도 화살을 10여 군데 맞고 달아나자 복병이 사방에서 나와 크게 무찔렀다. 그 괴수 5명을 죽이고 825급을 참수하였으며 그 나머지 무리로 산으로 도망해 들어간 자는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화살을 맞고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다. 전투마 118필을 획득하였고 또 정기(旌旗), 창과 방패, 갑옷도 매우 많이 얻었다.11월에 3위(三衛)가 군사를 합하여 길주(吉州)를 포위하였는데, 왜노가 굳게 지켜서 공략할 수가 없었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 군대가 급하게 공격하면 사상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먼저 영동책(嶺東柵)을 치는 것만 못할 것이다. 책중(柵中)이 평정되면 길주의 형세는 고립되어 구원이 끊어질 것이니, 내가 그것을 취하기는 조롱 속의 새와 같을 것이다."라 하였다. 즉시 군대를 이동시켜 쌍개포(雙介浦)에 이르러 직정을 만나, 3위의 정예 기병이 발분하여 그를 쳐서 마침내 왜노를 압해정(壓海亭) 아래에서 쳐부수었다. 100여 급을 참수하였고 시체가 15리에 어지러이 널렸다. 공이 또 길주로 나아가 포위하였다. 이튿날 격문을 만들어 성중으로 쏘아 보내니 왜노가 두려워하여 모두 달아났다.12월에 공이 비로소 국세필을 참수한 공으로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이 공의 공로를 시기하여, 이에 이문(移文)을 해서 공을 대장(大將)에서 해면(解免)하니 정현룡이 그를 대신하였다. 마침 절도사가 공으로 하여금 6진을 순행하여 말갈을 회유하게 하였다. 공이 휘하 50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군현에 가서 죄 있는 자는 벌주고 공 있는 자는 표창하였으며 어루만지고 방어하며 나가 싸우고 물러나 지켜서 능히 그 방법을 얻었으므로, 말갈이 두려워하고 존경하여 저들끼리 서로 경계하고 타일러서 그들이 잡아간 인구를 모두 돌려보냈다.공이 술과 음식을 갖추어 그 추장 2백 명을 불러서 먹이며 따뜻한 말로 타이르니, 선춘(先春)ㆍ운두(雲頭) 이남에서부터 동건(童巾)ㆍ다온(多溫)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족들이 감히 다시는 변경의 해가 되지 않았다. 윤탁연이 공을 대장에서 면직시키고부터 인심이 불만을 품어 6000명의 장사들이 많이 흩어져 가버리자, 윤탁연이 비로소 두려워하여 다시 공을 대장으로 삼았다.이듬해 정월에 공이 홀로 말을 달려 길주에 이르니, 6천 명의 장사들이 공이 오는 것을 보고 용기백배하였으며 흩어져 가버린 자들도 모두 돌아와 모였다.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이 공에게 와서 말하기를, "왜노가 고을 안을 멋대로 돌아다니니 원컨대 공이 군대를 나누어서 치소서."라고 하였다. 공이 정예병 3백 명을 선발하여 4부대로 나누어 성 밖에 매복시키고, 단천의 군대로 하여금 싸움을 걸어 거짓으로 패한 척 달아나게 하였다. 왜노가 추격하여 고개 아래에 이르자 4부대가 한꺼번에 나와서 달려 치니, 왜노가 패하여 달아나면서 공포(空砲)를 당겨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공이 힘을 다해 싸우면서 혹은 그 앞을 막고 혹은 그 뒤를 잘라서 60급을 참수하였다.5일 있다가 청정이 군사 2만 명을 통솔하여 마천령(摩天嶺)을 넘어 직정과 더불어 무리를 모아 북쪽으로 올라갔다. 공이 굳센 기병 600명을 이끌고 말을 채찍질하여 전진하며 이르기를 "내가 국가를 위하여 싸우다 죽지 않는다면 충신이 아니다."라고 하니 장사들이 그를 따라 감히 적을 두려워하여 물러나는 자가 없었다. 온종일 60리를 옮겨 다니며 싸우다 백탑교(白㙮郊)에 이르러 날쌘 기병으로 곧바로 왜노를 쳐서 크게 무찌르니, 흐르는 피가 들판에 가득했으며 화살을 맞고 죽은 자가 천 명으로 헤아렸다. 왜노가 시체를 싣고 성 안으로 들어가 불을 놓아 태웠다. 밤에 청정이 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밥 지을 겨를도 없었다. 이에 북방이 비로소 깨끗하게 맑아졌다.공이 최배천(崔配天)을 보내어 첩서(捷書)를 올리니 선조께서 눈물을 흘리며 최배천에게 조산대부(朝散大夫)를 더해 주었다. 윤탁연이 화를 내어 공의 과실을 모아 죄상을 열거하여 논하였으니 이 때문에 공은 등용되지 못하였다. 3월에 영흥 부사(永興府使)에 제수되었다가 온성(穩城)으로 개수되었으며 길주목(吉州牧)으로 옮겼다. 얼마 후에 왕의 부름을 받아 장예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부사(副使)로 천자에게 조회하러 갔다가 이듬해 사행이 돌아왔다. 북방 사람들이 상소하여 공을 칭송하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리고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總府副總管), 병조분사 참판(兵曹分司參判)에 승진시켰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공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소탈하며 조심스럽고 과묵하였다. 음주를 즐겼는데 대취하면 땀이 주르르 흘러서 빈객들이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인조가 즉위하자 원수(元帥)로 천거되었는데 공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내가 장차 화(禍)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 하였다. 이에 모친의 연로함을 들어서 노모를 봉양할 수령 자리를 청하여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는데, 2년도 안 되어 무고를 입고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죄가 없으므로 석방되려고 하는데, 공을 미워하는 자가 영사시(詠史詩)를 얻어 그것으로 그를 중상(中傷)하였다.처음에 광해군 때 공이 시를 지어 초 회왕(楚懷王)을 슬퍼하였으니 대개 그 뜻은, '회왕이 한번 무관(武關)에 들어가자 백성들의 희망이 끊어졌는데, 그 자손이 또 무엇 때문에 회왕이라 일컫는가?'라는 것이었다. 후에 최내길(崔來吉)이 그 시를 보고서 마침내 세상에 전하였다. 공이 이로 말미암아 죄에 걸려 고문을 받아 천계 4년(1624, 인조2) 11월 기사일에 옥중에서 돌아가셨으니 향년 60세이었다. 이듬해 모월 모일에 모부 모리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숙종 때(1713, 숙종39)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렸다. 7대조 정도공(貞度公) 정역(鄭易)이 강헌대왕(康獻大王 태조(太祖))을 섬겨 충근(忠勤)함으로써 소문이 났다. 증중조(曾仲祖) 정희량(鄭希良)은 관직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이르렀으나 일부러 강에 빠져 그 죽은 곳을 알지 못한다. 부친 정신(鄭愼)은 모부의 부사로서 모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공의 배필 모현의 모씨는 모관 모의 딸이며, 아들 몇 명이 있으니 모공이다.공이 돌아가신 지 42년이 되어 병마평사 이공(李公) 단하(端夏)가 의론하기를 "북방은 윤관(尹瓘) 공이 처음으로 9성(九城)을 설치하고서부터 317년 후에 군현이 몽고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김종서(金宗瑞) 공이 그 땅을 회복하여 마침내 6진(六鎭)을 설치하였다. 김공이 처음 6진을 설치하고서부터 161년 후에 군현이 왜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나, 정문부 공이 그 땅을 회복하였다. 이 세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힘썼으므로, 예법상 마땅히 제사를 지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북방의 사람들이 공의 사당을 무계(武谿)에 세웠으니, 숙종께서 이름을 내려 창렬(彰烈)이라고 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정씨 가문이 현달하기로는 鄭氏顯聞정도공에서부터 비롯되었으니, 自貞度始멀리 7세에 이르러 遙遙七世공이 그 복을 이어받았도다. 公承其祉처음에 평사를 제수 받아 初授評事북방의 원수를 보좌하니, 以佐朔帥변방의 선비들이 荒服之士예물을 가지고 모여들었도다. 罔不執贄섬오랑캐 극렬히 날뛰고 島夷孔熾북방 오랑캐도 위태롭게 하는데, 而狄又棘세 악인이 나라 안에서 반역하여 三孽內奰호랑이의 손발이 되었다. 爲虎羽翼아득한 북방 영토가 芒芒北門왜노들에게 함락되었으니, 淪于漆齒측근 신하가 도적을 키운 것이 屛臣養寇또한 크나큰 수치로다. 亦孔之耻공이 의로운 군대를 이끌고 公提義師무계에서 떨쳐 일어나니, 奮自武谿네 명의 지사가 용맹스럽게 四士蹻蹻더불어 고비를 따랐도다. 與從鼓鼙인의 갑옷에 예의 투구 쓰고 仁介禮冑충성 신의를 깃발 삼아, 忠信爲旌원수 백성을 죽이고 旣戮讎民마침내 성벽을 굳건히 하였도다. 遂敦雉城저 장평의 적을 쓸어버린 輮彼長平그의 6천 명의 군대가, 其旅六千백탑교에 이르러 至于白㙮하늘의 토벌을 도맡았다. 天討是專이에 야인들을 쳐서 乃拊山戎모여 살게하고 부드럽게 달래니, 以輯以柔오랑캐들이 복종하여 氊裘率從모두 임금님 은덕을 칭송하였도다. 咸頌王休북방이 평정된 것은 朔方載定누구의 공이던가, 伊誰之功아 너희 측근 신하가 咨汝屛臣도리어 충신을 헐뜯었도다. 乃反訾忠아름다운 시호가 빛나 有赫嘉謚그 잘못이 바루어졌으니, 其屈斯直의로운 명성을 길이 밝히고자 永昭義問돌에다 새기노라. 以刻于石 顯宗六年十二月戊寅,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臣太和言, 倭奴淸正入北方, 屠燒城郭, 蘇下江東北靺鞨勒輕騎, 深輮茂山·富寧地, 兵馬評事臣文孚, 躬將義師, 討淸正, 搴旗六鎭之外, 蹀血白塔之下。威服靺鞨, 以全邊境, 挫蠻戎之氣, 建震耀之勳, 萬曆以來, 宣武請將之所未有也。靖社時, 預元帥薦, 而被人誣告下吏, 又坐所謂詠史詩, 死於獄中, 臣竊悲之。行長入西方, 神宗皇帝命大將軍李如松, 率師五萬, 擊倭奴平壤城下。惟北方山川隔遠, 此神宗皇帝之所不得救, 而大將軍之所不能禦也。然文孚以一評事, 募兵六千, 能力戰斥逐倭奴, 復北方二十二州, 而大功未獲封爵, 乃以非罪, 竟死於刀筆之前, 豈不痛哉。臣以爲宜命有司, 贈文孚爵, 以慰北人之心。上乃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公姓鄭氏, 字子虛, 海州人也。少擧甲科, 補漢城府參軍, 出爲咸鏡北道兵馬評事。萬曆二十年, 平秀吉叛, 六月淸正入北方, 會寧府吏鞠景仁, 執王子臨海君珒·順和君?及南道兵馬節度使李瑛等, 幽之軍中, 使林珉獻于淸正。旣數日, 景仁叔父世弼, 以鏡城叛, 末秀以明川叛, 爲淸正爪牙, 北方大亂, 縛節度使韓克諴·虞侯李範等, 以迎淸正, 自六鎭至咸關嶺千餘里, 皆屬倭奴。公發憤, 潛與慶源府使吳應台·慶興府使羅廷彦等, 入鏡城, 謀復北方, 衆畏世弼, 皆分散, 不可復集。公棄去, 弊衣行乞, 入富寧靖巖山中, 菜食。久之, 至龍城, 依巫覡韓仁侃家。仁侃熟視, 曰:"子豈非兵馬評事邪?" 遂厚遇之。八月中, 公與布衣崔配天、池達源二人者, 或負或携, 從間道, 南抵武谿。武谿處士李鵬壽見公容貌, 大說之, 迎至其家。居一月, 公欲浮海下東南, 鵬壽慨然爲公語曰:"吾欲建義討倭奴, 陰求烈士之可爲將者, 而未得其人也。今公來臨, 是上天佑我北方也。" 因留公招集義旅。鏡城壯士姜文佑、鍾城府使鄭見龍願爲前行。徐忠肅公渻聞公之風, 亦歸之。鵬壽身自負軍糧, 間走吉州, 覘倭奴軍中虗實。時淸正屯于安邊, 與世弼使諜不絶。公患之, 乃令文佑從數騎, 邀於道中盡殺之, 使諜遂絶。見龍等勸公立號, 公不肯。鵬壽流涕固請之, 然後乃許。衆遂推公爲大將, 見龍、應台爲次將。公自以年少位卑, 讓於見龍, 見龍固辭不敢當, 諸將士亦願隷公。會靺鞨, 自蘇下江襲訓戎、阿山、撫夷、造山四鎭, 殺掠人民。公由是主義旅盟, 卽遣使于世弼, 諭以戮力禦邊境。九月, 公自漁郞里, 次于柳亭, 又遣使請與世弼會府中, 世弼盛兵以待之。公引麾下百餘騎, 馳入府中, 以利害反復譬曉, 世弼畏服, 不敢動。乃使親屬居公旁, 察其機變。人有勸公誅世弼者, 世弼聞之,乃大懼。公夜屛人,與世弼語府中事,不色疑,世弼甚喜。已而倭奴九十餘,夜薄城下, 公命將士擊斬之。於是世弼與其子禽倭奴將, 公錄其功, 申聞之。世弼益喜, 乃自安。公又赦府中叛兵, 嘗射己者, 爲禆將, 六鎭戎士皆感激, 願屬麾下。居未幾, 會寧諸生吳允廸服公之義, 言於府學曰:"敬仁可斬。" 府中義士申世俊乃吹角, 士卒皆會。諸生尹岦等六人勒令士卒斬敬仁及其義兒崔鱗水等。冬十月, 明川士民二百人共討末秀, 敗績潰府中。義士金千年生擒末秀及其黨張應豪等。自是南北得通道, 徵兵稍至。明日, 公建大將旗, 登南門樓, 縛世弼等十三人, 皆斬之, 以徇其軍。於是威聲震北方, 列鎭壯士應募者, 至六千人。公與諸將議出師, 見龍曰:"倭奴方銳不可敵。宜保鏡城以伺其釁。" 公奮曰:"文孚本興義兵, 爲國耳。今守一城, 不出戰, 欲效閨門女子爲邪?" 乃分其兵爲三衛, 出永康驛, 行數里。有人走告曰:"倭奴軍盛, 公與戰必不利也。宜城守以自保。" 公怒曰:"汝爲倭奴沮吾軍邪?" 立斬其首, 懸旗上。次于明川, 以防垣兵馬萬戶韓仁濟爲伏兵將。又令從事元忠恕率精兵, 屯吉州北三十里, 與倭奴戰于海汀, 斬其帥先登二人, 倭奴遁去。忠恕乘勝追擊之, 至長平, 倭奴直正與將軍都關、汝文, 引大兵敢死搏戰。文佑、忠恕分左右, 縱騎突進, 仁濟伏兵又迭前, 廝徒、郵卒無不鼓勇, 直正下馬遂步闘。自申至戌, 四面流矢如雹集, 倭奴力屈, 始升高。文佑、忠恕皆怒馬先後夾馳, 上峻阪, 直正軍潰, 遂北走。文佑追至長德山, 都關、汝文亦中矢十餘而遁, 伏兵四出, 大破之。殺其巨魁五人, 斬首八百二十五級, 其餘衆亡入山者, 輒縱火而燒殺之。中矢墜崖而死者, 不可勝數。奪戰馬一百十八匹, 又得旌旗戈戟鎧甲甚多。十一月, 三衛合兵, 圍吉州, 倭奴堅守不可拔。公以爲:"吾兵驟攻, 死傷必多, 不如先擊嶺東柵。柵中旣平, 則吉州勢孤援絶, 吾取之如籠中鳥耳。" 卽移兵至雙介浦, 遇直正, 三衛精騎奮擊之, 遂破倭奴於壓海亭下。斬百餘級, 僵尸縱橫十五里。公又進圍吉州。明日, 爲檄射城中, 倭奴恐懼, 皆遁去。十二月, 公以始斬世弼功, 特加通政。觀察使尹卓然忌公之功, 乃移文免公大將, 見龍代之。會節度使令公巡行六鎭中, 以綏靺鞨。公率麾下五十人, 北行郡縣, 誅有罪旌有功, 拊禦戰守, 能得其方, 靺鞨畏愛, 私相戒諭, 悉還其所掠人口。公具酒食, 招其酋長二百人以饋之, 溫言開告, 繇先春、雲頭以南, 至童巾、多溫諸族, 不敢復爲邊境害。自卓然免公大將, 人心不平, 六千壯士多散去, 卓然始懼, 乃復以公爲大將。明年正月, 公單騎馳至吉州, 六千壯士見公來, 勇氣百倍, 散去者亦皆還集。端川郡守姜燦造公語曰:"倭奴橫行郡中, 願公分兵以擊之。" 公選精兵三百人爲四隊, 伏於城外, 使端軍挑戰陽北。倭奴追之抵嶺下, 四隊並出馳擊之, 倭奴敗走, 提空礮發, 皆不中。公力戰, 或遮其前, 或斷其後, 斬六十級。居五日, 淸正勒兵二萬人, 踰摩天嶺, 與直正合衆北上。公引勁騎六百人, 策馬而進, 曰:"吾爲國家不戰死, 非忠臣也。" 將士從之, 莫敢有畏敵而退者。終日轉闘六十里, 至白㙮郊, 以輕騎直搗倭奴, 大破之。流血盈野, 中矢死者以千數。倭奴載尸入城中, 縱火燒之。夜淸正棄城南遁, 不暇炊食。於是北方始廓淸。公遣配天上捷書, 宣廟流涕, 加配天朝散大夫。卓然恚, 積公過失, 列狀論之, 故公不得見用矣。三月授永興府使, 改穩城, 遷吉州牧。已而召拜掌隷院判決事。光海卽位, 以副使朝天子, 明年使還。北方人上疏頌功, 陞嘉善, 進五衛都總府副總管、兵曹分司參判, 皆不就。公爲人剛簡謹默。喜飮酒, 大醉淋漓, 賓客不得見其面也。仁廟卽位, 被元帥薦, 公歎曰:"吾將不免矣。" 乃以母老求終養, 出尹全州, 不二年, 被人誣告, 逮繫獄。無罪當釋, 嫉公者得詠史詩以中之。始, 光海時, 公爲詩, 傷楚懷王, 蓋其意曰:"懷王一入武關, 民望已絶, 則其孫又何以稱懷王也?" 後崔來吉見其詩, 遂傳於世。公由是坐, 被考問, 以天啓四年十一月己巳, 卒于獄中, 享年六十。以明年某月某日, 葬某府某里之原。肅廟時, 謚曰忠毅。七世祖貞度公易事康獻, 以忠勤聞。曾仲祖希良, 官至藝文館檢閱, 佯沈江, 不知所終。皇考諱愼, 某府府使, 贈某曹參判。公之配曰某縣某氏, 某官某之女也。有子幾人, 曰某公。旣卒之四十二年, 兵馬評事李公端夏議:"北方自尹公瓘初置九城, 後三百十七年, 郡縣入于蒙古, 金公宗瑞復其地, 遂置六鎭。自金公初置六鎭, 後一百六十一年, 郡縣入于倭奴, 鄭公文孚復其地。此三人以勞定國, 法宜祀。" 於是北人立公之廟於武谿, 肅廟賜名曰"彰烈"。銘曰:"鄭氏顯聞, 自貞度始。遙遙七世, 公承其祉。初授評事, 以佐朔帥。荒服之士, 罔不執贄。島夷孔熾, 而狄又棘。三孽內奰, 爲虎羽翼。芒芒北門, 淪于漆齒。屛臣養寇, 亦孔之耻。公提義師, 奮自武谿。四士蹻蹻, 與從鼓鼙。仁介禮冑, 忠信爲旌。旣戮讎民, 遂敦雉城。輮彼長平, 其旅六千。至于白㙮, 天討是專。乃拊山戎, 以輯以柔。氊裘率從, 咸頌王休。朔方載定, 伊誰之功。咨汝屛臣, 乃反訾忠。有赫嘉謚, 其屈斯直。永昭義問, 以刻于石。"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기문록 창곡 최유해 길주 □ 있을 때 □ 바이다. 記聞錄 蒼谷崔有海【□吉州時所□】 임진년(1592년)에 왜적이 승승장구하며 쳐들어오자 왕의 수레가 서쪽으로 몽진하였다. 함경도 감사(咸鏡道監司) 윤탁연(尹卓然)은 새가 도망치고 꿩이 숨는 듯하였는데, 왜적이 길주(吉州) 이북에 가득 차 백성을 날로 사살하였으니 이것은 북병사(北兵使) 한극함(韓克諴)과 남병사(南兵使) 이혼(李渾) 등이 철령(鐵嶺)을 지키다가 패하였기 때문이었다.어리석은 백성과 종[奴]의 무리들은 우리나라 사대부의 은신처를 다투어 왜놈에게 고하여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재신(宰臣) 황정욱(黃廷彧)과 황혁(黃赫) 등이 회령(會寧)에서 포로가 되었으며, 명천(明川)의 관노 말수(末秀)와 회령의 관노 국경인(鞠景仁) -정공의 장계에서 모두 국경인을 아전이라 하였으니, 관노라 칭한 것은 아마도 잘못인 듯하다.- 등은 왜적의 무리를 따랐으며, 병사 한국함, 경성 판관 이홍업(李弘業), 명천 현감 한인제(韓仁濟) 등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10월에 본주(本州) 사람 허진(許珍)은 적개공신 허유례(許惟禮)의 증손으로서 무사 김국신(金國信), 경성 유생 이붕수(李鵬壽) 등과 충심과 울분이 격렬하여 몰래 산속에 다니면서 의병을 일으키고 패전 병사 및 백성들을 일깨우니 호응하는 자가 많았다. 해구(海口)에서 의논을 모아 군사 1천 명을 얻었다. 여러 사람들이 북평사 정문부(鄭文孚)가 문무의 재주가 있다고 추대하여 대장으로 정하고 피를 마시며 하늘에 맹세했다. 반역자 송대풍(宋大豐), 임대정(林大定), 박 보(朴甫), 기남(奇南), 기말수(奇末守), 국경인(鞠景仁), 전언국(田彦國) 등을 먼저 잡아 몰래 죽이니 위엄이 원근에 진동하였다.북우후(北虞侯) 한인제(韓仁濟), 경원 부사 유경천(柳擎天), 오응태(吳應台) -정공의 장계와 택당의 《채순록(採詢錄)》에는 모두 유경천은 고령(高嶺) 첨사라 하고 오응태를 경원 부사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경원 부사 유경천이라 하였고 오응태의 위에는 관직이 없으니 아마도 탈자나 오자가 있는 듯하다.-,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이 모두 와서 따랐으니, 부대가 만 명이 되었다. 대장은 제장(諸將)에게 부서를 맡겼으니, -부서를 맡긴 것은 정공의 장계와 다르니, 아마도 이 글을 기록할 때 정공의 장계가 아직 널리 전해지지 않아서 다만 들은 내용에 의지하여 기록한 것인가.- 한인제는 좌위장이 되어 목책(木柵)에 진을 쳤고, 정현룡은 중위장이 되어 백탑(白塔)에 진을 쳤고, 유경천은 우위장이 되어 날하(涅河)에 진을 쳤고, 원충서(元忠恕)는 우복병장이 되어 모회(毛會)에 진을 쳤고, 오응태는 좌복병장이 되어 석성(石城)에 진을 쳤고, 허진(許珍)은 우척후장이 되어 방치동(方峙洞)에 진을 쳤고, 김국신(金國信)은 좌척후장이 되어 임명(臨溟)에 진을 쳤으며, 대장 정문부는 명천(明川)에 진을 쳐서 서로 의각(猗角)의 형세44)를 이루어 적병이 나와 노략질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장차 그들을 죽이려고 하였다.11월에 주진(州陣)의 적장 거도문(巨道文)이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명천 가파(加坡) 지역까지 와서 노략질하였다. 이 때에 내노(內奴) 이배(李培)는 집안 살림이 매우 넉넉하였는데 굿을 지내기 위해 빚어 놓은 술이 한창 잘 익었으므로 모든 적이 마시고 진탕 취하였다. 크게 노략질하여 회군하는데, 허진과 김국신이 회의하기를 "왜놈이 돌아갈 때 어둑해지면 마땅히 석성령(石城嶺)에 이를 것인데, 길이 좁고 옆으로 매우 험준하니 군사가 매복하면 목을 움켜쥐고 등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라 하고 사잇길로 가서 몰래 매복하였다.적이 과연 날이 저물어 석성령 밑에 이르므로, 좌우 복병이 함께 뛰쳐나와 두어 겹으로 포위하니 적이 놀래어 어쩔 줄 몰라 하였고 혹은 술에 취해서 창도 잡을 수 없었다. 허진과 김국신 등이 활을 잡고 쏘니 적중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짧은 병기로써 뒤쫓아가 찌르니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오직 왜적의 우두머리 거문만이 도망하여 성벽에 들어가 통곡하였는데, 견고한 성벽은 움직이질 않았다. 그 뒤 성과 나루 그리고 진(鎭)에 머무르던 왜적이 임명(臨溟)에 나타나 지르고 노략질하니, 의병장이 날랜 기병을 산기슭에 매복시키고 적이 돌아오는 것을 엿보다가 추격하여 매우 많은 왜적의 목을 베었다. 그들의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어 길가에 늘여놓은 것이 십여 리나 뻗쳤으니, 병사들의 사기는 크게 진동하였다.이듬해 2월에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이 격문을 돌려 협력하여 왜적을 칠 것을 청하니, 의병장이 정예병을 선발하여 사절동 권관(斜卩洞權官) 고경민(高敬民)을 장수로 삼아 보냈는데, 성 밖에서 왜적을 꾀어 공격하여 매우 심하게 머리와 몸통, 그리고 발을 토막 내니 왜적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이에 대장 청정(淸正)에게 고하니 대군을 거느리고 본주(本州)로 들어가는데, 의병장이 고을 사람 허충방(許忠邦)과 원충서(元忠恕)로 하여금 내달려가서 왜적이 가는 길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왜적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행군하였다. 허대성(許大成)과 이붕수(李鵬壽)는 적의 탄환에 맞아 죽었다. 청정이 고을에 이른 이튿날 철수하기 시작하여 이틀 거리를 하루에 가며 남으로 내려가니, 북로에서 국명(國命)을 보전하게 된 것은 의병의 공 아님이 없었다.이 때 북로의 소식이 오랫동안 행조(行朝)에 두절되었다. 정문부가 경성 유생 최배천(崔配天)을 시켜 승전보를 행재소에 보고하니, 그를 포상하여 판관의 관직을 내려주었다. 그 뒤 경성 유생 등이 상소하여 정문부 등이 창의한 사적을 극력 아뢰니, 선조 대왕이 가자(加資)하고 다시 길주 목사로 임명하였다. 허진의 손자 허힐(許詰)은 유식한 유생이었고, 김국신의 손자 김기남(金起男)은 두 번이나 달려가 근왕병이 되어 시종일관 종군하였는데, 각각 할아버지의 기풍이 있었다. 이붕수의 손자 이훤(李萱)과 이용(李蓉)은 경성에 있다고 한다.무인년(1638년) 8월에 목사가 소장을 올려 의병장의 자손을 거두어 녹용(錄用)해서 권선징악의 도리를 세상에 밝혀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감사에게 명하여 후손들을 채방하여 녹용(錄用)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壬辰, 倭賊長驅, 龍馭西行, 咸鏡監司尹卓然, 鳥竄雉伏, 賊瀰滿吉州以北, 日殺人民, 北兵使韓克諴·南兵使李渾等, 守鐵嶺致敗之故也。愚民僕屬, 爭告我國士大夫隱伏處, 王子臨海君·順和君·宰臣黃廷彧·黃赫等, 被擒於會寧, 明川官奴末秀·會寧官奴鞠景仁【鄭公狀啓, 皆以景仁爲吏, 則官奴之稱, 恐誤。】等, 付賊黨。兵使韓克諴·鏡城判官李弘業·明川縣監韓仁濟, 幷被擒。十月本州人許珍, 敵愾功臣惟禮之曾孫也, 武士金國信·鏡城儒生李鵬壽等, 忠憤激烈, 潛行山谷, 以義兵倡, 諭敗卒及士民, 多應之。會議於海口, 得兵一千。衆推北評事鄭文孚, 有文武才, 定大將, 歃血誓天。叛民宋大豐·林大定·朴甫·奇南·奇末守·鞠景仁·田彦國等, 爲先潛戮, 威震遠近。北虞侯韓仁濟·慶源府使柳擎天·吳應台【鄭公狀啓及澤堂《採詢錄》, 皆以柳擎天爲高嶺僉使, 吳應台爲慶源府使, 而此云慶源府使柳擎天, 吳應台上無官銜, 恐有脫誤。】·鍾城府使鄭見龍, 皆來附, 兵隊滿萬。大將部署諸將,【部署, 與鄭公狀啓異, 豈其時鄭公狀啓未及傳行, 而只憑傳聞記之邪。】 韓仁濟爲左衛將屯木柵, 見龍爲中衛將屯白塔, 柳擎天爲右衛將屯涅河, 元忠恕爲右伏兵將屯毛會, 吳應台爲左伏兵將屯石城, 許珍爲右斥候將屯方峙洞, 金國信爲左斥候將屯臨溟, 大將鄭文孚陣明川, 相爲猗角, 以待賊兵出掠, 將勦之。十一月, 州陣賊將巨道文, 領千兵, 出掠明川加坡地。時內奴李培, 家甚饒, 因巫祀釀酒方濃, 諸賊飮而盡醉, 大掠回軍, 許珍·金國信會議曰: "賊之還, 暮當至石城嶺, 路狹傍多險阻, 可伏兵, 扼項拊背。" 間行潛伏。賊果暮至嶺底, 左右伏兵俱發, 圍之數匝, 賊震駭失措, 或醉不能持戟, 許珍金國信等, 彎弓以射, 無不中, 短兵追跐, 積屍如山, 賊酋巨文, 獨跳奔入壁痛哭, 堅壁不動。後城津留鎭之賊, 出臨溟焚掠, 義兵將以輕騎還伏山麓, 伺賊之還, 追斬獲甚多, 遂剖其腹, 露其腸, 列之路旁, 連延十餘里, 兵聲大震。明年二月, 端川郡守姜燦移檄, 請恊力討賊, 義兵將抄精銳, 以斜卩洞權管高敬民爲將以遣, 誘擊於城外, 大膊亦甚, 賊大懼, 告于大將淸正, 領大兵入本州, 義兵將使州人許忠邦元忠恕, 馳犯賊路, 賊略不顧徐行。許大成李鵬壽, 中丸以死。淸正到州, 翌日撤回, 倍日南出, 北路得全國命者, 莫非義兵之功也。時, 北路聲息, 久絶行朝。文孚使鏡城儒生崔配天, 報捷行在, 褒賞秩判官以送, 後鏡城儒生等, 陳疏極言鄭文孚等倡義之蹟, 宣祖大王命加資, 再牧吉州。許珍孫詰, 有識儒生, 金國信孫起男, 再赴勤王, 終始從軍, 各有祖風。李鵬壽孫李萱李蓉, 在鏡城云。戊寅八月, 牧使陳疏, 請收用義兵將子孫, 以彰勸懲, 上命監司採訪遺孫, 以裨錄用。 의각의 형세 한 손으로는 그 뿔을 잡고 한 손으로는 그 발을 비튼다는 뜻으로 협공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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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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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조선국 함경도 임명 대첩비명 병서 有明朝鮮國咸鏡道臨溟大捷碑銘 【幷序】 崑崙崔昌大撰【李奉化明弼書】 곤륜 최창대가 짓다. 봉화 이명필이 쓰다.옛날 임진년의 난리에 힘써 싸워 적을 깨뜨려 한 세상에 이름을 크게 울린 이로 해전에서는 이 충무공(忠武公)의 한산대첩이 있고 육전에서는 원수 권율(權慄)의 행주대첩이 있으며 이월천(李月川)의 연안(延安) 대첩45)이 있는데, 역사가가 그것을 기록하였으며 재담꾼은 칭송하여 마지않는다. 그러나 이분들은 오히려 지위가 있어서 말과 부역과 군졸들을 냄에 힘입을 수 있었다. 고단하고 미약한 데서 일어나 도망 다니며 숨어 지내다 분발하여 다만 충의로써 서로 격려하여 마침내 오합지졸을 써서 완전한 승첩을 거두어 한 지방을 수복한 것은 관북(關北)의 군사가 제일이었다.처음 만력(萬曆) 연간에 왜의 추장 수길(秀吉)은 강한 군사들을 믿고 오만하게 굴면서 우리의 뜻을 거스르며 중국을 넘겨다보고 침범하려 하였다. 우리가 길을 빌려 주지 않는 것에 화를 내어, 드디어 대규모로 쳐들어와 서울에까지 밀고 들어왔다. 선조는 이미 서쪽으로 몽진하였고 여러 고을이 무너졌으며 적은 이미 경기도를 함락시켰다. 그 날랜 장수 두 사람이 군사를 두 길로 나누니 행장(行長)은 행조(行朝)를 뒤쫓아 서쪽으로 가고 청정(淸正)은 북방 침공을 맡았다.그 해 가을에 청정이 북도로 들어갔는데 왜적의 군대가 대단히 정예병이라 철령(鐵嶺) 이북의 성을 지키지 못했다. 이 때에 국경인(鞠敬仁) 등이 반역하여 왜적에게 내응하였다. 국경인은 회령부(會寧府)의 아전으로 본성이 악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왜적이 부령(富寧)에 이르자 그 위기를 타고 난을 일으켜 피난해 온 두 왕자와 대신을 사로잡고 아울러 장수와 관리들을 묶어 적에게 내주며 정성을 보였다. 경성(鏡城) 아전 국세필(鞠世必)은 그의 숙부인데, 이놈이 명천(明川) 사람 말수(末秀), 목남(木南)과 연합하여 서로 무리를 지어 모두들 적이 주는 관작을 받아 각각 고을을 점거하고 성세(聲勢)를 벌여 백성을 죽이고 위협하기를 그들의 지령대로 하니, 여러 고을이 무너지고 겁내어 백성들이 자신을 보전하지 못하였다.경성 이붕수(李鵬壽)는 의기 있는 선비로, 분개하며 말하기를 "비록 국가의 어지러움이 이에 이르렀으나, 흉도가 감히 저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 몰래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 강문우(姜文佑) 등과 함께 의병 일으키기를 도모했는데, 여러 사람의 지위가 서로 비슷하여 장수 삼을 이가 마땅치 않았다. 평사 정문부(鄭文孚)는 문무의 재주는 있으나 군사가 없어 싸울 수 없으므로 몸을 빼어 산골에 숨어 있던 중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즐거이 찾아왔으니, 마침내 정공을 추대하여 주장(主將)으로 삼고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과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등을 차장으로 삼고서 피로써 의리를 맹서하며 병사를 모집하여 백여 명을 얻었다.그 때 북쪽 오랑캐들이 또 북쪽 변방을 침범하므로 여러 장수들이 사람을 시켜 국세필을 달래어 같이 힘을 합하여 오랑캐들을 막자 하니 국세필이 허락하고 의병들을 성 안으로 받아들였다. 이튿날 아침 정공이 기와 북을 세우고, 남문루에 올라 국세필에게 올라와 인사하라고 꾀어 그가 누대에 올라올 때에 강문우에게 눈짓하여 그를 사로잡게 하고서 목을 베어 조리돌리고, 그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은 용서해 주었다. 곧바로 군사를 이끌고 남쪽 명천(明川)으로 달려가 말수 등을 잡아 목을 베었으며, 회령 사람이 또한 국경인을 쳐서 죽여서 의병에게 호응하였다. 군세(軍勢)가 점점 커져서 따라와 붙는 자가 더욱 많아졌으니, 길주(吉州) 사람 허진(許珍), 김국신(金國信), 허대성(許大成)도 또한 군사를 모아 성원하였다.이 때에 청정이 편장(偏將)으로 하여금 정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길주에 웅거하게 하고서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남관(南關)에 진을 쳐 뒷배를 지켜주었다. 11월에 적을 가파리(加坡)에서 만나 싸우려는데, 정공은 여러 장수들을 부서를 나눠 배치하되 정현룡은 중위장을 삼아 백탑(白㙮)에 진을 치게 하고, 오응태와 원충서(元忠恕)는 복병장을 삼아 석성(石城)과 모회(毛會)로 나누어 진을 치게 하고, 한인제(韓仁濟)는 좌위장을 삼아 목책(木柵)에 진을 치게 하고, 유경천(柳擎天)은 우위장을 삼아 날하(涅河)에 진을 치게 하고, 김국신과 허진은 좌우 척후장으로 삼아 임명(臨溟)과 방치(方峙)로 나누어 진을 치게 했는데, 적들은 전투에 이긴 것에 오만하여 방비를 허술하게 하였다.우리 군사들은 한꺼번에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여 기세를 타고 달려들었으니 고함치며 앞서 나가지 않는 군사가 없었다. 적이 패하여 달아나는데 군사를 풀어 추격하여 장수 다섯 명을 죽였고 목은 수 없이 베었으며, 그 말과 가축, 무기들을 모조리 빼앗았다. 원근에 승전보가 진동하여 도망치고 숨어 지내던 장수와 아전들이 앞 다퉈 일어나 호응하니 무리들이 7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왜적은 패잔병을 수습해 길주성으로 들어가 움츠리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는데 길옆에 복병을 두어 나오기는 왜놈을 맞아 곧바로 무찔러 버렸다.이윽고 성진(城津)의 왜적이 임명(臨溟)을 크게 노략질하므로 경기병(輕騎兵)을 이끌고 습격하였으며, 산에 숨어 매복했다가 적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협공하여 크게 격파하고 또 수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마침내 그 배를 갈라 창자를 길가에 늘어놓자 군사의 사기가 크게 떨치고 적은 더욱 두려워하였다. 12월에 또 쌍포(雙浦)에서 싸웠는데, 싸움이 한창 접전을 벌이는데 편장(偏將)이 철기를 끌고 풍우처럼 빠르게 가로질러 돌파하니 적이 기세를 잃고서 맞서 보지도 못하고 모두 흩어져 달아나므로 승세를 타고 또다시 격파하였다.이듬해 정월에 단천(端川)에서 싸웠는데, 세 번 싸워 세 번 이기고 돌아와 길주에 진을 치고 군사들을 쉬게 하였다. 이윽고 청정이 군대를 쓰는 것이 불리함을 알고 대군을 보내어 길주의 왜적을 맞아 돌아오게 하므로 우리 군사들은 그 후미를 공격하였는데, 백탑에 이르러 큰 전투가 벌어져 또다시 패배시켰다. 이 전투에서 이붕수, 허대성, 이희당(李希唐)은 전사하였으나, 적은 마침내 물러가 다시는 감히 북쪽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이 때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도 또한 행장을 평양에서 격파하였는데, 정공이 최배천(崔配天)을 시켜 샛길로 행재소에 승첩을 아뢰니 임금이 불러보고 눈물을 흘리며, 아붕수에게 사헌부 감찰을 추증하고 최배천에게는 조산대부의 직급을 내렸다.당시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은 정문부가 절도사에게 아뢰지 않은 것을 성내며 의병의 공적이 자기보다 뛰어남을 시기하여 임금께 공로를 숨기고 거짓말로 아뢰었기 때문에 공에게는 포상이 시행되지 않았다. 오랜 뒤 현종(顯宗) 때 관찰사 민정중(閔鼎重)과 북평사 이단하(李端夏)가 부로(父老)들에게서 듣고서 사실을 아뢰었다. 이에 비로소 정문부에게는 찬성(贊成), 이붕수에게는 지평(持平)을 증직하고 남은 사람들에게도 차등 있게 관작을 내렸으며, 또 사당을 경성 어랑리(漁郞里)에 세워 당시 같이 거의했던 여러 사람들을 제사지내게 하고 '창렬(彰烈)'이라 사액했다.지금 임금 경진년(숙종 26, 1700년)에 내가 북평사가 되어 의병의 자손들과 함께 연고지를 방문하여 사적을 자세히 알게 되니 제공(諸公)의 기풍을 탄식하면서 상상하였다. 또 이른바 임명(臨溟), 쌍포(雙浦)를 찾아가 진을 치고 싸우던 자리를 살펴보면서 배회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탄식이 일어 떠나지 못하였다. 간간이 부로에게 말하기를 "섬나라 오랑캐의 전화(戰禍)가 혹심하여 세 서울이 함락되고 팔도가 무너졌는데, 이 분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고립된 군사를 이끌고서 강한 왜구를 무찔러 우리나라 왕이 일어났던 옛 지역을 마침내 오랑캐 땅이 되는 것에서 면하게 하였다. 변방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일어나 충의를 서로 권하게 된 것이 그 또한 누구의 힘이더냐. 행주와 연안의 일은 모두 비갈(碑碣)이 있어 사적을 적어 공렬을 드리우고 있으니 동서로 오가는 이들이 우러러보고 예를 표하는데, 관북의 훌륭한 공로를 가지고도 비갈 하나가 없으니 어찌 제군의 수치가 아니겠는가."라 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뜻이기도 한데 하물며 공의 명령까지 있음이겠소."라 하였다. 마침내 돌을 다듬고 재물을 모으고서 사람을 시켜 나에게 글을 청하였는데 나는 적임자가 아니므로 사양했더니 다시 와서 말하기를 "이 일은 공이 실로 처음 의논한 사람이니 허락해 주지 않으면 일을 철폐하겠소."라 하기에 나는 마침내 그의 사적을 서술하고서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남쪽에서 도적이 와 有盜自南명나라를 치려하였네. 讐我大邦우리 왕은 그 이웃이 되니 我王于蕃온 나라가 칼날을 받았어라. 以國受鋒높고 높은 북방이 屹屹北原오랑캐 소굴이 되었구나. 狼虺穴墉어리석은 백성들이 有蠢者氓대항하지 못하고 따랐네. 不抗而從피 머금은 입으로 서로 삼키며 血口胥呑흉악한 독을 퍼트렸어라. 濟毒以兇선비가 헌걸차니 士也朅朅준수한 무리 모두 같구나. 俊羣攸同군사에겐 의리가 제일 중요하니 兵義莫利창과 활로 싸우는 게 대수랴 不屑戈弓이윽고 반역의 무리를 섬멸하니 旣殲叛徒왜구는 우리에게 덤비지 못하네. 寇莫我衝무부들 북을 치고 함성 지르니 武夫鼓呼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솟구치는 듯. 山摧海洶군대의 정벌이 크게 빛나니 師征孔赫왜놈들 무너져 두려워하였어라. 厥醜崩恟협심하여 하늘의 벌이 이르게 하니 協底帝罰나의 충정을 사사로이 한 것이 아니라네. 匪私我忠북토가 이미 평정되니 北土旣平너는 누에 치고 나는 농사짓누나. 爾蠶我農임금께서 "아! 大君曰咨누가 너의 공보다 뛰어나랴." 孰尙女功관직 추증하고 사원 제사 명하니 贈官命祠시종 빛나는 은혜 베풀었어라. 光惠始終사풍이 이 때문에 열렬하니 士風其烈백성들은 곧바로 싸울 수 있구나. 民可卽戎임명의 바닷가에 臨溟之厓우뚝한 빗돌 있어라. 有石嵸嵸새겨서 그 말 외우게 하며 刻之誦詞영원히 보게 하리라. 用眡無窮숭정 갑신 뒤 65년 10월 일 삼가 짓다. 在昔壬辰之難, 其力戰破賊, 雄鳴一世者, 水戰則有李忠武之閑山焉, 陸戰則有權元帥之幸州焉, 有李月川之延安焉, 史氏記之, 游談者誦之不倦。雖然此猶有位地, 資於乘賦什伍之出也。若起單微奮逃竄, 徒以忠義相感激, 卒能用烏合取全勝, 克復一方者, 關北之兵爲最。始萬曆中, 倭酋秀吉, 怙强驁逆, 規犯中國, 怒我不與假道, 遂大入寇, 長驅至都。宣廟旣西幸, 而列郡瓦解, 賊已陷京畿。其驍將二人, 分兵首兩路, 行長躡行朝西, 淸正主北攻。其秋, 淸正入北道, 兵銳甚。鐵嶺以北, 無城守焉。於是鞠敬仁等叛應賊, 敬仁者, 會寧府吏也。素惡不率, 及賊到富寧, 隙危扇亂, 執兩王子及宰臣奔播者, 並縳諸長吏, 與賊效欵。鏡城吏鞠世必, 其叔父也, 及明川民末守木男, 連謀相黨, 並受賊所署官, 各據州城, 聲張勢立, 殺脅惟所指, 數州崩駭, 人莫自保。鏡城李鵬壽, 爲氣士也, 奮曰: "縱國家創攘至此, 兇徒敢爾耶。" 乃潛與崔配天·池達源·姜文佑等, 謀起義兵, 諸人地相夷, 莫適爲將。評事鄭文孚, 有文武才, 無兵可戰, 脫身匿山谷間, 聞義兵起, 欣然從之, 遂推鄭公爲主將, 鍾城府使鄭見龍·慶源府使吳應台爲次將, 歃血誓義, 募兵得百餘人。時北虜人侵北邊, 諸公使人誘世必, 並力禦北虜, 世必許之, 內義兵州城。明朝, 鄭公建旗鼓, 上南城樓, 誘世必上謁, 時其入, 目文佑禽之, 斬以徇, 赦其脅從。卽引兵南趣明川, 又捕末守等斬之, 會寧人亦討敬仁誅之, 以應義兵, 軍勢稍壯, 來附者益衆, 吉州人許珍·金國信·許大成, 亦聚兵爲聲援。當是時, 淸正令偏將, 領精兵數千, 據吉州, 身率大軍, 屯南關以護之。十一月, 遇賊于加坡將戰, 鄭公部署諸將, 見龍爲中衛將, 屯白㙮, 應台及元忠恕爲伏兵將, 分屯石城·毛會, 韓仁濟爲左衛將, 屯木柵, 柳擎天爲右衛將, 屯涅河, 金國信,許珍爲左右斥候將, 分屯臨溟方峙, 賊狃勝不甚備。諸軍並起揜擊, 乘銳蹙之, 士無不疾呼先登者, 賊敗走, 縱兵追之, 殺其將五人, 斬獲無數, 盡奪其馬畜兵械。於是遠近響震, 將吏亡伏者爭起應之, 衆至七千餘人, 賊收入吉州城, 窘不敢動, 列伏于旁陿, 邀其出輒剿之。已而城津賊, 大掠于臨溟, 率輕騎襲之, 萆山設伏, 伺其還夾擊, 大破之, 又斬數百人, 遂剖其腹腸, 暴之大路, 於是兵聲大振, 賊益畏之。十二月, 又戰于雙浦, 戰方合, 偏將引鐵騎橫衝之, 迅如風雨, 賊失勢, 不及交鋒, 皆散走, 乘勝又破之。明年正月, 又戰于端川, 三戰三勝, 還屯吉州休士。旣而淸正知軍不利, 遣大兵迎還吉州賊, 我軍尾擊, 至白㙮大戰, 又敗之, 是役也, 李鵬壽·許大成·李希唐, 戰死。然賊遂退, 不敢復北。當是時, 皇明將李如松, 亦破行長於平壤, 鄭公乃使崔配天, 間行奏捷行在, 上引見流涕, 贈鵬壽司憲府監察, 賜配天秩朝散。時觀察使怒文孚不稟節度, 而疾義兵功聲出已, 聞奏率以誣揜, 以故賞不行。久之, 顯宗時觀察使閔鼎重, 北評事李端夏, 聽於父老, 以實聞。於是加贈文孚贊成, 鵬壽持平, 餘人贈官有差, 又建祠鏡城之漁郞里, 祀同事諸人, 賜額曰彰烈。今上庚辰, 昌大爲北評事, 旣與義旅之子孫, 訪問前故, 得事蹟爲詳, 慨然想諸公之風, 又嘗路所謂臨溟·雙浦者, 觀其營壁戰陣之所, 徘徊指顧, 爲之咨嗟而不能去。間語其長老曰: "島夷之禍烈矣, 三京覆而八路壞, 諸公出萬死一生, 提孤軍摧勁寇, 使我國家興王舊地, 卒免於左袵, 而邊塞之人, 興於聽聞, 勸於忠義者, 又誰之力也。幸州·延安, 俱有碑碣, 載事垂烈, 東西者瞻式, 以關北之功之盛而獨闕焉, 庸非諸君之恥歟。" 咸應曰: "然。惟鄙人志, 矧公命之。" 遂伐石鳩材, 以人來請文, 辭非其人, 又來曰: "斯役也, 公實首議, 不得命將輟。" 余乃叙其事, 系之銘曰: "有盜自南, 讐我大邦。我王于蕃, 以國受鋒。屹屹北原, 狼虺穴墉。有蠢者氓, 不抗而從。血口胥呑, 濟毒以兇。士也朅朅, 俊羣攸同。兵義莫利, 不屑戈弓。旣殲叛徒, 寇莫我衝。武夫鼓呼, 山摧海洶。師征孔赫, 厥醜崩恟。協底帝罰, 匪私我忠。北土旣平, 爾蠶我農。大君曰: '咨, 孰尙女功。' 贈官命祠, 光惠始終。士風其烈, 民可卽戎。臨溟之厓, 有石嵸嵸。刻之誦詞, 用眡無窮。"崇禎甲申後六十五年十月日 謹撰 이월천의 연안 대첩 이월천은 이정암(李廷馣,1541~1600)의 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류재(四留齋) ·퇴우당(退憂堂) ·월당(月塘),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임금을 호종, 개성(開城)에서 방어했고, 개성이 함락되자 황해도에서 의병을 모아 활약한 공으로 황해도초토사(黃海道招討使)가 되어 연안(延安)에서 포위된 왜군 3,000여 명을 격파하여 경기도관찰사 겸 순찰사(巡察使)가 되고 병조참판에 승진하였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596년 충청도관찰사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나 죄수를 임의로 처벌하여 파직되었다가 황해도관찰사로 기용되어 도순찰사를 겸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재차 황해도초토사로서 연안을 수비하였고, 난이 끝난 후 사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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