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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의 전장을 지나며 느낌을 읊다 번암 채제공 過臨溟戰場感吟【樊巖 蔡濟恭】 신령한 사당에 바람 불고 벌판에 구름 짙은데정 장군의 충정 늠름하여 머리털 쭈뼛해졌네공훈 세워도 기린각114)에 화상 구하지 않고의병장들 닭 피 마시고 한마음 되었네앉아서 해내를 안정시킨 건 누구 힘이었던가기우는 하늘 지탱한 공이 지금까지 이어졌네전투하던 성루 들풀과 들꽃으로 뒤덮히니석양에 말 달리며 슬픈 마음에 시 읊어보네 靈宮風颯磧雲深鄭帥忠貞凜髮森勳不麟臺求畫面義將鷄血歃同心坐令海晏伊誰力撑得天傾也至今原草野花生戰壘夕陽驅馬一悲吟 기린각(麒麟閣)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 곽광(霍光) 등 11명의 공신(功臣) 초상을 그려서 걸게 했던 전각 이름이다. 기린각에 걸렸다는 것은 곧 국가에 큰 공훈을 세워 공신에 책록된 것을 말한다. 《漢書 卷54 蘇武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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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 집에서 즉흥적으로 읊다 山家卽事 산속 사람이 일이 없어 산가에 누웠는데 山人無事臥山家가을 산으로 해 저무니 산 정경이 다양하네 日暮秋山山意多흥이 올라 홀연히 물가에 앉으니 乘興忽然磯上坐밝은 달 비친 푸른 물결에 흰 갈매기 가득하네 白鷗明月滿滄波 山人無事臥山家, 日暮秋山山意多.乘興忽然磯上坐, 白鷗明月滿滄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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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 임탄23)에게 부치다 寄林閑閑亭坦 학 울음24) 들리지 않고 숲속이 비었으니 鶴唳未聞林下空문을 나가 까마귀 암수 분변할 것25) 없네26) 出門莫辨烏雌雄돌아오며 흰 갈매기와 이야기 나누는데 歸來相與白鷗語밝은 달과 옅은 안개가 물에 비치네 明月疎煙水鏡中 鶴唳未聞林下空, 出門莫辨烏雌雄.歸來相與白鷗語, 明月疎煙水鏡中. 임탄 임제(林悌, 1549~1587)의 셋째 아들로 한한정은 그 호이다. 학 울음 원문의 '학려(鶴唳)'는 은거하는 굳자의 덕이 멀리까지 알려지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의 늪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고 하였다. 분변할 것 원문에는 '변(辨)' 아래에 "다른 본에는 문(問)으로 되어 있다.〔一本作問〕"라는 소주가 붙어 있다. 까마귀 …… 없네 하늘과 땅이 만물을 포용하듯이 모두가 조화를 이룬다면 굳이 시비와 선악을 가릴 것도 없다는 말이다. 《시경》 〈정월(正月)〉에 "모두 말하기를 '내가 성인이다.' 하는데, 누가 까마귀의 암수를 알까.[具曰予聖, 誰知烏雌雄.]"라고 하였는데, 이는 까마귀의 암수를 가려내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시비를 분간하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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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를 읊다 詠梅 흰 옷 입고서 낙조 아래 서 있는 이 누구인가233)좋은 구슬 패물로 차고 둥근 옥을 옷으로 삼았네나는 알겠네 옥빛처럼 아름다운 정명도(程明道)234)의얼굴 가득한 춘풍(春風)235)에 덕스런 광채 모여 있음을【뜰에 오래된 매화 한 그루가 있었는데, 단정하고 곧게 자라 장인(丈人)과 군자(君子)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 봄을 맞아 일찍 피어 온 가지에 밝은 구슬이 가득하여 지초와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게 스며드는 듯한 느낌236)이 있었으니, 마침내 붓을 잡고서 감탄하며 썼다.】 素服何人立落暉良珠爲佩璧爲衣吾知玉色程明道滿面春風總德輝【庭有古梅一樹。端直整束。甚肖丈人君子之象。當春早發。萬枝明珠。有芝蘭襲人之氣。遂援筆感歎而書。】 흰……누구인가 '흰 옷'은 매화를 비유한 말이다. 수(隋)나라 때 조사웅(趙師雄)이 나부산(羅浮山)에 갔다가 황홀한 경지에서 향기가 감도는 어여쁜 미인을 만나 즐겁게 환담하고 술을 마시며 하룻밤을 보냈는데, 그 다음 날 아침에 보니 큰 매화나무 아래에 술에 취해서 누워 있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龍城錄 趙師雄醉憩梅花下》 옥빛처럼 아름다운 정명도(程明道) 주희(朱熹)가 정호(程顥)에 대해 지은 〈정명도화상찬(程明道畫像贊)〉에, "양기가 만물을 기르듯 하고 산처럼 우뚝 섰으며, 옥빛처럼 아름답고 종소리처럼 쟁쟁했다.[揚休山立 玉色金聲]"라 하였다. 또 송나라 문인 장도흡(張道洽)의 시 〈매화〉에 "옥빛은 홀로 천지의 정기를 받았고, 철석 같은 심장은 눈서리에도 놀라지 않네.[玉色獨鍾天地正 鐵心不受雪霜驚]"라 하였고, 섭옹(葉顒)의 시 〈고포매화(故圃梅花)〉에도 "신세는 수운의 고장이요, 차가운 살에 옥빛의 치마로다.[身世水雲鄕 冰肌玉色裳]"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매화의 색은 옥빛으로 자주 묘사된다. 얼굴 가득한 춘풍(春風) 정호(程顥)의 온화한 기상을 묘사한 말이다. 주희(朱熹)의 《근사록(近思錄)》 권14에, "주공담이 여주에서 명도 선생을 뵈었다. 한 달을 머무르다 돌아가 사람들에게 '광정이 춘풍(春風) 속에 한 달을 앉아 있었다네.'라고 하였다.[朱公掞見明道於汝州 逾月而歸 語人曰 光庭在春風中坐了一月]"라 하였다. 지초와……느낌 훌륭한 기운에 감화된다는 뜻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선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마치 지란(芝蘭)의 방에 들어간 것과 같아 그 향기는 못 맡더라도 오래 지나면 동화된다.[與善人居 如入芝蘭之室 久而不聞其香 卽與之化矣]"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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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로이 지내며 성찰하다【4수】 閒居省察【四首】 가슴 속에 하나의 조정을 따로 세우니주객(主客)과 군신(君臣) 간에 분의(分義)가 분명하네만물이 조정에 함께 서서 다 같이 명을 들으니온 당(堂)에 일이 없고 다만 허령(虛靈)할 뿐이네【위는 마음이 만사를 거느림이다.】아침 내내 괴롭게 다퉜으나 전공(戰功)이 없으니어지러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 마치 쑥대머리와 같네승패와 흥망 아직 판가름 나지 않았으니잡아 지키는263) 방략(方略)은 원수(元帥)에게 달려 있네【위는 이욕(理欲)이 서로 다툼이다.】기린각(麒麟閣)264) 위에 공신(功臣) 그려져 있으니지수(志帥)265)의 훈공과 명성 첫 번째라네이로부터 태평한 시대 비로소 점칠 수 있으니시를 짓고 서로 이어 화답함에266) 옛 나라 새로워지네【위는 뜻이 기(氣)를 거느림이다.】많은 관원 조회(朝會)에 모였다가 일이 다 끝나 조정이 텅 비니대(臺) 위의 깊은 궁에 상서로운 해 붉네저 속에서 참된 의미를 알고자 한다면천 길 깊이의 옥연(玉淵) 바람도 없이 맑은 것을 보아야 하리【위는 일이 지나고 사물이 떠남이다.】 胷中別立一朝廷主客君臣分義明萬品同朝咸聽命一堂無事但虛靈【右心統萬事】終朝苦戰戰無功起滅紛紜似亂蓬勝敗興亡猶未判操存方略在元戎【右理欲交戰】麒麟閣上畫功臣志帥勳名第一人自此昇平方可占作詩賡詠舊邦新【右志以御氣】萬官朝虗【恐作處】大庭空臺臺上深宮瑞日紅那裏欲知眞箇意玉淵千仞淡無風【右事過物去】 잡아 지키는 원문은 '조존(操存)'이다. 마음을 잡아 굳게 지키는 것을 말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공자가 이르기를 '잡고 있으면 보존되고, 놓아 버리면 없어지며,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일정한 때가 없고, 어디를 향할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孔子曰 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기린각(麒麟閣)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 곽광(霍光) 등 11명의 공신(功臣) 초상화를 봉안한 전각 이름이다. 후대에는 모든 공신각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漢書 卷54 蘇武傳》 지수(志帥)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지(志)는 기(氣)의 장수이다.[夫志 氣之帥也]"라 한 데서 유래한 말로, 뜻[志]을 장수로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시를……화답함에 원문은 '작시갱영(作詩賡詠)'이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를 권면하며 노래를 수창하는 것으로, 순(舜) 임금과 고요(皐陶)가 노래를 주고받으며 공경히 직무를 수행할 것을 권면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한 노래를 '갱재가(賡載歌)'라 한다. 《書經 益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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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山寺)에 묵다 宿山寺 우두커니 단정하게 앉아 밤이 더욱 깊어지니달이 부들방석을 비춰 냉기가 스며드네네모난 못으로 걸어 나옴에 바람도 일어나지 않으니쓸쓸하게 말없이 하늘을 대하네 兀然端坐夜更深月照蒲團冷氣侵步出方塘風不起蕭然無語對天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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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비에 술을 보내 준 사람에게 사례하다 久雨謝人送酒 늙은이 병이 많아 쓸쓸한 마을에 누웠으니비바람 하늘에 가득하여 홀로 문을 닫고 있네다행히 다정한 벗 있어 좋은 술 보내주니시름으로 병든 몸 억지로 부지하며 남쪽 난간에 기대네 老夫多病臥荒村風雨漫空獨閉門賴有情人送美酒強扶愁疾倚南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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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曉 금빛 닭 울어 밝은 새벽 여니사해의 봄빛 하룻밤 지나자 환해졌네동해에 막 해가 나온 모습을 상상해 보니천 길 자줏빛 물결에서 붉은 태양 목욕하겠지 金鷄喔喔啓明辰四海春光一夜晨想見東溟初出日紫波千丈浴紅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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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 사람이 군정(軍丁)을 징발하려고 어린 종을 끌고 가니 허탈하게 웃으며 시 한 수를 짓다 縣人括軍丁挽僮僕而去。笑成一律。 몇 칸의 네모난 집 들밭에 의지해 있으니뜬세상의 속세 소리 귓가에 이르네어느 곳이 푸른 산 운수(雲水)의 땅인가한 구역 연월(烟月) 속에서 남은 세월 보내고 싶네 數間方宅寄郊田浮世塵聲到耳邊何處碧山雲水地一區烟月送餘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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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생(鄭生)【온(榲)】에 대한 만사 挽鄭生【榲】 옛날 내가 장년(壯年)일 적 그대 아직 어린아이였는데나의 머리 아직 검거늘 그대 먼저 꺾였구나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이와 같은 일이 있으니눈물 또한 흐르지 않고 마음도 애통하지 않네두 번째그대 예전에 다른 사람이 일찍 부친 여읜 일을 애통해 하면서그대 부친의 얼굴 잠깐이라도 보고 싶어 하였지지금 저 세상으로 돌아감이 비록 모친과 너무 빨리 이별한 것이기는 하나지하에서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의 가르침 받들겠지330) 昔我壯年君尙孩我頭猶黑君先摧人生斯世有如斯淚亦不下心不哀其二君昔爲人痛早孤親顔願欲見斯須今歸縱別慈闈速地下應歡鯉對趍 아버지의 가르침 받들겠지 원문의 '이대(鯉對)'는 이정(鯉庭)과 같은 뜻으로, 아들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는 것을 말한다. 《논어》 〈계씨(季氏)〉에, "공자가 일찍이 혼자 서 있는데 이(鯉)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가자, 공자가 '너는 시(詩)를 배웠느냐?' 하니, 이가 대(對)하여 아뢰기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하였다.[嘗獨立 鯉趨而過庭 曰學詩乎 對曰未也 不學詩 無以言]"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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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3월 3일】 暮春【三月三日】 한식(寒食)의 풍광 늦봄에 속하니늦봄 3일은 가장 좋은 날이네동군(東君)151)은 건곤(乾坤)의 문 활짝 열었고만물은 어진 우로(雨露) 흔연히 맞이하네생동하는 뜻은 뜨락 아래 풀에 먼저 돌아오고이 마음은 거울 속 먼지를 새로 털어내네향기 찾을 적에는 굳이 꽃과 버들 구할 필요 없으니꽃과 버들의 향기 또한 사람에게 있다네 寒食風光屬暮春暮春三日最佳辰東君大闢乾坤戶品物欣迎雨露仁生意先歸庭下草此心新拂鏡中塵尋芳不必探花柳花柳芬芳亦在人 동군(東君) 봄을 주관하는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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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서재에 머물며 큰아들 나덕명이 거문고소리를 듣고 지어 올린 시에 차운하여 在大安書齋次伯子德明聽琴吟呈韻 【丁亥六月】 【정해년(1587) 6월에 지은 것이다.】비 온 뒤 재루에서 한 동이 술 열어 놓고 齋樓雨後一樽開이내 피어나고 푸른 느티나무 드러나네 正是浮嵐捲翠槐맑게 갠 경치 눈에 들자 한없이 시 읊는데 霽景入眸吟不盡울리는 거문고 소리에 쉼 없이 술 먹기가 좋구나 鳴琴端合倒千盃 齋樓雨後一樽開, 正是浮嵐捲翠槐.霽景入眸吟不盡, 鳴琴端合倒千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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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운 【나덕명】 原韻 【德明】 장맛비가 그치더니 맑게 개여 저녁 하늘 열리고 積雨晴來暮色開남산은 막 푸르러 뜨락의 회화나무까지 이어졌네 南山新翠接庭槐촉나라 거문고13)로 다시 요지14)의 곡조를 연주하며 蜀琴又奏瑤池曲삼천갑자 동방삭15)에게 한 잔 술 부치노라 方朔三千屬一盃 積雨晴來暮色開, 南山新翠接庭槐.蜀琴又奏瑤池曲, 方朔三千屬一盃. 촉나라 거문고 촉금(蜀琴)은 한(漢)나라 때 촉 땅에서 살았던 사마상여(司馬相如)가 거문고를 잘 연주하여 그가 사용하던 거문고를 촉금이라 했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 여기에서는 거문고의 범칭으로 쓰였을 뿐이다. 요지 곤륜산(崑崙山) 꼭대기에 있다는 신화 속의 못 이름인데, 선녀인 서왕모(西王母)가 주 목왕(周穆王)을 영접하여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穆天子傳 卷3 古文》 삼천갑자 동방삭 속설에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 먹어 장수하였다 하여 '삼천갑자 동방삭'이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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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일기 초 丁亥日記抄 ▪1월 14일 비오늘 맏형의 장남 나경(羅絅)의 처, 원길(元吉)의 어머니 소상(小祥)에 아들 나덕명(羅德明), 나덕준(羅德峻), 나덕현(羅德顯), 나덕신(羅德愼)이 각기 술과 과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이어 아들 나덕명이 서울소식을 들었다며 나의 벗 순천 군수(順川郡守) 유조인(柳祖訒)이 어리석은 논박을 펼치는 사람으로 지목되었다고 하는데 언제 그 일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크고 밝은 임금께서 위에 계시고 어질고 준걸한 신하들이 아래에 있어 그 보좌하고 다스림이 마땅히 지극함에 이르지 않은 적이 없는데, 대간된 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저 유군수처럼 우뚝하고 뛰어난 사람이 진실을 잃어버린 논의를 폈겠는가.생각해보건대 팔도(八道) 군읍(郡邑)의 관리들 중 유공보다 뛰어난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나는 유군이 다른 사람들에게 비판당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세도의 혼탁을 깊이 탄식한 것이니 어찌 유군을 마주하여 이러한 울분의 마음을 말할 수 있겠는가. 유군은 한 시대의 위인일 뿐만 아니라 전 옛 시대의 현명하고 준걸한 인물들과 비교해도 더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 충효의 절개는 실로 빼어남을 대적할 이가 없는 훌륭한 남자이거늘 지금 간쟁하는 신하들의 탄핵을 당하니 만약 평소 그를 증오하던 자가 음해한 것이 아니라면 정녕 간사한 무리들의 탄핵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유공의 어짊 때문에 우의정(右議政) 정지연(鄭芝衍)은 이미 그의 충효와 큰 절개를 들어 경석(經席)에 이르게 한 것이다. 정재상 또한 어진 재상이라 분명 어릴 적부터 그의 사람됨이 어짊을 잘 알아서 그를 천거하여 승진시킨 것이니 반드시 그 좋아하는 바에 아부하여 망령되게 그를 천거하여 이른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지금 대간의 지위에 있는 자들은 실로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유군이 어리석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어질고 뛰어나단 말인가! 해괴함의 극치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1월 15일 비아들 나덕명, 나덕준, 나덕윤은 성현을 사모하고 본받고자 하여 행실이 세속을 넘으니 실로 자신을 위해 힘쓰는 선비이다. 일찍이 형제끼리 같이 살고자 하는 뜻을 두고 여러 차례 나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나 또한 일찍이 그러한 뜻이 있기는 했어도 이루지 못하여 매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지 몇 년이 흘렀다. 지금은 부모형제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나 나만 홀로 한밤중에 남아 있는 것 같아 비통한 마음 또한 지극하다. 그러나 이 아이들의 뜻이 고인들에게 있어 이처럼 아름다운 일을 실행하고자 할지 어찌 알았겠는가. 이에 당(堂)은 함께 하지만 실(室)을 다르게 하는 제도를 도안하여 나에게 주었는데 그 법규와 도안을 살펴보니 실로 이전 현인들께서 남기신 뜻을 법으로 삼은 것이니 어찌 가상히 여겨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생각하건대 이는 실로 말세에 실천하기에는 어려운 일이다. 비록 처음에는 노력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끝을 잘 맺기란 어려울까 걱정이다. 그러나 여섯 아들이 한 집안 사람들을 잘 이끌어 끝내 연익(燕翼)19)의 아름다움을 거둘 수 있을지 어찌 알겠는가. 나덕명, 나덕준, 나덕윤아! 늘 삼가 힘써라. 세속의 비웃을 당하지 마라. 나는 이제 늙고 병마저 많아 너희들이 같이 사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없을까 두렵다. 비록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이 뜻을 성취한다면 또한 구천에서라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바라건대 여섯 아들은 나의 지극한 마음을 깊이 새겨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마라.▪1월 17일 맑음오늘 새벽 이웃 조카의 집에 제사가 있었지만 감기에 걸려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들 나덕명, 나덕준, 나덕현, 나덕신을 참석하도록 했다. 한 집안의 형제들이 거의 다 죽고 오직 나만 남았거늘 병들고 나이 또한 많아 여러 차례 제사에 참석하지 못했으니 그 비통하고 슬픈 마음이 얼마나 지극한지.▪1월 19일 맑음강진에 사는 이모 김 씨께서 그 댁의 어른 경원 부사(慶源府使) 이억복(李億福)의 상을 당했기에 오늘 조문을 쓰고 노비를 보내 위로하도록 했다. 이억복은 이름난 무관으로 당상관에 올라 오랫동안 벼슬을 했는데 갑자기 병이 들어 죽으니 그 가문의 불행함이 극심하다. 나와 이군은 한때 서울에서 벼슬을 하면서 서로 따르고 좋아하는 마음이 적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었는데 홀연히 죽으니 애통한 마음 더욱 끝이 없다. 같은 고향의 벗 진사 이담(李曇)과 생원(生員) 정이상(鄭履常)도 동시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어제 부음(訃音)을 들으니 슬프고 애도하는 마음을 어찌 다할까. 이공은 우리 집안과도 서로 왕래하는 사람이고, 정군은 나의 동년배이다. 모두 평소 교유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인데 이제 고인이 되었으니 그 비통하고 애도하는 마음은 평소의 마음에 비할 바가 아니다.▪1월 20일 맑음모산(茅山)에 사는 조카 박자하(朴自夏)가 오늘 새벽 갑자기 세상을 떠나 그 집안의 종들이 달려와 부고를 전하니 아들과 함께 대성통곡하였다. 박 조카는 자녀가 많으나 집이 매우 가난하여 초상에 염습하는 도구는 필시 갖추지 못할 것이라 생각되어 아들과 함께 있는 힘을 다해 도모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슬프다. 가난함이여! 우리 집에서 보낸 물건은 정목(正木)20) 한 필, 관에 바르는 대장지(大壯紙) 열 장, 유지(油紙) 두 장, 생마(生麻) 한 묶음, 풀자리 두 개, 명정(銘旌) 한 개, 홍색 물들인 명주 다섯 척, 멱목(幎目)21) 악수(握手)22) 등의 도구였다.▪2월 3일 맑음목백 성주가 아침에 사람을 보내 담양(潭陽) 김사중(金士重) 【이름은 천일(千鎰)이다.】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김사중이 술과 음식을 갖추고 목백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은밀하게 주인에게 말했더니 먼저 작은 상에 만두를 내왔다. 목백은 또 관에서 큰 상을 내오도록 명하여 매우 즐겁고 자리를 떠났다. 좌객으로는 두 성주, 목백의 아들 임전(任錪), 이광우(李光宇), 이광주(李光宙), 주인과 내가 있었다. 또 주인의 아들 김상건(金象乾), 김상곤(金象坤) 등과 돌아가신 부윤(府尹) 양응정(梁應鼎) 영공(令公)의 아들 양산숙(梁山璹) 또한 참석하였다. 목백은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나의 손과 사중의 손을 잡고 "바라건대 제가 큰 실정이 없도록 가르침을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가 우리를 대하는 도는 진실로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목백 임윤신(任允臣)은 1월에 막 부임했고, 판관(判官) 임기문(林起門)은 무인 집안이다.】▪2월 7일 온종일 비가 내림청암 찰방(靑嚴察訪) 경시정(慶時貞)은 근래에 와서 인사한 사람인데 오늘 백상지(白常紙) 각 다섯 권을 보내왔다. 이 사람과는 평소 친분이 없었는데, 내가 그의 형 경시경(慶時經)과 함께 벼슬하여 서로 친분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들러 서로 만나더니 정성된 마음을 보인 것이다. 대화 중 그의 형 얘기가 나오면 눈물이 흘러 멈추지 못하니 우애가 깊고 지극한 사람이 아니라면 반드시 이 지경에 이르지 않을 것이기에 탄복하기를 그치지 못하였다. 이 사람은 그의 형이 죽자 마음으로 슬퍼하며 삼년상을 마쳤으니 어찌 오늘날 세상에 보기 드문 사람이 아니겠는가. 왜구가 좌도와 우도로 나눠 이르러 변경의 경계가 바야흐로 시급하였다. 얼핏 듣기로는 가리포(加里消) 첨사(僉使) 이필중(李苾中)이 눈에 탄환을 맞아 전쟁에 이기지 못하여 우수영(右水營) 우후(虞侯)가 병사를 매복시켰으나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실로 막대한 변고로서 우려가 어찌 끝이 있겠는가. 태평한 시절이 오래도록 유지되자 문무의 벼슬아치들은 직무를 게을리 하고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어 나라에는 곡식을 쌓아둔 것이 없으며 북쪽의 난리가 아직 안정되지도 않았으되 남쪽의 오랑캐들이 또 다시 일어났는데도, 조정에는 훌륭한 장수가 없고 백성은 윗사람을 위해 죽을 마음이 없으니 저 왜적들은 필시 우리나라의 허실을 자세하게 살펴 틈을 타서 침략한 것이다. 만약 내가 쇠약하고 병든 몸을 버려 비록 전쟁에서 죽는다고 한들 실로 아까울 것은 전혀 없다. 다만 안타까운 건 주상께서 위에서 외롭게 서서 충성스러운 신하가 누구의 자제여서 능히 충절의 절개를 다하여 사수(死綏)23)의 정성을 다하는지 알지 못하신 것이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진다. 만약 저 왜구가 우리를 곤란하게 할 계책을 잘 알아 동으로 서로 공격하여 거의 헛된 날이 없다면 우리나라가 장처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2월 14일 맑음나덕명, 나덕준, 나덕현, 나덕헌 등을 데리고 걸어서 새 집터에 올라 성안의 봄빛을 두루두루 고개 숙여 바라보니 이미 매화는 봉우리를 터뜨리고 버드나무는 누런빛을 내고 있었다. 가까이 산의 푸른빛을 맞이하고 멀리 하늘의 푸른빛이 뒤섞여 함께 천태만상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으니 실로 얻기 어려운 장관이다. 여러 명의 종을 불러 삽으로 언덕 끝에 우뚝하게 만들다가 비가 와서 그쳤다.▪2월 25일 맑음감사 한준(韓準)이 순행하다 이곳에 이르렀다. 아들 나덕준과 나덕윤을 감사가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보내 그 왜적을 막는 대책에 대해 자문하고 의논하게 하였다.▪3월 3일 맑음오늘은 답청절(踏靑節)24)이다. 아들은 각각 술과 안주를 가지고 남산 서당에 모여 청아한 기쁨을 오롯이 누렸다. 아들들은 진사 정양좌(鄭良佐)를 좌장으로 모시고 함께 즐겼으며 나원로, 나덕진, 나덕의 등이 또한 와서 참석하였다. 나덕창이 소반에 과일을 담아오고 나덕진 또한 술상자를 가지고 왔다. 아들 나덕명, 나덕준, 나덕윤은 각자 소반에 과일과 제철 음식을 상에 가득 담아 올리니 좋은 음식이 상에 가득하여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끝내고 돌아올 때 새 집터에 모여 앉아 술을 가져 오라 하고, 자식들과 조카들로 하여금 각자 노래하고 춤을 추게 했으니 오늘 즐김은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말할 만하다.▪4월 2일 잠깐 비가 뿌리다가 곧바로 쾌청해 짐목백의 부름을 받아 나덕명과 나덕준을 데리고 서원에 갔다. 서원의 유생들을 선발하였는데 뽑거나 탈락시키는 데 어려운 것은 여러 사람의 논의가 분분하기 때문이다. 담양(潭陽) 김천일(金千鎰)이 내게 좌장을 양보했는데 한참을 서로가 좌장을 하라고 하니, 목백이 곧장 "향당에서는 나이가 우선입니다. 선생께서 윗자리에 앉는 것은 당연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좌장이 되자 유생 15〜6명이 와서 모였다. 저물녘에 목백이 우리들 서너 사람을 끌어당기며 시냇가 누대 위로 자리를 옮기자고 청하였다. 목백과 담양 김천일은 활쏘기 놀이를 했다. 다시 김정간(金廷幹)의 시냇가 정자 높은 누대에 자리를 옮기고는 온 종일 즐겁게 노니다가 헤어졌다.▪4월 17일 맑음정(正) 정인귀(鄭仁貴)는 나의 동년배로 서로 우애하는 막역한 사이다.▪4월 28일 맑음오늘은 명종의 기일(忌日)이다. 전에는 매번 소찬(素饌)25)을 했는데 오늘 중병을 겪은 뒤라서 소찬을 행하지 못하였다.▪7월 18일 오전은 맑고 오후에는 비가 옴오늘 감사(監司) 윤두수(尹斗壽)가 방회(榜會)를 열어 여러 동년들을 모아 큰 잔치를 베풀고자 하였다. 나는 장모의 기일이어서 갈 수가 없다고 사양했더니, 감사가 전하기를 "그런 일은 예문(禮文)에도 적혀 있지 않으니 빨리 와서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해 모셨던 제독(提督) 정인귀(鄭仁貴), 동복현감(同福縣監) 김부윤(金富倫), 전 함안군수(咸安郡守) 장이길(張以吉), 진사 위대용(魏大用) 등 또한 편지를 보내 초대했다고 하였다. 아들들과 상의해보니 감사가 장원으로써 감찰사가 되어 방회를 연 것이기에 빙모의 기일을 핑계로 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나도 생각해보니 참석하는 것이 마땅한 듯하여 서당에서 집으로 내려와 관복을 잘 입고 부중(府中)으로 들어갔다. 먼저 서상방(西上房) 작은 누각에서 방백을 배알하고, 다음 금성관(錦城館) 뒤의 행랑에서 이아(二衙)26)의 성주를 배알한 뒤 이어서 여러 동년들을 만났다. 감사가 먼저 무이루(撫夷樓)에 앉아 동년들에게 들어와 융복(戎服)을 입으라고 재촉하였다. 동년들이 모두 윗옷을 벗고 들어와 감사에게 인사를 올리니 감사가 일어나 자리 밖으로 나가 절을 받은 다음 방(榜)의 순서대로 앉아 있었다. 감사 다음 동복현감 김부윤이 상석에 앉고, 그 다음에 전 군수 장이길이 앉고, 그 다음은 내가, 나 다음 진사 위대용, 그 다음 제독 정인귀가 앉았다. 자리에 앉은 뒤 감사가 도사(都事) 권율(權慄)과 목사(牧使) 임윤신(任允臣)을 오도록 청하였다. 감사가 나는 오늘 기일이고 위대용 또한 삼촌의 상이 있으니, 음악을 울려서는 안 되는 일이요 매우 잘못된 일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술이 한 순배 돈 뒤에 악상(岳相)의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영공께서 새로 부임하셔서 30년 만에 방회를 베푸셨는데 방(榜)에 들었던 사람 중 살아있거나 반은 살아 있고 반은 세상을 떴으니 오늘의 일은 참으로 성대한 일이거늘 우리 두 사람 때문에 마침내 풍악을 울리지 않으신다니 먼저 돌아가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감사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이윽고 허락하였다. 내가 먼저 나가자, 위대용도 내가 나가는 것을 보고 나갔다. 비로소 음악이 울리더니 밤이 되도록 놀았다고 한다. 잔치에서 정제독이 절구를 한 수 읊자 감사가 바로 화답하였다. 또 좌중에 종이를 주게 하여 나 또한 차운하여 올리니, 감사가 일어나 받아 보고는 칭찬하여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윤두수는 자가 자앙(子昂)이고, 호는 오음(梧陰)이며,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서울에 거주하였다. 이소재(履素齋)의 문인으로 훗날 무오년(1558)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영의정(領議政)과 해원 부원군(海源府院君)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공(文精公)이다. ○ 김부윤은 자가 돈서(惇敍)이고, 호는 설월당(雪月堂)이며, 본관은 광주이고, 예안에 거주하였다. ○ 장이길은 자가 천응(天應)이고, 본관은 흥덕(興德)이며, 나주에 거주하였다. ○ 위대용은 자가 사행(士行)이고, 본관은 장흥(長興)으로 사는 곳도 같다. ○ 정인귀는 자가 사현(士顯)이고, 본관은 광주로 무안에 거주하였다. 훗날 신유년(1561) 문과에 급제하여 시정(寺正)과 목사를 지냈다.】▪7월 19일 맑음아침에 동복군수(同福郡守) 김부윤(金富倫)이 편지를 보내오면서 또한 청주 한 되와 옻칠한 부채 서너 개를 보내와 그 중 세 개는 나의 아들 나덕명, 나덕준, 나덕윤에게 보내고 중미(中米) 두 말은 산재(山齋)의 찬값에 걸맞게 보냈다. 이 사람이 바로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의 고제(高弟)로 나를 중히 여길 뿐만 아니라 나의 아들들까지 사랑하여 한번 오면 밤까지 무릅쓰고 술잔을 잡고 산재에서 위로해 주는데, 지금 또 음식을 보내와 이렇게 뜻을 두터이 하니 감사인사를 올리지 않을 수 없다. 동복현감은 또 오늘 사상(使相)27)에게 술잔을 올리고 곧 여러 선배들과 대화할 일을 일러주며 나에게 정성을 내라고 청하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두 성주를 찾아뵌 뒤에 악상(岳相)을 찾아뵈려 했으나, 악상이 바야흐로 정사를 듣느라 바쁘시기에 감히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한 채 여러 선배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었다. 조방장(助防將)28)이 서울로부터 본주로 내려와서 부중이 매우 소란스러웠다. 내가 이에 동복군수에게 힘써 고하여 작별하고 돌아가니, 동복군수도 말리지 못하였다.▪8월 16일 오전에는 맑고 오후에는 비가 옴나덕준, 나덕윤, 나덕현 세 아들이 시험장 고을 【영광(靈光)이다.】 로 갔다. 내일 과장에 당도할 예정이나 천거할 만한 재주가 어떠할지 모르겠다. 기대가 끝이 없다.▪8월 20일 맑음온종일 바깥채에 있으면서 아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오후에 나덕준, 나덕윤, 나덕현이 시험을 마치고 돌아왔다. 들어보니, 나덕윤은 진사 과장에서 부(賦)를 지어 삼등이 되었다고 한다. 생각하건대 반드시 높은 점수로 합격할 것이니 어떤 기쁨이 이만하겠는가. 나덕준과 나덕윤은 두 과장에서 초고를 모두 잘 지었다고 하는데 나덕준의 의대(疑對)는 더욱 뛰어나니, 기뻐할 만하였다.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8월 21일 비를 뿌리다가 맑게 갬아침에 향교의 노비 네다섯 명이 방(榜)을 들고 와서 밖에서 소리쳤다. 방록(榜錄)을 보건대 아들 나덕준이 생원시에 6등으로 합격했으니 반드시 우등일 것이다. 아들 나덕윤도 두 시험에 합격했으니 쇠미한 가문의 경사로 이보다 기쁜 것이 없어 나의 생각이 끝이 없다.▪9월 9일 맑음오늘은 가절이라 헛되이 보낼 수 없어, 나원로, 나덕진, 나덕의와 아들 나덕명, 나덕준, 나덕윤, 나덕현, 손자 나용, 나규, 나진 등을 데리고 강가에 놀러 나가 낚시하여 물고기를 잡았는데 소반 가득 팔딱팔딱 뛰는 좋은 회와 진귀한 생선을 사람들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나원로, 나덕진, 아들 나덕준 등이 각자 술을 올렸는데 맛있는 물고기와 좋은 과일 모두 계절에 맞는 맛있는 것들이었다. 나 또한 점심으로 먹을 흰 쌀 열다섯 되를 가져오게 하여 밥을 지어 모두 배불리 먹었다. 저녁에 버드나무 가지에다 물고기를 꿴 것이 거의 수십 수백 개나 되었다. 달빛을 받으며 돌아와 모자를 떨어뜨릴 정도의 흥취29)란 바로 이때를 말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목백 성주가 살아 있는 숭어 한 마리를 보냈다. 회를 뜨기에 적합하여 역시 가지고 나가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삼았다. 저녁 돌아오는 길에 아들 나덕준이 그의 아들 나규와 나수를 데리고 나와서 함께 말을 타고 오다가 말에서 땅에 떨어졌다. 흥이 넘쳐나는 와중에 하나의 흠집이 되는 일이었다.▪9월 19일 비내일은 조카 박자춘을 안장하는 날이므로 쌀 세 말, 큰 초 한 쌍, 만장 세 폭, 떡 한 상자, 술, 과일 등을 부의로 보냈고, 아들 나덕명과 나덕윤이 급히 말을 달려갔다. 나덕준은 병으로 가지 못하고, 나덕현은 그의 처가에 갔다. 생각하건대 나덕명과 나덕윤이 함께 제사를 드리며 슬퍼할 것이다. 내가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한 뒤에 사돈 윤언부의 처, 김담양 【경헌(景憲)이다.】, 이함양 【언양(彦讓)이다.】 의 여동생, 박자춘, 박자하, 종질 나병문 등이 모두 건강한 사람이었는데 연달아 세상을 떠났으니 뜬구름 같은 인생이 어찌도 이렇게 갑자기 죽음에 이르는 것인지 조용히 생각해보니 가슴 아픈 생각 끝이 없다.▪10월 1일 맑음정상사 【정량좌(鄭良佐)이다.】 와 여섯 아들, 여섯 조카를 데리고 나란히 말을 타고 복암리(伏巖里)에 있는 담양 김사중의 서당에 가서 조용히 속세 밖의 깨끗한 유람하였다. 서재에 모여 점심을 먹은 뒤 바위 꼭대기로 이동하여 모였다. 어부를 시켜 노를 두드려 울리게 하고 그물을 던지게 하여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았다. 주망으로 잡은 물고기를 탕을 끓여 씹어보니 강호의 맛이 났다. 저녁이 되어 함께 말을 타고 돌아왔다. 내가 앞장서서 뒤를 돌아보니 말을 타고 횃불을 들고 줄지어 오는 자들이 무려 15~6명이나 되어 지극히 성대하였다. 이는 옛날 부친과 형님들을 모시고 즐기던 일인데 오늘 내가 자제들과 친구들을 데리고 놀았으니 슬프고 애도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11월 8일 맑음내일은 선군의 기일로, 죽은 조카의 집에서 제사를 지내므로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목욕재계를 하였다.▪11월 9일 맑음닭이 울자 기상하여 의복을 바르게 하고 걸어서 이웃 조카의 집에 갔다. 나덕준, 나덕헌, 종질 나덕진을 데리고 제사를 지내 술잔을 올리고, 엎드려 옛날 형제들이 모두 살아 있을 때 모여서 제사를 올리던 일이 그립고 부모님의 평소 모습과 말씀하시던 목소리를 그리는 마음이 가슴속에서 일어나 서글퍼 나도 모르게 통곡의 슬픔을 어찌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11월 18일 맑고 매우 추움멀리서 변방 수비를 보는 병졸들이 혹독한 추위에 고생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측은한 마음이 든다. 필시 얼어 죽는 사람이 있을 것인데 구중궁궐 세전(細氈)30) 위까지 능히 이 마음 미칠 수 있을까.▪11월 19일 큰 눈에 몹시 추움아들 나덕준과 나덕윤이 금양서원(錦陽書院)에서 와 안부를 물었다.▪11월 22일서원 사우에서 한훤(寒暄), 일두(一蠹), 정암(靜庵), 회재(晦齋), 퇴계(退溪) 다섯 선생의 봉안 제례를 하여 나덕준과 나덕윤이 집사로 차출되어 저녁을 먹은 뒤 곧장 서원으로 올라갔다. 내가 차헌관(次獻官)이지만 목백에게 병이 들었다고 알리고 나덕명에게 대신하여 일을 행하도록 하니, 목백이 정성을 다해 그를 가르쳐 주었으나 나덕명은 또 말에서 떨어져 어깨를 다쳤기에 참여할 수 없을까 걱정된다.▪11월 22일 맑음오늘 새벽부터 기분이 좋다. 서원에서 다섯 선생을 봉안하는 제사를 행하니 한 고을에 있어서 천고토록 있지 않았던 성대한 일이 어찌 아니겠는가. 전 목사 김성일(金誠一)이 서원을 창립하고 지금 목사 임윤신(任允臣)이 사우를 다 지어 다섯 분의 현인들을 봉안하고 제사를 올리니 실로 선비들의 큰 경사이다. 아들 나덕명, 나덕준, 나덕윤 등이 애당초 이미 김목백과 함께 건물을 세우는 것을 논의했지만 그 공을 미처 이루기 전에 김사군이 생각지도 못하게 파직되어 떠나 버렸다. 지금 목백 임사군이 그 일을 이어 다시 사우를 세우니, 이 두 목백은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만하다. 목백이 온 고을의 선비들에게 제문을 지어 올리게 했는데, 목백은 아들 나덕윤이 지은 것이 좋다고 하여 이를 사용하였다.▪12월 3일 추위가 매우 심해짐정우상의 노비를 만나 그 집안의 상하 모두의 안부를 자못 상세하게 물었다. 정상과 나는 나이가 같고 지위가 같고 스승이 같은 벗이다. 일평생 지기로는 이만한 벗이 없는데 예전에 만나 서로 따르며 형제처럼 지내다가 나를 버리고 먼저 세상을 뜬 지 지금 4년이 흘러 매번 생각이 나서 헤어나지 못한다. 오늘 눈앞에 그의 종을 보고 어떻게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재상 정지연(鄭芝衍)의 노비가 2일 서울에서 편지를 가지고 왔기에 이처럼 불러서 본 것이다.】▪12월 8일 맑음시장에서 청어를 사다가 종가 부모님과 백부의 신주에 천신(薦新)31)하였다. 【이때 서 씨가 종부로서 그 위손(僞孫)이 되는데 혼사로 인해 서울로 올라갔기에 천신의 제례를 거행하지 못하므로 공이 진설하여 행하였다.】▪12월 29일 맑음선영에 올리는 제사는 나덕현과 죽은 조카 다음에 하는 것이 마땅하고 부모님의 묘제는 박(朴) 조카 등의 다음에 하는 것이 옳기에 제사의 예물을 보내지 않다가 오늘 재사(齋寺)에 보냈다.▪30일 비온 후 눈섣달그믐 모임이 있어 나는 병을 무릅쓰고 사랑방에 나가 참석하였다. 회원은 종질 나환문, 나형문, 나섭문, 나덕진, 나덕신, 조카 나덕창, 아들 나덕명, 나덕준, 나덕윤, 나덕현, 나덕신, 나덕헌, 작은 조카 나덕홍 또한 참석하였다. 매우 즐겁게 놀고 파하니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시각이 되었는데 다만 고시(古詩) 중에 '흰머리 내일 아침이면 또 한 살 더 먹지. [霜鬂明朝又一年] '32)라는 구절이 떠올라 슬픈 감정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正月十四日 雨.今日伯氏之長男絅之妻元吉母氏之小祥, 子明 峻 潤 顯 愼等, 各措酒果, 進奠. 因子德明聞京奇, 則吾友順川郡守柳祖訒目之以迂愚論駁云, 未知此何等時耶. 聖明在上, 賢俊在下, 其補佐治理, 宜無所不臻其極, 而不知爲臺諫者, 何如人也. 有如柳倅之磊落傑特之人, 而致此失實之論也. 想居八道之郡邑者, 未知幾何人出柳君之右耶. 吾非惜夫柳君之被論也, 深歎夫世道之混淆也, 安得對柳君道此憤恚之懷耶. 柳君非止爲一世之偉人, 雖比之前古之賢俊, 無以加矣. 其忠孝之節, 實挺特不偶之奇男子, 而今爲諫臣之所劾, 若非平日其所憎嫉之人所陰中, 定是憸邪之類所彈射也. 此柳之賢, 故右議政鄭芝衍已擧其忠孝大節, 達于經席上. 鄭相亦賢相也, 必自小少之時, 審知其爲人之賢, 而有此薦進, 必不至阿其所好而妄告之也, 明矣. 今時之居臺諫之位者, 實不知其何如人耶. 謂柳君爲迂愚, 則更以何等人爲賢俊耶. 不自覺驚怪之極也.▪十五日 雨.男明 峻 潤等, 慕法聖賢, 行迢流俗, 實爲己務實之士也. 曾有兄弟同居之志, 屢稟于余, 余亦曾有是志而未就, 深以爲感慨者, 幾年于玆, 今則父母兄弟已皆辭世, 余獨留在中夜, 悲痛亦其極矣. 豈意豚犬輩志在古人, 欲爲此懿美之行耶. 乃圖案同堂異室之制呈之, 觀其規畫, 實法前賢之遺意也, 豈不爲之嘉歎耶. 第思玆實末世所難爲之事. 雖力其始, 恐難善終也. 不知我六男, 其能導率一家之人, 卒收燕翼之美耶. 明乎峻乎潤乎, 尙慎勗哉, 毋爲流俗之譏笑也. 余今老且多病, 恐不及見爾曺同居之美也. 雖未及見如能就此志, 則亦可瞑目於泉下矣. 願吾六男體余至懷, 毋忝爾所生也.▪十七日 晴.今曉設天只忌祭于隣姪家, 而因感冒未得進參. 只令男明 峻 潤 顯 愼等, 進參也. 一家兄弟令落殆盡, 唯余獨在, 多病而年且老, 屢未參祭, 其爲悲痛感悼之懷, 何可極乎.▪十九日 晴.康津居姨妹金氏, 丁其家翁慶源府使李億福之喪, 故今日修吊狀, 送奴以慰也. 李億福以名武驟陞堂上, 將騁長途, 而遽爲病逝, 其家門之不幸, 極矣. 余與李君, 一時遊宦于京, 其相從相好之情, 不啻萬萬, 而忽焉長逝, 痛惜之懷, 尤不可涯極也. 同鄕友進士李曇, 生員鄭履常, 一時病逝. 昨日聞訃音, 嗟悼何極. 李公通家之人也, 鄭君余之同年也. 俱是平日相好之人, 而今爲作古, 其爲悲悼之情, 非尋常比也.▪二十日 晴.茅山居甥姪朴自夏, 今曉忽焉長逝, 其家奴奔來告訃, 與豚輩失聲痛哭. 朴姪多子女, 而家契甚貧, 初喪斂襲之具, 想必不能措. 故與豚輩極力啚之, 而事不入手. 傷哉, 貧也! 吾家所送之物, 正木一疋, 塗棺大壯紙十張, 油紙二張, 生麻一束, 草席二, 一銘旌, 紅紬五尺, 幎目握手等具也.▪二月初三日 晴.牧伯城主朝送人, 期會于金潭陽士重 【千鎰】 家, 薄脫進去. 士重設水食, 以待牧伯來臨, 穩說主人, 先呈小床進饅頭. 牧伯又命進官供大床, 極歡而罷. 坐客, 兩城主, 牧伯之子任錪, 李光宇 光宙, 主人及余矣. 主人之子金象乾 象坤等, 故府尹梁應鼎令公之子山璹, 亦參之. 牧伯酒酣, 就執余手與士重之手, "願敎我無大失政也." 云云. 其待之之道, 實出誠悃 【牧伯任允臣, 正月纔到任, 判官林起門武弁也.】▪初七日 盡日雨.靑嚴察訪慶時貞, 頃者來見, 今日送白常紙各五卷. 此人無素分, 而以余與其兄慶時經有同官, 相好之分, 累過相見, 極示款意. 言及其兄, 則輒垂淚不自禁, 非友愛深至之人, 必不到此, 歎服烏可已乎. 此人於其兄之死也, 服心喪終三年, 豈非今世之所稀耶.倭寇分到左右道, 邊警方急. 似聞加里浦僉使李苾中鐵丸于目, 戰不勝而退兵, 右水營虞侯, 因伏兵而無去處云. 此實莫大之變, 憂慮何可極耶. 昇平日久, 文武恬嬉, 連年失稔, 國無儲峙, 北亂未靖, 南夷又起, 朝無良將, 民無死長之心, 彼倭奴必審察我國之虛實, 乘釁而發. 如我迸棄衰病之身, 雖死於兵火之中, 固不足惜. 只念主上孤立於上, 未知忠亮之臣, 誰氏之子, 能仗忠義之節, 盡死綏之誠耶. 言念及此, 不覺隕淚也. 設若彼寇能知困我之策, 衝東擊西, 殆無虛日, 則未知我國將何以應之耶.▪十四日 晴.率明 峻 顯 憲 等, 步上新基, 周覽俯視城中春光, 已到梅綻柳黃. 邇迎山綠, 遠混天碧, 供眼佳致千萬, 其狀眞難得之區也. 招數奴, 鍤治兀臬處, 雨作而罷.▪二十五日 晴.監司韓準巡到. 送男德峻 德潤于監司所, 使之諮議禦敵之策.▪三月初三日 晴.今日踏靑佳節, 男等各措酒肴, 會于南山書堂, 穩做淸歡. 男等爲邀座首鄭進士良佐氏共樂. 羅元老 羅德振 德懿等, 亦來參. 德昌盛辦盤果, 德振亦持壺笥. 男德明 德峻 德潤, 各呈盤果時物, 佳羞滿案, 可啖. 罷散時, 會坐新基, 呼酒, 使子姪輩, 各唱歌起舞. 今日之遊, 可謂至樂也.▪四月初二日, 暫洒雨旋卽快晴.承牧伯之招, 率明 峻進書院. 選揀書院儒生, 而難於取舍, 僉議囂囂故也. 金潭陽千鎰讓坐於余, 良久相推, 牧伯乃曰 "鄕黨莫如齒, 尼山當上坐." 云. 余乃首坐, 儒生十五六輩來會. 薄晩, 牧伯請携吾等數三人, 移坐于溪邊臺上. 牧伯與金潭陽射帿. 又移會于金廷幹溪亭高臺, 盡日歡樂而散.▪二十七日 晴.鄭正仁貴, 余之同年同庚, 相好莫逆之.二十八日 晴.今日明宗諱辰. 前每爲素, 而今日纔經重病, 不能行素也.▪七月十八日.午前晴午後雨. 今日監司尹斗壽欲爲榜會, 會諸同年, 將設大宴. 我以聘母忌日辭不進, 則監司送言曰 "禮文不載, 願亟來參."云. 餘年侍如提督官鄭仁貴, 同福縣監金富倫, 前咸安郡守張以吉, 進士魏大用等, 亦皆致簡邀之. 議諸豚輩, 則監司以壯元爲道主, 設榜會, 不可以聘親私忌不進云. 余且思之進參似當, 故自書堂下來于家, 整官服入府中. 先謁牧伯于西上房小樓, 次謁二衙城主于錦城館後廊, 因見諸同年. 監司先坐撫夷樓, 促諸同年入來使着戎服云. 諸同年咸脫上服, 入謁監司, 監司起出坐席外而受拜, 因坐以榜. 次同福縣監金富倫居上, 次前郡守張以吉, 次余, 次進士魏大用, 次提督鄭仁貴. 擧床後, 監司請來都事權慄, 牧使任允臣. 監司以余今日有忌, 魏大用亦有三寸服, 不命動樂, 極是欠事. 故余行酒後, 進岳相之前而告之曰 "令公新臨, 卽設榜會於三十年之後, 榜中之存沒居半, 今日之事, 實盛事也, 不可以二同年之故, 而遂不動樂也, 願先辭歸." 則監司初不許矣, 旋許之. 余先出來, 魏大用見余之出, 亦出來. 始爲動樂, 入夜以遊云. 方宴鄭提督吟呈一絶, 監司卽和之. 又令分紙于座中, 余亦次呈, 監司起而受之, 見而贊之, 曰 "不敢當, 不敢當." 云. 【尹斗壽, 字子昻, 號梧陰, 本海平, 居京. 履素齋門人, 後中戊午文科, 官領議政 海原府院君, 諡文靖公. ○ 金富倫, 字惇敍, 號雪月堂, 本光州, 居禮安. ○ 張以吉, 字天應, 本興德, 居羅州. ○ 魏大用, 字士行, 本長興, 居同 ○ 鄭仁貴, 字士顯, 本光州, 居務安. 後中辛酉文科, 官寺正牧使.】▪十九日 晴.朝同福倅金富倫致簡, 且送淸一升, 漆扇四柄三柄, 則送于豚明 峻 潤也, 中米二斗, 稱山齋饌價而送之. 玆人也, 乃退溪李先生之高弟也, 不但重余, 亦復愛我豚犬輩, 來卽冒夜持酒, 以慰於山齋, 今復致餽, 至此厚意, 不可不進謝. 同福又諭以今日欲獻盃于使相, 仍與諸年兄更語云云. 請我出諸誠款. 余勉强以入先謁二城主, 後欲謁岳相, 而岳相方聽政擾, 不敢進退, 與諸年兄敍話矣. 助防將自京下來州, 府中極擾擾. 余乃力告于同福而辭歸, 則同福不能挽也.▪八月十六日 午前晴, 午後雨.峻 潤 顯三子, 方赴試邑 【靈光】. 明日當入場, 未知貢才將如何耶. 懸望不可極也.▪二十日 晴.盡日在外軒, 以待豚輩之來. 午後豚峻 潤 顯, 罷場而歸. 聞德潤進士場, 賦爲三中云. 想必高中, 何喜如之. 及見峻與潤兩場草稿, 則皆善製, 而德峻之疑對, 尤佳可喜. 共對夕食爲話也.▪二十一日 洒雨而晴.朝, 校奴四五人, 持榜呼唱於外. 及觀榜錄, 則男德峻中生員試第六, 必入優等也. 男德潤俱中兩試, 衰門之慶莫大悅, 余之懷, 極矣.▪九月初九日 晴.今日佳節, 不可虛過, 携羅元老 羅德振 德懿, 及男明 峻 潤 顯 憲, 孫 龍 蛇 辰 等, 出遊川上, 釣得銀鱗, 滿盤跳躍, 玉鱠珍鮮, 人皆飫飽. 元老 德振 男德峻等, 各呈壺笥, 嘉魚珍果, 皆節物之勝味也. 余亦命持點心之具白粒十五升, 炊飯以呈, 皆飽食也. 夕貫魚柳枝, 幾什百箇, 帶月而歸. 落帽之興, 其爲此時道也. 今朝, 牧伯城主, 送生秀魚一尾, 可合切膾, 故亦持爲出遊之資. 夕還之路, 男德峻率其兒虯 壽, 同騎而來, 馬仆墜地, 興餘之一欠事也.▪十九日 雨.明日是姪朴自春永葬, 故賻米三斗, 大燭一雙, 挽章三度, 餠一笥及酒果, 措送之, 男明 潤等, 馳往焉. 德峻病不得往, 德顯曾往其聘家. 想與明 潤共祭而慟矣. 余之罷歸後, 査頓尹彦溥妻氏 金潭陽【景憲】 李咸陽【彦讓】 姊子 朴自春 自夏 從姪炳文等, 皆康强之人, 相繼以逝, 浮生何至于若此之奄忽耶, 靜言思之, 傷痛之懷, 不可涯極也.▪十月初一日 晴.携鄭上舍【良佐】及六男六姪, 聯鑣共往于伏巖金潭陽士重書堂. 穩作物外淸遊. 會書齋點心後, 移會巖頭. 使漁人鳴舵投網, 只得錦鱗一尾. 只以紬網所得, 作湯咀嚼, 江湖之味. 乘夕共其轡入來. 余乃作首顧後以見, 則騎馬列炬而來者, 無慮十五六員, 其盛極矣. 此昔日陪父兄, 遊樂之事也, 而今日余乃率子弟及親舊而遊, 能不嗟悼興感耶.▪十二月初八日 晴.明日, 先君諱日, 設祭于亡姪家, 故欲參祭, 洗浴致齋.▪初九日 晴.鷄初鳴, 起整冠服, 步進隣姪家. 率德峻 德憲 從姪羅德振, 行祭仰奠俯思, 念昔兄弟俱存會祭之事, 慕父母平素警欬之音, 由中以發, 曷勝悼怛不覺哭之哀也.▪十八日 晴極寒.遠想邊戍之卒, 寒苦之狀, 不覺惻然也. 必有凍死者, 九重細氈之上, 能念及否乎.▪十九日 大雪極寒.男德峻 德潤, 自錦陽書院來, 覲來.▪二十二日.書院祠宇, 以寒暄 一蠹 靜庵 晦齋 退溪五先生奉安行祭, 故峻 潤逢差執事, 夕食後, 卽上書院. 余則差獻官, 告病于牧伯, 則以德明代行事, 牧伯懇敎之, 而明亦落馬傷臂, 恐不得進參也.▪二十二日 晴.今曉想好. 行書院五先生奉安祭, 豈非一州千古所未有之盛事耶. 前牧使金誠一氏, 刱立書院, 今牧使任允臣氏, 畢建祠宇, 以五賢奉安而祭之, 實士類之大慶也. 男德明 德峻 德潤等, 初旣與金牧伯, 謀議營建, 未訖其功, 金使君意外罷去, 今牧伯任使君, 能繼其事, 又建祠宇, 玆兩牧伯, 可謂能知所當務者也. 牧伯使一州諸士, 製祭文進呈, 牧伯以男德潤所製爲善而用之.▪十二月初三日 寒.沍比劇. 見鄭右相奴, 問其一家上下頗悉. 鄭相與余, 同庚同榻同門故人也. 一生知己無如此友, 前日會合相從, 有同壎箎, 棄我先逝, 今經四年, 每念不釋矣. 今見其眼前使喚蒼頭, 寧不爲之迸淚耶. 【鄭相芝衍家奴, 初二日自京來納簡, 故有此招見.】▪初八日 晴.貿靑魚于市, 薦新于宗家父母與伯氏神主. 【時徐氏以家婦爲其僞孫, 婚事上京不擧薦新之儀, 故公設行焉.】▪二十九日 晴.先塋節祀, 當次于德顯及亡姪, 家親墓祭, 則當次于朴姪輩, 而不措送之祭物, 今日措送于齋寺也.▪三十日雨 雪.作除夜會, 余力疾出參于外軒房也. 會員從姪羅煥文 炯文 燮文 羅德振 羅德新 姪德昌及男明峻 潤 顯 愼 憲, 少姪德弘, 亦與焉. 極樂而罷, 舊歲隔晨, 只思古詩 "霜鬂明朝又一年"之句, 不能不興感嗟悼也. 연익(燕翼) 조상이 자손을 위해 세운 계책이나 교훈을 말한다. 《시경》 〈대아(大雅) 문왕유성(文王有聲)〉에서 주(周)나라 문왕에 대해 "후손에게 계책을 남겨 두어 공경하는 아들을 편안케 하셨다.[詒厥孫謀, 以燕翼子.]" 하였다. 정목(正木) 품질이 썩 좋은 무명을 말한다. 멱목(幎目) 소렴(小殮)을 할 때 얼굴을 싸는 천이다. 악수(握手) 소렴을 할 때 손을 감싸는 천이다. 사수(死綏) 군사가 패하면 장수는 마땅히 죽어야 함을 뜻하는 말이다. 《춘추좌씨전》문공(文公) 12년에 "사마법(司馬法)에 장군은 수레에 오르는 끈을 잡고 죽는다.〔死綏〕"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답청절(踏靑節) 3월 3일은 들판의 풀을 밟는 풍속이 있어 답청절(踏靑節)이라 한다. 소찬(素饌) 고기나 생선이 들어 있지 않은 식사를 이른다. 이아(二衙) 보통 관찰사의 감영(監營)이 있는 곳의 아문을 가리킨다. 사상(使相) 감사(監司)의 별칭이다. 조방장(助防將) 조방장은 무재(武才)가 있는 수령이 겸임하게 하였는데, 비상시 도내의 군사 요충지 수비 강화를 위해 둔 직임이다. 모자를 …… 흥취 원문 '낙모(落帽)'는 가을바람이 모자에 불어 모자를 떨어뜨린다는 말로, 진(晉)나라 맹가(孟嘉)가 일찍이 환온(桓溫)의 참군(參軍)으로 있을 때, 중구일(重九日)에 환온(桓溫)이 베푼 용산(龍山)의 주연(酒宴)에 참석했다가, 술에 흠뻑 취한 나머지 바람에 모자가 날아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識鑑》 세전(細氈) 궁전(宮殿) 바닥에 까는 고운 융단을 이르는데, 전하여 어전(御前)을 뜻한다. 천신(薦新) 시절을 따라 새로 난 과일이나 농산물을 먼저 신주(神主)나 신(神)에게 제사지내는 일을 말한다. 흰머리 …… 먹지 당(唐) 나라 시인 고적(高適, 약 707~765)은 일찍이 자사로 있을 때 "고향 땅 오늘밤에 천 리 멀리 그리는데, 흰머리 내일 아침이면 또 한 살을 더 먹지.[故鄕今夜思千里 霜鬢明朝又一年]"라는 〈제석시(除夕詩)〉를 지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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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연간에 올린 글 萬曆中呈文 김응기(金應期)의 자는 언정(彦挺)으로 타고난 기질이 성실하고 훌륭하며 효성이 순수하여 어려서부터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곧장 부모님에게 올렸고 부모님께서 조금이라도 불편하시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병오년(1546)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양친에게 병이 있어 관사에서 거처하는 과거의 계책에 다시는 뜻을 두지 않았다. 정미년(1547)에 부친이 위독하자 곁에서 모시며 탕약을 올리고 대변을 맛보아 길흉을 살폈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름에 정성과 슬픔이 상례의 법도를 넘어 몸을 훼손할 정도였다. 삼 년 동안 죽을 먹고 채소와 과일은 먹지 않으며 몸소 묘소에 올리는 음식을 준비하였고 또한 맛있는 음식으로 모친을 봉양하였다. 겨우 부친의 상을 마치자, 모친 또한 오랜 지병이 있어 여러 해 동안 탕약 시중을 들며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엎드린 채 아침을 기다렸으며 흙 걸상에 무릎 닿는 곳이 움푹 패여 들어가 오목한 모양이 만들어지니 의원들이 그것을 보고 감탄하였다. 평생 사사로운 재산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모친이 아들들과 며느리들에게 따로 재산을 베풀어 주고자 하니 모친의 뜻에 앞서 이루게 하였다.무진년(1568)에 모친께서 돌아가시자 갑자기 쓰러졌다가 곧 회복하여 삼일장을 치르는 동안 게으른 행동이 없었다. 장례를 치르던 날 밤새도록 많은 비가 내리자 슬프게 울부짖으며 하늘에 비니 하늘이 갑자기 맑아졌다. 조문하는 사람들은 매우 기뻐하면서 모두가 효성에 감복한 것이라고 여겼다. 아침저녁으로 묘를 살펴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제수를 깨끗하게 하여 반드시 평소 좋아하던 것을 생각하여 공판을 지극히 힘썼다. 또 미음을 먹으며 삼년상을 마치니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들리지 않았으며 몸은 가시처럼 말랐기에 그를 본 사람들 중에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상을 마친 후 반드시 묘를 향하여 앉았고 부모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먼저 줄줄 떨어졌다. 그 효행의 독실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명종 때 그의 행동을 가상히 여겨 두 차례 참봉을 제수하였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우리 선조는 김공과 더불어 한 고을 【고을은 노곡(蘆谷)이다.】 에 살면서 함께 지극한 행실이 있어 송서교[宋贊]의 추천을 함께 받았으니, 생각건대 반드시 서로 미루어 인정해 주는 것이 마치 지초와 난초의 향취가 서로 꼭 부합함과 같다. 일찍이 창강(槍江) 조장령(趙掌令)33)이 손수 쓴 글을 보니 김공의 효성에 관한 사적을 책 앞에 두고 〈만력중정문〉을 그 아래에 둔 다음 또 나공 이산 현감이 기록한 것에 적었는데 우리 선조가 이 글을 지어 포장하여 올린 것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지은 글을 우리 선조가 취하여 기록하신 것일까? 우선은 우리 선조가 지은 조목을 끝에 덧붙여 사정을 아는 사람을 기다린다.현손 나두동(羅斗冬)이 삼가 쓰다. 金應期字彦挺, 氣賦愿懿, 孝誠純至, 自在髫齔, 遇異味, 輒獻父母. 父母有微蛘, 涕泣憂悴. 丙午中司馬, 以雙親有疾, 不復有居館赴擧之計. 丁未, 父病沈綿, 侍側湯藥, 嘗糞以驗吉凶. 及歿喪葬, 以誠哀毁踰禮. 啜粥三年, 不食菜果, 躬執奠具, 且供甘旨, 以奉慈親. 服闋, 母又有宿疾, 積年侍藥, 衣不解帶, 俯伏待朝, 土床當膝處, 坎入成窠, 醫師見之, 嗟歎. 平生不營私財, 母嘗於子婦中欲別有施給, 先意導成. 戊辰, 遭母憂, 頓絶方蘇, 三日不怠. 及葬之日, 終夜大雨, 哀號禱天, 天忽開霽. 吊者大悅, 皆以爲孝感. 朝夕省墓, 雨雪不廢, 奠羞蠲潔, 必思平日所嗜, 極力供辦. 又啜糜粥, 終三年, 眼昏聽重, 紫毁骨立, 見者莫不哀慘. 終喪之後, 坐必向墓, 語及父母, 涕淚先零. 其孝行之篤, 大槪如此. 明廟朝, 嘉其行, 再授參奉, 而皆不赴.吾先祖與金公, 同居一鄕 【蘆谷】, 同有至行, 同被選於宋西郊薦啓, 想必互相推許, 有如芝蘭臭味之相符耶. 曾見滄江趙掌令凁手筆文字, 卽金公誠孝事蹟, 而起頭書, 以萬曆中呈文其下, 又書以出羅尼山所記云, 無乃吾先祖製此文褒呈之耶, 抑或他人所製而吾先祖取而記之耶? 姑附于先祖著述條末端, 以俟知者. 玄孫斗冬, 謹書. 창강(滄江) 조장령(趙掌令) 조속(趙涑, 1595~1668)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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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其爲東周賦 執達權而仰究聖軌安於適可志蠻貊而有爲事皇王其在我用此道而欲往思郁郁乎東土豈屑就而注意必善變而比化曰吾衰而未夢魯秉周則庶幾昭穆煥以授心典憲備而經世相時君而孰與視天命而聽否棲轍返以拜豚又弗擾稱旌招民彛發而幸至直道求而忍拒行行咈於執輿寧已矣其若凂尙危邦而休禍矧亂流而包羞珠衡俯而鐸鳴默睿算而遐矯賢愚同於擴充事業易於率由匪誠好而曷來或一治焉是謀縻爾壽其亦命展大猷之將導龜蒙蕞而道隆軼何代而可期儀明堂而願言眷宗國而勖子文王歿而性近日新餘而化孚環小東以愷悌覿二南於朝暮豊鎬逖而在斯指余掌於費都徹雍家而祼廟泣麟郊而鳴鳳回王賓於太室揖章甫於公庭斯變魯而至周盍從汝而試之需嘉會而倘遇撫晟際而竊比縱未溥於天下足爲師於王者山榛鬱而寤懷人不起而時去適南子而已違枉公氏而難預要屈己而從渠知正路之背却宜由也之不悅始欲行而終怩止巨猾於季宰孰斯取於魯無洙波接於澗東樂弦歌而爲綏何必懷夫西方素王治於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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責失王賦 楚竪來而辱王匹婦耻於無人寂晉蛇於羾勵哀魯鵒之翩繽兒亦從夫何處弗知所於王在曰殉君其職耳遑恤母而歸爲昔仗釰而徂莒喜有子於勤王懿純心其敵愾勔義方而圖終邦或濟則死可余旣耄而何憾驚班衣之血雨自外來而慊慊糜一城而孰保糊四方而言歸干戈際而反面在母心兮如何情宜鬱於陟屺念可慰於倚閭山河茫於擧目問赤芾兮安指秋存亡於瑣尾義休戚於臣隣薊鋒狠以叵測知莫可乎遄旋蹇從野而失所賈胡忍而歸歟汨無期於奔走阻常節於起居曾委質而自許郞匪躬而迺沮忠未效於死綏憂亦後於尸饔孰在家而可知恫守王之無良寧吾兒而有此不願聞于老孃指東社其何地來北堂而非時苟奔問之有人詎播越之迷戾安平留於卽墨盍汝往而共求驚消息於鼓里一天長於人間蹇申申而切責昭大義而明訙㜫王母之知義超戰國之男子陋燕哺之煦恩勖蛾報之貞誼非一言之起惕詎亡人之自來平時全其係戀亡國餘而蹈節齊城忽焉吿捷匪母言其疇激豈惟美乎訓子將以勵夫爲臣咨遺君而蔑親獨不愧於王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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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꼬리 鸎 천지의 중색(中色)290)으로 금 소리를 얻으니주조(朱鳥)가 남쪽에 있을 때 곧 변화하여 생겨난 것이라네291)울음에 만 가지 무한한 뜻을 실어 보내니녹음(綠陰) 짙은 나무 높은 곳에 있을 때가 가장 정겹네두 번째황금을 허리에 두르고서 천은(天恩)에 감격하니입으로 차근차근 수만 마디 말을 하네옛날 삼동(三冬)을 숲속에서 보낼 적의 뜻바로 오늘부터 따사롭게 말을 하네 乾坤中色得金聲朱鳥南時便化生啼送萬端無限意綠陰高處最多情其二黃金橫帶感天恩口舌循循數萬言曾昔三冬林下志直從今日語溫溫 중색(中色) 황색을 뜻한다. 방위로 보면 황색이 중앙의 자리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주조(朱鳥)가……것이라네 '주조(朱鳥)'는 이십팔수(二十八宿) 중 남방(南方)에 자리한 정(井)‧귀(鬼)‧유(柳)‧성(星)‧장(張)‧익(翼)‧진(軫) 등 일곱 개 별자리의 총칭으로, 춘분(春分) 날 황혼(黃昏)이 된 뒤에 일곱 별자리가 다 오위(午位)에 있게 된다고 한다. 봄이 되어 꾀꼬리가 나온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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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 鷰 갈 때는 무슨 마음이고 올 때는 또 무슨 마음인가이를 통해 모든 행동 다른 곳에 머무르지 않음을 알겠네북풍(北風)과 비와 눈을 그대 능히 멀리하였으니천지의 따뜻한 기운에 의기양양하게 지나가네 去以何心來亦何從知動靜不留他北風雨雪君能遠天地陽和得意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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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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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이성암(李惺庵)327)【수인(壽仁)】에 대한 만사 挽李惺庵【壽仁】 정도(正道)가 전해지지 않은 지 이미 백 년이 지났는데선생의 심학(心學)이 선천(先天)을 일으켰네328)연하동(烟霞洞)에서 편안하고 고요히 지낸 것이 가련하니이로부터 누가 옛 책을 보겠는가 正道無傳已百年先生心學起先天可憐安靜烟霞洞從此何人閱古編 이성암(李惺庵) 이수인(李壽仁, 1601~1661)을 가리킨다. 성암(惺菴)은 그의 호.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유안(幼安)이다. 전라남도 강진 출신. 1633년 과거에 급제하여 전적, 병조 좌랑, 정언을 역임하였다. 1642년 재차 전적에 제수되었으나 사은한 뒤 바로 전리(田里)로 내려갔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선생의……일으켰네 '선천(先天)'은 우주의 본체와 만물의 본원을 가리키는 말인데, 복희씨(伏羲氏)가 만든 역(易), 즉 선천역(先天易)을 뜻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이수인이 《주역(周易)》에 특히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박세채(朴世采)는 〈홍문관전한성암이공행장(弘文館典翰惶菴李公行狀)〉에서 그에 대해, "《역경(易經)》에 가장 심력(心力)을 기울여 《계몽전의(啓蒙傳疑)》 따위에 대해서도 반드시 고증(考證)을 하여 막히는 데 없이 이해하였다.[最用力於易經 以及啓蒙傳疑之屬 亦必考證而融會焉]"라 하였으며, 이단상(李端相)은 〈이전한【수인】만(李典翰【壽仁】挽)〉에서, "주인은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깨끗하게 앉아서 《주역》을 연구하였네. 자취가 세상과 더불어 이미 소원해졌고 마음은 경계와 더불어 모두 잠잠해졌네.[主人披鶴氅 淸坐點羲易 跡與世已疏 心隨境俱寂]"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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