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선생집 신간 발문 南圃先生集新刊跋[韓用幹] 옛날에 사마천(司馬遷)20)이 〈백이전(伯夷傳)〉을 지어서 허유(許由)의 광의(光義)가 매우 높다고 하는데, 문사(文辭)에서는 그 대강도 볼 수가 없다21)고 탄식하고는 말하기를 "암혈(巖穴)에 사는 선비는 진퇴(進退)에 알맞은 때가 있는지라, 이 같은 부류는 이름이 매몰되어 일컬어지지 않은 경우이니, 슬프도다."라고 하였고, 한창려(韓昌黎)22)는 〈송서무당남귀서(送徐無黨南歸序)〉에서 또한 학자들이 옛 성현을 사모하여 자신의 한 일생을 부지런히 문자 사이에 마음을 다하며 보내다가 끝내 사라지고 마는 것이 슬퍼할 만하다고 탄식하였으니,23) 나는 이 말은 모두 고인(高人)과 지사(志士)가 생을 마칠 때까지 이름이 일컬어지지 못한 데에 감개가 일어 한 말이라 생각되는데, 나 또한 일찍이 이것을 크게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다.내가 근래에 면성(綿城)24)의 인끈을 차고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승선(承宣) 김치문(金稚問)25)이 내게 편지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故) 세마(洗馬) 남포(南圃) 김 선생(金先生)은 현종(顯宗)ㆍ숙종(肅宗)의 시대를 당하여, 약천상공(藥泉相公)26)이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었을 때에27) 별단(別單)으로 선생을 포창하며 추천한 일이 있습니다. 그 뒤에 상이 약천상공에게 인재(人才)에 대해 묻자, 공이 일전에 추천하였던 김 아무개가 아직도 등용되지 못하였다고 대답을 하니, 곧바로 선생을 교관(敎官)에 제수하였습니다. 《명재집(明齋集)》28)에도 자주 칭찬하고 있는데, 본집 가운데 〈남유기문(南遊記聞)〉과 〈송임사가서(送林士駕序)〉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그리고 남포 선생의 구세손(九世孫) 김양국(金亮國)29)을 보내며 부탁하노니, 이 사람은 옥처럼 매우 아름다운 인물입니다. 거의 남쪽으로 와서는 거의 보지 못한 인물이니, 정답게 대해 주십시오."내가 마침내 김아(金雅)를 읍하고서 맞이하고는 간단한 안부 인사를 하고 나자,30) 김아가 남포 선생의 유집(遺集) 두 국(局)을 손수 떠받들고서 나에게 서발(序跋)을 부탁하는지라, 내가 무릎을 꿇고서 그것을 받아 손을 씻고 공경히 완미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거듭해 읽어보았다.그 시는 온아(溫雅)하고 간담(?淡)하여 염락(濂洛)31)의 풍아의 의취가 있고, 그 글은 전중(典重)하고 화섬(華贍)하여 구소(敺蘇)32)의 거려(巨麗)한 풍취가 있었다. 그 경술(經術)은 고정(考亭)33)에 뿌리를 두었는데 이따금씩 이전에 발명되지 않은 것을 많이 발명하였고, 그 경륜(經綸)은 한 통의 〈만언소(萬言疏)〉에 보이니, 가생(賈生)의 〈치안책(治安策)〉34)과 매우 유사하였는데, 군심(君心)의 바름과 시폐(時弊)의 구제에 대해 온 마음을 쏟았으니 완곡하면서도 측달(惻怛)한 뜻이 말 밖에 넘쳐났다. 〈경세통전(經世通典)〉은 또한 《주례(周禮)》의 육전(六典)과 비슷하였는데, 조리가 정연하고 핵심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남교일기(南郊日記)〉는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을 기르며 몸을 닦고 행실을 깨끗하게 하는 것에 관한 자경편(自警編)이 아님이 없었는데, 그 붕당의 편파성에 대해 논하면서 "글은 한기(韓琦)ㆍ범중엄(范仲淹)과 같고 학문은 정자ㆍ주자와 같더라도 만일 혹 지금의 편당에 얽매인다면 그 사람은 볼 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가 세상에 뛰어나 우뚝이 선 군자임을 알 수 있다.그런데도 일사로서 산림에 숨어35) 은거하여 의를 행하면서36) 비록 예를 갖추어 초빙하여도 지절(志節)을 숭상하여 일어나지 않았으니, 어찌 다만 한 고을의 선사(善士)37)일 뿐이겠는가.후세의 사표(師表)가 될 만하건마는 자취를 먼 구석 땅에 숨기고 이름을 누추한 시골 골목에 감추어서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으니, 개탄할 만하다.선생이 일찍이 《포은집(圃隱集)》을 보고서 스스로 그 바닷가 모퉁이 구석진 고을에 태어나 백 년 뒤에 초목과 함께 사라질 것을 탄식하고, 포은이 불후지명(不朽之名)을 세운 것에 감동하였다. 나는 이에 선생이 가장 슬퍼한 것은 이름을 전하지 못하는 데에 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자장(子長)과 퇴지(退之)의 말을 서술하여 대략이나마 선생의 지행(志行)과 문자(文字)의 대강을 쓰고서 김아에게 돌려주고, 또 한 마디 말을 다시 김아에게 전하기를 "샘물에 근원이 있으면 반드시 도달하고 옥에 온기가 있으면 반드시 빛나는 법이니, 선생의 이름은 이 문집이 간행되기만 하면 반드시 드러날 것이다. 그대는 어찌 판각할 것을 도모하여 선생의 이름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가. 그대는 힘쓸지어다."라고 하였다.신묘년(1831, 순조31) 단월(端月 음력1월) 하한(下澣)에 면성 읍재(邑宰) 한용간(韓用幹)38)은 삼가 발문을 쓴다. 昔司馬遷作伯夷傳。歎由光義至高。文辭不可摡見。曰巖穴之士。趍捨有時。若此類名湮沒而不稱悲夫。韓昌黎送徐無黨南歸序。亦嘆學者慕古聖贒。勤一世而盡心文字之間。終歸於泯滅爲可悲。余以爲斯言皆因激感於高人志士之沒世名不稱而發也。未嘗不喟然歎也。余間佩綿城紱。赴任未幾。金承宣稚問馳書於余曰。故洗馬南圃金先生。當顯肅之間。藥泉相公繡衣時。別單褒薦。其後自上問人才於藥泉相。對以前薦金某尙未用。卽除敎官。明齋集亦亟稱詡。本集中南遊記聞及送林士駕序可按也。仍送南圃先生五世孫亮國甫曰。此雅亦絶佳如玉。殆南來所未見之人。要其款接。余遂揖迎金雅。敍寒暄畢。金雅手擎南圃先生遺集二局屬余以序跋。余跪而受。盥手敬玩。繙閱其首末。其詩溫雅?淡。有濂洛風雅之意。其文典重華贍。有敺蘇巨麗之風。其經術本之考亭而間多發前未發。其經綸觀乎萬言一疏。殆類賈生之治安策。惓惓於君心之正時弊之捄。婉曲惻怛之意。溢於辭表。至於經世通典。亦類周禮之六典。井井有條。鑿鑿中窾。其南郊日記。無非存心養性修身潔行之自警編。而其論朋黨之偏曰文如韓,范。學如程,朱。若或拘繫於今之偏黨。其人不足觀。於此可知其爲高世卓立之君子也。然而逸士山潛。隱居行義。雖有旌招而尙志不起。奚但爲一鄕之善士。可以爲後世之師表。而遯跡遐陬。藏名陋巷。未克顯揚。可慨也已。先生曾覽圃隱集。自歎其生於海隅偏鄕。百年之後同歸於草木之泯滅。而感圃隱立不朽之名。余於是知先生之悲者。最在於不能傳名。故爲敍子長,退之之言而略書先生志行文字之槩。以歸于金雅。且以一語復于金雅曰。泉有本則必達。玉有蘊則必輝。先生之名。待斯集之刊行。知其必彰。子盍謀其剞劂。以彰先生之名。子其勉諸。辛卯端月下澣。綿城宰韓用幹謹跋。 사마천(司馬遷) 사마천은 한 무제(漢武帝) 때의 사가(史家)로, 자는 자장(子張)이다. 전한(前漢)의 태사령(太史令)이었기에 흔히 태사공(太史公)이라고 한다. 《사기(史記)》를 지었다. 허유(許由)의……없다 《사기(史記)》 권21 〈백이열전(伯夷列傳)>에는 "내가 들은 바로는 허유는 광의가 매우 높다고 하는데, 문사에서는 그 대강을 조금도 볼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余以所聞由光義至高, 其文辭不少槪見, 何哉.]"라고 되어 있다. 한창려(韓昌黎) 한유(韓愈)로, 당나라의 문인이자 사상가이다. 자는 퇴지(退之)이며, 선조가 창려(昌黎) 출신이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송서무당남귀서(送徐無黨南歸序)〉……탄식하였으니 〈송서무당남귀서〉는 사실 한유가 아닌 구양수(歐陽修)의 글로 확인된다. 그 글에 "지금 배우는 자들은 옛 성현의 불후를 사모하여 한 세상을 부지런히 힘써서 문자 사이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이는 모두 슬퍼할 만하다.[今之學者, 莫不慕古聖賢之不朽而勤一世, 以盡心於文字間者, 皆可悲也.]"라고 하였다. 《唐宋八大家文鈔 卷46》 《古文眞寶 後集 卷7》 면성(綿城) 전라남도(全羅南道) 무안(務安)의 별칭이다. 승선(承宣) 김치문(金稚問)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다. 약천상공(藥泉相公) 남구만(南九萬, 1629~1711)으로, 약천(藥泉)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로(雲路),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약천집(藥泉集)》, 《주역참동계주(周易參同契註)》 등이 있다. 암행어사(暗行御史)……때에 남구만은 31세 때인 1659년(효종10)에 호남 암행어사, 1662년(현종3) 경상도 암행어사로 나간 바 있다. 《韓國文集叢刊解題 131, 132輯 藥泉集》 《명재집(明齋集)》 조선 후기 학자인 윤증(尹拯, 1629~1714)의 문집인 《명재유고(明齋遺稿)》를 가리키는 것으로, 명재는 그의 호이다. 윤증은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또 다른 호는 유봉(酉峯)이며, 성혼(成渾)의 외증손이고, 부친은 윤선거(尹宣擧)이다. 권시(權諰),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김양국(金亮國) 글을 통해 저자인 김만영(金萬英)의 5대손으로 확인될 뿐, 누구인지는 상세하지 않다. 간단한……나자 원문의 '寒暄'은 날씨의 춥고 따뜻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겨울에는 춥고 봄에는 따뜻한 것과 같은 것이다. 전하여 간단한 안부 인사를 의미한다.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서의(書儀)》 〈거가잡의(居家雜儀)〉에 "날씨를 말하거나 기거를 여쭌 뒤에 또 세 번 재배하고 그친다.[叙寒暄, 問起居訖, 又三再拜而止.]"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염락(濂洛) 염계(濂溪)에 거주하던 주돈이(周敦頤)와 낙양(洛陽)에 거주하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의 합칭이다. 구소(敺蘇) 구양수(敺陽修)와 소식(蘇軾)의 합칭이다. 고정(考亭) 송(宋)나라 주희의 별호이다. 이는 원래 복건성(福建省) 건양(建陽) 서남쪽에 있는 지명이다. 주희가 만년에 이곳에 거주하며 창주정사(滄洲精舍)를 세웠는데, 이종(理宗)이 주자를 숭사(崇祀)하기 위하여 고정서원(考亭書院)이라 사명(賜名)하였으므로 뒤에 주희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가생(賈生)의 〈치안책(治安策)〉 가생은 한 문제(漢文帝) 때의 문신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그가 일찍이 한 문제(漢文帝)에게 시국 구제책으로 〈치안책〉을 올렸는데, 명문(名文)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漢書 卷48 賈誼傳》 《史略 卷2 西漢》 일사로서……숨어 반악(潘岳)의 서정부(西征賦)에 "산림 속에 깊이 숨은 선비여, 멀리 가서 돌아오지 않음을 깨달았네.[悟山潛之逸士, 卓長往而不返.]"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御製歷代賦彚 外集 卷9》 은거하여 의를 행하면서 한유(韓愈)가 동소남(董召南)이라는 당나라 때 은사(隱士)를 위해 〈동생행(董生行)〉이라는 노래를 지은 것이 있다. 그 가사에 "수주 속현에 안풍이 있으니, 당나라 정원 연간에 이 고을 사람 동소남이 그곳에 은거하여 의를 행했다.[壽州屬縣有安豊, 唐貞元年時, 縣人董生召南, 隱居行義於其中.]"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小學 善行》 한 고을의 선사(善士)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한 고을의 선사여야 이에 한 고을의 선사를 벗할 수 있다.[一鄕之善士 斯友一鄕之善士]"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한용간(韓用幹) 1783(정조7)~1829(순조29).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위경(衛卿), 호는 진재(眞齋)ㆍ수목청화관(水木淸華觀)이다. 1828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정언(正言)을 지냈다.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로서 신위(申緯)와 두터운 교분을 가졌고, 유작으로 「계산만춘도(溪山滿春圖)」가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