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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族孫濟倫 夫理氣本不相離。非氣不能發。非理無所發。然以其所主而言。則人心生於形氣。故謂之氣發。道心原於性命。故謂之理發。四端。自性中初頭推出。而純粹。故曰理之發。七情就情上首尾該擧。而或有過不及之差。故曰氣之發。然四七皆自性中發出來。初豈有苗脈之異乎。虛靈知覺。有合體用而統言。朱子所謂虛靈知覺之體。沈然潛隱。燁然呈露是也。有分體用而析言。朱子所謂此心之靈。其覺於理則道心。覺於氣則人心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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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講社諸友 契名之大不着題。曾已言之。而尙不改圖云。尤極悚縮。此固在所當已。而如或不已。則以輔仁二字塗付如何。夫仁也者。是天地生物之心也。而人得之以爲心者也心則人之所以主於身。而統是性情者也。然則心豈可斯須放逸哉惟其操之以存。則仁不待別求而已是自如矣。友朋相會之日。斷置閒說話。講此爲仁之方。則庶幾爲相長之道耶。然心雖與理爲一。而亦不無氣稟物欲之拘。則要在克去已私。復乎天理而已。以是勉勵。未知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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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貢問政。子曰足食足兵。民信之矣。夫子本以兵食兩者。爲爲政信民之不可不足。而子貢。擧信字。做爲三者至於窮問。則雖兵食俱去。而信不可去之意。答之曰。自古皆有死。民無信不立。蓋信是衆善之主。而民德之不可不守。敎化之不可不先。故畢竟歸重於信而已乎。 得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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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諟天之明命。註云常目在之。天命至微。非目可見。想只是就其發見處顧之。未知如何。 豈是有物可見。只是常存此心。知得有這道理光明。如立則見其參於前。在輿則見其依於衡底模樣。而不敢放肆之意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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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曺公習【在學】 客歲枉顧。能使窮山精采。彌感厚賜。而但傾倒未洽。別離相尋。是豈同衰暮可堪者哉。謹未審體上舒泰。味道有得。弟之宿疾膏肓。人所共知。而自昨冬以來痰火與眩症。日添月劇。對人說話。頓沒記念。纔有轉動。痛剌先到。實難晷刻可保。因思之。頹世殘生。老而不死。罪也。所以造物驅迫。此諸般惡症。而譴誅之。只合自任耳。龜洞喉音。近或褫聞耶。夏間聞之。則營始影堂。而治木云矣。伊後信阻。未知其那間了役。甚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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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梁汝正【在慶】 目今時象日迫。外患內訌。上而主辱於戎狄。下而民困於塗炭。無復可望於有爲。只捱遣一日。則是一日之好氣數也。惟吾五百年。禮義典刑。沒入於洪濤懷襄。而重爲蹄迹所踐踏。剝落無餘。有時中夜起坐。涕淚澘然。且區區爲圖生。以俟天下之淸爲計。則無地可占便宜。究竟事。只可任天而已。謹詢日來。搬移凡百。將何做去。而候節更何。若聞胤玉輩。講誦日勤。眞好消息也。九野寒威中。一点陽脈。不在讀書而在何。達煥連以兒病進退。憂惱送日。而於左右人事上。一切廢却。自訟辜負而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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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梁汝正 㤼界中。聞信猶喜。矧無大端憂虞者乎。弟依昔病劣。而村沴入室。眷率連痛。幾至屬纊者累矣。今始乾淨。可謂先咷後笑也。那間有相逢之期耶。雖念念不捨。奈此病躄何。或諒此狀。賜一枉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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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高仲三 聞有美愼。已累日矣。或因飮食菲薄。居處鬱摯。而且其用功勤苦。氣或不伸而然耶。大抵此學。以收心養性爲基本。明善擇善爲準的。修己治人爲事業而已。若其講磨之際。神精疲勞。則或登臯而風。或臨水而浴。隨所動容周旋。無非用功之地。何必欠損氣血。至於生病耶。且讀書魔障。莫甚於挾滯。則須愼之如何。吾夫子愼疾之義。亦已宿講。則何足須陋劣者。淺淺之言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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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崔善長【元植】 往年珍函。奚啻欣感。仰詢侍奉餘學文自力進進不已耶。莫以世亂自沮。而愈讀已讀。愈究未究。勇往直前。以舜何予何。爲立志如何。往古來今。有不勉學而能立揚者哉。誼同一室。百世難渝。玆忘舍已芸人之誚。敢煩紙面。愧懼也已。達病朽已久。眼前收拾。百不逮人。外何云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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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張子維 俯詢謹領。葬後則祖先之祭必不廢。而喪人。當爲祭主。但無祝單獻。不受胙可也。朱子喪中。以墨衰行薦于廟。又謂當使人鋪排酒食之物。而主祭者。去拜而已。栗翁謂使服輕者行之。此當考據參酌。若其末段。終喪以下云云。無是理。不必致疑。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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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從姪敬於【載熙】 月前嶠南之役。近遠士友齊會。只欠吾從叔姪。同未周旋也。意謂自泥場探奇。而徑發矣。竟失所圖何悵如之。從叔自夏至秋。以腫疼送日。遠役正難。偶被傍人勸起甚勤。晩後蠅附。一日僅一二十里。八顚九倒。至鳳城沙圖。始謁先生。因陪入華巖寺。留五六日。又轉進泉隱寺。留三四日。皆滯雨故也。橐罄腫添。因輒辭退。心懷靡定。間關還棲。百憊闖肆。良憐良憐。以李相敦語侵師門事發通。今二十日齊會江亭相議。亦來參爲好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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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從姪敬於 所引晦翁說。眼睫坦曠。心肚爽豁。如服空靑水碧。而忘却痿痺之在身。非爾此書。則何以得此好語耶。日與羣穉接膝共討。日見其進。眞好消息也。此是開來學。㝡初門路。其苦不須言。而其喜不可量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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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之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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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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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公諱達煥。字德卿。號遯齋。南平氏。以新羅武成公諱多省爲鼻祖。羅麗之際。名宦宿德。譜不絶書。至諱益漸。見麗運將替。遯于嶺之丹城。杜門自靖。世所稱三憂堂先生也。第二子諱中誠。亦繼父志。隱淪不仕。是生諱和。始仕本朝。官都承旨。贈左贊成。諡景惠。至孫諱尙行。官禮曹參議。自丹城移居于綾城。再傳至諱自修。號勉修齋。以學行被薦。歷咸悅谷城兩縣監。士林建祠以俎豆之。寔公十三世以上也。高諱演鼎。曾諱顯相。號鳳山。鄕中多士。以篤行孝友。經學深造。屢報于本邑。而刺史莫薦。終老林樊公論惜之。祖諱範龍。號安谷。乙丑中司馬。博學能文。孝行特異。親患思鼈湯。乃臨水彷徨。有巨鼈入苞之異。考諱鳳休。號心巖。天性廉介。專力於爲己之學。以朱宋二書。爲平生茶飯。於竝世諸賢。最慕勉菴崔先生。命兩子師事之。又源源修候。以表高景之忱。利川徐杓女。光山金光欽女。其先後妣。而公金氏出也。以哲宗壬子八月二十一日。擧公于綾州牟山里第。前此神人顯夢曰。必生賢人。俄而分娩身幹脩偉氣像厚重。父母甚愛之。小字曰夢賢。七歲上學。聰慧過人。一聞輒誦。八歲讀小學。稟于心巖公曰。衆人蚩蚩。物慾交蔽。乃頹紀綱云。爲學之道。必須防慾。似爲急務矣。聞者驚異之。十四五。文理通暢。因泛濫諸書。十七歲。以親命贄謁吾先子勉菴先生于靑城山中。先生愛其淳厚敦篤。深加勸獎。書贈進修根基。修齊治平。八字而勉之。佩服師訓。反覆實驗。其於天人性命之奧。道器師卒之分。人獸子賊之判。潛究黙識焉。勉菴先生癸酉進疏後。大院君還政。嶺人李相敦。憤其午徒之失勢。誣辱先生。公與道內士林。發通痛加聲討。其後。曺兢燮。作許元軾文集序。又誣害先生也。亦如之。高宗乙巳十月。倭脅五賊輩。勒搆五條。新約。國權盡替。勉菴先生不勝痛憤。誓欲擧義討復。以翌年二月。行次湖南。公自定山。追謁于泰仁鍾石山房。先生命歸家待之。四月復往鎭安崔仲悅家。問先生行處。則主人畏禍諉之。以駕次上耳菴近處。而地僻難尋云。卽討便上書。則卽賜下答。而亦不明言其所。蓋倭偵甚密。若來往煩多。蹤跡顯露。有僨事之慮故也。轉往定山。探問復至回文山中。拜謁而歸。閏四月。往龍湫寺拜先生。留數日。寫布告八路檄文。乃以同月十三日。建旗于泰仁武城書院。先生以擧義事。實上疏于高宗皇帝。且寄書日本政府。數其棄信背義十六罪。遂行軍井邑淳昌谷城之間。收軍得千餘人。復還淳昌。二十日全州觀察使韓鎭昌。淳昌郡守李建鎔。以倭兵來擊我師。我師遂潰。是日曉。光州觀察使李道宰。遣人來。宣皇勅。兼有告示一度。皆諭令解散之意也。先生祗受。顧謂左右曰。設使此眞君命。苟有安社稷利國家者。古人有專之之義。遂復書畧曰。某已上疏。陳達擧義之由。第當承批。進退。有非封疆之臣。所可指揮者也。俄而有報倭兵。自郡東北面圍來者。先生欲自出戰。左右交諫。先生曰。吾豈怕死者耶。士民牽衣擁護。乃令林炳瓚。設二奇兵迎之。已而有告此非倭也。卽全州南原鎭衛兵也。先生。不忍其同胞相殺。遣人致書諭。令退去。而皆不聽。全州兵。先放砲。丸下如雨。義師皆散。鄭時海。忽中丸而殉死。先生知軍勢已去。顧謂左右曰。此吾死地也。堅坐椽廳。義士願從者。二十一人兩隊兵合陣圍向。一齊放丸。先生謂炳瓚曰。吾輩死當明白耳。命錄姓名一通。貼壁上。各依錄序坐。又令整衣冠。諸人各解行裝。出着廣袖衣結纓。拱手而坐。于時流丸亂入。衆恐犯先生。環坐障蔽。先生亟止之曰。得正而斃。不亦可乎。諸人遂復列坐。天忽暴風雨。大雷電。兩隊兵。愕然棄銃伏地。已而夜黑無燭。尸在旁心。濡血可蹀。幕下士。李道淳。林相淳。適在外持燭來。檢旁中九人者。不知去處。惟林炳瓚高石鎭。金箕述。文達煥。林顯周。柳鍾奎。趙愚植。趙泳善。崔濟學。羅基德。李容吉。柳海瑢。十二人在矣。翌日柳鍾奎。以治鄭時海喪出外。梁在海先以偵探次在外。聞先生被圍突入。復成十二人之數。自是隊兵嚴守。群倭攔入。鼓刀戞銃。作聲甚惡。先生坐自若。先誦孟子浩然熊魚二章。令諸生各誦一篇。公自谷城還淳昌時。中路猝發寒熱。且腹疼。至是症愈加。嘔吐不已。全廢食物。但飮冷水而已先生屢次診視。且給丸藥。後三日。全州小隊長金哥。稱以有皇勅押上。先生大罵曰賊輩矯誣。敢藉皇勅耶。金哥手犯先生解佩刀。倭兵十餘酋。與隊兵。促發先生及林炳瓚乘轎。餘人竝結縛而行。公則病不能行。故亦乘轎。時日。暈三匝觀者。不勝悲憤。到全州。公亦被縛。足蹴之。拳打之。無數困迫。不勝憤激。欲奪軍刀。擊殺幾倭計。暗通于省菴【趙愚植號】。則以不可答之。更思之。恐禍及先生。遂止之。十顚九倒。卽欲自刎。而又無絲毫之筋力。每賴秀南【高石鎭號】扶護。僅存縷命焉。未及公州。大田二十里。顚倒氣絶。食頃還蘇。倭復使乘轎而行到大田。倭乘以輪車。抵崇禮門外。倭憲兵隊長小山三。已帶百餘倭。及通譯朴宗吉而來。環圍先生。請往司令部。先生據地罵曰。吾認以皇勅來。吾囚則當囚大韓法司。寧囚倭奴司令部乎。諸倭目宗吉。扶掖上人力車。十二人隨之。直向司令部。旣入門。先生坐地大罵曰。此是軍部耶。法部耶。倭迫十二人。去其袍笠。次第抱之。倭招出十二人。次第詰問。問公曰。師事崔大官幾年乎。曰數十年矣。曰此擧將何爲。曰吾先生。痛賊臣之販國。外國之擅柄。欲復宗社。而有此擧矣。通譯宋哥。稱以土匪。公厲聲曰。藉吾粮。從師赴國亂。此可謂土匪乎。宋黙然。又問曰。與閔炯植朴鳳來等五人。相通否。曰初不相知也。三已與通譯。亂打兩脇曰。不勝杖則必直招。且問且杖。公厲聲曰。如是勒招。是公事乎。賊卽止之。押送監房十餘日。又押去問曰。汝師上疏草本。汝寫乎。公不知其譎計。故將稟告先生後言之。欲出向先生處所。倭止之。俄頃。先生下臨曰。此人病不能食飮。爲十餘日。不能收拾精神。公始覺悟先生微意。卽答曰我果寫之。先生叱責彼賊曰。博文谷川輩。聚坐質問可也。汝每私問。何也。賊曰草疏時。誰誰見。先生曰十三人皆見之已。而先生還入。賊曰寫何紙。公曰張紙。又問連幅否。曰然矣。又曰誦其幾句讀。公曰十餘日苦痛中。有何精神。記得乎。又曰汝師行擔中。得汝書簡。字樣。與疏草不同。以是生疑。公曰我旣自書云。則汝何生疑乎。疏草書手懸錄于我名下可也。賊復押送于監房。六月。倭以先生及十二人等。往泥峴司令部。公則不能行步。以人力車乘之。讀所謂宣告書。崔某對馬島。監禁三年。林炳瓚二年。其餘或加囚。或杖刑。放送。先生之入馬島也。警堂。【林顯周號】負公。立於路傍而奉別。失聲痛哭。還鄕未幾。先生易簀于馬島。公獄苦之餘。已成跛躄。未能執紼於返柩之際。爲終身恨。遂蟄伏舊居。抱先生遺書。守先生所志。日夕乾惕。潛究性理之說。不知老之將至。遠近負笈者甚衆。各隨其材。而諄諄敎誨。多有所成就。其論心性則曰。心之爲物。本虛靈。故具衆理而應萬事。然虛靈自是本體。亦何嘗有形哉。心雖主乎一身。其體之虛靈。足以統管天下之理。宰制天下之物。其所以然者。則性也。所能爲者。則心也。故曰性。是心之道理也。或問心性先後。曰以其所謂人之所得乎天者看之。則是乃心性。俱得於天。而言。疑若不可以時處分矣。然以其所謂人有是性。則有是形。有是形則有是心者看之。則是乃先有所生之理而後。氣聚成形。而心存理具者也。又問心有以理言者。有以氣言者。曰心者。合理與氣而得名者也。蓋人之生也。稟四德而爲五常之性。受二氣而爲百骸之身。心也者。具是理而麗乎二氣。無間於動靜。而常爲一身之主者也。然但不主於理。而主於形。則恐流爲邪惡。故有人心道心危微之別。而務使精察此兩者之間。而一守其本心之正。常常循理。而行之而已。嘗侍坐於定山中和堂。先生顧謂曰。華翁主意。就一物上分理氣看。就一理上分心性看。始未嘗無疑晦。後來反復考之經傳。又以朱子所論心無形體之說。與夫論其理則心爲粗。性天爲妙之說。及其詠心詩。性外初非更有心。只於理內別虛靈之句。參互看之。則莫不脗合而義躍如矣。又曰人之有生。性與氣合而已。性主於理。而無不善。故其發皆天理之所行。此所謂天命之性。氣主於形。而或不善。故其發皆人欲之所作。此所謂氣質之性。然性非別有一性。性只是理也。而隨形氣賦焉。但氣有淸濁粹駁之異。故稟其淸粹者。氣不隔理而助其發揮。故得以專其本然之體段。此所以爲聖爲賢。稟其濁駁者。氣常掩理。而易致差謬。故無以專天性之本然。此所以爲愚爲不肖也。然學可以變愚爲智。變不肖爲賢。此聖賢所以設敎也。其要在變化其氣質而已。然而若不百倍其功。而刻苦堅。固則烏得以收其效哉。蓋公之爲學。專以誠實爲主。年彌高而工彌篤。反復闡明。而爲說者。不下數萬言。皆緊切有味。無非躬行體驗中流出來。非世之徒事文飭。坐談龍肉者之所能及也。所著有遺集五卷。朱文類選十三卷。東史二卷。以國讎未復。終身戴白笠。戊午。倭符同逆孽。弑害高宗皇帝。公聞而痛哭。作聲討文布告域內。以戊寅三月七日卒。方其疾革。少無怛化意。門弟子侍坐諄諄。以勤學問。扶陽脈勸勉。葬綾州寒泉面淸溪洞後麓甲坐。門人加麻者數十人。齊濟州梁氏俊黙女。甚有婦德。擧二男。載聲基皜。載聲男。泰應泰鍊泰仁泰允。基皜男濟仁濟義。曾玄以下不錄。噫靑。雲軒駟。人人之所欲。故由此而爲士者。專肆力於詩賦表策。以圖功名。滔滔皆是也。公以沈毅贍敏之材。果若從事於斯。則早晩大闡。優有餘地。而年未勝冠。能判得浮藻虛榮之爲外爲末。眞知實踐之爲內爲本。千里遠程。負笈於大賢之門。可謂行人所不能行者也。且當國家板蕩。主辱臣死之日。彼紆靑拖紫。貪權樂勢之輩。汲汲於全軀保妻。類皆越視秦瘠。而公以草野韋布之士。忠憤所激。按住不得。櫛風沐雨。彷徨于兩湖之間者。爲數箇月。終至陪師于矢石劒戟之場。南冠鬼窟。視如袵席。刀裾桁楊。不動毫髮。骨痿筋縮。抱經講道以終世。詎不偉歟。在昔庚申歲。拜謁於富春山房。公欣然執手曰。此先生孫也。遠地來見實非容易。再三申戒。以勤讀書勿墜家聲。今於狀文之述。尤不勝感懷。而但所學淺短。不能摸寫其眞境可恨。不顧僭妄。撮其志行之大槩。以竢秉筆君子採擇焉。歲甲辰小春。世下生月城崔龍植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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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집(南圃先生集) 南圃先生集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고서 국역 南圃先生集 金萬英 金萬英 미상 미상 남포(南圃) 김만영(金萬英, 1624~1671)의 문집 남포선생집(南圃先生集) 해제 나천수/나주시 향토문화연구회 부회장 1. 생애와 출신 배경 남포 김만영1)1) 이하 선생이라 호칭한다. 은 당악김씨 9세로 자는 영숙(英叔) 호는 남포(南圃)로 아버지 김태흡(金泰洽)과 어머니 나주나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1624년에 태어나 1671년에 졸하였다. 살아생전에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 洗馬) 그리고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이 화려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심오한 경지에 몰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유집에 수록된 작품만 보더라도 매우 심오한 학문의 경지를 득도한 것 같다. 이처럼 그가 문학으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당대에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문학적 자질 또는 문학적 DNA가 핏줄로 이어 온 것 같아, 선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여기에 소개 하고자 한다. 선생은 당악김씨 9세인데 그의 5대 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주 왕곡면 귀업리(龜業里)에 자자일촌을 이루며 살았던 당악김씨 터와 당악김씨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인물이 있으니, 바로 진사 김효정(金孝禎)이다. 당악김씨 4세 진사 김효정은 충주박씨 박우(朴祐)를 사위로 맞아들인다. 구전되어오는 이야기로는 대체로 부유하게 살았던 김효정은 사위 박우를 나주 처가 쪽으로 불러들여 공부를 시켜 마침내 1510년(중종5) 식년시 문과에 16위를 급제를 하였으니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더더욱 김효정의 외손자 사암 박순(朴淳)은 1553년(명종8)에 문과 장원 급제하고, 이조참의, 대사헌,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한 문신이 되었으니, 나주 당악김씨는 더더욱 빛을 보았을 것이다. 한편 1519년 기묘사화 때에 나주출신 선비 11명이 성균관에서 숙식을 하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 두 명이 바로 김효정의 두 아들 김구(金臼)와 김두(金㪷)도 있었다. 이들 11명이 궁궐에 가서 조광조를 신원하는 하소연을 하다가 쫓겨나게 되자, 그러한 정치상황에서 벼슬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고 반문하고 11명 모두 나주로 낙향하여 소위 「금강11인 현계(錦江11人賢禊)」를 결성하여 매양 좋은 날에 영산강을 선유하며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 여지승람과 나주읍지에도 기록될 정도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시에 지었던 정자와 글이 모두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지고, 오로지 김두의 시한수와 당시 회원인 나일손의 아들 나창[羅昶, 세자시강원 필선]이 남긴 차운 시 한수만 남아 있다. 선생의 가승을 보면 김효정- 김두 –김태각- 김원록- 김태흡- 김만영의 핏줄이 이어짐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남평에서 활동하다가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정유재란 이후에 맥이 끊어진 「금강11인 현계」의 계칙을 복원하고 현계 회원의 후손들 간에 모임을 계속 이어지도록 복원 하였다. 그러한 활동의 숨은 공로가 오늘날 왕곡면의 금사정(錦社亭)에 담겨져 있다. 「금강11인 현계」가 태동한지 어언 500년이 흘렀지만 그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교류를 하고 있어 이 분야도 학문적으로 연구해 볼 만하다. 2. 《남포선생집》 서지(書誌) 사항과 문집 구성내역 《남포선생집(南圃先生集)》은 1831년에 목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권수제나 판심제나 모두 같으며, 권책은 원집(原集) 16권, 부록(附錄) 2권의 2책으로 행자는 10행 20자에 규격은 25.7×18.1(cm)이다 어미는 상일엽화문어미(上一葉花紋魚尾)이다. 총392쪽으로 되어 있다. 《남포선생집》은 문인 나만성(羅晩成/金漢明의 외조카, 1678년 문과급제)의 편집을 거쳐 1831년(손조31)에 5세손 김양국(金亮國)이 주축이 되어 간행하였다. 목활자본이 간행되기까지의 과정은 세 사람의 권수(卷首) 글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발문은 1698년(숙종24)에 이현일(李玄逸, 1627-1704)에게 써 받았는데, 이현일은 1627-1704년대 인물로 사헌부장령,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학자인데, 선생의 제자이며 당시 사헌부 지평 나만성(羅晩成,1646-1700)이 서울의 이현일 집을 찾아가 《남포선생집》의 서발(序跋)을 창하였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그 후 이현일은 1697년 광양현에 이배(移配)한 것으로 보아, 전라도로 귀양 온 이현일을 선생의 외손자 나경성(羅景聖)이 찾아가 남포집 발문을 예전 나만성이 부탁한 바를 상기시키면서 마침내 써 받은 듯하다. 그렇다면 이때는 필사본으로 된 《남포집》이 먼저 탈고되었을 것으로 유추되나 그 흔적을 알 수 없고 나만성, 나경성 사후 여러 해를 미루었다가 선생의 5세손 김양국(金亮國/字 明叟)이 목활자본으로 발간하고자 1831년 지제교(知製敎) 안동김씨 김유헌(金裕憲)에게 부탁하여 후서(後序)를 써 받고, 또한 1831년 무안 현감 한용간(韓用幹)에게 신간발(新刊跋)을 써 받았다. 그리하여 이현일의 발문을 구발(舊跋)로 넣어 목활자본을 만들어 낸 것이다. 김양국의 가승을 보면 다음과 같다. 台角-元福-泰溟-百英-國亨-汝澤- 命祚-禎瑜-亮國이다. 《남포선생집》은 제목으로 보아도 총565편의 많은 글이 수록되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특징이 보인다. 첫째, 작품을 쓴 간지(干支)를 거의 기록해 놓지 않아서 작품 생산의 연보를 쓸 수 없다는 점이 단점이다. 다만 몇 군데 글만 간지를 알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오언고시 〈감흥(感興)〉에서 "나이 14살에 짓다"란 기록 한곳이 있다. 오언고시 132연의 시를 14살에 지었다는 것은 천재성을 보여준 것이다. 둘째, 1831년 간행본을 발간하면서 특히 시에서 "일작(一作)" 즉 어떤 본에는 글이 다르게 써졌다는 것을 13번이나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1831년 이전에 미상(未詳)의 초간본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1831년 간행하면서 무안현감 한용간에게서 써 받은 발문이 "신간발(新刊跋)"로 썼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최초 간행본은 언제쯤 만들어졌을까? 그 해답은 「갈암집 제21권 〉 발」에 써진 이현일이 쓴 〈書南圃金公行狀後〉에 그 해답이 있다. 여기에서 "호남(湖南)의 징사(徵士)인 남포 김공 만일(金公萬鎰)은 죽은 지 이미 28년이 된다. 그 문인인 간의(諫議) 나만성(羅晩成)이 서울 집으로 나를 찾아와 그의 유문(遺文) 3권을 주고"라 한 것을 보면, 남포의 최초 문집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만일(萬鎰)로 하였는데, 만영(萬英)의 오기(誤記) 같다. 그러므로 "구발(舊跋)"은 '나간의(羅諫議/나만성)가 써달라고 한 것을 미루다가 이현일이 1697년 광양현에 이배(移配)한 것으로 보아, 전라도로 귀양 온 이현일을 외손자 나경성(羅景聖)이 찾아가 1698년도에 써 받은 것으로 유추되며, 구발(舊跋)의 기록 내용과 일치한다. 셋째, 문집의 발문(跋文)을 권수(卷首)에 놓아 서문(序文)역할을 하게 한 점이다. 서문(序文)은 대체로 선생 살아생전에 교유했던 문장가에게 받아야 맞는데, 이때를 놓치고서 훗날 후세사람에게 서문을 써 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후 28년만[1698년]에 써 받은 발문을 1831년에 문집 간행하면서 책머리에 넣어 간행하면서 '舊跋'이라고 한 것이다. 선생의 사승(師承)관계는 문집에 특별히 기록해 놓지 않아서 글의 내용이나 족보기록으로 유추해 낼 수밖에 없다. 족보에 보면 아버지 김태흡(金泰洽)은 문장과 학행이 뛰어나, 당세에 향시(鄕試)에서 1등을 하여 여러 번 천거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선생의 유년 스승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여 진다. 한편 문집 서간문 편에 보면 스승을 대체로 유추할 수 있는데, 그런 맥락으로 보면 우산 안방준(安邦俊)과 이수인(李壽仁)을 스승으로 볼 만하다. 안방준은 1573-1654년 대 인물이니 선생의 51년 대선배이다. 서간문 편 첫 번째 수록된 편지가 〈상우산질의서(上牛山質疑書)〉인데 이는 '이때에 우산 안방준이 〈우산답문〉이라는 글을 지었는데, 그 의론이 편벽되었다. 그러므로 선생이 변론을 지어 질의하신 것이다.'라 기록해 놓고 있으며, 글의 내용을 보면 사제 간 자신의 견해를 논하여 스승께 올리는 편지임을 알 수 있다. 이수인(李壽仁)은 1601-1661년대 인물이니 나이로 보아도 선생보다 23살 위이다. 1633년 문과급제하고 전적, 병조좌랑, 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654년 홍문관교리·집의·장악원정·사간·부수찬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경사·성리학에 모두 밝았다. 이수인에게 올리는 답서의 글과 〈부시선생이심경질문(附時先生以心經質問)〉를 보면 사승관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남평과 고향 나주 귀업리에 와서 살 때 배우러 오는 제자들을 물리치지 않고 가르쳤다. 특히 남평에서는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유의(遺意)와 같이 하였는데 문하에 출입하는 자들 중에는 또한 이론가(異論家)의 자제들이 있어 마침내 문생(門生)과 자제(子弟)들이 심히 미워하여 유언비어(流言蜚語)로 헐뜯고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들었기에 마침내 가솔(家率)들을 이끌고 나주(羅州)의 고향으로 왔다. 나주에서도 배우는 자가 끊이지 않으니 그의 평생은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수범이 된 듯하다. 3. 문집 항목별로 특이점 시편을 보면 그는 평생 460제목에 534수의 시를 지었다. 특히 본 유집에는 13세 때부터 지은 시가 수록되었는데 14세 때 지은 오언고체시 〈감흥〉은 총132연으로 그가 시의 천재임을 여기서 보여준다 하겠다. 이현일도 '나이 겨우 훼츤(毁齔 이를 갈 정도의 나이인 7, 8세)에 언어와 행동이 보통의 아이와 달랐고, 나이 12, 3세 때에는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배웠다'라 한 것을 보면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서 벼슬을 제수하여도 나아가지 않고 두문불출 배우면서 가르치는 일에 몰두 한다. 그가 지은 시제(詩題)를 보면 자연의 사물, 현상, 경치 등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쓴 시가 매우 많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자연이 경승(景勝)으로 보인다. 자신의 서재인 구암서실(龜巖書室)에서 이른 바 팔경을 읊었는데, 1경 구암효운(龜巖曉雲), 2경 오령만하(鰲嶺晩霞), 3경 죽포어적(竹浦漁篴), 4경 송암범종(松庵梵鍾). 5경 북록청송(北麓晴松), 6경 동정제월(東亭霽月), 7경 봉악조돈(鳳岳朝暾) 8경 저탄모범(猪灘暮帆)이다. 영암 구림에 종제 해영(海英)이 사는데 아마 해영의 구호정사(鳩湖精舍)에서도 팔경(八景)을 지었으니 1경 서호추월(西湖秋月), 2경 용산락조(龍山落照), 3경 강촌모연(江村暮烟), 4경 전교춘흥(前郊春興), 5경 동원청견(東園聽鵑), 6경 남맥문앵(南陌聞鸎), 7경 학령귀운(鶴嶺歸雲), 8경 구봉만풍(龜峯晩風)이다. 이러한 시문은 장차 향부(鄕富)의 자원으로 상품화가 될 여지가 매우 많다. 소(疏)편을 보면 단 두 편만 수록된 것을 보면 그가 정치 지향적 인물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산릉분곡후언사소(山陵奔哭後言事疏)〉는 인조 승하 후 올린 상소로, 국론이 분열된 현실과 국론 분열이 망국의 길임을 역설한 후,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시기하고 편당하는 구습(舊習)을 일소해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음을 주장한 상소이다. 〈만언소(萬言疏)〉는 지었지만 상소를 올리지 않은 것인데, 1659년 효종에는 기근이 매우 심하였다. 내용 가운데 대동법이 근기(近畿) 지방에는 유효하나 원방(遠方)인 경우에는 적실하지 못하다는 주장과 향병(鄕兵)의 창설 주장 등은 조세(租稅)와 병제(兵制) 개혁 논의가 활발했던 당시 시대상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서간문은 총 16편인데, 스승 안방준과 이수인과의 학문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편지가 돋보인다. 기타 편지를 보면 영암의 효자 신성필(愼聖弼)에게 답하는 편지가 4편이고, 나머지도 제자나 벗들에게 답하는 글이다. 권10은 序(11), 記(9), 跋(3) 편인데, 모두 청탁을 받아 쓴 것이지만 유독 〈금강중수계서(錦江重修禊序)〉는 1665년 남평에서 나주 고향마을로 돌아와 기묘사화 때 결성된 〈금강11인현계〉의 후손들과 수계를 복원하고자 노력하였다. 더더욱 선생의 고조부 김구와 김두는 11인중에 두 분이 참여하였기에 〈금강11인 현계〉에 연민의 정이 많았던 것 같다. 서문에 보면 '기묘사화 때 결성된 수계가 정유재란 때 끊어졌는데, 1603년 조부 김원록(金元祿)이 이를 이어 받았다가 1665년 선생이 남평에서 고향 나주로 와서 계부 김태윤(金泰潤)과 상사 정국현(鄭國賢)과 함께 계칙을 중수하였다.'라 하였으니 그 중수계칙의 서문에 쓴 글이다. 한편 그의 조카 김이상(金履相)은 〈중수계안후서〉를 썼다. 이렇게 계칙을 복원하고 매년 후손 자손들이 만남의 장을 갖게 되었고, 그 후 1869년 나주 도약장(都約長)을 역임한 나동륜(羅東綸)은 이를 이어 받아 금사정(錦社亭)을 개축한 기록이 현재에도 금사정에 현판으로 게첨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비록 미미하기는 하나 〈금강11인 현계〉가 오늘날까지 회장 총무가 지정되어 운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다만 옛일로 간과해서 아니 될 것 같다. 권11은 경의설(經義說)인데 주로 경문(經文)에 관한 것으로 〈중설(中說)〉, 〈중용스장지도(中庸首章之圖)〉, 〈중용수장존양성찰지도(中庸首章存養省察之圖)〉, 〈중용분절변의(中庸分節辨義)〉, 〈중용분위오대절(中庸分爲五大節)〉, 〈덕성문학도(德性問學圖)〉 등 중용(中庸)에 대한 글들이 많다. 중용(中庸)에 관한 도설(圖說)에도 그의 독자적인 해석이 드러난다. 중용수장지도(中庸首章之圖)는 성(性), 도(道), 교(敎)를 주제어로 파악해 도표화 한 것이며 인심도심도(人心道心圖)는 왕백(王白)의 「인심도심도」의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독자적인 시각으로 새롭게 그린 것이다. 이 두 도표는 주자(朱子)와 왕백(王白)의 해석과 일정하게 변별되는 독자성을 갖는다. 그는 또 중용장구 제1장의 존양, 성찰에 해당하는 부분을 중시하여 중용수장존양성찰지도(中庸首章存養省察之圖)를 별도로 그렸는데 존양공부와 성찰공부를 통해 지정(至靜), 지동(至動)에 이르러 치중화(致中和)함을 도표화 한 것이다. 또한 「중용장구」 제27장의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을 존심(存心)과 치지(致知)로 나누어 「덕성문학도(德性問學圖)」를 그렸다. 〈역상소결(易象小訣)〉은 "경술년(庚戌年, 1670년, 현종11)에 여러 학생들을 위하여 저술하기 시작했으나, 병이 위독하여 송괘(訟卦)에서 그치고 말았다"는 부기(附記)가 있다. 특히 경의(經義說)은 곧 경서의 뜻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조 하반기 1894년 식년시를 마지막으로 문과 과거 시험이 폐하게 되자 많은 선비들이 대거 반발하자, 조선정부는 1904년과 1907년 두 번에 걸쳐 성균관에서 경의 묻고 답하는 경의문대(經義問對)의 시험을 치러 인재 발탁을 끝으로 조선조의 과거제도는 막을 내렸다. 권12는 찬(贊), 명(銘), 송(頌), 잠(箴), 상량문(上梁文), 제문(祭文), 묘갈명(墓誌銘) 등 총24편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그가 주장하는 잠(箴/경계)을 보면, 마음을 오로지하여 잡된 것을 들이지 말라는 주일잠(主一箴), 배움을 경계하는 경학잠(警學箴), 자신을 경계하는 자경잠(自警箴), 자신을 새롭게 한다는 자신잠(自新箴), 술을 조심하라는 계주잠(戒酒箴), 여색을 조심하라는 계색잠(戒色箴), 게으름을 조심하라는 계타잠(戒惰箴), 몸가짐에서 족(足), 수(手), 목(目), 구(口), 성(聲), 두(頭), 기(氣), 입立), 색(色)의 아홉 가지에 있어서 군자가 지녀야할 자세를 말하는 구용잠(九容箴)에서 선생의 철학이 무엇이고 행동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권13은 논(論), 전(傳), 격(檄), 의(義)로 총 7편이 수록되어 있다. 〈유기졸격(喩氣卒檄)〉은 지(志)를 장수로 기(氣)를 병졸로 의인화하여 지수(志帥)가 기졸(氣卒)에게 명을 따를 것을 효유하는 격문이다. 〈광나양읍전예격(光羅兩邑戰藝檄)〉은 나주 유생의 입장에서 광주 유생들에게 서로 만나서 문예(文藝)를 겨룰 것을 요청한 격문으로 전쟁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들을 문장에 결부시켜 비유하고 있다. 권14~15는 남교일기(南郊日記)로, 김만영이 남평에서 살고 있을 때인 1649년(효종 즉위) 7월부터 1665년(현종 6) 2월까지의 일기이다. 그는 시편에서 「제일기(題日記)」라는 시를 지어 인간사를 사절(謝絶)하고 소책자에 한가한 생활을 기록한다고 하여 일기를 처음 쓰게 된 배경을 밝혔다. 일기는 매일 매일의 것이 아니라 중요한 날짜의 것만 있다. 이 일기의 하권에는 효종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남인·서인 사이에 있었던 예설 논쟁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당쟁사를 이해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그리고 남평⋅나주 지역 양반들의 동향이나 선생의 지인⋅제자 동향, 그리고 기근이나 세금 등 지역사회의 생생한 모습이 이 일기에 담겨 있다. 권16은 〈경세통전(經世通典)〉으로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ㆍ병(兵)ㆍ승(僧)을 조치하는 데 있어서의 타당한 방도를 논하였다. 부록 권1에는 나만성(羅晩成)이 지은 가장(家狀), 임원(任遠)이 지은 행장(行狀), 이명적(李明迪)이 지은 묘갈명(墓誌銘)이 수록되었고, 말미에 심계석(沈啓錫)이 지은 후서(後敍)가 있다. 부록 권2에는 윤증(尹拯)의 《명재유고(明齋遺稿)》, 남구만(南九萬)의 《약천집(藥泉集)》 등 각종 문헌에 실린 저자 관련 기사와 저자 문인(門人)들의 기록, 남용익(南龍翼)의 《기아(箕雅)》에 실린 저자의 시 등을 수합한 〈서술(敍述)〉과 문봉의(文鳳儀), 나위(羅褘)가 지은 제문, 유명현(柳命賢)이 지은 〈풍산사우춘추향축문(楓山祠宇春秋享祝文)〉이 수록되어 있다. 4. 마무리 글 남포 김만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강11인 현계」의 연구가 같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묘사화 이후 500년이 흘렀고, 선생이 돌아가신 지 2019년 현재 348년이 지났으나 〈금강11인현계〉의 맥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현재는 당악김씨 김승병이 회장이고 나주나씨 나종석이 총무로 일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선생의 사당 풍산사(楓山祠)가 남평에 있었던 것을 2005년경에 나주 귀업리 고향으로 이축된 것이 변화의 모습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은 선생의 유집 속에 녹아있는 선생이 혼이다. 선생의 문집이 학계에서 관심을 두고 번역과 학술적 재조명을 하게 되니 만시지탄이지만 참으로 호남학 연구에 다행한 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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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서 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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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선생집후서 南圃先生集後序[金裕憲] 기자(箕子)1)가 〈홍범(洪範)〉에서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다.[無偏無黨]"2)라고 하였고, "음탕한 벗을 두지 아니한다.[無有淫朋]"3)라고 하였으니, 이는 붕당(朋黨)에 대해 깊이 마음을 쓴 것이다.4) 우리 동방은 기자를 조종(祖宗)으로 삼아서 역사서에서는 "어진 이의 교화[仁賢之化]"라고 일컬었는데,5) 붕당에 대한 의론이 우리나라에 가장 성행하여 너나 할 것 없이 온 나라 사람이 탕평(蕩平)하고 정직(正直)한 길로 나아가는 이가 거의 없는 것은 또한 유독 어째서인가.금성(錦城) 김군 명수(金君明叟)6)가 그의 선조인 남포선생(南圃先生)의 유집(遺集)을 보여주었는데, 단지 두 책(冊) 뿐이었다. 시문(詩文)ㆍ서(書)ㆍ소(疏)ㆍ기사(記事) 몇 편뿐이었으나, 그 언의(言義)의 공정함과 기상(氣像)의 광대함은 거의 근세의 문장에서는 보지 못한 것이었으니, 오호라! 선생은 참으로 홀로 우뚝이 선 호걸지사(豪傑之士)라고 일컬을 만하도다.효종(孝宗)과 현종(顯宗) 무렵에 당론(黨論)이 더욱 거세져 현자(賢者)들까지도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서7) 허둥지둥 쫓아다니는 지경이었는데, 선생은 이러한 때에 숲속에서 도(道)를 강론하여 아름다운 명성이 크게 드러났다. 저마다 문호(門戶)를 세운 자들이 공사(公事)를 빙자하여 좌지우지해서 득세하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선생은 우뚝이 홀로 서서 편벽되지도 않고 치우치지도 않으면서 논의하는 사이에 오직 올바른 것만을 허여하니, 알지 못하는 자들은 떠들썩하게 촉(蜀)나라 해를 보듯이 하였으나,8) 공론(公論)도 또한 이 때문에 선생을 훌륭하게 여겼다.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이 일제히 천거하여 초빙하는 활과 깃발9)이 여러 차례 사립문에 이르렀으니, 성대하도다. 확연(廓然)히 매우 공정하여10) 털끝만큼도 사호(私好)가 없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사람의 마음을 감복시킴이 이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그 마음을 보존함이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시문(詩文)에 발로 된 것이 모두 유연(悠然)히 자득하고 만물과 화락하여 기수(沂水)와 무우(舞雩)의 기상11)이 있었던 것이다. 〈경세통전(經世通典)〉은 간략하고 요약되면서도 광대하였고, 세밀하고 자세하면서도 균평하여 위로는 〈주관(周官)〉의 육전(六典)12)의 뜻을 좇고 아래로는 병농합일(兵農合一)의 부위(府衛)의 제도13)를 잃지 않았다. 〈만언소(萬言疏)〉 한 소장은14) 민생(民生)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 더욱 간곡하였으니, 그 귀결점은 군상(君上)의 한 마음이 천지를 제자리에 있게 하고 만물을 잘 기르는15) 근본이 된다는 것이었다. 비록 둔괘(遯卦)를 만나16) 침묵하고서 꼭꼭 싸서 골수에 간직해 두었으나,17) 가슴 속에 보존하고 있는 것은 대강 알 수 있었다.오호라! 말이란 마음의 발로요, 글은 그 마음이 더욱 드러난 것이다. 이 마음이 한번 편당에 의해 가려지면 시비(是非)에 대해 어두워지고 의론이 협소해지는 법이니, 비록 꾸미고 수식하여 가린다 한들 눈이 있는 자라면 어찌 분별하지 못할 자가 있겠는가.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가 말하기를 "밝으면 통하고, 공정하면 넓어진다.[明則通, 公則溥.]"18)라고 하였으니, 선생은 이에 가까울 것이다. 선생이 비록 당시에는 쓰이지 못하였으나 선생의 글은 반드시 후세에까지 전해질 것이니, 명수는 그날을 기다릴지어다.신묘년(1831, 순조31) 맹하(孟夏 4월)에 지제교(知製敎) 석릉(石陵) 김유헌(金裕憲)19)은 삼가 쓴다. 箕子洪範言無偏無黨。言無有淫朋。盖三致意焉。東人祖箕子。史稱仁賢之化。而朋黨之論。莫盛於我國。滔滔一國。殆無出於平蕩正直之路者。抑獨何哉。錦城金君明叟示其先祖南圃先生遺集。集僅二冊。詩文書疏記事若干篇。而其言議之公正。氣像之廣大。殆近世文字之所未見。嗚呼。先生眞可謂特立豪傑之士矣。孝顯之際。黨論益橫。賢者亦未免褰裳而趍之。先生於是時。講道林樊。華聞大彰。各立門戶者。無不欲藉公左右而輕重焉。先生挺然獨立。不偏不倚。論議之間。惟正是與。不知者譁然如見蜀日。而公論亦以此多之。公卿大夫交口尉薦之。弓旌之招。累及衡門。盛矣哉。非廓然大公無一毫私好。惡有以服人之心者能如是乎。其存心如是。故發之詩文者。皆悠然自得。與物煕煕。有沂水舞雩之氣像。經世通典。?要而廣大。纖悉而均平。上可追周官六典之意而下不失爲府衛兵農之制。萬言一疏。尤惓惓於民生之休戚。而其究則以君上一心。爲位天地育萬物之本。雖其遇遯嘿嘿。緘封骨髓。而胷中所存。槩可見矣。嗚呼。言者心之發而文尤其著者也。此心一蔽於偏黨則是非闇而議論狹。雖粉飾藻繪以揜之。具眼者豈有不卞者哉。周子曰明則通公則溥。先生其庶幾乎。先生雖不用於時。先生之書。必傳於後。明叟其竢之。辛卯孟夏。知製敎石陵金裕憲謹書。 기자(箕子) 기자는 비간(比干)ㆍ미자(微子)와 더불어 은(殷)나라 삼인(三仁) 중의 한 사람이다. 은나라가 멸망한 후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물음에 답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의 대법(大法)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르쳐 주고는 조선의 평양(平壤)으로 옮겨와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홍범(洪範)〉에……없다 〈홍범〉은 《서경》 〈주서(周書)〉의 편명으로, 기자가 지었다고 한다. 참고로, 그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왕도가 평탄하며, 편당함이 없고 편벽됨이 없으면 왕도가 안정되며, 상도(常道)에 위배됨이 없고 기욺이 없으면 왕도가 정직할 것이다.[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無反無側, 王道正直. 會其有極 歸其有極]"라고 하였다. 음탕한……아니한다 위와 마찬가지로, 《서경》 〈주서 홍범〉에 나오는 말이다. 참고로, 그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릇 그 서민이 음탕한 벗을 두지 아니하며, 사람이 사사로운 덕을 두지 아니함은 오직 임금이 극을 짓기 때문이다.[凡厥庶民, 無有淫朋, 人無有比德, 惟皇作極.]"라고 하였다. 깊이……것이다 《사기(史記)》 권84 〈굴원전(屈原傳)〉에 "군주를 보호하고 나라를 일으키며 그것을 반복하려거든 한편 가운데 깊이 마음을 쓸 것인저.[其存君興國, 而欲反復之, 一篇中, 三致意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사서에……일컬었는데 《동몽선습(童蒙先習)》에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기자가 백성들에게 예의를 가르쳐서 여덟 조목의 가르침을 베푸니, 어진 이의 교화가 있었다.[周武王, 封箕子于朝鮮, 敎民禮義, 設八條之敎, 有仁賢之化.]"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금성(錦城) 김군 명수(金君明叟)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다.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서 남을 따르는 것을 형용한 표현이다. 《시경》 〈정풍(鄭風) 건상(褰裳)〉에 "그대가 나를 사랑하여 그리워할진댄, 내 치마를 걷어 올리고서 진수를 건너가리.[子惠思我, 褰裳涉溱.]"라고 하였다. 이 시에서의 치마는 아래옷의 옷자락을 의미한다. 촉(蜀)나라……하였으나 당시에 선생처럼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올곧게 행동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이를 괴이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선생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하였음을 의미한다. 유종원(柳宗元)의 〈답위중립논사도서(答衛中立論師道書)〉에 "굴자의 부에 이르기를 '고을의 개들이 떼를 지어 짖는 것은 괴이한 것을 보고 짖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지난번에 들으니 '용ㆍ촉의 남쪽에는 항상 비가 내리고 해 뜨는 날이 적어 해가 뜨면 개가 짖는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지나친 말이라고 여겼었는데, 지난 6, 7년 전에 내가 남쪽지방으로 온 지 2년째 되던 겨울에 다행히 큰 눈이 고개를 넘어 남월 가운데의 여러 고을에 눈이 덮이니, 여러 고을의 개들이 모두 창황히 짖고 물고 미쳐 달리기를 여러 날 동안 하여 눈이 녹아 없어진 뒤에 이르러서야 그만두니, 나는 그런 뒤에야 전에 들은 바를 믿게 되었노라.[屈子賦曰, 邑犬群吠, 吠所怪也. 僕往聞庸蜀之南, 恒雨少日, 日出則犬吠. 予以爲過言, 前六七年, 僕來南二年冬, 幸大雪踰嶺, 被南越中數州, 數州之犬, 皆蒼黃吠噬狂走者累日, 至無雪乃已然後, 始信前所聞者.]"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여기에서 굴자는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초빙……깃발 원문의 '궁정(弓旌)'은 고대에 선비를 초빙할 때 신물(信物)로 쓰이던 활과 깃발을 가리키는데, 전하여 보통 현자를 초빙하는 예물의 뜻으로 쓰인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召公) 20년 조(條)에 "활로 사를 초빙하고 정으로 대부를 초빙한다.[用弓招士, 用旌招大夫.]"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확연(廓然)……공정하여 정호(程顥)가 《정성서(定性書)》에서 "확연히 크게 공평하여 사물이 오면 순히 응한다.[廓然大公, 物來而順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二程文集 卷3》 기수(沂水)……기상 인욕(人慾)이 없고 천지의 만물과 함께 유행하여 천리(天理)가 충만한 기상을 말한다. 각자 자신의 뜻을 말해 보라는 공자의 명에 따라, 제자 증점(曾點)이 "모춘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을 쓴 어른 대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주관(周官)〉의 육전(六典) 〈주관〉은 《서경》의 편명이다. 육전은 나라를 다스리는 여섯 가지 방면의 법으로, 치전(治典)ㆍ교전(敎典)ㆍ예전(禮典)ㆍ정전(政典)ㆍ형전(刑典)ㆍ사전(事典)을 말한다. 병농합일(兵農合一)의……제도 부위제(府衛制)이다. 서위(西魏)에서 시작되어 북주(北周)와 수(隋)를 거쳐 당(唐)나라 초기까지 실시된 군사 제도로, 부병(府兵)들이 경사(京師)에 와서 숙위(宿衞)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부병제(府兵制)라고도 한다. 당나라 때의 부병은 종신토록 복역하고, 정벌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각자 별기(別騎)와 군량을 마련해서 출정하며, 정기적으로 경사에 숙위하거나 변경에 수자리를 섰다. 《新唐書 卷50 兵志》 〈만언소(萬言疏)〉 한 소장은 〈만언소〉는 구언(求言)에 응하여 1659년(효종10) 효종 승하 후 지어졌으나, 점괘가 불길하여 실제로는 올리지 않은 상소이다. 대동법(大同法)이 근기(近畿) 지방에는 유효하나, 원방(遠方)인 경우에는 적실하지 못하며, 향병(鄕兵)의 창설을 주장하는 내용 등이 담겨있다. 천지를……기르는 《중용장구》 제1장에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잘 길러진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둔괘(遯卦)를 만나 소장을 올리지 못하게 됨을 의미한다. 송(宋)나라 영종(寧宗) 경원(慶元) 연간에 한탁주(韓侂冑)가 승상 조여우(趙汝愚) 등을 무함하여 축출하고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주희가 봉사(封事)를 올려 한탁주의 간사함을 밝히고 조여우의 억울함을 변호하려고 하였는데, 제자들이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올리는 것을 말렸다. 주희가 계속 뜻을 굽히지 않자 채원정(蔡元定)이 점을 쳐볼 것을 권하였다. 점을 쳐보니, 소인이 뜻을 얻은 상황에서 군자는 집 안에 들어앉아 집 안의 일만 돌본다는 의미의 둔(遯)의 가인괘(家人卦)가 나와 상소의 초고를 불태우고 호를 둔옹(遯翁)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周易筮述 卷8 推騐》 《吹劍錄外集》 《朱子大全 附錄 卷6 年譜》 꼭꼭……두었으나 한유(韓愈)의 〈귀팽성(歸彭城)〉에 "상소문을 꼭꼭 싸서 골수에 간직한 채, 그래도 훌륭하다 부질없는 혼자 생각.[緘封在骨髓, 耿耿空自奇.]"이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2》 주자(周子)가……넓어진다 주자는 주돈이(周敦頤)를 가리킨다. 주돈이의 《통서(通書)》 권20 〈성학(聖學)〉에 "밝으면 통하며, 동할 때에 마음이 곧아지면 공정하고, 공정하면 넓어지니, 밝고 통하며 공정하고 넓으면 거의 배울 수 있는 것이다.[明則通, 動直則公, 公則溥, 明通公溥, 庶矣乎.]"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김유헌(金裕憲) 1781~?. 자는 치간(穉間), 본관은 안동이다. 부친은 김수신(金秀臣), 조부는 김성한(金星漢)이다. 상세하지는 않으나, 유학(幼學)으로서 순조(純祖) 4년(180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를 친 기록이 남아있다. 《국조방목(國朝榜目)》 석릉(石陵)은 안동의 옛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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