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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 右龍山先生遺集。其手本六冊矣。今付剞劂。距公沒八年矣。夫子之孫松沙先生。就而刪正。得其半云。精可知耳。宇承何敢容喙於其間。且其問學之至。造道之微。覽斯集者。自有見矣。亦何敢贊一辭乎。雖然。惟孝友于兄弟施。於有政書美君陳如此。聖人引以自道。未嘗有加焉。惟曰是亦爲政。由是觀之。雖聖人爲政。亦不能外。孝友之爲德。其不大哉。之二者苟能焉。其餘不論可也。先生於未子。門子也。親炙最厚宿德。諸弟莫之或先觀其最初。請益不及他。而惟事親之爲問。則於孝也請事斯語。盖早矣。自後服勤性與天道。亦想得以聞焉。其答問可攷。然是非管見所及者。夫孝友則承也。亦曾及見先生之居庭矣。屢空不形。而愉婉滿容處。昆弟怡怡。而接人未嘗不攝以威儀也。今以孝友二者。推先生之德。而揚諸鄕黨。則人無賢不肖。莫有間於斯言也。必矣據其施於家者。而信其行乎國者。證諸書質諸聖人。則因此而論先生之政。亦不爲誣也歟。宇承無見。不足以發先生之蘊。宇炳請爲跋甚勤。敢不竭其有以從之。不文不足辭云。歲乙巳端陽月下澣。四從姪宇承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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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고집(靑臯集) 4卷 2冊 靑臯集 靑臯集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문집 표점영인 靑臯集 李承鶴 新式鉛活字本 2 有界 10行20字 한자 上2葉花紋魚尾 미상 국립중앙도서관 1962년에 간행한 조선 말기의 학자 이승학(李承鶴, 1857~1928)의 문집. 『청고선생문집(靑臯先生文集)』 해제 1. 이승학(李承鶴)의 생애 『청고선생문집(靑臯先生文集)』은 이승학(李承鶴, 1857~1928)의 문집이다.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으로, 1510년(중종 5)에 견성군(甄城君) 이돈(李惇)을 추대해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는 노영손(盧永孫)의 밀고로 전라도 명양현(鳴陽縣)으로 유배되고, 귀양에서 풀려난 후 담양의 대곡(大谷)에 은거한 이서(李緖)의 후손이다. 고조부의 휘는 정로(定魯)로 문장과 덕행이 있었는데 노사 기정진이 행장을 지었다. 증조부의 휘는 세용(世容)으로 효효처사(囂囂處士)이며, 할아버지는 이규형(李奎亨, 1797~1851), 아버지는 석전(石田) 이최선(李最善, 1825~1883)이고 어머니는 평택 임씨로 1857(철종 8)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비(妣)는 성주(星州) 이씨 지평 기대(箕大)의 딸이다. 할아버지 이규형은 노사 기정진과 동학이었으나 학문적으로 두드러진 것 같지 않다. 아버지 석전(石田) 이최선(李最善)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천명(天命)과 인성(人性)의 학문을 듣고 기정진의 문하에서 고제자(高弟子)가 되었다. 고산사(高山祠)에 배향되었다. 이승학은 태어나면서 얼굴이 깨끗하고 빼어났으나 병약하여 옷도 이기지 못할 것 같아 일찍이 학문을 하지 못하고 9세에 비로소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이승학은 9세가 되던 해 어머니를 잃고 12세에 아버지의 스승이기도 한 노사 기정진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중용』을 9일 만에 배송(背誦)하기도 하였다. 관례를 올린 후에 노사 기정진을 뵈니 자설(字說)을 지어주면서 격려하고 학문에 힘쓰게 하였다. 노사 선생 문하에 부자가 모두 동문수학하는 경우는 세상에서 드문 일이라며 칭찬하는 말들을 하였다. 이승학은 종신토록 한결같이 어버이를 편안하게 모셨으며 가끔 어버이의 책을 읽고 길게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렸다. 집안 사람과 대화할 때 부모를 일컬었으니 지극한 효를 아는 사람이었다. 1882년(고종 19) 전라감사 조강하(趙康夏)가 현량을 추천하였는데 벼슬도 하지 않은 몸으로 궁궐로 나아가 책문(策問)을 지어 천하의 이로운 일과 병폐가 되는 일에 관해 언급하였다. 그는 뒤에 문과 초시에 합격하여 임금님이 술을 내렸는데 당시 책문을 태평십이책(太平十二策)에 비교하였다. 그 뒤 1883년 부친상을 당하여 복제(服制)를 다하고 회시(會試)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당시 삼천((森川) 홍승헌(洪承憲), 강암(剛庵) 이용식(李容植),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이당(二堂) 이중하(李重夏), 보당(葆堂) 서병수(徐丙壽) 등과 더불어 도리와 의리를 서로 논하고 문장을 이야기하고 사태를 논란하고 돌아왔다. 그 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같이 환난을 겪으면서 나라를 걱정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란(東學亂)이 일어났을 때는 동학 농민운동에 반대하다가 사돈인 기재(奇宰)와 더불어 전봉준의 포섭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동학군이 그를 죽이려하자 신변의 불안을 느낀 두 집안은 식구들을 데리고 방장산(方丈山)으로 피신해 있다가 되돌아오기도 했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시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까지 간 부친 진사 이최선 공의 우국충정의 정신을 이어받아 1895년(고종 32) 8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왜적 토벌을 기치로 거사, 격문을 전국에 보내어 기삼연(奇參衍), 고광순(高光洵) 등과 함께 호남 최초로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주로 송사의 뜻을 받들어 격문을 지어 전라도 각지에 유포시키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진(陣)을 광주로 옮겨서 세를 불렸는데 송사 기우만과 함께 입궐상소하려 했으나 중앙에서 선유사(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을 보내 해산을 권유하자 그날로 군대를 해산하고 담양(潭陽) 수항산(受降山) 아래 산정리(山亭里)에 들어가 수개월을 지내다 돌아왔다. 이후 의병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피신 생활을 견뎌야 했다. 1895년 겨울에서부터 1896년 여름까지 송사 기우만과 환난을 같이 하였다. 아버지 이최선이 죽은 날 저녁에 경사자집(經史子集) 5천 여권 책과 좋은 물건이 화마(火魔)에 모두 불탔는데 오랜 세월을 두고 당을 다시 짓고 구당(舊堂)에 친히 영서(迎瑞)라고 편액하였으며, 기문을 지어 사실을 기술하였고 전답을 팔아 서적을 처음과 같이 모았다. 이 때문에 집안 살림이 줄어들게 되어 위로 계모와 아래로 집안 식구를 거느리기 어려웠다. 이에 오직 농사에 힘을 써서 8년을 하니 남의 곡식을 빌리지 않게 되었다. 선생님 문하의 일에는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천 리 먼 길 폐백을 싸가지고 혼자 포천(抱川)까지 가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을 뵙고 노사의 신도비를 받아오려 노력하였다. 1907년 아들 광수가 진도에 유배되어 12월에 해배되었다. 1928년 9월에 아들 이광수가 서울에 있었는데 비방을 막을 방법과 꾀를 일일이 지휘하는 한편, 서원을 세울 적에 몸소 역사(役事)를 독려하고, 문하 제현을 배향하며 기쁜 얼굴빛으로 나의 일이 끝났다고 하였다. 1928년 10월 선조의 묘소에 가서 참배하고 돌아와서 병이 났는데 한마디 언급도 하지 못하고 29일 향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승학은 선현들의 유집(遺集) 교정에 많이 참여하였으며 한가한 틈에 명산대천을 유람하였다. 동쪽으로 금강산(金剛山), 서쪽으로 영주산(瀛洲山, 변산), 남쪽으로 천관산(天冠山)과 월출산(月出山), 북쪽으로 명나라 요계(遼薊, 베이징과 만주)에 이르기까지 국내의 이름난 산과 누각을 오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시국에 대해 늘 마음 아파하고 풍속을 보는 것이 답답하다고 여기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서 휘파람을 불며 시를 읊고 돌아왔는데 이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지었다. 이승학은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이당(二堂) 이중하(李重夏) 등과 교류했으며 아버지 이최선 등이 주장하던 이기설(理氣說)의 학문보다는 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실천을 중요시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조하였다. 또한 장전(長田) 마을에 학당을 세워 신학문 보급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아버지 이최선은 병인양요 때 의병을 일으켰고, 아들인 광수는 나인영(羅寅永)이 주도한 오적암살단의 지도부 일원으로, 3·1 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이승학은 한말 의병에 투신하여 자부심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반외세항쟁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한 집안에서 3대가 모두 민족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한말 민족운동사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정부는 공의 공훈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 『청고선생문집(靑臯先生文集)』 구성과 내용 『청고선생문집(靑臯先生文集)』은 이승학(李承鶴, 1857~1928)의 문집이다. 4권 2책의 신활자본으로 1962년 손자 혁(爀)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1962년 기노장(奇老章)의 서문이, 권말에 1962년 여창현(呂昌鉉)의 발문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 시 172수, 권 2에는 책(策) 1편, 「상면암최선생(上勉菴崔先生)」, 「여이영재(與李甯齋)」 등 서(書) 20편, 「사물(四勿)」 등 잡저 10편, 권3~4에 서(序) 6편, 기(記) 11편, 제문 16편, 묘지명 2편, 「서염은유고발(書染隱遺稿跋)」 1편, 부록으로 만사 26수, 제문 2편, 가장(家狀), 묘갈명, 묘표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가장(家狀)은 아들 이광수(李光秀), 묘갈명은 1934년 안동(安東) 김영한(金甯漢), 묘표는 1933년 월성(月城) 김재홍(金在洪)이 지었다. 기노장(奇老章)의 서문에 의하면 이승학은 호걸(豪傑)한 자질로 학문을 닦아서 규모를 넓히고 은미한 뜻을 확장하였으며, 중국의 사대부들이 행한 선왕조의 전례(典禮)를 넓게 펼치니 문사(文辭)가 거침없다고 하였다. 이런 여유로움이 시에 나타나 있으며 필력(筆力)이 굳세고 힘차다고 서술하고 있다. 손자인 춘전(春田) 혁(爀)이 장차 유문을 판각하려고 하면서 두 집안의 세의(世誼)가 돈독하여 서문을 청하였다고 하였다. 권 1에 수록되어 있는 「여년금이십육첨피섬천대책우전정퇴숙우반궁여다사전촉염운(余年今二十六忝被剡薦對策于殿庭退宿于泮宮與多士剪燭拈韻)」은 26세에 추천을 받아 대책을 올리던 때에 성균관의 여러 선비와 운에 따라 지은 시이다. 시의 제목을 살펴보면 동오(東塢) 조의곤(曺毅坤),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 운람(雲藍) 정봉현(鄭鳳鉉), 소아(小雅) 조성희(趙性憙) 등 호남의 명사들과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승학은 간간이 나귀를 타고 동자를 데리고 이름난 산과 누각을 많이 유람했는데, 문일정(聞一亭), 물염정(勿染亭), 망미정(望美亭), 송광사(松廣寺), 송강정(松江亭), 취가정(醉歌亭), 사야당(四也堂), 여존각(如存閣), 몽한각(夢漢閣), 명발헌(明發軒), 석전재(石田齋), 만취정(晩翠亭), 학사루(學士樓) 등에 관한 시가 있다. 「송(松)」, 「은행(銀杏)」, 「추수(楸樹)」, 「행화(杏花)」, 「해당(海棠)」 등 자연을 소재로 읊은 시가 있으며, 「만백석기학사양연(挽栢石奇學士陽衍)」, 「만동오조처사(挽東塢曺處士)」, 「만유석우(挽柳石愚)」, 「만박석음노술(挽朴石陰魯述)」, 「만정운람봉현(挽鄭雲藍鳳鉉)」, 「만기춘담동준(挽奇春潭東準)」 제목에 만(挽)이라고 하였으나, 7언 율시의 시로 만사(挽詞)에 편차하지 않았다. 권2 서(書)에는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홍승운(洪承運), 송사 기우만, 최영조(崔永祚), 이운승(李運昇), 소아(小雅) 조성희(趙性憙), 가아(家兒) 등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상면암최선생(上勉菴崔先生)」, 「여고오천(與高梧泉)」에는 날로 급하게 변해가는 국사(國事)를 개탄하는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두 번째 수록된 「기가아(寄家兒)」에는 증조부 효효처사(囂囂處士)의 행장을 받으러 면암 최익현을 만나러 간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집을 떠난 지 3개월이 되었으며 집안 소식을 들을 길이 없고 내가 어느 곳에 머물렀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5월 13일 양주(楊州) 판곡(板谷)에서 출발하여, 5월 14일에 포천(抱川) 가덕(嘉德)에 도착해 면암 최익현을 만나 노사 선생의 비문과 효효공의 행장을 부탁하려고 머물렀다. 5월 16일 옥병(玉屛)을 향해 가서 2일 동안 가로리(可老里)에 머물렀다. 5월 20일에 다시 가덕에 도착하니 효효공의 행장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으나 노사 선생의 비문은 끝내 사양했다고 전해주고 있다. 책(策) 1편은 1882년 포의(布衣)로 대궐에 들어가 올린 책문으로 천하의 이로운 일과 병폐가 되는 일에 관해 언급하였다. 천지 만물의 이치는 궁(窮)하면 변(變)하고 변하면 통(通)하지만, 결코 도(道)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도가 남기는 것은 다만 시기일 뿐이라고 전제하여, 때를 알지 못하면 일을 성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어서 『주역』의 64괘(卦)의 변하는 이치를 말하였고, 예(禮)에는 상변(常變)이 있고 시(詩)에는 정변(正變)이 있으며, 읍손(揖遜)의 변을 설명하고 정벌(征伐)·재화(財貨)·용병(用兵)·비인재(備人材)·취사(取捨) 등을 낱낱이 들어 진술하였다. 그 요점은 성(誠)자에 있다고 하며 임금께서는 다하여도 변하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정성을 다하지 못함을 근심해야 할 것이요, 변하여도 통하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정성이 순수하고 완전하지 못함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송사 기우만과 주고받은 편지 3편에만 연도(1906, 1907, 1910)가 기재되어 있는데 1906~1910년 사이에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권3에 「영서당기(迎瑞堂記)」, 「석우기(石愚記)」, 「유옥담기(遊玉潭記)」, 「학천재기(鶴泉齋記)」, 「충의재기(忠義齋記)」, 「명학재기(鳴鶴齋記)」, 「남희정중건기(南喜亭重建記)」, 「순고정기(淳古亭記)」, 「육대조고묘비음기(六代祖考墓碑陰記)」, 「선편유인이씨비음기(先騙孺人李氏碑陰記)」, 「의인박씨효열비음기(宜人朴氏孝烈碑陰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영서당기(迎瑞堂記)」의 내용은 아버지 석전 이최선이 죽는 날 영위에서 불이 나 집안에 소장되어 있던 5천 여권의 책과 기타 좋은 물건이 모두 타버리니 오랜 세월을 두고 당을 다시 짓고 이름을 영서당(迎瑞堂)이라고 편액했다는 사실의 전말(顚末)을 기술한 기문이다. 「학천재기(鶴泉齋記)」, 「명학재기(鳴鶴齋記)」, 「남희정중건기(南喜亭重建記)」, 「순고정기(淳古亭記)」는 담양의 누정에 관한 내용으로, 그중 「남희정중건기(南喜亭重建記)」에는 1857년(철종 8) 부사(府使) 황종림(黃鐘林)이 양로(養老)와 교육(敎育)의 목적으로 두 정자를 지었는데, 북(北)은 관어대(觀魚臺), 남(南)은 남희정(南喜亭)이라 하였으며 노인들에게 부여하여 강학(講學)과 향약(鄕約)의 시행처로 사용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무지와유고서(無知窩遺稿序)」에 무지와(無知窩)는 조선 후기의 무신이며 학자 장사식(張師栻)의 시문집을 모아 1931년 장익환이 발행한 문집으로 1926년에 이승학이 작성한 서문이다. 잡저에는 「사물(四勿)」, 「거유(居遊)」, 「지명(知名)」, 「허백실명(虛白室銘)」, 「소변(笑辨)」, 「명교해(名敎解)」, 「시해(視解)」, 「파권론(破權論)」, 「반객설(反客說)」, 「괴구설시동학(愧懼說示同學)」, 「명중양설(名重陽說)」, 「통문(通文)」 등 10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수신(修身)을 위하여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 사항을 적은 「사물잠(四勿箴)」이 있고, 「반객설(反客說)」에서는 농사가 천하의 대본이기는 하지만 호국(胡國)의 사람들과 같이 농사를 짓지 않고 목축과 수렵으로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은 각각 경영하는 업(業)이 다르기 때문이며 선비도 이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허백실명(虛白室銘)」에서 허백실(虛白室)은 청고 이승학이 여가에 독서를 하는 곳이다. 경진년(1880) 봄에 축성하여 겨울에 들어갔으며, 1881년에 허백(虛白)이라고 명명하였고, 1882년에 명(銘)을 지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명교해(名敎解)」에는 '명교(名敎, 유학의 가르침)라는 것은 성인들이 세운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곧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완성하는 근본이 된다. 그 명교의 명회(明晦)에 따라 치란(治亂)의 징후도 달려 있으니 종신토록 이것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제백석기학사문(祭栢石奇學士文)」에는 1897년 3월 17일에 올린 제문으로 동문으로 같은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고 40년을 서로 의지하며 지낸 기학사를 애통해하고 있다. 「제망실박씨문(祭亡室朴氏文)」에는 52년을 같이 산 부인을 위한 제문을 지어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조비유인김씨묘지(祖妣儒人金氏墓誌)」, 「부지하인묘지명(不知何人墓誌銘)」 2편의 묘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부지하인묘지명(不知何人墓誌銘)」은 성명은 정확히 알지 못하나 『명미당집(明美堂集)』에 기록되어 있는 유수(兪叟)의 묘지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염은유고문(書染隱遺稿文)」 발문이 1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염은유고(染隱遺稿)』는 차계일(車啓馹)의 문집이다. 부록으로 김재홍(金在洪), 조덕승(曺悳承), 송태회(宋泰會) 등의 만사(挽詞) 26수와 「출후제승구(出后弟承龜)」, 「외생기낙도(外甥奇洛度)」 제문 2편이 있다. 아들 이광수(李光秀)가 지은 가장(家狀)에는 이승학은 아들에게 이르기를 행장(行狀) 등의 글을 다른 사람에게 청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니 '청고만생이모지묘(靑臯晩生李某之墓)'라고 쓰라고 당부하며 스스로 묘지명 두어 구절을 지어서 아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광수는 장사를 지낼 때 판서 윤용구(尹用求)에게 묘지석에 글씨를 써줄 것을 청하였는데, 여러 선비의 공론에 따라 '조선일사(朝鮮逸士)'라고 썼다. 만생(晩生)이나 일사(逸士)는 모두 '쇠잔한 세상'이라는 뜻인바 만생(晩生)은 자기가 이룬 것이고 일사(逸士)는 공적인 의론이라고 하니, 공의(公議)를 따라 '조선일사'라고 썼다고 하였다. 3. 세부목차 卷 上 詩 : 余年今二十六忝被剡薦對策于殿庭退宿于泮宮與多士剪燭拈韻, 南廟, 鼠相害, 歲除日述懷二首, 傷丙子講話, 詠漢祖, 聞邊報, 春夜二首, 寄郭聖述二首, 東塢曺丈毅坤以詩贈忘拙和呈, 偶吟, 感懷, 難窩吳丈繼洙愛余甚篤告歸不能捨送至十里地感而遂成, 金城吏, 醉後漫筆上小山兩族兄, 悼隣家子, 雜詩, 偶題, 有所思, 采桑, 秋夜, 所處書室甚隘用竹木仍舊稍廣是夜明月滿床欣然賦詩, 學靜子以鷺梅一絶詩見贈謹步五首, 奉和鄭雲藍鳳鉉見寄十一韻, 憫菊圃族兄, 長笑嘆, 聖德山觀音寺行, 老賊行, 奉別權雲卿大雅雲煥, 夢中作, 蘆沙先生挽章, 憶蘆翁用明道哭擴渠韻, 嗟我失依歸, 夢遊崑崙山顚, 閒中得七十韻, 當毗子, 靑靑枝上梧三首, 幽居二首, 辛巳春三月望, 過凰山, 過榮山浦三首, 省先騙墓二首, 是非者, 留別嶺南權二斯文, 擬韓昌黎射訓狐, 寗齋櫃我以詩效嚬以呈, 啄木鳥, 二鳥詩, 記夢, 和卯君除夕韻, 大明梅, 松, 銀杏, 楸樹, 杏花, 海棠, 申將軍故墟, 洛水津, 省外祖騙墓, 和篁林詩社韻五首, 先騙周甲日有感, 人間七夕問, 天上七夕答, 重陽日省先騙墓有感, 丹城訪同門知舊, 三嘉慰艾山鄭哀丈(載圭), 思家二首, 庚寅除夕與同志會山齋, 送別, 自慰, 酒後, 漢館與植齋對話(奇宰), 同松沙陪月皐南洲昆季與山陽昇平諸益遊松廣寺留別(壬辰), 遺愁, 久矣余之廢吟也見陽和日暢遂感而賦詩, 江華鼎足山城, 傳燈寺, 史庫, 慰寗齋, 庚寅開歲之五日嶠南丈人金山石同白水過余謂將遊頭流, 拜月皐趙先生(性家), 寗齋宥還同出貝州路中口號, 留海史安進士登聞一亭, 同安季玉奇松友二益登勿染亭, 次望美亭韻, 同寗齋遊松廣寺, 與牛峯諸益宿松廣寺, 遊仙巖寺, 蝶峙道中, 懷寗齋, 效社諸將韻, 挽栢石奇學士(陽衍), 挽東塢曺處士, 感憤, 訪黃梅泉玹不遇今以書來以詩答, 久雨餘見月, 奉簡寗齋, 謹步小雅趙丈(性憙)寄示韻, 小雅趙丈頗賜款于五家父子付手抄金管錄於迷息托以傳鉢之遠意安知以此從有媛突於其間飜成是非也嘆世情之險濫賦自訟之不敏以三絶志意, 同松沙昆季宿四也堂, 移會夢漢閣, 呈柳石愚, 獨嘆, 松江亭, 醉歌亭, 望美亭, 宿四也堂, 題如存閣, 題夢漢閣, 題明發軒, 謝事, 挽柳石愚, 石田齋珠聯, 次鶴山韻, 讀李白樂府愛其旨深思遠娛其意成句, 出塞曲八首, 擬古十二首, 題晩翠亭, 荒山行, 咸陽學士樓, 哭吳難窩先生, 挽朴石陰(魯述), 挽鄭雲藍(鳳鉉), 挽奇春潭(東準), 登天冠山, 夢裡君王近, 題諸葛澹寧獨釣臺, 江景浦, 謹次外舅興城館閣, 過完山, 到天安三街以寒威留宿, 三五七言, 上元小會, 和朴贊鳳韻, 完山歸路, 鳳山鄕飮酒禮後謹次蘆沙集中韻, 別山陽昇平諸益韻, 到完山留待植齋不至, 訪徐秋帆, 漢館堞坐, 維谷臥松堂與諸益成會, 走與呂氏諸賢善今老白首數公己作九原嗟我之不能營葬許得一壙地若西山之借屛山地眞行禮經殯於我之意也不勝感激于中詩以謝之, 上元日與諸賢留約三山齋望月前日遇雪未行櫃此遣愁 策 : 問天下事無窮而有善變者有不善變者故易日隨時變易以從道所貴乎變易者以其從道也禮之常變詩之正變皆有從道之義歟云云 書 : 上勉菴崔先生, 與李寗齋, 與洪三泉(承運), 與奇松沙(丙午), 答奇松沙(丁未), 與奇松沙(庚戌), 與崔雲齋(永祚), 與李耕齋(運昇), 上趙小雅, 與高梧泉, 上直菴族叔(克善), 答李菊軒(承旭), 答門中僉坐, 與安公瑞, 與安明瑞(啓), 答奇進士(東準), 答李庚萬, 寄家兒, 寄家兒, 寄家兒 雜著 : 四勿, 居遊 知名 好惡 行難, 虛白室銘, 笑辨, 名敎解, 視解, 破權論, 反客說, 愧懼說示同學, 名重陽說, 通文 卷 下 序 : 送魏二斯文赴玉川序, 無知窩遺稿序, 五契案序, 寧齋廬次惜別序, 贈族弟敬順詩序, 書後 記 : 迎瑞堂記, 石愚記, 遊玉潭記, 鶴泉齋記, 忠義齋記, 鳴鶴齋記, 南喜亭重建記, 淳古亭記, 六代祖考墓碑陰記, 先妣孺人李氏碑陰記, 宜人朴氏孝烈碑陰記 祭文 : 祭蘆沙先生文, 祭沙上奇公文, 祭三從敍掌令公文, 祭栢石奇學士文, 祭外叔李小松公文, 祭朴周玉文, 祭高鹿川文, 祭李寧齋文, 祭族叔殷賚文, 祭河瑞下文, 祭從叔石井公文, 先騙回甲日告墓文, 祭阿叔免筵文, 再祭文, 祭亡室朴氏文, 告第二男文 誌 : 祖妣儒人金氏墓誌, 不知何人墓誌銘 跋 : 書染隱遺稿文 附錄 : 挽, 出后弟承龜, 外甥奇洛度, 家狀(李光秀), 墓碣銘(金寗漢 1934), 墓表, 跋(呂昌鉉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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哭亡室朴氏【甲子十月十日】 嗚呼哀哉。歲在癸卯。吾年十八。子之年二十一。吾以是年之臘月二十八日。委禽於子之門。子以乙巳之三月六日。執榛於吾老親之堂。迄玆爲二十二年矣。嗚呼。于歸之越五日。遭吾祖妣喪。而吾以承重發喪。子亦同時被髮。一種無識之議。以爲姑在孫媍不當被髮。則君曰其夫在喪。其妻獨不以喪處乎。情旣如是。禮必與通矣。斷然行之。少不沮縮。莫不服子。見聞之高而義理之精白。自是恭執婦道。不厭食貧。訓誨子女。嚴立法度。余常謂子之性强明有餘。或不利於爲壽矣。其或以此而不永其年耶。嗚呼。子之性又仁愛。見人之奇窮而困迫。則惻隱焉周恤焉。稔爲鄕里之稱譽而猶不得壽。抑亦有不可諶者歟。嗚呼。子以子之親與娚沒而無嗣。恒用痛恨。則今於夜臺冥漠之中。見子之親與娚。而敍此無窮之悲懷耶。嗚呼。二子一女。其將托吾七耋老親。而永瞑地下之目耶。嗚呼痛哉。魭也幼尙不知失孃之爲大恨。而錦嬌則有時乎釀涕向隅。輒至失聲則此豈有人情者之所可忍見乎。守也旣嘗子之糞而又爲子刲指。大有孝名於世。旣葬之後。日必哭省。不以風雪間斷。則子或知是兒之情而慽之乎。此兒資質甚弱。吾憂其過哀滅性。而亦不可禁矣。嗚呼。吾不忍遠葬。而且未占得吉地。權葬於泉峴先壠下丙坐之原。則其於晨昏上。吾高曾考妣及祖考之塋以修婦道乎。嗚呼。吾昔多睡。遭譏於子矣。今或達曉不成寐。則是孰使之然哉。吾欲盡言家事及私情。則吾恐貽慽於子之靈。而吾之胸亦塞矣。嗚呼哀哉。不昧者存。其能格吾之觴。而聽吾之言也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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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梁子平【癸未二月】 出門只瞻望魚山一抹雲而已。魚山下知爲高。隱見魚山。猶眷着不能忘。況於兄乎。春雨養花。萬物句萌。兄湛樂餘體度味經沖裕。況復花朝月夕。徜徉於朝陽臺上。烟霞留約。魚鳥忘機。自有物外眞意。想此固格物中一事。苟若得力於斯。世味淡泊。而淡泊於世味則致知必精。終應有入神底義。可賀。弟日與數三村秀尋行數墨。亦可曰滋味耶。蒙來求我。雖難辭却。只增一場膠擾已矣。不敎則已如。或晏然自居。於敎授之地。當施以矩步。而顧念自家尙於繩尺遠矣。何及人哉。一進拜展。非不宿圖。而姑未暇及。適有此丈便。略此付字甚凌遽。亦草草不成候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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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禮契帖序【乙丑三月】 禮者天理之節文人事之儀。則節則無太過。文則無不及。儀在外而有可據則在內而有可守天理。是人事中理而具於吾心者也。天理在中而著於事。人事在外而根於中。則天理其體也。人事其用也體以敬爲主。用以和爲貴。而敬是喜怒哀樂未發之中。和是發而中節之。和。則少欠敬和。失之流蕩。可不戒哉。余嘗觀樂記曰。禮以道其志。是知人心之感物而動者。不以禮道之。則或煩而亂。或勝而離。終不得其中而與天地同和矣。嗚呼。簠簋俎豆。禮之器也。升降上下。禮之文也。升降上下。旣在我者則。我當爲升降上下之文。而簠簋俎豆固匪我易得。吾何議其爲也。有文而無器。則於勝而野之病痛。又十分過矣。深用慨惜而以筦子倉實知禮之說爲礭論矣。高君時中與吾家弟燾龍。屨及於門而謂余曰。吾嘗欲盡節於冠婚喪祭。而貧不能達志。則與吾子及諸友。出財修禊以備是禮之未備者。則不其美歟。余曰此迺不佞之所深願。而君言先獲矣。於是取陶菴先生四禮便覽之目。名之爲四禮禊。則其目甚美。而抑足道其志於宴安急遽之間矣。噫。禮是四端中一事。則不仁不義不智不信。而獨於禮能之乎。克全心之德而後。克辨事之宜。克辨事之宜然后。克知禮之體用。克知禮之體用而后。分別是非。迺可爲不約之信矣。且以爲禊言之。不克用力於四端。而不敬不和則禊之爲禊。吾不可知也。惟願諸君顧名而思義。原始而克終。與天地同和者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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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友公三【淵台】從我索遊。臨別贈以詩兼作小序【乙丑七月】 李友公三以鉛槧著述。索遊於余。余才術淺短。無以應子之求。亦不可永孤遠來之意。相守四十有九日。講劘日深。與聞於章句者。亦不甚淺尠。余愛其工甚瀟灑。富而有傾囷倒廩之狀。工而極切角磨玉之光。此匪藝術之所可襲得。而抑亦氣質淸粹。心志完厚。英華之發於外者。莫非龢順之積中而然歟。以此而進之。性理之學則優占地步。其爲吾輩相長之道。尤何如哉。程先生有馳獵之技。而進周子之門。成正中之德。呂先生有打破之氣。而見程子之學。爲變化之質。則以子之才。脫去詞章。聞名於大人先生之門。備聞出天之原。則亦何不能之憂也。性理內也詞章外也。舍其內而求之外。此非可惑甚耶。然而以吾之未能告之於子。雖犯恕昏責明之戒。而亦或輔仁之一種道理也歟。且子之文詞工於著述。而未熟於窮硏。則雖文章之學若不大段用力。未易到沖淡底界限也。旣以理學相勉。而復以詞章結之者。子旣着力於詞章。則惟願取舍於斯也。吾於此數段茫未之理會。而旣與子有契。且年長於子十六矣。以嘗聞於師友者而告之。子其勉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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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文 庚子十月二十六日甲子。實維公易簀之再期而前二日任戌。侍生蔚山金斗煥。敢將菲薄之奠。哭告于靈筵曰。嗚呼。公之學問德行。非小子管見所敢形容。而公於吾先人。同庚竹馬。契許之深。情誼之篤。視天倫無間也。時或切磋以相䂓。嘲諧以相謔。未嘗有跬步之違。時月之離者。殆四十年如一日。而有非世俗泛泛膠漆者。比其所景仰。在他人尤一層矣。小子積釁。往在甲午。蘧爾失怙。兩公琢磨之深。資益之厚。於何更覿。悠悠此恨。死未有釋。今於夜臺。文酒相從之樂怳然。如陽界上否。言念及此。安得不失。聖長號徹。天而有隕也。言窮意長。不能寫其萬一。而然字字皆肝膈語也。靈如有知庶。或有以鑑余之至情哉。嗚呼哀哉。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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省先妣墓二首 九歲哀兒今卄五。音容難記文山阡。玄宮一路猶無報。泣血靑山十七年。愁風愁雨復愁水。行路多艱況險津。長歎浮生住不得。百年役役是何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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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非者 從古是非者。紛紜無定時。莫言公案斷。太上自能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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留別嶺南權二斯文 訪我窮居者。驚起問爲孰。報道珍城來。方向珍丘逐。初疑舜卿兄。乃見舜卿族。舜卿吾所畏。交契亦有夙。暄凉未相分。顧中先慙恧。延之自阼階。共升蓬蓽屋。分席敍禮畢。摩挲注雙目。纓絶又肘見。容儀甚淸淑。論議雖不接。所存可以卜。如何輕十舍。迂路入空谷。二君氣味同。無論親與睦。竊言動間。善長牛山木。斧斤無所害。牛羊不敢牧。一念文字事。六經孜孜讀。但恨語默異。如甁如破竹。儘覺起余思。斂袵多敬服。上下千載間。酬酢方爛熟。未意松沙子。來此何神速。盡托一面舊。款款情可掬。是時天中節。此地神共宿。三儒在陳榻。芝香開茅腹。少一豈無歎。伊人思正獨。作書寄舜卿。吾言幸相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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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義堂風雪夜。與諸葛澹寧【夏帛】唱酬。 瑞雪霏霏古柏垂。寒風終夜使人悲。心感劉皇三顧日。義伸魏寇五驚時。天開鳳岫祥雲濕。路隔龍崗疋馬遲。廟宇誰知臨此地。憐君白髮慕思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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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惶惶齋韻 風竹蕭蕭月滿庭。靈臺喚起一翁惺。浸浸長夜人皆醉。皎皎平生我獨醒。事事至誠修己盡。言言修行戒心銘。晩來濯我淸纓足。曲曲滄浪孰有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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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書齋學童詩 源源活水古猶今。淘盡泥沙可得尋。立志當如千仞壁。傳家何必萬籝金。山辭土壤難成大。川合涓流乃就深。少學不勤年老悔。勿令虛送好光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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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莞爾李丈【寅龜壬辰】 丹陽仙窟也。享八十三春秋。翛然淸坐於錦繡山側羽化橋畔美丸。餘暇間往間來。非素禀得仙骨來。烏能叔季見如許。老仙於煙火界然世間。豈有仙哉。意梅華兩門的受源脈。道以貌玉。德以身潤。以之致爾勳。仙緣太重。獲陪光霽。今而後庶幾免生長。東南不知。有程伯淳之責矣。何幸如之重九一別。歲遽抛一。八十三又添一籌矣。依舊康健未老。健之於春寒秋熱。古人之諭。可慮而見其時擬參長潭百許里。鄕飮酒席氣力。計應無損顧。頑齒則少。先生卄七眼昏脚縮如是。可謂操之才不及三十里。愧悚愧悚。尊攘考。猥奉手敎與尾跋。其爲光榮可。但增三倍價哉。然僻隅無書。就緖未期。是懼是懼。道路甚悠。聲聞莫及。庶不遐棄。則或可於省齋宅致存歟。伏冀伏冀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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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亡室朴氏 嗚呼子。眞死也耶。上有吾七耋老親。下有吾弱子穉女。而供養之節托。之何人。撫育之道。付之何地。供養失節。撫育無道。而子其忍死之乎。習知孝慈之道。克敬克仁。豈肯背親捐幼。而樂爲之就木也。始知脩短有命不可違焉。而抑又造化兒殃吾之不仁。禍及於子耶。嗚呼。吾嘗有志於學。而懶散成習。猶未猛省着力。則每規警之箴。如古賢婦斷機之勉焉。吾有事遠役。則必禱之家庭。質之龜筮。以冀事成而來遄焉。吾或處事。少欠義理。則必明言不善處。而歸宿於義理停當之地。賴不獲戾於世。嗚呼。能盡敬於君子。如孺人者能復幾人乎。嗚呼。子之本生親考妣墳墓。一在梅達之岡。一在長者村左麓。梅岡之墓不吉云。然本庭無后。無以議及此道理。故取賣篋笥中尺布。而付之君之從娚。以爲改葬之策。越幾年而後。移葬梅岡墓於長村墓之右。則子之孝思。眞可謂不匱者哉。嗚呼。得痢疾於甲子七月之旬。以翌月之十一日。歸病臥於床四十餘日。而精神不少昏潰。及夫將盡之日。泣請吾老親而爲言曰。吾不能終養老姑。而又使三子女重貽老姑之憂。不孝之罪。實難逭天厭之殃。而其於夭壽之前何哉。又向余而言。殯斂之節。務從儉約。不使家力太盡。是爲養親保幼之道矣。言未終而逝。嗚呼。今焉已矣。規箴之話。敬待之禮。孰從而見聞乎。叢篁風寒之日。短梧月明之夕。徘徊於小阿。彷徨於空庭。則悲酸之思。容可已乎。吾豈不欲奠靈几哭朝夕。而吾親見必歎恨。聞必痛哭。吾恐傷吾病親之懷而不忍焉。知我者以爲親命攸在不知我者以爲情禮俱失。吾豈昧禮無情而然者哉。前旣操文一哭。而言猶未盡。又此申告。其或知也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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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石記 錦城强半是山。山於北者。最磅磚秀麗。北是風氣强勁。故多凝結爲山石歟。山之高大者十數間。於山巨石對峙。若棖闑者然。由門而入。藤蘿蔓絡。泉石爽塏。窈而廓覺。與人境絶異。然人知有山不知有石門。考地誌山經無徵。及石門先生吳公出然后。石門之名。始出於世。於是乎。始知有石門而又不知錦北之有山。石門非古無而今存。特賴先生文章行義光於世然耳。自是稱石門。皆認以爲先生。而孰復知先生之外別有佗石門乎。石門先生歟。先生石門歟。石門於先生。二而一也。石之門於山。其將開先生正大之路。而廣後承羹墻之慕歟。後先生數百年。繩先生武著文行者。吾友德行。其人持心堅進學强。是受先生之風。鍾山石之氣然歟。石門於吳氏式克先後之。先天而天不違。後天而奉天時。則先生之不違。固已著聞。而德行之奉。其將範圍歟。先生比則先天而河圖也。德行比則後天而洛書也。彖象疇範。固亦先後同貫。而莫非一太極一陰陽也。且況大學條目。以先後發明之。先生其克先正先齊。則德行其必物格知至意誠者歟。吳氏先後。其亦寓於石得於斯歟。德行以後石自號。足是羹墻於石門而遹追厥成則眞後也。夫德行勉旃余。故以洛河大學告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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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捿記 夫碧山水正色。山必高而秀。水必深而麗然后。庶幾此色。然兩全兼有。亦不可得。山水秀麗。固難兩兼。況人得而棲於兩碧之間者乎。余嘗過鳴陽之芝谷。背萬壽。面瑞石。一小磵源於萬壽。匯而過瑞石。逶迤屈曲。凡八九節者。如武夷至芝谷深而潭。澄碧泓滀。西有堂號環碧。碧爲前輩取尙雅矣。鄭公守環先生。以環碧爲晩年菟裘。琴書詩禮。至今有餘韻。噫。山水交映。如鏡照物。鏡何嘗有意於照物。物何嘗有意於照鏡。鏡與物皆無意而照之者。固自然山水交映。亦造化自然。非有意也審矣。人之粧占而棲者。未免有心然歟。以有心者居無意之中。逍遙偃仰。把詩書玩其理。講禮樂樂其道。則終必至無意無必無固無我。足以想像吾夫子聞韶忘味之境。與造化游灝氣合。豈不誠熙熙然囂囂然乎。吾友鄭君景一卽松江先生雲仍。守環翁六世孫。自幼種學灑然。有耿介拔俗之標。自號碧棲。棲於碧始未嘗無意於選勝。而近觀動靜折旋。未知山水景一耶。景一山水耶。吾不知其孰爲主孰爲賓。山之碧而標題於左海者。平壤之浮碧。竹樹之映碧。此就樓觀景物中說。豈若棲於碧。而與之相終始同體用。徜徉屈伸。莫知其爲者歟。人之求求諸高遠。而景一近取山水。體驗身心山是陰而有陰中之陽。水是陽而備陽中之陰。動靜相須。體用渾圓。則景一其將得山之靜水之動。體之爲仁智之樂。則豈其所得着題於碧而已哉。山水之高深秀麗。人得而見之。景一之高深秀麗。決不可淺淺求之。其將求於聲色臭味之外。而固當求於詩書禮樂之中歟。以余愚淺。何足斑窺以之記爲。然記者記其實。記其實。則抑可爲日後善摸象者證左乎。玆爲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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