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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1779년 좌목(座目) 고문서-치부기록류-계문서 나주 쌍계정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778년(戊戌)에 작성한 좌목(座目) 처음에 수록된 인원은 61명, 같은 해 7월 8일 동상례에 참석한 인원은 16명, 이듬해인 1779년(己亥) 5월 5일 동상례에 참석한 인원은 17명이며 모든 참석자의 字와 생년을 기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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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년 금안동구좌목(金鞍洞舊座目) 고문서-치부기록류-계문서 나주 쌍계정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712년(壬辰)에 작성한 좌목(座目). 풍산(豊山) 홍이규(洪以珪)가 序를 썼고 정가신(鄭可臣) 포함 175명의 명단이 기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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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638년 9월 13일 관문(關文) 崇德三年九月十三日 關文 086 병조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병자호란(丙子胡亂) 기간에 공로를 세운 수군(水軍) 이득춘(李得春)을 충장위(忠壯衛)로 옮겨 소속시킨 것은 부득이한 조치이므로 그대로 시행할 것.무인년 9월 17일 도착.병조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전에 보냈던 본조(本曹)의 관문에 의거하여 경기수사(京畿水使)가 올린 첩정(牒呈)에 이르기를,'본영(本營) 소속 수군(水軍)의 원래 숫자가 1,076명인데, 그 안에서 난리를 겪으면서 사로잡혀가거나 살해된 숫자와 도망하여 떠돌아다는 숫자가 모두 185명이나 되고 남아있는 숫자는 891명뿐입니다. 이 숫자만으로는 수많은 전선(戰船)과 병선(兵船)의 격군(格軍)을 채우는 것조차도 절반 넘게 부족하여 한 영문의 수군이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마지못한 상황에서 장계(狀啓)를 올려 허락을 받아 본부(本府)의 육군(陸軍)과 출무(出武) 등을 모두 현재 입방(入防)에 보태고 있습니다.146) 그런데도 나머지 각 처에 배정해야 할 숫자조차 여전히 부족할까 염려스럽습니다. 앞서 수군 이득춘(李得春)이 적병(賊兵)이 가득 차있는 가운데 길을 뚫고 가서 장계(狀啓)를 바친 공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겸사복(兼司僕)에 차출하라는 첩문(帖文)을 받은 것만으로도 그 당시에 공로를 갚는 은전에 해당합니다.147) 그리고 대체로 수군은 육군과는 비교할 것이 아니라서, 마지못한 상황이더라도 본래의 군역(軍役)을 다른 사람으로 충원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그의 군역을 면제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득춘이 본조에 바친 문서에 이르기를,「충장위(忠壯衛)로 상번(上番)할 차례를 옮겨 정하였으므로 4대조에 대한 책자를 올려보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재가를 받고 윤허를 받은 문서에 의거하였더라도, 2차례의 상번만 감해주고 본래 수군의 군역을 그대로 유지할지는 본조가 참작하여 처리하는데 달려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연유를 첩정으로 보고하니 각별히 다시 명령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첩정에 의거하여 살펴보았는데, 이 일은 예전에 교동(喬桐)의 겸사복 이득춘이 올린 정장(呈狀)에 따른 것으로, 이것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하여 산성을 지킨 공로로 가설겸사복(加設兼司僕) 첩문을148) 무더기로 발급해준 것과는 비교할 일이 아니다. 애당초 원손(元孫)의 행차가 폐단 없이 나루를 건넜다고 보고하는 장계를 가지고서 적진 가운데를 뚫고 나와 전달한 공로로, 병방승지(兵房承旨)가 어전에서 아뢰어 특별히 겸사복에 제수하기까지 하였으니, 다른 많은 사람들이 세운 공로와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득춘이 원하는 대로149) 충장위로 옮겨 소속시킨 조치는 마지못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전에 보냈던 공문을 모두 살펴서 시행하라."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9월 13일.▶ 어휘 해설 ◀❶ 첩문(帖文) : 관아에서 자격의 인정, 사실이나 권리의 확인, 관직의 임명 등을 위해 발급하던 문서이다. 소과(小科)에 응시할 자격을 인정하는 조흘첩(照訖帖) 및 회시(會試)나 전시(殿試)에 직접 응시할 자격을 인정하는 직부첩(直赴帖) 등은 자격을 인정하던 첩문이다. 조운선(漕運船)이 서울로 올라오던 도중 원산(元山)과 안흥(安興)에서 점고한 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발급하는 봉점첩문(逢點帖文) 등은 사실 확인을 위해 발급하던 첩문이다. 각 관사로부터 물품을 제공받을 권리 및 판상(板商)이 관재(棺材)를 매매할 권리나 삼상(蔘商)이 인삼(人蔘)을 매매할 권리 등을 증명하는 첩문은 권리를 확인해주던 첩문이다. 의금부(義禁府)의 참하 도사(參下都事), 왕자(王子)의 사부(師傅), 왕손(王孫)의 교부(敎傅), 교관(敎官), 감역관(監役官), 별검(別檢), 겸인의(兼引儀), 가인의(假引儀), 수직관(守直官), 수봉관(守奉官), 수위관(守衛官) 등의 구전관(口傳官)을 차정(差定)할 때 발급하던 첩문은 관직의 임명과 관련하여 발급하던 첩문이다.❷ 병방승지(兵房承旨) : 승정원(承政院)의 육방(六房) 중 병방(兵房)을 담당하던 승지(承旨)를 가리킨다. 조선 시대 승정원에는 도승지(都承旨), 좌승지(左承旨), 우승지(右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동부승지(同副承旨) 등 총 6명의 승지를 두었으며, 이들 6명의 승지가 육조(六曹) 또는 육전(六典)의 업무를 분담할 수 있도록 6개의 승지방(承旨房)을 두고 각 승지방마다 승지 1명씩을 배치하였다. 6개의 승지방이란 이방(吏房), 호방(戶房), 예방(禮房), 병방(兵房), 형방(刑房), 공방(工房)을 가리킨다. 승지를 6개의 승지방에 배정하는 방식은 먼저 승지방망단자(承旨房望單子)에 6명 승지의 직명을 열거하고 그 아래에 빈칸을 만들어서 국왕에게 올려 빈칸에 적어준 대로 배정하였다. 승지방의 배정은 순방(巡房)이 원칙이었지만, 업무의 특성이나 상피(相避)의 혐의 등이 있을 경우에는 환방(換房)하였다. 순방이란 승지의 서열에 따라 승지방을 배정하는 것으로, 도승지는 이방, 좌승지는 호방, 우승지는 예방, 좌부승지는 병방, 우부승지는 형방, 동부승지는 공방을 담당하도록 배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환방이란 순방 등으로 배정된 승지방을 서로 바꾸어서 담당하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戊寅九月十七日到付.兵曹爲相考事."前矣行移曹關據使牒呈內, '本營所屬水軍元數一千七十六名內, 經亂擄殺、流亡, 幷多至一百八十五名, 餘存只八百九十一名叱分以. 許多戰、兵船格, 太半不足, 一營舟師, 不成模樣乙仍于, 勢不得已, 本府陸軍及出武等, 竝只狀啓, 時方添防爲乎矣. 其餘各處把定, 猶患不足爲去等. 向前水軍李得春亦, 雖有賊兵熾滿之中穿路狀啓進呈之功, 受兼司僕帖, 其時酬勞之典. 而大槪水軍段, 非如陸軍之比, 不得已待得本定之後, 可免其役是去乙. 得春呈本曹, 「忠壯衛移定番次, 四祖成冊上送.」亦爲臥乎所. 必于依啓下蒙允公事, 二當番叱分減番爲遣, 仍存本役爲乎喩, 事係本曹參酌處置是乎等以. 緣由牒報爲去乎, 各別更良行下爲只爲.'牒呈是置有亦. 相考爲乎矣, 曾因喬桐兼司僕李得春呈狀據, 此非扈從守堞加設司僕帖文混同成給之比. 當初元孫行次無弊渡津狀啓陪持, 穿由賊中得達之功, 至於兵房承旨榻前啓達, 別爲兼司僕除授, 則其與衆類有異. 依願移屬忠壯衛之擧, 勢所不已是置. 前行移, 幷以相考施行向事."崇德三年九月十三日.❶ 加設 : 저본에는 원문이 '設加'로 되어 있으나, 다수의 용례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❷ 願 : 저본에는 원문이 '頉'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021 나덕헌의 장계'와 '030 나덕헌의 첩정' 참조. 이득춘(李得春)의 상언(上言)과 그에 대한 처분은 '069 병조의 관문' 참조. 저본에는 원문 '加設' 2자가 '設加' 2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願' 1자가 '頉'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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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9월 21일 관문(關文) 崇德三年九月二十一日 關文 088 경기관찰사 겸 순찰사 김남중(金南重)이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 임진(臨津)의 부교(浮橋)는 설치하지 말고 선창(船槍)만 설치하며, 칙사(勅使)가 탈 선박은 정자선(亭子船)으로 대령하도록 재가받음.무인년 9월 24일 도착.경기관찰사 겸 순찰사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이번에 도착한 영접도감(迎接都監)의150) 관문에 이르기를,'이번에 재가하신 본도(本道)의 장계(狀啓) 내용을 요약하면,「임진(臨津)의 부교(浮橋) 설치에 대해 양서(兩西)와 똑같이 결정을 받아주소서.」라고 하였다. 그 장계에 의거하여151) 본도감(本都監)이 올린 계목(啓目)에 아뢰기를,「재가받은 문서를 첨부하였습니다. 부교를 설치하는 공사는 평상시에도 매우 중대한 일인데 하물며 지금의 힘으로는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작년에 칙사(勅使)가 행차하였을 때에도 선박으로 건넜으니 어찌 이번에만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남쪽과 북쪽에 선창(船槍)만 설치하고 강을 건널 수 있는 선박을 다수 모아서 행차를 호위하되, 양서의 나루터에도 똑같이 거행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러한 뜻으로 양서의 관찰사에게도 아울러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9월 20일에 우부승지(右副承旨) 신(臣) 이행건(李行健)이 담당하여,「〈아뢴 대로 윤허한다.〉라고 재가받았다.」라고 판부(判付)하였다. 판부의 내용을 잘 살펴서 시행하라.'라고 하였다. 작년의 등록(謄錄)을 가져다가 살펴보니, 칙사가 타는 선박은 정자선(亭子船)으로 정돈하여 대령하였고, 선박을 끌어당기는 칡줄은 준비하지 않았으며, 선박의 원래 숫자는 40척이었다. 각 고을에 전처럼 분담하여 배정하여 통지하였는데, 40척은 다 사용할 필요는 없으나 두목(頭目)의 숫자가 얼마나 될지를 예상할 수 없으므로 우선 작년의 예대로 통지하였다. 칡을 채취할 군사는 전례에 따라 상번(上番)할 차례가 된 수군(水軍)으로 차출하여 사역하라. 살펴서 시행하라."숭덕 3년 9월 21일.▶ 어휘 해설 ◀❶ 영접도감(迎接都監) : 중국의 칙사(勅使)를 접대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설치하던 권설아문(權設衙門)이다. 도감(都監)은 일정 기간 한시적으로 특정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하는 관사에 붙이던 것으로, 임무를 완료하고 나면 폐지하였다. 영접도감은 칙사의 접대를 총괄하는 아문으로, 도제조(都提調), 제조(提調), 도청(都廳), 낭청(郞廳) 등을 두었다. 그 외에도 칙사의 접대를 위해 원접사(遠接使), 관반사(館伴使), 반송사(伴送使) 등을 차출하였는데, 원접사는 칙사가 압록강을 건너오면 의주(義州)에서 영접하여 서울까지 동행하며 칙사의 접대 및 정부와의 연락을 총괄하였고, 관반사는 칙사가 서울의 관소(館所)에 머무르는 동안 숙소와 식사 접대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반송사는 칙사가 돌아갈 때 서울에서 의주까지 동행하며 칙사의 접대 및 정부와의 연락을 총괄하였다. 영접도감은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를 제외하고 태조대부터 고종대까지 조선 시대 전 기간에 걸쳐 나타난다. 칙사가 돌아가고 나면 영접도감은 폐지되었다. 중국의 장수나 지위가 낮은 관원이 조선에 파견되었을 때에는 이들을 접대하기 위해 영접도감보다 격이 낮은 접대도감(接待都監)을 설치하였다. 접대도감은 대부분 선조대에서 인조대까지 보이고, 그 이후에는 효종 5년(1654)에 1차례만 보인 뒤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명(明)나라의 장수나 차관(差官), 청나라의 호행장(護行將)이나 감군(監軍) 등을 접대하기 위해 접대도감이 설치되었다. 『승정원일기』 인조 18년 윤1월 14일과 23년 4월 22일 기사를 참고하면, 접대도감은 영접도감에 비해 책임 관원의 자급이 낮고 숫자도 적었던 것을 알 수 있다.❷ 등록(謄錄) : 각 아문(衙門)과 영문(營門)에서 수발한 문서를 베껴 적어서 책자 형태로 만든 것을 가리킨다. 각 아문과 영문이 상호 간에 주고받은 문서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폐기하였기 때문에 후일 참고할 자료로 남기기 위해서 해당 문서를 일일이 베껴 적어서 책자로 만들었는데, 이를 등록이라고 하였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각사등록(各司謄錄)』, 『훈국등록(訓局謄錄)』, 『일기청등록(日記廳謄錄)』, 『선전관청등록(宣傳官廳謄錄)』 등이 그러한 종류이며, 본서인 『충열공삼도통어영록(忠烈公三道統禦營錄)』도 등록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❸ 두목(頭目) : 칙사(勅使)의 수행원 중 하나이다. 『통문관지(通文館志)』 「사대(事大)」 〈칙사행(勅使行)〉에 의하면, 칙사의 행차는 정사(正使) 1명, 부사(副使) 1명, 대통관(大通官) 2명, 차통관(次通官) 2명, 근역(跟役) 18명으로 구성되며, 그중 근역 18명은 정사에게 8명, 부사에게 6명, 대통관과 차통관에게 각 1명씩 배정되었다. 『인조실록』 24년 1월 10일(무오) 기사에 의하면, 당시 3명의 칙사가 나왔을 때 함께 나온 두목은 1등 두목이 10명, 2등 두목이 8명, 3등 두목이 16명이었다. 戊寅九月二十四日到付.兼巡察使爲相考事."節到付迎接都監關內, '節啓下敎本道狀啓內節該, 「臨津浮橋, 兩西一體定奪.」事據啓目, 「粘連啓下是白有亦. 浮橋之役, 在平時, 極爲重大, 況今日之力乎! 上年勅使之行, 旣以船渡, 今何獨不然! 南、北邊, 只設船槍, 多聚渡涉船護行爲白乎矣, 兩西津頭, 亦當一體爲之, 宜當. 此意, 兩西觀察使處, 幷以行移, 何如?」 崇德三年九月二十日, 右副承旨臣李行健次知, 「啓, 〈依允.〉」爲有置有等以. 敎旨內事意, 奉審施行向事.' 取考上年謄錄, 則勅使所騎船, 亭子船整齊爲有乎旀, 引船葛索, 不爲措備爲遣, 船隻元數, 四十隻是置. 各邑良中, 依前分定知委爲去乎, 四十隻, 不必盡用, 而頭目多少, 不可豫料乙仍于, 姑依上年例知委爲去乎. 採葛軍乙良, 依前例, 當番水軍以使喚是昆. 相考施行向事."崇德三年九月二十一日.❶ 迎接 : 저본에는 원문이 '接待'로 되어 있으나, 인조대 『승정원일기』와 『인조실록』의 이 시기에 접대도감(接待都監)은 설치되지 않고 영접도감(迎接都監)만 설치되었던 기록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❷ 據 : 저본에는 이 뒤에 원문 '都目' 2자가 더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삭제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迎接' 2자가 '接待' 2자로 되어 있으나, 인조대 『승정원일기』와 『인조실록』의 이 시기에 접대도감(接待都監)은 설치되지 않고 영접도감(迎接都監)만 설치되었던 기록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본서의 '116 이행원(李行遠)의 제사(題辭)', '117 이행원의 관문(關文)', '122 이행원의 관문'에도 모두 영접도감으ㅡ로 기록되어 있다. 저본에는 원문 '據' 1자 뒤에 '都目' 2자가 더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삭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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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11월 7일 전문(箋文) 崇德三年十一月初七日 箋文 092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보낸 전문(箋文): 인조의 탄신을 하례함.절충장군(折衝將軍) 경기수군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 겸(兼) 교동도호부사(喬桐都護府使)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 신(臣) 나덕헌(羅德憲)이153) 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11월 7일 탄신(誕辰)을 맞아 삼가 전문(箋文)을 올려 하례를 드립니다. 신 덕헌은154) 참으로 기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말씀을 올립니다."삼가 아룁니다. 양(陽)의 기운이 돌아오는 계절에 속하여155) 임금의 덕을 누리는 것에 부합하고, 탄생하신 날이 돌아와 새로운 책력(冊曆)을 반포하는 경사와 합치되니,156) 동물과 식물이 똑같이 기뻐하고 신하와 백성은 기쁨이 넘칩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주상전하께서는【홍색 찌지[紅籤]에 적었다.157)】 도덕(道德)이 있는 자손으로서 비교할 상대가 없는 무공(武功)을 세우시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 세상을 구제하는 아름다운 시기를 만나 하늘을 본받아 복을 똑같이 누리시고, 광대하고 심원한 어진 소문을 드날려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합니다. 이에 탄생하신 계절에 이르러 창대한 상서로움을 뚜렷이 받으셨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외람되이 재주 없는 사람으로서158) 경기의 진보(鎭堡)를 지키고 있는데, 영원히 귀감이 될 만한 글을 기록해서 바쳐야 하지만 당나라 신하와 같은 충성을 바치지 못하고,159) 참으로 만세를 부르며 송축하여 한(漢)나라 궁전에서 축원하던 마음을 멀리서나마 표현합니다.160) 신이 하늘 같은 성상을 바라보며 매우 감격스럽고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161) 삼가 전문을 올려 하례를 드립니다."숭덕 3년 11월 7일에 절충장군 경기수군절도사 겸 교동도호부사 삼도통어사 신 나덕헌이162) 삼가 전문을 올립니다. 折衝將軍京畿水軍節度使兼喬桐都護府使三道統禦使臣羅德憲, 恭遇崇德三年十一月初七日誕辰, 謹奉箋稱賀者. 臣德憲誠歡誠忭稽首稽首上言."伏以. 序屬雷復, 載符龍德之亨; 日回虹流, 聿叶鳳紀之慶, 歡均動植, 喜溢臣民. 恭惟主上殿下[紅籤], 有道湯孫, 無競武烈, 履開濟之嘉會, 憲天齊休; 騰廣淵之仁聲, 與民同樂. 爰屆誕彌之節, 顯膺昌熾之祥. 伏念臣猥以謏才, 叨守畿鎭, 錄千秋而獻鑑, 未效唐臣之藎忠; 信萬歲以呼嵩, 遙申漢殿之祈祝. 臣無任望天仰聖激切屛營之至. 謹奉箋稱賀以聞."崇德三年十一月初七日, 折衝將軍京畿水軍節度使兼喬桐都護府使三道統禦使臣羅德憲謹上箋.❶ 德憲 : 저본에는 원문이 누락되어 있으나, 『전율통보(典律通補)』 「별편(別編)」 〈본조문자식(本朝文字式)〉 '진전식(進箋式)'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❷ 德憲 : 저본에는 원문이 '〇〇'으로 되어 있으나,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❸ 謏 : 저본에는 원문이 '謝'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❹ 激 : 저본에는 원문이 '謝'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 및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❺ 德憲 : 저본에는 원문이 '〇〇'으로 되어 있으나,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德憲' 2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전율통보(典律通補)』 「별편(別編)」 〈본조문자식(本朝文字式)〉 '진전식(進箋式)'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德憲' 2자가 '〇〇'으로 되어 있으나,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양(陽)의 기운이 돌아오는 계절'은 동짓달인 11월을 가리킨다. 고대에는 『주역(周易)』의 괘(卦)를 12개월의 각 달과 연결시켰는데, 그중 동지가 든 11월은 복괘(復卦)에 해당하였다. 복괘는 상괘(上卦)가 곤괘(坤卦)이고 하괘(下卦)가 진괘(震卦)로, 6개의 효(爻) 중 맨 아래의 효만 양효(陽爻)이고 나머지 다섯 개의 효는 모두 음효(陰爻)이다. 복괘의 형상이 음(陰)의 기운이 극성한 가운데 양의 기운 하나가 아래에서 싹트는 것처럼 생겼으므로, 양의 기운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동짓달을 복괘로 표현했던 것이다. 중국의 고대에는 한 해의 시작을 12지 중 어느 달에 시작하느냐에 따라 3가지로 나뉘었다. 주(周)나라는 하늘을 상징하는 자월(子月 11월)에 시작하였고, 은(殷)나라는 땅을 상징하는 축월(丑月 12월)에 시작하였으며, 하(夏)나라는 사람을 상징하는 인월(寅月 1월)에 시작하였다. 공자(孔子)는 그중 사람을 위주로 하는 하나라의 책력(冊曆)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대에는 양의 기운이 생겨나는 동지(冬至)의 시작을 11월의 동짓날 자시 반(子時半)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라 조선 시대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동짓날에 책력을 만들어 바치면 국왕이 동문지보(同文之寶)를 찍어 신하들에게 나눠 주었으며, 그 책력을 '동지력[冬至曆]'이라고 불렀다. 『論語』 「衛靈公」; 『諸家曆象集』 「曆法」 〈性理大全〉; 『星湖全集』 「答禹大來」 〈甲戌〉; 『東國歲時記』 「十一月」 〈冬至〉; 『海東竹枝』 「名節風俗」. 전문(箋文)의 문서 형식에 의하면 '주상전하(主上殿下)' 또는 '존호(尊號)+주상전하(主上殿下)'는 줄을 바꾸어서 적되, 홍색 찌지[紅籤]에 적어서 붙였다. 『典律通補』 「別編」 〈本朝文字式〉 '進箋式'; 이강욱, 『조선시대문서개론』 상-신민의 상달문서-, 은대사랑, 2021, 475~479쪽. 저본에는 원문 '謏' 1자가 '謝'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당(唐)나라의 재상 장구령(張九齡)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이 간신의 모함을 받아 쫓겨난 뒤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이 고사에 따라 당(唐)나라의 신하들이 청동으로 거울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쳤다. 거울이 모든 사물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임금도 충신과 간신을 잘 구분하라는 의미였다. 현종(玄宗) 때에도 천추절(千秋節)에 신하들이 모두 청동 거울을 바쳤으나, 당시의 재상 장구령만은 거울 대신 『천추금감록(千秋金鑑錄)』을 지어서 바쳤다. 『천추금감록』은 임금의 마음을 깨우쳐서 좋은 정치를 베풀기를 바라는 내용이었다. 『新唐書』 卷126 「張九齡列傳」. 한(漢)나라 무제(武帝)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무제가 화산(華山)에서 숭산(嵩山)에 이르러 제사를 지낼 때 이졸(吏卒)들이 모두 어디선가 세 차례 만세 부르는 소리를 들은 듯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호숭(呼嵩)'은 임금이 장수하기를 축원하는 의미로 쓰였다. 『漢書』 卷6 「武帝紀」. 저본에는 원문 '激' 1자가 '謝'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 및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德憲' 2자가 '〇〇'으로 되어 있으나,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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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638년 11월 17일 전문(箋文) 崇德三年十一月十七日 箋文 093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보낸 전문(箋文): 동지(冬至)의 명절을 맞아 하례함.절충장군(折衝將軍) 경기수군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 겸(兼) 교동도호부사(喬桐都護府使)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 신(臣) 나덕헌(羅德憲)이163) 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11월 17일 동지(冬至) 명절을 맞아 삼가 전문(箋文)을 올려 하례를 드립니다. 신 덕헌은164) 참으로 기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말씀을 올립니다."삼가 아룁니다. 일기(一氣)가 순환하여 양(陽)의 기운이 돌아오는 자시(子時)의 밤에 이르고,165) 오복(五福)이 극(極)에 돌아와 거듭 명하는 복을 크게 받으니166) 태양은 빛을 더하고 상서로운 구름은 채색을 바칩니다. 삼가 생각건대, 주상전하께서는【홍색 찌지[紅籤]에 적었다.167)】 비교할 대상이 없는 공적을 세우시고168) 백성에게 군림할 만한 총명을 지니시어,169) 오래도록 유지하는 지극한 정성은 높은 하늘과 두터운 땅에 짝이 되고170) 중화(中和)의 성대한 덕은 생성된 만물을 감싸며,171) 음률(音律)은 황종(黃鍾)에 다시 돌아오고 경사(慶事)는 붉은 병풍에 두루 넘칩니다.172) 삼가 생각건대, 신이 은덕을 입고 지방에서 지키고 있으므로 하례하는 반열에 나아갈 수는 없으나, 북쪽 궁궐을 향해 마음을 기울여 가까이 계신 것처럼 공경하고,173) 남산(南山)처럼 장수하시기를 축원하여174) 티끌만큼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이 하늘같은 성상을 바라보며 매우 감격스럽고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전문을 올려 하례를 드립니다."숭덕 3년 11월 17일에 절충장군 경기수군절도사 겸 교동도호부사 삼도통어사 신 나덕헌이175) 삼가 전문을 올립니다. 折衝將軍京畿水軍節度使兼喬桐都護府使三道統禦使臣羅德憲, 恭遇崇德三年十一月十七日冬至令節, 謹奉箋稱賀者. 臣德憲誠歡誠忭稽首稽首上言."伏以. 一氣循環, 爰屆子夜之復; 五福歸極, 誕膺申命之休, 化日增輝, 祥雲呈彩. 恭惟主上殿下【紅籤.】, 功烈無競, 聰明有臨, 悠久至誠, 配兩儀之高厚; 中和盛德, 囿萬物之生成. 律更回於黃鍾, 慶彌衍於丹扆. 伏念臣霑恩外守, 阻趨班行, 向北關而傾心, 弗違咫尺; 祝南山以齊壽, 庶補涓埃. 臣無任望天仰聖激切屛營之至. 謹奉箋稱賀以聞."崇德三年十一月十七日, 折衝將軍京畿水軍節度使兼喬桐都護府使三道統禦使臣羅德憲.❶ 德憲 : 저본에는 원문이 누락되어 있으나, 『전율통보(典律通補)』 「별편(別編)」 〈본조문자식(本朝文字式)〉 '진전식(進箋式)'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❷ 德憲 : 저본에는 원문이 누락되어 있으나,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❸ 臣羅德憲 : 저본에는 원문이 누락되어 있으나,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德憲' 2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전율통보(典律通補)』 「별편(別編)」 〈본조문자식(本朝文字式)〉 '진전식(進箋式)'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德憲' 2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일기(一氣)'는 천지 만물을 구성하는 본원(本原)을 가리키고, '자시(子時)의 밤'은 동짓날 밤의 자정을 가리킨다. 고대에는 양의 기운이 생겨나는 동지(冬至)의 시작을 11월의 동짓날 자시 반(子時半)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라 조선 시대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동짓날에 책력을 만들어 바치면 국왕이 동문지보(同文之寶)를 찍어 신하들에게 나눠 주었으며, 그 책력을 '동지력[冬至曆]'이라고 불렀다. 『諸家曆象集』 「曆法」 〈性理大全〉; 『星湖全集』 「答禹大來」 〈甲戌〉; 『東國歲時記』 「十一月」 〈冬至〉; 『海東竹枝』 「名節風俗」. 『서경(書經)』의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서경』 「주서(周書)」 〈홍범(洪範)〉에서는 장수[壽], 부귀[富], 강녕(康寧), 덕을 좋아함[攸好德], 천수를 누리고 죽음[考終命], 이상 다섯 가지를 오복이라고 하였다. 한편 『서경』 「주서」 〈홍범〉에서는 '그 극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어 그 극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會其有極歸其有極]'라고 하였는데, '극(極)은 황극(皇極)을 가리키는 말이고, 황극은 '임금이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준칙'을 가리킨다. 『서경』 「우서(虞書)」 〈익직(益稷)〉에서는 '하늘이 거듭 명하여 아름답게 할 것이다.[天其申命用休]'라고 하였는데, 이는 우(禹)가 순(舜)임금에게 임금의 자리에 있는 것을 삼가라고 말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임금과 신하가 백성이 바라는 정치를 하면 하늘의 명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전문(箋文)의 문서 형식에 의하면 '주상전하(主上殿下)' 또는 '존호(尊號)+주상전하(主上殿下)'는 줄을 바꾸어서 적되, 홍색 찌지[紅籤]에 적어서 붙였다. 『典律通補』 「別編」 〈本朝文字式〉 '進箋式'; 이강욱, 『조선시대문서개론』 상-신민의 상달문서-, 은대사랑, 2021, 475~479쪽. 『시경(詩經)』 「주송(周頌)」 〈청묘지십(淸廟之什)〉 집경(執競)에 '강함을 잡으신 무왕이여! 비교할 대상이 없는 공렬(功烈)이도다.[執競武王無競維烈]'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31장에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인이라야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백성의 위에 군림할 수가 있다.[唯天下至聖爲能聰明睿智足以有臨也]'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중용장구』 제26장에 '지성(至誠)'의 속성을 설명하면서 나온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지성은 중단 없음[不息], 오래 지속[久], 외부 증명[徵], 장기 유지[悠遠], 넓고 두터움[博厚], 높고 밝음[高明]의 속성을 지니며, 그중 넓고 두터운 속성은 만물을 싣는 땅과 짝이 되고, 높고 밝은 속성은 만물을 덮어주는 하늘과 짝이 되며, 장기 유지하는 속성은 만물을 이루어주어 무궁하다고 하였다. 『중용장구』 제26장에 '희로애락이 드러나지 않은 것을 중이라 하고, 드러났으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 하니,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라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 중화를 이루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길러진다.[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發而皆中節謂之和中也者天下之大本也和也者天下之達道也致中和天地位焉萬物育焉]'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황종(黃鍾)'은 12율려(律呂) 중의 하나로, 동짓달인 11월을 상징하였다. 그러므로 '음률(音律)은 황종(黃鍾)에 다시 돌아오고'라고 한 것이다. '붉은 단풍[丹扆]'은 임금이 앉는 자리 뒤에 둘러치는 붉은 빛깔의 병풍으로, 임금을 가리킨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9년에 '천자의 위엄이 면전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天威不違顏咫尺]'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나덕헌이 지방에 있지만 가까이 있는 것처럼 임금을 공경한다는 의미로 인용한 것이다. 『시경』 「소아(小雅)」 〈녹명지십(鹿鳴之什)〉 천보(天保)에서 '남산처럼 장수하소서.[如南山之壽]'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남산(南山)은 주(周)나라 도성인 호경(鎬京)의 남쪽에 있는 종남산(終南山)을 가리킨다. 저본에는 원문 '臣羅德憲' 4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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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638년 11월 25일 전문(箋文) 崇德三年十一月二十五日 箋文 094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보낸 전문(箋文): 인조가 가례(嘉禮)를 올려 중전(中殿)을 맞이한 경사를 하례함.절충장군(折衝將軍) 경기수군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 겸(兼) 교동도호부사(喬桐都護府使)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 신(臣) 나덕헌(羅德憲)이176) 삼가 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12월 3일을 맞아 납폐(納幣)의 예로 상서로움을 정하고177) 경사스러운 복을 크게 받으니, 신이 기쁨을 금치 못하여 삼가 전문(箋文)을 올려 하례를 드립니다. 신 덕헌은178) 참으로 기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말씀을 올립니다."삼가 아룁니다. 만물이 하늘의 도에서 시작하였으나179) 땅의 도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는데,180) 납폐의 예로 상서로움을 정하여 중전(中殿)의 바른 자리를 보게 되니, 봉황이 그려진 임금의 병풍에 기쁨이 넘치고 꿩의 깃으로 장식한 중전의 옷에 빛이 납니다. 삼가 생각건대, 주상전하께서는【홍색 찌지[紅籤]에 적었다.181)】 우(虞)나라의 순(舜) 임금처럼 형벌을 살피시고182) 주(周)나라 문왕(文王)처럼 교화를 이루셨으며,183) 큰 덕으로 반드시 그에 적합한 자리를 얻으시고184) 삼강(三綱)을 밝히셨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여185) 살 곳을 잃어버린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에 육례(六禮)를 거행할 때가 되니 참으로 온갖 복이 일어날 것입니다.186) 삼가 생각건대, 신이 아득히 먼 궁궐을 한껏 바라보기만 할 뿐인 지방의 곤수(閫帥)로 있는 몸이지만,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처럼 다행히 천 년의 복을 만났으니187) 강한(江漢)과 여분(汝墳)처럼 이남(二南)의 세상이 온 것을 송축합니다.188) 신이 하늘같은 성상을 바라보며 매우 감격스럽고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전문을 올려 하례를 드립니다."숭덕 3년 11월 25일에 절충장군 경기수군절도사 겸 교동도호부사 삼도통어사 신 나덕헌이189) 삼가 전문을 올립니다. 折衝將軍京畿水軍節度使兼喬桐都護府使三道統禦使臣羅德憲, 恭遇崇德三年十二月初三日, 文定厥祥, 誕膺慶福, 臣不勝慶抃, 謹奉箋稱賀者. 臣德憲誠歡誠忭稽首稽首上言."伏以. 乾資于始, 久欠坤道之有終; 文定厥祥, 聿看壼儀之正位, 喜溢鳳扆, 光生翟褕. 恭惟主上殿下【紅籤.】, 虞舜觀刑, 周文成敎, 大德必得位, 致三綱之克, 修治國自齊家, 無一物之失所, 玆當六禮之擧, 實是萬福之興. 伏念臣目極叢霄, 身居外閫, 關雎、麟趾, 幸逢千載之休; 江漢、汝墳, 佇頌二南之天. 仰聖激切屛營之至. 謹捧箋稱賀以聞."崇德三年十一月二十五日, 折衝將軍京畿水軍節度使兼喬桐都護府使三道統禦使臣羅德憲.❶ 德憲 : 저본에는 원문이 누락되어 있으나, 『전율통보(典律通補)』 「별편(別編)」 〈본조문자식(本朝文字式)〉 '진전식(進箋式)'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❷ 德憲 : 저본에는 원문이 누락되어 있으나,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❸ 臣羅德憲 : 저본에는 원문이 누락되어 있으나,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德憲' 2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전율통보(典律通補)』 「별편(別編)」 〈본조문자식(本朝文字式)〉 '진전식(進箋式)'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지십(文王之什)〉 대명(大明)에 '납폐의 예로 상서로움을 정하시고, 위수에서 친영하였다.[文定厥祥親迎于渭]'라는 말을 인용한 것으로, 인조가 16년(1638) 12월 3일에 계비(繼妃)인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趙氏)와 가례(嘉禮)를 치른 일을 가리킨다. 『인조실록』 16년 10월 5일(갑오); 『승정원일기』 인조 16년 12월 3일. 저본에는 원문 '德憲' 2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주역(周易)』 건괘(乾卦) 단전(彖傳)에 '위대하도다! 건원이여, 만물이 여기에서 시작하니, 이에 하늘의 일을 총괄한다.[大哉乾元萬物資始乃統天]'라는 말을 인용한 것으로, 건원(乾元)은 임금의 큰 덕을 가리킨다. 인조의 정비(正妃)인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가 인조 13년(1635) 12월에 출산하자마자 죽은 대군(大君) 때문에 슬퍼하다가 갑자기 승하한 뒤로 왕비의 자리가 오래 비어있었던 일을 가리킨다. '땅의 도[坤道]'는 왕비의 도를 말한다. 『인조실록』 13년 12월 5일(신사)·9일(을유). 전문(箋文)의 문서 형식에 의하면 '주상전하(主上殿下)' 또는 '존호(尊號)+주상전하(主上殿下)'는 줄을 바꾸어서 적되, 홍색 찌지[紅籤]에 적어서 붙였다. 『典律通補』 「別編」 〈本朝文字式〉 '進箋式'; 이강욱, 『조선시대문서개론』 상-신민의 상달문서-, 은대사랑, 2021, 475~479쪽. 『서경(書經)』 「우서(虞書)」 〈순전(舜典)〉에는 우(虞)나라 순(舜) 임금이 엄격한 형벌의 원칙을 정하면서도 관용을 베풀었던 일을 기록하였는데, 이를 인용하여 인조의 덕을 칭송한 것이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덕치(德治)를 바탕으로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폐하고 천자(天子)의 자리에 올랐던 일을 인용하여 인조의 덕을 칭송한 것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7장에 '큰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에 적합한 자리를 얻는다.[大德必得其位]'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대학장구(中庸章句)』 경(經) 1장에 '옛날에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려고 한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다스렸고, 그 나라를 다스리려고 한 사람은 먼저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였다.[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欲治其國者先齊其家]'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육례(六禮)는 임금이 가례를 올릴 때 차례대로 거행하던 여섯 가지의 예식으로, 납채(納采), 납폐(納幣), 고기(告期), 책비(冊妃), 친영(親迎), 동뢰연(同牢宴)을 가리킨다. 납채는 임금이 왕비가 될 집에 신하를 보내 청혼하는 의식, 납폐는 임금이 왕비가 될 집에 신하를 보내 폐백(幣帛) 선물을 바치는 의식, 고기는 임금이 왕비가 될 집에 신하를 보내 가례의 길일을 통지하는 의식, 책비는 간택된 처자를 왕비로 책봉하는 의식, 친영은 왕비가 머무르고 있는 별궁(別宮)에 임금이 직접 나아가서 맞아오는 의식, 동뢰연은 임금과 왕비가 술잔을 나누어 마시던 의식이다. 『國朝五禮儀』 「嘉禮」 〈納妃儀〉. 관저(關雎)는 『시경』 「국풍(國風)」 〈주남(周南)〉의 맨 처음에 나오는 시의 제목으로, 주나라 문왕의 후비(后妃)인 태사(太姒)의 덕을 노래한 시이다. 인지(麟趾)는 『시경』 「국풍」 〈주남〉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시의 제목인 인지지(麟之趾)의 약칭으로, 문왕과 태사의 두터운 덕으로 인해 자손이 번창함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강한(江漢)은 『시경』 「대아(大雅)」 〈탕지십(蕩之什)〉에 나오는 시의 제목으로, 주나라 선왕(宣王)이 소목공(召穆公)에게 명하여 회이(淮夷)의 반란을 평정하게 한 일을 칭송한 시이다. 여분(汝墳)은 『시경』 「국풍」 〈주남〉에 나오는 시의 제목으로, 문왕의 교화를 입은 여수(汝水) 부근에 사는 여인이 정벌하러 나갔던 남편이 돌아오자 그동안의 그리움을 노래한 시이다. 이남(二南)은 『시경』 「국풍」의 편인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가리킨다. 〈주남〉은 주나라의 수도와 남방 지역에서 채취한 시를 모은 편이고, 〈소남(召南)〉은 소공(召公)의 채읍(采邑)인 소(召)와 남방 지역에서 채취한 시를 모은 것으로, 둘 다 문왕의 교화가 가장 잘 펼쳐진 지역에서 채취한 시들이다. 저본에는 원문 '德憲' 2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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